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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의 사회사
제 1 장 서론
(1)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1. 근대 한국 사회는 혈연과 지연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가치관이 빠른 속도로 붕괴되었다. 그러나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이 아직 형성되지 못했다. 이러한 와중에 후기 산업 사회의 부정적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회적 무책임성, 패쇄성으로 대별되는 극단적 개인주의로 말미암아 사회를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박영신은 다음과 같이 우리시대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지난날 지역을 중심으로 구성원들이 사회 경제 관계의 축으로 서로 연결되고 비록 불충분하더라도 도덕의 망으로 얽혀 있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도덕의 망이 느슨해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가 경제 수단과 기능의 망으로 얽혀지게 되었다.”1)
서구 사회는 시민 계급의 등장하면서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와 함께 시민 계급의 인권이 급격히 상승하였다. 다른 한편 종래의 귀족과 승려 계급이 누리든 권력과 부가 시민 계급(보다 정확히 말하면 부루조아지 계층)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시민 운동과 노동 운동의 결과 민주화 운동은 종래의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보다 광범위하게 확산되었고, 이와 동시에 하층민도 권력과 부에 몫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화와 삶의 질을 권력과 부에 참여하는 것과 동일시 하게되었다. 또한 공동체 정신과 연대 의식은 계급의 이익이 작용하는 영역 내에서만 작용함으로 자연히 공동체 정신과 연대 의식의 축소를 가져왔다. 포스트모드니즘의 운동에서는 인간화와 삶의 질을 다양성 또는 탈확일성으로 이해되며, 내용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문화의 소비로 나타난다. 따라서 공동체 정신과 연대 의식은 개인의 기호의 범주 내에 머물 위험을 안게되었다.
정보화 사회에 접어드면서 세계가 전자적으로 결집된 가상 공동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유권자가 인터넷을 통해 직접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전자민주주의’에 대한 확신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가상 공간에 표현된 의견들은 가변적이며, 다양한 개성을 지녔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에 따른 규범 없이는 전자민주주의는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으나, 초국가적 기업의 상업적 통제나 기술 엘리트들의 배타적 우위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전자민주주의 미래가 밝은 것만은 아니다.2)
이러한 부정적 현상을 극복하고 사회적 연대의식을 고취시키고 공동체 정신을 함양시키는 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매우 중요한 과제라 생각된다.
확대되어가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주장 속에서도 사회의 통합의 과제는 결코 간가될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이다. 환경 운동, 페미니즘, 등의 중요한 주제와 과제는 공동체 정신과 연대 의식 없이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
2. 연구의 목적은 공동체 정신 및 사회적 연대의 역사적 경험을 소개하는 데 있다. 역사는 우리들에게 항상 두 측면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으로 살아있는 공동체 정신과 뛰어난 사회적 연대 의식을 발휘했든 시대나 사회적 집단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 공동체 정신과 사회적 연대 의식이 파괴된 시대와 사회적 집단이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역사의 양 측면을 모두 고려하고자 한다. 또한 본 연구자의 전공 영역과 관련하여 역사적 경험의 범위를 이스라엘 역사에 국한하고자 한다.
3. 최근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의 연구는 매우 활발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산업 사회이 부정적 요소들, 예를 들어 획일성, 물화로 인한 비인간화, 등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성과 창의성의 강조로 나타난다. 산업 사회로 말미암아 공동체 정신의 약화와 사회적 연대의 외해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에서 인간화와 삶의 질의 향상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정신과 사회적 연대 의식은 사회적 통합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심각하게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심각히 고려치 않는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에서 주창하는 인간화와 삶의 질의 향상은 피상적인 목표에 도달할 뿐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연구는 객관적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목표하에 이제까지 역사 비평적 연구를 수행했다. 객관적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목표에도 불구하고 실제 도달된 연구의 결과는 각 연구자들의 시대정신의 확인에 불과했다. 연구자의 문제의 제기는 항상 그의 현재의 삶의 자리에서 질문의 방향이 결정되어진다. 따라서 연구되어진 답변 역시 현재의 문제의 극복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19세기 말엽 민족 혹은 민족주의에 대한 주제하에 집단주의 혹은 전체주의 이념이 주창된 되었다. 그 이후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혹은 피착취자와 착취자의 연대를 주장하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한국에서도 민중신학이라는 이름 하에 이러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제기되는 개인주의의 극복을 목표로하는 공동체 정신과 사회적 연대 의식은 아직까지 제기된 바 없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문제의 제기는 바람직하다.3)
(2) 연구 방법론과 연구 내용
1. 이스라엘의 역사는 방법론에 따라 뚜렷이 다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독일을 중심으로 문헌 사적 연구를 전개했으며, 영미 계통을 중심으로 고고학적 연구를 전개했으며, 최근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학적 혹은 사회 인류학적인 연구를 수행했다.4)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왕권의 형성 이전 시대에는 사료로 이용할 수 있는 문헌이 풍부하지 못함으로 사회 인류학적인 연구는 이 시대를 밝혀주는 좋은 방법론이 될 수 있으며, 왕조 시대와 그 이후의 역사는 문헌사적 연구를 토대로 다른 방법론을 보충적으로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본 연구는 공동체 정신과 연대의식의 역사적 경험을 소개하며, 이를 통해 공동체 정신과 연대의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또 구체적 적용 방안을 위해 필요한 기초적 자료를 제공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그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 전 역에 걸쳐 범례적 경험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 범례적 경험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4장에 걸쳐 소개한다.
연구의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의 시대를 따라 소개된다. 제 2 장에서는 국가형성 이전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의 특성에 나타난 연대의식과 공동체 정신을 소개한다. 제 3 장에서는 왕조시대, 특히 다윗-솔로몬 시대의 시대적 변화와 이에 따른 사회통합의 과제를 소개하고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타난 사회 통합의 조치를 살펴본다. 제 4 장에서는 신명기 개혁운동에 나타난 민족적 연대의식과 공동체 정신을 살펴본다. 끝으로 제 5 장에서는 포로기와 포로후기 초기의 평화운동과 여기에 나타난 국제적 연대의식과 공동체 정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 2 장 국가 이전 시대의 이스라엘 사회의 연대의식과 공동체 정신
I. 유목사회의 연대의식과 공동체 정신
사람들은 흔히 유목사회를 가부장적 사회라 한다. 이 표현과 더불어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여기에서 부드러운 가족적 관습이란 느껴볼 수 없다. 가장의 따뜻한 배려 역시 느껴 볼 수 없다. 이들 공동체에서 무엇인가 되어지기 위해서는 오늘날처럼 조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용기를 내야하는 일이나 희생이 강요되거나 남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일이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보다 더 많다. 광야의 상황이 매우 단순하고, 전체를 조망할 수 있을 정도로 소규모적이며, 관심사 역시 천편일률적일지라도 도처에 장애가 놓여 있으며, 막혀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발전된 문화에로 나아올 수 없을 것이다. 광야라는 생활 조건에 제약됨으로 발전된 문화의 전개는 매우 어렵다. 개인의 자유조차도, 우리가 이해하는 한에 있어서, 국가적 강제력의 부재로 인하여 허용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5)
(1) 유목 사회의 사회적 특징
광야는 아랍인들의 생활의 조건을 결정지워 준다. 아랍인들은 광야라는 생활 조건으로 말미암아 많은 관점에 있어서 원시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 유목민들은 천막 생활을 하며, 계절에 따라 가축 떼의 목초지를 찾아 문명지를 찾아 유랑하였다. 이들은 믿을만한 길을 따라 새로운 목초지나 물이 있는 곳을 찾아 유랑한다. 그러나 거친 들늑대와 같이 광야를 휘몰아 다닌다거나, 일시적 목적을 위해 임의적으로 결합하고 또 대립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유목민들은 무엇보다도 정착된 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정한 거주 지역에 묶여있지 않다. 유목 사회는 지역적으로 상호 연계성이 없다. 그 결과 지역적으로 행정 조직화되어 있지 않다. 즉, 지방, 도시, 부락의 형식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들 나름의 결합, 조직, 통합, 분리의 내적 원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혈연, 인적관계이다. 가문의 구성원들은 인척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조부모, 부모, 자녀, 삼촌, 숙모⋯). 그러나 가문과 가문 사이에는 인척 관계로 상호 연결되어 있지 않다.
사회적 단위로서 가장 작은 집단은 가정 (bet ’ab)이며, 그 위에 가문 (가족 연합 mišpahã), 지파 (šebät/matā), 민족 (`am)이 있다. 유목민들의 인척관계의 사회적 단위는 군대 조직과 일치한다.
bet ’ab는 한 집에서 함께 사는 가정을 의미한다. 이들은 천막을 인접하게 치며, 공동의 거처에 거주한다. 창 12-50장에서는 사회적 단위로서는 다만 “가정”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창 12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고 말한다. 이 때의 아버지 집은 가정보다는 큰 집단, 즉 가문 (mišpahã)을 의미할 수 있다.
mišpahã는 가족들의 연합 (가문)이다. mišpahã를 씨족 (Sippe)으로 번역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가문의 크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레 18에 따르면 4세대를 포함하며, 창 14, 14에서는 아브라함은 318명의 남자를 이끌었으며, 창 33, 1에서는 400명의 남자를 이끌었으며, 삿 7에서는 300명을 전제한다. 따라서 가문은 1000명 이상의 구성원을 이루고 있다. 유목집단의 경우 함께 유랑할 수 있는 숫자는 많아야 100명을 넘지 않는다.
šebät/matā는 몇 개의 가문이 모인 지파이다. 그리고 지역적 요소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개념을 유목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정착생활의 상황을 역으로 전이시킨 것이다. 지파는 정치적 의무의 근원이며 경계이다. 아랍인들의 경우 공동의 언어를 사용하고 생활 양식의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결코 민족은 아니다.
유목 사회에 있어서 자손들이 각기 독립하여, 독립된 가정 - 가문을 형성하므로 새로운 개체들을 형성한다. 개체화 과정을 사회사적으로 설명할 경우, 각 개체들이 동시에 사회적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룹들이 분화되어 간다. 이와 같은 사회 조직을 개체적 선조직(Segmentary Lineage System)이라 한다. 각 그룹들의 통일체는 독립된 정치적 기구를 통해 이루는 것이 아니라, 계보론적 연결 체계에 속함으로써 이룩한다.
가문들 사이에 혈연 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이들이 공동의 선조로부터 유래되었다는 ( 허구적 ) 계보론에 근거하여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계보론은 상호 다른 가문들 사이의 혈연 관계를 성립시켜 준다. 계보론은 수직적 (시간상), 수평적 (공간적)으로 연장해 간다. 수평적 차원에서는 혈연 관계의 개체화를 나타내며, 수직적 차원에서는 계보의 연속성을 나타낸다. 계보론의 기능은 사회적 관계를 성립시켜 주는 조직의 기능을 한다.
가정이나 가문의 장은 'ab (באָ)이다. 이는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이다. 가정이나 가문은 가부장적 권위체계를 갖는다. 장자가 장자권에 따라 가부장적 위치를 계승한다. 가부장의 지위는 계급적 체계 (hierarchisch)를 가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자들 사이에는 동등하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소유와 노동에 있어서 동등하다. 개체화된 사회는 각 개체들이 평등하다. 즉, 상하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집단 내부의 권력 체계는 병렬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족장사에서 보여준 이스라엘의 유목민은 동일한 유형의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호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어떤 기구도 상하 관계 속에 놓이지 않는다. 이들 집단들은 그들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채워가는 구조와 성격에 있어서 동일하며, 구조와 기능상으로 동등하다.
지파를 결속시키기 위하여 형제애와 이웃의 사랑이 작용한다. 혈연이 최고의 가장 강력한 원리이며, 이웃의 사랑은 형제애로 넘어 간다. 모든 정치적 군사적 의무는 혈연의 의무나 형제애의 의무로 통한다. 개인이 가족에 대한 관계를 갖듯이, 그는 상위 조직 (가문이나 지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유목 사회에서는 가족의 일과 공동체의 일, 개인적인 일과 공적인 일의 차이가 없다. 원칙적으로 개개인은 동일한 권리와 동일한 의무를 갖는다. 어느 누구도 일방적 권리와 일방적 의무를 갖지 않는다. 모든 것이 상호적이다, 즉 진실과 동료애에 근거한다. 의무와 권리, 지배자와 신하, 귀족과 평민이라는 말은 모두 동일한 말로 표현된다. 관리, 고위직, 형리, 사형 집행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금에 근거한 재산을 갖고 있으며, 공적인 조직 속에서 독자적으로 통치하는 권력이니 통치니 하는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일은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동일하게 나누어 수행한다. 요즈음 관청에서 수행하는 국가의 권리와 의무를 고대 유목민들 (아랍인)은 각 개개인이 해야 했다. 물론 이것은 외적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웃간의 협동심이나 형제애에 의해 행해졌다.
정치적인 일이 고대 유목민들 (아랍인)에게 있어서는 도덕적인 일이다. 국가적 규범이라는 자리에 형제애로 표현되어지는 공동체 정신이 있다. 다른 사람을 배제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가벼이 악을 행하지 않고, 환자를 방문하며, 장례에 참석하고, 어려운 시절에 가난한 자들과 함께 양식을 나누며,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고 돌보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이따금 겨울에 낙타를 도살하여 이 중 가장 질 좋은 부위를 나누어 먹으며, 어느 누구도 자신이 혼자 먹고자 도살하는 일이 없으며, 모든 도살은 공동체의 축제와 함께 행해졌다. 이것은 형제애를 나타내는 일상적 표현이다. 이를 통하여 공동체는 통상적 상황 속에서 따뜻하게 유지된다. 모든 이에게 가장 중요한 의무는 위기 속에 빠진 형제를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의무는 근본적으로 이차적이다.6)
부정적 특징 또한 없진 않다. 동료애에 근거한 공동체에서 그들의 과제가 만족스럽게 이행되어지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체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내버려두거나 거부하는 경우도 많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외적 강제적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압력 수단은 그들의 나약함이나 빗나간 이기심을 그들의 가족이나 공공의 모임 앞에서 폭로하여 수치심을 줄뿐이다. 각 개인은 전체를 고려하여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약탈을 위하여 전 지파에 전쟁의 불을 당길 수도 있다. 이방인을 자신이나 가족의 천막 속에 받아들임으로 공동체 전체에 부담을 지울 수 있다. 더욱이 범죄로 인해 쫓기는 자를 보호할 경우 큰 부담이 된다.
(2) 유목 사회의 정치적 특징
개체 사회에서도 지도적인 인물들이 있다. 이들이 가진 개인적인 성품이나 능력으로 인해 이들에게 자유롭게 주어진 사회적 인정이다. 이 인정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선거나 인위적인 조작을 통해 이루어 진 것이나 공공의 의사에 의해 임명된 것이 아니다. 대개 지파의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어떤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의무만을 진다. 귀족들은 형제애의 이행 속에서 다른 모든 이에게 헌신해야 한다. 이들은 그들의 어깨에 다른 사람들이 져야 할 것을 져야 한다. 공동체내의 다수의 사람들에게 있는 물질적 부족을 자신의 물질을 베풀어 균등하게 한다. 이들은 결코 흥청거려서는 인되며, 전쟁이 났을 때 그들의 피를 아껴서는 안되며, 평화시에 그들의 선행을 아껴서는 안된다. 이들은 손님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며, 고아와 고부를 돌보아야 하며, 주린자를 대접해야 하며, 빚진 자의 빚 갚는 일을 도와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그의 의무는 지파의 화합을 유지해야 하며, 개인의 이기주의나 개별 가문의 분파주의로 인해 위협해 오는 균열을 예방해야 한다. 그는 천품의 중재자이며 평화 창시자이다. 그는 담판을 벌리기도 하며, 도덕적 압력을 넣기도 한다. 그는 높은 권위를 가졌으나, 최고의 공권력을 갖지는 않았다.
유목 사회의 정치 조직 형태는 중앙 정부가 없으며, 의사 결정에 있어서 관련된 자들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유목민들의 가문 (가족 연합)은 자율적 공동체이다. 각 집단은 자기 결정권을 가지며, 다른 정치적 집단에 예속되지 않는다. 유목 시대의 가뭄은 통상 개별 집단이나 소규모의 연합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때로는 목초지와 우물에 대한 주장으로 인하여 가문 내부에서도 갈등이 야기되기도 한다 (창 13, 1-14). 유목민들이 계급적으로 조직된 공동체나 정치적으로 잘 조직된 도시 국가에서 유목하거나 이동할 때, 일시적으로 유목민들이 정착민들에게 예속되기도 한다. 이러한 일은 결코 자율성의 원리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가문은 아버지의 지도하에 놓이며, 그의 영향력은 자신의 가문에 국한된다. 아버지는 공동체의 소유를 지키고, 공동체 생활의 규범을 지켜 나간다. 의사 결정권은 가부장 (아버지)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그의 결정권은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며, 집단 전체의 번영을 지향한다. 의사 결정은 항상 다른 구성원들의 동의와 결부되어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발적 복종에 그 결정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의사 결정을 위해 의회 (총회) 같은 것은 없으며, 아마도 아버지의 형제들이 함께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가문 내에 사회적 차등은 없다. 차이는 우연한 경우이다. 소유의 차이에 근거하여 상부층, 하부층, 예속이란 없다. 가문의 사회적 구조는 “동질적 homogen” 이다. 차별은 성별, 세대별, 인척과 이방인들 사이에 있다. 남성들이 우선권을 갖는다. 장자가 다른 사람에 비해 우선권을 갖는다. 이러한 서열의 차이가 어떤 정치적 구조를 낳는 것은 아니다.
(3) 유목 사회의 경제적 특징
모든 가족은 생산과 소비의 단위이며, 생산은 사용 가치에 주안점을 둔다. 생산의 주된 목적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생활용품을 독자적으로 조달하는 데 있다. 필요한 경우 (소)가족 밖의 친척들을 도울 수도 있다. 자신의 필요와 친척간의 도움을 위해 물품을 생산하는 것을 생계 경제 (Subsistenzӧkonomie)라 한다.
유목 사회에서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 생산한다. 경제 활동은 일상 생활에 필요한 것은 안전하게 확보하는 데 주안점이 있다. 제한된 범위의 저장도 가능하다. 부는 가축과 귀중한 물건의 형태로 모아진다. 이것은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킬 수는 있으나, 이윤을 남기는 데는 소용이 없다. 유목 사회에서는 과잉 생산이 구조적으로 제한된다.
자신의 가족의 필요한 것을 조달하는 것 외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친척들에 대한 경제적 연대 (ôkonomische Solidaritӓt)의 의무가 성립된다. 이로 인하여 최소한 가문 내에서는 생산의 차이가 자동적으로 소비의 차이를 가져오지 않게 되며, 동시에 가족 내의 상대적 균등 (평등)을 이루게 한다.
유목민들은 겨울의 우기 (11-3월)에는 초원에 머물며, 여름의 건기가 오면 농지가 있는 곳으로 와서 추수하고 난 빈 들판에서 그루터기를 먹게 한다. 유목민들과 농경지의 농민들은 연중 주기를 따라 서로 만나며, 목축들이 그루터기를 먹음으로 생존할 수 있고, 논밭에서는 이들이 눈 똥이 거름이 된다. 이렇게 하여 상호 도움을 준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품을 상호 교환함으로 필요한 것을 조달한다. 유목민과 농민들은 상호 보완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환이 생산 방식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이상에서 언급된 것은 유목 공동체의 상이다. 이들은 지배 없는 공동체이며, 외적 공권력이 없는 공동체이다.
II. 사사시대 사회구조의 분화와 사회통합
사사시대에는 중앙 정부가 없는 개체화된 사회였다. 다양한 기원의 이질적 집단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으로 발전되었다. 그 통합의 원인들을 추적하고자 한다.
한편 다양한 기원의 前이스라엘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면서 가나안 문화와 종교를 접하게 되었고,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열등한 前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기에 완전히 동화되었으나 해체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통합된 원인들을 규명한다.
그리고 사사시대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땅 (토지)를 소유하게 되며, 동시에 사유 제산 제도가 발생하게 된다. 사회가 점차 분화되기 시작한다.
前이스라엘의 유목민들은 천막 생활을 하며, 계절에 따라, 가축 떼의 목초지를 찾아 팔레스타인과 그 국경 지방을 오르내리며 유랑하였다. 때로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까지 여행하였다.
가나안은 잡다한 농업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각의 왕이 있었다. 그 지방 군주의 세력과 통제권은 성벽이 있는 도시들로 이루어졌다. 그 도시들은 지속적으로 물공급이 가능한 산록지대의 셈줄기와 비옥한 충적토로 이루어진 평야 근처에 군집해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인구 집중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동시에 외부 세계와 육로의 연결 필요성에 의해 비교적 평평한 지형을 선호했다. 지배 엘리트들은 소수의 주민들로 구성되었으나, 이들만이 활로 무장하면서 전차를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평야에 사는 주민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이와는 달리 이스라엘인들은 성벽이 없는 읍이나 촌락지대나 구릉지대의 울퉁불퉁한 지형과 관목지대에 모여 있었다. 그 곳은 가나안 왕들의 통제가 그리 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지역은 가파르고 잡목이 많은 산등성이이며, 토양이 얕고, 수자원이 풍부하지 못하여 경제적 여건으로 볼 때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외부로부터 몰려온 유목민들은 바로 이러한 지역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이 차지한 땅은 잘 균형잡힌 하나의 영토를 이루지 못했다. 팔레스타인의 산악지대는 상당 부분 이스라엘의 수중에 있었지만, 해안지대와 이즈르엘 평야는 이스라엘 지배권밖에 있었다. 기기에 정착해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인들과 뒤섞이거나 (삿 1, 31f.), 그들에게 예속되었다 (창 49, 14f.). 그리고 예루살렘의 경우 가나안인들의 거류지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릴리의 지파들은 이즈르엘 평원의 가나안인의 영유지로 인해 에브라임과 갈라져 있었고, 동쪽 지파들과 서쪽 지파들 사이에 깊은 계곡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리고 중앙 고원지대는 크고 작은 계곡들 때문에 교통이 막혀 있어, 각자의 고유한 관습, 전통, 방언을 지닌 작은 산촌들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회는 개체화된 사회 (segmentäre Gesellschaften)를 이루고 있었다.
가나안 땅에 이주해 들어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의 원주민들과 일정 기간 함께 살았다. 따라서 가나안 땅에서는 두 그룹간에 문화적 종교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제까지 양 집단의 관계에 대하여 학자들은 다양한 견해를 피력했다.7) 가장 균형있는 견해는 존 브라이트의 입장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시대를 적응과 조정의 시대라 부른다.8)
먼저 농업 기술의 적응이다.9) 좁은 생활 공간에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더 넓은 생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고원지대에 위치한 삼림 지역을 개간하여 많은 경작지를 확보하였다. 수조를 설치하는 데 구운 석회 플라스터가 일반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산등성이에도 사람들이 조밀하게 정착해 살 수 있게 되었고, 전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던 곳에 수 많은 성읍들이 건설되었다. 산간지역을 개간하여 계단식 경작지를 확보하여 농작물이나 포도나무를 심었다.
적응은 좀더 깊은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사례적인 법률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가나안 원주민의 법률을 대량 차용하였다. 또한 가나안 사람들이 이미 지켜오던 종교적 관습과 이미지를 자기 것으로 흡수하였다. 농경과 관련된 풍요제의도 갈등 없이 수용하게 되었다.10)
그러나 200년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국가로 발전하였고, 가나안의 도시국가 역시 정복당하여 거대한 제국 속에 편입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적응되고 흡수되는 측면이 있었지만, 이러한 변화에는 대립과 갈등의 요소도 있었음을 전제한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점은 어떻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민족 국가로 통합해 갔으며, 가나안적 요소를 극복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시대에 사회 내의 각 개별 요소들을 통합시켜 주는 기능을 하는 요소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1. 가나안 땅의 정착 과정에서 보여준 군사적 연합
전 이스라엘 유목 집단은 점진적으로 가나안 땅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각 가문은 성장했고, 가문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지역의 확대를 가져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정착하지 않은 지역이나 드물게 정착한 지역으로 이스라엘인들이 확산되었다. 강력한 중앙 정부적 기구가 없는 전 이스라엘의 집단이 경제적, 문화적, 군사-기술적으로 우위에 있는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을 어떻게 능가할 수 있었겠는가?
성서 보도에서는 정착단계에서의 수 차례의 갈등을 보도한다. 창 34장에서 세겜을 가나안의 도시 국가로 이해하며, 이와 상응하여 시므온과 레위를 의인화된 집단으로 이해할 경우, 창 34장 배후에는 가나안의 도시 국가 세겜을 덮치(정복)기 위해 두 개의 전 이스라엘 개체들이 연합했다. 이 연합은 “형제”라는 것을 통해 가능했다. 상호 독립된 개체들 (집단들)이 계보론적으로 상호결합되어 있으며 밀접한 인척관계 속에 있을 때 이방인 집단에 대해 상호 연합할 수 있다. 이 연합은 시간상으로 제한되어 있다. 사사기 1, 1-9, 16-19에서는 시므온이 남쪽 네게브까지 내려가 체류함을 보여 준다. 이제는 시므온이 유다와 연합하여 가나안에 대항하여 싸운다.
전 이스라엘 집단이 연합을 했음에도 군사-기술적 관점에서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은 우위에 있었다. 군사적 대결에서 이스라엘의 연합체가 승리한 것은 아마도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이 내부적으로 저항에 부딪쳐 허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소유자와 무소유자,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의 갈등이다. 이러한 대립은 가나안 도시 국가들의 정치적 활동 능력을 마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멘덴할 - 고트발트 (Mendenhall - Gottwald)의 농민 혁명가설은 역사적 배경을 밝혀 주는 좋은 시각이다.
군네벡 ( Gunneweg )은 정착민, 유목민 외에 제 3 의 집단인 하비루의 존재를 상정한다. 하비루들은 가나안 도시 국가의 통제밖에 있는 하층민 집단이다. 가나안 봉건 제도의 구조는 소시민들을 하비루의 생존 방식으로 전환케 했다. 이스라엘의 연합체들은 가나안의 도시 국가에서 뿌리가 뽑힌 하비루 집단과 연대하여 가나안의 도시 국가를 궁극적으로 능가하였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2. 가나안적 요소와 非가나안적 요소와의 대립 구조에서 非가나안적 요소에 속하는 공동 운명 (혹은 처지)의 요소이다.
이미 유목시대에서부터 농경지의 농민들과 유목민들 사이에는 강한 적대감이 있었다. 유목민들과 농경지의 농민들은 연중 주기를 따라 서로 만나며, 경우에 따라서는 상호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들의 관계는 상호대립적 관계이다. 농경지에 사는 농민들에게는 초원에서의 유목민들이 “야만인”, “천막거주민” “도둑”으로 이해되었다. 정착민들에게는 유목민들이 그들의 땅이나 재산을 탐내거나 노리는 자로 이해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시의 영향권 안 - 도시에 의존된 지역이나, 도시와 도시 사이 빈공간 -에 있는 지역이나 평야에 비해 현저히 낙후된 산간 개간 지역에 거주하였다. 팔레스타인은 도시적 중심부와 농촌지역이 함께 얽혀 있다. 양자 사이에는 교류와 동화의 문제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 첫째, 가나안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그 땅에 있어왔기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지역에 자리 잡고 도시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건축술 (축성 기술도 포함), 수로 시스템, 도자기 기술, 무기, 조각품 등, 높은 수준의 가나안 문화를 이루었다.
이와는 달리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난한 하층민들이었다. 이들은 도시의 건축술이나 높은 수준의 예술이 없는 유목민들이며, 정착 이후에는 가난한 소농민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도시에서 뿌리뽑힌 국외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둘째, 가나안 사람들은 비옥하고, 물이 풍부하며, 경작하기 쉬운 지역을 소유하고 있는 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건조하며, 돌이 있고, 산지의 땅으로 많은 수고를 들여야 경작이 가능한 땅을 소유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또한 가나안 사람들은 교통이 편리한 지역, 즉 도로망에 인접한 지역에 위치하여 군사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유용한 도로망을 통제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이스라엘은 내력 깊숙한 곳에 위치하였다. 경제적, 문화적 삶의 풍요가 모두 도시에 집중되었다.
셋째, 당시 도시국가들의 사회 경제적 상황은 사회구조를 계급적으로 분화시켰다. 가나안의 도시국가는 상부에 왕가와 귀족 가문이 있고 그 아래 두 개의 시민 계층이 있고 바닥에는 부자유인들과 노예들이 있다. 이와는 달리 이스라엘 사람들의 빈약한 경제 구조는 다소 동질적 사회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각 가문이나 지파는 정치적으로 독립성 (Autonomie)을 유지했다.
이러한 이원적 사회 시스템은 자연스럽게 적대감으로 나타날 수 있다. 非가나안적이라는 요소만으로도 연대의식, 동질감을 가질 수 있다. 특히 어려운 환경에 놓인 자들은 상호 운명 공동체로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요소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점차 민족적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3. 동일거주 지역에 거주한다는 “공동의 삶의 자리”
前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종례의 인척관계라는 사회 조직 외에도 이웃 관계라는 조직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인척관계의 원리와 영토적 원리가 동시에 작용하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역, 특히 공동의 생활공간에 놓임으로 빈번하게 접촉하게 되고,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 도움을 주거나 청할 수 있게 된다. 개별 가정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과제가 생겼을 경우 상호 협력을 하게도 된다. 지리적 인접성은 동일한 생산 양식을 유지하게 하며, 따라서 동일한 삶의 스타일을 유지하게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동의 삶의 자리는 공동의 문화, 즉 공동체로 발전하게 된다.
유목민들이 정착민으로 전환할 때, 인척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동일한 지역에 자리잡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즉 먼 후손으로 뻗어져 나갔을 때, 이 혈연관계는 점차 옅어지게 된다. 그러나 계보론적으로는 여전히 인척관계에 있으므로 가족이나 가문보다 큰 사회적 단위 (지파)를 형성 하게된다. 이 때 인척관계의 원리와 영토적 원리가 동시에 작용한다.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인척 집단으로 묘사된다. 全 민족이 한 사람의 시조, 야곱의 자손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지파는 정착 이후의 산물로 보고 있다 (M. Noth). 그러나 어떤 이는 지파의 조직 형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초기의 산물로 보고자 했다. 이것을 이미 유목시대의 특징으로 보고자 했다. 이러한 설명은 왕권의 태동을 이미 있는 제도의 확대로 설명할 수 있는 잇점이 있다 (Alt).
구약성서에 나타난 이스라엘 지파들은 독립된 사회적 단위들이며, 개별 지파들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11) 그럼에도 개별 집단들이 특정 지역과 결부됨으로써 이스라엘의 히브리인들에게는 “새로운 집단적 자기 참모습 (Identität)”을 형성하게 되었다 : 지역적 (영토적) 지파. 지역의 원리는 다양한 집단이 지파로 함께 성장해 가는 전제를 형성한다. 지파는 다양한 가문들이 결합한 이해관계의 공동체이다. 지파는 공동의 운명의 결과로 또 정치적 군사적 행동의 목적을 위해 형성되었다.
4. 전쟁시 이웃 가문이나 지파가 혈연적 의무감에서 도움을 주는 행위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 지파들은 때때로 경계에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해야 했다. 이웃나라들의 관심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해야만 했다. 언제나 이웃나라들은 불시의 침입과 집단적인 규모의 위협을 가해왔다. 이러한 상황이 지파들에게 운명 공동체의 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전쟁으로 인해 위협을 받을 경우 우선 해당 지역에서 먼저 방어를 해야한다. 각 가문은 동시에 군사적 단위였다는 점은 유목시대의 前역사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가문은 유랑의 집단으로 외부의 적의 공격을 방어해야 한다. 이러한 성격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도 계속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접한 지파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사사기의 보도 (한 시대에 한 전쟁이 차례차례 발생하며, 모든 전쟁은 전국적 규모로 모든 지파가 해당된다)와는 달리 한 시대에 여러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기도 하고, 그 규모는 대부분 지역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전국적일 수도 있었다. 삿 5장에서는 10지파가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보도된다. 이 때의 군사들을 야웨의 백성 (암 야웨 “הוהי םꘞ”)이라 불렀다.
사사시대 全기간동안에 이스라엘이 수행한 전쟁은 주로 방어전쟁이었다. 사사기 5장의 드보라의 노래에서는 거의 무장되지 못한 이스라엘의 농민들이 잘 무장된 가나안 군대와 싸워 이긴 승리를 노래하였다. 사울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군대는 여전히 징집 부대에 근거하고 있었다.12) 전쟁 발생시 각 가문에서 소집되어 군사적 의무를 이행했고, 평화시에는 다시금 각 가정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했다.
이러한 도움의 요청은 혈연적 의무감에 근거하기 때문에 강제력을 동원할 수 없다. 도움의 호소에 응하지 않았을 경우 도덕적 비난을 제외한 처벌 수단도 없다.
전쟁이라는 공동의 운명과 공동의 방어의 경험은 공동체 정신과 연대의식을 높여 주었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 각 가정들을 지파로, 더 나아가 민족으로 발전하게 했다.
5. 산악 지역에 살 경우 보다 많은 농경지를 얻기 위해 공동의 개간 사업에 참여한다.13)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시의 언저리나 산악지대에 자리잡았다. 따라서 생계를 유지 할만한 토지는 인구의 증가와 함께 쉽게 고갈되었다. 필요한 토지를 얻기 위해 개간을 해야 했다. 개간된 언덕 지역의 땅은 넓은 평야가 아니라,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좁은 땅이었다. 여기에 밭작물을 심는 경작지나 과실수나 포도를 심는 과수원으로 가꾸어 나갔다. 개간 사업은 개인이 수행했다기보다는 가문이나 가문의 연합이 공동으로 수행했다. 따라서 토지 소유 역시 공동소유였다. 경작지의 경우 가문의 공동 소유였지만 포도원의 경우 곧장 개인 소유로 발전되었다. 왜냐하면 집중적 관리와 기술적인 재배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동의 개간 사업은 참여한 사람들에게 공동체 정신과 연대의식을 갖게 하며, 이스라엘 사회를 통합시켜 나간다.
이러한 통합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사회는 경제적 분화와 함께 사회적 분화도 발전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왕권이라는 제도로 도약된다.
III. 이스라엘의 왕조 이전 시대의 종교와 사회
이 글의 중요 목적은 이스라엘의 국가 이전 시대, 특히 유목 시대의 종교적 특징을 밝히는 데 있다. 한 시대의 공동체의 신앙 고백과 신학은 시대 정신과 항상 깊은 관련이 있다. 따라서 필자는 사회 구조가 종교에 미친 영향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1). 유목민들의 종교적 특징은 가나안의 종교적 특징과의 비교를 통해 보다 선명하게 밝히 수 있다 (§2, §3). 왜냐하면 가나안 종교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라 종교 형태도 변화되었으며, 그 의미도 변화되었고, 가나안 종교의 변화는 족장 시대의 유목 종교와 강한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족장 시대의 유목 종교에 대한 이제까지의 선행 연구들은 주로 종교 형태를 밝히는 데 주력했으나, 종교 형태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를 밝히는 데에는 나가지 못했다. 따라서 족장 시대의 종교 형태의 신학적 의미를 밝히고 한다 (§4).
(1) 사회 구조가 종교에 미친 영향
이스라엘은 역사가 흘러가면서 사회 구조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땅에 정착하면서 前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점차 민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정착과 농경 생활로 접어들면서 사회조직은 물론 종교와 문화에까지 광범위한 변화가 일어났다. 문화적 -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기존의 가나안 사람들에게 삶의 양식 ( 예를 들어 농경 기술 )을 배우게 되며, 종교적 전통들 (특히 예배 의식)도 받아들이게 된다. 지속적인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 속에서 왕권 제도가 형성되었고, 국가라는 조직으로 광범위한 사회 구조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정치 - 사회적 요구는 종교적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이 한 국가 속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 결과적으로 국가의 지원 속에서 종교적 전통의 혼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이스라엘 사회가 도시문화로 넘어 가며, 자연물교환 혹은 물물교환 경제에서 화폐 경제로 넘어 감으로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와 함께 새로운 종교적 반응을 가져오게 했다. 사회적 상황과 사회 구조의 힘이 종교에 영향을 미쳤다. 만신전은 인간 사회와 같이 복잡하게 조직화되었다. 여러 신들은 자연과 문화와 역사의 영역에서 삶을 규정짓는 요소들을 대변한다. 종교적 이해관계들은 경제적으로 본질적인 요소들을 나타내준다는 점에서 경제체제와 종교체제는 상호 일치한다. 물론 종교적인 사상과 상황도 초기에서부터 사회 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종교는 사회에 포괄적이며 통합적 의미를 주는 요소이다.
(2) 중청동기 시대 (기원전 약 2150-1550)의 가나안의 종교
반유목민들의 예배처소는 대부분 성전을 갖지 못한 단순한 성소, 즉 야외성소(offene Kultstätte)이다. 년 중 주기를 따라 이동하는 무리들은 석주 (혹은 제단)가 세워진 자리에 정기적으로 제물을 드렸다. 중청동기 II기 (기원전 1950-1550)의 고고학적 발굴물에서 많은 신상들이 나왔으며, 대부분 여신상이다. 성전이 없는 성소에 세워진 신상들은 대부분 여신상이다. 여신상들은 금속이나 돌로 만들어 졌으며, 주로 여성을 상징하는 심벌과 함께 나체의 여신상이다. 때로는 헬멧과 같은 머리의 뿔모양의 장신구를 두르고 팔은 아래로 내리거나 가슴을 받치는 모양을 하고 있다. 여신상에게서 풍요의 측면들이 강하게 강조되었다.
기원전 2000년부터 (정확히 표현하여 중청동기 IIA기 : 기원전 1950-1750) 가나안에는 도시들이 해안선을 따라 생겨났다. 이 때부터 도시화된 건축과 사회가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세겜이나 게젤 등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성곽이 없는 단순한 정착지에서 축성을 하게 되었다. 자연 성소들이 여전히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성전 건축물을 갖춘 성소로 바뀌게 되었다. 초기 청동기 (기원전 3150-2150)에서부터 있어 왔던 성전은 넓은 공간이 있는 성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성전에는 대부분 남신상들이 놓여져 있으며, 남성적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남신상들은 대부분 무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허리에 거들을 두르며, 머리에는 헬멧으로 여겨지는 머리 장신구를 두르고 있다. 이러한 특징과 함께 남신상은 주로 전쟁의 신상을 보여주고 있다.
(3) 후청동기 (기원전 1550-1200)의 가나안의 종교
후청동기에는 정치적으로 시리아 -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의 식민 지배하에 놓였다. 후청동기의 종교적 건축물들은 대부분 중청동기의 전통이 계속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가나안의 종교적 전통에 계속적으로 존중하였다.
후청동기에 나타난 이전 시대와 구별되는 종교적 건축물들의 새로운 양식은 두 가지 점에서 두드러진다. 첫째는 성채성전 (城砦聖殿 Festungs-Tempel)이다. 중청동기 II기 말렵부터 성채성전이 지워졌다. 성전의 윤곽은 그대로 두며, 다만 현관에 세워 둔 두 개의 기둥은 제거되고, 출입구에 두 개의 망루를 세워 두어 출입구가 좁아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성채성전이라 부른다. 후청동기의 성채성전은 군사적 측면이 이전 보다 더 강조되었다.
둘째는 이전에는 성전이 현관과 내부의 넓은 공간으로 이분되었으나, 후청동기 시대에는 내부가 여러 공간으로 나눠졌다 : 즉, 현관과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집트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여진다. 지성소에는 제사장이나 당직 사제만이 출입이 가능한 곳으로서, 이것은 가나안 사회에서 전문 (직업적) 사제 계급이 형성되었음을 말한다.
후청동기에는 聖所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신들의 세계 역시 매우 다양하며 복잡하다. 우가릿에서는 200종 이상의 신들이 예배되었다. 다른 지역의 만신전에서도 비슷한 숫자의 신들이 예배되었다.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국제화의 시대적 특징이 종교적 영역에서는 혼합주의 (Synkretismus)에로 영향을 미쳤다. 가나안에서도 이집트의 영향을 입은 성전을 세웠을 뿐 아니라, 이집트의 신들에게 봉헌된 성전을 지었다. 아시아 지역에서 드려진 이집트의 예배에서는 이집트의 사제가 활동을 하였다.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지역 만신전의 이집트화를 가져왔다. 이집트 사람이 우가릿에서 바알 짜폰을 위해 석주를 봉헌하기도 하며, 가자에서는 이집트 사람들이 가나안의 여신 아낫 (`Anat)를 위한 축제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집트 자체에서도 가나안의 신들이 예배되기도 하며, 그들 자신의 만신전에 편입되기도 한다. 신들이 상호 교환되거나 동일시되기도 하며, 신들의 기능, 칭호, 상징들도 상호 교환되거나 동일시되기도 한다.
신들에 대한 묘사도 매우 다양하게 묘사되어 진다. 보좌에 앉아 있는 남산상과 여신상이 있다. 보좌에 앉은 신상은 이미 중청동기 II기에서부터 석주에 새겨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보좌에 앉은 신상은 왕의 특징을 대변한다. 보좌에 앉은 신상으로부터 풍요의 사상과 결부되고 있다는 점은 어디에도 암시하고 있지 않으며, 전투적 측면은 외양 속에 나타나 있지 않다. 보좌에 앉은 여신상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의미하는 상징은 분명치 않다. 여신상과 보좌에 앉은 왕과의 구분은 쉽지 앉다. 보좌에 앉은 여신상은 통치자의 모습인지 아니면 남자신의 파트너인지 분명치 앉다.
동물 위에 서 있는 신상들도 있다. 동물은 황소와 사자와 말 등이다. 황소 위에 서 있는 신상이 하솔에서 발굴되었다. 신이 황소 위에 서 있으며, 손에는 막대기, 칼 혹은 삼지창으로 무장했다. 가슴에는 사각별, 아마도 태양을 상징하는 마크를 달고 있다. 이러한 신상들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제국과 아카드 제국)의 폭풍신과 동일시된다.
사자 위에 서 있는 나체의 여신상들이 시리아 -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매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사자는 서 있기도 하지만 누워 있는 사자상도 있다. 라기쉬와 벧스안 등에서는 말 위에 서 있는 나체의 여신상이 발견되었다. 오른쪽으로 달리는 말 위에 나체의 여신이 서 있으며, 양손에는 연꽃을 들고 서 있다. 우가릿 텍스트에 나타난 여신 아서라 (’Asera)는 엘 (El) 신의 부인으로, 또 뱀의 여군주 혹은 사자의 여군주로 알려졌다. 말 위에 서 있는 여신은 이집트와 우가릿에서는 아서라가 아니라 아스타르 ( ‘Astarte)로 불려 졌고, 말의 여군주와 전차의 여군주였다. 중청동기 II기에는 여신들이 인간 세계와 동물 세계와 식물세계에 풍요를 지켜 주는 자연신들로, 종종 그들의 성적 부분이 강조되면서 풍요의 직접적인 화신 (Verkörperung)으로 인식된 반면, 후청동기에는 여신과 자연력과의 관계는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여신들이 여전히 옷을 입지 않았음에도 장신구나 왕관은 그들의 지위가 여군주임을 강조한다.
떠받치는 동물 없이 단순히 서 있는 신상들도 있다. 꽃이나 뱀을 들고 서있는 나체의 여신상도 있으나, 후청동기의 새로운 특징은 긴 옷을 입고 있거나 날개를 단 여신상이 있다. 우가릿 텍스트에서는 여신 아낫 (Anat)이 바알의 자매나 사랑하는 이로 날개를 달고 있다.
청년의 전쟁의 신들도 있다. 손에는 막대기, 칼, 도끼, 창 그리고 방패로 무장하고 있다. 무장을 하고 전투적 태도는 폭풍우의 신과 동일시 될 수 있다.
중청동기와 비교해 볼 때, 만신전은 매우 확대되었다. 이와 함께 산상들은 매우 다양해 졌다. 눈에 두드러진 변화는 모든 남신과 여신상들은 옷을 입고 나타난다. 이러한 과정과 나란히 신들의 호칭과 상징들도 늘어났다. 종교적 상징 언어들도 발전되었다. 중청동기 시대의 신들은 대부분 옷을 입지 않았으며, 인간 세계나 동물 세계나 식물세계에 풍요를 지켜 주는 자연신들이었다. 문자 그대로 나체의 신들은 자연 속에서 활동하는 힘의 화신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전쟁의 신들도 있다. 후청동기의 신들의 몸은 배경으로 후퇴되었다. 이들은 더 이상 힘의 화신이 아니라, 힘을 대변하며 동시에 힘을 지배한다. 여신들이 나체의 모습으로 사자나 말 위에 서 있으며, 손에는 식물이나 동물을 들고 자연 가운데에 있는 생명을 지배하는 여군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서고 있는 왕관은 지배자의 신분을 강조한다. 이러한 과정은 긴 옷을 입은 여신이나, 날개를 단 여신으로 계속 발전되었다. 이들은 자연력과의 어떤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칭호나 외형은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며, 만신전에서의 서열을 알게 한다.
(4) 유목민들의 종교 형태
족장들의 하나님은 유랑하는 무리들의 하나님으로 중요 특성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이다. 알트 (A. Alt)는 전통사적 방법론으로 前이스라엘의 유목민들의 종교를 연구하였다. 그는 고대적 표기인 하나님의 이름의 언어학적 연구와 함께 유목민의 종교형태의 전제가 되는 유목민의 생활 방식을 연구하였다.
그에 의해 연구된 족장들의 신들의 종교사적 유형의 특성을 다음과 같다. 족장들의 신들은 특정 장소 (성소/성전)과 관계보다는 인간의 집단이나 개인과의 관계를 중시한다. 이러한 신들은 대개 “고유한 이름이 없는 신들”로 알려져 있다.14) 양식 “하나님 + 고유 명사”에서 고유명사는 계보론의 원조 (ein Stammvater seiner Lineage)를 의미한다.15) 인척 집단을 나타내는 수많은 이름들, 아버지/할아버지 (באָ), 형제 (חאָ), 삼촌 (םꘞ) 등이 종종 신의 표시로도 통한다. 이러한 이름들 속에서 족장들의 신과 그들을 섬기는 인적집단들과의 관계를 인식하게 한다.
신의 속성과 신앙고백은 그 시대의 사회의 조직과 삶의 자리의 반영물이기도 하다. 알트는 족장의 하나님의 제의는 “광야의 유목민들”에게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16)
어떤 사회의 종교형태는 반복적으로 주어진 계시의 산물이 아니라, 그 사회의 조직 양식의 본질적 요소로 통합적 기능을 수행한다. 예배/제의 (Kult)는 공동체 생활의 필요 불가결한 구성 요소이다. 예배는 공동체와 함께 있었으며, 창설되는 것이 아니다.
가나안의 종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 사상이 특정 성소와 결부될 때 그 성소가 놓인 사회의 조직, 그 시대의 세계관과 관계된다. 가나안의 신들은 사회구조의 변화와 같이 전투적인 신으로 군주의 신으로 발전되었다. 가나안 성소의 하나님은 가나안의 계급적 사회의 가치 체계를 옹호해 주는 신으로 이해된다.
그와 달리 족장시대의 유목민의 사회는 계보론적으로 얽혀져 있는 혈연 공동체이다. 계보론 속에 나타난 혈연관계는 결코 계급적 체계를 가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자들 사이에는 동등하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소유와 노동에 있어서 동등하다. 각 개체들은 평등하다. 즉, 상하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탈 계급적 공동체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선조의 하나님은 혈연적 공동체의 산물이며, 탈 계급적 사회의 산물이다.
족장시대의 유목민의 사회는 계보론적으로 얽혀져 있는 혈연 공동체이다. 구조와 기능상으로 동등하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이 구분되지 않는다. 계보론적 구조 속에 형제애와 이웃 사랑을 담고 있는 공동체이다. 前이스라엘 사람들이 선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배하는 곳에서는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를 한 가족처럼 대할 것을 다짐하는 형제애를 보존한다.
前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내 아버지의 하나님, 즉
선조의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한 공동체로 체험하게 되었으며, 공동체 정신과 연대의식을 다짐하는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5) 유목민들의 전통과 문화적 관습
초원이나 광야의 생활 환경에서 前이스라엘의 사람들이나 아랍의 베루인들에게서는 이방인들에게 “손님들에 대한 우호적 태도” (Gastfreundschaft)를 보여 주었다. 이 점은 손님들에 대하여 보호의 의무 (보호처의 제공의 의무)를 포함한다. 초기 문헌들 속에는 증거 문헌이 보존되어 있지 않으나, 후기의 문헌들 가운데 이러한 전통이 계속 보존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와 동일한 유목적 전통은 피의 복수 (Blutrache)를 들 수 있다. “피의 복수”제도는 국가가 처벌할 권한을 갖게 된 후에는 소멸되었다. 이 제도는 보복이나 처벌의 수단을 가진 도시국가보다는, 처벌의 수단을 갖지 못한 가족적 조직 사회에서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6)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의 종교
정착 이후 이스라엘 사회는 독자적인 성소를 갖지 못하고 각 지역에 속해 있는 이전의 가나안 성소에서 그들의 제사를 드렸다.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들어온 자들은 그 땅에서 이미 수세기 전부터 이집트와 바벨론의 영향을 받아 온 고도의 종교 체계를 접하게 된다. 농경 사회의 필요와 상응하며, 정착민들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매력점을 제공했다. 따라서 이전의 유목민들은 수많은 가나안의 지역 성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동시에 그 곳 주민들의 제의 의식도 적응해 들어갔다. 족장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종종 가나안 지역 성소와 결부된 제의적 설화 (die Kultlegender)들로 인해 확대되기도 했다.
이러한 적응과 확대는 많은 위험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유목종교의 본질적 요소인 탈계급성과 형제애, 한 공동체성은 동행 사상 (하나님의 함께 하심) 이면으로 사라졌다.17) 신의 가호는 체제의 유지로 오인될 소지를 남겼다.
제 3 장 왕조시대의 변화와 사회 통합
I. 예비적 설명
이스라엘 사회는 기원전 12-11세기에 사사 시대에서 영토를 가진 왕조국가로 전환하였다. 이 전환은 이스라엘의 사회사와 종교사에 커다란 획을 긋고 있다. 이전 시대에는 지파들이 땅을 획득하는 일이 중요한 시대적 사건이라면, 이 때에는 왕조국가의 형성과 이로 인한 사회의 변화의 시대이다. 약 200여 년간 국가적 체제를 갖춘 주변국가로부터의 억압과 싸워 해방을 쟁취코자했던 지파적 사회가 중앙정부를 가진 국가를 형성시킴으로써 적지 않은 문제점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은 부지불식간에 이스라엘의 종교사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왕권의 보호 하에 놓인 국가의 공식 종교의 영역에서 큰 발전을 가져왔다.18)
이러한 시대적 특징과 함께 당시는 종래의 지파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국제적 개방적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특히 이집트로부터 지혜문학이 들어와 꽃을 피게되었으며, 음악과 시 등의 예술적 활동도 성행하였다. 한편으로 자유와 개방이라는 시대정신이 꽃을 피우게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다양성 속의 통일성과 사회적 책임성이 강조되게 되었다.
II. 정치적 변화
(1) 사울 왕권
사울은 남부 베냐민 지역에 있는 촌락인 셀라 (셀사)의 부유한 가문의 출신이다 (삼상 9, 1-2). 사울은 불레셋 사람들이 중부 구릉지대를 지배하고 있던 때에 등장하여 기브아-믹마스 근방에 있던 불레셋 수비대를 공격하고 불레셋 사람을 쫓아내고 소규모의 상비군을 거느리고 기브아-믹마스에 자리를 잡았다 (삼상 13, 2 - 14, 46).
그 후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암몬의 공격을 받아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사울은 군사를 모아 요단을 건너 암몬을 쳐서 두 번째 승리를 거두었다 (삼상 11). 길르앗 야베스에서의 승리 후에 그의 영향권은 에프라임 / 이스라엘 지파들의 영토를 포괄할만큼 확대되었다. 그 후에 사울은 네게브에 있는 아말렉족을 무찌르고 헤브론 남동쪽에 있는 성읍인 갈멜에 승전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이 지역에 대한 사울의 지배권의 표시로 세워졌다 (참조 삼상 15장). 사울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이즈르엘 계곡의 남동쪽 끝, 길보아 산기슭에서 불레셋과의 싸움에서 그의 최후를 맞는다 (삼상 31 장).19)
(2) 다윗 왕권
다윗은 베들레헴 출신의 유다 사람이었다. 다윗은 직업 군인으로 사울의 궁정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20) 다윗은 사울과의 갈등으로 남부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반군을 조직하여 남부 구릉지대 변두리에서 활동했다. 사울에 의한 지속적 추격으로 인해 다윗은 불레셋의 봉신으로 들어가 활동한다.
사울이 길보아 전투에서 패한 후에 다윗은 헤브론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는 헤브론과 그 주변을 점령하고 유다의 왕이 된다. 그는 남부 구릉지대와 세필라, 네게브, 유다 광야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21) 삼하 5장 5절에 따르면,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을 다스렸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면서 남북조 사이의 대립이 가시화되었다. 역사적으로 다윗은 북지파의 왕이 되었다. 그 역사적 과정은 분명치 않으나, 설득이나 강압적 수단으로 북지파를 합병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22)
다윗은 통일왕국의 왕이 된 후에 일차적인 과제는 불레셋의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다. 불레셋의 주력부대는 산악지대로 이동하여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 포진하였다. 불레셋의 목표는 다윗과 북지파와의 연결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레셋 부대는 다윗에 의해 격파당하여, 산악지대에서 완전히 쫓겨나갔다 (삼하 5, 25; 대상 14, 16). 다윗은 방어적 전쟁에만 머무르지 않고, 불레셋의 영토에까지 들어가 전쟁을 벌였다. 중부지방에서는 욥바의 남쪽 지점에까지 이르는 해안평야를 점령하였다.
다윗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자,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이제부터 그는 대제국 건설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리적으로 중앙 위치한 여부족의 도시인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그 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법궤도 예루살렘으로 옮겨왔다. 팔레스타인에 남아있던 가나안족의 다른 도시국가, 갈멜 산 북쪽과 남쪽의 해안평야, 에스드랄론 평원, 갈릴리 (참조 삿 1, 27-35)를 점령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영토 일대를 평정했음을 의미하며, 실제로는 가나안 정복 사업의 완수였다.
다윗은 국내의 질서를 잡고나서 자유로이 이웃 나라들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 다윗의 최초의 전쟁은 암몬과의 싸움이었다 (참조 삼하 10, 1-14). 그리고 모압과 암몬을 정복함 (삼하 8, 2, 13f.)으로서 영토를 동쪽으로 확장했다. 다윗은 방향을 바꾸어 소바 왕 하닷에셀을 침공하였으며, 다멧섹의 아람인들도 격파하였다. 그런 다음 다메섹에 수비대를 두고 이 지역을 자신의 제국의 속주로 다스렸다. 다윗의 정복사업은 급속도로 진전하여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 시리아지역의 제 일 강대국으로 변모시겼다.23)
(3) 다윗 - 솔로몬 제국의 영토과 정치적 구조
다윗 제국의 영토는 팔레스타인의 전지역, 즉 동부와 서부, 사막에서 바다까지 포함하고, 남부의 국경선은 시내 사막을 깊숙히 가로질러 아카바 만으로부터 이집트 강 (Wadi el-‘Arsh) 하구의 지중해까지 미치고 있었다. 서부의 국경선은 북쪽으로 페니키아 성읍인 시돈과 두로를 제외한 전해안 지역과 남쪽으로 좁은 해안 지역을 제외한 해안지역을 경계로 한다. 동쪽으로는 동부요르단의 에돔 모압 암몬을 포함하며, 북쪽으로는 헤르몬 산자락에 있는 단 가까운 지점까지 나아갔다.24)
이제 다윗의 제국은 분명히 동질적인 단일 성분으로 구성되어있지 않다. 팔레스타인의 가나안 사람들, 불레셋 사람들, 에돔, 모압, 암몬 사람들 그리고 시리아-다메섹 사람들이 제국 속에 편입되었다. 정치적으로도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모압은 조공을 바치는 봉신국/속국이 되었다 (삼하 8, 2). 모압 왕조를 폐위시켰다는 어떠한 증거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에돔은 왕조를 폐위하고 군사 수비대를 두었다 (삼하 8, 14). 에돔의 경우 한 단계 더 나아간 지배를 하였다, 즉 에돔은 이스라엘의 한 속주로 합병되었고, 왕조를 폐위되었다. 아람 다메섹의 경우도 이와 같은 경우이다 (삼하 8, 6). 그러나 다른 아람 지역은 조공을 바치는 봉신국이 되었다. 하맛의 경우 자발적으로 조공을 바치는 봉신국이 되었다 (삼하 8, 10). 다윗과 솔로몬의 제국은 유다를 중심으로 한 다원적 정치구조를 이루었고, 이는 명백히 제국을 이루었다.25)
III. 다윗 - 솔로몬 시대의 사회구조의 변화
이스라엘이 개체화된 사회로부터 왕권국가로의 변화는 의심할 바 없이 많은 영역에서 발전을 가져왔다. 왕조와 지파체제의 결합이 이스라엘 밖의 팔레스타인의 소국가에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상치 못했던 국제무대에서의 안전과 경제적 비약은 확실히 이스라엘 사회의 많은 이들에게 자유의 유보를 감수해야 했으며, 이것 전체를 필연적인 발전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참조 삼하 19, 10; 왕상 4, 20; 5, 5). 특히 왕권의 등장으로 직접적인 이익을 보았던 관리들은 더욱 그렇게 보았다. 초기에는 많은 발전의 부작용을 예기치 못하였다.
왕권의 등장으로 초기의 엄청난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회의 모든 집단들이 이 발전을 받아들인 것은 결코 아니다. 왕권에 대한 반대는 여러 차례의 저항운동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이전 지파적 사회에서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지도적 인사들이 제기하였다 (이스라엘의 장로들,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자들 삼하 15ff.). 이들은 왕권으로 인해 물질적 희생을 감수해야 했고 (삼상 8, 11-17) 이전의 권리의 삭감을 당해야했다.
알베르츠 (R. Albertz)는 이스라엘 초기 왕권 제도에 대하여 최소한 세 집단의 다른 반응을 보였다고 주장한다 : 1) 왕권으로 인해 이익을 보았으며, 이로 인해 왕권을 아주 긍정적으로 선전하는 집단 (관리, 군인, 사제 <아마도 직업적인 예언자>). 2) 왕권을 옹호 방어하며 동시에 전통적 가치체계를 전하려는 중간 집단. 3) 온갖 형태로 왕권을 거부하고 투쟁하는 집단.26)
(1) 국가 행정조직에 반영된 사회적 변화
(1-1) 군대조직
군사적 성공은 군대조직의 개편을 가져왔다. 사사시대 전 (全)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이 수행한 전쟁은 주로 방어전쟁이었다.27) 사울 왕권은 여전히 징집부대에 근거하고 있었으나, 다윗은 옛 징집부대를 직업군인들로 구성된 부대 (삼하 15, 18f.; 23, 13ff.; 15, 19ff.)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군대조직의 전환을 그는 그의 통치의 역점사업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다윗은 직업군인들로 구성된 이 부대의 군사적인 의의는 물론 정치적 의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8) 직업군인부대만이 오직 정치적-군사적 힘 (권력)이 되었다. 이 부대는 점점 더 커졌고, 또 중요한 의미를 얻게 되었다.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의 군부대는 다시 정비되었다. 즉 전 지파에서 징집된 징집부대와 직업군인부대외에 전차부대(왕상 9, 15, 17-19; 10, 26, 왕상 10, 28f.)가 창설되었다. 솔로몬은 전차부대를 계속 창설하여 예루살렘 왕의 주변이나 국경도시에 배치했다.29) 이 도시들은 정치 교통상 중요한 평원지역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쉽게 국경지역에까지 접근할 수 있는 도시들이다. 이로부터 말과 전차로 무장하여 이 지역에 배치된 솔로몬의 병사들의 과제가 이 지역 일대를 잘 감시하는 것이라고 추론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 도시에 배치된 전차부대의 과제가 외부로부터 침입해 오는 적의 공격에 대비한 영토방위 성격을 가졌다고 지나치게 과장해서는 안된다. 이들의 중요 과제는 솔로몬에 의해 정복되어, 그의 제국에 합병된 지역을 통제하고, 이들 지역에서 발생될 수 있는 반란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다.
(1-2) 행정조직
행정관리 조직도 확대되었다 (삼하 8, 15-18, 대상 18, 14-17, 삼하 20, 23-26, 왕상 4, 1-6, 7ff.; 왕하 18, 18). 이로 인하여 전통적으로 결정권을 가진 지파의 지도자들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이와 함께 새로운 사회계층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들은 가족이나 가문에 속한 것이 아니라 왕과의 충복관계에서만 설명되어진다. 다윗, 솔로몬 이전의 가나안의 도시국가 출신이나 외국인 전문가를 등용하였다 (삼하 23, 24-39; 15, 19ff.). 왕과 그 주변의 특권층, 관리, 군인, 상인들의 증가는 이스라엘 사회를 점차 평등적 사회구조의 해체로 몰아갔다.
(1-3) 조세제도
궁중과 행정관리를 위해 필요한 물자와 재원의 증가는 점차 조세제도의 필요성을 낳게 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12지방으로 나누어 궁중에 필요한 물자를 한 달씩 조달하도록 했다 (왕상 4, 7-19; 5, 7; 참조 5, 2f.). 여기에 성곽도시에 배치된 엘리트 부대의 유지를 위한 재원이 필요했다 (왕상 5, 8). 대개 국가기구를 위해 거두어들이는 왕의 조세는 곡물과 포도주와 짐승을 위한 십일조가 해당된다 (삼상 8, 15, 17). 관리들에게는 땅을 주어 생계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삼상 8, 14; 22, 7). 대개 주인이 없는 땅은 왕실 땅으로 편입되었고, 이것이 다시 영지형식으로 재분배되었다 (왕상 21, 15f.; 왕하 8, 1-6; 삼하 9, 7ff.; 16, 4; 19, 30). 왕권의 출현과 함께 나타나게 된 (가속하게 된) 대토지 소유는 이스라엘 사회를 빈익빈 부익부로 극단적으로 양분화시켜 나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기원전 8C부터는 항구적인 사회적 위기로 몰아넣었다.
(2) 사회-경제적 변화
정치적 구조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적 관점에서 이스라엘 사회의 내부구조 또한 다계층적으로 변화되었다. 이 점에 대하여 삼상 22, 1-2에서 잘 묘사해 주고 있다 : 다윗이 아둘람 굴로 피하자, 그의 형들과 온 집안이 그곳으로 모였으며, “압제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도, 모두 다윗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다윗은 이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이들은 사백여명이나 되었다.
이스라엘 사회는 왕권제도가 태동하기 이전부터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배계층과 몰락한 빈민 계층의 출현으로 다계층적 사회로 분화되어 이미 평등적 사회구조를 상실하였다. 경제력의 차이가 사회적 차이로 나타나는 현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문제점을 계약법전을 통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출 21, 2-11에서는 히브인들이 노예로 전락한 경우를 다루는 노예법30)을 담고 있다. 현재의 본문은 노예의 주인을 야웨의 법 의지아래 예속시켜, 야웨의 지배가 인간에 의한 다른 사람의 지배의 한계가 된다. 노예법 (출 21, 2-11, 20f., 26f.)은 사회의 강자에 반하여 약자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기능을 한다.31) 그러나 이 노예법의 본래적 의도는 주인과 노예 (그의 가족을 포함)와의 쌍방의 이해관계를 조정한다. 남자 노예들은 7년째 해방의 권리를 보장받으며, 여자 노예들은 성적 유린 방지의 권리를 보장받는다. 노예된 자의 권리를 최소한이나마 보장 받는다. 그러나 노예 소유주의 권리는 이들보다 더 커다. 노예들을 영구 노예로 전환시킬 가능성과 신체적 학대를 정당화시킬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32)
여러 가지 이유에서 경제적으로 몰락한 자들이 처해져야하는 운명 가운데 가장 비참한 경우는 노예일 것이다. 이러한 운명에 처하기를 거부하는 자들 중에는 도적들의 무리속에 가입하여 不自由한 노예의 운명을 피하기도 한다.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초기의 이스라엘 사회는 비교적 동질적 사회였다. 경제적 차이로 인한 사회적 차이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약 2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에는 경제적 차이가 동족중 다른 사람을 노예로 삼을 수 있는 상황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 노예법의 존재 자체는 이스라엘 사회가 이미 다계층적 사회임을 말하는 증거이다.
출 21, 33 - 22, 14에서는 각종 보상법을 담고 있다. 오토는 이를 여살렘-법 (םꗦꚃꖾ 보상하다)이라 하였다.33) 내용적으로는 가축 절도죄 (출 21, 37 - 22, 3)와 보관물의 손실 (출 22, 6-14)에 대한 보상규정을 다룬다. 그밖에도 각종 보상 규정을 담고 있다; 구덩이에 빠져 동물이 상해를 입었을 경우 (출 21, 33-36), 짐승에 의해 농작물을 망쳤을 경우 (22, 4-5).
여살렘 법들 (출 21, 33 - 22, 14)의 삶의 자리는 소유권 침해로부터 기득권층의 소유권을 지키는데 있다. 이 단락을 사회사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는 출 22, 2에 있다. “그가 가진 것이 없다면, 그가 훔친 것을 (갚기) 위해 그를 팔아야 한다.” 역사적으로는 왕조 시대의 초기로 경제적 가난으로 인해 도둑질한 경우 노예가 될 수 있다.34) 이처럼 강력한 소유권 보호는 이 사회에 빈곤층이 늘어 간다는 배경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계약 법전 중에서 출 21, 1 - 22, 16은 주로 조건법들로 묘사되어진 법률집 (םיꖩ꘩ꚉꗬ Mischpatim)이다.35) 미쉬파팀의 의미는 무엇보다 가해자 - 피해자 - 균형 모델을 제시한다. 미쉬파팀은 신체 보전권과 소유권의 침해라는 법의 두 영역에서 한편으로 책임의 한계를 설정하고 다른 한편 피해 보상/배상의 규칙을 확정한다.
이 고대 법률집에서는 이스라엘 사회가 사회-경제적으로 다층적 사회로 발전했으며, 이로 인해 재산권의 제도적, 법률적 보호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IV. 문화적 - 정신적 세계의 변화
경제적 정치적 상황의 변화는 엄청난 국가적 건설공사에서도 볼 수 있다. 솔로몬은 자신의 궁전을 확장했고 (왕상 3, 7; 5, 15ff.; 6f.), 전 국토를 무기도시, 전차도시, 성곽도시의 체계와 함께 조세 및 군사 관리체계로 개편했다 (참조 왕상 9, 15ff.). 동시에 전국가를 중앙 집권적 지배하에 놓이게 했다. 왕조시대와 함께 도시화가 가속화되었다. 많은 지역이 무장되었고, 신도시들이 만들어졌으며, 부분적으로 농촌부락의 거주가 포기되었다. 광적인 건설 계획들은 국가의 공적부역 (mas)을 통해 해결했다 (삼하 20, 24). 초기 다윗시대에는 전쟁포로들을 부려먹었으나 (삼하 12, 31), 후에 솔로몬 치하에서는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왕상 5, 27-30; 9, 20-22; 대하 2, 16f.).36)
국가의 형성과 함께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 유화적 개방을 가져오게 되었다. 신생국가는 주변국가들과 외교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솔로몬은 파라오의 딸과 결혼하였고 (왕상 3, 11f.) 파라오는 솔로몬에게 결혼선물로 게젤성을 주었다 (왕상 9, 16, 24). 두로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왕상 5, 15ff.), 더우기 남아라비아와도 관계를 맺었다 (왕상 10). 이와 함께 국가간의 원거리 무역도 확대되었다. 건축자재, 말, 전차, 심지어는 알려지지 않는 보석이 이스라엘로 흘러오게 되었다 (왕상 5, 15ff.; 9, 26-28; 10, 22, 28f.). 이러한 것들은 왕실 궁중에서는 물론 도시의 상류층으로 하여금 소농민들의 가치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방식을 하도록했다.
원거리 교역과 함께 고대동양의 높은 수준의 예술과 문학이 이스라엘로 들어오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성전과 궁전은 페니키아의 건축술로 빛나며, 이집트와 아랍으로부터 지혜문학이 궁중으로 흘러들어왔다 (왕상 5, 9-13). 새롭게 계몽되어진 정신세계는 자신의 생활반경을 넓게 했으며, 이스라엘 자신의 문학작품을 낳게 했다.
다윗 솔로몬 시대의 계몽주의적인 정신에 대하여 브루지만 (W. Brueggemann)은 지혜전승 연구에서 상세히 연구하였다.37) 다윗 이전의 자료에서는 중심적인 사상이 제의적 체험이며, 사건의 중심적 인물은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다윗 자료에서는 제의적인 문제로부터 정치적 역사적 문제로 바꾸어졌다 (40). 다윗은 인간 역사와 책임감, 인간의 결단력과 권력의 사용 등에 대해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44). 이러한 신학적 변화는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신뢰를 충분히 받았다는 데 기초한다.
그는 계속하여 신학적 변혁에 대하여 언급한다. 첫째, “거룩”의 개념을 종교적 개념으로부터 일상적 개념으로 해석하였다 (47-48). 둘째, 신앙 주제를 삶의 문제로 전환시켰다 : “인간은 살도록 신뢰를 받았다” (48-51). 다윗은 계급 차등을 거부하고 동료들과 함께 나누는 인간성을 정립하였다. 즉, 그는 인간성에 관한 새로운 것을 발견하였다 (51-52).
문화적 이질화가 가져다준 위험은 후에 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V. 왕조시대의 초기 시대적 과제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권”이라는 새로운 제도가 등장하게 되었다. 왕조시대의 초기 시대적 과제는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제도를 정당화 시켜야 했다. 다윗은 지속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광범위한 영역의 정복전쟁에서는 지속적인 위기상황, 자유의지에 근거한 참여,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에 의한 연대,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대한 해방이라는 전쟁의 목적의 제한 등의 특징이 전혀 없었다. 다윗은 모든 시대와 모든 목적에 자신의 직업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의견 일치 (동의)가 더 이상 필요없었다. 그의 전쟁의 목적은 이웃민족들에 대한 지속적인 정복이며, 통상로에 대한 장악이며, 자연지원의 확보, 강제 노동력의 확보 등이다 (삼하 8, 1 - 15; 10, 1 - 19; 12, 26 - 31). 전쟁은 왕의 통치의 수단이었다. 따라서 불만적 세력이 생겨났으며, 이에 상응하여 왕권 제도를 정당화시켜야 했다.
(1) 왕권의 정당화
다윗-솔로몬 시대에 여러차례의 반란이 있었으며 (압살롬의 반란 : 삼하 15-19장, 세바의 반란 : 삼하 20장), 여로보암의 반란 (왕상 11, 27ff; 12장)을 제외하고는 이들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이들은 왕권으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신학적으로 정당화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했다.
다윗 상승사화 (삼상 16, 1 - 삼하 5, 12)와 왕위 계승사화 (삼하 9 - 왕상 2)는 이러한 관심사에서 나왔다.
이러한 역사에는 몇 가지 정치-신학적 특색을 지닌다. 첫째, 다윗과 솔로몬이 왕이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Gottes Designation)의 결과로 보았다. 궁중의 사학자 (관리)들은 왕은 야웨에 의해 지명된 자로 묘사하였다. 이 점은 나기드 (Nagid) 칭호에 잘 드러난다. (삼상 10, 1; 삼하 5, 2; 왕상 14, 7). 이로써 야웨종교가 왕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사울의 실패와 다윗의 상승은 야웨의 신비로운 인도하심 (삼상 20, 22; 22, 3, 5; 23, 14; 25, 26, 31, 33f.; 삼하 4, 9; 12, 15; 15, 31; 15, 32ff.; 16, 12; 17, 14; 18, 19, 31; 왕상 1, 29; 2, 15)과 동행하심 (삼상 16, 18; 17, 37; 18, 12, 14, 28; 20, 13; 26, 25; 삼하 5, 10; 14, 17; 왕상 1, 37)의 결과라 서술했다. 따라서 다윗과 솔로몬이 왕이된 것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예시된 길이며, 아무도 저지할 수 없었다 (삼상 18, 8; 20, 31; 21, 12; 23 17; 24, 21; 25, 28, 30; 삼하 3, 9f., 17, 18, 21; 왕상 1, 48; 2, 24aα). 이러한 방식으로 궁중의 사학자 (관리)들은 “다윗 왕은 야웨가 선택한 자이며, 역사속에서 이것이 입증되었다”는 왕신학의 주장을 주민들에게 주지시켰다 (삼하 6, 21; 16, 18; 삼상 16, 8, 9, 10; 삼하 5, 15).
둘째, 궁중의 사학자 (관리)들은 다윗과 솔로몬이 왕이된 것은 백성들이 원하는 바임을 나타내고자 했다. 다윗은 백성들의 추대로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되었다 (삼하 2, 1-4). 그리고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바램으로 북왕국의 왕까지 되었다 (삼하 5, 1-3).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백성들은 기쁘 환호했다 (왕상 1, 39, 41, 45).
셋째, 사울과 다윗을 비교할 때, 모든 점에서 다윗은 사울보다 훌륭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윗은 종교적으로 경건하며, 야웨신앙에 충실한 데 사울은 우상 숭배에 기울었다. 다윗은 사울과는 달리 모든 일에 있어 지속적으로 야웨의 뜻을 물었으므로, 이로써 그의 경건성을 보여 주었다 (삼상 22, 10, 13, 15; 23, 1 - 12; 30, 7; 삼하 2, 1; 참조 5, 19, 23).
군사적으로 다윗은 만만의 성리를 거두었으나 사울은 겨우 천천의 승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다윗은 그의 주인인 사울에 대하여 충실한 반면,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계속 추격하였다. 다윗은 사울의 몰락에 무죄하다는 점도 잘 보여주고 있다 (삼상 26, 19; 27, 3f., 11f.; 29, 7ff. ; 30; 삼하 1, 11ff.; 2, 4b - 7; 32, 22 - 39; 4, 9ff.). 왕신학과 전통적 야웨종교와의 조화를 이루려면, 사울의 카리스마가 다윗에게 옮겨갔음을 보여준다 (삼상 16, 13).
그럼에도 왕권에 의해 부정적 경험은 왕권 자체를 비판적으로 대하게 했고, 기원전 8세기 예언자들과 (특히 호세아)와 신명기에서 왕권의 종교적 존엄 (권위)를 비판하였다.
(2) 왕 신학의 등장
이스라엘은 정복을 통해 거대한 제국을 이룩했다. 이로 인하여 제국내에 매우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이 함께 병존해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요소를 하나로 통합시켜야 했다. 통합을 위해 다윗과 솔로몬은 강력한 전제적 왕권을 형성하였고, 이를 위해 궁중신학이 등장했다. 궁중관리와 국가적 성소의 사제들과 예언자들에 의해 선전되는 왕조신학과 성전신학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왕조적 지배를 새로운 형태로 정당화시켰을뿐 아니라, 왕의 강력한 전제적 지배를 뒷받침했다. 이러한 궁중신학은 이스라엘 주변, 즉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왕신학의 궤도 위에서 움직인다. 고대동양 (서부 아시아)에서 다소 차이는 있지만, 왕을 지상의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피조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모형, 하나님 자신으로 통했고, 그는 밖으로는 신적 지배를 펼쳤고, 안으로는 신적 질서를 세우며 동시에 국가의 존립을 보장한다.
이스라엘은 왕신학에 대한 무수한 증거를 보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왕시편 (시 2; 18; 20; 45; 72; 85; 101; 110; 132; 144, 1 - 11)과 삼하 7장 등이다. 이스라엘의 궁중신학에서도 고대동양의 왕신학을 볼 수 있다 : 야웨께서 왕 자신을 낳았다,38) 왕을 하나님의 아들이나 맏아들로 표현한다39), 왕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자가 되게 하셨다,40) 그를 높이셨다,41) 보좌의 우편에 앉게 하시고42), 왕을 더욱이 신 혹은 신적 존재로 호칭할 수 있었다.43) 다윗은 자신의 고유한 신학적 기초를 놓았다. 소위 나단의 약속 (삼하 2; 시 89, 20 - 38; 시 132, 114)에서는 다윗 왕조의 영원한 존속과 안전한 지배에 대한 하나님의 확약이 담겨져 있다.
궁중신학에 따르면 포괄적인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에 왕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왕은 야웨의 정치적 역사적 행동을 이스라엘에 중재하며, 자연과 사회에서의 축복행위를 중재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본질적인 요소들, 생산적, 정치적, 제의적 측면들이 왕이라는 인물에 집중되어 있고, 그 속에서 통일을 이룬다.
IV. 결론
다양성 속의 통일성의 과제는 전제적 왕권 강화의 방향으로만 흐르게 되었다. 개개인, 특히 지배 계층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만 흐르게 됨으로써 사회적 책임성이라는 과제는 약화되었다. 시소는 한쪽으로 기울게 되어 왕조시대 초기 이스라엘사회의 사회적 통합은 실패로 끝났다. 궁극에는 남북의 분열과 약소국으로의 축소로 이스라엘 역사의 제 일 막은 끝났다.
자신의 사회의 형태나 가치에 있어서 통일된 동질의식의 상실은 왕조시대의 종교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외국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의 상징인 야웨는 궁중신학에서는 국가권력의 보증이 되었고, 이에 근거하여 이방민족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회에 대해서도 새로운 억압 메카니즘을 만들어 내었다. 야웨종교는 정치적 권력욕을 강화시켜 주는 기능을 하며, 문자 그대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왕신학은 갈등적 요소를 가져왔다. 첫째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왕권을 통해 독점화되었다는 점이며, 야웨와 국가권력이 밀접히 혼합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항이 강하게 제기되었다는 점도 우연이 아니다.
제 4 장 신명기 개혁 운동과 국민적 연대와 공동체 정신
I. 문제의 제기
신명기는 구약성서의 중심이다. 그것은 신명기 이전의 모든 사상들이 신명기에서 종합되었으며, 신명기 이후의 모든 사상은 신명기의 영향을 받아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신명기 개혁운동44)의 정신은 신약시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원시 기독공동체의 교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 공동체의 신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신명기 개혁 운동은 정치, 경제, 종교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총체적 개혁이다. 신명기 개혁 운동은 기원전 714년부터 609년까지 100년 이상이나 지속된 개혁운동이었다.
II 신명기 개혁 운동의 태동과 역사적 배경
(1) 앗시리아의 부흥
신명기 개혁 운동의 동기와 출발점은 반앗시리아 저항운동 (혹은 독립운동)에서 찾는다.
따라서 앗시리아의 부흥과 이로 인한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예속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기원전 800년에서 750년에 이르는 두 세대 동안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상당히 평온한 시대를 가졌다. 그 후 745년에 디글랏빌레셀 3세는 칼라흐(Kalach)에서 왕이 되었다. 그는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여 조공을 바치도록 했다.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에도 원정하였다.45)
그 후 722/721년에는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 성이 함락되었다. 이로써, 남북왕조가 분열된 이후 북왕국 이스러엘은 약 200년 쯤 계속되다가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기원전 933-722 년= 211년).
앗시리아의 정권이 불안정할 때 - 예, 왕이 바뀔 때 - 마다 저항운동을 펼쳤다. 733년에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저항운동을 폈다. 이 저항운동은 사마리아가 몰락될 때까지 계속되었고,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2) 시리아 - 에브라임 전쟁과 유다의 앗시리아 예속
시리아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33년에 반앗시리아 동맹을 맺어, 유다로 하여금 이에 가담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들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까지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왕하 15, 37; 16, 5). 유다 왕 아하스는 자진하여 앗시리아에 굴복하였고, 자비를 빌기 위해 조공을 바쳐 (왕하 16, 8), 예속상태에 빠져 들어갔다 (왕하 16, 7-9). 아하스는 앗시리아의 최고 통치권과 앗시리아 민족의 최고의 신을 인정한다는 표시로서 야웨 제단 외에 또 다른 제단을 만들었다 (왕하 16, 10-18).46) 따라서 그는 앗시리아 왕에게 호감을 사고자 했다. 다른 한편 민족주의적이며, 야웨 종교에 충실한 자들의 반감을 무마하기 위해 여전히 야웨 제단에도 충실했다 (왕하 16, 15).47) 왕하 16, 10-18 은 두 개의 상호대립적인 집단이 공존했음을 보여준다. 한 집단은 아하스 왕과 그의 궁정 신하들로서 친앗시리아 정책과 앗시리아 종교형태를 수용한 집단이며, 또 다른 집단은 국가의 주권을 상실하고, 종교적 혼합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면, 그 책임이 궁중의 무리들에게 있다고 느끼는 집단이다. 이 집단이 후에 신명기 개혁집단으로 발전한다.
(3)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의 반 앗시리아 동맹운동
신명기 개혁 운동의 동기와 출발점을 찾는데 학계의 일치된 견해는 반앗시리아 저항운동 (혹은 독립운동)에서 찾고자 했다. 따라서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난 반앗시리아 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사마리아가 함락된 이후 기원전 701년 예루살렘이 포위되기까지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계속하여 반앗시리아 동맹 운동이 일어났다. 기원전 720년에 하맛이 봉기를 일으켰으며, 여기에 가자도 가담하였고, 이집트도 지원했다 (왕하 17, 4). 이 때 유다는 여기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유다의 궁중이 여전히 친 앗시리아 정책에 충실한 내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713-711년 아스돗이 맹주가 되어 반앗시리아 동맹을 결성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성서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앗시리아의 보도 - 처벌국가 목록48) - 에는 유다가 가담한 것으로 나타난다. 유다가 이 사건에 소극적으로 가담한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마도 히스기야가 왕이 된 이후 1-2년 안에 친앗시리아 정책에 충실했던 궁중의 내각을 개혁하여, 반앗시리아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내각으로 바꾸어 반앗시리아 정책을 강력히 수행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705년에 앗시리아에 왕이 바뀌자49). 이번에는 유다의 히스기아 왕이 맹주가 되어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장시간에 걸친 준비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701년의 침공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III. 히스키야의 개혁운동의 민족적 연대와 공동체 정신
(1) 히스기야의 군사적 조치
앗시라아의 침공을 대비하여 히스키야가 어떤 군사적 조치를 취한 것을 분명하다. 먼저 그는 국민들을 동원하여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아마도 그는 전 국민을 동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무기를 개선하여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성서와 앗시리아의 문헌에서는 앗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기원전 705-701년의 저항에 국민들이 참가했다는 증거가 있다. 성서에서는 주로 왕하 18-20장 (=사 36-39장)의 히스키야-이사야 이야기50)에서 찾을 수 있다. 왕하 18, 13에서는 앗시리아는 유다의 모든 성곽도시를 포위하여 점령했다고 보도한다. 이와 동시에 산헤렙 연감에서도 유다의 46개의 성곽 도시와 그 주변의 중소도시들을 점령했다고 보도한다.51) 왕하 18, 26(=사 36, 12)에서는 앗시리아의 장수 랍사케가 성벽을 향하여 히브리어로 비난을 하자 (=랍사케 제 일 연설), 유다의 관리들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과 셉나와 요아)은 그에게 백성들이 알아들을 수 없도록 아람으로 말해줄 것을 청한다. 여기에서도 기원전 701년의 반앗시라아 저항운동에 전국민들이 참여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랍사케 제 이 연설 (왕하 18장 28-35절)에서도 국민들이 참여했다는 증거가 있다. 앗시리아의 군사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속히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성위에 앉아있는 사람들 (=군사들)에게 직접 대화를 통해 담판하고자 했다 (=랍사케 제 이 연설, 왕하 18장 28-35절). 랍사케는 성벽 위에 대치하고 있는 군사들에게 히스키야의 말을 듣지 않고 항복하면, 먹을 것을 보장해 주겠다고 설득한다. 그러나 군사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침묵했다 (왕하 18, 36절).
앗시리아 왕은 자신의 군대로 짧은 시간 안에 저항을 격파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 그는 협상을 통해 목표를 달성한다. 이 때 대개는 정복코자 하는 통치자와 국민들 사이를 이간질시켜 목표를 달성한다. 랍사케 제 이 연설의 전체적인 기조는 앗시리아 전술의 전형적인 본보기이며52), 이러한 전술은 님루드 편지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여주고 있다.53) 따라서 랍사케 연설 (왕하 18, 19-25=사 36, 4-10과 왕하 18, 28-35=사 36, 13-20)은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회상을 담고 있다.54)
성벽위에서 랍사케의 청중이 되었든 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모병되어 온 자들이다. 이자들은 결코 직업적인 용병은 아니라 국민 모병제을 통해 징집되어 온 자들이다. 이 점은 랍사케의 말 가운데 (왕하 18, 31-32=사 36, 16-17) 더욱더 분명해진다. 랍사케는 평화의 계약을 채결할 것을 제안하며, 백성들에게 평안한 삶과 곡식과 포도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땅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한다.55)
대하 32, 6에서는 히스키야가 군사령관을 임명하는 등의 군사 체계를 재정비하여 군사력을 강화했음을 보여준다. 앗시리아가 유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 목록 속에는 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러나 유다에서 말이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어졌는 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말들이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어졌을 것이다.56) 전차부대로 무장한 왕의 근위대의 경우 종종 전투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결코 주력부대는 될 수 없고 지원부대일 뿐이다.57)
대하 32, 5하반절에서는 히스기야가 많은 창와 방패를 만들게 했다. 열왕기에서는 역대기처럼 무기제작을 직접적으로는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무기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왕하 20, 13). 바벨론 왕 브로닥발라단은 편지와 예물을 가지고 히스키야에게 사신을 보냈다. 아마도 기원전 705-701년 반앗시리아 동맹과 관련하여 보냈을 것이다. 히스키야는 이 사신들에게 그의 왕궁과 그의 제국에서 보여주고 싶었든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이 목록 속에는 무기고도 포함되어 있다. 이 무기고는 아마도 레바론 나무 궁이라 불려졌으며, 솔로몬의 무기고였을 것이다 (왕상 7, 2; 10, 17; 대하 9, 16, 20; 사 22, 8). 이 무기고에는 무기들이 있었으며, 이것으로 히스키야는 유다의 전투능력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중무기들과 병기들을 위해 Eisen II-C (기원전 850-587년)에는 철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라기쉬의 발굴에서 192개의 화살촉이 나왔다. 그중 하나는 빠를 깎아 만든 것이고 나머지 모두는 철화살촉이다. 라기쉬에서의 화살촉의 발견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 Eisen II-C의 유다의 일반적인 경우이다. 군사적 상황과 관련하여 Tell es-Seri'a의 성안에서 철제련소가 발견되었다.58)
(2) 히스키야의 건축
앗시리아의 침공을 대비해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히스키야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보수했다. 또 유다의 많은 도시들에 새로운 성벽을 건립케 했다 (대하 32, 1-5, 30; 사 22, 9-11a). 예루살렘의 남동언덕 지역을 발굴을 통하여 밝혀진 바 원래의 여부수 시대의 성벽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다시금 개선되었고, 기원전 8세기 후반기부터 여러 차례 성벽이 개선되어졌다. 개선되어진 성벽들 중의 하나가 아마도 히스키야에 의해 개선된 것일 것이다.59)
히스키야 시대에 예루살렘의 남동언덕 지역이 확장되어졌다.60) 유다의 다른 도시들도 기원전 8세기 라기쉬 (Tell ed-Duwer)의 모형을 따라 이중의 순환 성벽을 세워 도시를 방어했다.61)
팔레스타인의 기후상황을 고려할 때, 상설적인 샘물이 필요했다. 특히 도시가 적에의해 포위를 당했을 경우 방어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물공급이다. 예루살렘의 용수 조달에 대하여 왕하 20, 20에서 증거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밖에 있는 기혼샘의 물을 끌어오기 위하여 지하에 터널 (=수로)을 만들어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저수지에 물을 저장하였다 (참조 사 22, 11; 대하 32, 4-5, 30). 그리고 히스키야는 기혼 샘물은 메워버려, 적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대하 32, 4에서는 백성들이 많이 모여 모든 물근원과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았다고 보도한다. 이 수로와 저수지는 실로아 터널과 실로아 저수지를 말한다.62)
(3) 히스키야의 외교적 노력
히스키야는 앗시리아의 침공에 대비하여 외교적 측면에서도 적절한 준비를 하였다. 유다는 남 팔레스타인의 여러 나라들과 함께 반앗시리아 동맹을 체결하고 여기에 맹주가 되었다. 특히 불레셋 도시국가들 (아스칼론, 에클론63), 가자)을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유다는 북쪽의 에클론과 남쪽의 가자에 동맹에 가담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왕하 18, 8절에서는 히스키야가 가자를 정복했다고 보도한다. 이것은 아마도 가자가 반앗시리아 동맹에 가담하기를 거절하자 강압적으로 가담케하려는 조치로 보여진다.64) 팔레스타인의 도시국가들은 유다와 함께 앗시리아에 바치는 조공을 중단하였다. 이집트와도 동맹관계를 새롭게 맺었다.65) 더우기 바벨론에까지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여진다 (왕하 20, 12-19).
IV. 신명기 종교개혁의 국민적 연대와 공동체 정신
신명기 종교개혁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간략히 요약한다면, 그 내용을 아래와 같이 4요소로 요약할 수 있다. 예배의 정화 (Kultreinheit), 예배처소의 중앙통일화 (Kulteinheit), 유일신앙의 확립 (신 6, 4-5)과 예배개혁 (신 12장)이다. 처음 두 요소의 정보는 주로 열왕기와 역대기에서 얻을 수 있으며, 다음 두 요소는 주로 신명기에서 얻을 수 있다.
(1) 예배의 정화
신명기 종교개혁은 앗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신명기 개혁은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이며, 종교개혁은 중요한 한 영역이다. 신명기 종교개혁은 종교적 영역에 속하지만, 정치적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다른 나라의 신의 숭배가 여전히 행해진다면, 그것은 다른 나라의 권력이 아직 항존함을 말해주고 있다. 강압적인 수단에 의해 이방 신들의 숭배가 행해질 때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이방 신상의 제거는 종교 정화의 차원을 넘어서 이방권력의 거부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신명기 종교개혁에서는 앗시리아의 종교상징들, 태양, 달, 별들을 위한 신상들과 제단이 제거되었으며, 또 이들 신들에게 바쳐졌던 제사나 종교관습도 중지되었으며, 앗시리아 종교를 위해 임명된 사제들도 폐위되었다.
(1-1) 히스기야 시대의 예배의 정화
앗시리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저항운동 (혹은 독립운동)은 필연적으로 종교적 영역에도 수행되었다. 히스기야는 앗시리아의 종교적 상징물들, 신상이나 성물들을 일차적으로 제거했음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행위는 종교적 정화이며 동시에 정치적 독립운동이다.
신명기 역사서에는 히스키야의 종교정화에 관한 역사적 보도를 담고 있지 않는 샘이다.66) 역대기서에도 히스기야의 종교적 정화와 관련하여 역사적 사료로 간주될 만한 새로운 사료를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료의 침묵에도 불구하고67) 히스기야가 앗시리아의 권력을 상징할만한 종교적 상징물을 궁중에서 여전히 두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명백히 종교개혁을 단행했다는 증거를 담고있기 때문이다.
(1-2) 요시아 시대의 예배의 정화
앗시리아 왕 앗시리아바니팔이 죽고 (기원전 639년) 난 후, 앗시리아는 급격히 쇠락하여 마침내 기원전 616년에는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함락됐다. 이 무렵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앗시리아를 대체할 만한 세력이 아직 부상되지 않았다. 이러한 세력의 공백을 이용하여 유다 왕 요시아는 독립을 쟁취하고, 개혁을 단행하였다.
요시아의 개혁도 정치, 경제, 군사, 종교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이었다. 특히 그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민중들 (=암 하아레쯔 왕하 21, 24; 23, 30)은 사회,경제적 개혁없는 종교적 개혁만에 만족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에 대해 왕하 23장 4-20, 24절에 보도하고 있다.68)
앗시리아 지배로부터의 해방은 앗시라아의 권력을 상징하는 종교적 상징물들을 마땅히 제거했다. 요시아 왕도 므나세 치하에 다시 등장했던 앗시리아적인 종교 상징물을 제거했다. 태양과 달과 성좌들과 하늘의 별(군대)을 위해 만들어졌던 종교적 상징물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거되어졌으며, 이들을 위한 종교 관습들도 폐지되었다 (왕하 23, 5). 이것은 정치적 독립운동의 한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
왕하 23, 5에서는 앗시리아 제의를 위해 임명되었던 사제를 폐위시켰다. 고메르 (רꗮꗔ, 혹은 그마림 םיꙞꗪꗖ)69)라 불리는 앗시라아의 사제들70)을 폐위시켰다.
왕하 23, 6에는 요시아 왕이 아세라 목상을 야웨의 집에서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들어내다가 불태워 가루로 만들어 일반 백성의 공동묘지에 뿌렸다고 보도한다. 아세라 여신 숭배에 대한 논쟁은 아마도 초기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제의가 예루살렘에서 통일되며서 이스라엘의 공식 종교에서 배제되었다.
(2) 예배의 중앙 통일화
신명기 종교 개혁의 중요한 특징들 중의 하나는 모든 예배처소를 예루살렘에 통일시킨 점이다. 지방에서 활동하는 사제들을 모두 예루살렘에 오게하여 활동하게 했다. 선행연구에서는 그 동기와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해석을 내렸다.
예배의 처소를 중앙에 통일화시킨 것은 종교적 동기에서라기보다는 정치적 - 종교적 동기에서 기인하였다. 그러나 예배처소의 중앙 집권화는 권력집중화 현상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회학적 상식은 여기에서 통용되지 않는다.71) 이와 같은 중앙통일화가 성립되려면, 분명히 전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즉, 예루살렘의 사제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지방사제와 동등한 권한만 가질 때 가능하다. 기득권의 포기는 비단 사제계급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각계 각층에서 일어났으며, 이 때에 비로소 국민전체가 하나가 되는 연대감을 가졌다.
예배처소의 통일화는 오직 야웨 한 분만을 섬기기 위함이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야웨를 민족의 신으로 예배했다. 한 예배처소에서 한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직 야웨만의 신앙고백이 필요했다. 민족 전체의 연대의식을 고양하기 위하여,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필연적이었다. 오직 야웨에 대한 고백은 앗시리아 신에 대한 거부이며, 동시에 한 민족 공동체를 지향하는 신앙고백이다.
(2-1) 히스키야 시대의 예배의 중앙 통일화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다는 앗시리아의 군사적 공격을 방어해야 했다. 이를 위해 국민의 대다수 - 아마도 전체 - 가 동원되어야 했다. 이와 같은 준비와 노동은 전체 국민의 동참과 연대의식을 전제로 할 때만이 가능하다. 물리적인 강제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전국민이 진정한 연대의식을 가질 때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를 위해 왕과 지배 계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보하고, 기층 민중들과 함께 할 때만이 유일하게 가능하다.
지배계층의 기득권을 포기케하고 국민전체의 진정한 총화를 이룩하는데 종교 계층에서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신 18, 6-8에서 좋은 예를 보여준다. 이 규정은 지방 사제인 레위인들에게 예루살렘의 사제들과 동일한 권한을 허용한 규정이다. 왕하 18, 4-8에는 종교 계층이 히스기야의 개혁에 동참했다는 언급은 없지만, 왕하 18, 22에는 예배의 중앙 통일화에 대해 증거하며, 종교 계층도 앗시리아의 공격을 방어하려는 노력에 동참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히스기야는 지방의 모든 사제들을 중앙 예루살렘으로 오게 하여, 예배의 중앙 통일화를 이룩했다.
(2-2) 요시아 시대의 예배의 중앙통일화
요시아의 정치적 종교적 성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암몬왕 치하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므낫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암몬이 왕이 되었다. 암몬왕 짧은 기간 재임했기 때문에 비정치적 영역, 특히 종교적 영역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정치적 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친앗시라아적인 성향의 내각을 반앗시리아적이며, 민족주의적인 내각으로 바꾸려하자 친앗시리아 무리들에 의해 궁중 쿠테타로 죽게되었다. 이에 분노한 민족주의적인 민중들(암 하아렛쯔 ץꙠאָꕗ םꘞ)이 혁명을 일으켜 궁중무리들을 제거하고 어린 요시아를 왕으로 세웠다.72) 이 민중혁명에는 경제적 동기도 관련되었다고 보아야 한다.73)
민중혁명에 의해 요시아는 왕이 되었다는 점에서 요시아 왕은 민중이 요구하는 정책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 민중들은 왕의 정책결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가 죽고 난 후에도 민중들은 자신들의 의지대로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웠다 (왕하 23, 30). 민중들의 종교적 성향은 야웨 신앙에 충실했다.
왕하 23, 8에서는 (게바에서 베엘세바의) 유다의 성읍으로부터 모든 사제들이 예루살렘으로 왔음을 상기기킨다. 지방 사제들이 신명기 개혁에 동참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마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예배의 처소를 중앙에 통일화시킨 것은 종교적 동기에서라기보다는 정치적 - 종교적 동기에서 기인하였다.74)
(3) 유일 신앙
신명기 종교개혁 - 특히 예배의 중앙통일화 - 로 인해 나타난 매우 중요한 신학적 특징은 유일신앙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오직 야웨만을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한다. 신 6, 4-5 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4aα) 들어라 이스라엘아,
(4b) 야웨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야웨는 한 분이시다.
(5b) 너희의 마음을 다하고, 너희의 생명을 다하고, 너희의 모든 것을 다하여,
(5aß) 너의 하나님 야웨를
(5aα)사랑하여라”
4b절에서 야웨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라는 표현은 계약 양식의 한 부분이다.75) “야웨는 한 분이시다”는 유일 신앙에 대한 고백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야웨라는 표현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전통적 신앙고백의 반복이다. 오직 야웨에 대한 헌신의 요구는 결코 종교사적, 철학적 사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시대적 요구”로 이해할 때만이 설명되어 질 수 있다. 외부의 적과 대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주창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야웨이시지, 다른 어떤 신도 아니다. 계속하여 야웨만이 “하나님”임을 주장한다. 외형적으로는 앞의 문장 (야웨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진다. 왜냐하면 전문장은 일신론 (Monolatrie)를 주장하나 후문장은 유일신 (Monotheismus)를 주장한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문장도 일신론 (Monolatrie)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 즉 전문장과 동일한 역사적 삶의 자리에서 나왔다. 즉, 전문장이 민족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후문장은 민족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 분 하나님 야웨를 믿는 이스라엘은 하나된 신앙 공동체이다 : “한 예배처소 - 한 하나님 - 하나된 민족 공동체”의 고백이다.
이와 같은 고백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민족 공동체 내에 어떠한 특권층도 없어야 하며, 소외 계층도 없어야 한다. 야웨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고백이 있는 곳에서는 항상 한 민족, 공동체에 대한 정치적 목표가 확립된다. 따라서 5절의 헌신에 대한 요구는 필연적인 것이다.
(4) 예배의 개혁
신명기의 예배개혁은 신 12, 13-19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내용상으로 3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예배 개혁의 중심 규정 = 예배의 중앙 통일화 : 13-14절
2)부속 조치들 : 15-16절
3)부가적 규정들 : 17-19절
13-14절에 신명기 예배 개혁의 핵심 부분으로 야웨 제사를 야웨께서 선택한 한 성소에 통일시켜야 한다고 규정한다. 당시 이스라엘은 민족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결합되고 또 포함되지 못했기에, 신명기 운동의 초기 예배 규명에서는 예배 장소에 하나의 새로운 중심을 투고자 했다.76) 벨하우젠 (J. Wellhausen)은 예배의 중앙 통일화와 같은 법은 어떤 역사적인 계기로 말미암아 형성되어졌다고 주장했다.77) 예배의 장소를 야웨께서 선택하신 곳에 통일시켜 공동체성과 연대성을 얻고자 했던 개혁 운동에서이다. 예배의 중앙 통일화는 정치적으로 소속성과 동일성을 가져다주었다. 예배의 단일화를 통해 새 국가를 세우고, 이를 통해 민족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을 때 지방 성소의 포기는 필연적이다. 이 길만이 전 민족이 국가 성소를 향해 순례의 길에 오르게 되면, 이것은 곧 국가적인 일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14a절에서 지파들에 대한 언급은 소속의식을 전제한다. 따라서 신명기 편집자는 과거 지파들 사이의 연대감을 가졌던 관습을 상기시켰고, 이를 통하여 현재를 위한 공동체성과 연대감을 얻고자 했다. 중앙 정부가 없었던 지파 공동체에 대한 회상을 통해 아마도 신명기 저자는 당시 현존했던 정치적 경제적 격차에 반해 평등 의식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최고의 정치적 권위 (권력)가 중앙 정부에 부여된 것이 아니라, 민족의 총회에 주어졌다.
신명기 예배 개혁의 두 번째 핵심 부분은 예배 참석자의 확대이다. 신 12, 18에서는 단수 표현의 연설 형태로 예배 참석자의 범주를 상술하고 있다 “너, 너의 아들들과 딸들, 너의 노예들과 여자 노예들”. 이 목록은 전 가족을 망라한 표현이다. 즉 가장과 자녀들 외에도 남여노예들 포함한다. 신명기에서는 예배를 위해 참석자를 하나 하나 개별적으로 언급했지만, 이 열거는 정치적으로 구성된 어떤 전체78)를 의미한다.
특별한 강조와 함께 레위인들 (18ab절과 19절), 떠돌이, 고아와 과부 (신 16, 11, 14)들은 예배의 참석자로 포함시킬 것을 명한다. 종래의 축제의 칼렌더와는 달리 예배 참석자가 엄청나게 확대되었음을 여기에서 볼 수가 있다79) (참조 출 23, 16; 34, 22).
신명기에 따르면 예배에 참석하는 구성원은 “전체 이스라엘” 이다. 모두가 개개의 가족 계층, 신분이 민족으로 통합된다.80) 예배는 신명기의 법에 따르면 하나로 통합된다.
예배나 축제는 항상 사회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민족 축제나 민족 전체가 참가하는 예배에서는 사회적 계층간의 제한은 철페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차이는 포기되어 진다.81) 모든 신분 계층은 한 성소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며 따라서 민족 전체의 공동체가 실현되어 진다. 신명기는 민족의 내적 통일성을 힘 주어 강조하고 있다. 민족 내부에 있는 다양한 신분들과 계층이 차별 없이 형제들의 대가족으로 함께 되는 곳에서82), 균열이 없이 하나같이 통일되는 진정한 소속성의 의지를 잊을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예배의 개혁과 공동체의 개혁은 하나이다. 예배의 단일화라는 제도는 대대적인 혹은 각 부분 부분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신명기의 이론에 따른 예배는 계층간의 격차를 철폐하며 모두들 하나님 앞에서의 기쁨으로 이끄는 것이다.
신명기 예배의 또 다른 특징은 기쁨의 공유이다.83)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기쁘게 누리고 무엇보다도 다함께 누리는 것은 신명기 관심사의 전면에 서 있다. 예배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다는 흔적은 신명기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제사의 식사에서 갖는 즐거운 공동체의 모티브는 다음의 사실을 강조한다 : 이스라엘은 그들의 제사가 중앙 통일화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전부터 가져왔던 온갖 유의 축제의 기쁨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전 공동체가 야웨 앞에서 완전히 새롭게 경험하게 된다. 예배에서의 기쁨은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관련되며, 이방의 억압에서 벗어나게 한 야훼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관련된다. 신명기에서 야웨 앞에서의 기쁨은 성전의 영역 내에서 일어나는 어떤 행동 양식이나 어떤 예배 행위를 의지하지 않는다.84) 여기에서 추구하는 기쁨은 겉으로 드러난 열기와 외적인 즐거움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추구하는 것은 그 근거가 야웨에 의해 부여된 성공과 그에 의해 선물된 물질적 충만과 생의 의미 충족에 대한 감사에 있는 질적으로 최고의 기쁨인 것이다.
이것과 함께 이것은 더 넘어, 신명기에서 요구된 기쁨은 그 근거가 민족 전체가 차별 없이 예배에 참석하여, 야웨의 축복을 다함께 누리는 것에 있다. 이 기쁨은 그러나 창고에 곡식이 넉넉한 때, 부족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형제도 요구할 수 있게 허용했다 (신 15, 7-11).85)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 3년마다 십일조를 가난한 자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 신 14, 28f.; 26, 12ff. 신명기는 거룩한 헌물을 사회 구제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본질적으로 “야웨 앞에서의 기쁨”이란 사회적으로 예속되어 있거나 빈궁에 처한 자들에게 기쁨을 나누는 것이다.
신명기 이론에 따른 예배는 - 예배의 단일화의 전제하에서 - 이방 권력으로부터의 해방과 또 우리에 사회적 차등을 극복하여 야웨 함에서의 기쁨의 공유를 오게 한다.
V. 신명기 사회개혁의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 정신
(1) 왕권의 형성과 이스라엘 사회의 변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 왕권의 등장하면서 이스라엘 사회의 생활 양식에 있어서의 크다란 변화를 가져왔다.86) 국민들을 지배하는 새로운 제도의 등장과 함께 특권층들이 생겨났다 : 왕, 그의 권위를 상징하는 관리와 군인.87) 왕은 그의 영토 내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에 손을 될 수 있다. 그는 들판과 포도원과 가축들에 대하여 십일조를 거둘 수 있으며, 거두어들인 이러한 조세를 그의 권리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부역도 해야 했다.88)
철기시대 이스라엘의 물질 문화에 대한 연구89)에서도 이스라엘 사회의 변화를 볼 수 있다.90) 기원전 9세기에는 국가의 공공 건축이 매우 성황을 이룬 때이다.91) 예루살렘과 므깃도IVB-V와 라기쉬V에서는 이미 기원전 10세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기념비적인 건축은 기원전 9세기에 절정에 달한다 : 사마리아, 므깃도 IVA, 라기쉬IV. 기원전 9세기 이후에는 기념비적인 건물들은 세워지지 않았다. 기원전 10세기에는 결코 볼수 없었든 4공간을 가진 집이 기원전 8세기에는 주종을 이루었다. 기원전 7세기에는 대도시에서는 앗시리아의 영향을 받아 안뜰이 있는 집을 볼 수가 있었다.92) 기원전 8-7세기 동안에 이스라엘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에 특권층인 권리들의 그들의 지위를 이용한 이익추구에도 큰 원인이 되었다.
(2) 기원전 8-7세기의 이스라엘 사회
기원전 8세기의 전반기동안 이스라엘 사회는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다. 따라서 경제적 번영도 가져왔다. 그 이유는 앗시리아가 시리아의 아람을 압박함으로 아람은 앗시리아를 방어해야 했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아람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람의 군사적 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유다와 이스라엘은 특히 웃시야 (기원전 787-736)와 여로보암 II (787-747)시절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회는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의 차이를 보다 더 심화시켰다.
기원전 8세기동안에 대도시의 거주지가 크게 확대되었다. 라기쉬의 고고학 발굴 보고서에서도 이점을 지적한다 : “거주층 III은 거주층 IV에 비하여 분명히 인구가 조밀하게 거주하였다.”93) 예루살렘의 고고학 발굴에서도 기원전 8-7세기에 거주지가 확장되었음을 보고한다.
국가 형성과 함께 왕들은 영지를 형성하였으며, 조세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백성들은 조세와 부역의 부담을 져야했다. 앗시리아의 지배로 인하여 백성들은 조세와 부역외에 조공을 위한 부담도 함께 져야했다. 조세, 부역 및 군사적 의무는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었으며, 특히 경제적 약자들에게 채무자로 전락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이유가 이스라엘의 소자유 농민들이 채무자로 전락된 후에 그들의 빛을 갚지 못하여 저당의 형식으로 맡겨졌던 그들의 땅과 집을 잃는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기원전 701년의 전쟁에서 패함으로 유다는 많은 영토를 잃어 버렸다. 이로 인하여 국가의 중요한 수입원을 잃어버렸다. 국가의 관리들이 위로부터 그들의 직무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될 경우, 이들은 부족분이나 상실분을 대게는 체념하기보다는 그들의 수하에 있는 자들에게서 강압적으로 보충한다. 이것이 소자유 농민들이 그들의 토지와 집을 잃어버리는 또 다른 이유였다.
긴 전쟁으로 인하여 농토들이 황폐화됨으로 농산물의 감소를 가져왔다. 경제적 약자들은 기아에 빠지게되어 채무자가 되었다. 더욱이 문제가 된 것은 부자들은 경제적 약자들의 어려운 처지를 그들이 부를 증대시킬 수 있는 크다란 기회로 삼았다. 지나치게 높은 이자율을 책정하거나, 곡물의 가격을 조작하였다. 기원전 8-7세기의 상황들은 아마도 대영지를 형성시키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
(3) 예언자들의 사회비판과 신명기 사회개혁을 통한 연대의시과 공동체 정신
예언자들은 상류층의 부정한 부의 축적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94) 사 5, 8에서는 “화 있을진저,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이여” (참조 미 2, 2).95) 이 고발의 말씀 상류층, 즉 대토지 소유자를 향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영지를 소유하고 -아마도 채무 노예를 부려서 - 그 땅에 소작을 부린다. 반면 대다수의 경제적 약자들은 소작농이나 일용노동자의 신분으로 전락한다.
사법의 차원에서 부패와 이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의 보도를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사회의 이러한 변화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격자와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더 크게 하고있다. 크다란 사회적 차이를 들어낸다.
요시아 왕 이전 시대에서부터 그의 사후의 시대에까지 이스라엘 사회는 암 하아레쯔의 정치적 영향력은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하다 (왕하 21, 24; 23, 30). 이러한 사실로부터 요시아 왕이 암 하아레쯔의 이익에 상응하는 정책을 줄곧 폈을 것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예를들어 암 하아레쯔를 위하여 반앗시리아 정책을 진지하게 펼쳤을 것이다. 이것은 민족적 이유에서도 물론이요 경제적 이유에서도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백성들은 앗시아에 받쳐야하는 더 많은 조공과 조세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외교정책은 사실 군사력이 동반될 때, 상상할 수 있으며 실현 가능한 것이다. 암 하아레쯔들 가운데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남자들을 군대로 징집하는 일은 민족적 연대감과 공동체 정신 없이는 별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종교개혁, 특히 예배의 중앙 통일화가 사회적 연결, 민족적 연대와 공동체 정신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신명기의 종교개혁은 정신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명기의 개혁이 정신개혁(=종교개혁)만을 추구했다면, 민족적 연대감과 공동체 정신을 형성이라는 광범위한 목표는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기원전 8세기 하반세기부터 남왕국 유다에 있었던 사회적 차이는 간단히 무시될 수 있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브네 얌(Yavne Yam)에서 출토된 오스트라콘96)에서는 당시의 유다의 사회적 상황이 매우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렘 22, 13ff.에서는 요시와 왕의 통치와 비교하여 요야킴의 통치를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요시아 왕시절에 사회개혁이 있었다는 내적 증거로 볼 수 있다. 요시아 왕은 법과 정의를 행하였으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법을 세워주었다.
렘 34, 8ff.에서는 시드기야 왕은 위기 상황에서 신명기의 사회적 법 (신 15, 12ff.)을 실현에 옮겼음을 보여준다. 예루살렘이 포위당하여 주민들이 극도의 위기에 처하며, 공포가 극에 달했을 때, 시드기야 왕은 전 백성과 하나가 되어 계약을 맺고 히브리인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위기와 공포에 휩싸이게 되자 시드기야 왕과 사람들은 율법을 향하게 되고, 이로인해 사회적 연대와 민족적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아마도 여기에서는 민족적 동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므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민족의 하나됨을 생각하게 되어 부채로 인해 노예가 된 동족들에게 자유를 주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개혁이 신명기 개혁운동 시대에 문헌적으로 증거하고 있지는 않으나, 이러한 사회적 개혁을 통한 민족적 연대와 공동체정신이 있었다는 점을 전제해야 한다. 어째든 신명기 역사서의 경향적 역사서술에 근거하여 신명기 사회개혁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신명기 사회개혁의 역사성은 도시화의 현상과 약자 보호법에 나타난 사회적 연대의식와 공동체 정신에서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VI. 도시화의 현상과 약자 보호법을 통한 사회적 연대의식와 공동체 정신
예루살렘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에서 왕조시대 후기에 예루살렘이 대단히 확장되었음을 밝혀 준다. 기원전 8세기의 한 세기 동안 예루살렘의 거주지역은 거의 두 배로 불어났다. 계속하여 기원전 7세기 동안에도 예루살렘의 주거 지역이 팽창하였다.
도시의 팽창의 원인을 살펴보고, 이와 함께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나타난 도시의 하층민인 나그네(םיꙞꕂ)의 보호와 권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북왕국이나 혹은 농촌으로부터 온 나그네의 문제는 히스키야 시대 이래로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다. 따라서 떠돌이들의 권리를 주장한 몇 몇 법률 문헌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출 20, 10=신 5, 14; 출 22, 10; 23, 9). 이러한 경향은 법률 문헌들뿐만 아니라, 산문적 본문들 속에도 나타난다 (창 12, 10; 26, 1ff.).
(1). 북왕국의 멸망과 대량의 난민발생
북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 (732-724)는 앗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이집트와 관계를 맺고 (왕하 17, 4) 앗시리아에게 바치는 조공을 중단했다. 기원전 724년에 살만에셀 5 세 (726-722)은 공격을 해왔다. 앗시리아 군은 사마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이스라엘 땅을 점령한 뒤 사마리아를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앗시리아에서는 살만에셀이 죽고 사르곤 2세 (722-705)가 왕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기원전 722/21년에 마침내 사마리아는 함락되었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남은 땅마저 앗시리아의 영토에 편입되어 사마리아 속주가 되었다. 왕하 17, 6에서 말하고 있듯이 수천 명의 시민들 (주로 상류계층)은 메소포타미아와 메대로 이주당했다. 그리고 다른 지역, 바벨로니아, 바벨론 성, 바벨로니아의 성읍인 구다, 북부 시리아의 하맛 등에서 온 이방인 상류 계급들이 사마리아 속주에 거주하게 되었다.
사르곤 2세는 그의 왕위 계승에 이의가 제기되었고, 기원전 720년까지 앗시리아와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이 소요를 틈타 하맛을 중심으로 반 앗시리아 1 차 동맹이 맺어졌다. 기원전 720년이 되어서 비로소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평정했다. 북부의 주민들 중 일부는 이방인의 땅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하여, 또 보복이 두려워 남왕국 유다로 도망했을 것이다.
기원전 8세기의 한 세기 동안 대도시의 거주 지역이 확장되었다. 기원전 8세기 말엽부터 예루살렘의 남동 언덕 지역 - 성전의 남쪽지역, 기드론 골짜기와 중앙 골짜기 사이의 언덕 지역에 주거하기 시작했다. 한 세기 동안 예루살렘의 거주지역은 거의 두 배로 불어났다.97) 예루살렘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에서 왕조시대 후기에 예루살렘이 크게 확장되었음을 밝혀 준다. 이에 대한 성서의 문헌적 증거는 대하 30장 25-26절에 보여 준다.
(2) 이농현상과 도시화 과정
북왕국의 멸망으로 인하여 대량의 난민이 발생하여 도시들이 급격히 팽창한 이후에도 유다의 도시들은 계속하여 팽창해갔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히스키야 시대에 한번 변경된 이래98)로 남왕국 유다의 멸망 때 (기원전 587년)까지 3차례의 성벽의 파괴를 확인할 수 있다. 유다 왕 요시아 (기원전 639-609)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 확장하였다. 아마도 그의 통치 기간에 기원전 8세기부터 거주하기 시작한 남서 언덕이 성안으로 포함되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서쪽언덕 거주에 대한 성서적 보도는 왕하 22, 14 (참조 습 1, 11)에서 언급하고 있다.99) 남서 언덕 지역이 기원전 8-7세기 동안 새롭게 주거 지역으로 확대된 것은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들을 통해 확실하게 입증되었다.100)
예루살렘의 주거 면적이 거의 삼배로 확장되었다. 다윗 시대 이래로 예루살렘은 거의 10배로 확장되었다.101)
여기에서 제기되는 중요한 문제점은 어떤 이유에서 이루어 졌는가 하는 점이다. 도시 확장의 이유를 기원전 8세기에는 북왕국의 난민의 대량 유입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 이후 7세기에는 농촌의 소 자유 농민들의 이농현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들의 농토를 잃어버리고, 대도시에서 생계를 유지할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이주해 왔다. 이들은 아마도 일용노동자나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 갔을 것이다.
나그네의 문제는 히스키야 시대 이래로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다. 따라서 법의 보호밖에 놓인 이들, 나그네를 지켜 주어야 한다는 신학적인 주장은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의 필연성과 관련되었다.
(3) 이스라엘 왕조시대의 나그네의 지위
나그네 (רꕂ 게르/םיꙞꕂ 게림)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살아가는 자로 혈연과 지연으로 인해 주어지는 보호나 특권을 받지 못한다. 대개 이스라엘의 시민들이 가질 수 있는 4가지의 권리는 결혼을 할 수 있는 권리, 제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군대에 참여 할 수 있는 권리,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권리이다.102) 나그네의 지위와 특권은 오직 지역민의 우호적 태도 (Gastfreundschaft)에 달려있다. 나그네는 가족을 가질 수 있으며, 용병의 신분으로 이스라엘의 군대에도 속할 수가 있었다.
다윗은 나그네들 중에 석공들을 모아 성전을 지을 돌을 다듬게 했다 (대상 22, 2). 이들은 아마도 비이스라엘의 가나안 원주민들 일 것이다. 솔로몬도 이스라엘 내의 나그네들을 조사했다. 이들의 수는 모두 십 오만 삼천 육 백 명이었으며, 그 중에서 칠만 명을 짐꾼으로 징용하고 팔만 명은 석공으로 일을 시켰다 (대하 2, 17f.). 나그네로서의 족장들은 가축이나 종들을 소유할 수 있으며, 자신의 집도 소유했다 (창 19, 9).
(4) 나그네의 보호와 권리
1. 이스라엘의 유목시대를 전제하는 족장사에서는 ‘손대접’을 매우 높은 도덕적 가치로 여기고 있다.
구약성서에도 모범적인 손대접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아래에서 천막을 치고 살았다. 어느 날 날이 뜨거운 정오에 나그네 세분 (=천사들)이 지나갔다. 아브라함은 뜨거운 해를 피해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쉬어 갈 것을 청하였다. 아브라함은 손님들에게 물을 주어 발을 씻게하고,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고,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고, 엉긴 젖과 우유와 함께 극진히 대접했다. 이렇게 극진히 대접하는 자에게 세 천사는 이 가정의 간절한 소망인 후손을 보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축원하고 떠나간다 (창 18, 1-16). 그 후에 사라는 임신하고 아들을 낳았다 (창 21, 1-7).
2. 다른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이용하여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취하거나 여성들을 성적으로 농락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야웨의 종교의 하나님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도움을 주기도 하며, 위기에서 구출하기도 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불순한 기후로 인하여 기아의 문제가 발생했던 경우가 종종 보도된다. 창 12, 10-20에서는 가나안 온 땅에 기근이 들어 아브라함은 가족들과 함께 이웃 나라 이집트로 가서 그 곳에서 떠돌이로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을 보도하고 있다. 그는 이집트에 가까이 갔을 때,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에게 이제부터는 그녀는 그의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하라고 제안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생각에 그녀는 미인이고, 그래서 그녀로 인해 죽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나그네들은 이방인의 땅에서 자신의 아내나 딸을 지킬 수 없는 법의 보호 밖에 놓여 있다. 아브라함의 행동은 지극히 초라하며, 어쩌면 비열해 보이기조차 하는데, 이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작은 사람들의 행동 양식이다. 이들이 불의한 자들을 대항하여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은 이처럼 초라한 자의 삶을 선택하는 길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여성 신학자들은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동을 아내를 팔아 자신의 생명을 연명하며, 때로는 호사하기까지 하는 비열한 행위로 보기도 하였다. 마침내 이집트사람들이 사라의 미모를 보고, 곧장 바로에게 고하자 그녀는 궁중으로 이끌리어 가게되었다. 바로는 이로 인하여 아브라함을 후사하고 사라를 취하려 하였다. 사라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이제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불의한 현장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웨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셨다 (참조 창 26장).
3. 구약성서 내의 각종 법률집에서는 나그네의 보호와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사회는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를 포함함)와 나그네에게 추수의 여분을 이들의 몫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제도는 고대에서부터 후대의 미쉬나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자를 돌보기 위한 사회복지적 법률제도였다.103) 이를 위해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104) :
“들의 가장자리" (האָ)”105)
“떨어진 이삭" (טꙐꗞ)”106)
"잊어버린 것" (חכשׁ)107)
"살펴따지 말 것" (תוֹלꗝ꘢)108)
"떨어진 과일" (טꙠ)109)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 (רꙵ꘤ꗫ)110)
4.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고아(םוֹתꖷ)와 과부(הꗺꗪꗡאַ)를 사회적 약자로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자로 간주하였다. 여기에 신명기에서는 나그네 (רꕂ, 복수 םיꙞꕂ)111)와 레위인을 추가하고 있다.
출애굽기 22, 21-24에서는 “너는 이방인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니라.112) 너는 과부와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네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고 규정한다. 이 법률은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 (personae miserabiles)의 보호를 목적한다. 나그네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 사는 자로서 자신 소유의 토지가 없고 법적 대변인도 없다. “손접대의 관습법”이 자기에게 베풀어져서 압제받지 않게 되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압제란 경제적 착취를 의미하는 것 같다. 나그네 보호의 또 다른 이유는 이스라엘의 자의식에 호소한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노예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의 백성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이웃을 부자유하게 해서는 않된다.113) 고아와 과부 역시 보호를 받아야 한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하나님의 법적 도움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갈의 곤궁을 들어 시고 그녀를 구출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이 이집트에 있을 때, 그들의 고통이 매우 큼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호소를 들어 주셨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이스라엘의 법률 속에서도 반영되어 사회적 약자들이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호소에 응답하신다. 그래서 재판에 있어서 나그네에게 불이익을 주지 말 것을 규정한다.114)
제 5 장 제 2 성전 공동체 시대의 평화 운동
1. 국제 정세의 변화
바벨론 제국의 상황이 극도로 불안정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소망은 고조되었다. 느부갓네살이 죽자 바벨론의 세력은 급속도로 기울었다. 국내 정세가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7년 동안에 왕이 3번이나 바뀌었다. 더욱이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인 나보나두스 (기원전 556-539)는 종교적 갈등마져 겪게되어 국정이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115)
기원전 550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등장하여 먼저 메대제국을 점령하고 몇 차례의 신속한 군사 자전을 통해 거대한 제국을 창건했다. 기원전 539년 티그리스 강변 오피스에서 교전이 벌어졌고 그 결과 바벨론 군대의 참패로 끝났다. 페르시아의 장군 고브리스는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바벨론을 점령하였고 도망하던 나보니두스는 포로가 되었으며, 고레스는 개가를 부르며 바벨론에 입성했다. 기원전 538년에는 이집트의 국경에까지 서아시아 전역을 그의 수중에 넣었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한 때부터 기원전 333년 알렉산드 대왕이 두로를 멸망시킬 때까지 두 세기 넘게 팔레스타인 및 유다의 유대인 공동체는 페르시아의 통치하에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유대인들은 물론 바벨론에 의해 억압당하는 모든 약소민족들에게 해방에 대한 소망을 용솟음치게 했다. 이스라엘의 한 예언자는 기진 맥진한 자기 동포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선언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참회가 야웨께 받아들여졌으며, 야웨께서는 한량없는 자비하심으로 자기의 양떼들을 고향으로 인도하리라는 하나님의 결심을 선포한다 (사 40, 1-11). 거듭거듭 “새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언했다 (사 42, 9; 43, 19; 48, 3, 6-8).
2. 고레스의 칙령과 유다의 해방
고레스는 바벨론에서 그의 재위 제 1 년 (기원전 538년)에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공동체 및 제의의 재건을 명하는 포고령을 공포하였다. 그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팔레스타인으로 귀환을 허용하고 거기에서 그들의 조상 대대로의 제의를 복구하는 일을 돕고 이 업무를 위해 그들의 왕족 출신을 파견하였다.
고레스 칙령은 에스라서 1장 2-4절과 6장 3-5절에서 두 번 보도한다. 고레스의 칙령은 성전 재건과 그 경비를 왕실 금고에서 지출할 것을 규정하며, 느부갓네살이 빼앗아 간 성전의 기물들도 제자리에 가져다 놓도록 지시하고 있다. 또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유태인들에게 귀환을 허용하며, 바벨론에 남아 있는 유태인들에게 기부금을 촉구하고 있다.116)
또 에스라 1, 7 - 11에서는 느부갓네살이 빼앗아 간 성전 기물들이 돌아온 것도 보도하면서, 이 업무가 “유다의 군주” - 즉 왕족의 한 사람인 세시바사르에게 맡겨졌다고 보도한다. 유다 지역에 총독을 파견하므로 이제는 사마리아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된 총독 관구를 형성하였다.
고레스의 칙령은 식민지의 문화와 종교적 자율성을 존중하는 페르시아의 식민지 통치 방식과 당시 이집트와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완충지대로서의 유다의 위치에 기인한다.117)
3. 바벨론 포로의 제 1 차 귀환
성경 지료에서는 페르시아 통치초기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포로들에 관한 정보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귀환자들의 명단은 에스라 2장과 느헤미야 7장에 나온다. 이 명단에 따르면 세시바살의 영도하에 약 5만명이 귀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헤이스 밀러는 이 명단과 관련된 관리를 세시바살이 아니라 후대의 스룹바벨, 여호수아, 느혜미야 등으로 보고 있다.118) 바벨론에서 최초로 귀환한 사람은 소수일 가능성이 크다. 기원전 520년경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학개서와 스가랴서는 성전 재건을 완성하기 위한 열심히 귀환자들이 대거 몰려들었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미 바벨론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잡고 살고 있었기에 안정된 삶의 기반을 버려 두고 본국으로 귀환하기를 원치 않았다 (Ant XI 1, 3; 8). 바벨론에서 잘 살게 된 유대이들 중에는 성전 재건 사업에 재정적으로 도와 주려했으나 (스 1, 4, 6), 직접 참여하기를 원치 않았다. 존 브리이트는 기원전 522경의 유다의 총 인구를 2만을 넘지 않는 것으로 추정했다.119)
4. 유대 공동체의 재건과 정치적 상황
고레스는 바벨론식의 이름을 가진 세시바사르를 총독으로 임명했다.120) 세시바살은 계속적으로 예루살렘의 성전 기물을 반환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페르시아에 의해 임명된 유다 속주의 총독이라는 지위로 고레스 칙령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 시작되었으나(스 5, 14-16)121) 세시바살은 그 임무를 완성하지 못했다. 아마 그는 죽을 때까지 총독으로 있다가 스룹바벨이 그의 직위를 계승했다. 정규적인 제의가 재개되었을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시작이지만 충성스러운 유대인들에게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계속될 수 있었다.
고레스 후원 하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그의 치세에 현실화되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전 회복에 대한 해석은 재건 공사가 세시바살의 주도 아래 시작되었으나, 중단되었다. 아마도 고레스가 530년 동부지역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의 아들 캄비세스가 왕이 되면서 가까스로 시작된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되었을 것이다. 성전 공사를 중단하게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은 그 사업을 계속할 만한 재원도 정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의 일부를 학개서에서 전하고 있다. 귀환 후에 팔레스타인의 유대 공동체는 극히 미약한 규모였고, 대부분 폐허로 남아 있다. 새로 돌아온 자들은 여러 해에 걸쳐 역경과 궁핍과 불안정에 시달렸다. 그들은 낯선 땅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했다. 그것 자체가 힘겨운 과제였다. 돌아온 자들 중에는 필요한 양식과 의복도 없이 빈곤으로 허덕였다 (학 1, 6). 게다가 가뭄이 들어(학 1, 10f.) 극심한 흉작에 시달려야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민과 걱정에 휩싸여 있었다 (학 1, 9). 인구도 극히 적었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페허였으며 많은 사람들의 주거는 불쌍할 정도로 형편이 없었다.122)
페르시아가 약속한 원조도 실질적이지 못했다. 페르시아의 지원 중단은 아마도 정치적 이유에 있는 것 같다. 고레스 2세 (559-530) 때에는 아직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정복하지 못했다. 유다는 이집트와 접하는 국경 지역으로 페르시아의 측면에서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고레스는 칙령을 내려 유다를 관대하게 대해주어 국경을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했다.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제 1 차 유대인 귀환 (538)이 있었으며, 이어 총독 스룹바벨이 성전 재건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레스가 죽고 캄비세스 (530-522)가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으며, 그는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이제는 페르시아 편에서는 더 이상 유다를 지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캄비세스가 죽어면서 페르시아 제국은 혼란에 빠지며서 이스라엘 예언자들에게는 흠분과 희망이 생겨나게 되었다. 제 1 차 귀환 이후 18년이 지닌 후에, 총독 스룹바벨 치하에서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는 예루살렘에서 예언활동을 시작했다.123) 세계적 사건의 변화에 도움을 받아 이들은 정력과 신앙으로 백성들을 분발시켜 성전 재건 공사를 재개하는 데 성공하였다. 예언자 학개는 야웨가 다시 시온을 자기 통치의 거처로 선택하였다고 확신하고, 야웨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며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서는 성전의 완공을 가장 긴급한 일로 보았다. 성전은 야웨의 왕적 통치의 자리가 되어야 했기에 성전의 왕공은 가장 긴박한 일이었다. 이로부터 대략 4년 후, 다리오 제 육 년 (기원전 515년 참조 스 6, 15))에 성전은 완공되어 엄숙히 봉헌되었다 (520-515).
이로서 이스라엘은 다시금 종교 중심지를 갖게 되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장래이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 독립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전은 이스라엘의 삶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종교 공동체였다. 이 종교 공동체에서는 제사장적 요소가 이전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중요하였다. 예루살렘의 가장 높은 제사장, 대제사장이 온 이스라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사독 가문이 새로운 성전에서 제사장단을 이루고 이스라엘의 수장으로서 새롭고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124)
5. 유대 공동체의 정신적 위기
바벨론 제국의 싱황이 불안정해 지면서 포로로 끌려갔던 자들에게는 시온에 대한 간절한 향수 (시 137)와 함께 귀환에 대한 희망이 생겨났다.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야웨의 심판과 그들의 궁극적인 해방을 기다렸다 (사 13, 1 - 14, 23). 거룩한 도성의 재건 (사 63, 7 - 64, 12)을 위한 출애굽와 같은 야웨의 개입을 간절히 바랐다. 많은 사람들이 다윗국가의 재건을 꿈꾸며, 이전에 다윗에게 대려준 약속들은 다윗언약으로 신학화시켰다.125) 에스겔 40-48장에서는 사제들이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를 웅대히 설계하기도 하였다.126)
제 2 이사야는 거듭거듭 ‘새 일’이 바야흐로 일어날 것을 선언했다 (사 42, 9; 43, 19; 48, 3, 6-8). 이 결정적인 사건에서는 사막에 꽃이 만발하고 물이 넘쳐흐르고 사막을 통과하는 대로가 생겨난다고 보도한다 (사 40, 3-5; 41, 18f.; 42, 16; 49, 9-11; 55, 12; 35). 이 비유를 출애굽 전승에서 이끌어 온다. 바벨론의 포로를 이집트에서의 종살이와 광야의 유랑생활로 비유하고, 다가오는 구원을 새로운 출애굽로 묘사했다 (사 43, 16-21; 48, 20f.; 52, 11f.).127) 이 새로운 출애굽 사건을 야웨의 창조적 구속활동의 절정으로 이해했다 (사 51, 9-11). 이스라엘의 희망은 단순히 옛 질서의 회복에 있지 않고, 야웨의 궁국적인 승리와 그의 세계적인 통치의 확립에 있다 (사 51, 17 - 52, 12). 이를 통하여 이스라엘 세계의 중심이 되며, 세계를 위한 빛이 됨을 희망하였다 (사 42, 6; 49, 6; 51, 4; 60, 1-3 ...).
그러나 현실은 이와는 달랐다. 제 2 이사야의 휘황 찬란한 약속들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초기의 상황은 참으로 ‘작은 일의 날’ (참조 슥 4, 10)의 연속이었다.128) 귀환 후에 팔레스타인의 유대 공동체는 극히 미약한 규모였고, 대부분 폐허로 남아 있다. 새로 돌아온 자들은 여러 해에 걸쳐 역경과 궁핍과 불안정에 시달렸다. 그들은 낯선 땅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했다. 그것 자체가 힘겨운 과제였다. 돌아온 자들 중에는 필요한 양식과 의복도 없이 빈곤으로 허덕였다 (학 1, 6).
주변 국가들, 특히 사마리아의 귀족들은 유다에 대한 자기들의 특권이 제한받게 되자 분개하여 공공연하게 적대적으로 나왔다. 또한 전부터 유다 땅에서 살아 왔던 유대인들도 이주자를을 환영한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유다 땅을 자기들의 소유지로 생각했고 (겔 33, 24), 새로 이주해온 자들이 조상의 소유지를 되찾겠다는 그들의 주장을 순수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돌아온 자들은 자신들을 참 이스라엘이라 자처했고 사마리아 사람들과 그에 남아 했던 자들을 부정한 자들로 취급함으로 긴장이 고조되었다 (참조 스 8, 10).
재건 사업의 초기는 참담할 정도로 실망을 금치 못하게 했고 좌절과 낙심만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재건 사업은 명목만 남고 완전히 실패로 돌아갈 위험성이 존재했다. 의기양양했던 새로운 출애굽와 시온에서 온 세상을 다스릴 야웨의 통치가 확립될 것이라는 휘황 찬란한 청사진은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예언자 학개는 성전 재건을 독려하야 말하기를 야웨께서 모든 나라를 진동시켜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스라엘로 흘러와서 성전에 영광이 충만할 것이라는 희망의 메세지를 전하였다 (학 1, 6-9). 예언자 스가랴는 성전이 완공되면 온 세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무리를 지어 몰려와서 (슥 8, 1-8) 큰 도성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슥 1, 17; 2, 1-5). 성전이 완공된 이 후에도 유대공동체는 여전히 작은 날의 연속이었다.
6. 유대 신앙 공동체의 증대의 신학
포로 전환기와 포로 후기의 이스라엘 사회는 다양한 이익 집단으로 분화되었다. 베버 (M. Weber)이래로 최근까지 많은 학자들이 포로후기 시대의 이스라엘 사회 구조를 규명하려 했다. 그러나 자료의 빈곤은 이 당시의 사회 구조를 정확히 규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망함으로 이스라엘은 독립 국가가 될 수 있다고 희망을 갖게 되었다. 제 2 성전을 중심으로 한 성전 공동체는 새로운 신생 독립국으로서 화려한 이상과 꿈을 꾸었다. 그러나 이들의 꿈과 이상과는 달리 현실은 암담했다. 국제적으로는 약소국으로서의 무수한 한계점을 누출시켰다. 새롭게 출발하는 신생 독립국은 주변 나라들에 비해 허약하였다. 따라서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 미래를 새롭게 개척하여 강한 나라가 되기를 희망하여 다양한 전승 집단에서 다양한 비죤과 희망을 재시하면서 증대의 신학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증대의 신학은 창세기 1장 26-28절과 창 9장 1-7절의 언어적 표현 속에 잘 반영되어져 있다.
먼저 창 1장 26-28절에서 인간 창조 이후의 축복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창 1, 26, 27), 인간 창조 이후에 여러 가지 형태로 인간을 축복하여 주셨다. 그 축복의 내용은 5개의 명령형의 동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 생륙하라 (הרפ), 번성하라 (הבר), 땅에 충만하라 (אלמ), 땅을 정복하라 (שׁבכ), 그리고 동물 세계를 다스려라 (הדר)고 하였다 (26, 28).
먼저 생육하다 (הרפ Qul 혹은 생육케하다 הרפ Hi.), 번성하다 (הבר Qul 혹은 번성케하다 הבר Hi.)라는 두 동사는 이스라엘 혹은 예루살렘의 회복과 시온으로 몰려오는 포로들의 귀향, 즉 포로기 동안 폐허가 되었던 곳에 다시 사람이 살게되며, 또 인구가 늘어날 뿐 아니라, 또 산업도 번성하게 되는 상황과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어 졌다 (렘 3, 14, 16-18; 23, 3; 겔 36장).129) “생육하다”, “번성하다”라는 표현과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땅에 충만하다 (ץראה - תא + אלמ)”라는 표현도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130) “땅을 정복하다” (שׁבכ)이라는 표현을 슈미트 (W. H. Schmidt)는 동물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 이해하고 있다.131) 즉 땅위에 있는 모든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표현하는 הדר동사와 동의어로 이해하였다.132) 땅의 정복을 통해 인간은 땅위에 있는 동물 세계를 다스리게 된다. 이 두 표현의 의미는 인간의 통치 영역이 전세계를 포괄하여 우주적 영역 (동물의 세계)에까지 미침을 말한다. 여기에 인간의 동물 세계에 대한 지배와 통치는 정치적 지배와 통치의 상징적 표현이며, 지배자의 세력이 강력하며, 절대적임을 말해주고 있다.133)
창 9장 1-7절에서는 홍수 이후 노아에게 내려준 축복을 묘사하고 있다. 1절과 7절에서는 ‘생육하라,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으로 단락의 앞과 뒤를 감싸고 있어, 단락 전체의 성격을 규정해 주고 있다. 2-3절에서는 인간의 동물 세계에 대한 지배를 언급하고 있다. 짐승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할 것이다. 내가 이것들을 다 너희 손에 맡긴다. 모든 종류의 동물들은 인간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의 손에 맡긴다고 표현하였다 (2절). 뿐만 아니라, 이들을 먹을거리로 삼을 수 있다고 하였다 (3절). 여기에서 동물을 먹을거리로 삼을 수 있다는 표현은 인간의 동물 세계의 지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한 사례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4-6절에서는 피를 먹지 말며, 피를 흘리지 말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 근거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따라 창조되었음을 말한다. 피를 먹지 말라는 규정은 신 12, 16, 23의 제의 규정에서 온 표현이며, 원래 폭력과 살인을 금지시키려는 노력에서 나온 제의 규정이다. 이 금령은 지배자와 상부 계층에서 자행될 수 있었던 폭력과 살인을 금지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134) 그러나 여기에서 신명기와는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어 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공동체 내부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살인이 아니라, 외부의 적으로부터 가해지는 폭력과 살인을 전제하고 있다. 새롭게 출발되는 공동체는 자신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방어하고자하는 노력을 기울이며, 이를 위해 제의 규정을 방어를 위한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사상은 인간이 신의 대리자로서 세계를 다스리는 지배자임을 말한다.135) 여기에서도 이러한 사상이 자기 방어를 위해 사용되었다. 살인하는 자는 그도 살인을 당해야한다는 사상은 자기 방어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즉 외부의 적이 신생 공동체를 공격하여 폭력과 살인을 자행 할 경우, 그들도 (아마도 하나님에 의해) 동일한 폭력과 살인을 당해야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창 9, 1-7에 담고 있는 축복은 새롭게 출발하는 이스라엘의 공동체는 한편으로 외부로부터 가해질 수 있는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되고 방어되어져야 했고, 또 다른 한편 이를 위해 크고, 강한 나라가되고자 열망했다. 이와 같은 사상은 포로 전환기 혹은 포로 후기의 시대적 여망을 암시한다.
7. 유대 신앙 공동체의 공동체 정신과 평화의 사상
새롭게 출발하는 신생 독립국의 허약성을 피부로 체험하면서 제 2 성전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제의 규정의 정비를 통하여 사회 질서 체제의 확립코자 했다. 동시에 정복과 지배를 통한 국가의 힘을 증대시켜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을 기원하는 증대의 신학을 전개해 나갔다. 이와는 달리 다른 지도자 집단, 아마도 소수의 집단에서는 정복과 지배의 철학을 포기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공동체 정신과 평화 공존의 길을 제시하였다.
이사야서에 담겨져 있는 야웨의 종의 노래에서 이러한 정신을 본받을 수 있다. 야웨의 종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발견한다 :
“... ... 나는 나를 때리는 자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 ...” (사 50, 6)
비폭력 무저항만이 때리는 자와 억압하는 자와 화해하는 길이며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길임을 보여 주고 있다 :
“... ...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 ... ” (사 55, 5)
“그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발견하였고,
뭇 민족에게 빛을 던져 주는 주의 종의 도를 찾았다” (사 49, 6)
그는 결코 정복과 지배를 통하여 뭇 민족의 빛이 되고자 하지 않았고, “옳바름”으로 뭇 민족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약한 자를 도와줌으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평화 공존의 길을 추구하였다 :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를 치거나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사 42, 1-3)
포로기와 포로 후기의 많은 전승 집단들에서는 이방을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사 56, 3-7에서는 새로운 시각으로 국제관계를 바라보고 있다.136)
“이방 사람이라도 야웨께로 온 사람은 ‘야웨께서 나를 당신의 백성과는 구별하신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라” (사 56, 3)
“야웨를 섬기려고 하는 이방 사람들은 야웨의 이름을 사랑하여 야웨의 종이 되어라” (사 56, 6)
특별히 룻기에서 이방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준다. 모압 여인 룻을 통하여 민족의 좁은 한계를 넘어서, 온 인류가 함께 한 가족이 될 수 있는 뜨거운 인간애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포로기와 포로 후기, 특히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이방과의 강한 분리주의와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제 2 성전 공동체 시대의 소수의 지도자들은 정복과 지배 철학의 사슬에서 벗어나 평화 공존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민족의 생존을 다른 나라들과 평화 관계를 유지함으로 확실성을 얻고자 했다. 또, 국제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평화의 형성자로 설정했다.
제 2 성전 공동체 시대의 소수의 지도자들은 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한다. 법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들을 불러왔다. 전통적으로는 율법은 복음과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법은 지배 계급의 이익을 대변해 주고,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구실로만 이해해왔다. 사 10, 1에서도 이러한 법과 법 제정을 규탄하였다.
“불의한 법을 공포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제정하는 자들아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경고해왔다. 특별히 포로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경고는 더욱 호소력 있게 들려왔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국가 멸망이라는 참담한 파멸이 초래하게 된 원인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반성을 통해 구두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문헌으로 작성하게 되었고, 또 단편적으로 전승되었던 것들을 수집하여 종합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작업은 포로 후기로 접어들면서 실제적으로 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법을 준수한다는 것은 구원의 상징으로 이해되어졌다. 법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담겨져 있고, 동시에 이스라엘에게 내려준 구원의 선물로 이해되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문자화되고 또 집대성되면서, 법에 대한 가치를 한층 더 강조시켜왔다.
사 2, 2-4 (= 미 4, 1-4) 에서는 영원한 평화에 대한 비죤을 제시하고 있다 :
“마지막 때에
야웨의 성전이 시온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작은 산들 위어 뛰어나나니,
모든 민족들이 물밀듯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야웨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야웨께서 우리에게 그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우리가 그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야웨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그가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 2, 2-4)
이 시에서는 율법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 법은 그의 입장에서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된 법을 말한다. 이 시에서는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이며,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 이 법은 모든 나라들과 백성들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 법은 궁극적으로 민족들 사이의 분쟁과 나라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 법은 전쟁 무기를 평화의 도구, 즉 산업 용구로 전환시키며, 전쟁을 위한 군사 시설과 제도를 철폐시킬 것을 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에서는 이 법을 배우기 위해 모든 민족들이 물밀듯이 몰려오는 비죤을 제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제 2 성전 공동체 시대의 소수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존립과 미래를 새롭게 바라보고 있다. 국제 무대에 평화를 정착시킴으로, 나라의 안녕을 지키고자 했으며, 더 나아가 약소국으로서 세계 무대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았다. 그 길은 정복과 지배의 철학에서 전환하여, 함께 살아가는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길이라 보았다.
8. 메시야 사상에 나타난 증대의 신학
앞서 6장과 7장에서 살펴본 대립적인 사상의 경향은 메시야 사상에도 나타난다. 성전 공사가 지연될 때,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는 역동적으로 활동했다. 성전 재건의 독려와 함께 (혹은 독려를 위하여) 예언자 학개는 2장 20-23절에서 스룹바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내(=야웨)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여러 왕국들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여러 나라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자를 엎드러뜨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의 동료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
그 날에 내(=야웨)가 너(=스룹바벨)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
이 예언은 유다 국가가 재건되어야 한다는 희망을 전제하고 있다. 오래지 않아 제국의 세력이 멸망되고 유다 국가가 재건될 때에 스룹바벨을 통치자로 삼을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메시야 사상은 유다 국가의 정치적 회복과 관련되는 현실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대망이다.
스가랴도 메시야적 어투로 스룹바벨을 찬양했다. 그는 순, 곧 다윗 가문의 기다리던 후손 (참조 렘 23, 5f.)이 바야흐로 나타나서 (슥3, 8)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다름 아닌 스룹바벨이라고 하였다 (슥 6, 9-15).
학개와 스가랴는 야웨가 시온과 다윗 왕조를 선택하며, 스룹바벨을 그들을 다스릴 대망의 다윗의 후손으로 보았다. 이르한 메시야 운동을 통하여 성전 재건을 독려하였다. 성전이 완공된 후에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지도자들, 특히 제사장들은 그들의 소망이 성취된 것으로 간주하 제의 규정을 복구하는데 주력하였고, 또한 백성들이 이 규정들을 준수하도록 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특히 민간에서는 다윗 가문의 메시야가 나와 독립된 국가를 다시 새울 것이라는 메시야적 대망이 계속적으로 확산되었다 (참조 사 11, 1-9은 사 9, 1-7). 역사적으로는 스룹바벨이라는 다윗 가문의 유다 총독을 전제하였다.137) 다윗 가문에서 나오게 될 메시야에 대한 희망은 포로 후기에 상당히 펴져있었다. 존 브라이트의 추론에 따르면, 페르시야는 유다에 퍼져있는 메시야 소동에 관한 소문을 듣고, 스룹바벨을 제거했다고 한다.138)
어쨌든 다윗 왕권은 재건되지 않았고, 약속의 시대는 밝아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다인들 사이에서 메시야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어 졌다. 신약 시대에도 유다 사람들은 메시야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스룹바벨이 정치적 무대에서 소멸되기까지의 이스라엘의 메시야 대망 사상은 당시의 대부분의 다른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증대의 신학의 또 다른 표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스룹바벨 시대 이후에는 희망의 내용과 형태는 변화되었다. 다윗 왕권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고, 메시야에 의해 실현될 새 시대, 즉 사회의 형태에 대한 희망을 가져왔다. 이사야 65장 25절과 11장 6-8절에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정복과 지배가 없는 완전한 평화 공존의 사회를 희망하였다.
9. 새로운 메시아 사상에 나타난 연대의식과 평화의 사상139)
이사야 65장 17-25절에서는 새 창조, 즉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창조의 사상을 담고있다. 여기서는 포로 후기에 새롭게 출발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새 공동체의 이상과 지표가 담겨져 있다. 새 창조에 의해 탄생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새 공동체는 무엇보다도 평화의 공동체를 지향하고자 하였다 :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사 65, 25).
여기에서 추구하고 있는 “평화”는 “정의”, 특히 “경제적 정의”의 실현을 통하여 실현되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 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사 65, 21-22).
이러한 관점은 제 3 이사야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포로 후기에 양분화된 사회 질서 - 소수의 부유한 지배 계급과 다수의 가난한, 피지배 계층 - 속에서 배태되었다. 이와 같은 양분화된 사회 질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악화되어졌다. 따라서 “정의의 실현을 통해 평화를 이룩하려는 평화 운동”은 신약 시대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고, 그 사상은 종말론적으로, 또 묵시문학적으로 더욱 심화되어졌다. 이와 같이 종말론적으로 발전된 평화의 사상의 한 예를 이사야 65장 25절에서 볼 수 있다 :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다” (사 65, 25).
이 우화적 표현에서는 ‘정복자 - 피정복자’라는 관계가 사라지며, ‘지배자 - 피지배자’라는 관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평화 공존의 새로운 관계를 선포하고 있다. 정복과 지배가 없는 사회 (Ohne Obrigkeit)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140)
이사야 65장 25절 보다 약간 확대된 표현으로, 동일한 우화적 표현을 이사야 11장 6 - 8절에도 담고 있다.141)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으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 11, 6-8)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참조 7장), 이 동물 우화는 메시야 대망 사상을 담고 있는 사 11, 1-5과는 달리 스룹바벨 이후에 새롭게 발전된 메시야 대망 사상이다.142)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없는 완전한 평화 공존의 세계를 선포하고 있다. 정복과 지배가 없는 평화 공존의 공동체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스가랴 9장 9 - 10절에서도 평화의 메시야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사야에서는 정복과 지배가 없는 완전한 평화 공존의 시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면, 여기에서는 피정복자이며 피지배자 출신의 메시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중요한 점은 한글 번역의 문제점을 교정하는 일이다. 표준 개역 번역, 공동 번역, 새번역 모두 본문을 잘못 번역하고 있다. 정확한 번역은 아래와 같다 :
“... ....
너의 왕이 네게도 오신다
그는 공의로으며, 구원을 받은 자이며, 가난한 자이다
... ... ” (슥 9, 9)
이사야에서는 정복과 지배의 포기를 통해 평화를 이룩코자 한다면 여기에서 무력과 전쟁의 포기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코자 하였다 (10절). 물리적 힘에 의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나 온 인류의 평화의 실현에 강한 회의를 나타내고 있다. 이사야에서는 고난 받은 자를 야웨의 종으로 이방을 구원하는 빛으로 이해하였고, 스가랴에서는 가난한 자를 평화의 메시야로 보았으며, 기독교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를 인류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포로 후기에는 다양한 전승 집단들이 공존하였다. 그 가운데 한 (소수의) 전승 집단에서는 공동체 정신과 평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평화 운동은 궁극에 신약 시대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집단에서는 정복과 지배의 포기를 통해 평화 공존을 주장하였으며, 폭력과 전쟁의 포기를 통해 평화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정복과 지배가 없는 사회에 대한 희망과 이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포로 전환기와 포로 후기의 초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품었던 원대한 꿈과 이상은 성전 공동체 내에서 실제 실현되지 않았다. 시간이 계속됨에 따라, 대다수의 민중들은 사회적 불의를 더 많이 체험하게 되었다. 이 평화 운동의 또 다른 한 특징은 물리적 힘에 의해 새 질서의 실현에 대해 강한 회의를 표명하고 있다. 진정한 구원의 빛은 고난의 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보여주는 바, 자신의 희생과 남을 위한 섬김 속에 있음을 천명한다. 따라서 정복과 지배의 포기는 불가피했다.
제 6 장 요약과 결론
1.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유목적 혹은 반유목적인 생활 환경에서 살았다. 유목민들은 목초지를 찾아 유랑하므로 지역에 묶여있지 않다. 그 결과 지역적인 행정 조직이 없으며, 혈연-인적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유목 사회에서는 개인적인 일과 공동체의 일의 차이가 없다. 모두가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정치적인 일이 도덕적인 일이다. 국가적 규범이라는 자리에 형제애로 표현되어지는 공동체 정신이 있다.
유목 사회의 정치 조직 형태는 중앙 정부가 없으며, 의사 결정에 있어서 관련된 자들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개체 사회에서도 지도적인 인물들이 있다. 개인적인 성품이나 능력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주어진 사회적 인정이다.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어떤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의무만을 진다. 귀족들은 형제애의 이행 속에서 다른 모든 이에게 헌신해야 한다. 전쟁시에 피를 아껴서는 안되며, 평화시에 선행을 아껴서는 안된다. 공동체내의 다른 사람들에게 물질적 부족이 있을 경우 자신의 물질을 베풀어 균등하게 한다. 그의 중요한 의무는 공동체의 화합을 유지해야 한다.
유목사회의 생산의 주된 목적은 가족 구성원의 생활용품을 조달하는 데 있다. 자신의 필요와 친척간의 도움을 위해 물품을 생산하는 생계 경제 체제이다. 자신의 가족의 필요한 것을 조달하는 것 외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친척들에 대한 경제적 연대의 의무가 성립된다. 가문 내에서는 생산의 차이가 자동적으로 소비의 차이를 가져오지 않게 되며, 동시에 가족 내의 상대적 균등 (평등)을 이루게 한다.
이스라엘은 다양한 기원의 이질적 집단들이 모여 민족으로 발전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면서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를 접하게 되었고,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열등한 자들이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민족으로 통합되었다.
이 시대에 사회 내의 각 개별 요소들을 통합시켜 주는 기능을 하는 요소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가나안 땅의 정착 과정에서 보여준 군사적 연합
(2) 가나안적 요소와 非가나안적 요소와의 대립 구조에서 非가나안적 요소에 속하는 공동 운명 (혹은 처지)의 요소이다.
(3) 동일거주 지역에 거주한다는 “공동의 삶의 자리”
(4) 전쟁시 이웃 가문이나 지파가 혈연적 의무감에서 도움을 주는 행위
(5) 산악 지역에 살 경우 보다 많은 농경지를 얻기 위해 공동의 개간 사업에 참여한다.
족장들의 하나님은 유랑하는 무리들의 하나님으로 중요 특성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이다. 신의 속성과 신앙고백은 그 시대의 사회의 조직과 삶의 자리의 반영물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의 종교형태는 사회의 조직 양식의 본질적 요소로 통합적 기능을 수행한다.
가나안의 종교는 특정 성소와 결부되어 그 성소가 놓인 사회 조직, 그 시대의 세계관과 관계된다. 가나안의 신들은 사회구조의 변화와 함께 풍요의 신에서 전투적인 신으로 군주의 신으로 발전되었다. 가나안 성소의 하나님은 가나안의 계급적 사회의 가치 체계를 옹호해 주는 신으로 이해된다.
그와 달리 족장시대의 유목민의 사회는 계보론적으로 얽혀져 있는 혈연 공동체이다. 계보론 속에 나타난 혈연관계는 각 개체들은 평등하다. 즉, 상하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선조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탈 계급적 공동체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배 공동체에서 구성원 모두를 한 가족처럼 대할 것을 다짐하는 형제애를 보존하며, 한 공동체로 체험하며, 공동체 정신과 연대의식을 다짐하는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정착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많은 가나안의 지역 성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동시에 그 곳 주민들의 제의 의식도 적응해 들어갔다. 이러한 적응과 확대는 많은 위험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유목종교의 본질적 요소인 탈계급성, 형제애, 한 공동체성은 동행 사상 이면으로 사라지며, 신의 가호는 체제의 유지로 오인될 소지를 남겼다.
2. 이스라엘 사회는 기원전 12-11세기에 사사 시대에서 영토를 가진 왕조국가로 전환하였고, 다윗과 솔로몬은 국가의 영토를 제국에 비할 만큼 확대시켰다. 이로 인하여 다양한 민족들이 제국 속에 편입되는 복잡한 정치구조를 이루었으며, 행정조직도 체계화되었다. 이와 함께 이스라엘 사회의 내부구조 또한 다계층적으로 변화되었다. 제국으로의 발전은 국가를 유화적 개방적으로 만들어, 고대동양의 높은 수준의 예술과 문학이 이스라엘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권”의 등장함으로 이 새로운 제도를 정당화 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다윗 상승사화와 왕위 계승사화와 같은 역사가 나왔으며, 여기에 담긴 신학적 특색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윗과 솔로몬이 왕이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Gottes Designation)의 결과로 보았다. 둘째, 궁중의 사학자 (관리)들은 다윗과 솔로몬이 왕이된 것은 백성들이 원하는 바임을 나타내고자 했다. 셋째, 사울과 다윗을 비교할 때, 모든 점에서 다윗은 사울보다 훌륭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정복을 통해 거대한 제국을 이룩했다. 이로 인하여 제국내에 매우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이 함께 병존해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요소를 하나로 통합시켜야 했다. 통합을 위해 다윗과 솔로몬은 강력한 전제적 왕권을 형성하였고, 이를 위해 궁중신학이 등장했다.
다양성 속의 통일성의 과제는 전제적 왕권 강화의 방향으로만 흐르게 되었다. 개개인, 특히 지배 계층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만 흐르게 됨으로써 사회적 책임성이라는 과제는 약화되었다. 시소는 한쪽으로 기울게 되어 왕조시대 초기 이스라엘사회의 사회적 통합은 실패로 끝났다. 궁극에는 남북의 분열과 약소국으로의 축소로 이스라엘 역사의 제 일 막은 끝났다.
3. 신명기 개혁 운동은 반앗시리아 저항운동 (혹은 독립운동)에서 출발한다. 사마리아가 함락된 이후 기원전 701년 예루살렘이 포위되기까지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계속하여 반앗시리아 동맹 운동이 일어났다.
유다는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위해 앗시리아의 침공을 방어해야 해다. 먼저 친앗시리아 정책에 충실했던 궁중의 내각을 개혁하여, 반앗시리아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내각으로 바꾸었다. 앗시라아의 침공을 대비하여 국민들을 동원하여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그는 군사 체계를 재정비하고 무기를 개선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며, 수도 방위를 위해 용병을 모집했다. 그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보수하고, 또 유다의 많은 도시들에 새로운 성벽을 건립케 했다. 성벽을 보수하고 수로를 건설하여 물공급을 확보했다. 외교적 측면에서도 적절한 준비를 하였다.
신명기 종교개혁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간략히 요약한다면, 그 내용을 아래와 같이 4요소로 요약할 수 있다. 예배의 정화, 예배처소의 중앙통일화, 유일신앙의 확립과 예배개혁이다.
신명기 종교개혁은 종교적 영역에 속하지만, 정치적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신명기 종교개혁에서는 앗시리아의 종교상징들, 태양, 달, 별들을 위한 신상들과 제단이 제거되었으며, 또 이들 신들에게 바쳐졌던 제사나 종교관습도 중지되었으며, 앗시리아 종교를 위해 임명된 사제들도 폐위되었다.
신명기 종교개혁에서 모든 예배처소를 예루살렘으로 통일시켰다. 지방에서 활동하는 사제들을 모두 예루살렘에 오게하여 활동하게 했다. 예배의 중앙 통일화는 정치적 - 종교적 동기에서 기인하였다. 즉, 예루살렘의 사제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지방사제와 동등한 권한만 가질 때 가능하다. 기득권의 포기는 비단 사제계급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각계 각층에서 일어났으며, 이 때에 비로소 국민전체가 하나가 되는 연대감을 가졌다.
예배처소의 통일화는 오직 야웨 한 분만을 섬기기 위함이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야웨를 민족의 신으로 예배했다. 한 예배처소에서 한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직 야웨만의 신앙고백이 필요했다. 민족 전체의 연대의식을 고양하기 위하여,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필연적이었다. 오직 야웨에 대한 고백은 앗시리아 신에 대한 거부이며, 동시에 한 민족 공동체를 지향하는 신앙고백이다.
신명기 예배 개혁의 핵심 부분으로 야웨 제사를 야웨께서 선택한 한 성소에 통일시켜야 한다고 규정한다. 예배의 장소를 야웨께서 선택하신 곳에 통일시켜 공동체성과 연대성을 얻고자 했던 개혁 운동에서이다. 예배의 중앙 통일화는 정치적으로 소속성과 동일성을 가져다주었다. 예배의 단일화를 통해 새 국가를 세우고, 이를 통해 민족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을 때 지방 성소의 포기는 필연적이다. 이 길만이 전 민족이 국가 성소를 향해 순례의 길에 오르게 되면, 이것은 곧 국가적인 일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신명기 예배 개혁의 두 번째 핵심 부분은 예배 참석자로 “전체 이스라엘”로 확대된다. 종래의 축제의 칼렌더에서 제외되었던 시회적 약자도 포함한다. 레위인들, 떠돌이, 고아와 과부. 예배를 통하여 모두가 개개의 가족 계층, 신분이 민족으로 통합된다. 예배나 축제는 항상 사회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민족 축제나 민족 전체가 참가하는 예배에서는 사회적 계층간의 제한은 철페 된다.
신명기 예배의 또 다른 특징은 기쁨의 공유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기쁘게 누리고 무엇보다도 다함께 누리는 것은 신명기 관심사의 전면에 서 있다.
기원전 8-7세기 동안에 이스라엘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국가 형성과 함께 영지가 형성되었으며, 조세 체계도 확립되었다. 앗시리아의 지배하에서는 백성들은 조세와 부역외에 조공의 부담도 함께 져야했다. 조세, 부역 및 군사적 의무는 특히 경제적 약자들에게 채무자가 되게했고, 소자유 농민들이 땅과 집을 잃기도 했다.
예언자들은 상류층의 부정한 부의 축적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요시아 왕은 암 하아레쯔의 이익에 상응하는 반앗시리아 정책을 펴면서 사회개혁도 시행하였다. 신명기의 사회개혁은 도시화의 현상과 약자 보호법에도 나타난다. 이러한 사회 개혁을 통해 사회적 연대의식와 공동체 정신을 함양시켜나갔다.
4.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한 때부터 기원전 333년 알렉산드 대왕이 두로를 멸망시킬 때까지 두 세기 넘게 유대인 공동체는 페르시아의 통치하에 있었다. 페르시아의 등장은 바벨론에 의해 억압당하는 모든 약소민족들에게 해방에 대한 소망을 용솟음치게 했다.
이사야의 휘황 찬란한 약속들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초기의 상황은 참으로 ‘작은 일의 날’ (참조 슥 4, 10)의 연속이었다. 귀환 후에 팔레스타인의 유대 공동체는 극히 미약한 규모였다. 새로 돌아온 자들은 여러 해에 걸쳐 역경과 궁핍과 불안정에 시달렸다. 그들은 낯선 땅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했다. 그것 자체가 힘겨운 과제였다.
재건 사업의 초기는 참담할 정도로 실망을 금치 못하게 했고 좌절과 낙심만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다리오 제 육 년 (기원전 515년 참조 스 6, 15)에 성전은 완공되어 엄숙히 봉헌되었다 (520-515). 이스라엘은 정치적 독립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전은 이스라엘의 삶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종교 공동체였다. 성전이 완공된 이 후에도 유대공동체는 여전히 작은 날의 연속이었다.
포로 전환기와 포로 후기의 이스라엘 사회는 다양한 이익 집단으로 분화되었다. 이스라엘은 신생 독립국으로서 화려한 이상과 꿈을 꾸었다. 그러나 이들의 꿈과 이상과는 달리 현실은 암담했다. 국제적으로는 약소국으로서의 무수한 한계점을 누출시켰다. 새롭게 출발하는 신생 독립국은 주변 나라들에 비해 허약하였다. 따라서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 미래를 새롭게 개척하여 강한 나라가 되기를 희망하여 다양한 전승 집단에서 다양한 비죤과 희망을 재시하면서 증대의 신학을 펼쳐나갔다.
이와는 달리 소수의 집단에서는 정복과 지배의 철학을 포기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공동체 정신과 평화 공존의 길을 제시하였다. 비폭력 무저항만이 때리는 자와 억압하는 자와 화해하는 길이며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길임을 보여 주고 있다. 약한 자를 도와줌으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평화 공존의 길을 추구한다. 민족의 생존을 다른 나라들과 평화 관계를 유지함으로 확실성을 얻고자 했다. 또, 국제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평화의 형성자로 설정했다.
이 평화 운동은 궁극에 신약 시대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집단에서는 정복과 지배의 포기를 통해 평화 공존을 주장하였다. 정복과 지배가 없는 사회에 대한 희망과 이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평화 운동은 물리적 힘에 의해 새 질서의 실현에 대해 강한 회의를 표명하고 있다. 진정한 구원의 빛은 고난의 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보여주는 바, 자신의 희생과 남을 위한 섬김 속에 있음을 천명한다.
5.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혈연과 지연의 전통적 가치관이 느슨해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가 경제 수단과 기능의 망으로 얽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사회에 도덕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는 역사적 전통과 종교가 크다란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의 한 전통인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회적 연대의식과 공동체 정신”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도덕적 기반을 위한 중요한 토대를 제공해 주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는 각 시대의 상황의 차이로 인하여 문제의 양상들이 다르며, 또한 요구되어진 사회적 연대의식과 공동체 정신도 다양한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살았던 고대 유목적 사회는 사회적 통합을 강제할 만한 중앙정부와 같은 조직이 없었다. 따라서 사회적 연대의식과 공동체 정신은 개인과 개별가정의 도덕과 인도주의적인 정신에 기초한다.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의 자기 희생적 기득권 포기가 사회적 연대와 통합의 중요한 토대였다. 유목사회의 중요한 특징은 중앙정부의 부재와 이로 인한 정치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의 사회보다 더 민주적이며, 구성원들 사이의 사회적 차이가 더 적은 사회였다. 따라서 벨하우젠은 이러한 사회를 ‘지배 없는 사회’라 불렀다.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에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속의 땅에 정착함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문제와 시름했다. 먼저 그들은 사방의 적과 대치해야했고 경제적, 문화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적응해야 했다. 이러한 문제와 시름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공동의 전쟁과 공동의 삶의 자리와 공동의 개간 사업과 공동의 운명을 경험하게 됨으로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사회에 왕권제도가 등장함으로 사회적 분화가 발생하게되며, 이와 함께 새로운 제도를 정당화시켜했고, 다른 한편 정복으로 인하여 다민족으로 구성된 복합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다른 시대에 보여주었던 지도자들의 기득권 포기를 통한 사회적 통합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왕권을 강화시킴으로서 물리적 통합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제국은 분열되고 약소국으로 다시금 전락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위한 정신적 유산을 남겼던 사회적 운동은 신명기 개혁운동이다. 외부로부터의 적을 방어하기 위해 민족 전체가 한 공동체로 연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대의 중요한 토대는 지도자들의 기득권 포기에서 출발한다. 정치권에서는 민중적 집단인 암 하 아레츠 집단을 적극 포용하였으며, 종교적 집단에서는 중앙 사제들의 기득권 포기로 전대미문의 예배의 중앙 통일화를 이루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약자 보호를 위한 사회 갸혁이 단행되었다.
제 2 성전 공동체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에 비하여 초라한 약소 식민 국가였다. 그럼에도 꿈과 이상을 지닌 시대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집단에서 다양한 꿈과 이상을 전개했다. 오늘 우리들의 눈길을 끄는 한 위대한 꿈과 이상을 볼 수 있다.143) 이들은 전정 소수의 무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국제무대에서 초라한 약소 식민 국가의 존립과 역할을 평화의 전파자로 자리매김 하였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참모습을 평화의 사자로 설정하고, 그들은 먼저 지배와 정복의 철학을 포기해야함을 주장하고, 나아가 국제적 연대와 공동체정신은 자기희생과 남에 대한 섬김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정신은 고난의 종의 모습에서 볼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에서 볼 수 있다.
흐물어져가는 전통과 도덕적 토대를 다시 세우는 일은 사회구조와 조직의 변화만으로는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지도자들의 기득권 포기와 섬김을 주장한 종교에서 진정한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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