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는 글은 스마트폰 📸 와이드(WIDE) 화면으로 볼 수 있게 조정하였습니다. 고난을 감사하라. 골로새서 2장 6-7절 / 김병삼 목사 ➤골로새서 2장 6-7절 “6. 그러므로 너희가 [주]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받아들였듯이 그렇게 그분 안에서 걷되 7. 그분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세워지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 안에 굳게 서서 그 안에서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라.”(KJV)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아빠는 불 끄고 글씨 쓸 수 있어요?” 아버지는 자신만만하게 대답을 합니다. “물론이지” 그랬더니 아들이 하는 말, “그럼, 불 끄고 여기 성적표에 사인 좀 해주세요.” 여러분에게 어떤 자녀가 있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오늘도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은 분명히 신앙인의 특권입니다. 며칠 전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를 읽으면서 본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영화배우 해리슨 포드가 영화제에서 상을 받을 때 소감을 발표한 내용이 실렸습니다. “오늘은 참 소중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소감을 두 가지로 준비했습니다. 짧은 소감과 긴 소감, 하지만, 오늘은 짧은 소감으로 해야겠군요.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는 것 같군요 조금 긴 소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주 멋진, 사람들에게 아주 많은 박수를 받은 수상 소감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주고 싶은 도전이 있습니다. 지금도, 아니 바로 교회 오기 전 여러분은 삶에서 감사할 일을 찾으셨습니까? 불평할 일을 만나셨습니까? 오늘의 주제는 아주 명확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하셨던 감사 설교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감사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바로 오늘의 말씀 때문입니다. ➤“너희가 [주]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받아들였듯이” 이 감사의 고백을 한센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에게 설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말씀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감동을 주는 삶 손양원 목사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그리고 “순교자”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이 있습니다. ➤“3. 내가 모든 재산을 바쳐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내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느니라.” 기독교 역사에서 핍박과 고난의 시절에 순교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킨다는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죽으면 천국에 가 하나님을 만날 소망으로 신앙을 지키다 죽는 것은 자신에게뿐 아니라 믿음의 가문을 세우는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박해 시대에 우리의 신앙은 순교를 통해서 증명되는 것보다 박해 가운데서 얼마나 신앙의 절개를 잘 지키고 신앙인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본질이 드러납니다.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증명됩니다. 사실 신앙을 지키며 죽는 것보다 신앙을 지키며 사는 것이 더욱 위대한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들려 드리는 이야기를 잘 들어보세요. 믿음이 있는 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소년들의 용기를 훈련하는 독특한 방법을 쓴답니다. 어린 소년들로 하여금 숲 속에서 야생동물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년들의 담력을 키웁니다. 그 밤을 지내는 동안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날이 밝아오면서 소년은 그의 아버지가 가까운 나무 뒤에서 화살을 당긴 채 자신을 지키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아들 몰래 밤을 새우고 함께 있었던 아버지. 이 소년이 두려운 시간을 보냈을지 모르지만 절대 위험한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아도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 때문에 드러나는 내 삶의 전적인 영역을 통해 신앙이 증명됩니다. 그런 면에서 손양원 목사님에게 붙어 있는 “사랑”과 “순교”라는 말은 잘 조화된 신앙의 본보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이념의 문제로 갈등을 겪던 시절, 사랑하는 아들 동인과 동신이 23세와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공산당에 의해 순교를 당합니다. 그 당시 손양원 목사님은 아들의 순교를 감사하므로 받아들이는 9가지 이유를 장례식장에서 낭송하므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을 위대한 신앙의 본보기로 만든 것은 자식과 자신이 겪었던 순교의 면류관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자로 받아들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손양원 목사님을 통해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삶에서 감사란 무엇인지를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며 신앙의 도전을 받아 보려고 합니다. 다니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다니엘 1장 8-9절의 말씀입니다. ➤“8. ¶ 그러나 다니엘은 왕이 정해 준 음식이나 왕이 마신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겠다고 마음속에 작정하였으므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내시들의 통치자에게 요청하니 9. 이제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인도하사 내시들의 통치자에게 호의와 친절한 사랑을 받게 하시니라.” 성경에는 아주 극명하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제멋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르심으로 소명자가 되는 것과 처음부터 삶을 정결하게 지키며 쓰임 받는 사람이 되는 경우입니다. 어떤 이들은 드라마처럼 일어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처음부터 거룩하고 깨끗하게 준비되는 사역자가 아닌가 합니다. 다니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작정하였으므로” 자신을 지키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서도 신앙의 절개를 잃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방 땅에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세상을 향해 자신의 의지를 알렸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자신을 주목하는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습니까? 하지만,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다니엘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그렇습니다. 손종일 장로와 김은주 집사 사이에서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는 장남으로 태어난 목사님은 부모님을 따라 새벽 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며 신앙을 키워왔습니다. 그런 목사님에게 1910년 한일 합방과 더불어 일제가 요구하는 신사 참배 강요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민족주의자로서의 애국의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었지요. 1916년 궁성요배(宮城遙拜)를 강요하던 학교에서 신앙의 사람 손양원은 제1계명을 범할 수 없다 하여 퇴학을 당하게 되었고 맹호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어렵게 1919년 졸업을 하게 됩니다. 손 목사가 애양원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평양 신학교 2학년 때, 애양원 교회에 사경회 강사로 초청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애양원 교회는 외부 사람이 예배를 인도할 때나 방문했을 때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장갑을 끼고 들어가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런데 손 목사는 교회에 들어가면서 흰 가운을 입는 것조차 거절하고 그렇게 했던 사람들에게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호랑이를 잡으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온 사람이 호랑이를 무서워해서야 어찌 호랑이를 잡겠느냐. 이곳에서 일한다는 사람들이 병을 무서워해서야 어떻게 일을 하겠느냐!" 이때 애양원 성도들은 손 목사의 설교에도 은혜를 받았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에 더 큰 감동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후에 그를 애양원 교회로 청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민되는 것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어디까지 하나님께 맡기며, 어디까지 내가 조심해야 하는가? 과연 손양원 목사님이 한센병 환자들과 목회를 하면서 조심하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인가? 아니면 위생적인 측면에서 갖춰야 할 것을 갖춰야 했을까? 아마도 이런 일은 우리의 삶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경우일 것입니다. 저도 군목 시절에 대전통합병원에 근무하며 동일한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병원은 전국에 간염에 걸린 군인들이 다 들어오는 병원입니다. 예배시간마다 간염환자들이 반을 차지하였고 예배를 마치고 나면 환자들과 함께 악수를 합니다. 제가 악수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데 이 환자들이 우리 애들을 쓰다듬고 가는 것은 왠지 꺼림칙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목회를 하다 보니 간염환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만지고 하지 않으면 목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담대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간염에 걸렸으면 이미 걸렸을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결국, 사역하면서 그들과 같이 해야 할 때 하나님께 맡기며 의지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 당시 한센병에 걸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면 손양원 목사님이 행동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목적을 정하면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사명자의 모습입니다. 사명자로서의 뜻을 정하면 그 가는 길이 곧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합니다. 다니엘은 목적을 정하고 나서 그 기준에 의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명자란? 하나님 앞에서 기준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의 뜻이 세워지자 신사를 참배한다는 것이 부당한 것으로 알았기에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많은 고초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의 강한 힘이 보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일본이 망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일본 사람들에게 손양원 목사님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마태복음 5장 11-12절을 보세요. “11. 나로 인해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거짓으로 온갖 종류의 악한 것을 말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보상이 크니라.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대언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제 손양원 목사님에게 핍박의 시절이 찾아옵니다. 1940년 9월 25일,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여수 경찰서에 끌려가 신사참배 거부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3년 동안 옥고를 치릅니다. 1943년 5월 17일, 만기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주 멋진 말을 남겼는데요. 당시 담당 검사는 손 목사에게 “덴꼬(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결국, 해방이 될 때까지 여러 형무소를 전전하면 6년을 넘게 옥고를 치르며 옥중에서 붙여진 별명이 “옥중 성자”이었으며 간수들까지 전도하여 사람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사역자들에게는 바로 그들이 선 곳이 사역지가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했으며 요셉은 노예로 있을 때에도, 옥중에 갇혀 있을 때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역자에게는 지금 서 있는 그곳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요 사명을 감당하는 사역지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을 이야기하는데 애양원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9명의 한센병 환자로 시작했지만, 손 목사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36세의 젊은 나이로 그곳에 부임했을 때에는 1천 명 이상을 수용하는 대규모 한센병자 수용소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손양원 목사님은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환우들과 함께 먹고 자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병이 나은 다음에도 갈 곳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병으로 손과 발이 없어지고 얼굴 형체가 일그러져 알아볼 수 없는 사람들을 아무도 사람으로 대접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간다 해도 사람들이 모이는 공공장소에는 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고 철저하게 외면한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준 분이 바로 손양원 목사님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일그러진 그들의 영혼과 육체를 감싸며 찬송과 감사와 기도의 옷을 새롭게 입혀 주었습니다. 애양원에는 모두 17호실로 되어 있었는데 1-10호까지는 비교적 건강한 사람이, 11-13호실에는 경한 환자들이 14호실부터는 중환자들이 있어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흉악한 모습으로 병마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늘 진물과 핏자국 땀들이 엉겨 붙어 있어서 도저히 그냥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님은 늘 그곳에 들어가 환자들을 안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자 사랑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당시 손양원 목사님은 한 여자 환자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었는데, 손 목사님은 그 환자를 늘 찾아가서 기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랑으로 녹여 내야 합니다." 이것이 손 목사님이 사역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많은 핍박과 고통 속에서 자신도 돌보는 것이 어려웠던 때 성도들을 향해 권면 했던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7-8절의 말씀입니다. ➤“7. 오직 모든 것의 끝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너희끼리 뜨거운 사랑을 품으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으리라.” 죄를 이기고, 허물을 이기고, 미움을 이기는 것은 상대방의 잘못된 것을 들춰내거나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덮어주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목회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열심히”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사람의 허물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고 용납할 이유가 보이기 시작할 때 크리스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에게서 그런 모습, 열심히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었던 모습이 드러납니다. 1948년 10월 19일이었습니다. 당시 제주 폭동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 중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남로당 계열의 군인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반란군이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을 놓고 역사가들이 어떤 평가를 하던 어떤 해석을 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여수와 순천은 졸지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반동으로 여겼던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대학살을 자행하게 됩니다. 당시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순천 사범학교와 순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신앙과 민족정신으로 무장한 둘은 학교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공산주의의 잘못을 폭로하였기에 당연히 체포되어 인민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두 형제는 서로 대신하여 죽기를 자원하였으나 폭도들은 잔인하게 두 형제를 한꺼번에 총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이 애양원에 전해지게 되었고 어느 정도 폭동이 진압된 10월 27일이 되어서야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지금의 애양원 동산에 묻히게 됩니다. 여수, 순천 사건이 진정되고 나서 동인과 동신 형제를 죽인 자 중에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을 찾아가 반란이 진압되고 나서 정세는 바뀌었고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 “나의 죽은 아들은 절대 자기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습니다.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아들을 삼았고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였고 전도사로 키워내는 사랑의 본을 보였습니다. 손 목사의 삶은 순교자로서의 최후를 맞이하므로 변함없이 살다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6․25전쟁은 곧 애양원에도 공산당들이 밀려들어 오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피난하라고 하는 권유에도 계속 교회에 남아 ‘잘 죽자!’라는 내용의 특별집회를 열었습니다. 손 목사는 천여 명의 환자들을 두고 피난 갈 수 없어, 재직들만을 보내고는 혼자 남아 교회를 지키다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 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였습니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이었습니다. 감사하다면 감사한 겁니다. 제가 언어학자가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감사라는 영어의 “thank”와 생각한다는 단어의 “think”는 많은 연관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는 “감사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특권이다!”라는 말과 더불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생을 깊이 묵상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손양원 목사님의 삶을 통해 “감사하다고 말했다면 정말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삶을 잠깐 살펴본 것처럼 여러분이 그런 상황에 있었다면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의 감사는 힘이 있습니다. 그분이 감사하다면 감사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6-7절 “6. 그러므로 너희가 [주]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받아들였듯이 그렇게 그분 안에서 걷되 7. 그분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세워지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 안에 굳게 서서 그 안에서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제가 오늘 택한 본문은 손양원 목사님이 [받은 은혜 감사하자]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택한 말씀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추수감사절 설교하면서 들의 양식과 풍성한 열매를 보니 2천 년 전 모든 인간의 영생 생명의 처음 익은 열매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생각나 감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아주 적절한 신앙 고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한다!” 혹시 어떤 분에게 상처가 될지 모르지만, 농담으로 생각하고 들어주세요.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여러분의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의 어떤 목사님이 하루는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는 좌석에 혼자 앉아서 깊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옆에서 “쿵”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덩치가 엄청나게 큰 흑인 여자가 올망졸망한 어린아이를 다섯 명이나 데리고 저기의 옆자리에 비집고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목사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지금 제 옆에 앉은 이 뚱뚱한 흑인 여자가 저의 아내가 아닌 것에 대해 저는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솔직하게 말해 봅시다. 여러분이 느끼는 감사 대부분이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들을 보며 가지게 되는 감정일 때가 잦지 않으신가요?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보며 느끼는 상대적 감정입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이 느끼는 감사의 고백은 누구와의 비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에게 어떤 분이시고 그분을 통해 지금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에 따라 나오는 고백이 감사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환경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소원과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때문에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아니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한 가지 간증을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우리 교회에서는 사모님들을 위한 영성훈련 가졌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후원으로 어려운 교회 사모님 혹은 자신이 기도하고 사랑하고 영성훈련에 참여시키고 싶었던 분을 초청해서 행사를 했습니다. 많은 돈이 들어가지만, 가장 큰 영적인 투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사를 다 마치고 롯데 호텔에서 목사님을 초청해서 함께 만찬을 하며 축복하는 자리였는데, 함께 간증을 하며 많은 은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다 이야기할 수 없지만, 한 가지만 나누겠습니다. 참석한 분 중에 의료선교사로 6년을 섬기고 안식년을 지키기 위해 나와 계시던 사모님이 있었습니다. 남미에 이민을 해서 만난 남편은 의대를 나왔습니다. 좀 더 선진국인 스페인에서 어렵게 공부를 하고 파라과이로 돌아와서 학교의 학장이 되었을 때, 이제는 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남편이 모든 것을 버리고 선교를 떠난 것입니다. 스페인에 있을 때, 남편을 위해 아침과 저녁으로 남의 집 일을 하며, 바나나로 허기를 채우며 견뎠는데 선교지에서 고생한다는 것이 정말로 견딜 수 없었답니다. 그래서 중국에 있는 6년 동안 남편을 참 힘들게 했노라고, 그런데 영성훈련에 들어오기 전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정장”을 가져오라는 전화를 받고는, 왜냐하면 이 사모님에게는 정장이 없었답니다. 중국에 사는 동안 늘 바지만 입고, 그렇게 마음이 상해서 어떻게 하면 영성훈련에 가지 않을까 고민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정장 한 벌이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밉고 남편에 대한 원망도 생겼답니다. 그런데 남편 선교사님의 꿈은 더 어려운 나라에 가서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마지막 복음을 전하는 것이랍니다. 이제 중국보다 더 어려운 곳으로 가야 하지요. 영성훈련에 가지 않으려는 자신에게 딸이 “엄마 가! 내가 옷 사줄게.” 그 말이 자신을 더욱 아프게 했답니다. 딸이 돈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영성훈련을 진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남편과 동일한 꿈을 가지게 하셨고, 그렇게 멋지게 사역하는 남편에게 때로 걸림돌이 되었던 자신을 회개하게 되었고, 너무나 큰 감사가 넘치게 되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편 선교사님이 꽃을 입에 물고 나와 아내에게 전해주며 포옹하는 장면은 정말 감격스런 모습이었습니다. 감사는 조건과 환경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한 감사의 고백을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상상을 합니다. 제가 만일 한센병 환자들과 목회를 했다면 감사절에 어떤 설교를 할 수 있었을까요?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격리되어 살아야 하는 사람들, 병이 나아도 흉측한 몰골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던 사람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늘 이 시간 딸이 백혈병으로 아파 고생하는데 “감사하세요!” 시험에 떨어진, 생각보다 점수가 안 나온 수험생에게 “감사하세요!” 버림받고 아파하는 사람에게 “감사하세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 “감사하세요!”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감사의 고백과 찬양이 꼭 우리가 생각하는 조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언젠가 목사님들과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헌금하고 감사를 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을 보면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고백이 감동을 주는 것은 마땅한 감사가 아니라 믿음이 아니고는 드릴 수 없는 감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말씀이 그렇게 증거 하는 것 같습니다. ➤골로새서 2장 6-7절 “6. 그러므로 너희가 [주]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받아들였듯이 그렇게 그분 안에서 걷되 7. 그분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세워지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 안에 굳게 서서 그 안에서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라.”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지 않고 감사하지 못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면 열심히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감사’, ‘사랑’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믿음이 진실한지 아닌지를 증명합니다. 한센병 환자들을 향해 “감사하라고” 설교할 수 있는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고 우리를 자녀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부자이면 그 아들이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는 것처럼 세상의 조건과는 달리 우리는 이미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손 목사님은 한센병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더구나 한센병을 앓으신 여러분이라도 이러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 것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은가요? ➤시편 27편 10절에 보면 “10.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버릴 때에 {창조주}께서는 나를 들어 올리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믿음 위에 굳게 서 보세요. 도저히 감사할 수 없었던 일이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 당신의 삶 속에 믿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당신이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을 넘어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자에게 절대 감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실수가 없음을 믿으십니까?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최선을 다하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로마서 8장26-28절의 말씀입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 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장 34-39절 말씀입니다.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시요, 참으로 다시 일어나신 분도 그리스도시니 그분께서는 바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 중보 하시느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으리요?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이것은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토록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겨졌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아니라.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해 정복자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하리라.” 오늘 나의 삶의 최고의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 어떤 조건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람을 끊을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감사할 수 있으십니까? 감사는 좋은 것과 좋은 때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 왔을 때 감사가 진정 감사합니다. 감사가 계속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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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