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17
뜻밖에 내 번호가 불리는 순간 나는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 되었다.
H-17
얼핏 무슨 훈련병 번호나 수인번호처럼 보인다. 혹은 무슨 고상한 소장품의 일련번호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다. 사실, 그 어떤 번호보다도 추억이 깊이 서려 있는 번호가 바로 이 H-17이다.
1982년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이다. 그 해에 경주에서 경상북도 도민체전이 열렸는데 내가 다니던 경주고등학교가 그 도민체전에서 카드섹션 팀으로 할당되었다. 카드 섹션은 문자 그대로 카드를 들고 글자나 문양을 만드는 메스게임을 말한다. 당시 우리 학년은 2학년 전체가 600여 명이었다. 그 인원 전부를 새로 건립된 황성공원 공설 운동장 스탠드에 배치하고 카드섹션 팀을 만든 것이다. 바로 그 카드 섹션에서 내게 주어진 일련번호가 바로 H-17이었던 것이다.
이 카드 섹션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메스게임이었다. 당시에는 일부 인문계 고등학교의 3학년들을 제외하고는 경주 시내 전 고등학교 학생들이 모두 동원되어 도민체전에서 무슨 역할이든 맡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경주만이 아니고 대부분 지방에서 행사동원에 가장 만만했던 것이 고등학생들이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선발고사로 학교에 들어간 경주고등학교 학생들이 비교적 머리가 똑똑하다고 해서 집중도가 가장 높은 카드 섹션이 맡겨졌다는 후문이었다.
문제는 이 카드 섹션 담당 선생님이 학교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이동호선생님이라는 것이었다. 이 선생님은 우리 학교의 대선배님이신 동시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카를 가진 분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숱한 전설과 신화를 남기고 계신 분이셨다. 전설이란 고등학교 시절 울산에서 경주로 전학와서 당시 경주고등학교 주먹왕이던 공모선생님을 단방에 눕히고 '가방모찌'를 시켰다는 것이었다. 신화는 그런 다음 고등학생 신분으로 경주와 울산은 물론 포항까지 휘어잡았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그렇게 사고를 치고 놀았음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미술감각과 실력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고 졸업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대단한 내력의 선생님이시고 보니 미술 수업시간에도 엄청난 포스를 발휘하셨다. 선생님은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곧 법이었다. 그리고 그 법에 조금이라도 위배되는 제자들은 인정사정 두지 않고 매로 다스렸다. 그 분의 매는 굉장한 마력을 가지고 있어서 허벅지에 딱 한 방 두들기면 누구든 그 자리에서 푹 꼬꾸라지고 말았다. 실제로 나는 친구들이 너무나 어이 없이 픽픽 나가떨어지는 것이 신기해서 일부러 다 해가지고 간 미술 숙제를 내지 않고 선생님의 매를 몸소 맞아본 적이 있었다. 그 결과 나도 모르게 풀썩 주저 앉은 것에 스스로 놀라서 그 다음부터 미술 숙제라면 하늘이 무너져도 기한 내에 해가는 착실한 학생이 되어야 했다.
그 정도였던 선생님이 담당하셨으니 카드 섹션은 처음부터 가관이었다. 우리에게는 모두 열 두 장의 두텁고 넓은 마분지 카드가 주어졌다. 대충 두께 2밀리, 가로 40센티 세로 60센티 정도 되는 카드였다. 거기에 모두 열 두 장의 서로 다른 빛깔 고운 베들이 주어졌다. 그 베들을 종이 카드에 붙이는 작업이 정규 미술시간에 진행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카드의 중상단 부분에 가로 2센티 폭 15센티 정도 되는 구멍들을 일사분란하게 뚫었다. 그 구멍은 행사시 선생님의 수신호를 보기 위한 구멍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내녀석들은 좀 덜 떨어지니 구석이 있는 놈들이었다. 종이에 베를 붙이고 구멍을 뚫는 그 단순한 작업을 하지 못해서 교실에서부터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일일이 자신에게 할당된 종이에 베를 붙였는 지를 심사하고는 제대로 작업을 하지 못한 친구들은 사정없이 몽둥이로 갈겼다. 교실에서는 미술시간 마다 돌아가면서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졌다. 물론 선생님의 매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여 반마다 딱 한 시간씩의 작업을 통해 카드 섹션에 쓸 색색의 대형카드들이 일사천리로 완성되었다. 카드에는 빛깔 별로 일련 번호가 쪼르르 붙여졌다. 우리는 1번부터 12번까지 번호가 붙여진 멋진 카드들을 들고 다음 작업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 카드는 마치 전쟁에 나가는 어린 병사들이 제각각 무기를 준비하는 모습과도 비슷하게 보였다.
그로부터 약 2주 동안, 황성공원 공설운동장 스탠드는 우리들의 카드섹션 연습장이 되었다. 아니, 전체 친구들 에서 매타작을 당하는 처절한 훈련소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겠다. 선생님은 우리를 스탠드에 적절히 배치하고 선생님이 구상하는 글자들을 카드섹션으로 만들어 나갔다. 우리가 만들었던 열두 가지의 카드는 멀리서 보면 대형 글자에 나타나는 하나하나의 모자이크인 셈이었다. 우리가 카드섹션을 선보일 시간은 도민체전의 입장식과 공식행사 동안이었다. 각 시나 군의 대표들이 입장할 때마다 참석 도시의 글자들을 스탠드에서 만들거나 국민의례의 순서를 글자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글자마다 각 도시나 국민의례순서에 따라 제각각의 고유번호가 배정되었다. 예를 들어서 '경주시'라는 단어는 1번이고 '애국가 제창'은 20번 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그 단어별 고유번호에 맞추어서 스탠드에 앉은 우리는 일일이 그 번호가 자신에게 부여하는 카드를 뽑아서 들었다. 그렇게 각각 뽑아 오린 카드를 멀리서 보면 거대한 글자로 형상화 되는 것이다. 물론 스탠드에 앉아서 카드를 빼드는 우리는 그게 무슨 글자인지도 모른 채 무조선 숫자에 부여된 자신의 카드를 쳐들 뿐이었다. 이런 글자들이 만들어지기 위해 600명의 친구들이 세로로 A-K까지 12열, 가로로 1-50까지 50행 이렇게 열을 지어 맞추어 앉았다. 그때 줄을 맞추면서 자기가 바로 행사가 끝나는 순간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훈련번호' 된 것이다. 여기서 내가 앉았던 자리가 가로로 H열 세로로 17행이었던 것이다. 바로 'H-17'이었다.
말이 쉬워서 글자마다 주어진 번호에 맞추어 카드를 뽑아내는 것이지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카드가 한 두 장도 아니고 모두 빛깔이 다른 열두 장의 카드였다. 자칫 잘못 빼들었다가는 글자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 꼴이었다. 세로로 A-K까지 12열 가로로 1-50까지 50행의 학생들 600명이 제 위치에서 정확하게 카드를 빼들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글씨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사불란함은 다른 어떤 방법도 필요 없이 딱 한 가지 도구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 600명 동기들은 훈련 내내 절실히 깨달아야 했다. 바로 선생님의 그 무시무시한 몽둥이였다.
"이너무 시끼들 바라.....내가 호명하는 번호, 눈깔 티나오도록 힘차게 달려 내려온다. D-15, E-20, G-21....!"
한 번씩 카드를 빼들때마다 열 서너명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가 선생님의 몽둥이 찜찔 아래 맥없이 푹푹 나뒹굴었다. 선생님의 몽둥이는 무슨 밀대 자루나 야구 베트같은 겁나는 것도 아니었다. 두께 1.5센티, 폭 5센티, 길이 70센티 정도의 보기에는 그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각목이었을 뿐이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그 만큼 많은 학생들을 두들겨 왔을 정도면 매가 수십 개는 부러졌을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약해보이는 몽둥이었다. 그런데 그게 선생님 손아귀에서는 쇠파이프 보다 더 단단해지는 것은 불가사의였다. 역시 '마력'이 있은 것임에 틀림없다. 선생님은 힘들여서 매를 드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슬쩍 들어올렸다가 슬쩍 내려놓는 듯했다. 허벅지에 떨어지는 소리도 특별히 크게 들리지 않았다. 그저 '빡'하는 소리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딱 한 방씩에 역시 쭉쭉 나가 뻗었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카드를 들 때마다 공포에 벌벌 떨었다. 자칫 방심해서 엉뚱한 카드를 빼기만 하면 허벅지에 '뻐얼건' 피멍이 감기는 것을 각오해야 했던 것이다. 이건 그 흔해빠진 커닝도 안되는 것이었다. 글자에 따라 바로 옆줄이나 바로 앞줄이 자신과 다른 빛깔의 카드를 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숫자마다 자신에게 부여된 카드를 정신 차리고 뽑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다.
"바라 바라...이런 달쪼 같은 넘들....H-16, H-18.....!"
이런 때가 가장 간이 오그라드는 순간이었다. 나를 쏙 빼고 바로 내 양 옆의 친구들이 동시에 불려나가면 나는 혹시라도 선생님이 내 번호를 잘 못 부른게 아닐까 하고 숨을 죽여야 했다. 어떤 때는 G-17과 I-17, 다시 말해서 내 앞과 뒤의 친구들이 불려나가서 꼬꾸라지기도 했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있어도 사람인 이상 한 두 번씩은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다. 아마도 그 카드섹션 연습장에서 과반수의 친구들이 한 번씩은 불려나가 매찜찔을 당했을 것이다. 특히 재수가 없어 글자의 변화가 심한 곳에 앉았거나 좀 덜 떨어진 친구들은 매일 나가서 뻗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그런데 역시 이동호 선생님은 대단한 분이셨다. 연습을 시작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틀리는 학생들이 현격히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일주일 만에 글자 한 번에 한 두 명의 친구들이 나가서 뻗는 정도의 성과를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동호 선생님이 대단하신 것은 다른 일로 인해 또 한 번 증명되었다. 당시 우리의 교련 담당선생님이 조남영 선생님이셨다. 이분 역시 체구는 작지만 월남전에서 야전 분대장까지 지낸 경험이 있는 상당한 포스를 지닌 선생님이셨다. 무엇보다도 교련선생님이 아닌가? 그런데 이동호 선생님이 무슨 일이 있어 황성공원 '훈련'에서 빠지고 조남영 선생님이 '연습'을 지휘하신 날이 있었다. 이날은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평소에 군기가 바짝 들어서 틀리지 않던 친구들이 개나 소나 다 틀리는 것이다. 물론 조남영 선생님도 매를 들고 학생들을 두들겼지만 친구들은 엉덩이만 한 번씩 슬쩍슬쩍 쓰다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또 틀리기를 반복했다. 오죽하면 조선생님 입에서 '이래 가지고 지대로 되겠나?'는 푸념 섞인 말씀이 흘러나오기까지 했다. 우리 역시 갑자기 많은 수의 친구들이 무더기로 틀리는 현상이 영 생뚱맞게 여겨지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런 이상 현상은 이동호 선생님이 다시 지휘를 맡는 즉시 생생하게 돌아왔다. 언제 틀린 일이 있었느냐는 식이었다. 우리는 선생님이 제시하는 일련번호를 보면서 마치 한 몸처럼 움직였다. 선생님이 깃발을 들었다 눕히면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카드를 돌리면서 파도타기도 했다. 멀리서 보면 글자와 배경이 휘리리릭하면서 바뀌는 것이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장관이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연습 막바지가 되면서 우리의 일사불란함에 가속이 붙었다. 특히 개막식을 며칠 앞두고부터는 다른 학교들도 황성공원 운동장으로 와서 예행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래도 경주 인근에서는 명문고라고 해서 목에 힘깨나 주는 학교가 우리학교였다. 그런 우리가 다른 학교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특히 인근 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빤히 지켜보는 앞에서 틀리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자칫 잘 못해서 그 여학생들 앞에서 두들겨 맞는 일이 생기면 이건 자손대대로 망신살이 뻗치는 것이었다.
우리는 카드 사이로 뚫어진 구멍을 통해 운동장에 도열해있는 여고생들을 가슴 두근거리며 쳐다보면서도 혹여라도 틀릴 세라 선생님의 숫자판과 깃발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었다. 카드 섹션이란 것이 경주 역사상 처음 있는 행사이고 보니 다른 학교 학생들도 우리를 눈여겨 쳐다보았다. 우리의 어깨가 더 으쓱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마침 우리가 연습하는 스탠드 앞으로 도열한 모 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을 열심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멀리서 보기에도 얼굴이 뽀얗고 예뻐 보였던 한 여학생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본부석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뒤태도 유난히 날씬하고 참하게 보였다. 그 여학생이 한 번만 더 뒤로 돌아서면 좋겠다며 방금전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어....이누무...시키....H-17...., H-17번....."
나는 설마 내가 틀릴 리가 없는데 내 번호가 호명되자 화들짝 놀라 카드를 내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히 선생님이 H-17을 지적한 것이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다시 한 번 선생님이 소리쳤다.
"H-17번, 그래, 니 말이다 니, 이누무 손아"
나에게 H-17번이라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연습하면서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었는데 하필이면 다른 학교 학생들 앞에서 더 하필이면 여학생들 앞에서 내 번호가 불린 것이다. 나는 순간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맞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쪽 팔리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선생님에게 찍히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느끼며 스탠드에서 내려가려고 주섬주섬 일어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천만 뜻밖의 말씀이 선생님이 든 메가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 댔다. 오늘은 다른 학교 학생들도 와 있으니까 특별히 한 번만 봐준다. 앉아라....!"
그 후 우리는 행사장에서 정말 멋지게 카드섹션을 완수한 덕분에 여러 신문과 방송에서 많은 찬사를 들었다. 황성공원 공설운동장을 꽉 채웠던 선수단과 관중들도 우리가 하는 카드섹션을 신기하게 쳐다보았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쳐주었다. 그리고 그 때의 장면들이 뒤에 우리의 졸업앨범에 기분 좋게 실렸음도 당연한 일이다.
그로부터 무려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가끔씩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아직도 'H-17'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듣으면 친구들이 내 기억력에 입을 쩍 벌린다. 그러나 자초지종을 듣고 나면 다들 배꼽을 잡고 나뒹굴기도 한다. 아마도 그 때 나의 입장이었다면 다른 친구들도 틀림없이 H-17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H-17을 떠올릴 때마다 그 때의 뒷태 고왔던 여학생의 모습과 일반 연습 때는 인정사정 두지 않다가 다른 학교 학생들 앞에서는 짐짓 잘못을 눈 감아 주었던 이동호 선생님을 생각하곤 한다. 그나저나 그 때 그 가스나는 요즘도 그렇게 이쁠랑강......?
* 당시 우리는 이런 행사를 하면서도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면서 그래도 갈 대학은 다 찾아갔다. 아마도 지금 학생들을 이런 행사에 동원하면 학부형들에게 집단 고소를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졌다고는 해도 요즘 학생들은 지나치게 공부에만 매달려 있다. 나중에 그들이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어떤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 지를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더 끔찍할 정도다.
첫댓글 괴력의 미술 샘~고딩 시절 샘 댁 방문했을 때 따님들이 대여섯 살 정도 되었을까..인형같이 귀엽더니만 지금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그럼 지금 40대 아닙니까? ㅎㅎ
~아마도 삼십대 중후반 정도? 한두 살 차이 정도의 따님 두 분으로 기억~가물가물합니다요^^
경주에 떠도는 악명 탓에 딸 셋들도 마음 고생 많았죠. 만혼으로 타지 사위 둘을 보고,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는 고운 셋째 딸이 아직도.....
아..그렇군요..근황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그때 자녀 분들이 너무 어리고 귀엽게 보였지요^^
그시대때는 걸핏하먼 고등학생들 동원 마이 해댔지요 특히 신라문화재땜에 여름 방학때 부터 연습하고 시민 체육대회때 마다 황성공원 가야 됐고,,, 그래도 공부 할건 다 하고 그랬죠 그라다 보이 추억거리도 많고 할 야그도 많고,, 요즘학생들은 상상도 못할끼시더 ~~~~
그렇지요. 우리 둘째 누부도 신라문화제 가장 행렬 참석하면서 궁녀 차림을 했었습니다. 선배님 동기시지요....!
이동호선생님이 그렇게 무서웠나? 한번도 혼난적이 없어서 그런지 무섭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한번도 없는데... 글이 맛있다는 생각이 드네.
선배님들께는 꽤 잘 대해주신 모양입니다. 아마 부임 초기셨었나 봅니다. 저희때는 반 죽였거든요.
이동호샘 요즘.....퇴직 하시고 제너시스 타고 다니시니더.......포스가 약간.....누그러지셨지만....그래도
ㅎㅎㅎ 한 삼년전에 동창회보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나뵈었었지.
카드섹션에다가 강당 짓는다꼬 벽돌 나르고...그때 황성공원에 도시락 싸가 댕기미 잘놀았지나는 J열 테두리라가 그양 자면서 했데이 @.@
야구장도 우리 손으로 돌 날라서 지은 거다. 그걸 생각하면 야구부 없애는 것이 원통하기 이를 데 없다.
박근영선생님은 몸만 서울에 있지 마음은 늘 경주에 머물고 계신듯합니다. 아웃 어브 사이트 아웃 어브 마인드라 했는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 어찌 그날 그날의 기억의 갈래들을 까묵지 않고 다 기억을 하시는지.... 대단한 기억력과 열정이십니다. ㅋㅋㅋ 그 미술선생님의 전설과 포스는 저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사립이니 수년을 한학교에서 근무하시니 한참 후배뻘될 제 동생도 그선생님 밑에서 배웠다지요. 박근영샘의 다른글에서도 읽었지만 샘은 소시적부터 예쁜 여학생을 은근히 밝히시는군요... 그 미를 추구하는 감각이 지금의 예술혼으로 거듭나나봅니다. ㅋㅋ...
예쁜 여학생을 '은근히' 밝히는 것이 아니고 '내놓고' 밝히지요. ㅍㅎㅎㅎ
저는 이동호샘하고 특별히 기억날 일은 없습니다만, 아직도 구원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마음으로는 아직 용서를 못하고 있지요..저는 워낙 쫌생이라..ㅋㅋ.. 사건의 일단은 똥이 대기 마려분데...고등학교때만 해도 똥누믄 약간 남사시러분 것도 있고..옛날 구 화장실은 시설도 안좋고..쫌 노는 친구들(?, 지금은 모두 친하지만..ㅋㅋ, 당시는 무서버 했심더..)이 담배를 하도 피고 그래서..선생님 화장실(전에는 구별해났지요..)에서 한판 때리고 나오는데..마침 이동호 선샘한테 걸려서..선샘 쓰레빠로 애복 씨게 마이 맞았심더.. 그래도 애복 공부도 했던 소심한 외동 촌놈이 첨으로 경주고에서 설움을 느낀 순간이지요..
애복 아팠겠다. ㅋㅋㅋ 그때는 선샘들이 아 그래 마이 때랬는지 몰라....!
아이고 미안합니다. 어쩌다 친정에 가면 지인들에게서 오빠의 악행?에 대해 듣고 대신 사과도 많이 했었는데 또 여기에도 상처 받은 마음이 있었군요, 어릴적 나에게 보여준 자상함과 사랑을 보면 그리 강팍한 사람도 아닌데......
똥누는데 위아래가 어딨고..선샘 궁디는 금장인가 싶디더.. 맞디라도 머 명분이 있어야지..여튼 지나간 일이고 은사님과의 추억 한편이긴 하지만..아직도 잊지 못하고 삽니다..커헐~~~
인자사 한판 뜨머 후배가 안 이기겠나내가 주선 함 해주꾸마 선샘캉 한판 해 볼랑강@.@;;
손원장 지정신이가? 두사부일체 모리나? 이동호 샘은 우리의 두목이고 사부셨다. ㅎㅎㅎ
아이고 말도 마소..안죽까지 선샘하고 눈마주치믄 궁디가 확 오그라듭니다..ㅎㅎ
ㅋㅋㅋ
제가 좀 특한가 봅니다. 전 학창시절 복우형이 말한 무서븐 아들중에 하나였고 지금은 더이상 착할수가 없는 아이지요 이동호쌤이랑은 같이 탕수육에 빼갈도 마시고 두치에 막걸리도 걸치고 여튼 친구처럼 그렇게 지냈었는데... 마이 패기도 하셨고 애들이 벌벌떨기도 했지만 그런 애들이 겁내는 만큼 저는 오히려 편하고 속내도 털어놓고 그렇게 지냈어용 사고도 마이쳤지만 나름 대외적으로 학교 이름도 알리고 머 그랬심더^^*
맞다..난 그때 사내가 아니었거덩..지금도 멀었지만.. 지나고 보이 사나이들이야 말로 선생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마치 전설의 김만곤 선생님이 여전히 우리학교의 또 한명의 레전드인 것처럼..ㅋㅋ
김만곤 선생님 글은 저 앞에서 한 번 써났지... 멋진 레전드 맞다. ㅎㅎㅎ
제가 고1이었을때. 이동호 쌤 따님이 결혼하신걸로 기억하는데~^^ 모의고사 치는 날. 영어듣기 문제를 푸는 타이밍에 따님 결혼식 화환과 관련해서 전화통화를 하시더라는;;; 찍소리도 못하고. 열심히 듣기에 집중했습니다~^^;;;
니캉 내캉 20년 차인데 그때도 교편생활을 하셨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