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문고리 / 김강호
어둠이 굴려내는 보름날의 굴렁쇠가
지상으로 굴러와 문에 턱, 박힐 때쯤
뎅그렁 종소리 내며 내간체로 울었다
원형의 기다림은 이미 붉게 녹슬었다
윤기 나던 고리 안에 갇혀 있던 소리들이
키 낮은 섬돌에 내려 별빛으로 피고 졌다
까마득한 날들이 줄지어 둥글어져
알 수 없는 형상으로 굳어 있는 커다란 굴레
어머니 거친 손길이 다시 오길 기다렸다
마른 꽃이 고운 날 / 김강호
요양원 유리창 쪽 웃고 있는 마른 꽃
잠깐 새 앙증맞고 아름답게 보여
눈시울 그렁해지며 나도 따라 웃는다
저, 마른 꽃 본향은 산골마을 너덜겅
능선보다 긴 슬픔 조심스레 개키면서
뒤엉긴 삶의 매듭을 풀었다 되 묶는다
인생 바구니에 기억들을 꺼내어
허공에 흩고 있는 아흔 살의마른 꽃
오늘은 혈색이 돌아 생화보다 고왔다
메마른 가슴 우물에 당신이 울컥 넘쳐서요 / 김강호
당신이 남긴 사랑 반딧불에 펴보는데요
봉숭아 꽃씨인 양 탱탱한 슬픔의 낱알
마당이 흥건하도록
밤새껏 터뜨려서요
어둠의 커튼 걷으면 도드라진 별 무리
쏙독새가 쪼아댈 때 아픔이 흘러내려
길고 긴 이별의 길에
은목서로 피어서요
지울수록 억세게 돋아나는 생각들을
뿌리까지 뽑아내어 하얗게 태우는 밤
메마른 가슴 우물에
당신이 울컥 넘쳐서요
주남저수지에서 / 김강호
눈이 먼 사랑 한 줌 연꽃으로 피워놓고
머잖아 올 것처럼 돌아보며 멀어져 간
긴 장마 하늘보다 더
눈물이 많던 그 사람
종일토록 서성이며 소식을 기다리다가
마음에 날개 돋은 난, 어느덧 개개비
연꽃 밭 들락거리며
울음 쏟아 놓고 있다
내 슬픔 빠져나가 노을로 번질 무렵
연잎에 고인 눈물 엎지르고 가는 바람
온몸이 녹아내릴 듯
그리움은 아프다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이면 / 김강호
당신 생각 지평선만큼 끝 모르게 길어서
수시로 둘둘 말아 가슴 깊이 묻어두고
남몰래 숨을 죽이며 보석이듯 꺼내 봤다
당신 생각 아파서 깊은 상처 동여맬 때
작설차는 연둣빛 울음소리로 끓고 있고
뒷산 숲 오솔길쯤엔 싸라기별 쏟아졌다
당신 생각 끊임없이 잔물결로 밀려와
갯돌 같은 이야기를 지그르르 쏟으면
내 귀는 자루가 되어 넘치도록 받았다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이면
슬픔 깊은 이별 강 목을 늘린 새가 되어
강물이 붉어지도록 피 토하며 울었다
다시, 베아트리체 / 김강호
죽도록 사랑한 죄 하늘만큼 깊어서
두오모 성당의 종 온몸으로 쳐 울릴까
당신이 묻힌 그곳에 내 혼마저 포갤까
밤마다 요동치는 그리움 만져 보고
하늘나무 흔들어서 별빛 쏟아지거든
못다 한 고백을 꺼내 구절초로 피워 볼까
시혼을 터트려서 바다가 되는 그날
투명한 당신 눈물 폭포로 쏟아다오
비련에 눈 멀 것 같은 내 사랑 베아트리체
달려온다, 봄 / 김강호
겨울이 앙탈 부려도 봄은 성큼 달려온다
장원급제 이도령이 춘향이 만나러 오듯
지체할 겨를도 없이 눈 깜짝할 새 달려온다
고을을 휘어잡고 호시절 보낸 겨울은
암행어사 출두 같은 마파람 소리에 놀라
변 사또 기절초풍하듯 까무러져 나뒹군다
주눅 들어 살아온 잡초들이 뛰쳐나와
월매, 방자, 향단이듯 흥에 겨워 들썩이며
한바탕 하늘 덮도록 꽃을 펑펑 터뜨린다
치자꽃 / 김강호
폭발성이 강력한
향기를 장착하고
불면에 뒤척이는 밤
숨죽이며 다가와
내 마음 저격해 버린 넌
사랑의 테러리스트
시편. 1 / 김강호
산 하나
옮기는 일
긴 강 풀어
놓는 일
붉게 달군
시 한편
모루에
올려놓고
은장색
숨을 죽이며
그믐달로
벼리는 일
-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2024. 다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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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아가 읽은 시조집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_김강호
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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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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