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개념 정의 / 여세주
‘수필(隨筆)’이란 용어는 여러 종류의 글을 특별한 체계 없이 모아 놓은 책명(冊名)이었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홍매(洪邁)는 《용재수필(容齋隨筆)》에서 “생각나는 대로 그때그때 기록하고, 기록한 순서에 따랐을 뿐 가리고 묶어서 차례를 매기지는 않았으므로 수필이라 한다(意之所之 隨卽記錄 因其後先 無得詮次 故目之曰 隨筆)”라고 했다. 잡록(雜錄)이나 미셀러니(miscellany)와 다르지 않은 의미로 수필이란 용어를 사용한 셈이다. 윤흔의 《도재수필(陶齋隨筆)》, 이민구의 《독사수필(讀史隨筆)》, 조성건의 《한거수필(閑居隨筆)》, 안정복의 《상헌수필(橡軒隨筆)》, 박지원의 《일신수필(馹迅隨筆)》에서도 그런 의미이다. 이들은 수시로 써놓았던 일기, 기행, 제문, 시화 등과 같은 다양한 형식의 산문을 특별한 체계 없이 모아서 엮은 서책이다. ‘수필’이라는 용어는 서책의 편집 특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수필이 특정 장르 개념으로 정착된 것은 1930년대이다. 김광섭, 김진섭 등에 의해 수필의 개념이나 특성 등이 논의되면서, 수필은 문학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는다. 이 시기의 비평가들은 에세이(essay)의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그것과 수필의 범주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1920년대 이광수의 에세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관한 시사평론이나 단편적인 논문까지 모두 수필의 영역에 포함시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김광섭은 수필을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심경을 고백적으로 표현하는 글이라고 규정한다. 수필의 개념적 범주를 상당히 축소시킨 것이다. 이는 수필을 문학에 편입시키려는 그의 의도와 그 당시 수필 문학의 현장을 반영한 결과라 여겨진다. 글자의 뜻을 그대로 풀어서 ‘붓 가는 대로’ 쓰는 글, ‘무형식의 형식’을 가진 글이 수필이라고 하는 정의도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이것을 두서없이 기록한 글, 형식이 없는 글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자유롭게 표현하여 정형화된 형식을 갖추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수필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일상생활의 경험에 대한 서정이나 사색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수필의 개념적 범주에 대한 인식은 해방 이후 좀 더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 수필은 미셀러니에 속한다고 하거나, 중수필(重隨筆)을 포멀 에세이(formal essay)라 하고 경수필(輕隨筆)을 인포멀 에세이(informal essay)라고 한 분류는 잘못되었다. 미셀러니는 어떤 부류의 작품이나 장르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잡다한 글을 모아놓은 책을 지칭하며, 중수필이든 경수필이든 모두 인포멀 에세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낙태나 안락사와 같은 사회적 쟁점을 다루는 칼럼 또는 논설까지도 포괄하는 인포멀 에세이에 비해 다소 그 범주가 좁기는 하지만, 한국 수필은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 인포멀 에세이에 맞먹는다. 따라서 수필을 에세이의 번역어로 사용하고 있으나, 이 둘의 범주는 매우 다르다.
수필은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느낀 수많은 경험을 소재로 삼는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삶, 그리고 사회문제나 자연현상에 관한 모든 것들이 수필의 글감이다. 그러나 수필은 신변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일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서 머물지 않는다. 신변잡기는 수필이라 할 수 없다. 수필은 관조한 경험 세계를 재현하고 해석하여 어떤 의미를 발견하거나 부여한다. 여기서 의미란 작가에 의해 의도된 주제이다. 수필은 주제를 함축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 시・소설・희곡과 다르므로, 수필을 주제의 문학이라고 한다. 수필은 경험의 재현을 통해 인간에 대해 탐구하고, 주관적 경험 세계에 주목하여 자신의 감정과 소통하면서 정서적 감응을 표현하며, 철학적 이념이나 사회 정치적 현실에 대한 견해를 펼친다.
수필은 자유로우면서도 산만하지 않은 짜임새를 갖춘다. 수필의 구성은 희곡이나 소설에서 말하는 플롯(plot)의 개념과 다르다. 수필에는 플롯이 없다. 희곡과 소설의 플롯은 개별 작품에 공유하고 있는 일정한 전형(archetype)을 갖지만, 수필의 구성은 각양각색으로 다양하다. 그렇지만 구성의 원리 또는 방법에서는 단일 구성・복합 구성, 삽화적 구성・연쇄적 구성・유기적 구성, 시간적 구성・공간적 구성 등으로 공통적 속성들을 묶어낼 수 있다. 이는 초창기의 수필에서 소홀하게 취급되거나 부족했던 형식적 가능성이 점차 주목받은 결과이다. 수필이 단순한 감상이나 기록에서 미학적이고 의미론적 정합성을 갖추어 가는 쪽으로 진화한 것이다.
수필은 경험과 사유로 교직된다. 경험을 먼저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사유를 덧붙이는 방식, 경험과 사유를 뒤섞어 기술해 나가는 방식, 경험의 형상 속에 사유를 함축시켜 놓는 방식이 두루 활용된다. 수필은 이러한 서술형태를 갖추면서 개별적인 경험에서 보편적인 사유를 이끌어낸다. 수필작품에서 경험과 사유는 은유적 관계에 놓인다. 이처럼, 경험과 사유의 결합을 통해 삶의 의미를 인식하거나 정서나 성정을 표현하고 어떤 견해를 제시하는 형식이 수필이다. 어떤 존재의 현상은 감각 작용인 체험으로 지각되고 그 본질적 진리는 정신 작용인 사색을 통해 인지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수필은 경험 철학과 사변 철학적 관점을 견지한다. 수필은 경험적이면서 사색적인 성격을 지닌다.
수필은 삶의 경험을 허구적으로 지어내지 않고 진실하게 드러낸다. 허구성은 수필의 속성이 아니다. 수필의 내용이 허구인가 진실인가의 문제는 작품 내적이 아니라 작품 외적인 문제이다. 작가가 내용을 허구적으로 꾸몄다고 하더라도 독자는 사실이며 진실이라고 믿는다. 진실성은 수필의 생명이다. 수필의 진실성은 여타 장르의 진실성과 성격이 다르다. 시・소설・희곡이 허구를 통해 문학적 진실성을 구축해 낸다면, 수필은 객관적 사실을 통해 문학적 진실성을 드러낸다. 허구를 사실처럼 그려내는 ‘그럴듯함’과 사실을 사실답게 그려내는 ‘그러함’의 차이이다. 수필은 허구성을 문학의 필수 요건으로 삼는 서구 문학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음에도 암묵적으로 문학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형상성은 문학의 속성 중 하나인데, 수필도 형상성을 지니고 있다. 시는 정서를, 소설과 희곡은 사건을, 수필은 체험을 형상화한다. 형상성의 정도는 장르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교술 장르의 하나인 수필은 본질적으로 비형상적이다. 현장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경험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보여주기’보다는 경험을 개략적으로 설명하는 ‘말하기’의 방식에 더 의존한다. 그러나 교술적 속성을 가장 많이 지닌 관념 중심의 수필도 철학과 같은 다른 담론에 비하면 형상적이다. 서정적 수필은 철학적 수필보다 형상성의 농도가 더 짙다. 서사적 수필이나 희곡적 수필에서는 형상성이 극대화된다. 수필은 갈수록 형상화를 더욱 중시하는 추세를 보인다.
수필은 작가와 독자의 직접적인 소통을 꾀하는 장르이다. 시나 소설의 화자는 창조된 인물인데, 수필의 화자는 작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필의 어조는 고백적이다. 수필의 화자는 윤리적 가면을 쓰고 있으므로 작가와의 인격적인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불일치가 수필의 화자를 창조된 인물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수필의 화자가 보여주는 가면은 작가의 윤리적 태도나 목소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작가와 동일인인 ‘나’의 시선으로 ‘나’의 경험 세계를 관조하고 그것에서 일어나는 사유를 전달하는 서술방식이다. 이런 점에서 수필은 자기 성찰의 문학이라고도 한다. 수필의 화자는 작가이므로, 수필은 기본적으로 ‘1인칭 시점’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간혹, 3인칭 시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문학적 효과를 위한 기교적 변용일 뿐이다.
수필의 언어는 대체로 일상어이다. 서정시에서 극대화되어 있는 비유적이고 함축적인 문학어는 수필에서 배제되지 않지만 극소화된다. 수필은 사전적 의미로 운용되는 일상어에서 주로 ‘설명’이라는 진술 방식에 의존한다. 근본적으로 수필은 경험적 사실을 전달하면서 그것에 대한 어떤 사유를 펼치는 교술 장르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여 전달하는 데에는 설명이 가장 유용하다. 함축적이고 비유적인 언어 조직이 문학의 본질적 속성이라면, 수필의 언어는 비문학적이다. 일상어를 가장 많이 운용하는 철학적 수필이나 시사적(時事的) 수필이 점차 쇠퇴하고 있는 것은 그 언어가 비문학적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문학적 언어 운용을 지향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수필은 문학・역사・철학의 핵심적인 속성을 두루 지닌다. 수필은 경험을 진실하게 기록하고 해석한다는 점에서 역사에 가깝다. 역사가 사실의 원인과 결과를 따져서 사실 그 자체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글이라면, 수필은 경험한 사실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인식에 이르려는 글이다. 인간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수필은 철학과 통한다. 인간에 대한 의문에 철학은 추상적인 관념으로 응답하는 글이라면, 수필은 경험의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대답한다. 형상이라는 점에서 수필은 문학과 동류이다. 역사의 중심 문제는 진실이고, 철학의 중심 문제는 인식이며, 문학의 중심 문제는 형상이다. 그들 사이의 등거리에 수필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수필은 경험을 진실하게 형상화하여 인간을 인식하는 데 이르고자 하는 장르이다.
수필은 참신한 실험을 시도하면서 끊임없이 진화한다. 따라서 수필의 개념적 범주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이다. 수필의 개념 정의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장르의 정의적(定義的) 규약은 작품 창작을 규제하려 들지만, 개혁적인 작가는 장르의 개념적 틀을 깨트리고자 한다. 따라서 수필의 개념 정의는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