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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방문기
김성덕추천 0조회 424.03.05 12:10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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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방문 친구 처남의 주선으로 6월 29일에서 6월 30일까지 개성공단엘 다녀왔다. 1박 2일이라고 하지만 6월29일 오후 1시에 홍제동에서 승용차로 떠나서 6월30일 12시경 다시 그 장소로 왔으니 만하루가 채 못 되는 시간에 다녀온 것이다. 짧은 시간인데도 그 곳의 현대아산 총 소장이 스케줄을 잘 짜서 여기 저기 이모저모 잘 보고 느끼고 먹고 마시고 왔다. 물론 떠나기 전에는 수유리에 가서 안보교육도 받았지만... 하도 사진 찍지 말라는 말에 사실 궁금한 북한 사람들과 그들의 집 등의 사진은 거의 찍지를 못하였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 머나먼 북한 땅이 있었다니... 북한 땅이 금강산에서 열리고 이어서 개성에서도 열리고 있다. 서울 홍제동에서 3명이 모여 오후 1시에 승용차로 떠난 우리는 자유로 로 약 70Km를 달려 40분 만에 남측 CIQ (Customes, Immigration and Quarantine /출입사무소)에 도착, 출경수속 (북한에 가고 오는 것은 출국/입국이 아니고 출경/입경 이라고 한다)을 마쳤다. 승용차를 가져가는 경우는 운전하는 사람만 차를 타고 Drive in 출경수속을 한다. 여기서 부터는 남측의 자동차 번호판을 가려야 한단다. 그래서 번호판과 같은 크기의 흰색 프라스틱 판을 번호판위에 덧 대고 클립으로 양쪽을 집어서 차번호를 가리고 자동차 우측에는 주황색 삼각형 깃발을 달고서야 북한으로 갈 수가 있다.(이 깃발이 없으면 북한이 벌금을 물린다고 한다.) 또한 핸드폰은 절대 못가지고 가기 때문에 이곳 CIQ 건물 내의 북한상품 가게에 날짜별로 돈을 내고 맡겨 놓던지 하루만인 경우는 한쪽 벽에 있는 코인 락카에 동전을 넣고 넣어두고 다녀온단다. 개성은 서울과 가까워서 조금 지대가 높은 곳에 올라가면 교신이 가능하기 때문에 핸드폰을 북한주민에게 주고 서울에서 교신이 가능하기 때문에 철저히 방지를 한다고 한다. 수속 마친 차들이 정지선에서 대기를 하면 군 안내 Jeep이 나타나서 DMZ 경계선까지 인솔을 해주고 다시 북측의 안내 차가 나와 앞장을 선다. 북측경계선에 도달하니 사진과 TV로만 보던 북한군경비병이 실제로 총을 메고 2인 1조로 들어오는 차량들을 양 옆에서 경계하며 바리케이트 문을 열어준다. 순간 긴장되는 마음이 든다. 북으로 들어가는 길 우측 저편으로는 남측에서도 보이게 높게 달아놓은 인공기 게양대가 보인다. 아! 북한 땅으로 들어 왔구나하는 느낌에 몸이 조금은 굳어진다. 북측에도 현대가 개성 토지 매입 대금 중에서 일부를 가지고 지어 주었다는 남측과 거의 같은 CIQ (출입 사무소)가 있다. “운전자 빼고 차에서 다 내리시오” 절도 있게 지적하는 자리에 차를 정차시키고 차에 탄 사람은 내리게 하여 수속을 받게 하는 데에 그 동작과 표정이 너무 딱딱하고 격하게 느껴서 고분고분 해지는 느낌이다. 차는 운전하는 사람을 포함하여 세관 및 입경관리소 직원이 차내의 짐, 트렁크 등을 뒤져본다. 조사했다는 표시로인지 차에 두고 내린 개인용 가방을 보니 쟈크가 열려져 있다. 입경심사 등 우리 측은 여권 비슷하게 만들어진 “방문증명서”의 바코드를 센서로 검색한 후 출경 도장을 찍어주는데 북측에서는 “방북증명서”라는 것은 보지도 않고 조그만 종이에 어느 회사일로 왔느냐고 묻고는 이름을 손으로 적는 것으로 끝이다. 이런 수속을 마치고 나니 이미 현대 측 총 소장이 나와서 우리를 맞아주니 마음이 놓이는듯... 새로운세상 그래도 아직은 약간 긴장되는 마음으로 차를 타고 2-3분 더 지나들어가니 현대가 벌리고 있는 개성공업단지가 여기저기 드문드문 지어놓은 공장들과 짓고 있는 건물, 파헤쳐진 공사현장과 레미콘, 산 같이 쌓아놓은 골재와 모래, 바둑판처럼 닦아놓은 아직 차는 거의 없는 아스팔트 등이 눈에 들어오면서 마치 해외의 건설현장 비슷한 느낌이 든다. 이곳 개성은 고 정주영 씨가 1981년 평양을 방문하여 경협의정서에 사인을 하면서 시작이 되었으니 지금까지 무려 26년이나 걸린 셈이다. 그 후 1998년 6월 소떼 500마리로부터 1501마리까지 몇 차례에 걸쳐 보냈다는데 북한에서 이 소들을 키워 새끼를 낳아 늘리려했으나 사료등이 없어서 결국은 보내진 소를 다 잡아 먹어 없앴다고 한다. 그해 11월 금강산 관광선을 띄웠고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그해 8월 공영지구 합의서가 만들어졌으며 2002년 11월 개성공업지구법이 제정되고 2004년 6월 본격착공 된 후 2004년 12월 첫 제품인 리빙아트의 냄비가 생산되었다. 50년간 2000만평 이용가능 사업권 쥔 현대아산 현대는 개성공업 단지 및 배후도시의 총 2,000만평의 개발을 50년간 이용할 수 있는 사업권을 북한으로부터 받아서 현재 1단계 100만평에 대한 부지 확보 및 분양을 마친 상태이다. 이 100만평은 여의도 윤중제 안쪽 넓이 약 90만평 보다 조금 큰 넓이이다. 그러니 모두 완성될 경우 여의도의 20배 넓이만큼 될 것이다. 여기에는 골프장도 3군데나 계획되어 있다. 정주영 회장 사망이후 어려워진 현대는 토지공사로부터 지원을 받아 이 일을 해 나가고 있다. 즉 토지공사는 설계, 감리, 분양, 자금조달을 하고 현대는 건설을 담당한다고 한다. 최근 분양 완료된 100만평은 평당 149,000원에 분양을 마쳤다고 하며 현재는 25개 업체가 이미 제품을 출하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1단계 100만평의 토목공사는 94.5%로 거의 마친 상태인데 마지막 부분인 취수, 정수, 배수 시설이 그것이다. 취수는 약 17km 떨어져 있는 이곳보다 높이가 약 40m 높은 위치의 저수지의 물을 대형 파이프를 묻어 자연낙차의 힘으로 가져와서 (이 공사는 이 지역을 벗어나는 일이라서 북측이 했다고) 이곳에서 정수하여 45,000톤은 이곳 공단에서 사용하고 15,000톤은 개성 시내로 보낸다는데 어제 (2007.6.28)부터 저수지 물이 이곳 정수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단다. 전기도 지금까지는 전봇대를 통해서 15,000kw를 남측에서 가져다 사용하고 있었는데 2007년 6월21일 한전이 16km 구간의 송전탑을 건립해서 100,000kw의 전기가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화면 왼쪽이 새로 건립된 송전탑, 우측이 기존 전봇대. 현대가 북측으로부터 받아쓰는 것은 골재와 노력(북측인력을 노력이라 부름) 이란다. 현대는 단지 내의 산은 깎아내고 낮은 곳은 메우고 하여 단지조성을 마쳤으며 여기에서 나온 바위와 돌을 잘게 부수어서 골재로 쓴단다. 공업 단지 한 가운데는 삼봉천 이라는 물이 흐르는데 세 번째 다리를 “만남의 다리”라고 이름 지을 예정이란다. 북측과 남측이 각각 두 팔로 큰 원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인데 그 큰 원은 보름달에는 전체가 불이 들어오고, 변하는 달 모양대로 불이 들어오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앞으로 단지가 완공되면 이곳이 아마 중심이 될 것이라고 한다. 다리도 아름답게 놓았다. 산 중턱에 걸린 달을 상징하는 듯 만든 다리도 있다. 신원이라는 봉제회사에 들어가 보았다. 800여명의 북한 직원들이 한편에서는 미싱, 또 옆에서는 다림질 등으로 바쁘다. 모두들 일을 열심히 한다. 이 신원이라는 회사는 이곳 개성공단에서도 아주 착실한 회사로 직원들의 출, 퇴근 시에는 한국인 관리자 모두가 나와서 일일이 인사를 하여 북한 직원들을 감탄시키고 있다고 한다. 3층에 마련된 식당엘 가 보았다. 빈 테이블과 의자가 쫘악 있다. 이곳 개성은 도시락을 모두 가지고 오면 회사에서는 국 만 만들어 준단다. 메뉴판을 보면 가재미국, 미역랭국, 돼지고기국, 국수, 소고기국, 떡국 등인데 예를 들어 국수 하는 날도 국수에 돼지고기를 듬뿍 넣어 냉면그릇 같은 데에다 가득 준다고 한다. 이곳에 몇 년째 근무했다는 현대 직원은 아직 북한 사람들의 도시락 속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다만 식당에서 국만 제공한다면서... 왜 하필이면 국을 주느냐? 언젠가 초코파이를 간식으로 주었더니 먹지 않고 집으로 가지고 가서 개성시내에 초코파이가 나돌고 이것으로 인해 위화감을 조성하므로 초코파이 간식을 주지 말도록 요청이 있었다며 그 이후 그 자리에서 먹어야지 가지고 나갈 수 없는 국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삼덕스타필드 신발공장엘 가 보았다. 이 공장에서 생산하는 특수한 신발은 바른 자세와 근력강화, 체지방감소 원활한 혈액순환으로 신체적 균형을 잡아준다고 하는데 일일이 직원들을 교육시켜서 지금은 잘 생산이 되고 있다고 한다. 교육을 맡은 남측 사람은 경상도 사투리가 하도 심해서 북측 근로자들이 말을 잘 이해하냐고 물으니 처음엔 좀 잘 안 통하다가 지금은 자기로부터 배운 북한 직원이 교육을 하기 때문에 언어상 불편은 없다고 한다. 1,50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으며 주로 수출품이라는데 1족에 30만원의 고가 신발이다. 국내 판매는 금년 8월경에 시작할 예정이라고.. 봉동관(초대소)에서의 식사 저녁엔 봉동관이라는 북한식당엘 갔다. 흔히 말하는 초대소이다. 이곳은 1단계 공업단지 밖에 있어서 그냥 마음대로 갈 수 없어서 안내참사 라는 안내원이 앞에서 차를 가지고 인도한다. 이 식당도 경계선에 물려 있어서 허물고 뒤로 물려 짓느라 새로 공사하고 있다. 멀리서 봐도 꽤나 큰것이 앞으로 많은 남측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 것 같다. 동네 이름이 봉동이라서 봉동관이란다. 미리 예약이 되어서인지 방 한가운데 4사람 좌석을 준비하고 들어서자마자 “대동강맥주”를 시원하게 맥주 컵에 따라준다. 상에는 샐러드와 오이김치 무생채 같은 것이 놓여있는데 음식이 갓 만들어 뜨끈뜨끈한 것으로 하나씩 나온다. 새우튀김, 소 꼬리찜, 순대, 만두, 사슴고기버섯죽순볶음, 돼지고기양배추볶음 송이버섯볶음, 등등 이다. 저녁 식사로는 평양랭면을 먹었는데 제대로 된 육수와 꾸미로 정말 제 맛 으로 된 평양랭면을 먹어봤다. 이곳 주방장을 비롯, 도우미는 거의가 평양에서 온 사람들이란다. 술은 대동강 맥주로 시작해서 들쭉술 16도짜리 포도주 비슷한 술과 42도짜리 령정술(해구신이 들어 있다는 술, 그래서 혐오감을 준다고 남측으로는 가지고 올 수 없는 술중의 하나이다) 을 마셨다. 이 술이 도수도 좀 세고하여 입에 척척 달라붙어서 두병이나 마셨다. 식사 도우미 외에도 기타와 노래 부르는 여자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른다. “반갑습네다” “휘파람” “고향의 봄” “반달” “찔레꽃” “아침이슬” “동지의 사랑” 등을 불렀다. 노래 잘 부르는 여자의 명찰이 김효정으로 되어있어서 혹시 본을 물어보니 아버지는 김해김씨 어머니는 나와 같은 전주 김씨 란다. 김일성부자가 전주 김씨인 것도 잘 알고 있다. 컨테이너 박스의 영빈관 저녁 먹고 숙소인 영빈관으로 갔다. 40ft 컨테이너 3개를 연결해서 만든 방이다. 약 22평이라고 하니 컨테이너 하나가 약 7평쯤 인가보다. 세상에 영빈관이라고 컨테이너 박스에 차려진 곳은 처음이다. 안은 매우 널찍하고 깨끗하며 냉장고, 에어컨, TV, 화장실, 거실, 침실 등이 잘 갖춰져 있어서 불편함이 전혀 없다. TV에서는 남한의 케이블 방송이 모두 잘 나오고 있어서 골프 뉴스도 보았다. 냉장고에는 하이트 맥주가 시원하게 냉장되어 있어서 한 캔씩 꺼내 마셨다. 아마 적당한 장소가 결정되면 그때 더 근사하게 잘 지으려고 하는 것 같다. 일찍 일어나서 밖으로 나와 보니 나방이를 비롯해서 곤충들이 온통 영빈관 창 옆에 붙어있다. 공기가 좋다는 뜻이다. 서울에선 거의 보기 어려운 제비도 날아다니니 이곳은 공해가 없는 곳이 구나 느꼈다. 엊저녁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는데도 일찍 일어난 것은 아마 공기가 좋아서인 듯하다. * 임진강 일대 휴전선 인근지역은 말라리아 위험지역이므로 1.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유의하고 2. 외출 시 긴 소매상의와 긴 바지착용 3. 모기가 무는 저녁부터 새벽까지 외출 삼가 할 것 4. 낚시, 야영 등 야외 활동 시에는 모기 기피제를 도포할 것 5. 문과 창에는 방충망을 설치 할 것 2개동의 직원숙소는 제대로 잘 지어 놓았고 총 소장도 이곳에 머문다. 침실 하나와 거실, 그리고 샤워실과 화장실이 전부인데 크기도 작아 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 좁은 거실 한쪽엔 아침저녁으로 운동한다는 트레이드 밀이 한 대있고 조깅화가 놓여 져 있다. 제비만 일찍 날아다니는 것 이아니라 벌써 출근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직장장, 반장, 조장 들은 출근 전 30분에서 1시간 정도 정신교육을 받고 아침 7시 50분까지 회사로 간다니 여간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15,000여명의 북한 노동자들 중 직장장은 300명당 1명이니 약 50명 정도이고 반장은 200명당 1명 정도라니 70-80명 정도 되는 폭이다. 더구나 아침 출근을 보니 빨간 상의를 입은 여자도 있으니 북한개성에도 여자들 마음에는 봄바람이 일고 있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의 복장은 아래 위 아주 새까만 조금 치렁치렁한 느낌이 드는 옷감에다가 같은 색깔의 운동화인데 위의 검정 천과 바닥을 잇는 부분은 흰색고무로 되어있는 운동화 또는 비올때 신는 장화, 그리고 검정색 모택동 모자 비슷한 것을 쓰고 하나같이 가로, 세로 30cm 정도 되는 가방을 들고 다닌다. 도시락과 필요한 소지품을 넣고 다니는 모양인데 일제히 배급 받은 것 같다. 역시 남남북녀라고 여자들은 옷만 잘 차려 입으면 남과 북의 여자를 구별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아마 이곳은 좀 더 예쁘고 신체건강한 사람들을 뽑아서 그런지 식당과 사무실,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한 결 같이 내 눈으로는 구별하기 쉽지 않은 느낌이다. 그래서 이곳 근무하는 한국인들은 처음에는 우선 복장으로 남과 북측사람을 쉽게 구별 할 수 있었다는데 공사현장에서는 남북이 같이 공사 작업복을 입고 있어서 남측의 흰색 안전모와 북측의 노란색 안전모를 벗으면 구별이 조금 어려워지나 그네들의 체격과 까맣게 그을린 얼굴 등으로 구별을 한단다. 월급은 직접 주지 않고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이라는 곳으로 일괄 계산해서 주면 국정가격수준의 물품교환권을 준다고 하는데 이 물품교환권이 프레미엄이 붙어있어서 국정가격수준으로 받은 것은 굉장한 메리트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임금이 57.50불이므로 1만5천 명 정도이므로 매월 약 100만 불을 북한에 주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개성공단에 와서 일 하는 것을 매우 선호하는데 뽑히기가 쉽지 않단다. 지금 개성 가는 길은 통일로와 자유로 두 개의 길뿐인데 앞으로 강화도에서 다리를 놓으면 개성으로 바로 들어갈 수가 있는 길이 생기게 되고 또 하나의 자유로 같은 길을 만들 생각이라고 한다. 나의 짧은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성공단이 바다와 전혀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서 앞으로 2000만평의 거대 복합 도시가 될 경우 물류에 많은 애로가 있을 것 같다. 아침식사는 현대아산의 직원식당인 개성관 에서 먹었다. 식재료 전량을 남측에서 가져와서 그런지 음식재료도 좋고 좋은 주방장이 있어서 총 소장도 이곳에서 늘 직원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손님이 있을 경우에만 별도로 칸을 막은 곳에서 식사를 한단다. 우리도 손님이라서 한쪽 끝 칸막이에서 식사를 했다. 아침인데도 어제 술 마신 것의 속 풀이 라고 생각했는지 동태찌개를 얼큰히 끓여 주어서 속을 잘 풀었고 밥과 반찬, 우유, 과일 등 나왔다. 북측 여자 도우미 둘이서 옆에서 열심히 시중을 해준다. 이들은 새벽부터 식사 하는 사람이 많아서 식당에서 잔다고 한다. 아침에 날이 조금 개어서 저 멀리 송악산이 보인다.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니 마치 임산부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어머니 산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송악산 자락에는 고려 문종의 넷째왕자였던 의천대각국사가 한국천태종을 개찰한 영통사가 있는데 2005년 10월31일 500년 만에 복원 준공하여 한국 신도300명과 북한신도 200명 등이 모여 복원기도회를 가졌던 바도 있다고 한다. 개성교육지구 기술교육센터 건설 현장엘 가 보았다. 이곳에서는 한 번에 약 1천명의 기술교육을 시킬 곳으로 금년 내 준공을 서두르고 있다. 100만평 경계선 상에 있어서 아마 이곳에 대거 입소시켜 기술 배우게 한후에 속속 늘어나는 공장에 인력을 댈 모양이다. 또한 아파트형 공장은 이미 분양이 완료되어 건물의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200평, 300평, 600평등 다양한 크기의 공장들과 한국 측 관리인들의 숙소가 같이 지어져있어서 여기에 입주하면 편리할 것 같다. 현대는 이러한 아파트형 공장을 앞으로도 4개를 더 짖는 다고 한다. 이 아파트형 공단 바로 옆에는 한국식으로 꾸며놓은 작은 공원도 있다. 이곳 북한 사람들을 멀리서 나마 보니 키도 작고 배가 나온 사람은 찾아 볼 수 없고 안경 쓴 사람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가끔 색안경을 쓴 사람은 보인다. 그리고 이곳은 철저하게 2인1조 형식으로 다니고 있어서 서로를 감시하고 여럿이 같이 있는 곳에서는 잘 이야기도 안한다고 한다. 1:1로 만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인데 이렇게 혼자 다니고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파워가 있는 사람이라고 봐야 한단다. 그들은 어떤 때는 현대직원들보다도 더 한국내의 사정이 밝아서 모르는 게 없을 정도라며 오늘도 한번 다녀가면서 한국에서 온 신문을 몇 개 가져갔다고한다. 아침 10시 떠나는 일정인데 나오면서 북한 술을 두병사고 신의주에서 목포까지의 일반국도 1번을 타고 서울로 왔다. *핸드폰은 못가지고 간다. 출입관리소에 있는 상점에 2000-3000원주고 맡겨놓거나, 하루정도 다녀오는 경우는 코인 락카에 넣어두고 다녀온다. *사진은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갈 수 있지만 북한이 보여 지기 싫어하는 사진은 검열하여 모두 지우므로 단지 내의 사진만 찍을 수 있다. * 북측에서는 화장실을 위생실로 부르는데 요즈음은 위생실이 어디냐고 물으면 저쪽에 화장실 있다고 이야기 해 준다. *북한에서 “일 없다”라는 말은 괜찮다는 말의 뜻인데 이 말도 지금은 괜찮다로 쓴단다. 총소장의 말 북한사람들을 이해하려면 김일성, 김정일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이해가 가장 빠릅니다. 총소장의 말이다. 매우 수긍이 가는 간단명료한 말인 것 같다. 기념으로 살 만한 물건은 잘 눈에 안 뜨이고 다양한 술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그중 평양소주 (미화 3불)와 백두산 돌꽃술(미화 20불)과 백두산 들쭉술(미화 8불)을 한 병씩 샀다. 承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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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의미심장한 글 잘 읽었습니다~
한번 다녀온 듯 한 느낌이네요^^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