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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로 돌아와 시간을 확인하자 벌써 새벽 3시였다.
인서는 재빨리 겉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몇 시간이라도 더 푹 자야 내일도 제 시간에 일어나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달게 자던 잠에서 깨어 추운 바람을 맞고 나갔다 왔더니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 대신 눈을 감으면 아까의 불쾌한 상황이 눈앞에 떠올랐다.
고양이가 실컷 토해놓은 걸 생판 남에게 치우라니...
생각할수록 이상한 사람이다.
그 남자에 대해 떠올리자 넓고 호화로웠던 그의 집이 생각난다.
천장에 샹들리에가 달려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던 거실은 고급스럽지만 심플한 분위기였다.
정원으로 통하는 유리문이 있고 그 앞에 놓여있던 소파와 테이블은 모던한 스타일이었다.
그 외에 또 뭔가 있었는데....
거실은 그 넓이에 비해 소파세트 외엔 일부러 그런 듯 이렇다 할 가구가 놓여있지 않았다.
흔한 텔레비전이나 오디오세트도 없었다.
그 대신 놓인 것은...
‘아! 피아노!’
고전적인 느낌의 검은색 피아노가 육중한 무게감을 드러내며 거실 한 편에 놓여 있었다.
문뜩 남자의 유난히 길고 하얗던 손가락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는 음악을 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무슨 상관이야. 피아노를 치던 노래를 하던 내가 알 바 아니지. 신경 끄고 잠이나 자자.”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며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
한밤의 갑작스런 전화가 있은 지 이틀이 지났다.
오후의 정기 스케줄인 강아지 산책을 마치고 가게로 돌아온 인서는 안으로 들어서다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어머, 정말요? 이런 귀한 표를...”
“그렇긴 하죠. 20만원에 판매중인 VIP석입니다. 두 장 드릴 테니 남편분과 함께 오시죠.”
“네! 꼭 갈게요. 진짜 감사해요!”
극도로 기분이 좋을 때만 나오는 희주의 소프라노톤 목소리에 놀라 멈춰선 인서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남자의 모습에 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마침 동생분이 오신 거 같군요.”
남자가 인서를 보며 보일 듯 말듯 거만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다.
“왔니? 너 그저께 밤에 로널드씨 댁에 갔었다며? 왜 얘기 안했어?”
“...로..널드?”
인서가 어리둥절해 하자 남자가 일어나 다가온다.
그는 인서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로널드 차입니다. 한국 이름은 차강우. 이제야 통성명하게 되네요.”
인서는 수상쩍은 기분에 미간을 찌푸리며 망설였다.
하지만 누나가 쳐다보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네.. 그런데 여긴 왜...”
“일을 맡기러 오셨어.”
남자 대신 희주가 대답했다.
“일?”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동생분께 설명 부탁드립니다.”
“네, 그럴게요. 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My Pleasure"
남자는 희주를 향해 반짝반짝 빛이 나는 미소로 응대한 뒤 인서를 지나쳐 가게를 나갔다.
희주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마치 꿈꾸는 소녀의 표정으로 황홀해한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저 사람 또 왜 온 거야?”
인서는 산책 다녀온 강아지들의 발을 닦아주고 물을 챙기며 희주에게 물었다.
“아아.. 인서야, 너 일주일만 아르바이트 해야겠다.”
“뭐??”
“이리로 앉아봐. 천천히 얘기해 줄게.”
희주가 인서의 팔을 끌어 아까 그 남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혔다.
“아까 그 사람 알고 보니 유명한 피아니스트더라고. 너도 텔레비전에서 이름 들어본 적 있지? 원래 해외에서 활동하는데 이번에 한국에서 리사이틀 연대.”
“...그래서?”
뭔가 얘기가 안 좋은 쪽으로 갈 것 같은 예감에 인서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진다.
“그런데 요즘 지인이 맡긴 고양이 때문에 집에서 연습을 잘 못한다고 하더라고.”
“......”
“너도 알지? ‘지나’말야.”
희주가 말한 지나는 지금 가게 손님용 소파에서 식빵 굽기 자세로 몸을 웅크린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서 낮에는 ‘지나’를 우리 샵에 맡기고 밤에는 네가 ‘지나’를 데리고 로널드씨 댁에 가서 돌보기로 했어.”
“.....뭐?”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아무래도 지인이 맡긴 녀석이라 마냥 샵에만 두긴 그런가봐. 그러니까 낮에만 여기서 돌보기로 했어.”
“아니. 그 얘기 말고. 밤에 어쩐다고?”
“네가 로널드씨 댁에 가서 ‘지나’를 돌본다고. 연습하느라 고양이 돌볼 시간이 없대.”
“싫어.”
인서는 한 마디로 딱 잘라 거절했다.
“왜?? 일주일만 그렇게 해 주면 페이를 무려 200이나 주겠대!”
“수상해. 그 사람 엄청 수상하다고. 게다가 무례하고 예의 없고 재수도 없어.”
“에이, 아까 얘기해보니까 친절하기만 하더라. 이것 봐! 리사이틀 표도 주셨어. 무려 VIP석이라고~”
“뇌물에 완전히 넘어갔군.”
“그러니까 넌 오늘부터 일주일간 야간엔 로널드씨 댁으로 출장이야. 이건 사장으로서 명령이야.”
“아아..진짜 말도 안 돼...”
그 남자의 의도는 뻔했다.
주인이 찾으러 올 때 까지 귀찮은 고양이를 손가락 하나 안 대고 돌보겠단 놀부 심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는 짓 마다 마음에 안 드는 그 남자를 앞으로 일주일이나 봐야 하다니.. 최악이었다.
***
그날 밤, 가게 문을 닫은 인서는 고양이를 안고 차강우의 집으로 향했다.
정말 어이가 없고 황당한 의뢰였지만 사장인 희주가 결정한 이상 인서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친척도 친구도 아닌 생판 남의 집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는 게 영 불편하고 내키지 않았다.
“하아... 너랑은 인연이 깊은 가 보다. 그렇지?”
품에 안긴 고양이가 대답하듯 야옹하고 울었다.
억지로 발걸음을 옮겨 이미 한번 온 적이 있는 익숙한 대문 앞에 섰다.
불필요하게 큰 대문과 그 너머의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 앞에 도착했다.
자동으로 열린 현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검은 바지에 흰 셔츠 그 위에 어울리지도 않는 나이트가운을 걸친 집주인이 우아하게 와인잔을 들고 다가온다.
이미 몇 잔 걸친 듯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다.
“오, 왔군.”
대뜸 반말로 응대하는 모습에 울컥 화가 치미는 인서.
차강우에 대해서는 이미 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검색을 마쳤다.
분명 자신보다 두 살 어린 스물여덟이었다.
그런데도 외국에 오래 살아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다는 변명으로 함부로 말한다.
게다가 아까 희주와 대화할 땐 깍듯이 존댓말을 쓰지 않았는가.
그는 자신을 얕잡아 보고 있는 것이다.
“내 집에 온 걸 환영해. 그러고 보니 두 번째로군. 하하.”
귀찮은 고양이로부터 해방된 기쁨 탓인지 그는 유난히 즐거워보였다.
“오늘은 찬찬히 집구경을 시켜주지. 자 날 따라와”
“됐어요. 그냥 제가 묵을 방만 알려주세요.”
별로 말을 길게 섞고 싶지도 않고 그만 쉬고 싶단 생각에 인서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 마음대로 해. 방이라면 2층에 몇 개나 빈 게 있어. 아무거나 골라서 써. 욕실도 모두 딸려 있지. 자, 그럼 어서 저 털뭉치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줘. 난 지금부터 연습을 해야 하니까. 1층은 내 방과 피아노가 있으니 되도록 고양이는 안 내려오게 해줘. 저 지저분한 고양이담요랑 밥그릇도 가지고 가.”
그는 소파 옆에 놓여 있던 고양이 물품도 짜증스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취한 것 같은데 무슨 연습을 한다는 건가 의심스러웠지만 인서는 일단 일이라 생각하고 강우의 요구에 따라 고양이 물건을 모두 챙겨 2층으로 향했다.
고양이와 둘이 생활할 테니 2층에 있는 방 중 제일 큰 걸 쓰기로 했다.
침대도 더블이라 넉넉할 것 같았다.
지나에게 간식과 물을 준 뒤 욕실에 들어가 씻었다.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 널찍한 욕실에서 오랜만에 느긋하게 몸을 씻었다.
가게에는 화장실 옆에 겨우 샤워기 하나를 달아놓은 터라 좁기도 했지만 난방도 잘 안 되고 수압도 약했다.
그에 비하면 여긴 파라다이스다.
몸이 따끈따끈 해 질 때 까지 기분 좋게 샤워를 마치고 쇼핑백에 준비해 온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간식을 다 먹어치운 지나는 벌써 침대 한 가운데 자리를 잡고 그루밍을 하고 있었다.
침대로 들어가려던 인서는 순간 멈칫했다.
욕실에선 물소리 때문에 몰랐는데 방문 틈새로 희미하게 피아노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괜히 살금살금 발끝으로 걸어 슬며시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자 소리는 기다렸다는 듯 커졌다.
계단에 이르자 더욱 커진 피아노선율.
인서는 계단 끝에 그대로 걸터앉았다.
누구의 무슨 곡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귀에 익숙한 멜로디다.
물이 흐르듯 막힘없이 잔잔하게 이어지던 음들은 점점 느려져 아주 조용하고 희미해진다.
그러다 갑자기 주의를 환기시키듯 강하게 치고 들어온다.
몇 개의 음이 한꺼번에 연주되는 지 짐작도 가지 않을 만큼 현란하고 화려한 기법의 곡이 이어진다.
클래식에 문외한인 인서조차도 넋을 잃고 빠져들게 되는 멋진 연주였다.
유명 피아니스트라던 누나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리사이틀을 앞 둔 차강우... 아니, 로널드 차는 젊고 유능한 피아니스트였다.
다만 그의 본 모습이 무례하고 상식이 없긴 해도 연주 솜씨만큼은 감히 일류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아까 분명 와인에 취한 것 같았는데 이 정도로 연주하니 똑바른 정신으로 무대에서 제대로 친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저 외모에 턱시도를 입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피아노를 치니 여성팬이 안 생길 리가 없다.
지나를 맡긴 그녀도 그의 이런 예술적인 모습에 반한 걸까?
그렇다면 막상 사귀고 난 후 후회했겠네... 라는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안자고 거기서 뭐해?”
빈 와인잔을 채우려던 강우가 계단에 멍하니 앉아있는 인서를 발견했다.
“네? 아... 그게...”
“아하! 내 연주를 감상 중이었군! 몰래 들을 거 없어. 난 비밀주의는 아니거든. 내 연주가 듣고 싶거든 아무 때나 내려와서 감상해. 찬사는 언제라도 환영이니 마음껏 표현하도록.”
“.......”
저렇게 지껄이는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님을 알기에 인서는 어이없는 웃음도 나오질 않는다.
“... 그만 잘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굿 나잇”
다음날 아침 인서는 자꾸 얼굴을 때리는 솜방망이에 흠칫 놀라 눈을 떴다.
벌써 일어난 지나가 앞발로 인서를 깨우고 있었다.
“으음.. 잘 잤니? 배고파서 깨운 거야?”
알았으면 빨리 밥을 달라는 듯 야옹하고 재촉하는 고양이.
“그래, 그래. 알았어.”
사료와 물을 담아 고양이에게 준 뒤 욕실에 들어가 세수를 했다.
옷을 갈아입고 시계를 보자 벌써 7시가 넘었다.
어서 집에 가서 아침을 먹어야 늦지 않게 가게를 열 수 있다.
사료를 다 먹고 모래화장실에서 볼일까지 마친 ‘지나’를 이동장에 넣어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
“굿모닝. 이제 슬슬 깨울까 했는데 벌써 나갈 준비까지 끝냈군. 역시 부지런한 직원이야.”
“안녕히 주무셨어요? 저 그만 가볼게요. 지나도 같이 나가요.”
“잠깐, 뭐가 그리 급해? 아침은 먹고 가야지”
“네?”
“계란은 반숙? 완숙?”
“에.......완..숙...이요”
“오케이. 샐러드를 해야는데 내가 양상추를 뜯는 동안 토마토 좀 썰어주겠어? 난 칼 쓰는 일은 안하는 주의라서.”
“아...네...”
인서는 어리둥절해 하며 일단 이동장에 있던 고양이를 꺼내주고 강우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예의 없다고 욕했던 사람인데 아침식사까지 선뜻 차려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괜히 미안해졌다.
“자, 접시에 담아줘.”
양상추와 어린잎, 토마토 샐러드에 상큼한 유자향이 감도는 소스를 뿌리자 금방 입 안에 군침이 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토스트가 구워지고 계란과 함께 익힌 베이컨도 놓였다.
방금 내린 따뜻한 커피와 함께 먹자 완벽한 아침식사가 되었다.
“..잘..먹겠습니다.”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인서는 강우와 마주앉아 식사를 했다.
사실 모르는 사람 집이라 어색해서 어떻게 자냐고 불평했던 게 부끄러울 만큼 지난밤에도 푹신한 침대에서 단잠을 잤었다.
거기에 더해 맛있는 아침식사까지 얻어먹었으니 일을 하러 온 게 아니라 마치 호텔에 쉬러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주 앉은 사람이 불편한 사람만 아니었더라면 그야말로 휴가인 셈이다.
식사를 얼추 마쳐갈 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애나!!”
그는 전화를 들고 버럭 화를 냈다.
“왜 이제야 전화를 하는 거야! 당신의 그 못생긴 고양이 때문에 내가 얼마나 열 받았는지 알아!!”
지나의 주인에게서 온 전화임에 틀림없었다.
인서는 남은 토스트를 입에 구겨 넣으며 슬쩍 ‘지나’를 쳐다보았다.
고양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소파위에 앉아 털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뭐라고?! 촬영 스케줄이 늘었다고?! 뭐??!! 내 리사이틀에도 못 와?!!”
당장 폭발할 듯 벌떡 일어선 강우. 인서는 조마조마한 분위기에 체할 것 같아 급히 커피를 마셨다.
“됐어! 당신 마음대로 해! 나도 저 못생긴 고양이 따위 길바닥에 내버릴 테니까!!”
아무래도 여기 더 있다간 지나에게 불똥이 튈 것 같아 인서는 재빨리 고양이를 이동장에 넣어 그 집을 나왔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쌀쌀했다.
인서는 고양이가 춥지 않게 케이지 입구를 막고 뛰어갔다.
그날 밤도 인서는 가게 문을 닫은 후 지나와 함께 강우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대문을 여는데도 현관문을 여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집주인은 아침에 봤던 옷차림 그대로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숯 많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바지와 셔츠는 잔뜩 구겨져 있었다.
게다가 지나처럼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채 소파에 벌러덩 누워있었다.
인서는 어차피 자신의 임무는 고양이를 돌보는 일이니 그냥 무시하고 2층으로 올라가 버리면 되는데 어쩐지 소파 옆을 무심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오늘.. 연습은 많이 했어요?”
지나가는 인사처럼 물었다.
“아니. 단 한 곡도 치지 못했어.”
“네? 공연이 일주일도 안 남았잖아요.”
“못할 것 같아. 난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어.”
“그렇게 갑자기...”
“원래 슬럼프란 갑작스럽게 오는 거야. 첫눈에 반하는 사랑처럼 그렇게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고 핀잔을 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인서가 말했다.
“...그러지 말고 연습하세요. 어젯밤에 들었을 때 피아노소리가 정말 근사하던데...”
“근사해?”
갑자기 누워있던 차강우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에? 아...네....”
“훗.. 그렇군. 난 역시 근사했어. 그딴 여자 하나 때문에 무너질 내가 아니지! 삐쩍 말라빠진 생선가시 주제에... 모델이면 다야? 헤어지자면 누가 무서울 줄 알고? 어디서 나 같은 멋진 남자를 만난다고... 흥!”
그거였군... 아침에 전화로 다투다 차이고 그 화풀이를 하고 있었군.
진짜 생긴 게 아깝다....
라는 진심어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은 인서.
“...헤어..지기로 한 건가요? 여자 친구랑?”
“그래. 그런 여자 내 쪽에서 사양이야. A컵도 안 되는 주제에!”
“.........”
인서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러면... 지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 여자 분이 찾으러 오시는 건가요?”
“이 털뭉치는 이제부터 내 인질이야. 하하하!”
“...네??”
“내가 예전에 잠시 미쳐서 그 여자한테 사준 선물이 있거든. 그걸 도로 내놓기 전까지 이 녀석은 못 데려간다고 했어.”
....찌.....찌질해!!
인서는 기가 막혀 입을 벌린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남자의 찌질함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예전에 사준 선물을 내놓지 않으면 고양이를 돌려주지 않겠다니.... 정말 어이가 없다.
“후후... 인질. 네 주인은 지금쯤 헤어지자고 한 걸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 거야. 좋아! 이번 리사이틀을 대성공시켜 그 후회를 백만 배 쯤 더 하게 해주지!”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과장되게 큰 소리로 웃고는 손가락을 풀며 피아노로 향했다.
그리고는 모든 연주 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온갖 기교와 포르테시모가 난무하는 음표의 홍수 속에서 인서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오늘 아침을 먹으며 잠시나마 저 사람이 괜찮은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꾸짖으며 재빨리 2층으로 도망쳤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네 주인과 저 인간 사이가 틀어진 모양이야. 이렇게 귀여운 고양이를 볼모로 잡다니... 정말 속이 얼마나 꼬인 인간인 거야?”
어제 묵었던 2층 방으로 들어온 인서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목을 긁어주자 눈을 지그시 감고 고롱고롱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인간들 간의 얽히고설킨 사연이야 어떻든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단 듯 초연한 표정의 고양이를 보자 유치한 싸움을 일삼는 인간들보다 훨씬 고고한 생물체란 생각이 들었다.
“간식 줄까?”
인서가 묻자 귀를 까딱거리며 슬그머니 눈을 뜬다.
그래,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 얼굴에 인서는 피식 웃으며 통조림을 따주었다.
폭풍연주는 밤이 늦도록 이어졌다.
다행히도 피아니스트가 사는 집이라 방음장치를 잘 한 덕에 이웃집으로부터의 항의는 들어오지 않았다.
인서는 2층으로 전해지는 희미한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 소리가 어젯밤과 똑같이 들려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설마 하는 생각에 1층으로 내려오던 인서는 피폐한 몰골의 강우가 실핏줄이 선 광적인 눈으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피아노를 치고 있는 걸 발견했다.
구겨진 옷과 땀으로 흠뻑 젖은 창백한 안색으로 보아 밤을 꼬박 새워 피아노를 친 게 분명했다.
“이...이봐요...”
인서가 불안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피아니스트는 신들린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차강우씨... 이봐요! 설마 밤새 이렇게 친 거예요?”
바로 피아노 옆까지 다가가 말을 건넨 인서.
“차강우씨!......앗!!...”
조심스레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린 순간 마치 스위치가 팟-하고 꺼진 듯 손가락이 뚝 멈추더니 그의 몸이 스르륵 옆으로 쓰러졌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차강우씨! 차강우씨!!”
인서는 얼떨결에 쓰러지는 강우의 몸을 떠안았다.
강우는 힘없이 인서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기절했다.
“진짜 뭐야 이 인간! 정신 차려 봐요!!”
땀으로 완전히 젖은 몸은 뜨거움이 전해질 만큼 열이 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될 때 까지 미친 듯이 피아노에 몰두해 있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읏! 무거워...”
인서는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강우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방으로 옮겼다.
우선은 옷부터 갈아입혀야 했다.
셔츠와 바지가 모두 땀으로 흥건했다.
겨우 침대에 눕힌 강우에게서 셔츠를 벗겨냈다.
길고 하얀 손가락만큼이나 피부도 아웃도어와는 무관한 인간답게 무척 흰 편이었다.
그래도 나름 운동은 하는지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간 가슴이나 복부엔 군살 없이 보기 좋은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인의 허락 없이 서랍을 뒤지는 건 께름칙했지만 비상 상황이니 과감히 옷장을 열기로 했다.
편하게 입을 잠옷을 꺼낸 뒤 입히기 전 열을 내리기 위해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었다.
괴로운 듯 한껏 찌푸려져 있던 강우의 표정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잠옷을 입히고 이불을 덮어준 뒤 차가운 얼음을 이마에 대 주자 숨소리도 한결 편안해졌다.
얼떨결에 병수발까지 들고 만 인서는 아침부터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벌써 시간이 9시를 향해 간다.
서둘러 가게로 나가봐야 하는데 아무래도 강우를 혼자 두고 나가는 게 걱정스러웠다.
연락해 줄 사람이라도 있으면 전화하고 갈 텐데 슬쩍 열어본 핸드폰은 잠겨 있어 연락처를 알아볼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인서는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얘기했다.
[그래? 그럼 내가 일찍 나가서 가게 열게. 걱정 마. 넌 차강우씨 깨어나는 거 보고 와. 연주회도 얼마 안 남았는데 아프면 큰일이잖아.]
다행히 희주가 이해해줘 인서는 좀 더 이 집에 머물기로 했다.
전화를 끊은 그는 거실로 나와 아까부터 배고프다며 울고 있는 ‘지나’에게 사료를 주었다.
아침부터 정신을 쏙 빼 놓은 집주인 때문에 인서도 이제야 슬슬 허기가 졌다.
남의 주방을 뒤지는 게 망설여졌지만 이미 옷장이며 휴대폰까지 뒤진 터라 이제 와 하나 더 추가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았다.
냉장고를 열어 식빵과 잼, 우유를 꺼내 간단히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강우가 깨면 먹을 수 있게 싱크대서랍에 있던 인스턴트 스프를 꺼내 끓여놓았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 잠든 강우의 얼굴을 만져보자 아까보다 많이 열이 내려있었다.
아무래도 밤새 무리를 해서 일시적으로 열이 오른 듯 했다.
이대로라면 곧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다행이다.”
열이 안 떨어지면 어쩌나.. 지금이라도 구급차를 불러야 하나.. 이런 저런 걱정을 하던 차라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는 체온이 반가웠다.
인서는 눈을 감고 평온하게 잠이 든 강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지독하게 잘 생긴 얼굴인 건 확실했다.
짙은 눈썹 아래 길고 숯 많은 속눈썹이 얇은 쌍꺼풀 라인을 따라 가지런히 나 있었다.
지금은 닫혀있는 저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그 안에 유난히 검은색과 흰색이 선명한 눈동자가 인상 깊게 자리하고 있다.
곧게 뻗은 콧대와 입술까지 상식을 벗어난 어이없는 성격만 뺀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남자일 것이다.
게다가 타고 난 재능까지 있으니 어느 여자가 그에게 빠지지 않겠는가.
“정신 차려, 유인서”
텔레비전 화면 보듯 온종일 쳐다보고 있으라고 해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에서 겨우 시선을 떼며 인서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어차피 외모뿐이잖아. 그 외엔 모조리 최악인 인간이야.”
설득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신은 공평해. 저 외모에 성격까지 좋아봐. 나 같은 인간은 질투 나서 살기 싫을 거야.”
강우가 일어나길 기다리던 인서는 정오가 가까워지자 더는 참지 못하고 그를 깨우기로 결심했다.
좀 전에 얼굴을 만져보니 이미 열은 다 내린 듯 했다.
그는 다만 어제 못 잔 잠을 보충하고 있을 뿐이었다.
“차강우씨.”
인서는 침대로 다가가 그를 불렀다.
“그만 일어나요. 저 이제 가볼게요.”
팔을 잡고 살며시 흔들었다.
“오후엔 예약손님도 있고 누나 혼자 일하기 힘들어요. 저 갈게요. 괜찮죠?”
열도 없고 잠이나 실컷 자고 나면 정상컨디션으로 돌아오겠지 라고 생각했다.
“.....음.....”
“아, 깼어요? 저 이제 가야해요.”
“.....언제 왔어? 돌아왔으면 인사를 먼저 해야지.”
“네?... 어!!”
그 순간, 설핏 잠이 깬 듯 멍한 얼굴로 눈을 뜬 강우가 인서의 팔을 잡아끌었다.
균형을 잃은 인서가 강우 위로 쓰러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강우의 팔이 허리를 감고 그대로 몸을 반전시켰다.
눈 깜짝 할 사이 인서는 강우 아래 깔리고 말았다.
“무..무슨...!!!”
그리고는 이내 내려오는 얼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기도 전 입술이 닿아 있었다.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란 인서는 온 몸이 급속도로 굳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우는 놀라 벌어진 인서의 입술 사이로 혀를 미끄러트리며 끈질기게 프렌치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인서는 마비된 몸을 겨우 풀어 강우의 가슴을 두 손으로 밀쳐냈다.
힘없이 밀린 강우는 다시 침대로 쓰러져 언제 그랬냐는 듯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놀라고 당황스런 마음에 인서는 벌떡 일어나 거실로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그 길로 집을 벗어나 가게로 달려갔다.
첫댓글 오호~~ ㅋㅋㅋ 담편이요~+_+
지금 막 올렸어요! 헉헉!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3.30 13:59
착한 인서가 상처받지 않기를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4.02 04:30
재밌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