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고모의 결론적인 말은 "큰고모가 너의 소식을 무척 궁금해하니 그리 알아라" 나는 작은고모의
전화 한 통화에, 내가 그 동안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무심하게 지냈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미안한
마음이 온 몸을 찌르르 타고 내린다. 안부전화를 잊지 않고 가끔씩 했던 일이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에서 지워져 버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 같아서, 큰고모님 댁 전화번호를 벽에 커다랗게
써놓았다.
이튿날 아침. 설거지를 끝낸 후 수화기를 들었다. 강남 반포동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한 지 2년이
다돼가는데, 찾아간다며 벼르다 찾아 뵙지 못했던 아파트를 가르쳐달라는 나의 부탁에 선뜩
응하셨다. 그간 많이 그리워하신 모양이 역력했다.
나는 얼른 채소밭으로 나갔다. 커다란 비닐봉투 속에, 아침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파란상추와
적색상추를 뜯어 담고, 입 속에 넣으면 향긋하게 싸한 느낌이 맴도는 당귀 싹의 어린 잎과 깻잎을
뜯고, 아욱과 상추 쌈에 제격인 씀바귀와 쑥갓을 되는대로 뽑아 담으니 봉투 두 개가 불룩했다.
땀이 비오 듯 눈두덩 밑으로 흘러서 눈을 뜰 수 없었지만, 오랜만에 큰고모를 찾아가는 기쁨에
이쯤 더운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3호선 지하철을 타고서야 더위는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매년 4월이 되면 나는 큰고모를 잊을 수가 없다. 60년 3월 초. 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낯선
서울에서 그나마 둥지를 튼 곳이 큰고모 집이다. 딸자식을 혼자 내놓기가 걱정 되신 엄격한
부모님은 고모에게 맡기셨다. 나의 본의와는 동떨어진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의 뜻을
거역할 힘이 내겐 없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한 달에 생활비로 얼마를
드리긴 했었지만 그리 넉넉하진 않았다.
그래서 고모에겐 고맙고 늘 미안했다. 그 당시. 공무원이신 아버지 월급으로 서울로 유학을
시키는 일이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으셨고 동생들이 여럿 있어서 교육비대기에도 무척 바쁘셨다.
고교에서 교직생활을 하신 큰고모부는 어려운 생활에 나 외에 친조카를 함께 데리고
계셨다.
그 시절엔 친척 중에 어느 한 집이라도 서울이나 도시에 살면, 염치 불구코 지방이나 시골에서
자식을 유학시킬 일이 생기면 그냥 맡기게 되는 풍조가 있었다. 한마디 불평도 못 하고, 오빠
딸인 나를 졸업할 때까지 도와 주시고, 그 후로 취직까지 신세를 졌으니, 어찌 큰고모와 고모부를
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서울서 공부할 즈음은 나라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6.25사변이 일어난 50년대는 정치적인
혼돈과 가난에 찌든 국민들의 전반적인 생활도 엉망이었고, 혼란과 무질서로 이어진 60년
초에는 이승만정권 말기에 저질러진 3.15 부정선거가 극도의 광란으로 번져, 이대통령 하야라는
불씨가된, 4.19학생의거도 일어났다.
4.19의거가 있던 날. 나는 서울의 한 복판인 명동에서 길이 막혀, 오도가도 못하고 쩔쩔매다가
을지로 쪽으로 겨우 빠져 나와, 종로 쪽으로 돌아서 동대문밖에 있는 용두동 큰고모 집까지
걸어서 오는데, 밤 12시가 다되어 도착하니 고모부와 고모님의 근심걱정은 태산 같았다.
부모님한테서 걱정스러운 전화를 여려 통 받으셨다니 왜 안 그러셨겠는가. 나라 전체가 불 난 집
같았다.
종로에서 본 광경은, 검정 교복을 입은 대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올라탄, 트럭이 달리는
곳에다 총부리를 들이대고 콩 볶듯 사정없이 쏘아대니, 총알에서 일어나는 불꽃은 간을
콩알만하게 만들었고, 그걸 피하여 쫓기다가 어느 가게 화장실로 들어 갔는데, 그 당시의
화장실은 요즈음의 깨끗한 개념의 그런 곳이 아니었다. 지저분하기 짝이없는 곳이었지만,
목숨을 부지 하기에 급급한 겁 많은 사람들에겐 그 곳이 차라리 천당이었다.
어떤 일이, 무엇 때문에, 왜 일어 났는지. 이유도 잘 모르고, 그날. 나는 서울 거리를 종일
이리저리 헤맨 기억과, 고모내외분에게 많은 걱정을 끼쳐 노여움을 산 기억밖에 없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매스컴의 대중화가 신문과 라디오에 겨우 의지 할 정도였으니 아침에
일찍 집을 나선 사람들은 아무런 낌새도 못 차린 채, 거의가 느닷없이 당한 일이었다.
그날의 아비규환 속에서, 살아서 부상도 없이 고모 집에 들어선 것만도 불행 중 큰 다행이었다.
정치적. 사회적인 큰 혼란의 틈바구니에 들어선 민주당 장면 張勉 정권은 우왕좌왕하다가,
그 이듬해인 61년 5월16일에 또 다른 사태가 일어나니 이를 5.16 군사혁명이라고 했다.
혁명이라는 지극히 생소한 단어를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됐다. 이날도 하교길에 남산밑 신세계
백화점 본점 앞에 있는 분수대 앞에서 완전 무장한 군인들의 엄격하고, 비장에 찬 눈초리를
보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났을 거라 짐작했으나, 4.19때 같은 극도의 사회적인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런 일들이 벌어진 국가적인 일을 잘했느냐, 잘못했느냐는 역사가들이
사실로 밝힐 일이고, 오로지 우리들이 대학공부를 한답시고 서울에 머물 때, 60년 4월과
61년 5월에 연달아 일어난 국가적인 일들은 나의 젊은 시절에 겪었던, 생애에서 쉽게 잊어
버릴 수 없는 중대한 대사건이었다.
찾아 간 아파트는 사 남매를 모두 결혼시킨 두 분이 오붓하게 살고 계셨다. 고령이신 고모부는
제자들 성화에 함께 산행을 가셨단다. 고모는 점심을 지어놓고 기다리시다가 반갑게 맞아
주셨다. "아이! 우리고모 한번 안아 드릴게요." 나는 덥석 안았다.
예전에 퍽 곱고 예쁘던 모습이 아직도 여전하시다. 일흔일곱 연세에도 수영으로 단련된
무릎은 아픈 것을 모르신단다. 점심을 먹고 가져간 무공해 상추와 여러 가지 채소를 알뜰히
다듬어드리고 나오다가 산행을 마치고 들어서시는 고모부를 만났다. 빙그레 잘 웃으시는
모습도 한결 같았다. 어찌나 반가와 하시던지. 작은 성의를 표시한 것뿐인데도 좋아하시는
두 분께 무공해 채소를 또 갖다 드려야겠구나. 연달아 2년간 일어난 역사의 소용돌이를 현장에서
지켜 본 나는 나라가 잘 돼 가기를 빌 뿐이다.
첫댓글 우리세대가 겪었던 엄청난 현실들을 간결한 필치로 엮어나갔군요 그래요 저도 당시 광화문근처까지 스크람을 짜고 진군한후 엄청난 체류탄세례로 대열을 잃은후 친구집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귀가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큰고모님을 도입부문으로 인용하신 솜씨가 정감이 갑니다 ㅎㅎ 자주찾아뵙고 인사를 올려야 될 사연이 깊은 고모님이신것같습니다 건필하십시요
그러고 보니 강대님도 4.19 세대이셨나 봐요. 같은 시대의 아픔을 잘 알고 계시니 동지를 얻은 기분입니다. 댓글 주시어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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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들을 겪고 자란 우리 세대는 역사의식에 눈뜨고 나라 장래를 많이 걱정하며 지냈지요. 나라가 권장하는 국산품 애용. 새마을 운동에 동참하여 부자 나라가 되길 음과 양으로 도왔지요. 앞장서서 희생하신 고귀한 분들께 고개 숙여 명복을 빌어야 겠구요. 벌써 47여년이 지난 일들이지만 생생하게 떠오르는군요. 석촌님 감사합니다.
4.19가 일어난 해는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해이니 기억을 한다면 학교를 나가지 안았다는 것과 중학교 1학년때 '방공을 국시의 제 1호로 삼고' 를 아침 조회때 마다 복창을 한 기억이 납니다. 여러운 시절 구국심정으로 이 나라를 지켜주신 분들을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고모님과의 정감이 가는 글 잘 보고 갑니다 따오기님 건안 건필하세요
그때는 '반공이 국시'이고 말고요. 참으로 위태로운 국운이었지요. 애국심의 고취를 국민들이 합심하여 외치던 시절이 그래도 살 맛나는 세상이었는데....선영님 고마와요.
진난날 반세기 동안 극도의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공을 국시의 제1호로 하지 않고는 우리가 살아 남지 못했을 겁니다. 자주 자립 정신과 우방의 지원으로 우리는 지금의 경제 성장을 했다고 봅니다. 따오기님의 뒤돌아 본 이야기 잘 읽고 다시 지난날을 회고해 봅니다. 건강하세요! 그런데 글씨가 작아서 읽기가 불편합니다. 내 나이 탓인가 봅니다.
석천 바다님. 글자크기를 늘렸습니다. 좀 괜찮으실런지요? 저는 아직 컴 다루는 솜씨가 많이 미숙합니다.ㅎㅎㅎ 그동안 나라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우리 세대가 합쳐서 이루어 놓은 애국심을 젊은 세대도 많이 본 받았으면 좋겠지요. 댓글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암울했던 60년대 격동의 시절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지요... 국민 교육 헌장이며 우리의 맹세가 지금도 귓전에 머물고 있는데... 아득한 남의 나라 일인양 젊은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고 살아가니 적지않게 걱정이 됩니다. 잊을 수 없는 그 시절 다시 상기하며 댓글 드리네요 따오기님!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 주셔서 고마워요. 늦은 밤 단꿈 꾸기요.
늦은 밤 고단하심에도 불구하고 오셔서 좋은 공감이 가는 댓글을 달으셨군요. 맞아요. 국민교육헌장. 우리의 맹세. 국기에 대한 경례! 같은 애국 언어들이 있어 나라사랑을 많이 했었죠. 피곤하신데 감사합니다. 건필하세요.
저의 집은 구포(부산)였는데 4촌 6촌 해서 오빠들이 셋 저의 오빠둘 남동생둘 해서 남자들 속에서 살았는데 4.19때 저의집은 온통 비상 였답니다. 엄마가 어디서 찿아 오셨는지 모두 방안에 모아 놨는데 밤에 대학생들이 한방 가득히 읹아 저보고 밥달래서 옆집 친구집에서 몰래 밥을 해서 주던일이 주마등같이 스치네요. 많이 힘든 시기의 세월이였지요,고모님께서 살아 계시니 좋으시겠어요. 아무도 안계시니......... 무공해 상추도 먹고 싶고 ........지난날의 일들을 글로 읽게 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늘 건강 하세요.
중국에 계시는 진주님. 안녕? 그 시절은 남여노소 모두가 힘들었고, 특히 부모님 마음은 항상 자식들 걱정에 애간장이 타셨지요. 그 보람으로 나라가 부강했고 세계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었기에, 지난 날들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으로 애국 더하고 살아야겠어요. 가까이 계시면 올여름 무공해 상추를 한 소쿠리 드리련만....아쉽네요. 늘 고마워요. 건강하세요.
같은 시대를 살아온 우리세대 지난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네요 따오기님의 글을 읽으며 한달전 근처 대학에 입학한 대전사는 조카와 같이 지내며 바로 내가 고모인데 ㅎㅎㅎ 키큰 귀여운 대학생과 지내며 좀 바쁘기는 하지만 활력소가 되나봅니다 잘읽고 갈게요 좋은날 되세요
튜립고모와 대학생 대전 조카.... 제가 47년 전에 겪은 사이군요. 대견하지만 가끔 힘들 때도 있겠어요. 활력소도 생기지요. 튜립 고모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어쩌면 우리 세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해 온 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특히 60년대에서 70년대 청춘의 시절 조차도 사회의 흐름에 그냥 흘러 보낼 수밖에 없었지요.70년대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에 선생으로 들어가서도 많은 제약을 받으며 교사의 자리에 있었던 기억이나는군요. 반찬 냄새 때문에 코를 막고 학생들 잡곡밥까지 검사를 했으니까요. 요즈음 수업을 하면서 그때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은 정말 그랬을까하는 표정이죠. 이 아침 님의 글을 읽으며, 문득 그 시절이 아련히 떠오르며 그리워도 지내요. 건강하시기를....
그 시절과는 많이 다른 세계에서 성장하는 아이들. 하지만 인간미는 점점점 없어지고 교권도 무너지고..... 예전엔 애국심 하나 가지고도 잘 살았는데 요즘 아이들은 무슨 마음으로.... 동시대 사람들이라 이야기를 통감할 수 있군요. 설근님은 아직 현직에서 활동하느라 바쁘시겠어요. 저는 몇 년만에 교직을 떠났기 때문에 못다 이룬 꿈이 가끔 후회되죠.... 오늘도 학생들과 좋은 사이 되시길....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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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초님 안녕하셨어요? 그때 그 남학생 참 운이 좋은 분이였군요. 님 덕에 무사했으니까요. 이 댓글을 보시고 혹시나 인연이 닿아 연락이라도.ㅎㅎㅎ 나라 전체가 난리였으니 대구인들 온전하셨겠어요? 그래도 님은 애국 하셨네요. 건강하세요. 감사...
4.19 로 해서 5,16 까지 그래요 그땐 넘넘 힘들었지요 그런아픔이 있었기에 오늘의 성장이 아닐까요? 그저 애국적인 마음에서 무서움도 모르고 ... 그때의 추억이 주마등같이 스쳐갑니다 ~~~~~~~~~~~
거목님 안녕 하세요? 그때 뵙고 오랜만입니다. 참 힘든 세상을 우리나이 분들은 살았지요. 모두 애국하는 마음으로 뭉쳤고요.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건필하세요.
아직 제게는 선배님 보다 좀 어렸나요?!...대학교 들어가서 한일회담(한일기본조약) 반대 시위 (데모)는 매일이고요 체루탄 으로 눈물을 많이 흘렸던일 잊을수가 없지요.대학가는 온통~~교사가 되서도 유신(헌법)을 좋게 말씀드리라는(학부모,학생들 동네)이해시키라는 훈련(?)을 받은 때가 생각 나네요.ㅎㅎ고모님 살아 계신 동안 열심히 무공해 채소 가꾸셔야 겠어요 ㅎㅎ...귀한 글 좋은 시간 주셔셔 고맙습니다 ^^*()
귀염둥이님도 교직생활을 하셨군요. 지내놓고 보니 어려운 시절에 모두 애국하고 산 것 같네요. 귀한 댓글 주시어 너무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무공해 채소를 가꾸시는 따오기님은 분명 무공해 인간 일것 같습니다.. 고모와 조카의 아름다운 만남이 그림처럼 펼쳐지네요
무공해까진 못돼도 순진하다는 말은 듣고 사는 편이지요.ㅎㅎㅎ 가희님의 사랑이야기에 흠뻑 빠질 정도로.ㅎㅎㅎ 가희님 건필 하시고 행복하세요. 댓글에 감사합니다.
어려운 시절에 서울에 유학을 하셨다니 대단하셨습니다. 휼륭하신 고모부님 덕분도 크다하겠습니다. 소용돌이 치는 격량의 시절을 다행히도 잘도 견디어 내셨습니다.옛 시절을 상기하게 하는 좋은 글 잘 읽고 감니다. 감사합니다.
현준님의 댓글에 힘이 절로 납니다. 알아 보셔서.ㅎㅎㅎ 그때의 용기있는 학생들 때문에 불의는 물러가고, 민주주의가 서서히 뿌리를 내리게 됐지요. 우리나라 좋은 나라를 후세들에게 잘 물려줘야 할 일이지요. 늦은 밤. 이제 들어와서 님에게 답글 드립니다. 건필하세요.
4.19때 데모 .고대생들이 스크랍을 짜고 돌면서 총탄에 맞서 전진하던 모습. 5.16 혁명 우리어린학생들 사이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인기 체류탄 까스의 눈물 흘리던 어린시절로 돌아가 감회가 새롭읍니다. 감사합니다.
낭만님 가슴 속에도 그때의 일이 감회로 남아 있으시군요. 왜 안그러시겠어요?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겪었던 일이기에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박대통령의 구국정신은 우리나라를 살린 셈이지요. 댓글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지나간 격동의 세월을 이렇게 올려주시니 바로 청와대 옆에 있는 학교를 다니면서 얼마나 놀랍고 무서워서 벌벌 떨며 울던 생각이 새롭네요. 이젠 안정된 사회에서 편하게 맘 놓고 살 때도 됐건만....건강하세요
우리들의 파리 특파원이신 시월애님도 댓글을 달으셨군요. 그때가 가장 겁나던 시절이었죠. 무서워서 울음이 터질만큼.....시월애님. 새로운 대통령께 희망을 걸어 보자구요. 대한민국이 안정되고 국민들이 잘 살 수 있는 날이 꼭 올거예요. 기다리자구요. 감사합니다.
그시절은 어려움이 없어다면 그누구도 기만 이겠지요 그수필을 일거 내리다보니 몸전체가 빠저드는것 갓았어요엣일을 기억하게 해 주셨읍니다 살다보면 어려운 일이나 줄거운 일이나 잊고 살지요 무공애 야체 만킥 하세요 ...******
원주에 계신 수노기님이 댓글을 달아 주시니 기분이 좋습니다. 옛일을 기억나게 해드렸다니 감사 합니다. 자주 수필방 들리시어 함께 읽고 댓글다는 재미를 가져 보시길....ㅎㅎㅎ
따오기님께서 그 난시에 대학 초년생이셨군요. 저는그때 중학생이었고,집안에 이대통령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위정자가 계셨기에 정치를 모르고자ㅡ해도 모를수가 없던 때였어요. 어린 나이지만 남들보다는 정권의 전체를 대충은 꽤고있었고 그 부정선거는 너무잘, 너무너무잘알지요. 지난 일이니까 지금 따오기님과 단 둘이라면 빠삭-한 실정을 말씀 드릴수도 있을텐데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기가막혔던 일이 .... 그때 위정자 집안은 참 몸달고 안타까웠었어요. 님이주신글에 열 두세살로 돌아가서 바쁘게 뛰었었네요.ㅎㅎ. 아 ㅡ 집안에 정치하는사람있으면 나 어려도 바뻤다구요.ㅎㅎ 祝:美的生活 !
오월향기님 집안에 정치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려서부터 정치공부 많이 하셨겠네요. 저 보다 퍽 어린 나이로 그 시절을 보냈으니, 나라의 아픔을 깊이 간파하실 수는 없었겠죠. 여하튼 아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오늘의 우리가 있어요. 이제 좋은 길로 나아갈 차례입니다. 감사합니다. 祝 ;日日是好日!!!
한국 근대사의 현장에 서있었던 산 증인이십니다. 그 때 그날들을 덕분에 만나보게 됩니다. 푸성귀를 담아들고 찾아뵙는 마음에 코끝 찡해집니다. ㅎㅎㅎ 모두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요.
안녕하세요? 원참님. 모두 지난 일들이지만 해마다 4월이 돌아오면 만나게 되는 날들이지요. 귀한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