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산의 역사와 비밀
성묘교회. 오늘날의 성묘교회는 12C 십자군들에 의해 재건된 건물로서,
입구가 두 개의 아치로 되어 있으며, 골고다 언덕을 실내에 포함시키기 위해
2층 구조로 만들어졌다. 입구로 들어가서오른쪽 2층에 골고다가 있으며,
왼쪽에는 원형 광장 한가운데에 예수님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무려 45년에 걸쳐
무덤 주위의 거대한 바위를 평지로 쪼아냄
무덤 주위로 거대한 바위를 평지로 쪼아내는 작업은 성묘교회가 완성된 후 무려 45년이나 걸려서 서기 380년이 되서야 마무리됐다.
예수님의 동굴무덤 위치가 원형 광장의 중앙으로 위치하게 되어
사방에 타트인 골고다 바위 언덕이 됨
그 결과 바위굴 무덤은 원형 광장의 한 가운데 자리잡게 됐으며, 무덤에서 동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는 누구든지 바라볼 수 있는 골고다 바위 언덕이 되었다.
638년 성묘교회 방문시 오마르가 기도를 거절,
1009년 이것이 非 회교 성지라는 증거라며 하킴이 완전 파괴
서기 638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아랍 통치자 오마르는 방문하여, 기도해도 좋다는 성묘 교회측의 초빙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만일 그가 이곳에서 기도를 한다면, 이 교회의 기독교적 거룩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겸손의 표시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훗날 서기 1009년 파티마 왕조의 통치자 하킴(Hakim)이 성묘교회를 완전히 파괴하는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만일 오마르가 다른 교회들처럼 이 곳을 이슬람교 사원으로 만들었다면, 비잔틴 시대의 골고다 건축물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전산의 경우에서와 같이, 어쩌면 골고다가 이슬람교의 성지로 둔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1009년 파티마의 무슬림들이 예수님무덤을 감싸고 있는 바위 언덕을 완전 파괴함으로써
예수님무덤의 이스라엘식 전통적 동굴무덤 모습이 완전 변형됨
서기 1009년 파티마(Fatima) 왕조의 무슬림들은 예수님무덤을 감싸고 있는 바위 언덕을 정으로 쪼아내 버렸다. 이때부터 이 곳은 더 이상 무덤이라고 보기는 어렵게 됐다.
1042년 비잔틴 황제 모누마쿠스와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십자군이 1099년부터 50년 동안 성묘교회 재건
서기 1042년 비잔틴 황제 모누마쿠스는 파괴된 성묘교회를 재건했으나, 다시 1073년 셀주크투르크(Seljuk Turk)의 전성기인 제3대 술탄 말리크샤(Malik-Shah:1072~92)의 침입을 받았다.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십자군들은, 그 후 50년 동안 예수님무덤과 골고다 언덕 사이에 교회당을 새로 건설하면서 성묘교회를 재건했다.
비록 1808년의 지진과 1927년의 화재로 여러 부분이 파괴됐지만, 오늘날의 성묘교회는 십자군 시대의 건물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것이다.
새로운 골고다를 찾자는 운동이 시작
조용한 정원 한 가운데 놓였을 요한복음서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무덤을 예상한다면, 온갖 제의 기구와 향불과 등잔이 어지럽게 장식된 성묘교회의 현실은 실망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더욱이 골고다의 성묘교회는 라틴 카톨릭,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시리아, 콥트, 에티오피아 기독교 등 모두 여섯 교파가 각각 한 부분씩 차지하며 소유권을 주장하는데 반해서, 개신교의 자리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새로운 골고다를 찾자는 운동이 시작된다.
1883년 고든 장군이 골고다로 인정한 정원무덤 발견으로
골고다 성묘교회의 역사적 신빙성이 의심받기 시작
1894년 영국 성공회 소속의 ‘정원무덤협회’는 예루살렘 성벽 북쪽에 위치한 한 정원지역을 사들였다. 이 곳에 위치한 무덤과 근처의 바위 언덕은 1883년 영국의 고든(C. Gordon) 장군에 의해 골고다로 인정된 곳이기도 하다. 이 곳은 일단 예루살렘의 성벽 밖에 위치하고 있고, 정원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근처의 바위 언덕이 해골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적격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이 때부터 골고다 성묘교회의 역사적 신빙성이 의심받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