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은 어떤 무늬를 가지고 있을까. 상처가 기억이 되는가 아니면 기억을 끌어올리는 과정이 우리에게 생채기를 내는가. '아픔', '기억', '치욕', '서러움'과도 같은 추상명사들이 제 나름대로 따뜻한 부피를 갖고 움직이고 춤추고 피 흘릴 수 있을까. 지난 봄에 나는 지독한 감기를 앓았다. 한 철을 보낸다는 것이 단순히 옷을 바꿔 입는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것으로 다가왔고 몸이 뜨거웠다. 그때 애인이 전화로 읽어주던 <꽃피는 시절>에는 가지마다 가지에 박힌 옹이마다 애써 꽃을 틔우고 떨구어야 하고 끝내 스스로 붉게 으깨어진 고통의 모습이 있었다. 내가 품고 있는 아픔과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기억과 창피함들이 이성복의 시에서는 구체화된 모습을 갖추어 움직이고 심지어는 춤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여러 계절을 이성복을 읽었지만 아직 내게는 부족함이 많아 이 글을 쓰는 내내 후회하기도 했다. 부디 이 글이 존경하는 시인 이성복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빈다.
약력
시인 이성복은 1952년 경북 상주읍 오대리에서 아버지 이한구와 어머니 송정남의 오남매중 넷째로 태어난다. 위로 누나 둘과 형 아래로 여동생이 있다. 7살 때 (1959년) 상주 남부 국민학교에 입학, 백일장등에 참가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5학년 2학기가 되는 11세때 서울 효창 국민학교로 전학하여 고모댁에서 기거했고 서울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는 모든 식구가 서울로 솔거를 하여 비로소 안정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1968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평론가 진형준을 고교 동창으로 만난다. 또 미래의 소설가 이인성을 한 해 후배로 만나고 시인인 김원호 선생의 국어시간을 통해서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다. 고 2때 창작과 비평을 통해 김수영의 추모 특집을 읽고 교내 백일장에서 입선하기도 한다.
1971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불문학과에 입학해 교양과정부 전임강사로 부임한 김현 선생을 처음 만나게 된다. 교양 과정부 문학상에 시 <知, 不知> 등을 투고하나 낙선하고 20세가 되는 72년에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 [형성]에 편집기자로 들어간다. 토니오 크뢰거, 크눌프 등 독문학을 열심히 읽는다. 이어 73년에 황지우. 김석희, 정세용 등과 교우, 4월에 해군에 입대하여 릴케, 도스토예프스키, 니이체를 독서카드를 만들어 체크하면서 읽는다. 군복무중에 신춘문예 투고도 할만큼 간간이 습작을 하지만 다시 낙선한다.
1976년 24세에 제대 후 복학, 불어에 대한 애정으로 열심히 공부하며 황지우와 함께 교내 시화전을 하거나 정과리, 이인성 등과 만난다. 산문집 [꽃핀 나무들의 괴로움]에 실린 소설 [천씨행장]이 완성되고 <서시>가 씌어진다. 문리대 문학회 시화전이 열리고 황동규 시인을 처음 찾아가 인사한다. 25세때 김현 선생에게 노트 한 권 분량의 시를 보이고 1977년 [문학과 지성] 겨울호에 <정든 유곽에서>와 <1959> 두 편으로 등단한다. 1978년 대학 신문사 전임기자로 들어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많은 시들이 이 시기에 씌여진다. 이성복이 '내 삶의 제1 황금기'라고 말하는 시절. 김현 선생의 주선으로 <그 날>등을 발표하고 대학원 준비를 한다.
1980년 5월에 같은 대학원 동기이던 김혜린과 결혼. 시인 박남철과 알게 되며 오규원 선생의 주선으로 김혜순, 최승자 등과도 알게 된다. 1982년 대구 계명대학교에 강의 조교로 부임,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로 제 2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무크지 [우리 세대의 문학1]를 창간하며 동인으로 참가했다. 3월에 첫 아이 효원 출생. 이어 83년에 둘째 아이 지원 출생.
1984년 프랑스의 엑스 앙 프로방스에 부인과 함께 유학하면서 처음으로 이국생활을 한다. 33세가 되는 1985년에 귀국해 동양 고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5월에 남해금산을 여행한다. 셋째 아이 수유 출생, 1986년에 남해금산이 출간된다. 35세 때 계명대학교 정문 앞 대명한의원의 서찬호 선생으로부터 대학, 중용, 주역 등을 일년 육 개월 가까이 배운다. 1988년 중문과 교수들의 논어 윤독회에 참여하고 [문예중앙]가을호에 [연애시와 삶의 비밀]을 일기 형식으로 발표한다. 1989년에 제 4회 소월시 문학상을 수상한다. 1990년 산문집 [그대에게 가는 먼 길]과 [꽃핀 나무들의 괴로움]과 [그 여름의 끝]이 출간된다.
1991년 39세때 파리로 유학한다. 이성복의 기숙사 방은 매주 토요일날 개방되어 여러 전공의 한국 유학생들이 모여 서로의 학문을 교환하는 장소가 된다. 이성복이 말하는 제2의 황금기이다. 1992년 귀국하여 이병헌의 누드를 소재로 <소묘>를 쓴다. 1993년 제 4시집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을 출간, 현재 계명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통의 춤
이성복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징후는 '고통'이다. 특히 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는 아픔과 고통의 리드미컬한 춤판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아픔은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이다. 그러나 모두 병들었는데도 아무도 아프지 않다면? 한없이 어두운 강가를 돌아왔어도 병 이름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즉 아픔과 고통 사이의 간극에서, 그 미세한 틈에서 시인의 시가 흘러나온다. 그렇다면 시는 무엇인가? 이성복은 그의 시에서 유곽을 정든 곳이라 했다. 그 곳에는 사랑과 미움이 뒤섞인 누이가 있으며 아버지가 있고 아픔이 없는 나라로 가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즉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시인 자신이 있다. 남자들에게 있어 '유곽'이란 즐거움과 치욕스러움이 뒤섞인 역설적인 곳이라고 한다. 그 곳이 이제는 이미 정들어버린 상처가 되었다. 칼로 곪은 부분을 떼어낼 수도 없고 지속되는 아픔에 시인은 무기력과 불감증의 경지에 이른다. 말하자면 이성복의 시는 더러운 삶의 틈새에서 내지르는 시인의 '無痛의 비명'인 것이다.
시가 우리 삶의 더러운 것들을 기억하고 스스로 더러운 기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은 삶 자체가 병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시가 삶이라는 병을 치유할 것으로 믿지는 않는다. 그가 확인하는 것은 다만 시는 끊임없이 삶을 소독 혹은 정화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병은 더 깊어지지도 나아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시의 역할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시의 역할은 삶의 병을 유지시키는데 있다. (이성복, 당집 혹은 죽은 대나무의 기억)
이러한 이성복의 고통의 근원지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정신 내부에 있다. 그는 이렇게 더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한탄하는 대신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며 너는 나의 방이고 풀밭이고 공기와도 같은 존재라 말한다. 동시에 '우리는 어디에서 왔냐, 우리는 누구냐'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제시한다. 즉 '나는 무엇이고 너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인데 시에서 나타나는 '나'와 '너'의 경계는 모호하다. 이를테면 '흐르는 물과 내리는 물의 서로 몸바꾸기, 그대가 물의 발이라면 나는 물의 발가락'과도 같은 관계이다. 그는 사랑하는 '너(그대, 女子, 당신)'를 갈망하고 그로 인해 숙명적인 고통의 연애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 '너'라는 존재는 시인 자신이 만들어낸 상처이고 그것이 곪아 가는 아픔이고 흉터이고 마지막으로 부대끼며 헤집고 들어가야 할 것으로 남는 것이다.
지혜로는 지혜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탈출구가 없는 딜레마입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에이. 욕 한마디 하고 제3의 길로 뻗어나갈테지만 난 안됩니다. (이성복, 중년 시와의 불화)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에서 보여준 그의 끝없는 연상작용과 같이 이어지는 어긋남, 모순, 딜레마속에서 삶을 유지시키는 것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치욕과 서러움 등과도 맞닿아있어 그의 두 번째 시집, 세 번째 시집을 예고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정든'과 '유곽'의 부조화, 살아야 하는 이상적 삶과 일상의 부조화 속에서 아버지는 씹쌔끼가 된다. 그러나 더러운 세상을 그래도 살게 하고 무능한 아버지를 버릴 수 없게 하는 사랑은, 결국 우리가 매일 먹는 쌀밥과도 같은 치욕스러운 삶이 된다.
[남해금산]에 와서 그가 살아내야 할 현실은 더욱 지친 사랑이 된다. 즉 그 전까지는 삶을 살아내는 동안의 사랑이었지만 이제는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픈 것이 된다. 구역질나는 삶인 것이다. 이것이 곧 [남해금산]의 핵심어라고도 할 수 있는 '치욕'이 된다. 고통을 극복하고 때늦은 사랑에 대하여 노래하겠다던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삶과 고통은 그 위치를 전도하여 시인을 실패의 구렁으로 몰아넣는다. 삶은 너무나 헐거워지고 이제 내보내 주세요! 하면서 악을 쓰지만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 치욕의 쌀밥을 매일 먹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그 욕망을 지울 수밖에 없는 시인은 외부로부터 오는 사랑의 아름다움, 기적처럼 떠오르는 그것을 찾으려 한다. 다시 치욕이 사랑으로 역전되는 순간, 그의 연애시는 탄생한다.
[그 여름의 끝]에서 그의 시는 이제 사랑으로 가는 길의 막다른 골목에서 사랑의 내부로 들어간다. 즉 지금까지 나의 내부에 사랑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뒤집어 나의 내부에 不在하는 그대를 기다리고 그 문가에서 서성거린다. 우리가 집이라 부르는 그것도 제 집을 찾아 멀리 떠났듯이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떠나버린 집과도 같이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해 주지 못하고 갈수록 멀어진다. 그러나 처음부터 나와 너의 경계는 모호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사랑을 찾아 떠나는 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밝힌바와도 같이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이다. 하지만 당신을 어떻게 떠나보내야 할지 알지 못해 그의 고통과 서러움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서러움은 사랑보다 본질적이고 영구한 것이다. 그가 그의 초기시에서 '나는 너의 방'이라 했다. 네가 있어서 나의 사랑이 있었고 고통은 그에 수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항상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의 不在를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한 서러움을 안고 사는 수밖에는 없다. 그 곳에는 나도 그대도 없고 단지 서러움이 자리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네 번째 시집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이 씌어진다.
한때 그는 벌집같이 많은 눈을 가졌네. 이제 씨가 빠진 해바라기 꽃대궁처럼 그의 눈은 텅텅 비었네. 그의 고통은 말라버렸네. 겨울에 그의 꽃대궁이 꺾여 눈발에 묻힐 때 그의 생애는 완성되네. 그가 본 것은 환상이었네. (천사의 눈)
절망 끝에 온 사랑, 모두 지우고 텅텅 비운 상태에서 그래도 계속되는 삶이 그 삶의 숨고르기가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에 나타나있지만 나로서는 시인의 마지막 시집의 세계를 그리고 그 이후의 침묵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문재 시인과의 인터뷰의 일부로 그 대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첫 시집을 펴내기 직전인 70년대 말이 시와 결혼한 행복한 신혼이었다면 그 이후에는 계속 시와 불화였습니다. 불화 속에서 아이들(시집)을 생산했지요. 지금은 별거 상태입니다. 이번 시집도 밖에서 보면 '부부관계'가 좋아보일 듯도 하지만 머리는 안따라가고 욕심만 승합니다. 욕심을 줄이면 쉽고 자연스러운데 나는 자주 이렇게만 생각합니다. 고민을 너무 많이 하다보면 프로포즈도 못하고 말지요.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