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OLD&WISE> 12월호 표지는 시골집 마당의 아궁이와 가마솥으로 장식했습니다. 가마솥에 밥을 지어 이웃과 나눠 먹으며 따뜻한 정을 주고받은 우리 선조의 삶의 풍경은 고객에게 언제나 변함없는 믿음과 사랑으로 따뜻한 희망을 전하는 KB국민은행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한국의 美_나눔
따뜻한 삶, 나눔
희망과 설렘으로 시작한 한해도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GOLD&WISE>는 12월을 맞아, 아름다운 삶의 가치인 ‘나눔’을 마음속 깊이 새기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촬영장소 경북 안동 수애당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넘어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같은 세계적 부호들의 통 큰 기부는 오래전부터 잘 알려져 익숙하다 보니 상상을 초월한 액수가 이어져도 감동보다는 솔직히 ‘얼마나 돈이 많기에’ 하는 놀람에 그치기 일쑤였다. 그런데 올해 서아프리카발 에볼라 바이러스 공포를 지켜보며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반드시 영토나 국력의 크기로만 구분되는 것은 아님을 새삼 느꼈다.
신윤복 ‘한정도’ (50.0×35.5cm, 조선 시대, 국립중앙박물관) <뒤뜰의 정경>
부나 명예, 지위는 홀로 분연히 애쓴다고 해서 이뤄지지는 않는다. 일정 부분 사회적 구조가 뒷받침해주고 수많은 사람이 나름의 방식으로 지지하기에 다져지는 것이다. 지도층의 솔선수범은 그래서 중요하다. 거부(巨富)가 모두 명가를 만들지 않듯 자리에 맞는 책임과 의무가 뒤따라야 세인의 인정을 받는다. 백성을 생각하고 위치에 맞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선비의 가르침, 이것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도덕적 권위의 원천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고비를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선인의 용기는 삶의 위로이자 격려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부유층의 기부 문화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태도를 통해 확립되는 진정한 나눔을 말한다. 힘센 자들의 독식과 횡포 때문에 고된 삶을 산 수많은 민초에게 백성의 안녕을 걱정하고,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는 모범을 보인 이들은 그래서 더 소중했다. 패악이 도사리던 한 시대에 탄생한 이야기가 지금까지 우리 심금을 울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금 술통의 좋은 술은 천 사람이 흘린 피요, 옥쟁반의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된 사실을 숨기고 걸인의 모습으로 변학도의 생일잔치에 찾아와 읊은 시다. 권력을 무기로 백성의 고혈을 짜낸 이들에게 보내는 경고문인 셈이다. 이몽룡은 이 시를 읊고 나서 사회악에 대한 대대적인 처단을 시작한다. <춘향전>의 클라이맥스다. <춘향전>이 첩첩산중 산간벽지에서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며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이야기로 사랑받는 이유가 신분을 뛰어넘는 춘정 때문만은 아니다. 시대를 초월해 사회를 바로잡는 힘이 거기에 있어서다.
이 힘으로 또 한 번 우리를 열광시킨 이야기가 바로 <명량>이다. 영화적으로 높은 수준이 아니었음에도 <명량>이 국민의 사랑을 받은 건 사회가 어려울수록 빛을 발하는, 이순신 장군의 책임감 높은 리더십 때문이다.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이들을 보며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질서를 바로잡는 모범적 인물을 원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정부에서 식량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자 병사들을 먹이기 위해 스스로 무밭을 갈고 미역을 땄다. 하사품이 도착하면 옷 없는 군사가 몇인지 헤아려 빠짐없이 지급하고 때로 잔치를 열어 사기를 높였다. 또 자신은 어머니 상중이라 먹을 수 없으면서도 병사들에게 고기를 나눠주며 살뜰히 건강을 챙겼다. ‘수군의 몸이 나의 몸’이라면서 수군의 가장 높은 곳에 있으나 언제나 자신의 몫은 맨 마지막에 챙겼다. 이에 백성은 스스로 찾아와 곡식을 바쳤고 후원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자리만으로 존경을 받지는 않는다. 이순신을 한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성웅으로 추대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모습 때문이다.
보물 제 1495호인 명재 윤증 초상화.
백의정승, 명재 윤증
명재의 선비 정신을 높이 산 왕은 나이 팔순이 넘은 그에게 우의정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그는 이때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천수를 누린 만큼 인조부터 숙종까지 4대 임금을 모셨는데, 명재는 임금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고 정승의 반열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명재가 딱 한 번 벼슬에 응하려고 한양으로 올라간 일이 있다. 숙종 9년, 그의 나이 55세 때다. 첫째는 지역 감정을 해소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17세기 지역 감정의 피해자인 남인을 돌봐주자는 취지의 ‘서인은 남인의 쌓인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는 ‘외척의 세도를 막지 못하면 안된다’, 셋째는 ‘당이 다른 자는 배척하고 당에 순종하는 자만 등용하는 풍토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였다. 명재는 남계에게 이 문제들이 해결되겠는지를 물었고, 남계는 고민 끝에 모두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이 답을 들은 명재는 결국 벼슬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사회를 바꾸지 못하는 벼슬은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그의 결단에 영향을 받은 박세채와 송시열도 모두 낙향했다.
이후 명재는 고향에 머물면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에 매진했다. 조선 후기 최고의 명문 사립 학교인 종학당(宗學堂)을 통해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 것 역시 그의 업적 중 하나다. 종학당은 원래 파평윤씨 문중의 자녀와 내외척 처가의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문중 서당이다. 그러나 명재는 배움에 신분 차별을 두지 않기 위해 중인 집안 자제도 제자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친족에게도 지나치게 이익을 따르지 말라 명했다.
그의 일생을 담은 <명재언행록>에는 “이익을 따라 행하면 원망이 많다. 우리 가문이 선대 이래로 남에게 원망을 듣지 않은 것은 추호도 남의 일을 방해하지 않았던 데 있다. 이는 자손이 마땅히 삼가지켜야 할 일”이라고 기록돼 있다. 동학운동이 일어났을 때 동학군이 존경받는 어른의 집이라며 명재의 집은 조용히 피해갔다고 한다. 명재의 가르침은 후대에도 이어졌다. 9대손 윤하중은 1939년 흉년이 들자 주민을 돕기 위해 일부러 공사를 벌이고 대가로 쌀을 나눠주었다. 요즘은 명재의 업적보다 고택의 아름다움으로 더 유명하다. 고택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담백한 건축미와 함께 대를 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조선 사대부가의 깊은 품위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 격인 경주 최부잣집의 목조 곳간은 쌀 800석을 채우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곳간이었다. 심한 흉년이 들 때마다 문을 열고 백성의 주린 배를 채워주며 구휼에 앞장선 최부잣집 가문의 정신은 후손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현대에 더 큰 울림을 주는 최씨 집안의 육훈
선비로서 갖춰야 할 소양과 양반으로서의 신분은 유지하되 정치에 깊이 관여해 필요 이상의 권력을 갖지 말라는 뜻이다. 편법으로라도 대를 이어 고위직을 차지하려는 지금의 행태에 일침을 가하는 덕목이다.
이 부분이 최씨 집안이 민심을 얻은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돈의 숫자란 끝이 없어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면 일정 수준에서 멈출 수가 없다. 확고한 사회의식과 인내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쉽게 실천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소작인을 관리 감독하고 때로 횡포를 부리는 ‘마름’을 따로 두지 않았다. 중간 관리인이 없어지니 소작농에 돌아가는 이윤은 더 커졌다.
흉년은 부자가 재산을 불릴 수 있는 기회다. 요즘도 많은 기업이 위기를 기회의 발판으로 삼아 성장하고 이를 성공의 열쇠라 포장하는데, 그 기회란 것이 남의 불행을 저당잡는 경우가 있다. 이런 행태가 계속되면 부는 모으되 사회로부터 어떤 존경도 받지 못하는 천박한 기업으로 전락한다. 이 덕목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정확히 인지하고 강조한 가르침이다. 최부잣집은 이런 실천을 통해 정의가 살아 있는 경제 활동을 하며 이웃이 최부잣집 부의 기틀을 다진 최동량의 맏아들 최국선은 어려운 사람이 돈을 빌리기 위해 담보 문서를 가져오면
부잣집에는 이런저런 객이 끊이지 않는데, 매몰차게 몰아내거나 소금을 뿌려 내쫓는 집도 많았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길손을 후히 대접해 많을 때는 하루 100명이 넘었다는데, 1년 소작 수입의 3분의 1을 과객 대접에 사용할 정도였다. 사랑채에 손님이 넘치면 쌀과 과메기를 들려 소작인의 집으로 보냈다. 손님을 대접한 소작인은 소작료를 면제 받았다. 이렇게 길손을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덕을 쌓고 인심을 얻음과 동시에 다양한 손님들에게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육훈 중 가장 유명한 말이다. 최부잣집은 보릿고개가 되면 한 달에 쌀 100석 정도를 이웃에 나눠주었다. 흉년이 심할 때는 창고가 바닥이 날 정도로 모두 퍼주었다. 최국선은 이를 두고 “주변 사람이 굶어 죽는데 홀로 재물을 지켜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에서는 어려운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퍼준 반면 가족에게는 근검절약을 강조한 가풍이 드러난다. 이것이야말로 12대까지 부를 유지한 비결이다. 수백 년을 지켜온 부는 훗날 독립운동과 대학 설립 자금으로 쓰였다. 일제 강점기, 최국선의 9대손 최준은 백산 안희제와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헌신했다. 광복 후에는 남은 재산을 전부 대구대학교와 계림학숙을 세우는 데 기부했다. 그 결과 현재 이 가문은 평범한 중산층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부의 끝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한국의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칭송하고 있다.
제주를 살린 조선의 여성 거상, 김만덕
그러나 이것만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지는 못할 터. 1790~94년의 5년간 제주에 심각한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정조가 급하게 구호 식량을 보냈지만, 풍랑으로 수송 선박까지 침몰하면서 백성의 고통은 극심해졌다. 이때 김만덕은 전 재산을 풀어 급히 쌀 500여 섬을 사다 제주 백성에게 나눠주었다. 당시 이렇게 구해낸 사람이 제주 백성의 3분의 2에 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정조는 김만덕을 궁으로 불러 여성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자리를 하사했다.
후대는 그녀의 선행을 기리고 정신을 잇기 위해 김만덕 기념사업회와 봉사단, 나눔 쌀 만섬 쌓기, 김만덕 국제상 등의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1922년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이 속한 대한독립단의 명의로 일본 정부에 보낸 서신과 이회영의 유품인 중국식 의복이다. 명예나 지위에 대한 욕심 없이 우당은 형제·가족과 함께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혁명가의
불의를 좌시하지 말라, 우당 이회영
당시 그는 “대대로 명문이란 소리를 듣는 우리 가문이 왜놈의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이어간다면 어찌 우당의 가족은 두만강을 건너면서 뱃사공에게 뱃삯의 두 배를 지불하고 “일본 경찰에 쫓기는 독립투사가 돈이 없어 헤엄치려 하거든 부디 배를 태워주시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착한 만주에서 그 가족은 독립군 양성의 중추 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1930년 폐교될 때까지 이 학교를 거쳐간 독립군 수천 명이 후일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정작 우당의 가족에게 찾아온 것은 가난으로 인한 갖은 고생이었다. 중국의 빈민가를 돌며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끝내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문 끝에 옥사하거나 병사했다. 조선 최고의 가문과 모든 명예를 거머쥔 명문가가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이토록 용기 있는 선택을 한 것을 후손은 잊지 말아야 한다. 권력의 이면은 곧 책임이라는 사실 또한.
이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특권층의 미담에 그치지 않는다. 현대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그 의미를 되찾으려면 계층 간의 차이, 소외의 지대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기준을 달리하면 소외되는 자는 언제든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 현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며 이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자료협조 국립중앙박물관, 독립기념관, 충남역사박물관 참고도서 <조용헌의 명문가>(조용헌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노블레스 오블리주>(예종석 지음, 살림 펴냄)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이 깃든 문화재를 지키다
그중 서울에서 으뜸가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간송 전형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문화의 정수라 할 고려청자, 훈민정음 해례본, 혜원 신윤복 그림 등 값을 매길 수 없는 국보급 문화재가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산을 팔아 사들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문화재는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얼을 모으고 이어주는 고리임을 알고 지켜낸 전통 문화 수호자였다.
선비, 농부의 경험에 지혜를 더하다
성호 이익의 애민 정신은 농촌의 현장에서 백성의 삶을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시도 농민의 삶을 외면한 적이 없었고, 나라의 백성이 궁핍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늘 고민했다. 성호에게 도는 ‘천하에 곤궁한 백성이 없게 하는 것’이었다. 선비가 할 일은 농부의 경험에 지혜를 더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농민들이 벼를 심는 데는 능하지만 벼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벼의 계보를 정리한 <도보>를 통해 지식 나눔을 실천했다.
에디터 조민진 포토그래퍼 김재이 어시스턴트 이선우 스타일리스트 양은숙 어시스턴트 김소혜, 박은미 자료협조 간송미술관 촬영장소 경북 안동 수애당
최씨 고택의 사랑채. 부를 과시하지 않은 담백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이다.
경북 경주
연일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고, 차디찬 겨울바람에 마음마저 얼어붙은 요즘이다. 그래도 거리 곳곳에 울려 퍼지는 자선냄비의 종소리를 듣노라면 마음 한쪽이 군불 지핀 듯 따스해진다. 이번 달 여행은 경주로 떠난다. 첫 목적지는 최부잣집으로 알려진 교동 최씨고택이다.
최씨고택을 이야기하기 전, 먼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말하자. 프랑스에서 비롯된 이 말은 높은 신분에 뒤따르는 사회적 책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노블레스’는 원래 귀족이란 뜻으로 사회적 상층을 가리키며, ‘오블리주’는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만나다
부자는 3대를 넘기기 힘들다지만, 최부잣집은 300여 년 동안 부를 유지했고, 마지막에는 기부와 독립군 자금, 그리고 교육사업에 모든 재산을 써버림으로써 영원한 부자로 남았다.
그 역시 처음에는 여느 부자와 다르지 않았다. 당시의 관행대로 8할의 소작료를 받았고, 보릿고개에 양식을 빌려주고 많은 이자를 붙였다. 그런 최국선의 의식이 바뀐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도적 떼에게 침입을 당했는데, 그 도적 무리 안에 자신의 소작농과 그들의 가솔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도적 떼는 양식은 손도 대지 않고 장리를 준 증표인 채권 서류만 가져갔다. 도적들이 돌아간 뒤 주변 사람들은 도적을 잡아야 한다고 했지만, 최국선은 외려 80% 이상 받던 소작료를 50%로 낮춰버린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때부터 최부잣집의 나눔과 상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시작된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도 최부잣집과 인연이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황태자였던 구스타프 6세는 신혼여행차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당시 조선의 명가인 최부잣집에서 묵은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최준 선생의 인품에 반했다고 한다.
1 한옥의 그윽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최씨고택. 3 사랑채 뒤를 돌아 사당으로 가는 길, 그윽하고 소담한 정원이 숨어 있다.
2 신라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다보탑. 4 경주의 야경. 해가 지면 첨성대와 계림에 조명이 들어와 신라의 달밤을 밝힌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다보탑이 이토록 아름다운지
다시 찾은 경주는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키득거리며 찾았던 수학여행지 경주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마주 보고 선 두 탑은 전혀 다른 매력으로 보는 이를 감탄시킨다. 다보탑이 화려하면서도 세밀한 형상미를 가지고 있다면, 석가탑은 단순하면서도 균형적인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1 조선 시대 대표 서원 옥산서원. 각 현판의 글씨는 조선 최고 명필들의 작품이다.
3 감포항 가는 길. 기암괴석이 가득한 동해바다를 옆에 두고 달린다.
4 감포에서 포항으로 이어지는 해안 도로. 겨울 바다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5 문무왕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자신의 유골을 동해에 뿌리게 했다. 수중 왕릉 대왕암. 새해를 맞는 일출 여행지로도 인기다.
6 한적한 포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감포항.
바닷길 따라 즐기는 낭만 드라이브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 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이며 인력을 수고롭게할 뿐 죽은 혼은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숨을 거둔 열흘 뒤에는 불로 태워 장사할 것이요, 초상 치르는 절차는 힘써 검소와 절약을 좇아라.’
문무대왕릉의 일출은 장관 그 자체다. 거센 파도를 뚫고 문무대왕릉 위로 불쑥 솟아오르는 커다란 햇덩이는 보는 이에게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해마다 이맘때면 일출을 촬영하기 위해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몰려든다.
1 황룡사지에 남아있는 돌무더기들.
2 분황사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전탑이 있다.
3 안개 자욱한 황룡사지. 장륙존상이 자리했던 빈터가 쓸쓸하기 그지없다.
돌에게 듣는 신라 천년의 이야기
어떤 돌에는 연꽃을 새겼고, 어떤 돌에는 부처님 얼굴을 새겼다. 그 돌들 위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황룡사지에 천천히 깃드는 어둠을 보노라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천년을 거슬러 신라인의 기도와 정성에 가 닿는다. 황룡사지에서 그렇게 한나절을 보내다 일어설 때쯤이면 어느새 마음 한쪽에도 자그마한 폐사지(廢寺址)가 만들어진다. 그 폐사지 위에는 별과 달이 떠서 유적처럼 흩어진 삶의 부스러기를 비춘다.
강퍅한 세상을 살아내느라 잊고 있던 고맙고 애틋한 이름들, 그 부스러기는 각기 모두 빛나며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겨울 감포
감포는 경주시 동쪽의 작은 어촌이다. 빛의 바다 영일만에서 호미곶을 거쳐 구룡포로 이어지는 해안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신라 문무왕의 숨결이 오롯이 깃든 바닷가에 닿는다.
…부왕부래(浮往浮來) 전해주신/ 지금은 감은고탑만이/ 남의 애를 끊나니.
글 박경수(소설가) 포토그래퍼 최충식
INFORMATION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경주IC로 나온다. 대릉원 앞에 넓은 주차장이 있다. 황룡사지는 구황동에 있는데, 국립경주박물관 앞 사거리에서 안압지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 500m가면 황룡사지가 나온다. 분황사에서 황룡사지로 들어갈 수도 있다. 차는 분황사 입구에 세워둬야 한다. 감은사지는 경주IC에서 직진해 4번 국도를 타고 감포 쪽으로 가다가 양북면 어일리에서 929번 지방도를 따라 양남 쪽으로 6. 5km를 가면 길 왼쪽 산자락 아래 감은사지가 보인다.
GOLD & WISE KB Premium Membership Magazine
|
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