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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한국의 美_나눔 / 따뜻한 삶, 나눔
ysoo 추천 0 조회 116 15.12.06 23: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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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WISE> 12월호 표지는 시골집 마당의 아궁이와 가마솥으로 장식했습니다.

가마솥에 밥을 지어 이웃과 나눠 먹으며 따뜻한 정을 주고받은 우리 선조의 삶의 풍경은 고객에게 언제나 변함없는 믿음과 사랑으로 따뜻한 희망을 전하는 KB국민은행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한국의 美_나눔

 

따뜻한 삶, 나눔

 

희망과 설렘으로 시작한 한해도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GOLD&WISE>는 12월을 맞아, 아름다운 삶의 가치인 ‘나눔’을 마음속 깊이 새기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KB국민은행 고객 여러분,
행복한 세상의 밑돌인 작지만 위대한 힘, 나눔을 통해 가슴 따뜻한 연말 보내십시오.


에디터 조민진 캘리그래피 강병인
포토그래퍼 김재이 어시스턴트 이선우 스타일리스트 양은숙(스튜디오 밥)어시스턴트 김소혜, 박은미
소품협찬 누비이불ㆍ반짇고리(금단제)

촬영장소 경북 안동 수애당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넘어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같은 세계적 부호들의 통 큰 기부는 오래전부터 잘 알려져 익숙하다 보니 상상을 초월한 액수가 이어져도 감동보다는 솔직히 ‘얼마나 돈이 많기에’ 하는 놀람에 그치기 일쑤였다. 그런데 올해 서아프리카발 에볼라 바이러스 공포를 지켜보며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반드시 영토나 국력의 크기로만 구분되는 것은 아님을 새삼 느꼈다.


흔히 말하는 ‘나눔’은 자신이 가진 것을 덜어 다른 이와 함께한다는 뜻이다. 가진 것이 있어야 나눌 수 있음은 당연지사지만 무엇까지 나눌 수 있고, 나눔의 정도가 어디까지인지에 이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나눔은 덜어주는 것이다. 그러니 필요 최소한 자신의 것은 나눔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생명이 나눔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까닭이다.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치사율이 한때 90%를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으니 전 세계 국가 대부분이 자국으로의 확산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무렵 서아프리카 현지에서 의료 활동을 하던 미국인 의사가 감염되어 본국으로 이송되는 일이 벌어졌다.


여러 논란이 일었다. 만약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설령 우리 국민이라도 국내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 ‘국제 행사 참가자 중에도 해당 지역 출신은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 등등.


미국이나 영국 등 서방 의료진 중 몇몇 사람이 감염되어 본국으로 송환되고, 일부에서는 추가 감염의 공포가 확산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앞선 의료 환경의 적절한 조치로 추가 감염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고, 감염된 그들도 대부분 완치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 죽음의 땅으로 되돌아가는 젊은이까지 있는데, 그의 부모는 ‘봉사 현장의 영상에서 아들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였기에 반대할 수 없었다’며 ‘아들의 진정한 행복’을 인정했다.


뜬금없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생명을 나누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또 그런 나눔에 국가가, 이웃이, 부모가 담담히 동참하는 크기가 부럽고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도 12월 13일 ‘에볼라 바이러스 긴급구호대 1진’ 10명이 시에라리온 현지에 파견된다. 더욱 놀라운 일은 처음 파견 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정치권을 비롯한 일부의 우려와 달리 3.5 대 1의 경쟁률까지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아마 비슷한 GDP나 경제 규모, 인구나 국토 면적을 가진 나라 중에서 선뜻 찾기 어려운 사례일 것이라는 생각에 뿌듯하기 이를 데 없다.


솔직히 매년 한 해를 마무리할 때마다 나눔의 온도계까지 설치하는 모습이 조금은 씁쓸했다.
나눔의 근본은 측은지심과 연민이고,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는 겸양이 도리라고 여겨온 까닭이다. 그럼에도 세상의 어둡고 추운 구석을 돌아보자는 진심 어린 이들의 호소에는 얇은 지갑이나마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사회에는 왜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이 나오지 않을까? 그러나 청맹과니의 넋두리였던 모양이다.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죽음이 넘실거리는 땅으로 향하는 지원의 대열도 경쟁이었으니, 우리 사회의 성숙은 상상을 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대기업이 출연해 벌써 40주년을 맞은 고등 교육 재단도 있고, 청년의 미래를 지원하는 각종 장학 재단, 국제적 지원이나 자선을 위한 단체도 부지기수다. 부의 편향에 기댄 졸부가 되어 생색내듯 기부하며 특혜를 기대하는 여느 나라의 그것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 않은가.


우울한 일 많은 한 해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희망은 유효한 우리다. 내친 김에 생명의 나눔까지는 못해도 측은지심은 넘어봐야겠다. 더불어 ‘긴급구호대 1진’에게 뜨거운 박수와 함께 신의 가호를 기원하는 바이다.


글 김정현(소설가) 사진 안수현(여행 칼럼니스트) 촬영장소 경주 교동 최씨고택

 

 

 

신윤복 ‘한정도’ (50.0×35.5cm, 조선 시대, 국립중앙박물관) <뒤뜰의 정경>
정자관을 쓴 선비가 단정하게 앉아 마당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담은 풍속화로, 선비 정신의 요체는 사회 지도층의 책임과 의무를 가리킨다.

 

 

부나 명예, 지위는 홀로 분연히 애쓴다고 해서 이뤄지지는 않는다. 일정 부분 사회적 구조가 뒷받침해주고 수많은 사람이 나름의 방식으로 지지하기에 다져지는 것이다. 지도층의 솔선수범은 그래서 중요하다.

거부(巨富)가 모두 명가를 만들지 않듯 자리에 맞는 책임과 의무가 뒤따라야 세인의 인정을 받는다. 백성을 생각하고 위치에 맞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선비의 가르침, 이것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도덕적 권위의 원천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고비를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선인의 용기는 삶의 위로이자 격려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부유층의 기부 문화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태도를 통해 확립되는 진정한 나눔을 말한다. 힘센 자들의 독식과 횡포 때문에 고된 삶을 산 수많은 민초에게 백성의 안녕을 걱정하고,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는 모범을 보인 이들은 그래서 더 소중했다. 패악이 도사리던 한 시대에 탄생한 이야기가 지금까지 우리 심금을 울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금 술통의 좋은 술은 천 사람이 흘린 피요, 옥쟁반의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도 함께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드높구나.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된 사실을 숨기고 걸인의 모습으로 변학도의 생일잔치에 찾아와 읊은 시다. 권력을 무기로 백성의 고혈을 짜낸 이들에게 보내는 경고문인 셈이다. 이몽룡은 이 시를 읊고 나서 사회악에 대한 대대적인 처단을 시작한다. <춘향전>의 클라이맥스다. <춘향전>이 첩첩산중 산간벽지에서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며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이야기로 사랑받는 이유가 신분을 뛰어넘는 춘정 때문만은 아니다. 시대를 초월해 사회를 바로잡는 힘이 거기에 있어서다.

 

이 힘으로 또 한 번 우리를 열광시킨 이야기가 바로 <명량>이다.

영화적으로 높은 수준이 아니었음에도 <명량>이 국민의 사랑을 받은 건 사회가 어려울수록 빛을 발하는, 이순신 장군의 책임감 높은 리더십 때문이다.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이들을 보며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질서를 바로잡는 모범적 인물을 원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정부에서 식량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자 병사들을 먹이기 위해 스스로 무밭을 갈고 미역을 땄다.

하사품이 도착하면 옷 없는 군사가 몇인지 헤아려 빠짐없이 지급하고 때로 잔치를 열어 사기를 높였다. 또 자신은 어머니 상중이라 먹을 수 없으면서도 병사들에게 고기를 나눠주며 살뜰히 건강을 챙겼다. ‘수군의 몸이 나의 몸’이라면서 수군의 가장 높은 곳에 있으나 언제나 자신의 몫은 맨 마지막에 챙겼다. 이에 백성은 스스로 찾아와 곡식을 바쳤고 후원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자리만으로 존경을 받지는 않는다. 이순신을 한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성웅으로 추대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모습 때문이다.

 

 

보물 제 1495호인 명재 윤증 초상화.
조선 중기 송시열과 쌍벽을 이룬 명재 윤증은 조선 시대를 대표한 사상가로 선비 정신의 표본이 된 인물이다. 살아생전 극구 초상화 작업을 거부했음에도 제자들이 화가를 시켜 몰래 스승의 옆얼굴을 관찰해 초상화를 남겼다.

 

백의정승, 명재 윤증


이처럼 존경받는 선비는 항상 백성의 안위를 걱정했다. 위정자란 무릇 그에 대한 의무를 지닌 자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당파 싸움에 휘둘리지 않고 제대로 위정할 자신이 없으면 입신양명할 좋은 기회가 생겨도 굳은 정신으로 마다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명재 윤증이다. 그는 조정에서 스무 번이나 벼슬을 권했으나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청을 수락하지 않았다.

명재의 선비 정신을 높이 산 왕은 나이 팔순이 넘은 그에게 우의정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그는 이때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천수를 누린 만큼 인조부터 숙종까지 4대 임금을 모셨는데, 명재는 임금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고 정승의 반열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명재가 딱 한 번 벼슬에 응하려고 한양으로 올라간 일이 있다. 숙종 9년, 그의 나이 55세 때다.
그는 한양으로 가던 중 과천에 머물며 당대 논객이던 남계 박세채를 만난다. 숙종은 송시열, 윤증, 박세채에게 서로 협력해 정치를 주도해보라는 왕명을 내렸다. 명재는 남계와 벼슬에 오를 것인지를 두고 밤새워 토론했다. 우선 명재는 3가지 전제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는 지역 감정을 해소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17세기 지역 감정의 피해자인 남인을 돌봐주자는 취지의 ‘서인은 남인의 쌓인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는 ‘외척의 세도를 막지 못하면 안된다’,

셋째는 ‘당이 다른 자는 배척하고 당에 순종하는 자만 등용하는 풍토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였다.

명재는 남계에게 이 문제들이 해결되겠는지를 물었고, 남계는 고민 끝에 모두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이 답을 들은 명재는 결국 벼슬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사회를 바꾸지 못하는 벼슬은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그의 결단에 영향을 받은 박세채와 송시열도 모두 낙향했다.

 

이후 명재는 고향에 머물면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에 매진했다. 조선 후기 최고의 명문 사립 학교인 종학당(宗學堂)을 통해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 것 역시 그의 업적 중 하나다. 종학당은 원래 파평윤씨 문중의 자녀와 내외척 처가의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문중 서당이다.

그러나 명재는 배움에 신분 차별을 두지 않기 위해 중인 집안 자제도 제자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친족에게도 지나치게 이익을 따르지 말라 명했다.

 

그의 일생을 담은 <명재언행록>에는 “이익을 따라 행하면 원망이 많다. 우리 가문이 선대 이래로 남에게 원망을 듣지 않은 것은 추호도 남의 일을 방해하지 않았던 데 있다. 이는 자손이 마땅히 삼가지켜야 할 일”이라고 기록돼 있다.

동학운동이 일어났을 때 동학군이 존경받는 어른의 집이라며 명재의 집은 조용히 피해갔다고 한다. 명재의 가르침은 후대에도 이어졌다. 9대손 윤하중은 1939년 흉년이 들자 주민을 돕기 위해 일부러 공사를 벌이고 대가로 쌀을 나눠주었다. 요즘은 명재의 업적보다 고택의 아름다움으로 더 유명하다. 고택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담백한 건축미와 함께 대를 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조선 사대부가의 깊은 품위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 격인 경주 최부잣집의 목조 곳간은 쌀 800석을 채우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곳간이었다. 심한 흉년이 들 때마다 문을 열고 백성의 주린 배를 채워주며 구휼에 앞장선 최부잣집 가문의 정신은 후손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현대에 더 큰 울림을 주는 최씨 집안의 육훈


경주 교동 69번지. 조선 시대 ‘참부자’로 유명한 최부잣집이 있다. 부자는 3대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말과 달리 이 가문은 무려 12대, 400년 동안 만석의 재산을 이어왔다.


대지 6,600m²(약 2,000평)에 노비만 100여 명에 이른 집인데, 오랫동안 나눔을 실천해 존경받은 가문으로 더 유명하다. 가훈으로 만들어 자자손손 이어온 최부자의 가르침은 지금도 고위층이 가슴속 깊이 새겨야 할 훌륭한 덕목으로 세인의 칭송을 받고 있다. 다음의 육훈(六訓)은 현대에 적용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선비로서 갖춰야 할 소양과 양반으로서의 신분은 유지하되 정치에 깊이 관여해 필요 이상의 권력을 갖지 말라는 뜻이다. 편법으로라도 대를 이어 고위직을 차지하려는 지금의 행태에 일침을 가하는 덕목이다.


둘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이 부분이 최씨 집안이 민심을 얻은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돈의 숫자란 끝이 없어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면 일정 수준에서 멈출 수가 없다.

확고한 사회의식과 인내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쉽게 실천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소작인을 관리 감독하고 때로 횡포를 부리는 ‘마름’을 따로 두지 않았다. 중간 관리인이 없어지니 소작농에 돌아가는 이윤은 더 커졌다.


셋째,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흉년은 부자가 재산을 불릴 수 있는 기회다. 요즘도 많은 기업이 위기를 기회의 발판으로 삼아 성장하고 이를 성공의 열쇠라 포장하는데, 그 기회란 것이 남의 불행을 저당잡는 경우가 있다. 이런 행태가 계속되면 부는 모으되 사회로부터 어떤 존경도 받지 못하는 천박한 기업으로 전락한다. 이 덕목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정확히 인지하고 강조한 가르침이다. 최부잣집은 이런 실천을 통해 정의가 살아 있는 경제 활동을 하며 이웃이
어려울 때 자신의 재산으로 구제하고, 이렇게 얻은 인심으로 다시 재산을 늘렸다.

최부잣집 부의 기틀을 다진 최동량의 맏아들 최국선은 어려운 사람이 돈을 빌리기 위해 담보 문서를 가져오면
문서를 전부 태워버리고 더는 묻지 않았다. 갚을 사람이면 담보가 없어도 되고 안 갚을 사람이면 담보가 있어도 갚지 않는다는 것이다.


넷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부잣집에는 이런저런 객이 끊이지 않는데, 매몰차게 몰아내거나 소금을 뿌려 내쫓는 집도 많았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길손을 후히 대접해 많을 때는 하루 100명이 넘었다는데, 1년 소작 수입의 3분의 1을 과객 대접에 사용할 정도였다. 사랑채에 손님이 넘치면 쌀과 과메기를 들려 소작인의 집으로 보냈다. 손님을 대접한 소작인은 소작료를 면제 받았다. 이렇게 길손을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덕을 쌓고 인심을 얻음과 동시에 다양한 손님들에게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다섯째,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육훈 중 가장 유명한 말이다. 최부잣집은 보릿고개가 되면 한 달에 쌀 100석 정도를 이웃에 나눠주었다. 흉년이 심할 때는 창고가 바닥이 날 정도로 모두 퍼주었다. 최국선은 이를 두고 “주변 사람이 굶어 죽는데 홀로 재물을 지켜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여섯째,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하라’.

이 말에서는 어려운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퍼준 반면 가족에게는 근검절약을 강조한 가풍이 드러난다. 이것이야말로 12대까지 부를 유지한 비결이다. 수백 년을 지켜온 부는 훗날 독립운동과 대학 설립 자금으로 쓰였다. 일제 강점기, 최국선의 9대손 최준은 백산 안희제와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헌신했다. 광복 후에는 남은 재산을 전부 대구대학교와 계림학숙을 세우는 데 기부했다.

그 결과 현재 이 가문은 평범한 중산층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부의 끝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한국의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칭송하고 있다.

 

 

제주를 살린 조선의 여성 거상, 김만덕


김만덕은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기녀의 몸종으로 살아야 했던 여성이다.
어깨너머로 배운 춤과 노래로 기생이 되어 목숨을 연명했으나 이후 영의정이 <만덕전>이라는 전기를 써서 바칠 정도로 국가적 칭송을 받는 인물로 거듭났다. 비결은 무엇일까.


김만덕은 상인들이 묵는 객주를 운영하면서 장사를 배웠다. 상인들은 제주와 육지를 오가며 유통업을 했는데, 그는 그들을 통해 각 지역의 특산물과 수량을 정확히 익혀 지역에 서로 부족한 물품을 공급하며 이익을 취했다. 물건이 많으면 가격이 내려가고 부족하면 오른다는 시장의 원리를 이용해 곧 거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지는 못할 터.

1790~94년의 5년간 제주에 심각한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정조가 급하게 구호 식량을 보냈지만, 풍랑으로 수송 선박까지 침몰하면서 백성의 고통은 극심해졌다. 이때 김만덕은 전 재산을 풀어 급히 쌀 500여 섬을 사다 제주 백성에게 나눠주었다. 당시 이렇게 구해낸 사람이 제주 백성의 3분의 2에 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정조는 김만덕을 궁으로 불러 여성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자리를 하사했다.


후에 김만덕이 남은 재산을 가난한 이에게 모두 나눠주고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추사 김정희는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넘친다)’라는 글을 남겼다.

후대는 그녀의 선행을 기리고 정신을 잇기 위해 김만덕 기념사업회와 봉사단, 나눔 쌀 만섬 쌓기, 김만덕 국제상 등의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1922년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이 속한 대한독립단의 명의로 일본 정부에 보낸 서신과 이회영의 유품인 중국식 의복이다. 명예나 지위에 대한 욕심 없이 우당은 형제·가족과 함께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불의를 좌시하지 말라, 우당 이회영


독립운동에 가문의 운명을 바친 명가가 또 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기득권을 포기하고 만주로 망명해 전 재산을 들여 만주에 학교를 세우고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낸 집안이 바로 경주이씨 백사공파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삼한갑족(신라, 고려, 조선 3조에 걸쳐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으로, 조용헌에 따르면 한 집안에서 재상이 10명 이상 배출돼야 만들 수 있는 책 <상신록(相臣錄)>을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가문이기도 하다. 학식과 인품을 두루 갖춰야만 오를 수 있는 재상을 줄줄이 배출한 배경은 사회에 대한 깊은 책임감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백사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오성과 한음의 바로 그 오성이자, 위기 때마다 사명감을 가지고 나랏일에 앞장선 인물인 이항복이다.


백사의 애국심은 11대손 우당 이회영에게 그대로 대물림되었다. 을사조약에 분노한 이회영은 무력 항쟁 기지를 설립하기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하고 60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났다. 전문가들은 당시 처분한 재산이 6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그는 “대대로 명문이란 소리를 듣는 우리 가문이 왜놈의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이어간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다 하겠습니까. (…) 왜적과 피 흘리며 싸운 백사 이항복 공의 후손된 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라며 망명의 소회를 전했다.

우당의 가족은 두만강을 건너면서 뱃사공에게 뱃삯의 두 배를 지불하고 “일본 경찰에 쫓기는 독립투사가 돈이 없어 헤엄치려 하거든 부디 배를 태워주시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착한 만주에서 그 가족은 독립군 양성의 중추 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1930년 폐교될 때까지 이 학교를 거쳐간 독립군 수천 명이 후일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정작 우당의 가족에게 찾아온 것은 가난으로 인한 갖은 고생이었다. 중국의 빈민가를 돌며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끝내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문 끝에 옥사하거나 병사했다.

조선 최고의 가문과 모든 명예를 거머쥔 명문가가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이토록 용기 있는 선택을 한 것을 후손은 잊지 말아야 한다. 권력의 이면은 곧 책임이라는 사실 또한.

 

이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특권층의 미담에 그치지 않는다. 현대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그 의미를 되찾으려면 계층 간의 차이, 소외의 지대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기준을 달리하면 소외되는 자는 언제든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 현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며 이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글 김선미(자유기고가)

자료협조 국립중앙박물관, 독립기념관, 충남역사박물관 참고도서 <조용헌의 명문가>(조용헌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노블레스 오블리주>(예종석 지음, 살림 펴냄)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이 깃든 문화재를 지키다


고대 로마 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 정신에서 비롯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정신을 실천한 사람이 많았다.

 

그중 서울에서 으뜸가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간송 전형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문화의 정수라 할 고려청자, 훈민정음 해례본, 혜원 신윤복 그림 등 값을 매길 수 없는 국보급 문화재가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산을 팔아 사들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문화재는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얼을 모으고 이어주는 고리임을 알고 지켜낸 전통 문화 수호자였다.

 

 

 

 

선비, 농부의 경험에 지혜를 더하다


조선 시대 선비라면 누구나 품었던 애민(愛憫) 정신.

성호 이익의 애민 정신은 농촌의 현장에서 백성의 삶을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시도 농민의 삶을 외면한 적이 없었고, 나라의 백성이 궁핍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늘 고민했다. 성호에게 도는 ‘천하에 곤궁한 백성이 없게 하는 것’이었다.

선비가 할 일은 농부의 경험에 지혜를 더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농민들이 벼를 심는 데는 능하지만 벼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벼의 계보를 정리한 <도보>를 통해 지식 나눔을 실천했다.

 

 

에디터 조민진

포토그래퍼 김재이 어시스턴트 이선우 스타일리스트 양은숙 어시스턴트 김소혜, 박은미

자료협조 간송미술관

촬영장소 경북 안동 수애당

 

 

최씨 고택의 사랑채. 부를 과시하지 않은 담백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이다.

 

 

경북 경주
신라에서 조선까지, 고요하고 찬란한 발자국을 더듬다

 

연일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고, 차디찬 겨울바람에 마음마저 얼어붙은 요즘이다. 그래도 거리 곳곳에 울려 퍼지는 자선냄비의 종소리를 듣노라면 마음 한쪽이 군불 지핀 듯 따스해진다. 이번 달 여행은 경주로 떠난다.
얼마 남지 않은 2014년, 떠들썩하지 않고 번잡하지 않은 여행지면 좋겠다는 분이라면 가볼 만하다.

첫 목적지는 최부잣집으로 알려진 교동 최씨고택이다.

 

최씨고택을 이야기하기 전, 먼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말하자. 프랑스에서 비롯된 이 말은 높은 신분에 뒤따르는 사회적 책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노블레스’는 원래 귀족이란 뜻으로 사회적 상층을 가리키며, ‘오블리주’는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사회의 지도적인 지위에 있거나 여론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도덕적 의무를 가리킨다. 초기 로마 시대에 왕과 귀족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 정신에서 비롯된 말인데, 이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실천한 가문이 바로 경주 최부잣집이다.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만나다


경주를 찾은 이들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이 바로 대릉원과 첨성대. 이곳에서 발길을 안압지로 돌리지 않고 계림 숲 속 뒤쪽으로 가면 교동이다. 신라 때 학교 시설인 국학이 있던 곳으로 돌담길과 그 너머로 얼핏 보이는 기와지붕이 이런저런 복잡한 심사를 잊게 하는 마을이다.
최부잣집은 이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흔히 ‘9대 진사, 12대 만석꾼’으로 회자되는 집이다.

부자는 3대를 넘기기 힘들다지만, 최부잣집은 300여 년 동안 부를 유지했고, 마지막에는 기부와 독립군 자금, 그리고 교육사업에 모든 재산을 써버림으로써 영원한 부자로 남았다.


최부잣집의 토대는 최국선(1631~1681)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역시 처음에는 여느 부자와 다르지 않았다. 당시의 관행대로 8할의 소작료를 받았고, 보릿고개에 양식을 빌려주고 많은 이자를 붙였다. 그런 최국선의 의식이 바뀐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도적 떼에게 침입을 당했는데, 그 도적 무리 안에 자신의 소작농과 그들의 가솔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도적 떼는 양식은 손도 대지 않고 장리를 준 증표인 채권 서류만 가져갔다. 도적들이 돌아간 뒤 주변 사람들은 도적을 잡아야 한다고 했지만, 최국선은 외려 80% 이상 받던 소작료를 50%로 낮춰버린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때부터 최부잣집의 나눔과 상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시작된다.


최부잣집은 왕궁 터 월성을 끼고 흐르는 문천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다. 1700년쯤에 지어졌는데, 원래 아흔아홉 칸이었지만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1884?1970) 선생이 돌아가시던 해에 사랑채와 별당이 화재로 소실돼 지금은 70여 칸으로 줄었다.


방문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솟을대문이다. 여느 대갓집과 달리 소박하다. 크게 높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한 최부잣집은 주변 집들과의 조화를 고려해 솟을대문을 일부러 낮게 지었다. 집 역시 왼쪽에 자리한 계림향교보다 2계단 낮게 터를 깎아내고 지었다.


솟을대문을 지나 발을 들이면 큰 사랑채가 버티고 서 있다. 지난 2006년에 복원한 것이지만 최부잣집의 역사와 연륜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 집에서 면암 최익현,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 의친왕 이강 등이 묵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도 최부잣집과 인연이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황태자였던 구스타프 6세는 신혼여행차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당시 조선의 명가인 최부잣집에서 묵은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최준 선생의 인품에 반했다고 한다.
후에 국왕이 된 구스타프는 여성 전용 공간이라 둘러보지 못했던 안채의 모습이 궁금해 한국전쟁에 파견한 간호장교들에게 사진을 찍어오라는 밀명을 내렸다고 한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가다 보면 드넓은 공간에 떡하니 서 있는 목재 곳간을 볼 수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 크기로 지었는데, 현존하는 목재 곳간 가운데 가장 크다. 이 곳간은 최부잣집이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다. 최부자는 흉년이면 곳간을 열어 쌀을 나눠줌으로써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해 자칫 부자로서 사기 쉬운 원성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최부잣집이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배경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육훈이 깔려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으라’ 등 가훈처럼 내려오는 가르침이다. 실제로 최부잣집의 1년 쌀 생산량이 대략 3,000석이었다는데 1,000석은 집 안에서 사용하고, 1,000석은 과객에게 베풀었으며, 나머지 1,000석은 주변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줘 농민이 굶주리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최부잣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崔浚, 1884~1970)에 의해 완성됐다. 일제 강점기에 백산상회를 설립해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군자금을 보낸 그는 광복 후에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전 재산으로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과 계림학숙을 설립했다.


지난해에는 최부잣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입증하는 고문헌 3,000점이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서 중에는 노비나 소작인의 빚을 탕감하고 병자호란 중 전사한 충노(忠奴)를 표창해달라는 등의 내용이 많다고 한다. 증오가 아닌 솔선으로 주위를 밝힌 최씨 가문의 선견지명은 오늘날에도 큰 모범이 된다.

 

 

 

1 한옥의 그윽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최씨고택.

3 사랑채 뒤를 돌아 사당으로 가는 길, 그윽하고 소담한 정원이 숨어 있다.

 

 

 

2 신라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다보탑.

4 경주의 야경. 해가 지면 첨성대와 계림에 조명이 들어와 신라의 달밤을 밝힌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다보탑이 이토록 아름다운지


여행지도 나이에 따라 달리 보이고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20대 배낭여행자가 느끼는 인도와 40대 중반 여행자가 느끼는 인도가 같을 리 없을 터이다. 경주 역시 마찬가지다. 들판에 구르는 돌 하나, 길가의 기와 한 장도 하찮은 것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문화재로 가득한 경주.

다시 찾은 경주는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키득거리며 찾았던 수학여행지 경주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예나 지금이나 경주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불국사. 그곳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이 다보탑과 석가탑이다.

마주 보고 선 두 탑은 전혀 다른 매력으로 보는 이를 감탄시킨다. 다보탑이 화려하면서도 세밀한 형상미를 가지고 있다면, 석가탑은 단순하면서도 균형적인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첨성대와 대릉원 주변은 저물녘 찾는 것이 좋을 듯. 경주에서 야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다. 첨성대를 비롯해 대릉원과 여러 고분군, 계림 등이 모여 있다.


오후 6시 무렵이면 조명이 켜지기 시작한다. 이때면 사람들은 삼삼오오 첨성대로 향한다. 조명을 받은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화려하다. 첨성대 건너편은 계림. 경주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얽힌 곳이다. 그가 태어날 때 흰 닭이 그 사실을 알렸다고 해서 계림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첨성대에서 계림 방면으로 걷다 서쪽으로 바라보면 둥그스름한 곡선의 능이 몇 기 있다. 석양이 질 무렵, 여인의 가슴선을 닮은 봉긋한 고분의 곡선이 뒤쪽 산의 능선과 어우러져 절묘한 풍경을 빚어낸다. 한 걸음을 가면 능 2개가 겹치고 두 걸음을 가면 능 3개가 포개진다. 가까운 능은 진한 곡선을, 먼 산은 옅은 곡선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곡선 위로, 신라의 땅 위로 장엄하게 번지는 노을. 옛 신라는 아마 이보다 더 황홀한 왕국이었을 것이다.


안압지의 밤 풍경도 분위기 있다. 안압지는 신라의 궁궐을 화려하게 장식한 연못.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어느 곳에서도 연못 전체를 조망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다.


그윽한 겨울 운치를 즐기기에는 독락당과 옥산서원이 좋다. 조선 시대 큰 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여러 가지 정치 공학적인 이유로 벼슬할 뜻을 잠시 접고 고향으로 내려와 지어놓고 5년간 머문 곳으로 알려졌다. 집 주위가 깊은 산속도 아닌 그냥 개울 옆인데, 마치 심산유곡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겨울의 적요와 아름다움이 가득한 곳이다. 옥산서원은 수령이 수백 년 된 굴참나무와 느티나무가 가득한 곳으로, 한석봉과 추사 김정희, 퇴계 이황의 현판이 볼만하다.

 

 

 

1 조선 시대 대표 서원 옥산서원. 각 현판의 글씨는 조선 최고 명필들의 작품이다.
2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감은사 탑. 탑 위에 솟은 송곳 같은 찰주에 서슬 퍼런 전의가 서려 있다.

 

 

3 감포항 가는 길. 기암괴석이 가득한 동해바다를 옆에 두고 달린다.

 

4 감포에서 포항으로 이어지는 해안 도로. 겨울 바다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5 문무왕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자신의 유골을 동해에 뿌리게 했다. 수중 왕릉 대왕암. 새해를 맞는 일출 여행지로도 인기다.

 

6 한적한 포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감포항.

 

 

바닷길 따라 즐기는 낭만 드라이브


사실 경주를 하루 이틀에 두루 살펴보기란 불가능하다. 남산만 제대로 보려해도 족히 일주일은 걸린다. 보문단지에서 문무대왕릉과 감포항을 잇는 코스는 경주 답사 여행 코스로도 손색없고, 문무대왕릉에서 감포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따라 바다 드라이브도 즐길 수 있어 가족 여행 코스로 괜찮다.


추령재를 지나 동해 쪽으로 가다 보면 감은사지다. 완벽한 조형미 덕분에 신라 탑의 전형으로 불린 감은사 탑이 있는 곳이다. 감은사 탑 높이는 13.4m.지금까지 남아 있는 신라의 탑뿐 아니라 삼층석탑 중에서도 가장 크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감은사 탑의 완벽한 조형미는 보는 이를 감탄하게 한다.


감은사지에서 5분을 가면 문무대왕릉이 있는 해변에 다다른다. 삼국 통일을완수한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불에 태워 동해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 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이며 인력을 수고롭게할 뿐 죽은 혼은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숨을 거둔 열흘 뒤에는 불로 태워 장사할 것이요, 초상 치르는 절차는 힘써 검소와 절약을 좇아라.’


-<삼국사기> 중에서

 

 

문무대왕릉의 일출은 장관 그 자체다.

거센 파도를 뚫고 문무대왕릉 위로 불쑥 솟아오르는 커다란 햇덩이는 보는 이에게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해마다 이맘때면 일출을 촬영하기 위해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몰려든다.


이곳에서 감포항을 지나 구룡포에 닿는 31번 국도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기도하다. 대본, 나정, 전촌 등 크고 작은 해변을 지난다. 이 길은 바다를 따라 포항 구룡포까지 이어지는데, 겨울 바다의 낭만을 물씬 느낄 수 있다.

 

 

1 황룡사지에 남아있는 돌무더기들.

 

2 분황사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전탑이 있다.

 

3 안개 자욱한 황룡사지. 장륙존상이 자리했던 빈터가 쓸쓸하기 그지없다.

 

 

돌에게 듣는 신라 천년의 이야기


경주에 간다면 황룡사지에 꼭 들러보기를 권한다. 황룡사 9층 목탑이 있던 그 황룡사지다.
규모는 동서 288m, 남북 281m로 무려 10만 m²(3만여 평)다. 진흥왕 14년(553)에 궁궐을 지으려다 계획을 바꿔 착공한 황룡사는 16년 만인 569년에 완공되었다. 황룡사 9층 목탑 완공은 그로부터 4년 뒤, 말 그대로 1장 6척(약 4.5m)의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만들고, 584년인 진평왕 6년에 금당을 조성한 뒤인 선덕여왕 때의 일이다. 즉 9층 목탑은 진흥왕과 진평왕, 선덕여왕 3대에 걸친 대공사였으며, 재위 기간이 짧은 진지왕까지 포함하면 4대가 되고, 공사 기간만 해도 90년이 넘는 대역사였다.


황룡사지는 서쪽 선도산 위로 해가 막 넘어갈 때가 가장 예쁘다. 해 질 무렵, 그 옛날 거대한 절을 떠받쳤을 돌무더기가 모여 있는 곳으로 가보자. 황룡사지 서쪽 끝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 절을 짓는 데 쓰인 돌들이 오글오글 앉아 있다.

어떤 돌에는 연꽃을 새겼고, 어떤 돌에는 부처님 얼굴을 새겼다. 그 돌들 위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황룡사지에 천천히 깃드는 어둠을 보노라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천년을 거슬러 신라인의 기도와 정성에 가 닿는다.

황룡사지에서 그렇게 한나절을 보내다 일어설 때쯤이면 어느새 마음 한쪽에도 자그마한 폐사지(廢寺址)가 만들어진다. 그 폐사지 위에는 별과 달이 떠서 유적처럼 흩어진 삶의 부스러기를 비춘다.

 

강퍅한 세상을 살아내느라 잊고 있던 고맙고 애틋한 이름들,
그리고 그 이름들에 묻은 추억들….

그 부스러기는 각기 모두 빛나며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글·사진 안수현(여행 칼럼니스트)

 

 

 

 

겨울 감포

 

감포는 경주시 동쪽의 작은 어촌이다. 빛의 바다 영일만에서 호미곶을 거쳐 구룡포로 이어지는 해안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신라 문무왕의 숨결이 오롯이 깃든 바닷가에 닿는다.
여기에서 시린 바닷바람을 맞으며 대왕암과 감은사 터를 둘러봄은 경주 여행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눈보라 흩날리는 섣달 여행이라면 더욱 그렇다.
토함산에서 시작한 대종천 물줄기가 동해로 흘러드는 감포 앞바다의 모래톱에 서면 태곳적부터 파도에 몸을 맡겨온 작은 바위섬이 보인다. 1,300여 년 전 문무왕의 납골을 흩뿌렸다는 대왕암이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던 대왕의 넋이 깃든 바위섬을 지금은 한 무리의 물새들이 지키고 있다.


대왕암을 제대로 보려면 이견대(利見臺)에 올라야 한다. 이견대는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곳이며, 그의 아들 신문왕이 천고의 보물인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곳이기도 하다.
감포에서 0.5km쯤 떨어진 감은사 터에는 생전의 대왕만큼이나 당당하고 위엄 있는 삼층석탑이 2개 있는데, 이곳의 금당 주춧돌에도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게끔 만든 작은 구멍이 나 있다.


화려한 능묘를 마다하고 호국의 용이 되고자 한 대왕의 넋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을까. 비상하는 물새가 되어 바다와 하늘을 넘나들고 있을까. 그리하여 또다시 갈라져버린 옛 왕국의 땅을 안타까이 내려다보고 있을까. 임금의 염원과 백성의 불심이 의연히 남아 있는데도 이 땅은 아직도 평화롭지 않으니, 미술사학의 선구자 고유섭이 남긴 시구는 어쩌면 바닷바람에 실어 보낸 대왕의 비통함이 아닐는지.


영령이 환현(幻現)하사/

…부왕부래(浮往浮來) 전해주신/
만파식적 어이하고/

지금은 감은고탑만이/

남의 애를 끊나니.


_고유섭, ‘대왕암’ 중에서

 

글 박경수(소설가) 포토그래퍼 최충식

 

 

 

INFORMATION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경주IC로 나온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시내 쪽으로 가다 보면 첨성대. 대릉원은 첨성대 바로 옆에 자리한다.

대릉원 앞에 넓은 주차장이 있다. 황룡사지는 구황동에 있는데, 국립경주박물관 앞 사거리에서 안압지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 500m가면 황룡사지가 나온다.

분황사에서 황룡사지로 들어갈 수도 있다. 차는 분황사 입구에 세워둬야 한다.

감은사지는 경주IC에서 직진해 4번 국도를 타고 감포 쪽으로 가다가 양북면 어일리에서 929번 지방도를 따라 양남 쪽으로 6. 5km를 가면 길 왼쪽 산자락 아래 감은사지가 보인다.
감은사지 입구에 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보문단지에 경주힐튼호텔(054-745-7788), 호텔현대(054-748-2233) 등 특급 호텔이 많다. 경주조선온천호텔(054-740-9600)에서는 마그네슘이 함유된 온천욕도 즐길 수 있다. 먹을거리로는 쌈밥이 유명하다.
쌈밥집은 대릉원 동편 골목 후문 쪽에 많다.
구로쌈밥(054-749-0060), 삼포쌈밥(054-749-5776)이 유명하다. 상추와 배추, 호박등과 다양한 양념장이 나온다. 감포항 은정횟집(054-744-8600)은 40년 전통을 자랑한다. 75세 고령의 할머니가 며느리와 대를 이어 맛을 내는데, 복어 요리로 유명하다. 근해에서 잡히는 참복을 주로 쓴다.
경주 향토 음식 브랜드 별채반 교동쌈밥(054-773-3322)은 경주의 명물이다. 놋그릇에 음식을 담아 1인상으로 제공하므로 나 홀로 여행자에게도 안성맞춤이다. 교동 최씨고택 옆골목의 교리김밥(054-772-5130)은 달걀지단을 듬뿍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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