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1. 12. 19(주일) - 대림절 넷째 주일 - (2021년 51주)
제목; “복음의 기원(본질)과 목적”
성경; 롬 16:25-27 (p. 262) (시 89:1-2, 179<167>, 550<248>, 621장)
<예배의 부름> (시 89:1-2)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 촛불 점화 : 대림절 첫째 주일 ▶ 「소망」, 두 번째 ▶ 「평화」, 세 번째 ▶ 「사랑」
★ 네 번째 촛불 점화 : 「기쁨」의 촛불
“우리는 기쁨으로 오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하여 이 불을 켭니다. 기쁨은 성탄절뿐
아니라 항상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 첫 주 복습 : 대림절 ☞ 교회력으로 새해 시작, 의미: 오심= 과거적, 현재적, 미래적
- 색상 : 보라색 = ‘참회’를 상징
※ 둘째 주 복습 : 촛불예배의 의미☞ 촛불: 기쁨을 알리고, 죄의 어두움을 제거하는 상징
※ 셋째 주 복습 : 크리스마스 ☞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예배한다’
- 크리스마스 카드 : 1840년대 시작해서, 1960년대 보편화 됨. ☞ 크리스마스 인사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나심을 알리기 위해서 유래되었다.
I. 산타 클로스 이야기
* 산타 클로스의 유래 :
산타 클로스 : 神話, 그러나 실제로 Saint Nicholas라는 사람이 있었다.
Saint Nicholas : 초기 기독교 주교로서 소아시아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방의 한 도시 Myra(현재 Kale)를 관할했던 사람이다. 그는 어린 시절에 탁월하였고, 젊은 나이에 교회의 높은 직분에 선발되었기 때문에 그는 “소년 주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어린이들과의 관계에 특별한 애정을 갖게 되었고, 품성이 너그러웠기 때문에, 많은 예배당이 그를 기념하는 뜻으로 봉헌되었다. 러시아는 그를 수호 성인으로 삼았고 그리스도 그와 같이 하였다. 사도들의 이름보다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한 교회가 더 많았다. 예를 들면 벨기에에 300교회, 로마에 60교회, 영국에 450교회가 있다.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상인들이 그 주교의 너그러운 성품을 최초로 유럽에 전해 주었다고 생각하며, 유럽에 알려진 성 니콜라스의 전설적인 모습은 이러한데, ‘그는 백마를 타고서 다니면서 착한 아이들을 위해서 선물 바구니를 주고 장난꾸러기들을 위해서 한 다발의 자작나무 막대기를 주는 턱수염이 난 성인’이었다.
이름은 이 ‘세인트 니콜라스’가 독일어 ‘상트 니콜라우스’(Sankt Nikolaus), 네덜란드어 ‘신텔 클라우스’(Sinter Klaus)로 번역되어지면서, ‘산타 클로스’가 나왔다.
그런데 오래 전의 착실한 성인이 어떻게 성탄절 분위기를 사로잡는 뚱뚱하고 유쾌한 인물이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상당히 힘든 문제이다.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면서 오늘날의 산타 클로스의 모습을 추적해 보면,
네덜란드 선원들이 뉴 암스테르담(오늘의 뉴욕)에 정착했을 때, 그들은 성 니콜라스의 최초의 교회를 성 니콜라스 협동 교회로 칭하고, 또한 성 니콜라스의 상(像)도 네덜란드 이주민들이 타고 온 배위에 놓여져 있었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파이프(담뱃대)로 상징되었고, 기장이 긴 예복은 짧은 바지로 바뀌어졌다. 이것은 아마 얌전한 성자가 뚱뚱하고 활기 있는 인물로 바뀌는 중요한 첫 단계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19세기 초에 왔다. 뉴욕에서의 성탄절 행사 형태에 영향을 미친 영국의 영향으로, 1809년 ‘워싱톤 어빙’이라는 작가가 책에서 산타 클로스를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하늘을 나르는 명랑하고 뚱뚱한 인물로 묘사하였다. 키가 작고 뚱뚱한 네덜란드인은 그 외모와 기질에 있어서 산타 클로스의 화신이 된 것으로 간주되는 듯하다.
성 니콜라스가 산타 클로스로 바뀌게 된 마지막 중요한 단계는 유명한 만화가 Thomas Nast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클레멘트 무어의 일반적 개념을 생생하게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는 1863년에 그린 만화에서, 모피로 장식한 붉은색 코트를 입고, 흰털이 딸린 빨간 옷에 검은 벨트를 두르고, 긴 모자를 쓴, 흰 수염의 늙은 신사로 산타 클로스를 그려내었다.
이상의 여러 모습이 합작되어져서 만들어진 모습이 현재의 산타 클로스의 모습이다.
* 산타 클로스에게 카드 보내면 답장 온다. ☞ 핀란드 산타 마을 로바니에미에서 답장 보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절을 앞두고한 꼬마가 물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요. 산타가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얘야, 그건 말이다…. 인생은 처음엔 산타의 존재를 믿다가, 나중엔 믿지 않게 되고, 결국엔 본인이 산타가 되는 세 단계를 거친단다.”
요즘 어린이들은 산타 클로스에 대한 기대가 거의 없지만, 나이가 조금이라도 드신 분들은 성탄절이 오면 순록을 타고 와서는 굴뚝을 타고 집안으로 들어와 머리맡에 메어둔 양말에다 선물을 주는 산타 클로스를 기다리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정말 얼마나 소망이 깃든 날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동화 속의 소망은 사라지고 그저 현실에 찌들어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성탄절을 앞둔 대림절 네 번째 주일, “기쁨의 촛불”을 밝힌 오늘, 우리 모든 성도님들께 가장 큰 선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소망에 더욱 풍성한 나날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롬 16:25-27)은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으로, 앞서 과거 자신의 선교 사역과(롬 15:14-21), 미래의 선교 계획을 이야기하고 로마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한데(롬 15:22-33) 이어, 로마서를 마무리하면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사역자들을 소개하면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개인적으로 문안 인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사도 바울은로마서를 15장에서 마무리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추신을 덧붙여 16장에 26명의 이름을 실명으로 언급하면서 다른 서신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친밀한 어조로 문안 인사를 합니다. 심지어 16장에서도 20절로 인사를 마무리하는 것처럼 하다가 다시 펜을 들어 21절부터 기억나는 사람들을 추가하며 오늘 본문을 마지막으로 로마서를 마무리합니다. 로마서의 서론(1:1-7)이 총체적 복음을 설명해준 것처럼 마지막인 오늘 본문에서도 새로운 언어로 복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6장에서 먼저 겐그레아 일꾼으로 자매 뵈뵈를 천거하고(1-2), 많은 동역자들의 이름(26명)을 거명하면서 문안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3-16).우리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내가 여기 있기까지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격려해 주었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내가 16장에 나오는 바울의 많은 동역자들의 이름처럼, 하나님 앞에 복음의 동역자로 그 이름이 기록되어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배만 섬기고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17-20)한 후에,마지막 동역자에 대한 인사(21-23)와 송영(25-27)을 통해 로마서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로마서 마지막 송영 부분인 우리의 본문 말씀은 하나의 긴 문장으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복음의 기원(본질)과 정체성, 목적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1. 복음의 정체성은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선포)함”입니다(25a).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25a)라고 시작되는 오늘 본문에는 복음의 기원(본질)과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나의 복음”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 메시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선교의 내용을 언급하는 핵심적 표현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재림,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며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전파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정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초입에서도 “나의 복음”이란 말을 통하여 자신의 복음에 대한 신앙고백을 확실히 하고서 시작합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6)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얻는 복음이 피상적인 남의 복음이 아니라 바울과 같이 “나의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셨다는 나의 복음을 분명히 나의 입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여기서 “나의 복음”이라는 표현은 사도권의 시비와 함께 복음의 내용이 문제가 된 갈라디아 교회나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을 이해하면 더욱 그 실감 있는 뉘앙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그가 배워서 획득한 자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요(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또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도 전혀 다를 바 없는 진리된 복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전파함’이란 말이 지난 주에 말씀드린 ‘선포’, ‘설교’라는 헬라어 ‘케리그마’(κήρυγμα)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내가 전하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선포로 여러분을 능히 튼튼히 세워주십니다”(25a)라고 번역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재림 등을 아우르는 선교 메시지를 선포(설교)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의 이방인 선교 현장에서 핵심 메시지로 전파했고, 그것은 초기 교회공동체의 신앙고백에서 공유되는 핵심 요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선포해야 합니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선포해야 합니까? 이러한 선포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복음 선포의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기에 극단적인 방법을 통한 복음 선포가 필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입으로 전달된 복음 선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선포된 선교적 삶이 진짜 선포입니다. 더욱이 코로나 사태를 통하여 한국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금은 드러낸 선포가 아니라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사는 복음적 삶의 선포가 더 중요합니다.
로마서 전체를 관통하는 구원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재림 등을 포함한 총체적 메시지’를 기억하고,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메시아적 선포를 하므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 복음의 기원(본질)은 이제 나타내신 하나님의 “신비의 계시”에 관한 것입니다(25b-26a).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25b-26a)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나타난 “신비(비밀)의 계시”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영세 전부터”는 ‘영원한 시간 동안, 영원한 시간을 따라’라는 의미로, 창조 시점부터가 아니라 그 이전의 영원한 시간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처럼 삼위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시기 이전부터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계획은 하나님의 나타내심이 없이는 미련한 인간들이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감추었다가”(세시게메누, σεσιγημένου)란 단어가 ‘침묵을 지키다’라는 뜻을 지님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즉 구약 시대에는 구원 계획의 일부분이 보여짐으로 침묵이 유지되다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 모든 것은 확연해졌던 것입니다.
이런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신비의 계시가 이제 나타내신 바 되었습니다. 우리 번역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26절 말머리에 ‘그러나’(데, δέ)란 말이 나와 있어, 과거에 공개되지 않았던 구원의 진리가 이제 공개되고 있음을 보다 명확히 합니다.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네로덴토스’(φανερωθέντος)는 ‘감추었던 것을 드러내다’라는 뜻의 동사 ‘파네로오’(φανερόω)의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로, 이는 감추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그것을 드러내어 계시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며, 또한 그 시제가 부정과거 시제인 것은 이미 그 계시가 드러났다는 뜻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란 주제가 더 이상은 비밀이 아님을 가리켜 줍니다. 복음은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 드러난 신비(비밀)의 계시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이제 그 드러난 복음에 대한 상세한 서술이 계속 나타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즉 복음에 관한 모든 주도권은 바로 하나님께 주어져 있습니다. 그분은 ‘시작도 끝도 없이 무궁한’, 즉 “영원하신”(아이오니우, αἰωνίου) 분이시며, 바울이 전한 복음의 전파에 있어서도 궁극적 권위를 부여하십니다. 이런 측면에서 바울은 자신의 이방인 전도 사업의 당위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또 “선지자의 글로 말미암아”라고 하여 복음의 근원과 수단을 분명히 밝혀줍니다. 즉 “선지자들의 글”이란 구약성경을 가리키며, 오늘 본문은 복음이 구약에 이미 예언된 사실이 나타난 것일 뿐임을 보여줍니다.
이렇게구약에서 계속 메시아를 언급하였지만 모든 사람이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비밀의 계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하나님께서 만약 인간 세상에 그리스도를 계시하지(성육신) 않으셨다면 여전히 복음은 신비(비밀)에 불과했으며 인간이 구원에 동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고 그를 통한 구원이란 계시된 비밀은 바울에 의해 선포되었으므로 “신비의 계시” 즉 ‘복음’을 통해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바울이 선포하는 나의 복음, 신비의 계시는 어떻게 전파(선포)됩니까?(26).
사도 바울은 영세 전부터 감추었다가 이제 비로소 나타나신 “신비(비밀)의 계시”, 곧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6절,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은 복음의 목적이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순종하게 하려는 데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라는 말에는 다음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1) 복음의 전파 대상 : “ 모든 민족”
먼저 복음 전파의 대상이 유대인만이거나(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이방인의 것만이 아닌, “모든 민족”이라는 사실입니다.다시 말하면 “모든 민족”은 유대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합니다. 특히 이것은 구원의 범위가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서 전반부에서 보여준 것처럼 유대인으로만 제한되어 있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에게 복음으로 선포됩니다. 이것이 진짜 열려진 복음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메시지가 전부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좁은 해석의 복음입니다. 실상은 로마서 전체가 담고 있는 메시지처럼 숨긴 복음이 유대인으로만 제한되었던 것을 뛰어넘어 모든 인류에게 개방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선포해야 합니다.
2) 복음의 효능 혹은 목적 : “믿어 순종하게 하는 것”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에이스 휘파코엔 피스테오스, εἰς ὑπακοὴν πίστεως)를 직역하면 ‘믿음의 순종을 위하여’로, ‘믿어 순종에 이르게 하는 것’,혹은 ‘순종에 이르게 하는 믿음’란 의미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그 구체적인 행함의 요체로 ‘순종하는 삶’과 그 열매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이 전파한 핵심 메시지, 곧 그리스도 복음의 요체와 그 지향하는 목적인즉, 새롭게 주어진 구원의 언약은 전통적 이스라엘의 선민주의 반경을 넘어 모든 이방인까지 다 포함하여 그 복음을 믿어 신실한 삶의 열매로 순종하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순종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믿음의 사람은 순종의 사람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순종의 사람은 신실하게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역에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故 한경직 목사님께서 “믿음은 충성이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믿음”, 곧 ‘피스티스’(πιστίς)는 “충성”, 곧 ‘피스토스’(πιστός)를 전제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먼저 예수 믿고 순종하여 구원과 영생에 이르고, 이 복음의 비밀을 선포하므로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3) 복음의 주체 : 항상 “하나님”
앞서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파네로덴토스)가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로, 이는 감추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그것을 드러내어 계시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며, 또한 그 시제가 부정과거 시제인 것은 이미 그 계시가 드러났다는 뜻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란 주제가 더 이상은 비밀이 아님을 가리켜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알게 하신 바”(그노리스텐토스, γνωριθέντος) 역시 ‘알게 하다’, ‘나타내다’를 의미하는 동사 ‘그노리조’(γνωρίζω)의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로써,‘인간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알려질 수 있는 것이 복음’임을 가리켜 줍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하나님에 의해 드러내어 알게 된 “신비(비밀)의 계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음, “신비(비밀)의 계시”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체적으로 드러내고 알게 하신 것으로,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누구나 믿고 순종하므로 영생과 천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믿는 것을 넘어 순종과 헌신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순종과 헌신에 이르는 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복음을 수용하는 사람은 당연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순종은 무능하며, 순종 없는 믿음은 거짓’입니다.
미국의 설교가 밴스 해브너(Vance Havner) 목사님은 순종의 삶과 불순종의 삶이 가져오는 극명한 결과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복과 저주를 갈라놓는 대표적인 단어는 순종과 불순종이다. 순종과 불순종은 우리의 삶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을 갈라놓는 키워드이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복음에 순종하는 삶은 행복을 약속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는 삶은 불행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고 순종한 믿음의 자녀들을 끝까지 책임지시며 범사에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 앞에 순종하십시다. 순종을 넘어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십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2,5)
4. 우리를 능히 견고하게 하는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은 이렇게 마칩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27)
로마서의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1:1)로 시작했다면, 로마서의 마지막은 “예수 그리스도”(16:27)로 마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처음에는 나 자신으로 시작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마쳐야 합니다.
인간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요리문답 제1조). 하나님께 세세무궁토록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살펴본 대로 나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의 계시 등 모든 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에 눈을 뜨고 그분을 찬양하며 송축하는 것이 생의 최고 최대 목적임을 깨우쳐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송축할 수 있는 사람은 그 하나님이 누구이며 동시에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통찰한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은 영원한 영광이며 하나님은 그 ‘영원’에 합당한 영광을 받으실 만한 유일한 대상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역시 그 영광의 매개로 개입됩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찌 보면 ‘영광에 도취된 세상’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그것으로 사람들한테 뽐내고자 애쓰고, 그것을 밑천으로 명예에 얽매이며, 사람들을 압도할 만한 권력을 추구합니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이 각각 분별 되어 금력과 권력과 명예 사이에 창조적 긴장이 있었는데, 요즘엔 이런 것들이 서로 엉겨 붙은 상태로 상승 작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집착적인 행태를 보이는 사람 치고, 그것이 한시적인 가치임을 깨달아, 섬기는 권력, 겸손한 명예, 베풀고 나누는 재물의 미덕을 발휘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에 아직 감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영원한 영광으로 우리 가운데 운행하시는 하나님께 그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송축하는 예배자, 찬미자들이 넘쳐나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지나가는 행적들에 집착하려는 마음을 반성하며, 비로소 하나님의 지혜에 눈뜰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그 “신비(비밀)의 계시”를 밝히는 순례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 복음을 “나의 복음”으로 삼아 이 세상의 어둠을 내치며 암흑 가운데 허덕이는 이들을 향해 진리의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하나님께” 있길 송축한 이 구절의 중요한 실천적 메시지입니다.
III.
대림절 마지막 주일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여러분 중에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 같은,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하고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한 남자가 숲에서 사자를 만나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라고 생각하고, 그 남자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떠보니 사자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 사진 보며)
남자가 사자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너 예수 믿는 크리스챤이니?”
사자가 대답합니다. “야 이 멍청한 놈아, 넌 밥 먹기 전에 기도 안하냐?”
요즘은 없어진 것으로 아는데, 예전에는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선 채로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듣곤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늘 학생들을 힘들게 하는 어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정리해서 이야기하면”, “마지막으로”,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해서 이야기하면”같은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해놓고도 끝나는 법이 없이 도돌이표처럼 다시 같은 내용을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 설교 가운데에서도 종종 이런 화법이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웃음이 납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설교가 교인들을 지루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아마도 전하고 싶은 내용이 그만큼 중요하거나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이 그러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15장에서 마무리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추신을 덧붙여 16장에 26명의 이름을 실명으로 언급하면서 다른 서신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친밀한 어조로 문안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16장에서도 20절로 인사를 마무리하는 것처럼 하다가 다시 펜을 들어 21절부터 기억나는 사람들을 추가하며 오늘 본문을 마지막으로 로마서를 마무리합니다. 그만큼 하고 싶은 말과 기억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오실 주님을 참회하며 기다리는 대림절 네 번째 주일 “기쁨”의 촛불을 밝히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복음의 비밀을 올바로 깨닫고 나의 복음으로 고백하여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됩시다. 그리고 내가 받은 신비의 계시인 복음을 목숨을 걸고 전파하고, 순종하고 헌신하며, 능히 견고하게 서서, 세세무궁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갑시다.
평화의 왕, 구원의 메시아,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망 중에 기다리는 대림절에, 예수 믿으므로 구원 얻는 복음을 전파하므로, 온 누리를 기쁨과 구원의 복된 소식으로 가득 채우고, 코로나19로 인해 고통과 절망 중에 있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희망과 생명을 나눠주는 희망과 평화의 사도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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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9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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