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일서 4:7-12
서울 소망교회 원로목사이신 곽선희 목사께서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사무실에 있는데 건장하면서도 풀이 죽어 있는 사람이 자기를 찾아왔습니다.
알고 보니 교도소를 들락날락했던 전과 16범의 사람이었는데,
최근에 출소해서 직장을 잡고 일을 하려고 해도 받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목사님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교도소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올바르게 살아보려고 했지만 받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목사님이 직장을 알아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합니다.
갑자기 만난 낯선 사람에게 이런 부탁을 받으니 목사님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난처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목사님과 교회를 비판하고 욕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다 헛소리에 불과하고 교회도 목사도 다 똑같은 사람이다.’
‘세상에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 야단을 치는 그 분을 붙잡고 한참동안 이야기를 했다는 일화입니다.
제가 짧게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전과자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이 세상에 사랑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모도 자기를 버렸고 어떻게 결혼한 아내도 자식을 데리고 도망갔고
그래서 찾아온 교회마저도 자기를 받아주지 못하는 세상에 사랑이 어디 있느냐? 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랑이 어디 있느냐? 사랑은 없다’ 고 외치는 절규는 비단 그 사람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절규이며 하소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찬송가 503장을 보면,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1.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 뿐일세.
2. 곳곳 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받기 원하네.
3. 어떤 사람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으며/ 어떤 사람 자연 앞에 사랑요구 하도다.
4. 기갈 중에 있는 영혼 사랑받기 원하며/ 아이들도 소리 질러 사랑받기 원하네.
이 가사가 보여주는 대로 세상은 사랑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세상은 갈수록 냉랭해지고 곳곳에서 번민이 생기고 사랑의 기갈을 느끼게 됩니다.
참된 사랑을 찾지 못한 사람은 헛된 것에서 사랑을 찾고 있지만 그들이 찾는 우상이나 자연이 사랑의 기갈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한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이러한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사랑이 여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그렇게 원하고 찾고 갈망하는 사랑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이야기를 조금 더 하면 그때 목사님은 ‘사랑이 왜 없느냐? 당신이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다 사랑 때문이 아니냐?’
‘당신이 태어난 것도 사랑 때문이고 당신이 어려운 시절을 지나 성장한 것도 누군가의 사랑 때문이고 당신이 자식을 난 것도 사랑 때문이 아니냐?’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없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그 사람자체가 사랑의 열매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전부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사랑이 여기 있다고 할 때 여기는 어디를 말할까요?
먼저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다른 어떤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학자 벵겔의 설명을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영적생활의 발전을 네 단계로 나누는데요,
첫 번째는 두려움도 사랑도 없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 없이 두려움만 있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완전히 믿게 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사랑보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점차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통하여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서 인간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까지는 진정한 사랑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이라고 해도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닌 사랑을 가장한 이기심이고 자기만족이고 자기욕심이고 본능일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공허하게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여 나타나게 되었는데,
1) 첫 번째가 성육신 사랑입니다.
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향하여 가장 빛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통하여 최근에 자주 들었습니다만,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셨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독생자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일체가 되신 분이십니다.
가장 사랑하시는 그 분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가장 귀한 아들, 아니 자신과 동체이신 분을 보내주시는 사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본능도, 의무감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며칠 전에 유튜브에서 이런 영상을 보았습니다.
캥거루 두 마리가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을 때 캥거루를 노리는 짐승이 습격을 합니다.
깜짝 놀란 캥거루가 도망을 하는데 엄마 캥거루는 잘 도망을 갑니다.
그러나 어린 캥거루는 아무래도 잘 도망을 하지 못하니까 당연힌 짐승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영상은 죽기 살기로 좇아가고 도망가는 장면이 계속되는데 그것을 보는 저까지도 저게 어떻게 될까?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하여 시선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좇아가는 짐승이 캥거루를 잡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정말 감동적인 것은 도망가던 새끼 캥거루와 그것을 지켜보던 어미 캥거루가 만나서 얼마나 기뻐하는지
서로 부둥켜 앉고 서로 만져주고 입을 맞추고 정말 눈시울이 뜨거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어미 캥거루는 짐승이 나타나자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을 칩니다.
새끼를 위하여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대항을 하지 못합니다.
물론 자기가 나서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본능을 따라서 그렇게 했겠지요.
도망가서는 새끼가 살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살아오니까 너무 반가워서 너무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인간이 죄와 사망에 쫓겨서 도망 다니다가 결국은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너희들이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하시지 않고 독생자를 보내서라도 죽어가는 인간을 살리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희생하고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더라도 인간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두 번째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한 화목제물로 이 세상에 오신 아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통하여 우리 죄를 대속하십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시고 십자가의 수치를 참으시고 조롱과 비웃음을 참으시고 목마름과 배고픔을 참으시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십니다.
이 ‘십자가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우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여기에, 성육신과 십자가에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다고 할 때에 두 번째 ‘여기’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11절 말씀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말씀합니다.
20절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짐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성육신과 십자가 사랑으로 구체화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랑을 알고 힘입어 구원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또한 숙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니까 사랑이 어디 있느냐? 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밀림의 성자라고 불렸던 슈바이처박사의 아프리카 생활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못했다고 합니다.
유럽 사람이나 심지어 아프리카 현지인들마저도,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한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의 오지에 들어가서
의료사역에만 투신하는 것이 무척 의아스러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배운 것이 아깝고 사람이 아깝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지에서 봉사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책을 써서, 지식으로 가르치고 전파해도 사람들은 전혀 변하지 않고,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내가 직접 몸으로 보여줘야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행함으로 직접 보여주어야 합니다.
전주 화산동에는 군산 영명고등학교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데이비스 선교사의 기념비가 있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한국에 파송 되어 최초로 순교한 여 선교사입니다.
1896년 군산에서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던 그녀는 결혼 후에는 전주 서문 밖에 약방을 개설하고 환자들을 치료하며 선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파송한 미선교부의 지원으로 병원을 지은 후 본격적으로 의료선교를 하게 되는데 그 곳이 바로 전주 예수병원입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누구보다 전도의 열정이 강하여 한 해에 1,885명을 전도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전도하는 일에 목숨을 바친 그녀는 예수병원에 입원한 어린이들을 돌보다가 열병에 전염되어 41세의 나이로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녀의 기념비에 '생명을 바쳐 선교한 여장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가 이렇게 헌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머니로부터 배운 십자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먼 이곳까지 와서 전도를 하였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사랑의 선교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경험한 자들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와 하는 것입니다.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믿고 그 사랑이 마음에 채워질 때 비로소 영혼 구원하는 일에 그리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지 교리나 의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없는 기독교는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쓰레기통에 버려질 휴지같이 될 것입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하며 탄식하며 사랑 없는 까닭에 실망한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나에게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교우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면 ‘사랑이 어디 있느냐?’고 외치며 한탄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고 세상은 점점 더 냉랭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은 나에게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랑을 증거하면 세상은 더욱 더 활기있고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사랑은 나에게 있습니다.’
(2024. 04.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