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는 글은 스마트폰 📸 와이드(WIDE) 화면으로 볼 수 있게 조정하였습니다. 경건의 비밀 디모데전서 3장 15-16절 / 김병삼 목사 ➤[디모데전서 3장 15-16절] “15. 그러나 내가 오랫동안 지체하면 네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네가 알게 하려 하노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16.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기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 져서 영접을 받으셨느니라.”(KJV) 여자들에게서 치매의 초기 증상을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갑자기 남편에게 잘하기 시작하면 치매가 시작된 것이랍니다. 지금 자기 앞에 있는 남자가 남편인 줄 모르고 다른 남자로 착각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고 또한, 잊고 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혼동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보면 시대마다 사용하시는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사실은 그들의 사역이 귀합니다. 그들을 사용하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 순간 초대교회부터 지속되어 왔던 오류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가 이 부분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지난주에 칼뱅 탄생기념 하는 주일로 여러 행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별로 강조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교파’문제입니다. 제 마음속에 있는 가장 분명한 확신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가 어느 교파에 속하느냐보다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지요. 즉, ‘예수님의 교회’가 되는 것 말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성령님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끊임없이 초대교회에 주장했던 것 중의 하나가 교회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게바파나, 아볼로파나, 예수파나, 바울파가 되는 것을 염려했습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있었던 가장 강력한 종교개혁의 역사는 교회가 사유화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부분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이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어느 교회에 속하고 어떤 사람의 말을 듣느냐가 중요해졌을 때 외친 것입니다. “Sola Fide” “Coram Deo” 개혁자들이 외쳤던 모토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였습니다. 루터도 종교개혁을 하며 자신이 어떤 교파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이었고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도 끝까지 자신이 교파를 만드는 것에 대하여 반대를 했었습니다. 단지 영국 국교가 너무 제도화되므로 영성을 잃어버리고 형식화된 무미건조한 신앙에 대한 영성 회복 운동이었던 것이지요. 사람이 변하는 것, 사회가 변하는 것은 제도화된 율법이나 공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성령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도화된 교회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느냐라는 “자유의지와 은혜”를 강조했던 것이지요. 칼뱅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세속적으로 변해버린 기독교에 대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우리의 삶을 증거 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앙의 본질을 외쳤던 위대한 인물들의 후예들은 다시 ‘교리’와 ‘교권’에 매달리기 시작했지요. 마치 자유의지냐 하나님의 주권이냐를 주장하는 차이에 따라 구원의 문제가 달린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종교개혁 운동은 늘 한쪽으로 치우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무시할 때, 그 간격을 좁히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오늘 존 칼뱅의 ‘경건’도 율법주의 경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의 본질적 경건을 이야기합니다. 칼뱅은 그의 설교에서 이런 의문으로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왜 영생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을 경건의 비밀이라고 불렀을까요?” 오늘 본문말씀을 16절을 보세요. ➤“16.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기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 져서 영접을 받으셨느니라.” 경건의 비밀의 내용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 영으로 의롭다 하신 것, 그리고 그 사실이 전파되고 믿게 되고 영광 가운데 올라가신 것이 경건의 비밀이라고 합니다. 결국, “성육신”의 문제에서 경건의 비밀이 풀립니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 칼뱅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의 시대나 오늘날 교회의 고민이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매일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본성을 책임지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설교를 어떠한 태도로 듣습니까? 성경을 읽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이런 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 자기 일에 대해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고민입니다. 자신의 일에 일주일에 엿새를 쓰고 하루는 예배라는 이름으로 종교교육에 배정하는 사람들, 그래서 예배로 정해진 날에도 그 시간이 끝나면 놀이나 오락으로 보내기 쉬운 사람들. 과연 하나님이 이들의 삶에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바로 그런 우리에게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키시고 그 연결을 통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보게 하십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목적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 목적에 합한 삶을 살아갈 때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삶은 늘 자신의 관점에서 삶을 계획하고 살아갑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에서 연예인 선교회를 시작하려고 모였을 때입니다. 몇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던 것을 내려놓고 “1년만 세상일에 열심히 살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어느덧 18년이 흐르고, 5년이 흘렀습니다. 국민일보에 보니까 우리가 잘 아는 배우 예지원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모태신앙으로 살았던 그가 연예 활동을 하면서 40이 넘으면 봉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연예계의 어떤 분의 인도로 교회를 다시 찾게 되었고 요즘 연예인들이 열심히 봉사하는 컨패션 밴드와 함께 ‘아이티’를 방문해 굶주린 어린아이를 안은 동안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되었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자 그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 보인 것이지요.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생각한 것이지요. 성육신 하나님을 내가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삶은 경건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세속적인 삶으로 나타납니다. 만일 우리가 예배드리는 날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나머지 날은 내 마음대로 산다면 결코 경건한 삶을 산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살면서 자유함을 느낀다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믿음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만일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자신의 삶을 통해 늘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경건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삶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존 칼뱅은 그의 설교에서 경건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제시하고 그것이 우리가 매우 귀중히 여겨야 할 보석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경건의 삶이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제가 조금 해석한다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할 수 있을 때 ‘경건’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관계되어 있을 때 ‘경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적용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자녀가, 남편이, 아내가, 사업이, 이웃과의 만남이, 미래의 계획과 집을 사는 위치가 하나님과 관계가 있습니까? 경건의 삶은 우리의 인생을 아주 단순하게 만들어 줍니다. 제가 늘 주장하는바 신앙생활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simple 하게 생각하라고 하지요. 어떤 분과 식사를 하는데 집을 사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합니다. 아내는 빨리 집을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남편은 무리하게 집을 샀다가 은행 빚을 갚는데 너무 버거울까 걱정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이 집을 살 만한 적당한 가격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저는 집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별로 집을 살 이유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집을 언제 사고 가격이 오르고 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그 집이 필요한 때이고 내가 그 집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지금 필요해서 샀다면, 나중에 더 싼 가격에 살 수 있었다 하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가장 필요한 때 그 집을 사서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것은 경제적 가치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고민하며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 금전적인 이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살아야 하는 이유와 지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 가치가 하나님과 연관된 것이라면 우리의 결단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의미 있겠습니까? 그런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선하심이 선포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의미 있고, 선하며, 자랑할 만하며 자신감에 차 있으며,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런 인생을 살 때,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이 선포되지 않겠습니까? 경건은 즐거움이다! 이 경건의 문제를 풀어가기에 앞서 이런 말을 해 보겠습니다 .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경건은 고역(苦役)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고 사는 사람들에게 경건은 큰 기쁨과 감격입니다.” 칼뱅의 설교를 제가 조금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뉘앙스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감탄과 선포가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 경건의 비밀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하나님이 육신이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이 믿게 되는 것, 그리고 영광 가운데서 올림을 받는 이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사랑하는 여러분! 경건하게 살아가려는 여러분의 삶에서 기쁨과 감사,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할 수 있나요? 아니면 여러분은 경건하게 살아가려고 늘 하나님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고통을 느끼시나요? 아니 다른 물음이 가능하네요.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신가요? 아니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신가요? 분명히 성경은 우리에게 심판의 날이 이르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심판은 우리를 구원하고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날입니다.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수난 주간에 강사였던 임은미 선교사님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주일을 범하고 골프장에 갔다가 그만 공에 맞아 뇌진탕으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수근 거립니다. “주일을 범하더니 벌 받은 거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입니다. 주일을 범하고 놀러 갔다가 사고를 당한다든지, 술 먹고 운전하다가 사고가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벌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다면 우리 가운에 여기 살아 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죄송하지만 저도 예배시간에 가기 싫을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보다 당장 육신의 피곤함이 나를 엄습할 때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그때마다 내가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렇게 무서운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오히려 우리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 합니다. ➤시편 86편5절입니다. “5 [주]여, 주는 선하시고 기꺼이 용서하시며 주를 부르는 모든 자에게 긍휼을 풍성히 베푸시나이다.” 적어도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은 아닙니다. 잘못에 대하여 분명히 심판은 하시지만,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하시며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원하시는 소원이 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무섭게 심판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혼이 나야 하고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많이 있음을 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보면서 내 모습을 보아야 하고 나를 용서하시고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의 비유를 보면 가라지를 뽑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혹시라도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까 두렵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아시지만, 잠시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분의 선하심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며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이 선포됩니다. 바로 이것이 경건입니다. 우리가 가끔 길을 가다 보면 “공사 중”이라는 표지판을 봅니다.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공사가 끝나기까지는 그 길을 우회해야 합니다. 가끔 우리의 삶에도 누군가의 삶에도 “공사 중”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교정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 “God at work”의 시간 말입니다. 이때는 인내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의 삶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바로 선하심입니다. 그 장로님이 주일을 어기고 골프를 치러갔기에, 그의 삶이 올바로 교정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술 먹고 운전하는 성도를 보면 조심하라고 경고하시는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Good”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건한 삶을 살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골프를 치러 갔다고, 예배를 한번 빠졌다고, 우리가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놀음을 했다고 곧바로 심판하시는 그런 분은 아니시지만, 우리가 경건한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분별하고 행동하게 되지 않을까요? 경건이란?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을 향해 갈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경건의 비밀이 아닐까요? 비밀이 선포됩니다! 칼뱅은 그의 설교를 통해 사단이 이 비밀을 아는데 방해하려고 전략을 쓰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인간이 되셔서 이 땅 위에 오셨다는 사실, 그분으로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왜곡하려고 사단은 많은 이단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게 방해하는 마귀졸개 이단들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죽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든 권능을 소유하고 계시며 그분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라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하고 보존하며 생존을 유지하는 성부 하나님의 지혜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육신으로 나타나신바 되므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그분이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심으로” 그분이 승리하셨고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교훈에 믿음으로 굴복할 때 복음이 의롭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영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3-4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3.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그분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4.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 제가 칼뱅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바울과 어거스틴, 그리고 루터의 계보를 잇는 기독교의 “은혜”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은혜는 기쁨과 즐거움이며 하나님을 누리는 것입니다. 칼뱅이 “경건의 비밀”이라는 설교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이것을 알게 될 때 우리의 지혜가 완성된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마음껏 즐기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복음의 밝은 빛으로 밝혀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과 어거스틴, 루터, 칼뱅의 공통점이 있다면 구원의 은혜 가운데서 평안과 기쁨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행함과 율법으로도 비밀의 영광이 선포되지 않습니다. 수천 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자꾸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격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되 우리 속에 거한다는 사실을, 그분이 우리 속에 거하시되 영광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날 노 스승이 제자들을 모두 마당에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한 제자에게 마당에 동그라미를 그리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시키는 대로 꼬챙이를 가지고 마당에 둥근 원을 그렸습니다. 스승이 물었습니다. “지금 너희는 동그라미에 들어가도 죽고 동그라미 밖에 있어도 죽는다. 어떻게 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느냐?” 제자들은 한참을 생각합니다. 한 제자가 말합니다. “혹시 금을 밟고 있으면 어떤가요?” 스승이 대답합니다. “물이 담긴 항아리가 물속에 있으면 그 항아리의 안도 물이요 밖도 물이거늘 그런데 금이 어디 있느냐?” 한참 시간이 지났을 때 평소 별로 눈에 띄지 않던 제자 하나가 걸어 나오더니 동그라미를 두 손으로 지워버렸습니다. 노 스승이 그제야 마당으로 시선을 보내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금을 그어 놓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그분과의 간격, 심판과 구원의 사이에서 인간과 하나님이라는 엄청난 차이 앞에서 우리는 참 많은 절망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간격을 메우려면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당황하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황당해하기도 합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입니다. 당황: 교회 버스를 타려는데 뒤가 갑자기 마려울 때 슬픔: 꾹 참고 탔는데 계속 방귀가 나올 때 쇼킹: 방귀와 함께 이 물질도 함께 나올 때 당황: 내가 예배 기도인 줄 모르고 주보를 받았는데 내 이름이 있을 때 슬픔: 찬송시간에 쪽지에 급하게 기도문을 적을 때 쇼킹: 기도하려고 하는데, 적은 쪽지를 안 가지고 나갔을 때 당황: 신약에 있는 설교 본문을 구약에서 찾으며 못 찾고 있을 때 슬픔: 본문을 못 찾고 헤매고 있는데, 목사님께서 교독하자며 나부터 시킬 때 쇼킹: 겨우 찾아 읽으려는데, 한문성경이고 모르는 한문투성이일 때 당황: 설교시간에 자꾸만 졸음이 밀려올 때 슬픔: 간혹 눈을 떠서 목사님을 바라보는데, 목사님과 눈이 마주칠 때 쇼킹: 난 그냥 조는데 옆 사람은 코를 골 때 당황: 예배 중 핸드폰이 올릴 때 슬픔: 핸드폰을 꺼놓고 예배를 드렸는데, 모르고 종일 꺼놨을 때 쇼킹: 예배 중 울린 핸드폰 소리가 트로트 음악일 때 당황: 헌금 내려고 지갑을 꺼냈는데 10만 원짜리 수표만 달랑 한 장 있을 때 슬픔: 급하게 옆자리 앉은 아는 성도에게 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 꿀 때 쇼킹: 예배 끝나고 지갑을 열었는데, 수표 뒤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찾았을 때 이런 사소한 일이라면 그냥 웃고 넘길 수 있지만, 실제 우리의 삶에서 도저히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그 길을 걸으라]라는 책에서 다윗의 기도인 시편 130편을 인용합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창조주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도다.“ 그의 인생을 가는 동안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서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되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질병 앞에서 도저히 내 인생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에도 말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그분과의 관계 속이 있음을 믿습니다. 칼뱅은 그의 설교에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경건의 비밀이라고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5절입니다. “5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성육신 하신 그분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적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이런 문제를 안고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합니다. 그분의 선하심이 때가 이르면 우리 가운데 행하실 일을 기다리며 그분의 임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 우리가 문제를 안고 그분 앞에 와서 기도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분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비밀입니까? 세상 사람이 문제를 안고 술을 찾을 때, 신경이 날카로워 담배를 찾고 약을 찾을 때,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순간에 우리는 직접 하나님 앞에 나와 직접 기도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죽으심으로 중보자가 되셔서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 경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당황함과 황당함 가운데서도 경건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선포하는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그분은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 속에 거할 뿐 아니라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므로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요, 그분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경건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때로 죄와 슬픔과 낙망이 우리를 가로막지만,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가는 자격을 박탈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죄가 때로는 사단의 권세와 세력이 우리의 길에 들어와 혼란스럽게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경건한 자의 거룩한 길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때로 무력하고 길을 잃을 때도 있으며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여전히 그분을 믿으며 그 길을 가는 경건의 삶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잘못과 절망과 실패를 기억하신다면 누가 하나님의 길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분은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선한 일을 행하심을 단지 기다릴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죄함 받고 치유 받고 회복되고 용서받으며 “아침”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아직은 불완전한 길을 가면서 그분의 선하심을 바라보는 것이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에 우리의 손을 잡으시는 그분을 기대하는 것이며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 소망으로 주의 깊게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온전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우리가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격 없으므로 인하여 그분의 능력이 임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의 삶을 살 때 그분의 능력이 선포될 것입니다. 아니, 그분의 영광과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가 경건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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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