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나는 CCM에 대해 신학적 분석을 부탁 받았지만, 전문적인 음악인도 아니며 CCM에 대해서도 문외한에 가까운 사람이다. 나는 CCM의 노래들을 충분히 듣고 섭렵한 사람이 아니며, 이 장르의 음악에 담긴 다양한 차원들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CCM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현대의 대중음악과 축을 같이할 뿐 아니라, 교회음악(혹은 예배음악)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전문적인 음악적인 훈련을 쌓지 못한 사람으로서 나는 존재론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나의 신앙생활의 과정을 돌아보면 CCM과 무관하게 살아온 것 같지 않다. 나는 1969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대학생선교단체에서도 생활하였으므로 한국교회에 "가스펠 송"이 도입되던 초기에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처음으로 "햇빛 보다 더 밝은 곳 내 집 있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율동과 함께 그룹을 이끌었고, CCM의 원조 가운데 하나인 "작은 불꽃 하나가"(엑스플로 '72, Dallas)와 포크 송에서 나온 여러 가스펠 송들인 “Do Lord Do Lord, Give Me Oil in My Lamp, I've Got the Joy Joy Joy Down in My Heart. Seek Ye First, Father I Adore You, Our God Reigns, The Peace that Passes All Understanding” 등의 노래를 젊은 시절에 친구들과 가장 열심히 부른 사람 중 하나이다. 특히 나는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그들과 함께 즐겨 불렀던 많은 노래들이 CCM인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CCM을 다룰 수 있는 기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에 비해 현대 대중 음악들을 열심히 들으려고 한다. 이런 과정을 되돌아보면, 나는 CCM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지니고 살아온 "청중"으로 여겨지며, 어떤 "이념적인 전제"를 가지고 "원천적으로 주장하거나 봉쇄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또한 나는 다른 어떤 사람들 보다 시편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시편 연구에 몰두해 있으며, 시편과 CCM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CCM은 그 역사적인 발전 과정에 있어서 시편을 노래로 대중화하였으며, 구미에서 현대 예배 음악을 만드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이다. 비록 나는 CCM은 단편적으로만 알지만, 시편 만은 비교적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찬송가로서 시편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관점에서 오늘날의 CCM을 조금이라도 비출 수 있는 위치에는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신학적인 면에서, 개신교 신학자요, 장로교 신학자이며, 신학적인 경향은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이며, 내용에 있어서는 개혁주의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 1답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이며, 이 고백은 우리의 "찬양"으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나는 신학의 전체적인 축이 보수와 전통을 중요시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현대적" 기독교 음악에 대해서도 어떤 책임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표현되고 결실해야 하므로, "현대성"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과제요 책임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형태의 CCM이 다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젊은 세대"에게 그들의 음악 장르와 장단과 박자로 노래하며 복음을 소개하고, 기독교를 현대적 관점에서 변증하고자 하는 CCM 아티스들의 기본적 관심에는 찬사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주제를 충분히 다룰 시간이 없었으며, 읽은 글과 책도 지극히 제한되었음을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이 글을 준비하며 나는 가끔 "내가 무모했구나"하는 느낌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돌아갈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윤리학을 가르치는 존 프레임이 Contemporary Worship Music: A Biblical Defense(1997)라는 글을 통해 보다 균형잡힌 시각을 던져준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우리 모두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기독교 현대 음악"에 대해 서로가 다른 견해들에 대해 미소지으며 들어주고 또한 우리의 공통분모를 함께 찾기를 열망하면서, CCM에 대한 공적인 담화를 함께 시작하여 21세기 한국교회가 더욱 성숙해지기를 바라며 부족함을 무릅쓰고 감히 이 주제를 다루어 본다.
1. CCM에 대한 예비적 고찰
1) CCM이 무엇인가?
CCM이란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의 준말이다. 그러나 언어적 의미 그대로 "현대적인 기독교 음악"이 모두 CCM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대적인" 교회 및 예배 음악이 모두 CCM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 나타난 "현대적"이란 용어와 "기독교적"이란 말도 청중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되므로 CCM은 보다 좁은 의미에서 정의될 필요를 느낀다. 프레임에 따르면, CCM은 기본적으로 "1960년대 중반이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기원된 것이며, 기독교 음악계에서 일어난 특정한 운동이다"(1997:6).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1960년대부터 영적 각성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의 신앙체험은 새로운 유형의 음악을 요청하게 되었고, 특히 척 스미스(Chuck Smith)가 세운 "갈보리 채플"(Calvary Chapel)을 중심으로 CCM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음악의 형식적 관점에서 CCM을 정의한 양동복에 따르면, CCM은 "처음에 예수 음악(Jesus Music), 지저스 록(Jesus Rock)으로 불려졌으나, (사람들이)1970년대 말부터 CCM이라는 용어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사람들이 CCM을 전통적인 찬송가풍의 음악과는 다른 음악으로 인정한 것이다"(2000:33). CCM의 기본적인 성격에 대해 존 프레임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의한다(8쪽). (1) "CCM은 문학적이고 음악적인 표현양식에 있어서 전통적이거나 고전적이기 보다 훨씬 현대적이고 일반적이다." (2) "CCM의 대부분은 1절 코러스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여러 소절의 시로 구성된 전통적인 찬송가와 대조를 이룬다." (3) "CCM의 본문은 전통적인 찬양 보다 훨씬 단조롭다." (4) "CCM은 전통적인 찬송가와 비교해 볼 때, 애통, 죄 고백, 가르침, 개인 간증, 간청 보다 찬양을 훨씬 많이 강조한다." CCM에 대한 프레임의 네 가지 성격 규명에 우리는 세 가지 사항을 덧붙여 볼 수 있을 것이다. (5) 음악의 형식적 관점에서 CCM은 랩, 헤비 메탈, 팝, 컨츄리, 록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CCM은 기존하고 있던 미국의 "가스펠 송" 뿐 아니라, 보다 엄격한 "교회 음악"과도 구별되며, 음악적 장르 사용에 있어서 "현대성"이 두드러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CCM이 담고 있는 "현대성"이라는 용어는 "시대와 더불어" 혹은 "당대"를 의미하지, "새로움"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해럴드 베스트는 지적한다(160쪽). 즉 "CCM은 이미 음악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들과 병행한다는 의미에서 '현대적'이며 동시에 음악적으로 '보수적'이다. 이렇게 볼 때 CCM 현상은 '새로운 것'이기보다는 '선호되는 것'이다"(상동). (6) 음악의 내용에 있어서도 CCM은 "복음적인" 내용을 다양한 "현대적 상황"과 융합시키고 있다. 즉 "깨어진 가정"이나 전쟁, 마약, 사회정의, 인종차별 반대 등의 주제도 함께 반영한다. (7) 1990년대 이후에 CCM은 단지 교회 안의 음악으로 제한되지 않고, 현대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CCM 아티스트들은 그들의 청중을 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만으로 제한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이나 타종교인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2) CCM은 어떤 비판들을 받고 있는가?
CCM은 그 기원과 음악적 형식과 아티스트들의 파격적인 의상과 대중성 때문에, 여러 가지 형태의 비판을 받고 있다. 존 프레임은 데이빗 웰즈(D. Wells)가 "복음주의 교회에 침투한 8가지 사항의 세속 문화 현상"이란 해석적 모델을 가지고 CCM에 대한 비평가들의 논점을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해 주고 있다(Frame 1997:46). (1) 주관주의적인(subjectivism) CCM은 인생을 객관적 진리 위에 두기 보다 인간 경험 위에 두므로, 지나치게 예배자의 느낌과 체험에 비중을 높이 둔다. (2) 인본주의적인(humanism) CCM은 하나님을 "사용자 편의적인" 신(user-friendly God)으로 만들어, 인생관과 세계관에서 하나님을 약화시키거나 배제하며, 결국 하나님의 초월성을 약화시키고, 하나님의 율법과 인간의 죄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은 외면한다. (3) 반지성주의적인(anti-intellectualism) CCM은 우리의 지성 보다 감정에 호소한다. CCM은 신앙의 초보자들을 위한 것이며,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4) 심리주의적인(psychologism) CCM은 진정한 은총과 죄사함의 복음보다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 사이비 심리치료를 제공한다. (5)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에 빠진 CCM은 사업적인 경영기법과 광고 기술을 사용하여 기독교조차도 마케팅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6) 소비지상주의적인(consumerism) CCM은 소비자 중심적인 기독교를 만들어 신앙을 상품화하고, 사람들의 소비욕구를 부추긴다. (7) 실용주의적인(pragmatism) CCM은 결과로서 모든 개념과 행동을 판단하는 세속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8) 현대 우월주의(temporal chauvinism)를 믿는 CCM은 전통을 업신여기며, "현재"가 가장 좋은 시대라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CCM은 전통적인 예배를 지루하고 케케묵은 것으로 만들고, 현대인들에게 쓸데없는 관심을 끌려고 한다. 이들은 "급진적이며" 또한 "자유주의적"이다.
CCM에 대한 여러 비평가들의 8가지 사항은 정당한 것일까?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해 보면, 위의 비판은 단지 CCM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 교회 및 사회 전반에 적용될 수 있는 사항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위의 비판들은 CCM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혹독한 것 같다. 물론 대중음악의 형식을 빌려 신앙을 표현하고자 하는 CCM은 근본적으로 많은 한계를 갖고 있을 것이다. 또한 모든 CCM이 고도로 높은 음악적 질과 신학적인 수준을 갖고 있다고 보기 힘들며, CCM은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작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어떤 통일성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위와 같은 비판들이 부분적으로 적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CCM에 대해 공평한 시각을 갖기 위해, 위의 사항들을 여섯 가지로 정리하여 좀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1) CCM이 "주관주의"에 빠졌다는 점은 모든 노래가 주관적이며, 감성적인 점에서 재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가슴에 느껴질 때, 어떻게 "냉정한 객관성" 만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또한 CCM이 "심리주의적"이라는 비판은 부분적으로 정당할 수 있으나, 진정한 찬양은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순화시키는 효과가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사울이 악신에 사로잡혀 고통당 할 때, "다윗은 수금으로 노래하였고, 사울은 마음이 상쾌하게 되어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났다"고 한다(삼상 16:23).
(2) CCM이 "인본주의적"이라는 점은 아마 CCM이 전통적인 찬송가 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강조하는 데서 나온 것 같다. 그러나 CCM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는 것은 그의 "초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전통적인 찬송가들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심을 노래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3) CCM이 "반지성주의적"이라는 비판은 모든 CCM에 대한 비판은 아닐 것이며, CCM이 더욱 자라가야 할 목표에 대한 비판으로 여길 수 있다. 즉 CCM은 앞으로 더욱 포괄적인 믿음의 체계를 구축해 가야할 것이다.
(4) CCM이 "소비지상주의적"이며, 상업적인 경영기법과 광고 기술을 사용하는 "프로페셔널리즘"에 빠졌다는 비판은, 기독교적 사역이 지닌 "생존"과 "섬김"의 양면성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기독교 정신을 따라 "봉사"해야 하지만, 더욱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경영적인 마인드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
(5) CCM이 "실용주의적"이며 "세속적 목적"을 가진다는 비판은 CCM이 "교회"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개인"이나 "단체"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며,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처럼 그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초창기의 CCM 아티스트들은 경제적으로 아무런 보상도 없이 살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6) CCM이 "반전통적" 태도를 가지므로, "급진적"이고 "자유주의적"이라는 비판은 "현대성"과 "전통성"을 지나치게 대립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때로는 "급진성"을 가져오지만, 항상 "옛 패러다임"과 "새 패러다임"은 공존하며 지내다가, 서서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전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3) CCM에 대한 가장 심각한 비판 사항은 무엇인가?
위에서 존 프레임이 데이빗 웰즈를 원용하여 제시한 8가지 사항 보다 더욱 근본적인 쟁점은 CCM이 주로 사용하고 있는 음악의 장르와 연관된 것으로서,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로 귀착된다. 즉 CCM은 그 기원에 있어서 리듬 앤 블루스와 록큰롤이라는 두 뿌리를 가지고 있는 데, 전자는 흑인 연주자들이 성적인 문제를 노골적으로 그들의 가사에 반영하며, 후자는 반항과 성적인 방종을 고무하기 때문에, 이런 두 유형의 음악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CCM 자체를 거부하게 된다. 이 문제를 달리 말하자면, 소위 "세속적 음악"의 첨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록 음악 속에 어떻게 "경건한 기독교 음악"을 담을 수 있는가?" 즉 "기독교 및 교회 음악"이 "세속 음악의 형식"을 사용하는 것은 신앙의 타락과 변질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냐? 는 우려를 하게 된다. 최근 이광복은 (흰돌 1997)에서 세속음악의 폐해성을 드러내려고 애쓰고 있다. 이 책의 추천사에서 한 원로 목회자는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단의 음악이 이미 교회 안에 침투해 있다"고 단정하여 말한다. 이 책의 저자 자신은 "세속음악은 사단의 무기"(15쪽)이며, 그 중 특별히 록 음악은 (1)사단을 찬양하고 (2)사단의 교회를 세우며, (3)사단경을 전하고, (4)강신술을 사용하며, (5)신흥종교를 만들고, (6)인간을 신격화하며, (7)인간을 지옥으로 안내하는 것으로 본다(제 2장). 또한 록 음악은 (1)하나님을 모독하며, (2)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3)성경을 모독하며, (4)십자가를 모독하고, (5)교회를 저주하고, (6) 천국을 거부하며, (7)종교통합 운동을 유도한다고 한다(제 4장). 이어서 그는 록음악이 윤리와 사회와 인간성을 무너뜨리며(5장), 청소년들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한다(6장). 그는 세속음악에 대해 "다소 긍정적인 요소"를 인정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밖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백해무익한 독소일 뿐"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사단은 세속음악을 기독교로 유입시켜 성도들을 타락시키려 하기 때문이다"(99쪽). 그는 특히 "세속음악의 대표격인 록 음악이 크리스찬 록이라는 이름으로 성도들의 거부감을 완화시켜 교회로 침투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상동). 이런 혹독한 비평적 관점은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하나의 극단적인 "유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존 프레임 역시 CCM의 비평가들(M. Beach 1995:5; M. Dawn 1995:150) 등이 CCM이 "열등한 복음"을 전하며, "생명의 주를 예배하는 자들을 강탈해 가고", "정통적 기독교와 아주 다른 종교"를 제시하며, "염병"으로 여긴다고 한다(75쪽). 이런 비평적 관점들은 주로 경건한 목회자들 뿐 아니라, 기독교 음악인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CCM을 둘러싼 논쟁은 쉽게 해결되기 어렵다. 한 사람은 청춘을 바쳐 CCM 아티스트로 헌신하며 사는 데, 다른 사람은 그를 "사단의 도구"로 본다. 이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사실 음악은 이성으로 논할 수 없고, 노래는 우리 감성의 언어이며 가슴에서 작용하는 것이므로 사람마다 음악에 대해서는 비이성적으로 반응한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새로운 음악(악기와 노래 포함)이 도입될 때마다 음악의 문제가 얼마나 폭발력이 강한 것인지 자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쨌든 위의 비판은 같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음악을 통한 "현대적인 기독교적 표현"에 대해 너무나 대립적인 시각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런 갈등들은 우리 "믿음과 행위"의 참된 잣대가 되는 성경의 원리를 따라(Sola Scriptura), 보다 깊고 신중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신학적 작업을 요청하고 있다.
2. CCM의 세속성에 대한 문제
CCM에 대한 비판 중에서 가장 격렬한 것은 CCM이 사용하고 있는 음악의 장르들 속에 록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이것이 통속적 관점에서 "사단적"인 것으로서 여겨지고 있음을 우리는 바로 앞에서 보았다. 즉, CCM의 세속성에 대한 문제가 CCM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CCM은 기독교의 옷을 입은 세속적 노래이므로, 배격되거나 정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물어야 할 것 같다. 첫째로 CCM을 세속적인 음악이라고 일축하는 것이 정당한가? 둘째로, 세속적인 것은 선험적으로 모두 나쁜 것이며, 죄된 것인가? 셋째로,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은 공존할 수 없으며,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은 절대로 피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세상적인 것은 그 모양이라도 피하라"는 태도가 CCM에도 무분별하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1) CCM을 세속적인 음악으로 일축하는 것이 정당한가?
CCM은 그 가사의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헌신을 노래하며, 사랑과 믿음과 수많은 기독교적 덕을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가사들 중 많은 부분들이 "성경구절"에서 나온 것이므로, CCM을 세속 음악으로 일축하는 것은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CCM의 세속성은 사용되고 있는 가사보다는 음악의 형식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4가지 사항을 정리해 볼 수 있다. (1) 앞에서도 보았듯이 모든 CCM은 록 음악에만 의존하지 않으며, 다양한 음악적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CCM을 록과 일치시키거나 밀착시키고 모든 CCM을 "세속적인 음악"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2) 우리는 록 음악에 대해서도 내용과 기능의 관점에서 어떤 구별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록 음악은 많은 록 아티스트들에 의해 신성모독적이며,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적대적이고, 윤리와 도덕을 파괴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록"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지, "록" 자체가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보다 신중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음악의 장르나 스타일은 중립적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즉 "음악의 장르나 스타일"은 선악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고전 음악이 현대 음악 보다 더 선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유럽 음악이 한국 음악 보다 더 영적이라거나, 혹은 더 기독교적이고 말할 수 없다. 즉 음악의 스타일은 신학적으로 중립적인 것이며, 그 형식이 신학의 내용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어떤 음악의 스타일이 우리의 신앙 표현에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늘 심사숙고하며, 바른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며, 나아가 우리의 예배에 적합한 스타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장르와 스타일의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규범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지 않다.
(3) 따라서 우리는 한 장르나 스타일의 음악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해 더욱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우리의 관심은 음악 스타일의 용도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 내용과 연주자의 태도와 의도와 연관된 것일 수 있다. "사단은 바하의 코랄로도 사람을 숭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프레임).
(4) 음악 형식의 선호도는 상대적이며, 문화적이고, 세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미국에서 록음악은 대부분 나이가 든 기성세대에서는 거부감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 스타일의 노래는 1960년대 젊은이들의 반항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록에 대해 긍정적이며, 이 점에 있어서 기성세대와 다른 입장을 가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어떤 스타일의 음악이 특정 계층에게는 적절하나, 다른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음악의 스타일에 대한 평가는 세대나 사회계층이나, 종족 및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와 연관하여 프레임의 평가가 적절하다. "따라서 어떤 노래가 예배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기 전에는 모든 사람의 음악이 들려져야 한다. 늙은이와 젊은이의 노래, 유럽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복잡한 노래와 단순한 노래 등이 모두 들려져야 한다"(프레임).
2) 세속적인 것은 모두 나쁜 것이며, 죄된 것인가?
CCM의 세속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성과 속"을 지나치게 이원론적으로 대립시키고 있는 것 같다. 구약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성과 속은 다음과 같은 도표로 이해될 수 있다.
구약의 세계관에서 모든 사물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크게 나누어지지만, "세속"은 다시 "정결"과 "부정"으로 나누어진다(레 10:10). 즉, 성과 속의 두 개념은 서로 대조를 이루는 것이 분명하지만, "속되다"는 것은 "더럽다"는 개념보다는 오히려 "일반적"이고 평상적이며 정상적인"인 상태를 가리킨다. 물론 "속되다"는 히브리 원어가 "오염되다, 더럽혀지다"는 개념을 포함하지만 "거룩하다"와 반의어로 사용된 곳(레 10:10; 겔 22:26; 44:23)에서는 "일반적인 것"을 의미한다. 에스겔 48:15은 제사장이 사는 "거룩한 땅"과 일반백성이 사는 "속된 땅"을 구별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속된 땅"은 "더러운 땅"이 아니라 "성별된 곳"과 구별되는 "일반적인 땅"으로 보아야 한다.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것이 하나님께 바쳐지면 거룩한 것이 된다. 즉 속된 것은 일반적인 것으로서 다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누어진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세속성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해 가시는 세계의 일반성 속에서 일차적으로 이해해야 하며, 세상에서 하나님을 적대하는 모든 것을 세속적이라고 일축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과 속의 구별은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방향의 문제이지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성속의 문제를 음악과 연관해 볼 때, 우리는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1) 성경은 라멕의 아들 "유발"이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말할 때에도 가치 중립적으로 말한다(창 4:21). 본문은 "수금과 퉁소"가 이방인의 악기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배 음악에서 피해야 할 악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기자는 단지 "유발이 음악의 조상이 되었다"는 점을 서술적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2) 성경에는 "아담이 하와를 처음 만났을 때 부른 노래"(창 2:22), "처녀가 시집갈 때 축원하는 노래"(창 24:60), "우물을 팔 때 부르는 노래"(민 21:17-18),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부르는 승전가"(삼상 18:6-7), "결혼축가"(시 45) 등 다양한 세속적 배경에서 부른 노래들을 담고 있다. 이 노래들은 꼭 "예배음악" 만이 아니었으며, 일상 생활 속에서 축제와 연관된 것들이었다.
(3) 솔로몬 성전에서와 스룹바벨 시대의 찬송가로 여겨지는 시편은 음악적 관점에서 볼 때 여러 가지 다양성을 지닌다.
[1] 시편은 예배음악에 있어서 다양한 문학적 장르를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경배와 찬양"의 그룹에서는 "찬양"을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노래로 협소한 의미로 제한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김홍전이 만든 (평화사 1982)이란 책에는 하나님을 직접 찬양하는 것들을 주로 담고 있다. 그는 경배송(Worship), 성삼위송(Sanctus), 송영(Doxology), 아멘, 영광송(Gloria), 할렐루야, 헌상송(Offertorium)을 "찬양"으로 여기고 있다(홍정수 1995:679-80에서 인용됨). 그의 책에는 기타 찬송으로서 성탄절 노래, 부활절, 어린이 노래, 성구 노래(마11:28, 30), 기도 노래 등을 담고 있다.
김명종의 (예수마을 찬송 시리즈 2. 도서출판 예수 마을, 1993)은 바른 찬송에 대해 주의를 한다. 바른 찬송이란 (1) 성경에 합한 찬송가, (2) 하나님만을 상대로 한 찬송이라고 한다. 전자는 "가사는 물론 곡조까지도 성경에 부합된 것"이다. 즉 "세속적 음악풍을 본뜬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죄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라"는 하나님을 기리는 노래가 아니므로 찬양이 될 수 없으며 전도 노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홍정수 1995:676). 이런 관점에서 홍정수는 "찬양"과 "예배음악"과 "교회음악"으로 구분한다. 교회음악은 개념이 가장 큰 것이고, 예배 음악과 찬양의 순으로 개념이 좁아진다.
시편의 관점에서 보면, 옛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찬양"과 "감사시"(개인과 공동체)와 "애가"(개인과 공동체)와 "신뢰의 노래" 등을 사용하였으며, 내용에 있어서는 "시온의 노래"와 "토라 시편"과 "제왕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등을 담고 있다. 때로는 기도와 심지어 "원수에 대한 저주 기원"까지도 담고 있다. 시편 밖에서는 "장송곡"(예레미야 애가) 등도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찬양은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라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찬양은 극히 제한되어 나타나고 있다(사6:3참조).
[2] 시편의 곡조와 운율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시편은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송가로서 곡조를 분명히 갖고 있었으며, 곡에 대한 명시가 시편의 표제에도 나타나고 있으나, 그 곡에 대한 전승은 잊혀 졌으며, 현재 유대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노래들은 후대의 새로운 전승으로 여겨진다. 시편의 곡조에 대한 정확한 전승은 없지만,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대근동아시아의 곡조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시편의 운율에 있어서 학자들은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으며, 운율 계산에 있어서 엑센트 계산법, 음절 계산법, 모음 계산법 등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합의된 방법은 없다. 또한 시편의 노래들은 영시나 한시처럼, 정형적 운율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상당히 폭넓은 다양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운율과 박자와 노래의 빠르기에는 다양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3] 시편에는 "모세의 노래"(시90편)로부터 "바벨론 포로기의 노래"(시137편)에 이르기까지 온갖 옛 노래들과 새노래들을 다양하게 담고 있으며, 특히 시인들은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성도들을 격려한다(시33:3; 40:3; 96:1; 98:1; 144:9; 149:1; 사 42:10; 계 5:9; 14:3 참조).
[4] 시편에는 악기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시편 150편에는 모든 형태의 악기가 동원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여기에는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가 등장하여 각각 독특한 부분으로 연주하도록 한다. 또한 거룩한 춤이 함께 하였다. 3절에 나타나는 "비파와 수금"에서 전자는 고대의 바이올린이다. "소고"는 동녀들이 춤추며 연주하는 악기이다(시69:25). "현악"(minnim)은 오직 여기에 나오며(45:8 참조)와 "퉁소"('ugab; 창3:21; 욥21:12; 30:31)와 함께 종교적인 축제와는 전혀 무관한 악기이다. 퉁소는 밝고 비음이 나는 현대의 오보에와는 달리, 어둔 공명이 섞인 소리가 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어 5절에는 "큰소리 나는 제금"과 "높은 소리나는 제금"이 나타나고 있다. 시편의 관점에서 볼 때, 성경은 어떤 악기와 곡조에 대해 규범적 지시를 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성경의 악기에 대해서는 성출훈 역, [호산나음악사 1994]을 보라).
이런 관점에서 우리들은 CCM이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음악적 스타일들과 장르들을 보다 자연스러운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래리 노먼(Larry Norman)이 부른 노래, "왜 좋은 음악은 모두 악마가 가져야만 하는가?"(1970년대 초)를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들을 필요가 있다(양동복 105에서 인용). "나는 나의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하지만 나는 아직도 록이 나오는 라디오를 좋아한답니다. 사람들은 '로큰롤은 나쁜 것이야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난 너무 좋아서 일어나 춤춰야겠어요' 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압니다. 난 혼동하지 않아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왜 좋은 음악은 모두 악마가 가져야만 하는가?'난 매일 기쁩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내 반석이시며 내 슬픔을 모두 없애주셨기 때문입니다 (Jesus is the rock and He rolled my blues away)".
물론 우리는 "세속문화" 속에 담긴 비기독교적이고,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인 요소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문제는 너무나 큰 쟁점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본 논문의 주제 범위 밖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이라는 신학적 범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이정석이 잘 말하였다. "그러므로 헨리 미터(Henry Meeter)는 심지어 비기독교인이 수행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베푸신 일반 은총의 열매들이 어디서 맺히든지 하나님의 명예와 그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감사하게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라고 하였다. 실로 성경에서 우리는 문화에 대한 지나친 구분을 발견할 수 없다.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모든 기존 문화를 버리라고 하지 않았다"(1998:43).
성경적인 기독교는 그 신앙의 내용에 있어서 "초월성"과 "내재성" 및 "거룩성"과 "세속성"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는 유일한 종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들은 초월성과 내재성을 대립시킨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할 때, 내재성은 약화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성경의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하시며, 또한 내재하시고 가까이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존재와 믿음도 초월적이고 또한 내재적이다. 그러나 이 두 대조적인 성격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일은 쉽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세상의 문화 속에서 세상의 국민과 시민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이 세상을 초월적으로 또한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거룩성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CCM에 대한 우리의 논의도 이런 양면적 가치관 속에서 더욱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3) CCM과 현대 음악의 유사성 문제
CCM을 둘러싼 세속성의 논쟁 가운데, CCM이 지나칠 정도로 현대 대중 음악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많이 받고 있음을 우리는 여러 번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유사성"의 논리를 지나치게 확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유사하다고 다 같은 것이 아니며, 유사성이 선악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러 사람을 위해 여러 모양이 되라"(고전 9:22)고 우리에게 권면한다. 성경은 기독교인의 삶의 모든 양식에 있어서 다 하나의 규칙과 기준과 스타일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프레임은 "우리가 CCM이 현대 대중 음악과 비슷한 것이 좋은지 혹은 나쁜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비슷한 것들 가운데 좋은 점들도 있고, 나쁜 점들도 있기 때문이다. 찬송가의 역사를 보아도 많은 찬송가들이 당대의 노래들과 유사성을 가지며, 어떤 것들은 당대의 민속 음악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들인 "하나님의 진리등대, 이 몸에 소망 무엔가, 저 장미꽃 위의 이슬" 등은 19세기 부흥 운동 때에 처음 만들어진 가스펠 음악으로서 당대의 민요들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토착화 한 노래들이다. 따라서 어떤 유사성은 사람들에게 더욱 친근감을 주며, 불신자들로 기독교적인 내용을 문화적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CCM의 노래들 중에서 비록 "All hail, King Jesus, Be exalted, O God, Great is the Lord, Great and Marvelous are Your Works, Though the Fig Tree Shall not Blossom" 등이 팝 음악의 형식들을 수용하였지만, 이 노래들에는 깊은 기독교적 정신이 담겨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유사성에 있어서 우리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모든 대중성이 기독교적인 예배와 삶의 양식에 적합하지는 않을 것이다. 헤비메탈 스타일은 비록 기독교인이 기독교의 언어로 연주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분노, 남에 대한 멸시, 마약 정당화, 폭력, 왜곡된 섹스, 하나님에 대한 반역 등의 감정"이 담겨 있기 때문에, 예배에는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적인 정황에서 만약에 한 음악의 스타일이 특정한 종교적 관습과 연관되어 있을 때에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곡조가 "굿거리 장단"과 연관되어 "청신굿, 강신굿, 또는 배뱅이굿"으로 사용되어 왔다면, 그런 것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음악의 스타일 문제가 아니라, 그 기능과 용도에 속한 것이다.
3. CCM의 신학
CCM의 신학을 논한다는 것은 여러 점에 있어서 많은 한계를 갖고 있음을 우리는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1) CCM은 시간적인 면에서 1960년대부터 2000년대를 포함하며, (2) 지리적인 면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3) 사상적인 면에서 볼 때 CCM은 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4) 또한 CCM은 어떤 특정한 교단이나 신학교에서 지원한 운동이 아니라 수없이 다양한 개인과 단체에 의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CCM에 담긴 가사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신학을 논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도 않고, 공평하지도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CM은 20세기 후반의 기독교적 유산이며, 신앙을 표현하는 모든 가사 안에는 신학적인 요소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노래에 어떤 신학적 요소들과 성향들이 담겨 있는지를 살피는 것은 과거를 반성하며 미래 지향적인 노래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1) CCM의 신학의 긍정적인 측면
(1) CCM은 하나님 중심적이다.
CCM은 그 가사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며, 주님의 다양한 칭호들을 사용하여 찬양한다. 이 점에 있어서 CCM은 전통적인 찬양 보다 훨씬 하나님을 많이 찬양한다고 볼 수 있다.
(2) CCM은 예수의 이름을 높인다.
CCM의 초기였던 1960년과 1970년대 초에는 예수 이름이 등장하는 노래가 많이 나왔다. "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 등의 노래는 1950년 중반부터 유행했던 팝 음악의 제목들인데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널리 불려졌다. 1960년대 후반에 나온 "Oh Happy Day(when Jesus washed away my sin)"는 팝송에 기독교 메시지를 실어 부른 것이다. 1970년 레이 스티븐스가 "Everything is Beautiful”이란 노래에서 첫 부분에 도입시킨 어린이들의 노래, "Jesus Loves the Little Children,(all the children of the world…)"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아이들의 세계를 아름답게 연결시키고 있다. CCM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며, 인간의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게 하며,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는 길을 주는 사랑"이시며, "우리는 예수 때문에, 마약이 필요 없다"고 한다.
(3) CCM 가사는 성경적이다.
CCM 중에서 "성구 노래"(Scripture Song)은 젊은이들에게 성경을 암송시키며, 성경을 노래로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CCM은 성경중심적 찬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CCM이 성구를 단편으로 사용한다고 비판하지만, 이것도 적절한 비판이 아니다. 우리가 시편을 찬송가로 만든다 하더라도, 노래의 속성상 꼭 시편을 있는 그대로 반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CCM은 다른 어떤 노래들 보다 성구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 기여를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성구 노래들 중에는 이미 우리들에게 친숙해진 노래들도 많이 있다. 시편 8:1(마이클 스미스), 하박국 3:17-18, 시편73:25-26(밥 스미스), 케런 레퍼티의 "Seek ye First, Thy Lovingkindess, Heavenly Father. Holy Holy Holy" 등은 이미 청년들의 예배 음악에서 늘리 사용되고 있다.
(4) CCM은 복음적인 메시지들을 담고 있다.
케이스 그린은 "예수는 우리를 가라고 명하신다"(Jesus Commands Us to God)는 노래에서 교회의 전도 사명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 밖에 없습니다." 프로이스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CCM은 핵심적인 전도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1] 인간은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방황하며, 불안해하고, 불행하게 살며, 자살이 매력적인 선택으로 보이며,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고, 모든 관계는 깨어지고 결혼 관계도 무너져 사랑의 희망이 없다고 노래한다(Mommy Don't Love Daddy Anymore', 'Alienated,' 'Stark-Spare' 등. AD는 'Kansas'라는 노래에서 "세상의 거꾸로 발전해 가며, 사람들은 섹스와 마약에 노예가 된다"고 노래한다).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CCM은 예수를 우리의 삶 속에 영접하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한다. 결단의 교리는 CCM에서 중심된 신학적 주제가 된다. 케이스 그린은 'Altar Call'이란 노래에서 "복음이란. 만약 당신이 겸손히 그 앞에 나오며 그의 발 앞에 엎드려 '당신은 나의 주요…'라고 고백하면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죄를 사하시는 것이다"라고 노래한다.
(5) CCM은 현실참여적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담고 있다.
브루스 케럴(Bruce Carroll)이 부른 "Sometimes Miracles Hide"는 한 아내가 아이를 가졌는 데 병원에서 "인공유산"을 하라고 권했지만 거절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부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부부는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비록 다른 아기들처럼 건강하지는 않았지만 그 딸을 최고로 여기면서 키웠습니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은 '차라리 낳지 말걸...' 하는 후회는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기적은 때대로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다 예비해 놓으십니다"(양동복 303에서 인용됨).
2) CCM 신학의 부정적인 측면
다시 한번 우리는 우리 자료의 한계를 인식하며 이 문제에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CCM의 모든 가사들을 보지 않았으며, 제한된 관점에서 CCM의 신학을 보는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1) CCM은 포괄적인 신학을 담고 있지 않다. CCM의 노래들은 주로 "경배와 찬양" 및 "복음"과 연관된 것이므로, 소위 개혁주의에게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든 경륜"(행 20:27)을 다 다루지는 않는다.
(2) CCM은 그 뿌리에 있어서 전천년설적이며, 세대주의적인 종말론을 갖고 있다. 많은 CCM 아티스트들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 자들로서 휴거를 기다리는 가사를 불렀다. 래리 노먼이 부른 "I Wish We'd All Been Ready"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는 데 다음과 같은 가사를 담고 있다(양동복 110에서 인용). "아내와 남편이 침대에서 자는데 아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보았더니 남편이 사라졌습니다. 난 우리 모두가 예비했으면 합니다. 이젠 당신의 마음을 돌릴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내려오시면 당신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3) 교회론은 초보적으로 다루어진다. CCM에서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자주 비추어진다. 케이스 그린은 "Asleep in the Light"에서 "잠들어 있는 교회"를 묘사하고 있다. "세상은 어둠 속에서 잠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밝은 빛 가운데 있으면서도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교회가 그렇게 죽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1978. 양동복 313-4에서 인용됨). 마일런 러페브르(Mylon LeFevre)는 "Denomination Demolition"에서 교회가 "소란과 분쟁"에서 벗어나 "하나가 되어야 함"을 노래한다(1990).
(4) CCM에는 성찬이나 세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으며, 중생과 회심이 가장 중요한 기독교 체험으로 제시된다.
(5) 많은 CCM은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오순절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에 의해 점진적으로 성화되는 과정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두 단계의 경험으로 다루어진다. 페트라(Petra)는 사도행전 2장을 다루면서, "More Power to You"라는 노래를 통해 전통적인 오순절 신학을 반영해 주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CCM은 교리적인 편식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CCM은 전세계적으로 보급되었으며, 다양한 신앙 공동체에서 사용되고 있으므로, 각 공동체의 믿음을 표현하는 노래들이 점점 많아져 가리라고 생각된다. 이제는 "개혁신앙"을 가진 교회들이 개혁신학적인 CCM을 만들어 더욱 널리 보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왜 우리가 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신 "옛 복음의 노래"(Old Time Gospel)와 "현대적인 기독교 노래"(Contemporary Christian Song)을 함께 들어야 하는지 성경적인 근거 하나를 생각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이 "노래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바냐 3:17에서 가장 잘 표현되고 있으며, 이 구절은 우리의 모든 노래와 찬양의 근거를 제시해 준다. 또한 이 본문은 CCM에서 즐겨 부르는 "성구노래"(Scripture Song) 가운데 하나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는 분"(yagil 'alayik berinna)으로 소개된다. 에서는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로 새롭게 제시된다. 여기에서 첫 동사 "기뻐하다"(gil)는 "흥분하여 소리지르다" 는 뜻을 가진다(shout in exultation, rejoice; ekstatisch schreien, jauchzen, HALOT). 물론 하나님의 흥분은 여기에서 기쁨이 넘치는 것을 말한다. 둘째 단어에 대해 대부분의 영어번역들은 "노래하며"로 번역하고 있다(KJV, 'he will joy over you with singing'; NIV, 'he will rejoice over you with singing'; NRSV, 'he will exult over you with loud singing'). 이 히브리어 단어(rinna)는 (1)기쁨의 소리와 (2)애통의 소리를 뜻하는데, 여기에서 "노래하다"로 번역된 것이 흥미롭다. 이 단어에 대해 로벗슨은 "God breaks out in singing"으로 해석한다. 그는 바로 앞의 14절에서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ranni)고 했는 데, 이제 하나님께서 "노래하고"(ranna) 있음을 발견한다(1990:340). 이리하여 14절에서 "너희는 크게 노래하라"가 이제 "그가 크게 노래하신다"로 변한다. 18절은 이 노래가 바로 축제의 날에 부르는 노래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속받은 백성을 보고 기쁨을 참지 못하고 엑스타시 가운데 폭발적인 노래를 부르고 있다. 즉, 하나님은 노래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그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들은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노래는 "찬양"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높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스바냐 3:17에서 "노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눈을 지으신 이는 보시며, 귀를 지으신 이는 들으시며, 입을 지으시는 이는 말씀하시나, 성대를 지으신 하나님은 노래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노래를 주신 하나님은 노래를 듣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한국인으로서, 더욱 한국적인 노래를 한국적인 악기로 찬양해야 할 것이다. 시인의 말씀처럼,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찌어다"(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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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나는 CCM에 대해 신학적 분석을 부탁 받았지만, 전문적인 음악인도 아니며 CCM에 대해서도 문외한에 가까운 사람이다. 나는 CCM의 노래들을 충분히 듣고 섭렵한 사람이 아니며, 이 장르의 음악에 담긴 다양한 차원들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CCM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현대의 대중음악과 축을 같이할 뿐 아니라, 교회음악(혹은 예배음악)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전문적인 음악적인 훈련을 쌓지 못한 사람으로서 나는 존재론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나의 신앙생활의 과정을 돌아보면 CCM과 무관하게 살아온 것 같지 않다. 나는 1969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대학생선교단체에서도 생활하였으므로 한국교회에 "가스펠 송"이 도입되던 초기에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처음으로 "햇빛 보다 더 밝은 곳 내 집 있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율동과 함께 그룹을 이끌었고, CCM의 원조 가운데 하나인 "작은 불꽃 하나가"(엑스플로 '72, Dallas)와 포크 송에서 나온 여러 가스펠 송들인 “Do Lord Do Lord, Give Me Oil in My Lamp, I've Got the Joy Joy Joy Down in My Heart. Seek Ye First, Father I Adore You, Our God Reigns, The Peace that Passes All Understanding” 등의 노래를 젊은 시절에 친구들과 가장 열심히 부른 사람 중 하나이다. 특히 나는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그들과 함께 즐겨 불렀던 많은 노래들이 CCM인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CCM을 다룰 수 있는 기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에 비해 현대 대중 음악들을 열심히 들으려고 한다. 이런 과정을 되돌아보면, 나는 CCM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지니고 살아온 "청중"으로 여겨지며, 어떤 "이념적인 전제"를 가지고 "원천적으로 주장하거나 봉쇄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또한 나는 다른 어떤 사람들 보다 시편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시편 연구에 몰두해 있으며, 시편과 CCM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CCM은 그 역사적인 발전 과정에 있어서 시편을 노래로 대중화하였으며, 구미에서 현대 예배 음악을 만드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이다. 비록 나는 CCM은 단편적으로만 알지만, 시편 만은 비교적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찬송가로서 시편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관점에서 오늘날의 CCM을 조금이라도 비출 수 있는 위치에는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신학적인 면에서, 개신교 신학자요, 장로교 신학자이며, 신학적인 경향은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이며, 내용에 있어서는 개혁주의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 1답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이며, 이 고백은 우리의 "찬양"으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나는 신학의 전체적인 축이 보수와 전통을 중요시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현대적" 기독교 음악에 대해서도 어떤 책임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표현되고 결실해야 하므로, "현대성"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과제요 책임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형태의 CCM이 다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젊은 세대"에게 그들의 음악 장르와 장단과 박자로 노래하며 복음을 소개하고, 기독교를 현대적 관점에서 변증하고자 하는 CCM 아티스들의 기본적 관심에는 찬사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주제를 충분히 다룰 시간이 없었으며, 읽은 글과 책도 지극히 제한되었음을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이 글을 준비하며 나는 가끔 "내가 무모했구나"하는 느낌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돌아갈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윤리학을 가르치는 존 프레임이 Contemporary Worship Music: A Biblical Defense(1997)라는 글을 통해 보다 균형잡힌 시각을 던져준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우리 모두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기독교 현대 음악"에 대해 서로가 다른 견해들에 대해 미소지으며 들어주고 또한 우리의 공통분모를 함께 찾기를 열망하면서, CCM에 대한 공적인 담화를 함께 시작하여 21세기 한국교회가 더욱 성숙해지기를 바라며 부족함을 무릅쓰고 감히 이 주제를 다루어 본다.
1. CCM에 대한 예비적 고찰
1) CCM이 무엇인가?
CCM이란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의 준말이다. 그러나 언어적 의미 그대로 "현대적인 기독교 음악"이 모두 CCM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대적인" 교회 및 예배 음악이 모두 CCM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 나타난 "현대적"이란 용어와 "기독교적"이란 말도 청중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되므로 CCM은 보다 좁은 의미에서 정의될 필요를 느낀다. 프레임에 따르면, CCM은 기본적으로 "1960년대 중반이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기원된 것이며, 기독교 음악계에서 일어난 특정한 운동이다"(1997:6).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1960년대부터 영적 각성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의 신앙체험은 새로운 유형의 음악을 요청하게 되었고, 특히 척 스미스(Chuck Smith)가 세운 "갈보리 채플"(Calvary Chapel)을 중심으로 CCM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음악의 형식적 관점에서 CCM을 정의한 양동복에 따르면, CCM은 "처음에 예수 음악(Jesus Music), 지저스 록(Jesus Rock)으로 불려졌으나, (사람들이)1970년대 말부터 CCM이라는 용어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사람들이 CCM을 전통적인 찬송가풍의 음악과는 다른 음악으로 인정한 것이다"(2000:33). CCM의 기본적인 성격에 대해 존 프레임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의한다(8쪽). (1) "CCM은 문학적이고 음악적인 표현양식에 있어서 전통적이거나 고전적이기 보다 훨씬 현대적이고 일반적이다." (2) "CCM의 대부분은 1절 코러스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여러 소절의 시로 구성된 전통적인 찬송가와 대조를 이룬다." (3) "CCM의 본문은 전통적인 찬양 보다 훨씬 단조롭다." (4) "CCM은 전통적인 찬송가와 비교해 볼 때, 애통, 죄 고백, 가르침, 개인 간증, 간청 보다 찬양을 훨씬 많이 강조한다." CCM에 대한 프레임의 네 가지 성격 규명에 우리는 세 가지 사항을 덧붙여 볼 수 있을 것이다. (5) 음악의 형식적 관점에서 CCM은 랩, 헤비 메탈, 팝, 컨츄리, 록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CCM은 기존하고 있던 미국의 "가스펠 송" 뿐 아니라, 보다 엄격한 "교회 음악"과도 구별되며, 음악적 장르 사용에 있어서 "현대성"이 두드러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CCM이 담고 있는 "현대성"이라는 용어는 "시대와 더불어" 혹은 "당대"를 의미하지, "새로움"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해럴드 베스트는 지적한다(160쪽). 즉 "CCM은 이미 음악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들과 병행한다는 의미에서 '현대적'이며 동시에 음악적으로 '보수적'이다. 이렇게 볼 때 CCM 현상은 '새로운 것'이기보다는 '선호되는 것'이다"(상동). (6) 음악의 내용에 있어서도 CCM은 "복음적인" 내용을 다양한 "현대적 상황"과 융합시키고 있다. 즉 "깨어진 가정"이나 전쟁, 마약, 사회정의, 인종차별 반대 등의 주제도 함께 반영한다. (7) 1990년대 이후에 CCM은 단지 교회 안의 음악으로 제한되지 않고, 현대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CCM 아티스트들은 그들의 청중을 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만으로 제한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이나 타종교인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2) CCM은 어떤 비판들을 받고 있는가?
CCM은 그 기원과 음악적 형식과 아티스트들의 파격적인 의상과 대중성 때문에, 여러 가지 형태의 비판을 받고 있다. 존 프레임은 데이빗 웰즈(D. Wells)가 "복음주의 교회에 침투한 8가지 사항의 세속 문화 현상"이란 해석적 모델을 가지고 CCM에 대한 비평가들의 논점을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해 주고 있다(Frame 1997:46). (1) 주관주의적인(subjectivism) CCM은 인생을 객관적 진리 위에 두기 보다 인간 경험 위에 두므로, 지나치게 예배자의 느낌과 체험에 비중을 높이 둔다. (2) 인본주의적인(humanism) CCM은 하나님을 "사용자 편의적인" 신(user-friendly God)으로 만들어, 인생관과 세계관에서 하나님을 약화시키거나 배제하며, 결국 하나님의 초월성을 약화시키고, 하나님의 율법과 인간의 죄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은 외면한다. (3) 반지성주의적인(anti-intellectualism) CCM은 우리의 지성 보다 감정에 호소한다. CCM은 신앙의 초보자들을 위한 것이며,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4) 심리주의적인(psychologism) CCM은 진정한 은총과 죄사함의 복음보다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 사이비 심리치료를 제공한다. (5)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에 빠진 CCM은 사업적인 경영기법과 광고 기술을 사용하여 기독교조차도 마케팅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6) 소비지상주의적인(consumerism) CCM은 소비자 중심적인 기독교를 만들어 신앙을 상품화하고, 사람들의 소비욕구를 부추긴다. (7) 실용주의적인(pragmatism) CCM은 결과로서 모든 개념과 행동을 판단하는 세속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8) 현대 우월주의(temporal chauvinism)를 믿는 CCM은 전통을 업신여기며, "현재"가 가장 좋은 시대라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CCM은 전통적인 예배를 지루하고 케케묵은 것으로 만들고, 현대인들에게 쓸데없는 관심을 끌려고 한다. 이들은 "급진적이며" 또한 "자유주의적"이다.
CCM에 대한 여러 비평가들의 8가지 사항은 정당한 것일까?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해 보면, 위의 비판은 단지 CCM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 교회 및 사회 전반에 적용될 수 있는 사항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위의 비판들은 CCM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혹독한 것 같다. 물론 대중음악의 형식을 빌려 신앙을 표현하고자 하는 CCM은 근본적으로 많은 한계를 갖고 있을 것이다. 또한 모든 CCM이 고도로 높은 음악적 질과 신학적인 수준을 갖고 있다고 보기 힘들며, CCM은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작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어떤 통일성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위와 같은 비판들이 부분적으로 적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CCM에 대해 공평한 시각을 갖기 위해, 위의 사항들을 여섯 가지로 정리하여 좀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1) CCM이 "주관주의"에 빠졌다는 점은 모든 노래가 주관적이며, 감성적인 점에서 재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가슴에 느껴질 때, 어떻게 "냉정한 객관성" 만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또한 CCM이 "심리주의적"이라는 비판은 부분적으로 정당할 수 있으나, 진정한 찬양은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순화시키는 효과가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사울이 악신에 사로잡혀 고통당 할 때, "다윗은 수금으로 노래하였고, 사울은 마음이 상쾌하게 되어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났다"고 한다(삼상 16:23).
(2) CCM이 "인본주의적"이라는 점은 아마 CCM이 전통적인 찬송가 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강조하는 데서 나온 것 같다. 그러나 CCM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는 것은 그의 "초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전통적인 찬송가들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심을 노래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3) CCM이 "반지성주의적"이라는 비판은 모든 CCM에 대한 비판은 아닐 것이며, CCM이 더욱 자라가야 할 목표에 대한 비판으로 여길 수 있다. 즉 CCM은 앞으로 더욱 포괄적인 믿음의 체계를 구축해 가야할 것이다.
(4) CCM이 "소비지상주의적"이며, 상업적인 경영기법과 광고 기술을 사용하는 "프로페셔널리즘"에 빠졌다는 비판은, 기독교적 사역이 지닌 "생존"과 "섬김"의 양면성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기독교 정신을 따라 "봉사"해야 하지만, 더욱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경영적인 마인드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
(5) CCM이 "실용주의적"이며 "세속적 목적"을 가진다는 비판은 CCM이 "교회"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개인"이나 "단체"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며,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처럼 그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초창기의 CCM 아티스트들은 경제적으로 아무런 보상도 없이 살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6) CCM이 "반전통적" 태도를 가지므로, "급진적"이고 "자유주의적"이라는 비판은 "현대성"과 "전통성"을 지나치게 대립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때로는 "급진성"을 가져오지만, 항상 "옛 패러다임"과 "새 패러다임"은 공존하며 지내다가, 서서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전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3) CCM에 대한 가장 심각한 비판 사항은 무엇인가?
위에서 존 프레임이 데이빗 웰즈를 원용하여 제시한 8가지 사항 보다 더욱 근본적인 쟁점은 CCM이 주로 사용하고 있는 음악의 장르와 연관된 것으로서,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로 귀착된다. 즉 CCM은 그 기원에 있어서 리듬 앤 블루스와 록큰롤이라는 두 뿌리를 가지고 있는 데, 전자는 흑인 연주자들이 성적인 문제를 노골적으로 그들의 가사에 반영하며, 후자는 반항과 성적인 방종을 고무하기 때문에, 이런 두 유형의 음악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CCM 자체를 거부하게 된다. 이 문제를 달리 말하자면, 소위 "세속적 음악"의 첨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록 음악 속에 어떻게 "경건한 기독교 음악"을 담을 수 있는가?" 즉 "기독교 및 교회 음악"이 "세속 음악의 형식"을 사용하는 것은 신앙의 타락과 변질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냐? 는 우려를 하게 된다. 최근 이광복은 (흰돌 1997)에서 세속음악의 폐해성을 드러내려고 애쓰고 있다. 이 책의 추천사에서 한 원로 목회자는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단의 음악이 이미 교회 안에 침투해 있다"고 단정하여 말한다. 이 책의 저자 자신은 "세속음악은 사단의 무기"(15쪽)이며, 그 중 특별히 록 음악은 (1)사단을 찬양하고 (2)사단의 교회를 세우며, (3)사단경을 전하고, (4)강신술을 사용하며, (5)신흥종교를 만들고, (6)인간을 신격화하며, (7)인간을 지옥으로 안내하는 것으로 본다(제 2장). 또한 록 음악은 (1)하나님을 모독하며, (2)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3)성경을 모독하며, (4)십자가를 모독하고, (5)교회를 저주하고, (6) 천국을 거부하며, (7)종교통합 운동을 유도한다고 한다(제 4장). 이어서 그는 록음악이 윤리와 사회와 인간성을 무너뜨리며(5장), 청소년들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한다(6장). 그는 세속음악에 대해 "다소 긍정적인 요소"를 인정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밖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백해무익한 독소일 뿐"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사단은 세속음악을 기독교로 유입시켜 성도들을 타락시키려 하기 때문이다"(99쪽). 그는 특히 "세속음악의 대표격인 록 음악이 크리스찬 록이라는 이름으로 성도들의 거부감을 완화시켜 교회로 침투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상동). 이런 혹독한 비평적 관점은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하나의 극단적인 "유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존 프레임 역시 CCM의 비평가들(M. Beach 1995:5; M. Dawn 1995:150) 등이 CCM이 "열등한 복음"을 전하며, "생명의 주를 예배하는 자들을 강탈해 가고", "정통적 기독교와 아주 다른 종교"를 제시하며, "염병"으로 여긴다고 한다(75쪽). 이런 비평적 관점들은 주로 경건한 목회자들 뿐 아니라, 기독교 음악인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CCM을 둘러싼 논쟁은 쉽게 해결되기 어렵다. 한 사람은 청춘을 바쳐 CCM 아티스트로 헌신하며 사는 데, 다른 사람은 그를 "사단의 도구"로 본다. 이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사실 음악은 이성으로 논할 수 없고, 노래는 우리 감성의 언어이며 가슴에서 작용하는 것이므로 사람마다 음악에 대해서는 비이성적으로 반응한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새로운 음악(악기와 노래 포함)이 도입될 때마다 음악의 문제가 얼마나 폭발력이 강한 것인지 자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쨌든 위의 비판은 같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음악을 통한 "현대적인 기독교적 표현"에 대해 너무나 대립적인 시각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런 갈등들은 우리 "믿음과 행위"의 참된 잣대가 되는 성경의 원리를 따라(Sola Scriptura), 보다 깊고 신중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신학적 작업을 요청하고 있다.
2. CCM의 세속성에 대한 문제
CCM에 대한 비판 중에서 가장 격렬한 것은 CCM이 사용하고 있는 음악의 장르들 속에 록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이것이 통속적 관점에서 "사단적"인 것으로서 여겨지고 있음을 우리는 바로 앞에서 보았다. 즉, CCM의 세속성에 대한 문제가 CCM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CCM은 기독교의 옷을 입은 세속적 노래이므로, 배격되거나 정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물어야 할 것 같다. 첫째로 CCM을 세속적인 음악이라고 일축하는 것이 정당한가? 둘째로, 세속적인 것은 선험적으로 모두 나쁜 것이며, 죄된 것인가? 셋째로,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은 공존할 수 없으며,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은 절대로 피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세상적인 것은 그 모양이라도 피하라"는 태도가 CCM에도 무분별하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1) CCM을 세속적인 음악으로 일축하는 것이 정당한가?
CCM은 그 가사의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헌신을 노래하며, 사랑과 믿음과 수많은 기독교적 덕을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가사들 중 많은 부분들이 "성경구절"에서 나온 것이므로, CCM을 세속 음악으로 일축하는 것은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CCM의 세속성은 사용되고 있는 가사보다는 음악의 형식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4가지 사항을 정리해 볼 수 있다. (1) 앞에서도 보았듯이 모든 CCM은 록 음악에만 의존하지 않으며, 다양한 음악적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CCM을 록과 일치시키거나 밀착시키고 모든 CCM을 "세속적인 음악"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2) 우리는 록 음악에 대해서도 내용과 기능의 관점에서 어떤 구별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록 음악은 많은 록 아티스트들에 의해 신성모독적이며,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적대적이고, 윤리와 도덕을 파괴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록"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지, "록" 자체가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보다 신중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음악의 장르나 스타일은 중립적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즉 "음악의 장르나 스타일"은 선악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고전 음악이 현대 음악 보다 더 선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유럽 음악이 한국 음악 보다 더 영적이라거나, 혹은 더 기독교적이고 말할 수 없다. 즉 음악의 스타일은 신학적으로 중립적인 것이며, 그 형식이 신학의 내용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어떤 음악의 스타일이 우리의 신앙 표현에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늘 심사숙고하며, 바른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며, 나아가 우리의 예배에 적합한 스타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장르와 스타일의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규범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지 않다.
(3) 따라서 우리는 한 장르나 스타일의 음악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해 더욱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우리의 관심은 음악 스타일의 용도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 내용과 연주자의 태도와 의도와 연관된 것일 수 있다. "사단은 바하의 코랄로도 사람을 숭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프레임).
(4) 음악 형식의 선호도는 상대적이며, 문화적이고, 세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미국에서 록음악은 대부분 나이가 든 기성세대에서는 거부감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 스타일의 노래는 1960년대 젊은이들의 반항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록에 대해 긍정적이며, 이 점에 있어서 기성세대와 다른 입장을 가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어떤 스타일의 음악이 특정 계층에게는 적절하나, 다른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음악의 스타일에 대한 평가는 세대나 사회계층이나, 종족 및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와 연관하여 프레임의 평가가 적절하다. "따라서 어떤 노래가 예배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기 전에는 모든 사람의 음악이 들려져야 한다. 늙은이와 젊은이의 노래, 유럽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복잡한 노래와 단순한 노래 등이 모두 들려져야 한다"(프레임).
2) 세속적인 것은 모두 나쁜 것이며, 죄된 것인가?
CCM의 세속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성과 속"을 지나치게 이원론적으로 대립시키고 있는 것 같다. 구약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성과 속은 다음과 같은 도표로 이해될 수 있다.
구약의 세계관에서 모든 사물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크게 나누어지지만, "세속"은 다시 "정결"과 "부정"으로 나누어진다(레 10:10). 즉, 성과 속의 두 개념은 서로 대조를 이루는 것이 분명하지만, "속되다"는 것은 "더럽다"는 개념보다는 오히려 "일반적"이고 평상적이며 정상적인"인 상태를 가리킨다. 물론 "속되다"는 히브리 원어가 "오염되다, 더럽혀지다"는 개념을 포함하지만 "거룩하다"와 반의어로 사용된 곳(레 10:10; 겔 22:26; 44:23)에서는 "일반적인 것"을 의미한다. 에스겔 48:15은 제사장이 사는 "거룩한 땅"과 일반백성이 사는 "속된 땅"을 구별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속된 땅"은 "더러운 땅"이 아니라 "성별된 곳"과 구별되는 "일반적인 땅"으로 보아야 한다.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것이 하나님께 바쳐지면 거룩한 것이 된다. 즉 속된 것은 일반적인 것으로서 다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누어진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세속성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해 가시는 세계의 일반성 속에서 일차적으로 이해해야 하며, 세상에서 하나님을 적대하는 모든 것을 세속적이라고 일축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과 속의 구별은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방향의 문제이지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성속의 문제를 음악과 연관해 볼 때, 우리는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1) 성경은 라멕의 아들 "유발"이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말할 때에도 가치 중립적으로 말한다(창 4:21). 본문은 "수금과 퉁소"가 이방인의 악기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배 음악에서 피해야 할 악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기자는 단지 "유발이 음악의 조상이 되었다"는 점을 서술적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2) 성경에는 "아담이 하와를 처음 만났을 때 부른 노래"(창 2:22), "처녀가 시집갈 때 축원하는 노래"(창 24:60), "우물을 팔 때 부르는 노래"(민 21:17-18),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부르는 승전가"(삼상 18:6-7), "결혼축가"(시 45) 등 다양한 세속적 배경에서 부른 노래들을 담고 있다. 이 노래들은 꼭 "예배음악" 만이 아니었으며, 일상 생활 속에서 축제와 연관된 것들이었다.
(3) 솔로몬 성전에서와 스룹바벨 시대의 찬송가로 여겨지는 시편은 음악적 관점에서 볼 때 여러 가지 다양성을 지닌다.
[1] 시편은 예배음악에 있어서 다양한 문학적 장르를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경배와 찬양"의 그룹에서는 "찬양"을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노래로 협소한 의미로 제한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김홍전이 만든 (평화사 1982)이란 책에는 하나님을 직접 찬양하는 것들을 주로 담고 있다. 그는 경배송(Worship), 성삼위송(Sanctus), 송영(Doxology), 아멘, 영광송(Gloria), 할렐루야, 헌상송(Offertorium)을 "찬양"으로 여기고 있다(홍정수 1995:679-80에서 인용됨). 그의 책에는 기타 찬송으로서 성탄절 노래, 부활절, 어린이 노래, 성구 노래(마11:28, 30), 기도 노래 등을 담고 있다.
김명종의 (예수마을 찬송 시리즈 2. 도서출판 예수 마을, 1993)은 바른 찬송에 대해 주의를 한다. 바른 찬송이란 (1) 성경에 합한 찬송가, (2) 하나님만을 상대로 한 찬송이라고 한다. 전자는 "가사는 물론 곡조까지도 성경에 부합된 것"이다. 즉 "세속적 음악풍을 본뜬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죄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라"는 하나님을 기리는 노래가 아니므로 찬양이 될 수 없으며 전도 노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홍정수 1995:676). 이런 관점에서 홍정수는 "찬양"과 "예배음악"과 "교회음악"으로 구분한다. 교회음악은 개념이 가장 큰 것이고, 예배 음악과 찬양의 순으로 개념이 좁아진다.
시편의 관점에서 보면, 옛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찬양"과 "감사시"(개인과 공동체)와 "애가"(개인과 공동체)와 "신뢰의 노래" 등을 사용하였으며, 내용에 있어서는 "시온의 노래"와 "토라 시편"과 "제왕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등을 담고 있다. 때로는 기도와 심지어 "원수에 대한 저주 기원"까지도 담고 있다. 시편 밖에서는 "장송곡"(예레미야 애가) 등도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찬양은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라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찬양은 극히 제한되어 나타나고 있다(사6:3참조).
[2] 시편의 곡조와 운율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시편은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송가로서 곡조를 분명히 갖고 있었으며, 곡에 대한 명시가 시편의 표제에도 나타나고 있으나, 그 곡에 대한 전승은 잊혀 졌으며, 현재 유대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노래들은 후대의 새로운 전승으로 여겨진다. 시편의 곡조에 대한 정확한 전승은 없지만,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대근동아시아의 곡조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시편의 운율에 있어서 학자들은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으며, 운율 계산에 있어서 엑센트 계산법, 음절 계산법, 모음 계산법 등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합의된 방법은 없다. 또한 시편의 노래들은 영시나 한시처럼, 정형적 운율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상당히 폭넓은 다양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운율과 박자와 노래의 빠르기에는 다양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3] 시편에는 "모세의 노래"(시90편)로부터 "바벨론 포로기의 노래"(시137편)에 이르기까지 온갖 옛 노래들과 새노래들을 다양하게 담고 있으며, 특히 시인들은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성도들을 격려한다(시33:3; 40:3; 96:1; 98:1; 144:9; 149:1; 사 42:10; 계 5:9; 14:3 참조).
[4] 시편에는 악기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시편 150편에는 모든 형태의 악기가 동원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여기에는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가 등장하여 각각 독특한 부분으로 연주하도록 한다. 또한 거룩한 춤이 함께 하였다. 3절에 나타나는 "비파와 수금"에서 전자는 고대의 바이올린이다. "소고"는 동녀들이 춤추며 연주하는 악기이다(시69:25). "현악"(minnim)은 오직 여기에 나오며(45:8 참조)와 "퉁소"('ugab; 창3:21; 욥21:12; 30:31)와 함께 종교적인 축제와는 전혀 무관한 악기이다. 퉁소는 밝고 비음이 나는 현대의 오보에와는 달리, 어둔 공명이 섞인 소리가 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어 5절에는 "큰소리 나는 제금"과 "높은 소리나는 제금"이 나타나고 있다. 시편의 관점에서 볼 때, 성경은 어떤 악기와 곡조에 대해 규범적 지시를 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성경의 악기에 대해서는 성출훈 역, [호산나음악사 1994]을 보라).
이런 관점에서 우리들은 CCM이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음악적 스타일들과 장르들을 보다 자연스러운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래리 노먼(Larry Norman)이 부른 노래, "왜 좋은 음악은 모두 악마가 가져야만 하는가?"(1970년대 초)를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들을 필요가 있다(양동복 105에서 인용). "나는 나의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하지만 나는 아직도 록이 나오는 라디오를 좋아한답니다. 사람들은 '로큰롤은 나쁜 것이야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난 너무 좋아서 일어나 춤춰야겠어요' 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압니다. 난 혼동하지 않아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왜 좋은 음악은 모두 악마가 가져야만 하는가?'난 매일 기쁩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내 반석이시며 내 슬픔을 모두 없애주셨기 때문입니다 (Jesus is the rock and He rolled my blues away)".
물론 우리는 "세속문화" 속에 담긴 비기독교적이고,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인 요소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문제는 너무나 큰 쟁점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본 논문의 주제 범위 밖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이라는 신학적 범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이정석이 잘 말하였다. "그러므로 헨리 미터(Henry Meeter)는 심지어 비기독교인이 수행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베푸신 일반 은총의 열매들이 어디서 맺히든지 하나님의 명예와 그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감사하게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라고 하였다. 실로 성경에서 우리는 문화에 대한 지나친 구분을 발견할 수 없다.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모든 기존 문화를 버리라고 하지 않았다"(1998:43).
성경적인 기독교는 그 신앙의 내용에 있어서 "초월성"과 "내재성" 및 "거룩성"과 "세속성"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는 유일한 종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들은 초월성과 내재성을 대립시킨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할 때, 내재성은 약화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성경의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하시며, 또한 내재하시고 가까이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존재와 믿음도 초월적이고 또한 내재적이다. 그러나 이 두 대조적인 성격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일은 쉽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세상의 문화 속에서 세상의 국민과 시민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이 세상을 초월적으로 또한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거룩성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CCM에 대한 우리의 논의도 이런 양면적 가치관 속에서 더욱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3) CCM과 현대 음악의 유사성 문제
CCM을 둘러싼 세속성의 논쟁 가운데, CCM이 지나칠 정도로 현대 대중 음악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많이 받고 있음을 우리는 여러 번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유사성"의 논리를 지나치게 확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유사하다고 다 같은 것이 아니며, 유사성이 선악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러 사람을 위해 여러 모양이 되라"(고전 9:22)고 우리에게 권면한다. 성경은 기독교인의 삶의 모든 양식에 있어서 다 하나의 규칙과 기준과 스타일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프레임은 "우리가 CCM이 현대 대중 음악과 비슷한 것이 좋은지 혹은 나쁜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비슷한 것들 가운데 좋은 점들도 있고, 나쁜 점들도 있기 때문이다. 찬송가의 역사를 보아도 많은 찬송가들이 당대의 노래들과 유사성을 가지며, 어떤 것들은 당대의 민속 음악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들인 "하나님의 진리등대, 이 몸에 소망 무엔가, 저 장미꽃 위의 이슬" 등은 19세기 부흥 운동 때에 처음 만들어진 가스펠 음악으로서 당대의 민요들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토착화 한 노래들이다. 따라서 어떤 유사성은 사람들에게 더욱 친근감을 주며, 불신자들로 기독교적인 내용을 문화적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CCM의 노래들 중에서 비록 "All hail, King Jesus, Be exalted, O God, Great is the Lord, Great and Marvelous are Your Works, Though the Fig Tree Shall not Blossom" 등이 팝 음악의 형식들을 수용하였지만, 이 노래들에는 깊은 기독교적 정신이 담겨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유사성에 있어서 우리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모든 대중성이 기독교적인 예배와 삶의 양식에 적합하지는 않을 것이다. 헤비메탈 스타일은 비록 기독교인이 기독교의 언어로 연주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분노, 남에 대한 멸시, 마약 정당화, 폭력, 왜곡된 섹스, 하나님에 대한 반역 등의 감정"이 담겨 있기 때문에, 예배에는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적인 정황에서 만약에 한 음악의 스타일이 특정한 종교적 관습과 연관되어 있을 때에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곡조가 "굿거리 장단"과 연관되어 "청신굿, 강신굿, 또는 배뱅이굿"으로 사용되어 왔다면, 그런 것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음악의 스타일 문제가 아니라, 그 기능과 용도에 속한 것이다.
3. CCM의 신학
CCM의 신학을 논한다는 것은 여러 점에 있어서 많은 한계를 갖고 있음을 우리는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1) CCM은 시간적인 면에서 1960년대부터 2000년대를 포함하며, (2) 지리적인 면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3) 사상적인 면에서 볼 때 CCM은 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4) 또한 CCM은 어떤 특정한 교단이나 신학교에서 지원한 운동이 아니라 수없이 다양한 개인과 단체에 의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CCM에 담긴 가사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신학을 논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도 않고, 공평하지도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CM은 20세기 후반의 기독교적 유산이며, 신앙을 표현하는 모든 가사 안에는 신학적인 요소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노래에 어떤 신학적 요소들과 성향들이 담겨 있는지를 살피는 것은 과거를 반성하며 미래 지향적인 노래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1) CCM의 신학의 긍정적인 측면
(1) CCM은 하나님 중심적이다.
CCM은 그 가사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며, 주님의 다양한 칭호들을 사용하여 찬양한다. 이 점에 있어서 CCM은 전통적인 찬양 보다 훨씬 하나님을 많이 찬양한다고 볼 수 있다.
(2) CCM은 예수의 이름을 높인다.
CCM의 초기였던 1960년과 1970년대 초에는 예수 이름이 등장하는 노래가 많이 나왔다. "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 등의 노래는 1950년 중반부터 유행했던 팝 음악의 제목들인데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널리 불려졌다. 1960년대 후반에 나온 "Oh Happy Day(when Jesus washed away my sin)"는 팝송에 기독교 메시지를 실어 부른 것이다. 1970년 레이 스티븐스가 "Everything is Beautiful”이란 노래에서 첫 부분에 도입시킨 어린이들의 노래, "Jesus Loves the Little Children,(all the children of the world…)"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아이들의 세계를 아름답게 연결시키고 있다. CCM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며, 인간의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게 하며,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는 길을 주는 사랑"이시며, "우리는 예수 때문에, 마약이 필요 없다"고 한다.
(3) CCM 가사는 성경적이다.
CCM 중에서 "성구 노래"(Scripture Song)은 젊은이들에게 성경을 암송시키며, 성경을 노래로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CCM은 성경중심적 찬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CCM이 성구를 단편으로 사용한다고 비판하지만, 이것도 적절한 비판이 아니다. 우리가 시편을 찬송가로 만든다 하더라도, 노래의 속성상 꼭 시편을 있는 그대로 반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CCM은 다른 어떤 노래들 보다 성구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 기여를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성구 노래들 중에는 이미 우리들에게 친숙해진 노래들도 많이 있다. 시편 8:1(마이클 스미스), 하박국 3:17-18, 시편73:25-26(밥 스미스), 케런 레퍼티의 "Seek ye First, Thy Lovingkindess, Heavenly Father. Holy Holy Holy" 등은 이미 청년들의 예배 음악에서 늘리 사용되고 있다.
(4) CCM은 복음적인 메시지들을 담고 있다.
케이스 그린은 "예수는 우리를 가라고 명하신다"(Jesus Commands Us to God)는 노래에서 교회의 전도 사명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 밖에 없습니다." 프로이스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CCM은 핵심적인 전도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1] 인간은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방황하며, 불안해하고, 불행하게 살며, 자살이 매력적인 선택으로 보이며,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고, 모든 관계는 깨어지고 결혼 관계도 무너져 사랑의 희망이 없다고 노래한다(Mommy Don't Love Daddy Anymore', 'Alienated,' 'Stark-Spare' 등. AD는 'Kansas'라는 노래에서 "세상의 거꾸로 발전해 가며, 사람들은 섹스와 마약에 노예가 된다"고 노래한다).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CCM은 예수를 우리의 삶 속에 영접하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한다. 결단의 교리는 CCM에서 중심된 신학적 주제가 된다. 케이스 그린은 'Altar Call'이란 노래에서 "복음이란. 만약 당신이 겸손히 그 앞에 나오며 그의 발 앞에 엎드려 '당신은 나의 주요…'라고 고백하면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죄를 사하시는 것이다"라고 노래한다.
(5) CCM은 현실참여적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담고 있다.
브루스 케럴(Bruce Carroll)이 부른 "Sometimes Miracles Hide"는 한 아내가 아이를 가졌는 데 병원에서 "인공유산"을 하라고 권했지만 거절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부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부부는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비록 다른 아기들처럼 건강하지는 않았지만 그 딸을 최고로 여기면서 키웠습니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은 '차라리 낳지 말걸...' 하는 후회는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기적은 때대로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다 예비해 놓으십니다"(양동복 303에서 인용됨).
2) CCM 신학의 부정적인 측면
다시 한번 우리는 우리 자료의 한계를 인식하며 이 문제에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CCM의 모든 가사들을 보지 않았으며, 제한된 관점에서 CCM의 신학을 보는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1) CCM은 포괄적인 신학을 담고 있지 않다. CCM의 노래들은 주로 "경배와 찬양" 및 "복음"과 연관된 것이므로, 소위 개혁주의에게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든 경륜"(행 20:27)을 다 다루지는 않는다.
(2) CCM은 그 뿌리에 있어서 전천년설적이며, 세대주의적인 종말론을 갖고 있다. 많은 CCM 아티스트들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 자들로서 휴거를 기다리는 가사를 불렀다. 래리 노먼이 부른 "I Wish We'd All Been Ready"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는 데 다음과 같은 가사를 담고 있다(양동복 110에서 인용). "아내와 남편이 침대에서 자는데 아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보았더니 남편이 사라졌습니다. 난 우리 모두가 예비했으면 합니다. 이젠 당신의 마음을 돌릴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내려오시면 당신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3) 교회론은 초보적으로 다루어진다. CCM에서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자주 비추어진다. 케이스 그린은 "Asleep in the Light"에서 "잠들어 있는 교회"를 묘사하고 있다. "세상은 어둠 속에서 잠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밝은 빛 가운데 있으면서도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교회가 그렇게 죽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1978. 양동복 313-4에서 인용됨). 마일런 러페브르(Mylon LeFevre)는 "Denomination Demolition"에서 교회가 "소란과 분쟁"에서 벗어나 "하나가 되어야 함"을 노래한다(1990).
(4) CCM에는 성찬이나 세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으며, 중생과 회심이 가장 중요한 기독교 체험으로 제시된다.
(5) 많은 CCM은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오순절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에 의해 점진적으로 성화되는 과정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두 단계의 경험으로 다루어진다. 페트라(Petra)는 사도행전 2장을 다루면서, "More Power to You"라는 노래를 통해 전통적인 오순절 신학을 반영해 주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CCM은 교리적인 편식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CCM은 전세계적으로 보급되었으며, 다양한 신앙 공동체에서 사용되고 있으므로, 각 공동체의 믿음을 표현하는 노래들이 점점 많아져 가리라고 생각된다. 이제는 "개혁신앙"을 가진 교회들이 개혁신학적인 CCM을 만들어 더욱 널리 보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왜 우리가 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신 "옛 복음의 노래"(Old Time Gospel)와 "현대적인 기독교 노래"(Contemporary Christian Song)을 함께 들어야 하는지 성경적인 근거 하나를 생각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이 "노래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바냐 3:17에서 가장 잘 표현되고 있으며, 이 구절은 우리의 모든 노래와 찬양의 근거를 제시해 준다. 또한 이 본문은 CCM에서 즐겨 부르는 "성구노래"(Scripture Song) 가운데 하나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는 분"(yagil 'alayik berinna)으로 소개된다. 에서는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로 새롭게 제시된다. 여기에서 첫 동사 "기뻐하다"(gil)는 "흥분하여 소리지르다" 는 뜻을 가진다(shout in exultation, rejoice; ekstatisch schreien, jauchzen, HALOT). 물론 하나님의 흥분은 여기에서 기쁨이 넘치는 것을 말한다. 둘째 단어에 대해 대부분의 영어번역들은 "노래하며"로 번역하고 있다(KJV, 'he will joy over you with singing'; NIV, 'he will rejoice over you with singing'; NRSV, 'he will exult over you with loud singing'). 이 히브리어 단어(rinna)는 (1)기쁨의 소리와 (2)애통의 소리를 뜻하는데, 여기에서 "노래하다"로 번역된 것이 흥미롭다. 이 단어에 대해 로벗슨은 "God breaks out in singing"으로 해석한다. 그는 바로 앞의 14절에서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ranni)고 했는 데, 이제 하나님께서 "노래하고"(ranna) 있음을 발견한다(1990:340). 이리하여 14절에서 "너희는 크게 노래하라"가 이제 "그가 크게 노래하신다"로 변한다. 18절은 이 노래가 바로 축제의 날에 부르는 노래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속받은 백성을 보고 기쁨을 참지 못하고 엑스타시 가운데 폭발적인 노래를 부르고 있다. 즉, 하나님은 노래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그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들은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노래는 "찬양"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높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스바냐 3:17에서 "노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눈을 지으신 이는 보시며, 귀를 지으신 이는 들으시며, 입을 지으시는 이는 말씀하시나, 성대를 지으신 하나님은 노래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노래를 주신 하나님은 노래를 듣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한국인으로서, 더욱 한국적인 노래를 한국적인 악기로 찬양해야 할 것이다. 시인의 말씀처럼,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찌어다"(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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