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5일
큰돌개혁장로교회 주일예배 ▣주일경독시간 인도: 안기철 집사 ▶시편찬송 시편72편 다같이 ▶경 독 시편72편 고린도전서7장 다같이 ▶합심기도 다같이 ① 성령과 말씀의 예배 / 설교자와 회중을 위해 ② 성찬의 예배/ 은혜언약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의 교제가 풍성하게 드러나는 예배를 위해 ③ 믿음과 순종의 예배/ 배움(교리)과 실천(삶)이 있는 예배를 위해 ▶목사;“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1:3) ▶회중;“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 예배부름과 송영 시편47편 * 사도신경 다함께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제8주일 * 십계명낭독 다함께 * 참회기도 다함께 * 시편찬송 시편69편 헌 상 안기철 집사 목회기도 담임목사 말씀의 강설 요일2:12-17⑥ 요한일서 강해(28) 주의만찬 출6:1-7 다함께 * 찬 송 찬송가 170장 다함께 * 강복선언 설교자 * 교제의 인사 다함께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 표는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 헌금은 미리 준비해 미리 봉헌함에 넣어주세요. *주일 오후 교리공부: “성경과 교리”(54) 교리와 함께 읽는 야고보서 본문연구 |
제2부 인간의 구원 제8주일 제24문: 사도신경은 어떻게 구분됩니까? 답: 셋으로 구분됩니다. 즉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가 그것입니다. 제25문: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라 하면서 왜 삼위(三位), 즉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합니까? 답: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자신을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삼위(三位)가 곧 유일하고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
▣성찬본문/ 출6:1-7
▶『 (출6: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
▣설교본문/ 요일2:12-17⑥
『 (요일2:12-17)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코이노니아의 두 가지 신학적 특징알기
우리는 신자의 지상적 신앙의 여정을 추적해가면서, 참된 신앙의 출발지과 그 성장의 목적지를 탐색해왔습니다. 이 성장을 위한 코이노니아의 신학적 특징들을 유념하셔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 영적성장, 곧 코이노니아의 교회론적 특징을 살폈습니다. 이 다층적 신자군은 개별적인 신자의 면면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연합된 다양한 지체들로서 설명됩니다. 이들은 지금 개인적으로는 그 신앙의 성숙의 정도의 차이(양적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들은 모두 동일한 성장의 여정으로 초청받고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적 소명아래 있습니다.(성화의 질적차이는 없다) 우리는 이것을 ‘교회적 성화’라고 배웠습니다.1)
☞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는 개인적 성화론에 몰입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성화의 교회론적 성격이 상실되거나 약화되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자라가야 하는 신앙성장의 양상이 왜곡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일단의 부흥주의자들은 언제나 개인의 결신과 순종에 방점을 둠으로서 완전성화라는 허상의 교리를 유포합니다. 그러나 지상교회의 연약함과 불완전성은 신자들의 상태와 다르지 않기에 교회는 그 지체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성화되어 갑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화를 위한 유일한 수단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 구원이 없다는 말은 교회를 떠나 성화란 없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에서 존 번연이 미궁(美宮)으로 묘사한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세 가지 중요한 표지들과 관련됨을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도서관(말씀과 믿음), 둘째는 무기고(권징과 사랑), 셋째는 옥상(성례와 소망)입니다.2) 요한에게 코이노니아(사귐)와 에클레시아(교회)는 분리 될 수 없는 유기적 개념이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이 모든 여정을 지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내용으로 하는 기독론적 특징을 갖는 다는 점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 중심적 신앙의 진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가 ‘자녀들’(테크니온) 혹은 ‘아이들’(파이디온)이라고 불리는 중생한 초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은 복음으로 탯줄을 끊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믿음) 가진 신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신자로 하여금 칭의와 양자됨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소망)을 소유한 신자들로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속죄의 복음으로부터 영원히 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나아갑니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알게 될 때 역사를 넘어, 현실과 세계를 넘어 영원을 바라보는 전망을 소유하는 것은 가장 성숙한 신자가 갖는 시선입니다.
사도는 이들을 ‘아비들’(pathvr)이라고 부릅니다. 영원을 향한 시선과 소망의 위로를 따라 그리스도안에서 성부하나님과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정탐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기업을 확신한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사람들이요, 느보산 꼭대기에서 언약의 땅을 바라보던 모세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자, 그리스도를 아는 이 두 가지 지식은 필연적으로 세 번째 ‘지상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사랑)에로 이끕니다. 마치 홍해와 요단강 사이에 광야가 펼쳐집니다. 이제 신자는현실의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초청을 받습니다. 사도는 그것은 분투하는 청년의 초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은 제자도의 표상으로 가르칩니다. ▶(벧전0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라!
그리스도를 아는 이 세 가지 지식을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mevga")은 사랑이라
여기서 바울이 사랑을 ‘제일’이라고 표현 할 때 이 mevga"(메가스)라는 단어는 ‘첫 번째’ 혹은 ‘가장 먼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중요한’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사랑이 믿음보다 앞서거나 소망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믿음과 소망은 신자의 내면에 형성되는 비 가시적인 뿌리와 같습니다. 반면에 사랑은 믿음과 소망의 열매로서 가시적이며 항구적입니다.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면 믿음은 잠재태이고, 소망이 완성태라면 사랑은 현실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참된 믿음과 소망 없이 불가능하기에 사랑은 항상 기독교 신앙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탁월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지상적 생애를 본받고 그의 신성한 성품과 지상적 삶의 보상을 추구하는 자기비움과 겸손의 여정을 살아가는 분투하는 신자의 초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은 수고(kovpo",cut,벤 상처)가 따른다’(살전1:3)고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책, ‘입문자 교리교육’ 4장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우리는 모든 주제를 사랑과 관계시키고 사랑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설명하든지 입문자들이 들으면서, 믿고, 믿으면서 희망하고, 희망하면서 사랑하도록 가르치십시오.” (입문자 4.8)
☞ 어거스틴이 ‘가르치라’고 권할 때 이 가르침은 통상적인 ‘가르침’을 의미하는 도케레(docer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신탁(神託)을 전하다’는 의미의 모네레(monere)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단지 교리적인 지식이 아니라 신탁을 받은 선지자처럼 일종의 탄원과 예언자의 열정으로 가르쳐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교훈이 일종의 신탁을 받은 선지자의 언어라면 이 말씀을 듣는 회중들은 마치 전쟁을 치르듯 무겁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사랑을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성장의 목표라고 말한 것처럼 사도요한은 이 사랑을 추구하는 거룩한 신자상을 ‘청년들’이라고 부르면서 모든 신자들이 걸어가야 할 성장의 실천적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3)
▶사도요한은 사랑으로 분투하는 신자의 초상을 그립니다. 그가 청년들(neanivsko")이라고 부르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일2:13-14)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여기서 요한이 청년들이라고 말할 때 단지 생물학적인 분류에 따른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부르는 ‘청년들’(네아니스코스)이란 약40세 이하의 징집 가능한 연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군인으로서 복무할 수 있는 나이를 의미합니다. 즉 요한이 청년들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영적전장에 징집된 분투하는 군사와 같은 신자를 묘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아래 신실하라
사도요한은 이 세상과의 일전을 치러야하는 신자 곧 청년들을 향하여 첫 번째로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2:13)
▶요한이 언급하는 ‘악한 자’(to;n ponhrovn)는 마귀입니다. 사도는 세상은 악한 자의 지배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요일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ejk,of)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ejn,in) 처한 것이며
그러나 여기 중요한 강조점이 있습니다.
신자의 상태는 하나님께 속한 상태입니다. 즉 하나님께 완전한 소유권이 있어 그 신분이 확고부동하게 보장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신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한다’(요일5:18)고 말합니다. 반대로 세상은 악한 자의 권세아래서 지배되어 억눌리고 있습니다.4)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전쟁의 현장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엡0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이 세상은 사단의 지배아래서 구축 된 일정한 통치질서가 있음을 말합니다. 즉 사단의 지배력은 이 세상과 악을 하나로 묶어 일정한 체계를 구축하는 악의 연대(악의 코이노니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악의 카르텔(kartell)은 오랫동안 이 세상을 지배해온 견고한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악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상을 무력화시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이 악 한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출애굽한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세상은 신자에 대해 죄의 지배권과 실제적인 위해를 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무시 무시한 영적 전장에 나아가는 청년신자들에게 이것을 상기시킵니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2:13)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이미 승리했다고 완료형으로 선언합니다. 이 승리는 결정적이고 항구적인 승리로 과거에 있었던 그 승리가 현재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청년들은 승리하려고 전쟁터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들의 현재적 경험과는 다르게 이미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그 결정적인 사실로부터 신자의 승리는 보장되는 것입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골0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무장해제 된 상태)
그러므로 청년들을 설명하는 첫 번째 진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이 영적전쟁의 객관적 승리에 관한 약속입니다.
사도는 성화역정의 삶, 사랑의 계명순종의 여정, 시험과 시련의 현장을 지나는 신자들에게 패배가 없는 안전한 전쟁임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성의 질서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적인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침입하셨습니다. 거대한 세계의 충돌이 일어난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통해 균열이 일어났고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하는 곳에 사단의 지배력은 무장해제 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그가 파송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 사단이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눅10:18)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로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무장해제 시키시고(골2:15)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율법의 정죄)를 해체시키셨던 것입니다.(고전15:55)5)
그러므로 사단이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전략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의심하게 하고 마귀의 권세에 대한 과대망상적 두려움에 시달리게 하며 그가 통치하는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사단이 천하 만국의 영광을 보이며 세상에 대한 왜곡된 환상을 심어주고, 그가 소유한 권세를 하나님과 동등한 것으로 과장했던 것처럼 말입니다.(눅4:5-7)
▶이것이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에서 받은 시험이었습니다. 광야의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모진 현실이 이상한 신기루를 만들어냈습니다. 애굽의 삶에 대한 기억이 그리움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기억은 항상 왜곡됩니다. 우리의 과거의 경험은 오늘날 내가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과장되기도 하고, 선택적으로 잊혀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기억은 미화되기도 합니다. 이미 해방된 신분이었지만 그들은 세상에 대한 왜곡된 기억을 소환합니다. 그리고 마귀 앞에 절하고 세상을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적 기억을 조작합니다. 그렇게 죄와 사망과 저주와 고통에 사로잡혀 살았던 과거는 놀라울 만큼 왜곡되고 미화됩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사단의 기만에 속아 살아왔습니다.6)
사단은 분열과 증오와 절망과 상처만을 줍니다. 죽음에 볼모를 잡혀 우리들을 잠시간의 휴식과 평안함과 행복에 비굴해집니다. 이스라엘이 볒집에 이겨 벽돌을 굽는 일이 조금 더 가중되자, 바로의 폭력과 애굽의 비참에 저항하기 보다는 바로에게 이전의 노동의 정도로 감해주기를 그에게 자비를 구했습니다. 폭력과 박해가 자비와 배려로 변해버립니다. 속지 마십시오.
마귀는 빼앗고 죽이고 파멸하는 존재입니다.(요10:10) 이 세상은 죄인을 그렇게 속이고 장차 망한 세상과 운명을 같이 하게 할 것입니다.
은혜의 수단아래 신실하라
사도는 두 번째로 청년들을 설명합니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2:14)
청년들에 대한 두 번째 설명은 첫 번째 설명과 조금 다릅니다. 요한은 구체적으로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자녀들’(테크니온)과 ‘아이들’(파이디온)의 다른 강조점과 같은 논조입니다. 전자는 개관적인 중생의 상태를 후자를 주관적으로 성장(교육)을 필요로하는 현실적인 상태를 강조했던 것처럼 청년들에게도 동일한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불가역적인 승리를 확보하고 있지만, 이 승리는 신자의 현실 속에서 또한 경험되고 실제화 되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성화역정에 있는 신자는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악한 자’는 강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보다 ‘강하게 된’(이스쿠로이 에스테) 사람입니다. 이것은 강한 힘을 가진 상태보다는 강한 자가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어떻게 강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신(요1:1;10) 그리스도의 내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그분의 말씀이 신자의 마음에 새겨진 상태입니다.(렘31:33) 하나님의 말씀의 내재에 관하여 베드로는 신자를 중생하게 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살아 있고 항상 있는 그 말씀’(벧전1:23-25)이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사도는 우리의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1:21)고 권면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이념적으로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과의 교제(사귐) 곧 그리스도의 말씀과의 사귐만이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의 것으로 경험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그의 회중들에게 교회 안에 은혜의 수단앞에 신실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신자는 강한 자를 제압하는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한 성례와 기도에 신실함으로 신자는 이 악의 코이노니아를 분쇄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누리는 복된 코이노니아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누리는 영적성장은 이 거룩한 전쟁에서의 승리가 가져다주는 노획물입니다. 물론 이 승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것이지만 지상교회는 이 승리의 노획물들을 지상의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 감으로 체화하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믿음은 실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신실함으로 입증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실제로 경험하는 성숙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욜03:10)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지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지어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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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화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칭의에 정초한다. 그리스도의 칭의가 전가될 때 그분의 거룩함도 신자에게 전가된다.(고전1:30) 그러므로 중생한 신자에게 전가된 거룩함(결정적 성화)는 질적이 차이가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주신 구원의 은사들이며 차별이 없고 보편적인 은사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목양이 일어날 때 지상교회는 공동체적 성화를 경험한다. 각 신자들은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안에서 가시적 성화의 열매들을 맺어 가는데 이 과정에서 ‘양적인 차이’를 보일 뿐이다. 교회개혁의 중요성을 외쳤던 개혁자들에게 교회의 운명은 각 신자들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었다.
2) 교회의 표지는 또한 교회가 가진 은혜의 수단들을 포함한다. 말씀은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사역으로 믿음의 원천이고(롬10:17), 성례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으로서 소망의 원천이며(고전11:26), 권징은 그리스도의 왕적 사역으로서 사랑의 원천(요일2:7;3:23)이다.
3)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투쟁의 여정인 것은 이 성장에 관한 교훈들(요일2:12-14)이 사랑에 대한 명령과(요일2:7-11) 사랑하지 말아야할 세상을 향한 금령(요일2:15-17) 사이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주목하라!
4) 여기서 악한 자의 지배아래 있는 상태는 하나님에 의해 설정된 상태, 혹은 운명지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세상은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한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을 뿐이다.
5)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성도에게 현재적 죽음은 율법의 정죄아래 있지 않기에 그 결정적인 쏘는 것(독)이 없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최후의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 될 것이다. (고전15:54)
6) 기서 빈번하게 빚어지는 오해 한 토막을 지적하고 싶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사탄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예수님께 주겠다며 자신에게 경배할 것을 제안했다. 우리는 여기서 절하면 그것을 받고, 절하지 않으면 받지 못한다는 양자택일의 반응을 취하기가 쉽다. 그런데 이 제안은 이러한 프레임을 따라 사고할 것을 촉구하는 사탄의 음흉한 전략이다. 이는 반응하는 것 자체가 함정에 빠지는 은밀한 속임수가 감추어져 있는 제안이다. 둘 중에서 무엇을 택하든,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사탄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정답을 택하느냐 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유혹에 반응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사탄의 은밀한 속임수다. 사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물을 창조하신 예수님이 동시에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있는 모든 만물의 주인도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이에게도 소유권을 양도한 적이 없으시다.” (한병수, 기도란 무엇인가)
▣말씀의 반추를 위한 생각들
▣ 시편으로 기도하기!(피터 버미글리)
시편72편
1. 오 위대하시고 선하신 하나님,
올곧은 마음과 진정한 헌신으로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향하여 당신은 매우 크신 선하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악한 자들의 행복이 당신의 택함 받은 백성의 눈에 두드러질 때가 훨씬 많습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사람의 법률을 모두 경멸하며 경건으로부터 멀어진 자들이 그 모든 노력과 소망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루는지 볼 때에, 그들은 당신이 우리를 더 이상 전혀 돌보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뻔뻔스럽게 주장합니다.
우리가 믿음에서 비틀거리며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시기를 엎드려 구합니다. 우리가 미끄러질 때에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옵소서. 우리의 생각과 입을 단단히 죄어주셔서 , 당신께 예배드리는 우리의 모든 노력들이 헛 된 낭비였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우리가 인내심과 그리스도의 관용을 가지고 우리의 믿음의 결과와 마지막 성공을 기다릴 수 있게 하옵소서.
당신의 최후 심판 날이 시작 될 그 때, 당신이 얼마나 모든 것을 공의롭게 다스리는지 나타날 것입니다. 그 동안에는 우리의 영혼이 끊을 수 없는 띠로 당신에게 연결되고 묶여 있는 , 그 무엇보다도 더 큰 열망에 우리가 단단히 잡혀 있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