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1일(오순절 후 열한 번째 주일)
사무엘상 24:1~7
엔게디 광야에서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다윗은 광야에 서 있었습니다. 광야는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는 자리가 결코 아닙니다. 광야에는 도무지 선한 것, 아름다운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광야에는 오직 추위와 굶주림만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다윗은 지금 광야에서 서 있었습니다. 그가 서 있던 엔게디 광야는 사해 서쪽에 위치한 광야입니다. 히브리어로 ‘엔’은 ‘샘’을 가리키고, ‘게디’는 ‘새끼 염소’를 가리킵니다. 엔게디는 ‘새끼 염소의 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들 염소 바위’라고 표현되어 있던 곳이 이곳 엔게디였습니다.
엔게디에는 일반인들이 살 수 없었습니다. 그곳은 가파른 언덕 때문에 오직 들 염소 정도만 살 수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엔게디에 기슭을 따라 흘러내리는 신선한 오아시스가 있었던 점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곳을 택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다윗이 택했다."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내 몰렸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다윗은 이곳 광야로 내몰렸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해, 오직 들 염소들 정도만 살 수 있는 이곳, 엔게디 광야로 내몰렸습니다. 엔게디의 불편한 환경이 오히려 다윗에게는 안전한 피신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이곳을 찾았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어쩌면 이곳 엔게디가 다윗에게 마지막 장소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자칫 사울의 군사에게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이곳은 다윗의 무덤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엔게디는 절박한 곳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절박한 광야에서, 다윗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울은 그의 부하 3,000명을 거느리고 엔게디로 향했습니다.
한 참을 가다가, 사울 왕은 뒤를 보기 위해 한 동굴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동굴 깊은 곳에,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사울이 아무 것도 모른 채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내리고 있는 사이에, 다윗의 부하들이 다음과 같이 속삭였습니다.
“다윗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좋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이 말은 언제 들어도 듣기 좋은 말이고, 가슴 떨리는 말입니다. 어쩌면 지금이 그동안 계속되어 왔던 다윗과 사울의 악연을 끊을 수 있는 마지막 찬스일지도 있습니다.
생리적 현상으로 긴장을 풀고 있던 원수를 향해 다윗이 회심의 한방을 날릴 수 있는 완벽한 기회였습니다. 만약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아마 다윗은 평생 후회하며 지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를 한 방에 날려버렸습니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목숨 대신, 그의 겉옷 자락만을 가만히 베고 말았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부하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여러분은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없는 기회도 만들어야 할 판에, 가까스로 주어진 기회를 바보 같이 날려 버린다는 게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더군다나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도, 그로 인해 마음의 찔림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참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을 살아갈 요령도 배우지 못했고, 굴러온 호박을 넝쿨째 발로 차 버리는 어리숙한 사람 같습니다.
왜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충분히 죽일 수 있는데도, 왜 그는 자신의 칼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6절에서, 다윗은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이후, 다윗은 동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던 사울 왕을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땅에 엎드려 신하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손에 있던 사울 왕의 옷자락을 보며주며 말했습니다.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당신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는 자입니다.”라는 다윗의 고백에는 여호와에 대한 경외감과 여호와께 선택받은 사울 왕에 대한 존경심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던 이유는 여호와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갖는 일, 이것이 다윗의 영성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울 왕이 하나님이 선택한 왕답게 행동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교만했고, 누구보다 비열했으며, 누구보다 열등의식으로 가득했습니다. 아마 그의 인간 됨됨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를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 인정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그 피해를 고스란히 당하는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복수의 기회를 관용으로 바꿈으로써,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에게 아픔을 주는 사람을 향해 얼마든지 악하게 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 삶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도 역사하시고, 그것마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 이하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19-21).”
「하늘의 특별 검사」라는 책을 지은 김인호 검사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자신이 서울 지검에서 일하고 있을 때, 한 대형비리 사건을 수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 이 분은 한 거물급 유력 인사를 수사하였다고 합니다.
이 분은 수사를 하기 전에,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하지만 검사가 말하지 않고 어떻게 수사할 수 있겠습니까? 이 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감동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분이 수사를 하기 위해서 수사 실에 들어갔는데, 오히려 수사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 있던 상대방이 먼저 기선을 제압하는 말과 태도로 나오더랍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검사를 거칠게 몰아세우기도 하고, 때로는 검사를 훈계하기도 하더랍니다. 마치 상대방이 조사하는 사람이고, 자기가 조사를 받는 사람같이 보였답니다.
하지만 이 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따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방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답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인생 역경을 한참 동안이나 혼잣말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검사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상대방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도리어 검사인 자신에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고 묻더랍니다.
자정을 넘기고 나서 이 분이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이제는 해 봐라.”라는 감동을 주시더랍니다. 그래서 불쑥 그를 부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제가 좀 감해 드릴게요.”
이 말을 들은 상대방은 책상에 앉았다가, 침대에 엎드렸다가를 반복하면서 안절부절못하더랍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 말도 안 하던 검사가 던진 한 마디에 강펀치를 얻어맞은 겁니다.
결국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전부 뇌물수수를 부인하는 상황에서 혼자만 자백을 털어놨고,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른 사람들의 자백이 도미노처럼 이어졌습니다.
보통은 수사하는 사람이 말을 많이 하고, 조사를 받는 사람은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데, 이번에는 그 반대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방법과 정반대로 하는데도 일이 오히려 더 잘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원수 갚은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따라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을 존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선한 길,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다윗이 가졌던 영성의 핵심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세운 사람을 하나님이 세운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복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보이는 세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가졌던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결정한다는 단순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를 좇은 사람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좇은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돈, 명예, 권력의 힘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세계는 사랑과 겸손과 순종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이런 원리에 따라 살아가다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다윗과 같은 영성과 인격의 사람이 됩니다.
눈에 보이는 사울은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채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자동차처럼, 시기심과 폭력성으로 가득 찬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눈에 비친 사울은 더 이상 왕도, 권력자도, 원수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린 채, 자신의 수치스러움을 드러내고 뒤를 보고 있는, 말 그대로 연약한 인간 그 자체였습니다.
가령,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하루 세끼를 먹어야 하고, 피곤하면 자야하며, 급하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야 하는 연약한 사람일뿐입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연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눈에 보이는 세계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원수가 생기고, 대적들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을 짓밟고 넘어서야 자신이 승리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눈에 보이는 세계를 따라 살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입니다.
다윗의 영성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어린 아이의 눈을 갖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이 불의한 요구를 하거나 청탁을 해 왔을 때, 하나님의 생각으로 그 일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결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느 식당에 갔다면, 일하시는 분들의 수고를 기억하고 차려 놓은 음식만으로도 만족하고 맛있게 식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꼭 필요한 밑반찬은 부탁을 해서 더 드시더라도, 도에 넘치게 자주 많은 양의 밑반찬을 시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만약 그런 경우라면, 식당 주인은 여러분이 기독교인인 것을 알고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을 닫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옷이 한 벌 필요해서 옷가게를 방문했다면, 이 옷 저 옷을 마구 꺼내 본 뒤에 주인에게 “다음에 올 게요!”라고 돌아가지 마십시오. 그러한 행동은 신앙인으로서는 옳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을 하나님께서 세운 세우신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젊다고, 인격이 모자라다고 하나님이 세우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딤전 4:12)”고 권면하지 않았습니까?
자,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다윗의 영성을 가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윗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표상(表象)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분은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종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고, 그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께 선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으로 무장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눈에 보이는 힘의 논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과 순종의 원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다윗이 이야기를 듣고 사울 왕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향해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16절)”하고 목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다윗에게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17절).”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의 진심이 사울에게 통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사울의 마음이 바뀌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울이 다윗 앞에서 흘렸던 눈물은 진실이었습니다. 또한 사울은 장차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며, 자신의 후손을 멸족시키지 말 것을 다윗에게 부탁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은 이토록 강한 힘을 냅니다. 비록 당장은 악인이 득세하는 것 같고, 진리 편에 선 사람이 오히려 손해를 당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끝까지 진리 편에 서는 자가 승리합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어려움을 주고, 고통을 주는 사람이 있나요? 저는 여러분이 그 사람과 형편에 집중하기 보다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기 위해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악인을 통해서도 우리를 연단하시고, 우리를 준비시켜 가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이 엔게디 광야에서 세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