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이사슬. 육지의 생태계에서도 먹이사슬의 현장을 접할 수 있지만 바다에서는 보다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필자가 멸치잡이배를 타기 전에는 멸치가 바닷속 먹이사슬의 맨 아래단계인 줄 알았다. 헌데 아니었다. 멸치 중에 제일 작은 고기(치어)를 가이루(일본말인 것 같다.)라고 불렀는데..
젓가락으로 집어도 대여섯 마리가 그냥 잡히는 흰멸치가 바로 가이루다. 웃기는 것은 가이루를 주바(다음 단계 멸치)가 잡아먹고 주바는 고주바(또 다음 단계)가 잡아먹고 고주바는 고바(제일 큰 멸치: 흔히 국물용으로 쓰는 것)가 잡아먹고 고바는 정어리가 잡아먹고 정어리는 조기나 병어, 돔, 우럭, 농어들이 잡아먹는다.
눈으로만 보면 멸치는 먹이사슬 중에 최하위단계가 분명하다. 헌데 가이루를 잡아 삶았는데 뱃속이 투명하리만치 다보이는 가이루(치어)의 배에 붉은 반점이 깨소금처럼 보였다. 그러자 선두(갑판장)가 투덜거렸다. 새우치어를 먹은 것이라 상품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약 2cm정도 되는 뱃속이 훤히 보이는 멸치의 치어는 자신보다 작은 새우의 치어를 잡아먹으며 성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최하위등급의 먹이사슬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웃기는 것이 사람이나 육지의 동물들은 위장이 차면 먹지를 않는데.. 그것은 위장의 부피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는 자신의 몸집에 비해 3분의 1 정도 되는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다. 사람이 고기를 먹는 평균 분량이 한근 정도 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물고기는 적어도 체중이 60kg이라면 20kg을 먹는 것과도 같았다.
그들은 그물에 걸려 죽음이 임박했는데도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멸치와 함께 삶아지는 수난을 당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사냥하여 입에 멸치를 물고 삶아지는 물고기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식욕의 본능을 놓지 않는 것이었다.
또 한 예가 있다. 고향인 부여 백마강에 외래어종인 변대라는 물고기가 출연했었다. 변대라는 물고기는 잉어보다 큰 슈퍼물고기로 자신보다 작은 물고기는 닥치는대로 잡아먹었다. 그러니 자연 물속의 생태계는 파괴가 되었고 백마강의 물고기가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어서 손을 놓고 있었는데 결국 강에는 변대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벌어졌다. 변대들이 먹을 사냥감이 없어지자 자신들의 치어를 마구 잡아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스스로 멸종이 되고 말았다.
자연은 그런 것이다. 현재 우리는 먹거리가 풍부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자원은 알게 모르게 마르고 있다. 멸종위기의 동물과 식물이 점차 늘어나고 이미 멸종한 종도 많다. 마구잡이식으로 사냥하고 기르고 먹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결국 먹을 것이 없어지면 서로를 잡아먹으려 할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스스로 인육을 먹었노라고 자백한 일이 있다. 식욕은 모든 욕망 중에 가장 큰 욕망인 것이다. 전세계의 3분의 2를 정벌한 칭기츠칸의 몽골군에게 누구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단연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전투를 해야하는 와중에 친구나 동료와도 같은 말은 그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했을 것이다. 전장에서 고향에 있는 가족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존재해야 전리품을 차지할 수 있고 가족과 부를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가족보다 소중한 것이 바로 말이었다.
몽골군이 전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능력 중에 하나가 바로 기동력이었다. 쉬지않고 달릴 수 있는 기동력으로 불시에 기습을 하여 수많은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쉬지 않고 달리게 한 원동력이 바로 말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군량이 떨어지면 말을 잡아서 육포로 만들었다. 그 육포를 말안장에 깔면 한달의 식량이 되었다. 육포를 뜯어먹으면서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최고의 전투식량이 육포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드물다.
그들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말이 달리다 지치면 여분의 말을 타고 달렸고 식량이 떨어지면 하늘(장생신)에 제를 올리고 사랑하는 말을 잡아서 육포로 만들었던 것이다. 식량이 될 말은 눈물을 흘리면서 기꺼이 주인의 식량이 되어준다. 몽골군이 아끼는 말을 잡아먹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먹는 말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도 아니다.
그것이 인간이 누리는 먹이사슬의 최고 단계인 것이다. 기르는 가축을 잡아먹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잡는 인간에게도 정이라는 녀석이 진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잡아먹히는 말도 마찬가지다. 진실로 주인을 사랑하기에 육신을 내어주고 행복하게 죽는 것이다.
개도 밧줄에 목이 매달려 숨이 멎을 때 쯤에 주인이 손을 코에 대면 마지막 몸부림으로 꼬리를 흔든다. 주인의 먹잇감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만의 감성일 뿐 동물은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자신의 육체를 내어주는 모든 동물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귀히 먹으면 되는 것이다.
예수는 음식에 감사하라 하였고 석가는 살생을 하지 말라 하였지 육식을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오지랍이 넓은 속물들이 스스로 굴레를 만들어 머리 깍고 육식도 못하게 하고 결혼도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것을 해탈의 경지라고 떠들면서 말이다. 냉정히 따지면 본능의 탈선을 스스로 만들어서 굴레의 짐을 지고 가는 셈인 것이다. 만약 불교의 교리대로 세상이 돌아간다면 이미 인간은 멸종의 길을 걷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유교의 교리대로라면 자식도 낳지 말아야하고 음식도 먹지 말아야한다. 기독교의 교리대로라면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황량하고 메마른 인간의 정서에 지성을 심어주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 지성체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나친 편향은 자신도 죽고 상대도 죽고 사랑하는 주위도 죽는다. 뭐든지 적당한 것이 가장 현명한 삶의 방식일 지도 모른다.
모든 만물은 각자의 우주다. 우주는 각각의 생각과 움직임으로 생명을 유지해가는 것이다. 별개체의 세계로 서로의 구역을 인정하고 정해진 먹이사슬에 충실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복된 삶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고 비판을 하거나 비난을 해서는 안 된다. 각기의 영역을 존중하면 맹수도 싸울 일이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오만과 고집을 버린다면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좋은 말씀 감사감사~
희고 작은 가이리 멸치의 생태계 부터
여러 종교의 교리까지
충실한 애완 동물의 희생사 에 이르기 까지 모든 과정은
먹이사슬 의 기본원리 라 는 말 같아요
읽다 보니 가이리 멸치의 작은 몸에
작은 선홍점 을 본것 도 같아요
다 이유가 있네요 ㅎㅎㅎ
배울게 많아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