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눈물이고 거울인 동시의 말하기 방식 2-2
네이버블로그/ [발달뉴스 37편] 우리 아이의 언어 발달을 도와주는 현명한 말 걸기 방법
2. 아이에게 말 걸기의 어려움
동시에서 말하기의 방식은 매우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다. 어른 시인이 어린이를 일차독자로 삼는 동시의 장르적 특성은 화자나 어조와 관련해 끊임없는 고민을 요구한다. 화자가 말하는 방식이나 어린이 화자 뒤에 숨은 시인의 태도에 따라 작품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꽁다리가 더 맛있어.
삐져나온,
공부 않고 말썽 피우고 싶은 마음.
소시지의 환호성
시금치와 계란말이의 자유
밥 이불을 걷어찬 오이의 용기
그렇게 끄트머리에 든 희망들
둘둘 말리면서도
기어이 도망쳐 나온 것들의 노래,
딱 우리들 맛이야.
― 성명진 「김밥 꽁다리」 전문(『어린이와 문학』 2016년 1월호)
학교 제도와 규율로부터 탈주하려는 아이들의 마음을 김밥 꽁다리에 빗댄 이 시는 제목만큼이나 소박하고 재미있다. 김밥은 동시에서 친숙한 소재로, 지금껏 꽤 많은 비유와 이미지들로 만나 왔다. 그럼에도 ‘소시지-환호성’ ‘시금치와 계란말이-자유’ ‘오이-용기’ 등으로 동시에서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개념어들을 김밥 재료들과 연결해 탈주를 향한 사유를 표현한 점이 무척 신선하다.
그런데 탈주와 자유의 분위기가 아쉽게도 마지막 행에 이르면 화자의 문제에 걸려 반감된다. 마지막 행 이전까지는 이 시의 화자가 명확하게 어린이로 읽히지 않는다. 개념어들의 사용도 그렇거니와 “공부 않고 말썽 피우고 싶은 마음”이나 “그렇게 끄트머리에 든 희망들” 등의 구절은 어린이의 자기 인식이라기보다는 어른 시인들이 흔히 규정해 온 어린이 인식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행의 “딱 우리들 맛이야”는 어린이 화자의 목소리로 들리기보다는 어른 시인이 ‘딱 너희들 맛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딱 너희들 같다고 내가 말해 줄게’라고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노출된 채로 시에 종지부를 찍은 듯 보인다. 마지막 행에서 “우리들”이라는 시어로 갑자기 화자가 어린이임을 드러내는 바람에 그 뒤에 숨은 어른 시인에게로 오히려 시선이 향하는 것이다.
이렇듯 동시가 어떠한 방식으로 어린이의 감정과 생각을 말할 것이냐는 매우 섬세하게 고려되어야 할 문제다. 어린이 화자 논쟁을 떠올려보면 언뜻 어린이 화자 탓일까 싶기도 하지만 어린이 화자를 사용하지 않는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어린이 독자에게 말 걸기는 화자나 어조뿐 아니라 형식과 내용 전반을 아우르는 일이다.
오르다가
오르다가
앞서가는 사람 보고
털썩 주저앉고 싶을 때
뒤를
한번 돌아봐
꼴찌가 아니야
네가
일등이잖아
― 이옥근 「등산길」 전문(『어린이와 문학』 2015년 12월호)
시의 제목은 ‘등산길’이지만 결국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건 멀리는 인생길, 가깝게는 학업 경쟁에서 어린이들이 지녔으면 하는 태도다. 어린이의 지친 삶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삶의 지혜를 전하려는 뜻은 온당하나 다소 평면적인 진술이 되었다. 게다가 시에서 이유가 명확히 드러나진 않지만 뒤를 돌아보면 “꼴찌가 아니”고 “일등”이라는 또 다른 가치 평가는 평가 기준을 달리 두는 것일 뿐 경쟁과 비교의 대열 자체를 파괴하지는 못한다.
어린이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며 어린이 편에 서려는 시들이 주제에 대한 탐구와 아울러 어린이 독자에게 말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좀 더 다양한 실험을 하길 바란다. 그러려면 우선 교훈적이고 지시적이고 선언적인 틀에서 벗어나야 할 듯싶다. 흔히 교훈주의는 동화의 병폐로, 동심주의는 동시의 병폐로 지적되는데, 오늘날 동시는 여전히 동심주의와 교훈주의 모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3 나를 받아 적은 말이 아이에게로
울음을 그칠 수가 없어요
한참을 울다 보면 눈물이
볼을 핥아 주거든요
괜찮아, 괜찮아,
아무도 달래 주지 않는
볼을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거든요
아무도 달려오질 않아
속이 상하고
아무도 달려오질 않아
심통이 나지만
괜찮아, 괜찮아,
혼자 우는 아이를 달래 주는 건
눈물밖에 없거든요
― 손택수 「혼자 우는 아이」 전문(『동시마중』 2016년 1·2월호)
이 시에는 지금껏 동시가 그려 온, 어른에게 야단맞았다거나, 친구와 싸웠다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다거나, 공부나 다른 경쟁에서 졌다거나 하는, 눈물을 보인 이유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 이유로 우는 경우야 흔하다. 동시가 말해 온 그러한 이유들이 안타깝게도 동시의 본심과는 다르게 어린이의 눈물을 흔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 시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린이의 울음이 오히려 눈물 자체를 들여다보게 한다.
시인은 어린이의 눈물을 보고 안절부절못하거나 조바심치지 않는다. 얼른 닦아 주려 하지도 않는다. 우는 이유를 물어보거나, 그 이유를 없애 주거나, 울 필요 없는 일이라고 단정하거나, 다음번에 울지 않으려면 어떡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이 시에서 혼자 우는 아이를 달래는 건 어른의 배려, 친구의 우정, 아이의 결심이나 각오가 아니라 아이의 눈물이다. 내가 나를 달랜다. “한참을 울다 보면 눈물이” “쓰다듬어 주고” “달래 주”기에 “울음을 그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눈물이 나를 위로하고 정화한다. 눈물이 마르도록 울어 본 사람은 나의 슬픔이 나의 슬픔을 위로할 때가 있다는 걸 안다.
생떼를 쓰는 것 같아 보이는 어린이든, 존재의 슬픔에 겨워하는 어른 시인이든 누구에게나 눈물은 같다. 그래서 이 시는 어린이와 함께 울어주는 시가 된다. 혼자 우는 아이 옆에서 아이를 위해 어른 시인이 울어주는 것이 아니라 너도 울고 나도 우는 존재이기 때문에 같이 울 수 있는 것이다. 혼자 흘린 나의 눈물을 혼자 우는 너에게 보여 준다. 바로 여기에서 어른 시인과 어린이 독자는 온전히 만난다.
내가 바보 같은 날
거울을 보았어.
내가 울었더니 거울 속
아이도 울었어
내가 눈물을 닦았더니
아이도 닦았어
내가 머리를 쓰다듬었더니
아이도 쓰다듬었어
아이가 웃을까 말까
망설이기에
내가 먼저 씩 웃어 주었어
― 김금래 「거울 속 아이」 전문(『창비어린이』 2016년 봄호)
이 시 역시 우는 아이를 위로하는 것은 아이 자신이다. 거울의 이미지에 바탕을 둔 1연에서 4연까지의 평이한 서술은 마지막 연에 이르러 놀라운 전환을 이룬다. 깊은 슬픔이 내면의 나를 만나게 하고 나를 위로하고 회복시킨다.
내가 울었더니 거울 속 아이도 울고, 내가 머리를 쓰다듬었더니 아이도 쓰다듬는다. 이때 ‘나’는 보는 주체이고 ‘아이’는 보이는 대상이다. 하지만 마지막 연에서 ‘나’를 보며 웃을까 말까 망설이는 ‘아이’는 더 이상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된다. 망설이는 ‘아이’와 먼저 웃어 주는 ‘나’는 서로 다른 주체로 만난다.
어른이 쓴 동시가 어린이 독자에게 ‘거울 속 아이’가 되어 주면 좋겠다. 나와 똑같이 울고 웃는 아이, 어느 순간 나에게 말 걸어오는 아이, 그래서 바보같이 울던 내가 먼저 웃게 만드는 아이……. 그렇게 동시라는 텍스트가 어린이 독자와 깊이 만나길 바란다.
‘혼자 우는 아이’가 담겨 있을 때 비로소 동시는 ‘거울 속 아이’가 될 것 같다. <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 어린이, 소수자, 그리고 아동문학, 김유진 평론집(김유진, ㈜창비, 2021.)’에서 옮겨 적음. (2023. 7.12. 화룡이) >
첫댓글 어른이 쓴 동시가 어린이 독자에게 ‘거울 속 아이’가 되어 주면 좋겠다.
나와 똑같이 울고 웃는 아이,
어느 순간 나에게 말 걸어오는 아이,
그래서 바보같이 울던 내가 먼저 웃게 만드는 아이…
시 쓰기도 어렵지만 동시도 더 많이 힘이 들 것 같습니다
여러번의 연재 수고하셨고, 감사합니다^^^
동시 쓰기의 어려움을 바로 짚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성인 시인의 경험을 어린이 화자에 맞추어
재구성해야 하니 훨씬 더 어려운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동시는 쉬운 말로 쓰니 쉽게 쓸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묻는 것 같아서
늘 조심스럽습니다.
오늘도 복된 날이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