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 11/26 오늘~ 11/2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5 - 강릉단오제 등재 · 창덕궁 600주년 기념행사 강릉단오제의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 등재와 창덕궁 창건 6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문화재청(청장 유홍준) 주최로 26일 오후 서울 창덕궁과 경복궁 일원에서 개최됐다. 창덕궁 창건 600주년을 기념해 이날 오후 1-2시에는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주관으로 경복궁을 출발해 창덕궁으로 향하는 어가행렬을 재현했으며, 행렬 도착과 함께 창덕궁 인정전에서는 내빈과 관람객이 참여한 공식 기념식이 있었다. 뒤이어 같은 장소에서는 강릉단오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하는 행사가 펼쳐졌다. 기념사와 경과보고에 이어 민요.판소리.군웅장수굿.푸너리. 관노가면극으로 구성된 경축공연이 있었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5-11-26 오후 04:13:42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2887.html 창덕궁 창건 600주년 맞는다 이달 26일, 어가행렬재현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는 창덕궁 창건 600주년을 맞아 경복궁에서 창덕궁에 이르는 어가행렬재현 등 다채로운 행사를 갖는다. 민경범 기자 /시사포커스(부산경남판) 2005-11-01 17:11:56
인권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 (앰네스티 인터내셔널)는 버마 군사정부에 대해 야당 지도자 아웅산 수지씨를 석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위원회의 아시아 담당 부국장 캐서린 베이버씨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수지씨에 대한 가택연금은 정의를 우습게 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베이버 국장은 당국이 개인을 정치과정의 인질로 삼고 이를 위해 사법적 절차를 유린하는 것은 받아 들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언론들은 버마 군사정부가 2003년 5월 이래 가택연금 상태에 있는 수지씨에 대한 가택연금을 1년 연장할 계획이라고 보도했습니다. /VOA news 2005-11-26 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5-11/2005-11-26 -voa4.cfm?CFID=159094603&CFTOKEN=35003874
11 월 26 일 영국 ’브리티시 항공 ’ 소속 초음속 콩코드 여객기 중 마지막 퇴역기가 런던의 히드로공항 을 이륙한 뒤 영구전시될 잉글랜드 서부 필턴비행장에 도착하고있다 . 마지막 비행을 마친 콩코드기는 지난 1979년 콩코드기가 처음으로 제작된 필턴 비행장에서 일반에 전시될 예정이다. [로이터] (사진생략) /Google
[콩코드기 연혁] 1969.03.02 - 콩코드기 첫 시험비행 성공 (프랑스) 1969.10.01 - 초음속 비행에 성공 1970.11.04 - 102번째 시험비행에서 마하 2(시속 2천 1백55 km)의 굉속을 기록 1976.01.21 - 상업운항을 개시 1979 - 콩코드기 생산 중단 2000.07.25 - 파리 북부지역에 추락 사고 (113명 사망) 2000.08.17 - 영국-프랑스, 콩코드 운항 중지 2000.08.19 - 영국-프랑스, 콩코드 운항재개 감시단 구성 2000.09.22 - 뉴욕에 발묶여 있던 콩코드기 파리로 귀환 2003.06.14 - 파리 에어쇼 개막-콩코드기 고별비행 2003.10.23 - 마지막 상업비행 (런던-뉴욕) 2003.10.24 - 마지막 상업비행(회항편)(뉴욕-런던) 2003.11.26 - 콩코드기 마지막 퇴역비행 (히드로공항-필턴비행장)
2002 - 제10회 춘사나운규영화예술제 시상식 ‘오아시스’ 춘사영화상 주요상 석권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가 춘사영화상 대상을 받았다. 한국영화감독협회가 26일 오후 5시 서울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 새천년홀에서 개최한 제10회 춘사나운규영화예술제 시상식에서 <오아시스>는 대상과 함께 감독상(이창동), 각본상(이창동), 남자연기상(설경구), 여자연기상(문소리) 등 주요 부문상을 모두 휩쓰는 영예를 누렸다. 심사위원특별상에는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가 뽑혔으며 <취화선>은 출품되지 않았으나 영화제 집행위원회가 한국 영화계에 끼친 공로를 인정해 제작자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공로상 트로피를 증정했다. 오동진과 영화배우 추상미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시상식에서는 가수들의 축하공연과 시 낭송이 이어졌다 구교선 /무비스트 2002년 11월 30일 토요일 http://www.movist.com/article/read.asp?type=3&type2=1&id=4396
1986년 11월 26일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은 평화의 댐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1986년 10월 정부는 북한이 금강산 근처에 대규모 댐을 건설해 그 물을 원산쪽으로 역류시켜 발전시킬 목적으로 공사를 하고 있으며, 북한이 이 댐을 이용해 수공(水攻)을 해올 경우 최대 200억t의 물이 방출되면서 서울이 황폐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또한 1988년에 개최될 서울 올림픽 대회 방해 공작의 일환이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이윽고 11월 26일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평화의 댐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평화의 댐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방송국에서는 대대적으로 모금방송을 펼쳤고, 국민들 역시 적극 호응했다. 그러나 1993년 감사원의 감사결과에 의하면 당시 발표된 피해 예측 상황은 과장된 것이었으며, 댐 건설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평화의 댐 건설은 정권안보 차원에서 과잉 대응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브리태니커
1981 - 네덜란드의 체스 대가 막스 외웨(Euwe, Max) 사망 외웨 [Euwe, Max(Machgielis), 1901.5.20~1981.11.26] 본명은 Machgielis Euwe. 네덜란드의 체스 대가. 1935년 알렉산더 알레힌을 누르고 세계 챔피언이 되었으며 1937년 알레힌의 복수전에서 다시 그에게 챔피언 자리를 빼앗겼다. 10세 때 처음으로 출전한 체스 경기(미성년자 경기)에서 우승했으나, 대학 정규교육을 마칠 때까지 거의 경기에 참가하지 않았다. 1926년 그는 암스테르담대학교를 졸업했으며 그후 모교에서 수학교수가 되었다. 체스의 포석 이론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유명했던 그는 체스에 관한 수많은 책과 기사를 썼다. 그의 경기운영 방식은 극적이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차분하고도 안정적이었다. 1956년까지 계속 수준 높은 개인경기를 가졌으며, 그 이후에는 최고 체스 선수로 네덜란드 팀에 소속되어 활약했다. 1959년 그는 네덜란드 자동정보처리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1961~63년 체스의 컴퓨터 프로그램화의 타당성을 연구하는 유라텀 위원회(Euratom committee)의 회장, 1970~78년 국제 체스 연맹의 회장을 지냈다. /브리태니커
필리핀의 마닐라 국제공항!
1968 - 독일의 유대계 작가 아르놀트 츠바이크(Zweig, Arnold) 사망 츠바이크 [Zweig, Arnold, 1887.11.10~1968.11.26] 독일의 유대계 작가. 슐레지엔의 그로가우 출생. 마구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베를린 ·괴팅겐 등의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대학 졸업 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는데, 이때의 경험이 그를 격렬한 시대의 비평가로 만들었다. 특히 정보관으로서 러시아인 포로 그리샤 중사의 무실(無實)의 죄로 인한 사살 사건을 다룰 때에는 문학적으로도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입장을 명확히 하였다. 작가 생활에 종사하면서 유대민족 통일운동을 추진하고, 그의 사상이 작품에 강하게 반영되었다. 단편 《클라우디아를 둘러싼 이야기 Novellen um Claudia》(1912)로 문명을 확립하였다. 방대한 연작 《백인들의 대전쟁 Der grosse Krieg der weissen Männer》의 제1작인 《그리샤 중사를 둘러싼 싸움 Der Streit um den Sergeanten Grischa》(1927)을 비롯하여 《1914년의 젊은 아내 Junge Frau von 1914》(1931) 《기회는 성숙한다 Die Zeit ist reif》(1957)에 이르기까지 모두 5권을 완성하였다. 1933년 나치스 대두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를 거쳐 팔레스티나로 망명하여, 반파쇼 투쟁을 계속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8년 동베를린으로 돌아갔다. 동독의 문예아카데미 회장, 동서 독일 펜클럽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소설 이외에도 희곡평론 ·수필 등의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다. /네이버
본격적인 조력발전소(潮力發電所)가 건설되어 가동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이다. 현재 세계최대의 조력발전소인, 영국해엽에 면한 프랑스의 랑스강 하구의 발전소는 최대 13.5m, 평균 8.5m의 조차를 이용하여 10MW발전기 24기를 설치, 1966년에 완성하여 다음해부터 정상운전에 들어갔다. 단저수지식ㆍ복동조작운전으로, 양수식발전용인 튜블러형 가역식 펌프 수차를 사용하여 양수를 이용해서 1조기간에 2회 발전한다. 출력은 완성시의 프랑스 수력발전량의 약 1%에 해당하는 544GW이다. 조력발전은 입지조건이 제한되는데, 에너지원이 무료ㆍ무진장이고 공해의 원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장차 유망한 발전방법이다. /Google
- Robert Esnault-Pelterie(1881~1957)
1965 - 프랑스 최초의 인공위성 'A-1' 발사 프랑스에서는 영국보다 먼저 V-2를 이용한 로켓 개발에 나서 1949년 봄부터 베로니크(Veronique) 로켓의 개발에 나서 1950년 8월 2일 첫발사를 하였다. 첫발사 시험에서는 개발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믿지 않을 정도인 3 m를 상승하는데 그치고 말았지만, 베로니크 로켓은 길이 5.8 m, 직경 55 cm, 발사시 무게 1020 kg, 추력 4톤이었다. 베로니크 로켓은 개량을 거듭하여 후에는 300 km이상까지 상승하였다. 베로니크 로켓 개발에 성공한 프랑스는 이 기술을 이용하여 인공위성 발사 로켓인 디아망(Diamant)을 개발하였다. 디아망 로켓은 높이 23 m, 최대 직경 1.4 m의 3단계 로켓이었다. 1단과 2단 로켓은 액체 추진제 로켓이고 3단 로켓은 고체 추진체 로켓이었다. 발사할 때의 로켓 무게는 18.4톤이고 추력은 30톤이었다. 프랑스는 디아망 로켓을 이용, 1965년 11월 26일 A-1 인공위성의 발사에 성공하였다. (발췌) [로켓의 역사와 미래/채연석]
1956 - 소련의 영화감독 도브젠코(Dovzhenko, Aleksandr) 사망 도브젠코 [Dovzhenko, Aleksandr Petrovich, 1894.9.11~1956.11.26] 소련의 영화감독. 1930년대의 소련 영화산업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감정의 격렬함과 신비주의적인 상징성이 서술적인 구조보다 더 우선하는 그의 영화는 러시아 내전(1918~20)과 집단화 시기(1920년대말~1930년대초)를 주요배경으로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농가에서 태어나 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우크라이나 지방신문에서 정치만화를 그렸다.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에리히 헤켈에게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 1926년 영화계에 투신 〈사랑의 열매 Yagodki lyubvi〉(1926)라는 짧은 작품으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의 첫 주요영화인 〈즈베니고라 Zvenigora〉(1928)는 바이킹 조상 때부터 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우크라이나 민족의 서정적인 전기(傳記)이다. 〈무기공장 Arsenal〉(1929)은 혁명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징적인 영웅을 다루고 있다. '반혁명적'이라고 비난받은 〈대지 Zemlya〉(1930)는 예리한 상징주의적 시각으로 우크라이나 농부들이 땅에 대해 품고 있는 신비로울 정도의 유대감을 다루고 있다. 그밖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이반 Ivan〉(1932), 시베리아의 외딴 전초기지의 비행장 건설을 다룬 〈변경 Aerograd〉(1935), 우크라이나 혁명 지휘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1941년과 1949년에 스탈린상을 받은 2개의 작품 중 첫 작품인 〈시초르스 Shchors〉(1939), 〈충만한 인생 Michurin〉(1946) 등이 있다. 한편 도브젠코는 자서전적 소설인 〈매혹된 사람 Zacharovana Desna〉과 많은 단편작품도 썼다. /브리태니커
헤딘 [Hedin, Sven Anders, 1865.2.19~1952.11.26] [역사 속의 인물] 스웨덴 탐험가 스벤 헤딘 1908년 서울에서 스웨덴 탐험가 스벤 헤딘(1865~1952)은 순종 황제(고종 황제라는 설도 있음)를 알현했다. 그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황제의 차분하고 정연한 얼굴은 우울한 기운에 젖어있었다. 그가 천천히 위엄있는 모습으로 일어서면서 이별의 악수를 청했을 때 나를 향하던 슬픔과 외로움의 시선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일제 침략을 받은 한국에 상당한 연민을 가졌던 것 같다. 가장 유명한 실크로드 탐험가이자 지리학자다. 1895년부터 1908년까지 세 차례 중앙아시아와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 누란(樓蘭`타림분지의 오아시스 국가)왕국의 유적을 발견했고 서역 남도(南道)를 고증했다. 장장 2만㎞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2002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군도 그의 측량지도에 의존했다. 왜소한 체구에 약골로 태어났지만 오지 탐험에 대한 호기심이 유별났고, 베를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65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로 빛나는 업적을 쌓았지만 나치 독일과의 지나친 교류 때문에 종전 후 어용학자로 몰려 학계에서 쫓겨났다. 냉대 속에 1952년 오늘, 스톡홀름에서 죽었다. 친일파 논쟁에서 보듯 자신의 잘못으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것은 서양이라고 다를까. 박병선 논설위원 /매일신문 2009년 11월 2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0909&yy=2009
[오늘속으로(11월26일)] 헤딘 1952년 11월26일 스웨덴의 탐험가 겸 지리학자 스벤 안더스 헤딘이 87세로작고했다. 오늘날엔 지리학자가 반드시 탐험가를 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지리학자들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게으른 지리학자처럼, 남들의 발품을 빌려서 책을 쓰고 싶어한다. 지리학이 워낙 다양한 분과로 잘게 나뉜 탓도 있을 것이다. 고종석 /한국일보 2003-11-25 16:51 sec&sid1=103&oid=038&aid=0000208676
[오늘의 책<11월 26일>] 누란 이노우에 야스시 / 고려원 스웨덴의 탐험가ㆍ지리학자인 스벤 헤딘이 1952년 11월 26일 87세로 사망했다. 19세기 말 '실크로드'라는 명칭을 처음 만든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의 제자였던 헤딘은 1885년부터 여러차례 중앙아시아를 탐험했다. 그에 의해 사막에 묻혀있던 실크로드의 도시국가 누란(樓蘭)의 모습이 1,500여년 만에 다시 빛 속으로 드러났고, 히말라야와 티베트의 실체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이름부터 아스라한 울림을 주는 누란의 유적은 1902년 헤딘에 의해 최초로 발굴됐다. 기원전 2세기 중국 문헌에 최초로 나타나는 누란은 한(漢)과 흉노(匈奴)의 틈새에서 줄타기를 하며 실크로드 서역남로의 거점으로 번성한 오아시스 도시였다. 하지만 누란은 기원 5세기 무렵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헤딘은 '방황하는 호수' 설을 내세웠다. 위구르어로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땅'이란 뜻을 가진 타클라마칸 사막의 지형 변화 때문에, 누란 사람들이 깃들어 살던 이 사막 동쪽 로프노르('많은 강물이 흘러드는 호수'라는 뜻) 호수가 말라들었고, 누란도 쇠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헤딘은 로프노르 호수가 1600년을 주기로 남북으로 이동한다고 주장했다. 헤딘과 누란을 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1986년 번역된 일본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1907~1991)의 소설집 <누란>이다. 이노우에는 헤딘의 '방황하는 호수' 설과 누란의 폐허에서 발굴된 한 여인의 미라를 토대로, 누란 사람들의 사랑과 운명을 놀랍고 감동적인 상상력으로 재현하고 있다. 출판사가 문을 닫은 바람에 <누란>은 지금 절판된 상태다. 기자가 가지고 있던 책도 산실돼 버리고 없었다. 여기 쓴 표지는, 인터넷에서 수소문한 끝에 제주시 우당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책을 스캔해 얻은 것이다. <누란>을 비롯해 <둔황> <풍도> 등 이노우에의 다른 빼어난 소설도 다시 읽고 싶어진다. 재출간을 기대해 본다. 하종오 기자 joha@hk.co.kr /한국일보 2007/11/25 19:17:27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11/h2007112519172884210.htm 1941 - 미국, 추수감사절 확정 오늘의 역사 (11월 26일)[1941년 ] 미국, 추수감사절 확정 1941년 11월 26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11월 넷째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규정한 법안에 서명했다. 미국인들은 1939년 이전까지 11월 마지막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기념해 오고 있었다. 루즈벨트는 2년전 추수감사절이 끝나고 바로 시작되는 크리스마스 대목기간을 늘리기 위해 상인들이 맹렬하게 로비하자 추수감사절을 11월 셋째주 목요일로 바꾼다고 발표했었다. 하지만 경제성이 없어 주(州)마다 추수감사절을 다르게 기념해 통일성이 없어지자 의회가 넷째주 목요일로 절충안을 낸 것이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1620년 대륙으로 건너간 필그림들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그해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이듬해 풍성한 수확을 한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3일간 축제를 벌인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며 다른 설들도 존재한다. 이후 불규칙적으로 이워지던 추수감사절은 1777년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이 영국에 대한 승전을 축하하는 추수감사절 축제를 개최하고 1789년 전국적인 추수감사절을 선포하면서 그 명맥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이후 1862년 10월, 링컨은 11월 마지막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선포했다. 여기에는 '고디스 레디스북'의 부편집장인 사라 헤일의 역할이 컸는데, 그녀는 독자들에게 11월 마지막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자고 호소하고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종교계 인사 등에게 수백 통의 호소편지를 보내 추수감사절을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91125_0001
- Vladimir Komarov, Konstantin Feoktistov, Boris Yegorov 예고로프 [Yegorov, Boris Borisovich, 1937.11.26~1994.9.12] 러시아의 의사. 우주비행사 V. M. 코마로프, K. P. 페옥티스토프와 함께 1964년 10월 12~13일에 최초의 다인승 우주선인 보스호트('떠오르는 태양') 1호에 탑승하여 우주에서 임무를 수행한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1961년 모스크바 제1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소련 우주선에서 원격 측정한 의학자료를 연구하는 의사 팀에 합류했다. 내이(內耳)의 평형감각에 관한 전문가로서 보스호트 1호에 탑승하기 위해 1964년 여름에 훈련을 시작했다. 비행기간 동안(최고 고도 409㎞로 이는 당시 유인 우주선이 도달한 가장 먼 거리였음) 방사능·감금상태·무중력 그리고 우주비행의 여러 가지 상황이 자신과 다른 우주비행사들에게 미치는 효과를 측정했다. 그 비행에서 처음으로 양털로 만든 옷이 우주복 대신 쓰였다. 그는 전문 우주비행사가 아니었으므로 다시 의사라는 본업으로 돌아왔다. 보스호트 1호의 비행에서 얻은 정보와 계속된 연구로 소련의 과학자들은 인간이 장기간의 우주비행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발전시킬 수 있었다. /브리태니커
- Mongolia No.1-Scepter of Indra 몽골 인민 공화국은 소비에트 연방 다음인 두번째로 사회주의 국가가 된 나라이다. 현재는 1992년에 복수정당제를 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로 변화, 사회주의 체제를 버리고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했다. 국호도 몽골국으로 변경했다. 역사 1912년에 몽골을 지배하던 청나라가 몰락한 뒤, 몽골의 군주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중국에 대한 몽골의 독립을 선언했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자 몽골은 다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러시아 내전 때인 1920년에 벨로루시군 5,000명이 몽골을 침략했다. 그러자 담디니 쑤흐바타르가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러시아 적군(赤軍)의 도움을 얻어 벨로루시군을 격퇴시켰으며, 1921년에는 중국인들마저 몰아냈다. 1924년 11월 26일 Navaandorjiin Jadambaa가 "몽골 인민 공화국"을 건국하였다. 이때부터 소련과 몽골은 정치·경제·문화·이념적으로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중·소 관계가 악화되자 몽골과 중국의 관계도 더욱 나빠졌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완화돼, 1986년에는 몽골과 중국 사이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몽골은 1990~1991년 동유럽과 소련을 휩쓴 민주화 혁명에 동참해 주요 정치·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1992년에 복수정당제를 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로 변화, 사회주의 체제를 버리고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했다. 국호도 몽골국으로 변경했다. /위키백과
1922 - 투탕카멘(Tutankhamen) 무덤 발굴 1922년 11월 26일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왕들의 계곡에서 이집트 투탕카멘 왕(BC 1333~1323 재위)의 무덤을 발견했다. 카터는 10년 동안이나 투탕카멘 무덤의 유물 운반작업을 감독했다. 투탕카멘 왕의 무덤은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발굴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무덤이 극성스러운 도굴꾼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람세스 1세의 무덤 덕분이었다. 투탕카멘의 무덤 바로 위에 람세스 1세의 무덤을 만들 때 많은 돌 부스러기가 골짜기의 비탈을 따라 굴러떨어진 바람에 투탕카멘의 무덤이 두꺼운 토사층에 덮여 버린 것이다. 투탕카멘 왕의 미라는 3중 관 속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제일 안쪽의 관은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왕의 머리에는 찬란한 황금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이 무덤 덕분에 투탕카멘은 그보다 오래 살았거나 훌륭한 치적을 남긴 어떤 전임자나 후임자보다도 유명해졌다. /브리태니커
슐츠 [Schulz, Charles, 1922.11.26~2000.2.12] 역사속의 오늘-'피너츠' 그린 찰스 슐츠 출생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거의 50년 동안, 난 찰리 브라운과 그의 친구들을 그릴 수 있어서 매우 행복했단다. 이건 내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룬 거였으니까. 안타깝게도 난 더 이상 매일매일 이 만화를 그릴 수 없게 됐단다. 그래서 난 지금 은퇴 선언을 하는 거란다. 성실했던 에디터들과, 내 만화에 너무나 큰 도움과 애정을 보여줬던 팬들에게 나는 늘 고마웠어. 찰리 브라운, 스누피, 라이너스, 루시…. 어떻게 정말 내가 그들을 잊을 수 있겠니…."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만화 ‘피너츠’의 연재를 끝내며 찰스 슐츠(1922.11.26~2000.2.12)가 독자들에게 남긴 편지의 내용이다. 만화 제목보다는 주인공인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로 더 유명한 ‘피너츠’는 1950년부터 연재됐다. 슐츠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3~5세의 어린이들을 등장인물로 삼아 제작했다. 2000년 1월 3일 마지막 연재까지 전 세계 75개국의 2천600여 신문에 21개 언어로 번역됐다. 그런 피너츠도 인기몰이까지는 1년 여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캐릭터들도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준 경영진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운명이었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 듯.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5년 11월 25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4648&yy=2005
1919 - 미국의 과학소설(SF) 작가 프레데릭 폴(Pohl, Frederik) 출생 폴 [Pohl, Jr., Frederik George, 1919.11.26~ ] Frederik Pohl (1919~) 프레데릭 폴 미국 작가. 10대 시절부터 SF 분야에서 편집자, agent, 작가로 활동. Futurians 회원. 결혼 5번. 1911 - 미국의 체스 대가 사무엘 레셰프스키(Reshevsky, Samuel) 출생 레셰프스키[Reshevsky, Samuel Herman, 1911.11.26~1992.4.4] 미국의 체스 대가.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뛰어난 선수였다. 4세경부터 체스를 배우기 시작했고 6세 때 시범경기를 가질 정도로 체스의 신동이었으며, 9세경에는 이미 체스의 대가로서 실력을 갖추었다. 1920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정규교육을 마칠 때까지는 체스 활동을 자제했다. 1933년 시카고대학교에서 회계학학사학위를 받았으며, 1935년 중요한 국제 체스 대회에 참가하면서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그의 경기방식은 특히 방어에 있어서 끈질기고 임기응변의 재주가 뛰어났다. 주요저서로는 〈체스에 얽힌 레셰프스키 Reshevsky on Chess〉(1948)·〈체스 경기에서 이기는 법 How Chess Games are Won〉(1962)이 있다. /브리태니커 1909 - 루마니아 태생의 프랑스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Ionesco, Eugène) 출생 이오네스코 [Ionesco, Eugène, 1909.11.26~1994.3.28] 외젠 이오네스코 (Eugène Ionesco, 1909년 11월 26일~1994년 3월 28일)는 실존주의파에 속하는 프랑스의 시인·소설가·극작가이다. 루마니아계 프랑스 사람으로 루마니아의 스라티나(ro)에서 태어났다. 루마니아식 이름은 에우젠 이오네스쿠(Eugen Ionescu)이다. 유년시대는 프랑스에서, 청년시대는 루마니아에서 보냈고 1938년 이후 파리에 정주하였다. 1950년 <대머리 가희>(부제 <반희곡>)가 상연된 이래 이른바 반연극파(反演劇派)의 선단에 섰다. 이후 <수업> <의자> 등의 뛰어난 단막물로 종래의 것과는 좀 다른 초현실주의적인 희곡을 차차 인식시키고, 그 후에는 <무소> <빈사(瀕死)의 왕> <갈증과 기아> 등의 장막물(長幕物)로 국립극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앙티테아트르 작가로서 베케트와 더불어 호칭되고 오늘날에 와서는 프랑스의 대표적 극작가로 확고한 명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은 초기의 전위적 부조리극, 가령 <수업>(1951), 중기의 <무소(犀)>(1960) 등 사회풍자극과 <빈사(瀕死)의 왕>(1962) 등 내면적 작품의 3기로 나눌 수가 있다. 초기의 작품일수록 대담하며, 일상적인 회화(會話)를 해체하여 그 무의미성을 폭로하기도 하고, 의자를 무대 일면에 늘어놓음으로써 신이나 진실 또는 사상의 공허함을 표현하거나, 사람을 무소로 변신시킴으로써 현대 획일화(劃一化)의 공포를 우화화(寓話化)하기도 했는데, 항상 라틴적인 경쾌한 리듬을 잊지 않았다. 그는 연극의 줄거리·성격·언어를 해체하는 것으로 연극의 에센스를 뽑아내서 전 세대의 실험적 쉬르레알리즘 연극에 풍요한 넌센스 유머를 부여함으로써 대중화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었으며 1977년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위키백과
오늘의 역사 (11월 26일)[1906년] 1906년 11월 26일 일본 정부가 자본금 2억엔 가운데 반을 출자한 반관반민 회사 '만철(滿鐵)'이 도쿄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초대 총재는 대만 총독부 민정장관 고토 신페이가 선출됐다. (고토는 푸순(撫順)탄광을 개발하고 다롄항을 건설하는 등 만철 왕국의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만철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약자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은 동청(東淸) 철도 구간 중 남쪽지역인 다롄(大連)에서부터 창춘(長春)까지의 철도관리를 위해 설립된 회사였다. 1907년 영업을 시작한 만철은 안산제철소, 다롄 기계제작소 등 대형계열사를 설립하고 만주 구석구석에 지선을 만들며 만철을 아시아 대륙 침략의 첨병으로 발전시켰다. 만철은 전성기 때 종업원이 4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는데 일본 최고의 두뇌집단인 여러 조사 연구기관의 도움이 컸다. 실제로 1907년 4월에 설치된 조사부는 만철 성장의 열쇠였고 만철과 관동군을 잇는 연결고리였다. 조사부는 만주사변 발발 이듬해인 1932년 '만철 경제조사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만철은 관동군의 수족이 되고 조사부는 두뇌 역할을 하며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경제조사회가 추진한 석유.석탄.철강.화학산업에 대한 관료통제 사상은 2차 세계대전 후 관료주도경제로 고도성장을 일군 일본의 독자적인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철도산업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 1910년부터는 시베리아 철도를 경유해 유럽까지 가는 국제열차를 운행했고 1934년에는 다롄과 창춘의 700km를 시속 100km로 달리는 초특급열차 '아시아호'를 선보이기도 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327_0004
1902 - 한국 영화의 선구자 나운규(羅雲奎) 출생 나운규 [羅雲奎, 1902.11.26~1937.8.9] 나운규는 영화 제작자·감독·배우·시나리오 작가 등 다방면에 걸쳐 활약한 일제강점기 선구적인 영화인이다. 단역배우로 몇몇 작품에 출연하다가 윤백남프로덕션이 제작한 <심청전>에서 심봉사 역을 하면서 배우로서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1926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이 제작하고 이규설(李圭卨)이 감독한 <농중조 籠中鳥>에 복혜숙과 함께 출연했다.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아리랑>이 예술성을 인정받고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나운규는 영화계의 총아로 부각되었다. 그후 <풍운아>(1926)·<들쥐>(1927)·<금붕어>(1927)를 만들었으나 흥행에 실패했고, 조선키네마프로덕션과 불화가 생기자 결별했다.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이라는 영화사를 세워 <잘 있거라>(1927)·<옥녀>(1928)·<사나이>(1928)·<벙어리 삼룡>(1929) 등 5편의 영화를 만들어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단원들과의 잦은 불화와 자금난으로 나운규프로덕션은 해산되고 말았다. 1930년 <아리랑 그후의 이야기>, 1936년 <아리랑 3편>의 발성영화에 이어 <오몽녀 五夢女> 등을 제작했으나 폐결핵이 악화되어 죽었다. 1990년 영화감독위원회는 그의 업적과 영화정신을 기려 춘사영화예술상을 제정했다. /브리태니커 (10월 17일자) (나운규의 생일은 10월 17일, 10월 27일, 11월 22일, 11월 26일 등으로 명확하지 않았으나, 음력 10월 27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11월 26일로 공식화 되었습니다. *_@)
"살찐 전답과 / 아름다운 산천을 / 자랑하던 백성들이 / 길고 긴 세월에 쌓인 / 설움의 시를 / 읊으려 한다." - 나운규, <아리랑>에서
치글러 [Ziegler, Karl, 1898.11.26~1973.8.12] 카셀 부근의 헬자 출생. 저압(低壓) 폴리에틸렌합성법의 발명자로 유명하다. 1920년 마르부르크대학을 마치고, 1923∼1945년 마르부르크대학교·하이델베르크대학교·할레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5∼1969년 막스 플랑크 연구소(舊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석탄화학 분야에서 유기금속화합물을 연구하던 중에 트리에틸알루미늄과 사염화티탄을 촉매(치글러나타촉매)로서 이용하면 통상적인 온도·압력하에서 에틸렌중합이 급속하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발견(1953), 저압법으로 폴리에틸렌을 제조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이 제조 기술은 고분자화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이 연구로 G.나타와 함께 1963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naver
바트예 베레스 [Batlle Berres, Luis, 1897.11.26~1964.7.15] 1947~51년 대통령을 지냈고, 1953~54년 최고 행정관을 역임했다. 호세 바트예 이 오르도녜스의 조카로서 민주주의와 시민권을 옹호하고 권위주의적인 라틴아메리카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을 공공연히 바난한 것으로 유명했다. 1923~33년, 1942~47년 하원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43~45년 하원의장을 지냈다. 1946년 부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토마스 베레타 대통령이 직무중에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의 안정적이고 평온한 통치는 대규모 외국인투자유치에 도움이 되었다. 행정부를 9인 의원회로 구성하는 새로운 통치구조가 마련된 후 바트예는 1953, 1954년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58년 11월 총선에서 자신의 콜로라도당이 야당인 블랑코당에게 참패한 직후인 1959년까지 위원회 위원으로 계속 활동했다. 1948년 〈약시온 Acción〉을 창간하여 정치적 소신을 발표해왔으며 라디오 방송국 '아리엘'을 운영했다. /브리태니커
1883 - 한-영, 한-독 통상조약 체결 1883년 오늘! 우리나라는 유럽국가 가운데 영국, 독일과 통상조약을 각각 체결한다. /YTN 2012-11-26
버비치(바비치) [Babits, Mihály, 1883.11.26~1941.8.4] 부다페스트대학을 나와 지방에서 교원 생활을 하면서 시단(詩壇)의 인정을 받아, 아디와 더불어 20세기 초엽의 상징파를 대표하였다. 아디 사망 후에는 서구파의 문예지인 《서양(西洋)》을 주재하여 문단에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제1 ·2차 세계대전 동안의 지식인의 불안과 회의가 담긴 시집을 몇 편 내놓았으며, 소설 《티마르빌기르의 아들》(1922)에서도 지식인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이 엿보인다. 넓은 유럽적인 교양에 입각해서 쓴 《유럽 문학사 Az europai irodalom tortenete》(1934)도 유명하다. 이 밖에 시집 《서창부(敍唱部) Recitativ》(1916)와 소설 《죽음의 자식들 Halal fiai》(1927)이 있으며, 번역한 단테의 《신곡(神曲)》도 있다. /naver 1883 - 미국의 인권 운동가 소저너 트루스(Truth, Sojourner) 사망 트루스 [Truth, Sojourner, 1797~1883.11.26] 본명은 Isabella Van Wagener. 미국의 흑인 전도사·사회개혁가. 종교적 열정을 바탕으로 노예제폐지와 여권운동에 힘썼다. 그녀는 노예로 태어나 어린시절 주인들의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1810~27년 같은 처지의 노예 토머스와의 사이에 5명의 아이를 낳았다. 1827년 노예제가 폐지되기 직전 아이작 밴 와그너에게 노예로 팔렸으나 해방되었다. 퀘이커교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불법적으로 남부에 팔려간 아들을 찾기 위한 법정투쟁을 벌였으며, 1829년경 가장 어린 두 아이와 함께 뉴욕으로 가서 가정부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어린시절에 하느님의 형상과 음성을 경험한 뒤 신앙에 귀의했다. 뉴욕 시에서 열성적인 전도사인 일라이저 피어슨과 알게 된 뒤, 거리에서의 설교활동 외에도 피어슨의 검약공동체에 가입, 나중에는 그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1843년 뉴욕을 떠난 뒤부터 소저너 트루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국을 순회하라'는 계시에 따라 곳곳을 다니면서 야외집회와 교회·가두에서 노래·설교를 하거나 논쟁을 벌였으며, 사람들에게 성서의 전갈인 신의 선함과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사상을 받아들이도록 전했다. 같은 해 매사추세츠 주 노샘프턴의 이상주의적 공동체에서 인종차별 폐지운동을 접하게 되면서 인종차별 폐지를 주제로 전국 순회 설교를 했다. 1850년 중서부 여러 곳을 순회했는데, 좋은 평판을 얻어 많은 군중이 모였다. 그녀는 올리버 길버트에게 구술하여 쓴 〈소저너 트루스의 설교 The Narrative of Sojourner Truth〉를 출판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1850년대초 여권운동을 접하게 되었으며 저명한 여성 지도자 루크리셔 모트의 영향을 받아 여성참정권 운동 집회에 참여했다. 1850년대 트루스는 미시간 주 배틀크리크에 정착, 남북전쟁 초기에 흑인 지원부대를 조직했으며, 1864년 워싱턴 D. C.로 가서 전차에 흑인과 백인이 분승하는 것을 폐지하는 데 앞장선 공로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으로부터 백악관에 초대받았다. 같은 해 그녀는 전국자유인구제협회로부터 노예의 근절과 재정착문제를 상담하는 역으로 임명되었다. 1870년대말 다수의 해방노예가 캔자스와 미주리로 이주하는 것을 도왔고, 1875년 배틀크리크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브리태니커
- 'Talent', 1910
1868 - 러시아 화가 보그다노프 벨스키(Bogdanov-Belsky, Nikolay) 출생 보그다노프 벨스키 [Bogdanov-Belsky, Nikolay Petrovich, 1868.11.26~1945.2.19] Nikolay Petrovich Bogdanov-Belsky (Russian: 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Богда́нов-Бе́льский; 1868-1945) was a Russian painter. Bogdanov-Belsky was born in the village of Shitiki in Smolensk Governorate in 1868. He studied art at the Semyon Rachinsky fine art school, icon-painting at the Troitse-Sergiyeva Lavra in 1883, modern painting at the Moscow School of Painting, Sculpture and Architecture in 1884 to 1889, and at the Imperial Academy of Arts in St. Petersburg from 1894 to 1895. He worked and studied in private studios in Paris in the late 1890s. Bogdanov-Belsky was active in St. Petersburg. After 1921, he worked exclusively in Riga, Latvia. He became a member of several prominent societies in including the Peredvizhniki from 1895, and the Arkhip Kuindzhi Society from 1909 (of which he was a founding member and chairman from 1913 to 1918). Bogdanov-Belsky painted mostly genre paintings, especially of the education of peasant children, portraits, and impressionistic landscapes studies. He became pedagogue and academician in 1903. He was an active Member of the Academy of Arts in 1914. Bogdanov-Belsky died in 1945 in Berlin. http://en.wikipedia.org/wiki/Nikolay_Bogdanov-Belsky
- Early electric streetcar, Montgomery, Ala., 1886 1849 - 뉴욕에서 미국 최초의 전차 운행 개시 1820년대에 맨해튼의 주요 도로에는 말이 끄는 합승마차가 다녔다. http://blog.daum.net/_blog/BlogView.do?blogid=04ngD&articleno=10957858#ajax_history_home
1832 - 미국의 군의관 매리 워커(Walker, Mary) 출생 워커 [Walker, Mary Edwards, 1832.11.26~1919.2.21] Mary Edwards Walker (November 26, 1832 – February 21, 1919) was an American feminist, abolitionist, prohibitionist, alleged spy, prisoner of war and surgeon. She is the only woman ever to receive the Medal of Honor. Prior to the American Civil War she earned her medical degree, married and started a medical practice. The practice didn't do well and she volunteered with the Union Army at the outbreak of the American Civil War and served as a female surgeon. She was captured by Confederate forces after crossing enemy lines to treat wounded civilians and arrested as a spy. She was sent as a prisoner of war to Richmond, Virginia until released in a prisoner exchange. After the war she was approved for the United States military's highest decoration for bravery, the Medal of Honor, for her efforts during the war. She is the only woman to receive the medal and one of only eight civilians to receive it. Her medal was later rescinded based on an Army determination and then restored in 1977. After the war she was a writer and lecturer supporting the women's suffrage movement until her death in 1919. Early life and education
마운트 [Mount, William Sidney, 1807.11.26~1868.11.19] 미국의 풍속화가. 주로 고향인 롱아일랜드의 전원생활을 목가적으로 묘사했다. 19세기에 가장 뛰어난 미국의 풍속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7세까지 농가의 평범한 소년이었던 그는 뉴욕에서 간판공으로 일하는 맏형 헨리 밑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둘째 형 셰퍼드 얼란조(1804~68)도 뉴욕으로 와서 형제들과 합류했는데, 그는 나중에 초상화가가 되었다. 1826년에 전국 디자인 협회가 소묘 강좌를 개설하자 마운트는 첫번째 수강생으로 이 강좌에 등록했으나 1년을 다닌 뒤 고향 세토켓으로 돌아가 그림을 그려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1832년에 디자인 협회 준회원이 되었고, 1833년에는 정식 회원이 되었다. 마운트는 역사적 주제를 다루는 화가로 출발했다. 그의 첫번째 풍속화인 〈시골 춤 The Rustic Dance〉(1830)은 곧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평생 동안 이 분야를 떠나지 않았다. 시골생활에 대한 애정과 익살이 뒤섞인 그의 따뜻한 묘사는 지나간 농경시대를 기록한 귀중한 자료이다. 마운트의 그림은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상황묘사와 자세한 부분까지 꼼꼼히 재현한 구상적 특성으로 빅토리아 시대 미국인들의 민감한 정서에 호소했다. 마운트는 주제를 감상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자연스러움과 소박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브리태니커
[어제의 오늘]1789년 미국,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ㆍ이주민·인디언 '우정의 축제' 추수감사절을 상징하는 음식은 노릇노릇하게 구운 칠면조 요리다. 하지만 일부 미국 가정에서는 구운 칠면조와 함께 옥수수 5개를 추수감사절 식탁에 올려놓기도 한다. 신대륙에 처음 이주한 청교도들은 첫번째 수확을 한 1621년 가을까지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며 원주민들이 제공한 옥수수로 연명해야 했다. 당시 한 사람의 하루 식량이 옥수수 5개였다. 지금의 풍성한 추수감사절 저녁 식탁에 올려진 옥수수 5개는 오늘날 미국이 있게 한 선조들의 고난을 되새기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신모기자 /경향신문 2008-11-25 17:59:2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1251759425
[중앙 시론] 추수감사절의 두 얼굴 미국의 추수감사절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우선 시기가 11월말이니 '추수' 감사로는 좀 늦다.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그저 부활절이나 성탄절 같은 기독교 고유의 명절로 알고 지내지만 겨레 고유의 명절인 추석과 중복되기도 하고 추수시기와도 잘 맞지 않기 때문에 일부 교회에서는 추석 즈음에 추수감사절을 지내는 '토착화'를 시도한다. <조동호/퀸즈칼리지 사회학 교수> /뉴욕 중앙일보 11.20.06 18:48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440672
1607 - 하버드대학의 기여자(확립자) 하버드(Harvard, John) 출생 하버드 [Harvard, John, 1607.11.26~1638.9.14] 뉴잉글랜드의 식민지 개척자. 그의 유증으로 하버드대학교 설립의 확고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아버지는 도살업자였으며, 어머니는 가축상인이자 스트랫퍼드온에이번 참사회원의 딸이었다. 1625년 유행한 흑사병으로 아버지와 형제자매 대부분이 죽었다. 재혼한 어머니와 의붓아버지는 1627년 그를 케임브리지에 있는 에매뉴얼대학에 입학시켰다. 1631년 졸업하고 1635년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637년 결혼해 이듬해 뉴잉글랜드로 갔다. 1637년 11월 2일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 찰스타운의 공민이 된 그는 이곳에서 곧 학식 있고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찰스타운 '제1교회'의 부목사로 봉직했으며, '자유 총람'(Body of Liberties) 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영국에서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으므로 당시의 식민지 사람들보다는 분명히 부유했다. 그가 찰스타운에 온 지 1년도 채 안 되어 결핵으로 죽었을 때 1,600파운드에 달하는 재산을 남겼다. 그의 유언에 따라 재산의 절반이 그가 수집한 고전 및 신학 문헌과 함께 인근 뉴타운에 최근 설립된 학교에 기증되었다. 뉴타운은 이내 케임브리지로 명칭이 바뀌었다. 1636년에 설립된 이 학교는 하버드의 기부금으로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매사추세츠 입법의회는 1639년 최초의 거액 기금 헌납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교명(校名)을 하버드대학교로 정한다는 것을 선포했다. 하버드대학교 동문들은 1828년 화강암으로 된 존 하버드 기념비를 건립했으며, 1884년에는 에드워드 에버렛이 붙인 호칭대로 '미국의 학문과 종교를 위해 영원히 기억될 후원자'의 좌상이 교정에 세워졌다. /브리태니커
이사벨라 1세 [Isabella I, 1451.4.22~1504.11.26]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에 비견되는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이 태어났을 무렵, 스페인은 최대 왕국 카스티야와 아라곤, 그라나다, 나라바 이렇게 네 왕국으로 분열돼 있었다. 때문에 각각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위 후계자였던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의 결혼은 스페인 통합을 향한 중대한 첫 걸음이었다.
1394 - 이성계, 한양 천도 시작 공양왕 4년(1392년) 7월 개성에서 조선조를 창건한 태조 이성계는 곧 한양천도를 명했다. 풍수지리상 개성에 이어 두번째로 좋다는 길지(吉地)인데다 교통이 편리해 효율적인 중앙집권정치가 가능하다는 점을 내세웠지만 내심으로는 무조건 개성을 떠나고 싶어했다. 반대세력이 허다한데다 개국과정에서 많은 정적들의 피가 뿌려진 개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신하들의 입장은 달랐다. 오랫동안 터잡고 살아온 개성을 떠나는 것이 좋을 리 없었던 그들은 “한양에는 새 궁궐도 없어 관원들이 민가를 빼앗으면 백성은 어디로 가느냐”는 명분을 내세워 천도를 반대했다. 멈칫했던 이성계가 다시 한양천도를 확정지은 것은 2년 뒤인 1394년 8월이었다.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고 새로운 수도의 도시계획을 명한뒤 그해 늦가을 천도를 단행했다. 11월 26일(음력 10월 25일) 왕실과 문무백관을 이끌고 개성을 출발한 이성계가 한양에 당도한 것은 11월 29일이었다. 600년 `서울시대`의 개막이었다. /조선 [책갈피 속의 오늘]1394년 이성계 한양천도 610년 전 오늘, 태조 이성계가 왕실과 문무백관을 이끌고 개성을 출발한다. 사흘 뒤 일행이 한양에 당도하면서 ‘서울시대’가 열린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272310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