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_ 변동
나는 다 씻고 나와서 옷을 입고 거실로 나갔다. 시간은 벌써 열두시 반.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렸고 가끔 천둥번개도 쳤다.
"엄마랑 아빠, 오늘 못오신대."
"또 일때문에 바쁘신거야?"
"으응, 그건아니고 지금 섬에 있는데 비가 너무 많이와서 배가 끊겼대. 언제 올지 모른다는데.."
뭐, 아저씨랑 아줌마가 안들어오시는 일은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다.
연구때문에 못오시는 것도 일주일에 몇번이나 있었던 적도 있고.
-두두두두.
조용한 집 안에 빗소리만이 영향을 준다.
난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컵에 따랐다.
"마실래?"
"으응, 됬어."
"그러냐."
꿀꺽꿀꺽. 후, 역시 목욕하고 나와서 먹는 찬우유는 최고야.
내일은 토요일이었나. 학교는 안가도 되겠군.
이런 걸 생각하는데,
-번쩍!
-콰광!
-팟!
강한 빛이 번쩍이더니 집안이 깜깜해졌다.
"꺅!"
남희가 비명을 지른다.
번개에 맞아서 차단기가 내려간건가?
"아직 움직이지 마. 안보여서 다칠 수도 있어."
"으..으응."
"눈을 꽉 감고 10초를 센 다음에 떠 봐."
어둠에서 시야적응 하는 고전적인 방법이다.
인간의 홍채는 밝을때는 작아지고 어두울 때 커지는데 밝은 곳에서 갑자기 어두운 곳으로 이동하면 홍채가 확장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근데 그딴건 아무 상관 없고, 10초 지났나?
눈을 뜨니 어스름하게 사물의 형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때, 이제 좀 잘 보이지?"
"응.. 그런 것 같아."
아마 차단기는 집 밖에 있을 텐데, 이런 빗속에선 무리겠지. 내일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내일 봐 볼 테니까 일단 오늘은 자자."
"응, 알았어."
나는 남희의 손을 잡고 2층까지 올라갔다.
"잘 자."
"에릭도 잘자~"
나는 방 문을 닫고 들어왔다.
원래 항상 새벽까지 컴퓨터를 하다 자곤 했는데,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그냥 자야겠군.
나는 그대로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평소보다 몇배는 더 몸을 많이 움직인 것 같다. 몸이 상당히 피곤했다.
-똑똑.
그때, 내 방문이 노크되었다.
"저기, 에릭.. 자?"
"아니, 왜?"
"조금 잠이 안와서... 들어가도 돼?"
"밤에 남자방에 혼자 찾아오다니, 각오는 되있겠지?"
"에릭은 그런 짓 안하니까 괜찮아."
어이, 혹시 날 고자로 알고있는 거 아냐?
-끼익.
문이 열렸다. 남희가 베개를 안고 들어왔다.
물론 전기가 나갔기 때문에 거의 형체밖에 보이지 않지만.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남희는 침대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아무래도 그런 일을 당한 뒤라 말이지... 잠이 안와서.. 헤헤.."
당연하다. 이녀석에겐 과거에도 비슷한 일을 당한 트라우마가 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하고있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불안하겠지.
"있잖아, 에릭."
"...응."
"내일... 뭐해?"
"내일은 좀 바빠. 컴퓨터로 웹서핑도 해야되고, 게임도 해야되고, 커뮤니티도 들어가봐야 되고..."
"... 그거 계획 없다는 소리지?"
"......"
쳇, 들켰군.
"내일 나랑 시내에 좀 같이 가줄래?"
"시내? 왜, 먹는거라면 이 주위에도 많이 있잖아."
-퍽.
베개로 맞았다.
"데이트 하자는거야, 데이트."
"데이트라니.. 그건 연인들끼리만 하는 특수이벤트 아냐?"
"꼬..꼭 연인 아니라도 할 수 있어!"
강하게 부정해왔다. 연인이 아닌 사람끼리라도 데이트라고 하는게 맞는건가? 잘 모르겠군.
"으음, 그럼 내일 산소의 분자량이 5로 줄어들면 한번 생각해보도록 할게."
"그거,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
... 어떻게 알았지?
"너가 말하는 건 뻔하다니까."
왠지 자랑스럽게 말했다.
다행히도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닌 것 같다. 휴, 놀랬네. 이녀석이 생각을 하는 것만큼 놀라운 일은 이 세상에 없을거다.
".... 에릭, 방금 머릿속으로 날 개무시했지?"
"무..무슨소릴까나."
이런, 생각을 읽힌건가? 이녀석, 언제부터 독심술을 배운거냐.
"왠지모르게 알았어. 나도 그정도는 안다구."
"아..하하.."
하여간, 평소에는 바보인 주제에 이럴때만 날카롭다니까.
"아앗! 또 무시했어!"
-퍽. 퍽.
으악! 이녀석, 진짜로 독심술 배운거 아냐?
"하여간, 에릭이 날 무시할 때는 표정이나 행동으로 다 나온다고."
...아무래도 나도 모르게 그런 액션을 취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근데 그런 행동이라는게 뭐지?
"알았어.. 가면 되잖아."
"히히. 약속한거다?"
남희가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아무리 그래도 나도 남자라고. 너무 무방비한거 아냐?
"Zzz.."
그보다 벌써 잠들었고.
나는 남희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온 다음 남희에게 이불을 덮어줬다.
바닥에서 자는 수밖에 없는데.
나는 하는 수 없이 벽장에서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고 누웠다.
그리고 얼마 안가 나도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음날 아침.
익숙하지 않은 바닥에서 자서 그런지 나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으음.."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시각은 6시 45분. 너무 빨리 일어났나.
밖은 여전히 구름이 짙게 껴서 우중충했고 굵은 비가 내렸다.
-두두두두..
이래서야 외출은 무리겠는데..
"코오~"
침대에서 태평하게 자고있는 녀석을 쳐다봤다.
.... 이렇게 입만 다물고 있으면 귀여운데 말이지.
나는 일어나서 방 밖으로 나왔다. 차단기나 보러 가야겠다.
-철컥.
현관 밖으로 나가니 강한 비바람이 불어왔다. 아직 5월달인데, 벌써 태풍이 온건가?
우산을 한 손에 들고 집 옆의 차단기로 가서 뚜껑을 열어보았다.
"역시.."
차단기가 내려가있었다.
-탁!
차단기를 올리고 나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 전기가 나가기 전 상태 그대로 주방 불이 켜져있었다.
뭐라도 해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
뭔가 엄청나게 물이 생겨있었다.
그러고보니 전기 끊기면 냉장고도 멈추지. 생각을 못했다. 어제 무리해서라도 차단기를 보러 갔어야했나.
이건 먹으면 배탈 날 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2층으로 올라가 내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아직 태평하게 자고있는 생물이 한마리.
나는 이불을 확 걷어냈다.
"...후에?"
생물이 눈을 떴다.
"일어나, 벌써 아침이야."
"우응..."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다.
"하아아암.."
"일단 말해 둬야 할 게 있어."
"응?"
"사실 어젯밤, 너랑 내가.."
"...!!"
후다닥.
남희가 갑자기 침대 구석으로 도망갔다.
"여..역시 나한테 뭔 짓을 한거지! 어쩐지 내가 이런데서 자고있다 했어..!"
"...아무일도 없었어."
"지..진짜로?"
"것보다, 지금 냉장고가 전멸했어. 어제 전기가 나가서 그랬나봐. 지금 아마 안에 있던 것들 다 상했을지도 몰라."
"헐.. 그건 좀 큰일인데.."
"아침도 사먹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어떡할래?"
"으음....그럴까나..."
"일단 밖에 나가자. 얼른 준비하고 나와."
"응!"
매우 기쁜듯이 후다닥 달려나갔다. '매우' 기쁜듯이.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이불을 개서 벽장에 넣고 1층으로 내려갔다.
화장실은 1층에 있다. 일단 세수라도 할까.
-덜컥.
화장실 문을 연 나는 봐서는 안 될 것과 마주쳐버렸다.
"......"
"......"
시간이 멈췄다.
어.. 그러니까...
나는 그저 세수를 하려고 화장실 문을 연 것 뿐이고?
남희는 자기 방으로 간 줄 알고있었고? 설마 안에서 씻고 있다 라는 건 절대 몰랐었고?
그리고 상식적으로 씻고있다면 문을 잠그는게 상식이잖아?
따라서 이건 불가항력이고, 내 잘못은 아닌거지?
그래도 일단 사과하는게 맞는건가?
노크 안한 나도 잘못했고, 일단 여자애니까 내가 신경을 써줬어야 하는 부분이고.
아니, 애초에 이런 만화나 애니같은 장면이 내 눈앞에서 일어날리가 없잖아? 이건 꿈인가?
이대로 사과하고 사과를 받아주면 나가면 되는건가? 아니면 당장 뒤돌아서 나가야 맞는건가?
그래, 일단 사과를..
"저기..그..."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샴푸통이나 비누, 이런 것들이 날아올 줄 알았는데.. 내게 날아온 건 뜻밖에도, 정말 뜻밖에도 벽돌이었다.
이 집 목욕탕에 저딴게 있었나!?
-후웅!
벽돌이 눈 앞으로 빠르게 날아왔다. 크윽, 빨리 강화를!
-퍼억!
아, 갑자기 온 세상이 까맣게 물들었다. 18세 꽃다운 나이에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건가..
그것도 사망 사유는 소꿉친구의 목욕장면을 실수로 목격해서.. 하.. 정말 쪽팔리는 사인이구만.
젠장, 남희를 살인자로 만들어 버렸군. 미안하다.
사람이 죽을땐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했는데, 그말은 정말이었나보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영화필름처럼 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으윽, 아직 해보지 못한 것들이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있는데......
나는 더이상 생각하는 걸 할 수 없었다. 안녕, 나의 아름다운 인생이여.
Goodbye, My wonderful life.
[BAD END]
......
"하!"
나는 벌떡 일어났다, 나는 화장실 문 앞에 쓰러져있었다.
"에릭! 정신이 들었어?"
"뭔가 깊은 잠을 잔 거 같은 기분이... 윽!"
머리가 아프다. 정확히는 이마 부분이 매우 욱씬거린다.
"나는 뭘..."
"다행이다.. 죽은 줄 알고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되나 걱정하던 참이었어."
..... 어이.. 뒤숭숭한 일을 말하지 말라고.
이마에는 거즈가 붙어있었다.
"이거.. 너가 붙여준거야?"
"으..응. 일단은 내 잘못이기도 하고.."
"하아.. 겨우 알몸한번 보였다고 벽돌까지 날리다니.. 덕분에 죽을 뻔했다고."
"겨... 겨우?! 애초에 에릭이 확인도 안하고 들어온게 잘못이잖아!?"
"그 짧은 시간 안에 욕실까지 가서 옷을 벗고있을 거란걸 상상이나 했겠냐!"
"그치만! 배고파서 빨리 준비 안하면 굶어 죽는다고!"
"아휴...그래, 내가 다 잘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짧은 기간만에 굶어 죽지는 않는다고..
"그래서, 지금 몇시야?"
"지금? 여덟시."
응? 생각보다 별로 안지났네?
"그래서, 다 씻긴 씻었어?"
"아니.. 너가 쓰러져있는데 어떻게 태평하게 씻을 수가 있겠어.."
"....그럼 빨리 씻고 나와. 난 다른 준비 하고있을 테니까."
"알았어~"
남희는 욕실 문을 닫고 들어갔다.
자, 그럼.. 일단 갈아입을 옷이나 챙겨둘까.
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내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책상위에 왠 못보던 긴 흑발의 여자애가 다리를 꼬고 걸터 앉아있었다.
"......"
나는 다시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몇초 있다가 다시 방문을 열었다.
그랬더니 그 여자애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있었다.
"휴, 요즘 너무 지친건가... 이제 헛것이 다 보이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별일 아냐...... 우와악!"
갑자기 그 여자애가 내 뒤에 서있었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언제 이동한거지...? 혹시 순간이동이라도 했나?
"아하하, 역시 많이 놀라는군요."
"누...누구야! 넌!"
"닌자입니다요. 슈슝."
"닌자...? 그딴게 우리나라에 있을리가 없잖아! 헛소리 말고 너 진짜 누구야!?"
"으음... 글쎄.. 뭐라 설명하면 좋을까요..."
그 여자애는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무래도 이상한게 쳐들어 온 것 같다.
"비밀요원... 일까요? 일단은요."
"비밀요원? 어디의? 것보다 방금은 어떻게 한거야? 난 분명 문을 닫았고 넌 나올 틈이 없었을텐데?"
"노노, 그건 기업 비밀이라 가르쳐줄수는 없어요, Baby★"
...... 귀찮다. 매우 심각하게 귀찮다.
나는 머리를 감싸안았다.
"어, 왜그래요? 무슨 골치아픈 일이라도 있나봐요?"
그래.. 있지.. 바로 내 눈앞에 말이야.
"저기.. 도데체가 무슨일인지 이해가 전혀 되지 않지만... 일단 이 집에서 나가주지 않을래? 아무래도 넌 집을 잘못 찾아온 것 같아. 난 평범한 인간이고 비밀요원이 방문할 만한 이유같은건 하나도 갖고있지 않다고."
"어? 아닌데요... 너 이름 에릭 맞지요?"
"맞는데.."
"그럼 잘못 찾아온 건 아니에요! 히히."
"... 나에게 뭔 볼일이라도 있는거야?"
"흐흥. 있고말고요. 천재해커 에릭님."
"......!"
이녀석이 내가 해커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난 분명 해킹할 때는 언제나 아이피 우회를 하고있었는데?
삼중이나 우회한 아이피를 추적한다는 것은 이미 개인이 어떻게 할 만한 영역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추적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추적을 당한 내 컴퓨터에는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남을텐데...
아니, 것보다 앞에 천재라는 수식어를 붙였어. 이녀석, 퍼지넷을 알고있는건가?
"아니면 심판의 손가락이라고 불리는 편이 더 좋으신걸까요? 아니면 백의의 해커?"
"..... 누구야.. 너..."
"으음... 아까 비밀요원이라고 말했을텐데요. 잘 못들은 걸까요? 한번 더 말해줄까요?"
"... 어떻게 내가 해커라는 사실을 알고있지?"
"으음... 글쎄요.. 지금은 뭐라 해줄 말이 없네요... 궁금하다면 이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세요."
자칭 비밀요원이 나에게 흰색 편지봉투 하나를 건넸다.
"이건?"
"그 번호로 전화를 거시면 이쪽에서 마중을 나갈거에요. 우리 마스터의 명령이라서요. 난 그저 전해주러 온것뿐이에요."
나는 편지봉투를 뜯었다.
거기엔 덩그러니 어떤 번호만 써져있었다.
"되도록 빨리 거는게 좋을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마스터, 그렇게 기다리는걸 잘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럼 난 전해야 될 건 다 전했으니 이만!"
그 자칭 비밀요원은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어이, 여기, 2층이긴 한데 꽤 높다고...
것보다 밖에는 지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우산도 없이 괜찮은건가?
아... 머리아파.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난 옷을 갈아입고 일층으로 내려갔다.
첫댓글 짱!
제 소설 전체에서 첫 댓글이네요! ㅋㅋ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