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소설의 환상적 경향과 그 의미
- 거대 담론의 상실과 환상의 강화 양상을 중심으로
유 철 상
(서울대 강사)
1. 들어가는 말
흔히 소설을 성숙한 남성의 문학으로 봄은 형식 일반이 경험적인 현실을 초월해 있는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반면, 소설형식의 경우도 선험성이되 경험적 현실을 받아들임을 원리로 삼고 있음에 기인한다. 소설형식이란 선험성 내부에 경험성이 들어 있는 의미내재성의 형식이다. 드라마의 경우 본질적인 것에 의미나 이념이 있고 이를 통해 현실을 비추는 데 비해 소설은 경험적 현실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따라서 소설을 통해 본질을 추구하며 초월의 영역, 즉 황홀경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의미가 떠난 현실에서는 추구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을 뿐이다. 추구해야만 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다는 이 역설은 소설 형식이 결국은 경험현실의 진흙탕 속에서 뒹굴어야 한다는 숙명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성숙한 남성 형식으로서의 소설형식이 지시하는 의의는 본질적인 것, 달리 말해 의미란 과거적 의미에 지나지 않음에 있다. 따라서 신이 사라진 시대, 지나간 것(청춘)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겠지만 그럼에도 그에 슬퍼만 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미래 역시 두근거릴 정도의 큰 기대도 아닌 상태에 대한 냉철한 판단 형식을 이르는 말이다. 청춘을 잃었다고 슬퍼할 수만은 없되 또 별다른 것도 없음에서 오는 주체와 현실세계 모두의 삭막함이야말로 소설을 소설이게 하는 기둥인 셈이다. 다시 말해 의미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 그것은 바로 시간이며, 소설의 내적 형식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반면 이를 무시할 경우, 예컨대 환멸의 낭만주의에서는 시간과의 싸움이 내면이나 과거로만 도피하기에 냉혹하고 삭막하기만 할뿐인 삶의 원리가 포착되지 않는다. 제2의 자연으로서의 삶의 원칙은 의미가 떠난 상태에 불과하다. 역으로 소설에서 본질적인 것이나 의미만 추구하다보면 삶의 원칙을 떠난 시적, 드라마적 상태에 그친다. 이러한 이율배반을 조정해 주는 것이 소설 원리로서의 아이러니로 지칭된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일반적인 소설 규정이 통하지 않는 특이한 작품들이 양산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이론적 논의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본고에서 최근이라 함은 지난 80년대 말에서부터 지금까지의 대략 10여 년 전후를 지칭하고자 한다. 물론 한국 현대문학사에 있어서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일반적으로 10년을 단위로 끊어서 설정하고 이를 통해 그 시대의 한 경향이나 성격을 규정하는 작업은 일반적인 관행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렇듯 한 시대의 문학을 놓고 그 전체적으로 특징으로 어떤 경향을 지적해 낸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일 뿐더러, 특히 10년 단위라는 분류 기준은 모호하고 연구자의 안이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본고에서 (19)90년대 문학의 특징을 검토하는 일은 다가올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는 중요한 일일 수 있으며, 또한 최근의 소설경향을 검토해 봄으로써 우리문학이 나아갈 올바른 길을 조망해 본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작업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최근 90년대라 함은 앞선 80년대가 1980년에 일어났던 충격적인 5.18 광주민주항쟁에서 시작되어 그 자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듯이 80년대 말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주어지는 것으로 본다.
이론적인 측면에서든 현실에서 발현된 양태이든 간에 사회주의라는 거대담론의 붕괴는 문학의 영역에 있어서도 주류를 이루었다고 일컬어지는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이라는 거대담론이 사라지고 다양한 흐름이나 경향이 꽃피우는 계기가 된다. 백가쟁명식의 다양한 흐름이 만개해 있다고 지칭되어도 무방할 정도였던 바, 그 중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듯이 평단의 쟁점으로 문제시되고 있으며, 또한 새롭게 각광받는 신인들의 작품에서도 뚜렷이 그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 한 축으로서 소설에 환상적 요소를 도입하는 경향을 들 수 있다. 물론 한국 현대문학에 있어서의 환상적 요소 또는 환상문학이란 용어는 너무나 포괄적인 개념이어서 간단히 정의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환상문학에 대해 개론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는 토도로프의 견해와 다른 논자들의 논의에 의거한다면, 문학에서의 창조된 세계에 비일상적이고 초자연적인 사건을 개입시키는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설정해 볼 수 있을 듯하다.
<환상문학입문>을 쓴 바 있는 토도르프에 의하면, 환상문학이란 크게 세 가지의 조건을 충족시킨 문학을 일컫는다. 곧 환상문학이라는 장르는 “독자로 하여금 낯선 사건의 성격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머뭇거리고 주저하도록hesitation” 한다는 것이며, 아울러 이 주저함은 작중인물이 경험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물론 특정의 독서방식, 예컨대 시적이나 알레고리적 해석태도를 거부하는 방식도 포함된다. 실상 토도로프의 이러한 조건적인 정의는 이후 다양한 학자들의 ‘환상문학’에 대한 정의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지만, 본고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이러한 환상문학이라는 장르가 가져다주는 효과(기능)이다. 그에 의하면 문학의 환상성 또는 환상문학 장르는 크게 보아 세 가지 기능을 지닌다고 본다. 독자를 감동이나 놀라움으로 이끄는 실용적 기능, 초자연적인 것이 스스로를 나타낼 수 있는 장소라는 의미적인 기능, 마지막으로 초자연적인 사건이 스토리 전개 속으로 들어간다는 구문적인 기능이 그것이다. 특히 사건의 서술과 관련된 세 번째 기능인 구문적 기능은 토도로프가 가장 강조하고 있는 기능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환상적인 요소는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검열과 싸우는 수단일 수 있는 바, 초자연적인 요소가 서술 속에 개입함으로써 사건 진행이 급변하게 되고, 이는 완만한 진행 속에서 안정적인 면모를 보여주던 서술상황을 파괴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안정과 균형을 깨뜨림이야말로 형식주의와 구조주의에서 주장하는 문학의 존재양식으로서의 ‘낯설게 하기’ 효과를 서술적인 측면에서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흔히 현대문학에서의 환상적 경향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논자들이 주장하는 현실 전복적 기능이란 바로 토도로프가 말하는 이 균형파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문학에 환상적 요소를 도입하는 경향은 최근 현대문학에 이르러서 나타난 현상인가 하면 그렇지만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 한국소설에 있어서도 위와 같이 정의되는 환상적 요소가 작금에 이르러 개입되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과거의 신화, 동화, 몽유록 계통의 소설들이나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그 자장 속에서 창작된 작품들은 이와 같은 요소를 내포하며 생산되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최근소설에 이르러, 특히 80년대 말을 전후로 해서 부각되기 시작한 환상문학이나 문학에서의 환상적 요소가 특별한 관심이나 주목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으며, 이 특별한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 글은 환상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간략한 검토와 함께 최근 환상적 경향을 보여주는 일부의 작품을 검토할 것이나, 주안점은 이러한 현상이 주는 의미와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데 둔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최근 몇 년 환상문학에 대한 관심을 특별히 보여주었던 특집기사들을 검토해봄이 적절한 순서일 것이다.
2. 포스트모던적 인식과 환상적 경향
그렇다면 이러한 환상적 요소가 최근 들어 주목의 대상이 된 이유에 대해서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선 최근의 소설들에 있어서 환상적 경향의 대두 이유로 자주 거론되고 있는 것이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의 퇴조와 아울러 대두하게 된 포스트모던적인 인식의 도입이라는 점이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두 조류의 퇴조와 새로운 인식의 도입이 필연적인 관계에 놓이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모더니즘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는 발언이나, 이와는 반대로 기존의 문학에 대한 철저한 해체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포스트모던의 성격에 대한 논의는 차치해 두고서 일단 ‘포스트’의 의미에 주목하기로 한다. 다시 말하여 포스트모던적 인식이 기존의 문학 등에 대한 전면적 거부라고 보고 논의를 전개해나가기로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거부는 이론적인 논의차원에 그치지 않고 일부 작가의 경우에도 표나게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포스트모던한 것으로서의 환상적 경향이 리얼리즘의 퇴조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기에는 리얼리즘에서 행해왔던 경험적 현실의 재현 불가능성이 놓여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실상 현실의 반영으로서의 리얼리즘은 그 논리적 토대를 현실의 총체적 형상화, 곧 전형을 통한 재현에 두고 있음은 분명하다. 물론 재현인가 표현인가 하는 문제는 과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논쟁에서 제기된 문제이기도 하다. 현실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의미내재의 관점에서 의미 찾기에 주안점을 두고, 이를 진실하게 반영한다는 지점에 입각해 있는 것이 리얼리즘이라면, 이에 반해 모더니즘에서는 의미란 바로 구성으로서의 차원 곧 의미창조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리얼리즘 작가들은 그들의 담론이 실제로 현실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고 믿기도 하고 또는 암묵적으로나마 그와 같은 가정을 하고 있었으며, 리얼리즘에서 모더니즘으로의 전이란 재현이나 모방으로부터 구성이나 기호현상으로의 전이라는 P.지마의 입장에 동감한다면, 최근 소설에 있어서 환상적 요소의 도입과 강조가 리얼리즘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모더니즘에서도 지적되었던 바로 재현의 불가능성 또는 오류 지적에 중점이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실 자체는 인과적 법칙의 세계로 파악되는 대상일 수는 없으며, 도리어 가장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세계라는 인식이다. 이러한 현실인식이 문학에 적용되었을 때 인과론의 자연법칙을 반영할 뿐인 리얼리즘을 거부하고 기호론이나 메타언어의 차원으로 나아감은 필지의 사정이다. 설령 현실의 법칙을 부분적으로 재현해 준다고 할지라도 리얼리즘에는 결정적인 한계, 즉 언어로 직조된 문학예술이 대상의 진리를 직접적으로 지시해준다는 간과하기 어려운 한계가 내포되어 있다. 언어학에서의 탁월한 성과로 지칭되고 있는,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없다는 자의성 개념이 제기된 지 이미 100여 년이 지난 마당에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란 마땅히 타파되어야 할 도그마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현실 자체가 논리적이고 인식가능한 측면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성적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 즉 초자연적이거나 비일상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한 이상, 현실의 모든 부분을 일정한 합법칙적 논리에 의거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리얼리즘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을 통해 현실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하며 또 설명할 수 있다는 이러한 태도는 주체중심의 계몽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논리에 비추어 보면 설명이나 인식불가능한 부분의 형상화를 위해서 소설에 비현실적인 요소, 환상적 측면을 도입함은 필연적인 귀결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토대에서 볼 때 여기에는 거대담론으로서의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급변하는 현실을 리얼리즘이 제대로 포착할 수 없었다는 점이 전제로 놓인다. 특히 일국을 벗어나서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실현되는 자본주의적 시장화와 국제 투기자본의 공세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등의 상황에 대해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식론상의 혼란과 급변하는 정세에 발빠르게 대응할 수 없었음이 도리어 현실을 비현실화해서 파악하고자 하는 경향으로 흘렀다고 보는 것이다. 현실 자체가 안개에 쌓여있는 것처럼 불확실하고 모호할 때 이를 표현하는 적절한 수단으로 환상적 요소의 도입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무너진 현실 사회주의의 소멸은 유럽 지성사의 한 축을 받치고 있던 집단 정의 혹은 사회주의에 대한 거대담론이 함께 무너진 것으로 본다. 물론 평등과 집단정의라는 미명하에 현실적으로 실현된 상태가 스탈린주의적 테러와 공룡화된 관료들의 권력을 떠받쳤던 국가주의에 불과한 것은 별 문제이다. 세계공황이나 2차 세계대전의 공포에 의해 계몽으로서의 이성이 실은 신화적 광기에 지나지 않았음이 밝혀진 것과 마찬가지로, 이성의 역행적 귀결이나 체계에 대한 의지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유감없이 그 실체를 드러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라는 거대담론은 합리주의적 지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현실적 기제가 아니라 둘 다 이성의 이름으로 군림해왔던 권력지향적 담론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오랜 세월동안 인류의 지성을 흡수하고 열광시키던 이러한 거대담론을 무너뜨린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사소하지만 일상적 삶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출발은 이 거대담론마저 무너뜨리는 이러한 일상적 삶의 실체파악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모더니즘의 퇴조와 아울러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한다는 지적에 이른다면, 비록 리얼리즘보다는 모더니즘에 의지하여 환상적 경향의 대두를 설명한다는 차이는 있으나 동일한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다. 이때, 모더니즘 논리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 중심부와 주변부라는 이분법적 구분에 토대를 둔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더니즘 논리에 대한 저항은 이항대립의 거부에 있는 바, 현실 역시 일상적 현실과 비일상적 현실의 구분은 계몽주의에 입각한 주체중심적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 자체는 일상/비일상, 자연적/초자연적, 법칙적/초논리적인 것 모두가 융합되어 있는 상태이다. 근대라는 기획 자체에 대해 회의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분법적 대립구도하에서 그 동안 억눌려 왔던 타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함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여기에는 최근 부흥하고 있는 대중문화와 아울러 여타 매체에서의 기술주의는 문학에 있어서도 위기의식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상 포스트모더니즘이 거부하고 있는 모더니즘 자체가 사진으로 인해 초래된 미술 영역에서의 위기를 반영하고자 한 데서 유래한 것이라면, 포스트모던 쪽에서의 환상적 요소의 도입은 대중문화와 미디어의 발달로 인한 문학의 존재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우리가 흔히 대중문화의 한 표본으로 내세우는 영화에 대해 벤야민은 후기 자본주의(포스트 모던) 사회 예술의 본질과 미적 체험 그 자체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본 바 있다. 이 체험은 안정과 조화의 추구가 아니라 위험과 존재의 일반적인 불안정한 구조를 반영하는 불확실성이 예술의 본질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문학 역시 불확실성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형상화된 현실은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현실, 우연이 지배하는 현실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앞서 검토한 재현으로서의 리얼리즘에 반해 모더니즘 쪽에서는 현실과 진실은 애초에 주어지지도 않고 끝에 가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현실과 진실에 대한 방향상실과 끊임없는 탐구가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다. 현실이란 우리가 구성한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구성물인 한에서만 우리는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 역으로 주체라는 개념 역시 이분법적 분류와 배제를 통해 우리 자신의 구성물인 동시에 타인들과의 상호 교류과정에 성립된 타인들의 구성물이기도 하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구성한 바의 것만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명제가 바로 모더니즘의 핵심 주장임은 더 이상의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현실을 구성하는 일은 주체를 구성하는 일이며, 우연성을 포용하고 진실을 만들어 내는 일과도 일치한다. 이로 보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후자가 현실과 진실은 우리 자신이 구성한 것이며 따라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실제세계라고 부르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현실도 일종의 허구라는 관점인 셈이다.
반면 모더니스트 작가들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스트 작가들은 그들의 선배들과는 달리 현실에 대한 사실적 재현의 가능성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비록 접근불가능할지라도 엄연히 진리는 존재한다는 믿음 하에 이루어지는 모더니즘의 진실에 대한 미학적 탐구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리얼리스트적 환상 또는 재현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에 반발하여 씌어진 목적과 대상이 없는 탐구만 지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은 예전과 같이 지각되고 있으나, 지각행위 그 자체가 현실을 이해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현실에 대해 보면 볼수록, 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더 할 말이 없게 되는 인식상의 악무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불가능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식을 초월한 세계, 환상적 영역의 도입인 것이다.
3. 환상의 내적 적합성과 인식의 비결정성
이제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현실관에도 영향을 미쳐,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의 모호함, 나아가 이는 현실의 풍요화에 이어진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는 바, 비현실의 실체 또는 정체란 무엇인지 작품을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환상문학의 개념에 대해 정의하고 있는 학자 중 토도로프가 경이문학과 미스터리 문학 사이에 환상문학을 위치지우며, 초자연적인 사건의 설명 방식으로 이들을 구분하고 있지만, 이에 비해 바레네체아는 비정상, 초자연, 비현실적인 것과 그 반대의 것 즉 일상적 현실의 것의 공존을 말한다. 이때 공존이라 함은 양자가 문제화되어 공존할 수도 있고 별다른 문제 없이 공존할 수도 있다. 따라서 바레네체아는 공존의 방식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레네체아가 토도로프의 이론을 이어받아 약간의 변형을 가한 것이었다면, 환상문학을 새롭게 정의하고자 한 톨킨의 경우는 사정이 이와 다르다. 곧 1차적인 경험현실에서 탈출해 1차 세계에 대해 새롭고 신선한 시각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현실로서의 창조된 세계가 2차 현실이자 환상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창조된 세계 즉 2차 가공된 허구적 세계로서, 주안점은 1차적 현실이라는 우리의 일상 경험세계에 놓여있는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2차 세계가 과연 자립적 실체(자율성)를 지니는 세계인가 하는 면에 있어서는 환상문학을 논하는 이들이나 실제 작품마다 말하는 바가 달라 보인다는 점이다. 예컨대, 소설에 자주 환상적 요소를 도입하였던 김영하의 대표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 대해 탈출구 문학이라고 지적하며, 환상문학에서의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부터의 탈출’ 말하자면 ‘경험적 현실의 전복’이 아니어서 환상문학에 들 수 없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이승우의 작품 <해는 어떻게 뜨는가> <미궁에 대한 추측> 등도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해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미스터리에 속할 뿐 환상문학은 아니라고 본다. 환상문학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검토하면서도 경험현실의 전복적 기능(인식의 전환)에 철두철미하게 매달리고 있는 이 관점에서 대표적인 환상문학으로 보는 것은 송경아의 <엘리베이터> 정도일 터인데, 여기서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끝없는 교차운동이 엿보인다는 점 정도가 지적될 뿐이다.
그리고 이렇듯 환상문학의 전제조건을 내세워 좁게 바라보는 견해는 다른 논자들에 의해서도 되풀이되어 주장된다. 특히 그간의 환상문학에 대한 언급들이 구조원리/요소(모티프)/장르로서의 환상을 구분하지 못했었다는 논지가 그것이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경험적 현실의 의심할 바 없는 견고성에 대한 회의가 폭넓게 확산되어 환상적인 것이 도입된 것으로 본다. 현실에 대한 메타서사나 권위주의적 담론을 회의하고, 집단적인 신념을 거부하는 경향은 90년대의 두드러진 정신적 풍속도라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회의와 더불어 도구적 이성의 불모성, 진보 관념의 억압성을 비판하고 주체 혹은 이성의 탈중심화가 강조되는 바, 여기에는 기술공학의 눈부신 성장과 함께 가상 현실이 두드러지고 문화적인 것이 내파되면서 리얼리티가 위기를 맞게 되고 그 돌파구로서 환상적인 것이 도입된다는 견해의 피력이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한다면 단연 환상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송경아의 <책>이 고평될 터이다. 이 작품에서 보여준 삶의 불가해성, 앎의 불가능성은 정전의 권위 타파나 사물을 재현하는 언어의 권위에 도전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 현실을 포르노화하는 장정일의 소설이나 양귀자의 <천년의 사랑> 등은 비록 현실 정합성에서 문제가 있으나 그럼에도 모든 존재가 경계를 넘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다시 말해 주체의 자기중심적 망상에서 벗어나 타자에 대해 고려하게 해 주는 작품들이라는 점은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러한 작품들은 도입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현상이나 초자연적인 면모가 그 토대라고 할 수 있는 객관적 현실과의 관련, 즉 정합성이라는 면에서 다소 문제점을 드러낸다. 우리가 환상적 요소를 도입한 작품을 읽을 때 이들 요소를 단지 새롭고 신기한 것만을 간취하기 위해 읽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과의 정합성을 상실한 일부 작품의 경우 그것은, 현실이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또 다른 차원이나 상황이 존재하고 있기에 현실 전체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 정도에 그칠 것이다. 이들 환상적 요소란 도리어 우리의 삶에 대해 창조적 기능을 수행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데 기여할 때 비로소 온전한 의미가 주어지게 된다. 환상의 전제조건이었던 ‘주저’나 ‘망설임’이란 바로 이러한 경험현실과의 대비를 의미한다. 이것이 톨킨이 말한 바, 경험현실에서의 탈출이자 경험현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제공이기도 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히는 것이 박상우의 ?독산동 천사의 시?이다. 이 작품집에 실려있는 많은 작품들은 흔히 지적되듯이 몽환적인 의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내면탐구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환상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긴장이 유지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긴장이야말로 자연주의적인 재현에 매몰된 인식이나 반대로 뿌리가 없는 현실초월적 태도를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귀중한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결국 소설문학에 도입된 환상적 요소를 검토함에 있어 도입자체가 문제된다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 근저에는 환상성의 소설 내적 적합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할 따름이다. 특히 환상적 요소가 그 동안 억압되고 배제된 타자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데에 이르러서는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90년대 들어 소설이 내성화하거나 자서전화하는 주관적 경향이 이러한 환상적 요소를 초래한 것이라는 시각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실이나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틀의 동요란 역으로 이들이 보여주는 현실의 합리적인 법칙이나 목적에 대한 무관심과 현실의 물리적 조건에 무지를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현재의 경험현실이라는 구체성에 관심이 없이 초자연적 세계를 향한 초월이나 비현실적 환상세계로의 도피는 설령 그것이 자신만의 척도와 존재방식, 자기만의 감정과 내적 깊이로 이해될 수 있을지라도 우리 삶을 구성하는 객관적인 미적 체험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4. 소설기법적 면에서의 환상적 요소가 주는 영향
그렇다면 최근 소설에 환상적 요소가 도입되면서 주었던 문학적 충격은 무엇인지 검토할 차례이다. 물론 환상적 요소가 소설문학에 들어옴으로써 문학 내적인 변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앞서 검토한 인식적인 측면 외에도 특히 소설 기법면에서의 발전은 두드러진 바 있다.
환상을 미메시스와 더불어 문학을 구성하는 2대 요소로 보았던 캐서린 흄은 환상이란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합의된 리얼리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으로 규정한다. 곧 창조에 대한 욕망이 바로 환상성을 도입하거나 추종하게 만드는 동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반면 토도로프가 보았던 환상이란 독자로 하여금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는 현실과 비현실, 실재와 가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화해시키고 종합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토도로프와 흄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경험적 현실과 초월적 세계를 융합시키는 환상성은 문학에 있어서 창조적 측면(상상력)을 보강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질적인 이 두 세계의 종합은 어떻게 가능한가가 문제이다. 환상문학에서는 그러므로 이 두 세계를 연결시킬 수 있는 거울 이미지와 병치기법이 주로 이용된다. 이 중 거울이미지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거리를 다른 어떤 비유나 언어적 장치보다 현격하게 좁히는 까닭에 무엇보다 환상적 효과를 극대화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즉 “거울이미지가 만들어 낸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환상적 충격은 일과성 사건으로 매듭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환상으로 환상에서 현실로의 반전을 지속시켜 인식의 비결정성을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의 모호함, 그리고 비현실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의 주저함과 망설임은 단선적 인식의 허구성에 대해 경각심을 고취시킨다. 헤겔적 사유체계에서는 진리가 완결된 전체이었던 데 반해, 모더니즘을 내세운 아도르노가 ‘전체는 허위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울 이미지는 단지 환상적 문학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바흐찐의 경우도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예로 들어 문턱 이미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바, 시간적으로 “도스또예프스끼는 작품을 쓸 때 상대적으로 끊임없는 역사적?전기적 시간, 즉 엄밀하게 서사적인 시간을 거의 완전히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시간을 ‘뛰어 넘는다.’ 그는 행위를 위기, 급변, 파국의 지점에 집중시킨다. 그 때의 한 순간은, 내면적 의미에서, ‘10억년’에 상당한다. 말하자면, 시간의 한계성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공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공간을 뛰어넘어 행위를 오로지 두 ‘지점’에만 집중시킨다. 즉 위기와 급변이 일어나는 문턱(문지방, 현관, 계단, 복도 등)이 아니면, 파국과 스캔들이 일어나는 광장(보통 식당과 홀 같은 거실)이다.” 이러한 도스또예프스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예술적 사상은 종종 기본적으로 경험적인 개연성과 표면적으로 합리적인 논리도 뛰어넘는다고 평가된다.
요컨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서는 사건들이 주로 이러한 ‘점들’ 위에서 일어나며, 집이나 방의 문턱에서 멀리 떨어진 안쪽 공간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달리 말한다면, 문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안락한 안쪽 공간에서 사람들은 전기적 시간 속의 전기적 삶, 즉 경험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반면 위기의 시간이 존재하는 문턱이나 광장은 일상적 현실을 뛰어넘는 시공간을 지칭한다. 그리고 실상 이러한 시간의식이란 ‘정지의 변증법’을 내세운 벤야민이 <역사철학테제>에서 말한 바, 진보주의자들의 시간관념인 동질적이고 공허한 역사의 진행과정을 폭파할 수 있는 현재시간Jetztzeit과도 통한다.
따라서 환상적 요소를 도입하는 현대 소설 역시 경험현실에의 충격(인식의 비결정성)을 위해서는 이러한 변증법적 시간의식으로서의 위기와 파국적 공간으로 설정되어야 적절할 터인데, 그러나 실제 대다수 작품에서 드러나는 시공간 개념은 도리어 현실 도피적인 면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초월적 시공간이란 경험적 현실에서 벗어난 추상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역유토피아이거나 비판적 부정적 유토피아주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초자연적인 것의 소설적 의미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경험적 현실에서 파악되는 인과적 법칙이 아닌 논리적 환상으로 소설을 구성하고자 할 경우 자주 이용되는 기법의 하나가 ‘메타 텍스트의 환상’이다. 언어가 구체적인 현실의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의 논리(유희)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논리차원의 메타언어적 기능을 잘 보여주는 고차원의 소설작품이란 모순과 역설의 원리를 내포할 때이다. 합법칙성을 중시하는 리얼리즘과는 달리 환상적 문학에서는 혼돈과 우연성을 인과적 법칙에 대비시킴으로써 현실의 모순성과 복합성을 도리어 더욱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울에 비추어진 상이라는 의미에서 자연을 모방한다는 것을 재현의 중심 원리로 한 리얼리즘의 역사적 과제가 자연주의적 인과성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반면, 환상적 문학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인과성을 원리로 생산된 텍스트들의 논리적 한계와 모순을 되짚어 새로운 차원의 환상적 텍스트를 생산한다.
5. 문제점 및 전망
요컨대, 최근 현대소설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환상적 요소의 도입은 위에서 검토한 몇 가지 조건에 의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문제는 이들 소설이 왜 자꾸 현실에서 벗어나거나 현실을 무시하면서까지 비현실적이거나 초자연적인 곳으로만 나아가게 되는지 하는 점에 있었다. 이에 대해서 필자로서는 기존의 인식(과 서술)방식에 대한 반발과 현실 자체의 혼란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면서도, 혹시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현실인식 감각의 빈곤을 메우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억누를 수가 없었다.
소설에 도입된 환상적 요소란 환상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에 따를 경우, 그것은 마치 우리의 일상적 현실에서도 인간의 인식이 도달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불확실한 초자연적 현상과 마주칠 때 일부 점(占)에 의지하게 되는 것과도 흡사하다. 이때의 점이란 실은 운명이나 초자연적인 것을 그대로 믿거나 맹목적으로 수용한다기보다는 그를 통해 자신의 삶이나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고 그에 대처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이 더욱 크다. 이에 비추어 볼 때 토도로프가 말한 바,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현실과 비일상적 초현실적 사건 사이에서의 주저함과 긴장이란 현실의 총체적, 다면적 파악에 대한 인간의 한계를 드러냄이라는 관점으로 봄이 타탕하다. 반면 현실도피의 관점에 입각하여 비현실적인 측면에의 과도한 경사란 퇴영적인 것이 되기 쉽다. 마치 자신의 삶을 되돌아봐야 함에도 그 삶은 방기한 채 비주체적으로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지하거나 함몰되는 경우와 같다.
또한 현대문학에 있어서의 환상성에 대해 언급하거나 환상문학을 정의하고 있는 많은 연구자들이 환상성을 문학의 양대 구성요소인 상상력(창조적인 측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한 상상력은 분명 소설에서 간과되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상상력이란 현실적 토대를 지니고 있는 바, 이 부분이 제거될 때 남는 것은 화려한 언어의 유희에 불과할 뿐이다. 꼬리를 너무 화려하게 치장하여 도리어 날지 못하는 새와도 같은 모습이 아닐까하는 우려는 비단 필자만의 기우는 아닐 터이다. 이는 외부적 환경 특히 대중매체나 컴퓨터 통신의 발달로 인한 사이버 문학 등의 외부적 요인에 근거하여 환상문학이나 문학에서의 환상적 요소의 강화를 설명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현대사회란 이질적인 다양한 흐름이 뒤섞여 있는 상태, 헤테로피아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미가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며, 단지 장식적인 차원일 뿐이며, 다른 가능한 생활세계들의 준거점 역할을 통해 생활세계를 연장시키는 기능을 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중문화의 장식적이고 일시적인 상품성 등 싸구려 장식품들이야말로 후기 모더니티의 미학적 본질이라는 견해도 제시된다. 후기 모더니티 미학에서는 어떠한 미학이론이나 비평도 선별적 정향을 성취할 수 있는 준비를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환상적 요소의 도입 등 대중문화의 미적 체험을 단순한 진정한 가치와 본질의 왜곡으로 보지 않고 운명적인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이 설령 어려울 지라도 시도해 볼 수는 있다. 어떤 시대가 속도와 특정 방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그 시대를 읽고 해석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에 오늘날의 미학이 장식적이며 헤테로피아적인 소용돌이를 헤쳐 나갈 길로서, 현실이나 존재란 존재하는 바가 아니라 해체하는 것이며, 그것은 현존하지 않는 한에서만 차이 속에서 자신을 긍정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에 바로 차이 속에서 긍정되는 현실의 적절한 표현 수단으로서 환상적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출처:한국현대소설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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