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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아 시인의 시밭┃ 스크랩 온유溫柔에게 (외 1편) / 이향아
박숙인 추천 0 조회 24 14.11.17 15: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온유溫柔에게 (외 1편)  

   이향아

 

 

 

교실 맨 앞에, 태극기와 나란히

‘온유溫柔’라는 급훈부터 진하게 내걸었다

이제 막 큰 바다로 돛을 올리며

나를 순전하게 타이르는 말

춥고 외로웠던 그 시절의 불빛

 

막다른 벼랑에서 짐승을 만났을 때

자다가도 쫓기어 몸부림칠 때

온유여, 그대 홀로 견딜 수 있는지

‘험산을 잘라다가 바다를 메우자’고

남들은 소리소리 기염을 토하는데

진실로 괜찮은지 의심도 하면서

 

알고 있는가,

겨울이 깊어 갈수록

닫힌 문들을 더 굳게 잠갔어도

얼어붙은 땅 은밀한 깊이

거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밀물참 개펄의 도요새처럼

윤삼월 반짝이는 대추나무 새잎처럼

밝아 오는 창문 앞에 눈을 감고서

두 손바닥 오그려 햇살을 받는다

거기 담기는 노래의 곡조를

이제야 조금씩 알 것도 같은

해도 이미 흥얼흥얼 저무는 들판에서

온유여, 그대는 아직 무사하신가

 

 

 

은행나무 옆을 지나며

 

 

 

옷 빛깔 괜찮은가, 모양새는 어떤가

거울 앞에서 한참이나 머뭇거린다

지금은 가을이고, 더군다나

은행나무 곁을 지나가야 하니까

 

공작이 진저리치며 꼬리를 펼칠 때처럼

나 지나갈 때를 기다려

비밀한 절정을 토설할 것처럼

일제히 술렁이는 수만 개의 잎사귀

 

그중 어떤 것은 폭삭 늙어서

병이 들었나, 다가가 보았다

아, 암나무구나

치다꺼리할 새끼들만 매달렸구나

알맹이는 하나씩 내보내고

빈껍데기만 남아

지레 늙지 않고서야 어쩌겠는가

 

 

 

                         ?제20시집『온유에게』(2014)에서

--------------

이향아 / 1938년 충남 서천 출생, 전북 군산에서 성장. 1966년 《현대문학》추천 완료로 등단. 시집 『어머니 큰산』등 19권, 수필집 『종이배』등 15권, 문학 이론서 『창작의 아름다움』등 7권. 현재 호남대학교 국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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