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군
봄에는 화사해진다. 젊음으로 눈부신 아가씨들의 옷차림이 그렇고. 활짝 피어난 벚꽃이나 개나리의 빛깔이 그렇다. 세상이 화사해서 더 초라해진, 잊지 못할 봄도 있었다. 지긋지긋한 보릿고개가 그랬고. 연인과 헤어져 가슴 아픈 어느 해의 봄이 그랬다. 부산과는 너무 멀게 느껴져 낯선 전북 고창군을 찾았다. '청보리와 붉은 동백꽃', 그 강렬한 대조에 눈이 시렸다. 돌아오며 생각하니, 봄은 짧아서 아쉬운 청춘과 같았다.
눈부시게 푸른 청보리밭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뉘 부르는 소리 있어/나를 멈춘다….'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피난 온 박화목이 작사한 가곡 '보리밭'. 어떤 말로도 이 노래 가사만큼 청보리밭을 잘 묘사할 수 없을 것 같다. '학원농장'에선 고창 청보리밭 축제가 한창이다. 지난 24일부터 시작돼 내달 8일까지 계속된다. 청보리밭을 거니는 동안 우리 가곡이 계속 흘러나온다. 보리밭만큼 가곡이 어울리는 장소가 또 없다. 가곡 '보리밭'의 원래 제목은 '옛 생각'이었단다.
고창의 청보리밭은 신록으로 눈이 부셨다. 바람이 불자 푸름이 살랑살랑 물결친다. 그 모습이 싱그럽기 그지없다. 최신형 카메라마저 이 푸름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니 아쉽다.
고창의 옛 지명 모양현의 '모(牟)'는 보리, '양(陽)'은 태양을 뜻한다. 고창은 오래 전부터 보리의 고장이었다. 학원농장 100만여㎡에 펼쳐진 청보리밭이 마치 푸른 융단 같다. 이 농장은 1990년대 후반부터 사진작가들의 소재로 사랑받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보리의 일생'에 대해 배웠다. 보리는 11월 초에 파종해 11월 말이면 잔디 길이까지 자란다. 그 후에는 성장을 멈추고 눈 속에서 새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겨울 추위를 이겨낸 보리는 새 봄과 더불어 무럭무럭 자라 4월 초에 이삭이 나온다. 이때부터 누렇게 익기 시작하는 5월 중순까지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 바로 청보리다.
축제 기간 보리새싹비빔밥, 보리식혜, 보리떡 등 보리를 이용한 각종 먹을거리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학원농장.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 산 119의 2. 063-564-9897.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동백
고창의 선운사는 멀었지만 마음 속 선운사는 늘 가까이에 있었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가수 송창식이 부른 '선운사'가 저절로 흥얼거려졌다.
가는 길 내내 동백꽃이 걱정됐다. 혹시라도 동백꽃이 다 져버렸으면 어떡할까. 어떤 이는 선운사에 가서 동백을 보고 그냥 엉엉 울었다는데.
동백꽃은 그냥 빨갰다. 선운사 동백이 별스러운 동백은 아니었다. 선운산은 동백꽃의 북방 한계선이다. 5월까지도 선운사 대웅보전 뒤에 동백꽃 병풍을 볼 수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나 할까. 선운사 동백이 언제부터 심어졌는지는 모른다. 산불로부터 사찰을 보호하기 위한 사찰보호림으로 조성되어 약 2천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동백은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 추백, 동백으로 불린다. 선운사 동백은 춘백으로 아직 만개하지는 않았다.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라고 했지만 꽃은 지고, 떠날 사람은 떠난다.
동백이 없어도 백제 때 지어진 1천500년 된 고찰인 선운사는 편안해서 좋아 보인다. 분명 계곡 안에 자리했는데도 평지의 절집 같다. 빛바랜 단청은 쓸쓸함을 자아낸다. 약간 쇠락한 느낌의 선운사는 이름까지 맘에 들었다. 선운사를 거쳐 선운산의 암자까지 이르는 길은 조용해서 사색하며 걷기에 좋다. 선운사. 고창군 아산면 심인리 500. 063-561-1422.
풍천장어와 미당시문학관
선운사 아래에는 풍천장어집이 40여 곳이나 즐비하다. 풍천장어는 바닷물과 강물이 합쳐지는 고창 선운사 앞 풍천에서 잡은 장어를 말한다. 밀물 때 서해의 바닷물이 여기 개천까지 밀려들어 오면서 거센 바람까지 몰고 와 풍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설사 자연산이 아니라도 고창에서 나는 장어는 맛이 다르다. 자연산에 가까운 맛을 내기 위해 민물장어를 바닷물에 몇 개월간 자연 상태로 두기 때문이다. 이렇게 축양한 장어는 고창 일대의 몇몇 장어집에서 '갯벌풍천장어'라는 이름으로 비싸게 팔린다.
선운사 입구 할매집(063-562-1542)의 평이 좋아서 들어갔다. 1인분에 2만 2천 원이다.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나오는 것을 보니 그렇지가 않다. 굵고 큰 녀석으로 1인분에 한 마리씩이다. 쫄깃하고 담백해 일반 장어와는 맛이 다르다. 노는 '물'이 달라서 그런 모양이다.
다음 코스는 선운사와 가까운 미당시문학관. 문학관의 벽에는 담쟁이 덩굴이 예쁘게 올라갔다. 어느 문학관보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자랑한다. 미당 서정주는 '선운사 동구'라는 시에서 '선운사 골짜기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라고 노래했다.
문학관에는 그의 시 '자화상'에 나오는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에 착안해 초대형 바람의 자전거를 조형물로 만들어 놓았다. 미당의 친일작품 발표 및 독재정권 찬양 문제로 시문학관 폐쇄운동이 여전하단다. 세월은 가도 이름은 남는데 대체 왜 그랬나요. 미당시문학관.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231. 063-560-2760.
수천 년 세월의 속삭임 고인돌
이게 다 웬 돌일까. 고창에 가면 역사책에서나 보던 청동기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을 질리도록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3만여 기의 고인돌 중 고창에 2천 기나 있단다. 탁자식, 바둑판식, 지상석곽식, 주형지석, 위석식 고인돌 등 종류도 많아 학생들에게는 현장학습지로도 좋다.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08년 9월에 개관한 고창고인돌박물관은 청동기시대의 각종 유물 및 생활상과 세계의 고인돌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고인돌 길을 걸으면 수천 년 세월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올해도 피어난 벚꽃 아래 수천 년된 고인돌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고창고인돌박물관에 주차를 하고 한 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는 '모로모로 열차'를 이용하면 산재된 고인돌을 편하게 볼 수 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2시간 30분∼6시간이 소요되는 '고인돌 질마재 따라 100리길' 4코스 중에 1코스를 선택해 걸어도 좋다. 고인돌박물관. 고창군 고창읍 공원길 74. 063-560-2577∼8.
글·사진=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영상=이지은 대학생 인턴
찾아가는 길
청보리축제가 열리는 학원농장으로 가려면 남해고속도로를 지나쳐 가다 광주 못 미쳐서 남고창IC로 내려선다. 함평·영광 방면으로 좌회전한 뒤 서해안고속국도를 이용해 삼계 대산으로 향하다 화동서원 부근에서 공음 방면 796번 지방도로 직진하면 된다.
학원농장에서 선운사로 가려면 다시 서해안고속국도를 타고 가 선운사IC에서 내리면 된다. 미당시문학관은 22번 국도를 타고 부안면 소재지를 지나 용산저수지를 왼쪽으로 끼고서 삼거리에서 우회전해서 고갯길(질마재)을 넘어서면 나타난다.
고창고인돌박물관은 미당시문학관에서 19번 지방도를 타고 고창IC 방향으로 향하면 된다. 또 고창IC에서는 아산 방면으로 주곡교차로와 고인돌교차로를 지나 2분가량 직진하면 된다. 박종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