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골목 장만영
얼마나 우쭐대며 다녔었냐,
이 골목 정동 길을.
해어진 교복을 입었지만
배움만이 나에겐 자랑이었다.
도서관 한구석 침침함 속에서
온종일 글을 읽다
돌아오는 황혼이면
무수한 피아노 소리 …….
피아노 소리 분수와 같이 눈부시더라.
그 무렵
나에겐 사랑하는 소녀 하나 없었건만
어딘가 내 아내 될 사람이 꼭 있을 것 같아
음악 소리에 젖은 가슴 위에
희망은 보름달처럼 둥긋이 떠올랐다.
그 후 이십 년
커어다란 노목(老木)이 서 있는 이 골목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기와담은
먼지 속에 예대로인데
지난달의 소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오늘은 그 피아노 소리조차 들을 길 없구나.
<문예>(1949)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정동골목'이라는 특정한 공간에 대한 화자의 경험과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해어진 교복'을 입었지만 배움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화자는 황혼녘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돌아올 때 어떤 '소녀'가 쳤으리라 짐작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미래와 이성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오른다. 가난했지만 배움과 희망이 있어 행복했던 시절이다. 20년이 지난 후, 화자는 학창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정동골목을 다시 찾는다. '노목', '기와담' 등 정동골목이 풍경은 예전 그대로인데, 예전의 '피아노 소리'와 '소녀'는 찾을 수가 없다. 희망에 부풀어 올랐던 학창 시절은 사라졌음을 깨닫고 화자는 진한 안타까움과 상실감을 느낀다.
이 시를 쓴 장만영 시인은 1914년생이며 197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회상한 학창 시절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경성 제2고보(지금의 경복고) 재학 시절로 추정되며, '그 후 20년' 세월이 흐른 뒤인 1949년에 이 시를 발표하였다. 비록 가난했지만 도서관에서 온종일 책을 읽을 만큼 학구열이 높았고 그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맘껏 부풀었으며, '어딘가 내 아내 될 사람이 꼭 있을 것 같은' 미래의 사랑과 이성을 순수하게 꿈꾸며 동경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다시 찾은 정동골목에는 '커어다란 노목'과 '기와담'은 그대로인데, '지난날의 소녀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그 시절 한 여학생이 쳤을 '그 피아노 소리조차' 들을 길이 없다. 속절없는 삶의 무상과 허망을 느끼는데,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어느 누구라도 이런 무렵에 당도해서는 비슷한 상념에 젖어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티 없는 학창시절에 대한 회상일지라도 해방이후 공간에서 과거 식민시대를 긍정적으로 추억하는 듯 한 분위기는 역사인식의 결여란 의심을 갖게도 하는데, 순수한 시에 지나친 관찰의 확장은 시 읽는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겠기에 군말 않기로 한다.
정동은 우리 근대사와 선교의 요람이었다. 지금은 도심의 많은 학교가 강남 등 인구밀집지역으로 이전했지만, 당시엔 경복궁과 덕수궁을 중심으로 학교들이 포진하였고 이화여고와 풍문여고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특히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왼쪽은 배재학당, 오른쪽은 이화학당이 이웃하여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70년만 해도 '우리 배재학당 이화학당 연애합시다.'라고 외쳐대는 배재고의 응원가를 숱하게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