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사야 1,10.16-20 마태오 23,1-12
“누구든지 자신을 낮추는 이는.”
인간의 욕심은 이기적인 뿌리에서 비롯된 것이 많지요. 따지고 따져서 올라서 보면
'자기 욕심'이 웅크리고 있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의 지도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에게 악행을 떨쳐버리고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결국 그들은 회개하지 않아서
유황불에 멸망을 자초하는 불행을 겪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회개의 마음을 어여삐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진실을 외칩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야 예언서 1,18)
예수님께서 모처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해서 긍정적인 표현을 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마태오 23,2-3ㄱ)
그런데 주님께서 결국 그들의 행동은 닮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왜 인자하신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시는 것일까요?
그들은 겸손하지 않고 교만하고 위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어서 사람들 앞에 경건하고 신앙도 깊은 것으로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성경은 하느님이 말씀이기 때문에 들을 수 있지만 그들이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표양은 따를 것이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에 겸손하였다면 문제는 좋은 것에서 선하고 좋은 결실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율법의 항목만 세부적으로 나누어서 그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느다고 비판하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떠받들려서 대접받기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성구갑을 크게 만들어 이마나 팔에 붙이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어트리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사람들이 스승이라고 불러 주기를 원한다고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러한 그들의 드러내는 위선적인 행동을 반대하며 아예 스승이라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말하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옥같은 말씀을 해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오 23,11-12)
사람이 겸손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은 사람을 아름답고 선하게 만들어 주지요.
그러나 그 반대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은 보기에도 사실 흉합니다.
한국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공직에 있었을 때 불렸던 칭호를 변하지 않고
쓴다는 것입니다.
어떤 직책에서 물러났어도 ‘회장’, ‘사장’, ‘위원장’ 심지어는 ‘국장’, ‘과장’까지 불러 주고 있습니다.
안 불러주면 섭섭한 마음이라는 것은 대접 받으려는 심보를 못 고치는 것입니다.
성직자의 호칭 중에서 ‘신부’라는 것만큼 영광스럽고 황송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박사님’, ‘총대리’, ‘사무총장’ 소리를 기대하는 얼빠진 사제도 있다고 하네요.
어디 그 뿐이겠어요? 사회복지나 학교 계통에서 일하는 수도자가 ‘수사님’, ‘수녀님’이라는
고마운 칭호보다 ‘이사님’, ‘교무처장님’, ‘사무국장님’이라는 말을 선호하는
또 다르게 얼빠진 수도자가 있다고 하네요.
물론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교우들에게 뭐라고 하겠어요?
시부모의 위치에서 스스로 내려 올 수만 있다면, 나이 많은 위치에서 조금만 젊은 나이로
내려 올 수 있다면 대접받는, 그리고 주인의 위치에서 종업원으의 위치로 내려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겸손과 봉사하는 자리가 얼마나 기쁘고 자유롭고 주님의 평화로 가득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지요. 스스로 낮추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겸손을 배우는
사순절의 복된 날이 되도록 합시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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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사야 1,10.16-20 마태오 23,1-12
“그들이 말하는 것은 지키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진리이신 하느님께서는 진실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십니다. 하지만 악마는 그 진실을 거짓으로
가리거나 덮어서 방해를 합니다. 역사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진실과 거짓이 치열하게 다투는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 일러주시는 빛으로 거짓을 들추어내어
진실을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전체를 보되 본질을 꿰뚫어볼 줄 아는
안목을 발휘한 것이지요.
이집트에서 파라오가 태양신의 아들이라거나 스핑크스 같은 상상 속의 동물을 거대한
신상으로 만들어 섬기던 이집트의 우상숭배를 보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와서도 뱀이나 물고기 같은 짐승의 상을 거대한 나무나 돌로 만들어서 숭배하는
또 다른 우상숭배에 직면했습니다. 수메르 문명에서 비롯된 이들 주변 민족들의 문화는
이런 우상숭배 종교를 위해 화려하고 눈부시게 발달되었습니다.
그 반면에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하느님의 종교는 역사상 징표를 드러내실 뿐
우상숭배 종교들의 화려한 문화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화려한 우상숭배 종교와 그 문화에 빠져 들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간파한 이사야는
동족을 향해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두 도시의 이름을 소환하여 비판하였습니다.
“소돔의 지도자들아, 고모라의 백성들아!”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신앙에 따른 윤리를
가르쳤는데, 그 윤리는 무미건조한 듯하지만 올바르고 깨끗한 길이었습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6).
이러한 예언자들의 정통 노선 위에서 예수님께서도 그 당시에 지배층과 민중을 다 함께
지배하고 있던 정신 풍조인 바리사이즘을 정면으로 비판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마태 23,2)는 말이 그 서론입니다.
모세가 받들었던 하느님 신앙도 없이, 그 신앙 덕분에 백성으로부터 받았던 권위만 취하고,
신앙 없는 윤리만 공허하게 가르치고 있었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내세운
형식논리를 신랄하게 비판하시면서 그 핵심을 찔러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의 형식논리는 율법 규정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그 자구(字句)대로 지키라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 내놓으신 핵심은 믿는 이들이 하느님을 섬기듯이 사람들을 섬기라는 매우 단순하고
명쾌한 말씀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도 6백 가지도 넘은 규정들을 다 알지도 못해서
규정과 규정이 충돌할 경우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놓고 허구헌 날 입씨름을 하기 바빴으며,
그러한 공리공론의 와중에 “어느 율법이 가장 중요한가?”를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이었습니다.
설사 그들이 가장 중요한 율법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해도 자신들은 손해를 볼까 두려워 제대로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사소한 규정을 지키느라고 사람들 앞에서 생색내기 일쑤였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 먹으면서 형식적인 십일조를 헌금한다고 자랑했고, 기도를 해도
성전이나 저자 거리에서 보란 듯이 길게 빈 말을 늘어놓으며 기도 바쳤으며,
기도 중에도 겸손하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뉘우치거나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신을 자랑삼아 늘어놓으며 축복을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청중들에게도,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입으로 가르치는 말을 따라서 지키도록 힘쓰되, 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행실은
따라하지 말라고 인간관계에 필요한 지혜를 나누어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고 진정성입니다.
말이 진실해야 하고, 행동에 진정성이 담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 윤리에서도 사랑의 최대한과 최소한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먼저 그에게 내가 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연이나, 우리가 자유로이 선택해서 맺은 인간관계에서라면
우리가 하는 말은 더 없이 진실해야 하고 행동에 진정성이 담겨야 할 것이며,
이 진실한 말로 한 약속이라면 행동으로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나도 그에게 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우리는 최대한의 진실과 진정성이 목표가 아니라
최소한의 진실과 진정성이 흠나지 않도록 하면 됩니다.
거짓말은 그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 될 것이며, 가능한 한 얼마든지 선하고 의로운 이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이므로 예의를 갖추어 대함으로써 그 관계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겪다 보면 분명하게 하느님의 편에 서지 않는 사람임이 드러날 경우가 있습니다.
하는 말이 진실하지 않고 행동에 진정성이 없는 속물형 인간임이 드러날 때입니다. 그럴 때에는 발에
묻은 먼지까지 털어버리는 심정으로 분명한 선을 그어 처신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연히 엮여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기 십상입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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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만 안젤로 신부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사야 1,10.16-20 마태오 23,1-12
마태오 복음 23장은 21-22장에서 소개된 적대자들과 맞선 충돌을 요약하고,
26-27장에서 다루어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준비합니다. 이 장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 중심이 되고 있는데, 그들을 향한 비판을 넘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교육함으로써 공동체의 정체성과 가치를 규정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23장 1-12절에서 시작된 비판은 이어지는 23장 13-36절에서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유다교 안에서
합법적 교사로서 그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역할과 권한을 인정하십니다(23,1-3 참조).
그러나 그들은 위선 때문에 예수님의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23,3 참조). 그들은
권력자의 힘과 지위를 이용하여 짐을 지우고, 특별한 표지를 지니고 다니며 특권을 요구하고
대중 속에서 영예를 찾습니다(23,4-7 참조).
예수님께서는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만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지켜야 할 가르침을 제시하십니다(23,8-12 참조).
예수님의 제자라면 결코 ‘스승’이나 ‘아버지’나 ‘선생님’으로 불리지 않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하느님을 위하여, 그리고 ‘선생님’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유보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을 낮추고 서로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제자들의 교육을 위한 부정적 본보기로 이용하십니다.
잘못된 행위와 태도는 성장과 발전을 위한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들을 섬기려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머물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