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토대로 1호(한 가구) 당 인구를 5명으로 계산하여 고구려 인구를 약 350만으로 보았는데, 나는 이것이 고구려를 점령한 당나라의 추산일 뿐, 정확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고구려를 점령한 당나라의 행정력이 미친 곳은 고구려 전체 영토가운데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들은 동부만주에는전혀 세력을 뻗지 못했고, 요동에서 평야에 이르는 선과 점을 중심으로 통치했으며, 곧 고구려 부흥군에 밀려 철수하게 되어 실질적으로 고구려 전역을 통치하지는 못했지요.
따라서 당의 조사는 불철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구려가 350만이라면, 신라나 백제와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당시 고구려의 국력으로 볼 때 타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고구려에 속민으로 있는 거란, 실위, 말갈 등의 인구까지 합친다면 고구려의 인구는 더 늘어나야 합니다.
중국학자들은 여기서 호를 구라고 해석하여 고구려 말기의 인구를 약 70만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20만이 당에 끌려가고(2만 8천호라는 기록을 토대로 20만이 나온 것인데, 막상 전체 인구는 호와 구를 교묘하게 바꾸어 고구려 인구를 적게 보려고 하지요), 또 기타 유민들이 당으로 왔으니, 고구려는 당이 계승했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겨우 70만에 불과한 고구려에게 113만 대군이 패했고, 당나라가 50만, 100만 대군을 계속 동원해서 공격할 만큼 그 70만 고구려인이 일당백이었느냐는 것이지요.
69만 5천호에서 호를 몇명으로 보는냐는 문제도 5명설이 가장 유력하지만, 이것도 추정인 만큼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흔히 5명으로 계산하여 고구려 인구를 350만으로 보면 별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일부 연구자들이 고려시대 보다 인구가 많다는 이유로 이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앞서 이 부분은 비판했으니 다시 중복인 셈이군요.
고구려 말기에 고구려 군대의 숫자는 대략 30만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것은 발해인의 입으로, 또 최영전에 등장한 기록 등등에서 확인되며, 실제로 수, 당과 전쟁을 할때에 고구려 군대를 추정해보면 30만 이상으로 계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고구려 말기의 고구려 인구는 약 600만이 됩니다.
다만 후기 고구려는 거란이나 말갈, 실위 등의 족속을 이용하면 고구려가 동원할 수 있는 군대의 숫자는 좀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고구려 말기의 고구려 군대의 숫자를 50만이라고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고구려 전체 인구와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군대의 숫자로 고구려 전체 인구를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며, 다만 가장 근접한 추산 방법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때문에 이와 같이 추론했던 것이고, 그것이 350만 설보다는 더 타당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나는 고구려인의 인구를 약 500만 정도로 보고, 여기에 복속민까지 합쳐서 약 1000만으로 보는 것입니다.
김용만 선생님 글- 2
고구려 인구 문제에 대해 여러 견해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나의 견해도 한 부분을 차지하는 모양이로군요.
얼마 전부터 고구려 인구 관련 논문들을 수집해서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내 나름대로 고구려 인구에 대한 연구 방법론도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인구가 500만이란 나의 주장에 대해서,
작년 초에 신형식 교수님과 잠깐 문경에서 올라오는 차안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신형식 교수님은 처음에는 고구려 인구를 기록에 나오는 69만 7천호 * 5명을 해서 350만으로 보았다가, 최근에는 고구려 인구를 멸망시에 포로로 잡혀가거나, 죽은 자를 계산하여 약 200만 정도로 보고 있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인구를 500만 내외로 본 것이 많다고 보신 것입니다.
이옥 교수는 고구려 인구를 350만이 넘을 수 없다고 했는데, 11세기 200만, 17세기 500만 인구를 가진 한반도에서 삼국의 인구가 너무 많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는 [삼국유사]의 21만 508호 기록을 더 중시하고, 고구려 인구를 90만에서 135만 정도로 봅니다.
북한의 손영종 박사는 고구려인구를 거란, 말갈을 포함해 750만-850만 정도로 봅니다. 그는 고구려 69만 7천호가 당이 파악한 전체 인구가 아니며, 고구려의 자연호는 약 200만호에 육박할 것이라고 봅니다.
반면 국사편찬위원회 인터넷 사이트에 어떤 네티즌이 고구려인구를 물었을 때, 국편의 박대제 연구원이 답한 것을 보니 고구려 인구를 약 105만 정도라고 하더군요
그럼 중국학계에서는 어떨까요.대체로 70만으로 봅니다.
그 가운데 고구려 유민 30만이 중원으로 가고, 발해로 10만,신라로 10만이 사라지고, 대부분은 한족에 동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70만은 69만 7천호에서 1호=1명 으로 보기 때문인데, 문제는 70만의 고구려를 잡기 위해 백만의 당나라 군대가 쳐들어온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70만 가운데 30만이 군인인 나라 고구려가 가능할까요?
이 이야기는 더 하면 너무 우스워지므로, 넘어갑니다. 나중에 논문으로 비판할 때는 아주 정교하게 비판할 것입니다.
중국학계에서 좀 다른 주장이 있는데, 경철화는 고구려 인구를 348만 5천으로 보지만, 그 가운데 고구려족은 86만으로 봅니다. 민족별 구성 방식이라는 고구려 인구를 본 것은 방법상으로 대단히 무리가 따르므로, 고구려족 86만은 받아들을 수 없지만, 69만호를 戶로 인정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중국학계 자체에서 70만 주장에 무리가 있음을 처음으로 시인했다고 본다고 하기는 좀 어렵지만, 어쨌든 이런 주장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96년 11월에 완성된 전남대 사학과 박사과정의 조상현은 [고구려의 인구에 대한 시론]이란 논문에서 고구려 후기에 전쟁에 동원된 병사의 숫자를 일일이 조사하여, 고구려 인구는 300만명이 넘는 규모이나, 장기간 전쟁으로 멸망 시에는 200-250만정도로 줄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자. 우선 여기서 고민할 것이 있습니다. 고구려의 인구에 대해서 여러 견해들이 난무하는데, 우선 고구려의 인구를 적게 보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삼국의 인구가 고려시대보다는 적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신형식 교수님도 그것을 물으시더군요.
자 3가지 답변을 하겠습니다. 첫째 고구려와 고려는 영토가 다르다. 요동의 중요성을 그렇게 중시하던 학계가 왜 그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까요. 고구려는 요동뿐이 아니라, 부여지역과 책성 지역 등에서도 인구가 있습니다. 그 지역에 인구도 계산해야지, 한반도로만 우리 역사를 보니까, 자꾸 고구려와 백제 인구가 너무 많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 당나라가 파악한 호구가 전체 호구냐 아니냐는 문제도 중요합니다. 69만 7천호라는 기록이 절대로 고구려 전체 호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보다 더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세번째는 고구려의 최대군사동원 숫자가 전체 인구의 몇 % 인가 입니다. 고구려가 병력이 30만이라고 한다면, 전체 병력은 그의 20배가 되어야 합니다. 백제사 연구자 중에 인구가 병력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계산해서 백제 인구를 최대 동원능력 5만*20으로 계산하여 100만 내외로 추정하는 김기섭, 엄기표 박사님들도 있습니다. 그럼 고구려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여기에 나의 연구방법론이 몇 가지가 더 있습니다만, 그것은 나중에 논문을 쓸 때 사용할 계획이니, 여기서 공개는 불가능합니다.
고구려 인구문제는 고구려사 연구의 기초에 해당하는 문제인데, 너무들 오해가 많더군요.
그래서 나도 올해안에 이 문제를 연구해서 논문으로 제출할 계획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과거에 갖고 있던 주장이 잘못되었으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고 고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전의 주장을 계속 고집할 것입니다. 논문을 완성하기도 전에 미리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고구려의 인구는 500만 정도충분히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500만 보다 더 상회할 가능성이 500만 보다 적을 경우보다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여기까지만 말하겠습니다.
보충: 안형석님 글- 1
이 글은 원문이라 할 수 있는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의 발견]이란 책에 있습니다.
그런데 윗글은 역사문카페에서 간단히 답변한 것이라 이것만 보면 약간의 오해가 있을 수 있겠군요.
혹자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들어 인구를 약 120만으로 보는데, 이걸 근거로 드는 사람들은 삼국유사에 또한 신라 경주의 인구를 100만에 가까이 기록하고 있는점은 모르나봅니다.
경주인구와 고구려 전체 인구가 바슷하군요.
김용만선생님의 고구려인구에 대한 접근은 다방면에서 이루어집니다.
윗글은 그중 한가지 접근론에 불과하구요,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덤입니다.
고고학에서는 무덤의 분포와 규모, 개수를 기준으로 그 나라의 국력이나 인구를 판단합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일대에는 무덤이 약 12000여개가 있으며 이는 만주에서도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형태이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수치입니다.
그 규모에 있어서도 상당한데, 그 무덤의 규모가 크고 가옥과 같은 내부구조를 만든 것은 고구려인의 불교관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건 일단 넘어가고, 또한 수묘인이라 해서 왕과 함께 뭍혀 무덤을 관리하는 자가 왕의 경우 300여명(광개토대왕 330명), 귀족의 경우도 수십명(명림답부 20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덤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인력이 대강 감이 올겁니다.
지금 발견된 것이 12000여개라지만 소실되고 발견되지 않은 것도 합친다면 더 엄청나겠죠.
그것도 국내성 한 지역에서요,
그 담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유적입니다.
평양성의 남쪽에 장수산성이라고 있는데 고고학 연구결과에 의하면 10만여명이 거주했다고 추정한다 합니다.
그리고 평양성의 경우 둘레 23키로에 인구가 약 4~50만이 거주했다고 추정되며, 오골성(봉황성)도 둘레 15키로의 거대한 성이죠.
그 밖에 여러가지 측면에서 접근한 결과 고구려의 인구가 5백만가량으로 보며 복속민인 말갈, 거란, 해, 실위등을 합하여 그 이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처럼 조선은 이랬으니까, 삼국유사에는 이랬으니까 이렇다...라고 단순히 내놓은 견해가 아닙니다.
안형석님 글- 2
김용만선생님께서 고구려인구를 5백만정도로 잡고, 부속민들을 포함하여 그 이상이라고 결론내리신 이유는 어느 한가지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즉 여러가지 접근론을 통해 종합한 결과란 말이죠...
그런데 혹자는, 중국측 사서에 기록된 69만여호에 의거해 그런 견해를 내고 있으나
모든 학자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여 약 120만정도로 잡는다...남의 견해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려면 충분히 이해를 한 상태에서 하든가...
김용만선생님이 인구문제에 접근한 방법론으로는 대표적으로 무덤에 대한 것, 유적지에 대한 것, 농경에 충분한 평야와 다양한 식량자원 등이 있습니다. 고고학에서는 무덤의 규모나 개수 등을 통해서 인구를 추정한다고 하죠.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일대에는 무려 12000 여개의 무덤이 있답니다. 손실되었거나 발견되지 못한 것들을 생각한다면 어마어마한 수치입니다.
이것은 만주일대에서도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었으며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수의 무덤입니다.
고구려인들은 특유의 내세관념때문에 무덤도 평소 살던 구조와 같이 큰 규모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즉 무덤 하나 만드는데 투입되어야 하는 인력도 상당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수묘인이라 해서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 무덤주인과 함께 묻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왕의 경우 300여명(광개토대왕 330명), 귀족의 경우 수십명(명림답부 20명)...
이 정도만 옮겨와도 인구규모에 대해 감이 올겁니다.
그리고 유적의 연구결과, 장수산성의 경우 약 10만명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또한 둘레 23키로의 평양성은 약 4~50만명, 오골성의 경우도 둘레 15키로의 대규모성, 국내성의 경우 연남생이 국내성과 주변6성의 백성 10호를 들어 당에 투항했는데 국내성 주변엔 국내성만한 규모의 성이 없으니 대부분 국내성에 집중적으로 거주했을 것입니다.
즉 국내성만 해도 최소 약 2~30만의 인구가 거주했다는 것이겠죠.
그밖에 대규모 성은 부여성, 책성, 요동성, 신성, 건안성 등이 있는데 인구가 고작 120만이라.....
고구려가 매우 척박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요즘은 그래도 많이 그러한 인식이 개선된듯 싶습니다. 상세한 것은 넘어가더라도, 고구려 인구가 5백만 이상이라도 이들이 생존할 수 있는 식량자원은 충분히 보급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간단하게 3가지 접근론을 옮겨와 봤습니다.
사서의 기록의 근거는 부수적인 내용일 뿐 오히려 중요한 핵심은 위의 것들입니다.
그런데 핵심은 빼먹고 부수적인 근거만 가져다 전문적이지 않다니...
수박껍질만 핥아먹는 모양새입니다...한마디로 줘도 못먹는꼴이죠...
오히려 삼국유사를 근거로 120만정도를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의 근거는 정말 안습수준이죠.
그 근거는 이겁니다.
삼국유사 기록의 약 24만호와 조선때에는 이랬으니까...
이분들은 삼국유사에 경주인구가 100만에 달했다는 기록은 모르나봅니다.
경주인구와 고구려 전체인구가 비슷하군요...
또 삼국지에서 고구려인구 3만호이라 했는데 같은 상황에서의 부여인구는 8만호라했습니다. 이때에는 이미 부여는 자력으로 고구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는 국력이었는데 과연 고구려 3만호가 고구려전체 인구를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부여는 위와 친밀한 관계였으니 많은 정보가 있었겠으나 고구려와는 교류가 없었으니 부족한 정보를 토대로 기록된 수치에 불과하죠.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