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우명(座右銘)
흔히 ‘인생의 좌우명(座右銘)’이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이 말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자리 오른쪽에 놓인 명심할 내용’이란 뜻이다. 국어사전에는 ‘늘 자리 옆에 갖추어 두고 가르침으로 삼는 말이나 문구’라고 정의됐다.
선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좌우명을, 방의 벽에 붙여놓거나 책상 옆에 놓고, 늘 경계(警戒)로 삼았다. 중요한 것은 좌우명은 늘 볼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어 시시각각 자신을 일깨워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을 경계(警戒)하는 격언을 적어 좌우명으로 삼는 것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우선 ‘명(銘)’에 대해 알아보자. 명은 한문 문체(文體)의 일종이다. 고대에는 주로 종(鐘)이나 정(鼎, 발이 세 개 달린 솥)에 새기는 문장을 뜻했다. 진한(秦漢) 이후에는 비석에 새긴 글자를 의미하기도 했는데 동한(東漢) 시대 반고(班固)가 쓴 ‘봉연연산명(封燕然山銘)’이 그 예다. 여기서 ‘연연(燕然)’은 산 이름이다. 자기 스스로를 일깨우거나 다른 사람의 업적을 널리 기리기 위해 명(銘)을 새겼다.
좌우명이란 말은 ‘문선(文選)’에 실린 최원(崔瑗)의 ‘좌우명(座右銘)’이란 글에서 비롯됐다눈 것이 정설(定說)이다. 최원은 동한시대 저명학자 최인의 아들로 후한의 문학가이자 서법가였으며 초서(草書)로 크게 이름을 날렸고 초서 이론을 제창했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뜻을 둬 18세 때 낙양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천문(天文)과 역서(曆書)를 익혔고 경방(京房)의 주역을 배웠다.
그러나, 형인 최장(崔璋)이 타살당하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직접 나서 원수를 죽여 버렸다. 그 후 관아(官衙)의 추적을 피해 숨어 지내며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다행히 몇 년 뒤 조정의 사면(赦免)을 받아 고향에 돌아왔는데, 그는 자신의 살인행위를 깊이 뉘우치고 덕행을 기르고자 글 한 편을 지었다. 이 글을 명문(銘文)으로 만들어 책상 머리맡에 두고는 시시각각 자신의 언행을 경계했는데, 이 문장을 ‘좌우명’이라 칭했다.
이런 연고(緣故)로 최원의 좌우명은 역사상 최초의 좌우명이 됐다. 당나라 때 진자앙, 백거이(白居易) 등의 문인들도 그를 본받아 자신들의 좌우명을 만들었다.
최원(崔瑗)의 ‘좌우명(座右銘) 95자 속에 있는 말이다
守愚含光 (수우함광)
無使名過實 守愚聖所藏 在涅貴不淄 曖曖內含光(무사명과실 수우성소장 재날귀불치 애애내함광)
“명성이 실제를 넘지 않도록 해야 하나니 어리석음을 지키는 것은 성인도 지닌 바였다. 검은 곳에 있어도 검어지지 않음을 귀히 여기고 어둠에서도 속으로 빛을 지녀라.”
“어리석음을 지키라”는 구(句)는 “속으로 지혜로워도 그것을 너무 밖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노자(老子)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검은 곳에 있어도 검어지지 않는다”는 구(句)는 공자(孔子)의 말이다. 이처럼 유가(儒家)와 도가(道家)를 잘 섞어 빚어낸 그의 글은 후대 모든 좌우명의 원조(元祖)가 되었던 것이다.
이 글귀를 읽다보니 내 아버지께서 생전에 머리맡에 걸어놓으시고 즐기시던 문구가 생각난다.
“선부재정처(禪不在靜處) 역부재료처(亦不在鬧處) 부재일용응연처(不在日用應然處)부재사량분별처(不在思量分別處)’
중국 송대 대혜선사의 어록중 24자를 적은 나의 아버지의 휘호이다. 이 글은 “선(禪)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관련맺는 일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는 뜻이다. 선을 한답시고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다니는 것은 아직 선의 경지에 이르른 것이 아니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비록 그것이 시끄러운 저잣거리라 할지라도 매이지 않고 흔들림 없는 고요하고 비운 마음을 삶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경지에 들어서야 진정한 선을 할 수 있다는 뜻인 줄로 안다. 문을 걸어 잠그고 깊은 산 속에 숨어 있는 것보다 사람들 속에서 함께 어울리되 물들지 않음이 더 어려운 일이다. 깊은 산 속에 있으면서도 그의 마음이 번잡하다면, 그는 비록 산 속에 있으나 실은 장터에 나와 앉아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필자도 좋아하는 문구가 있다.
去去去中知 行行行裏覺(거거거중지 행행행리각)
”가고 가고 가다보면 알게되고, 행하고 행하고 행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 는 봉우(鳳宇) 권태훈[權泰勳] 선생의 좌우명이다.
이 말을 나도 무척 좋아하여 나의 좌우명으로도 간직하고 있는 경구이다. 그런데, 이 말이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서 나온 말로 잘못 알려져서 인터넷에 유포(流布)되고 있다. 노자 도덕경 어디를 뒤져봐도 이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 어디에서 사건이 시작되었을까? 지금까지 추척해 본 결과, 이 사건의 시작은 MBC 사극 '선덕여왕'에서 탈랜트 '신구'씨가 극중에서 위의 말을 대사로 사용하는데, 이때 자막에 출처가 노자 도덕경이라고 나온 것이 그 발단으로 추정된다. 공영방송에서 그 근거를 제대로 확인도 하지않고 방송에 내보낸 것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럽다. 심지어 중국의 블로그에서도 사극 '선덕여왕'을 근거로 들며 노자 도덕경에서 나온 말이라고 올라와 있다.
그러나, 실제 이 말은 단학(丹學) 연정원(硏精院)을 세운 봉우(鳳宇) 권태훈[權泰勳] 선생의 좌우명이며, 문헌 상으로는 '소설 丹'에서 실제 주인공 봉우 권태훈의 좌우명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은 네이버 지식백과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에도 나타난다. (아래 자료 참조) 이 경구(警句)를 생각하면 함께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산골짜기의 한 도인(道人)에게 세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하루는 산등성이에 잣나무 묘목을 심고 말했다.
"앞으로 100일 동안 산에 올 때 물을 가져와 묘목에 물을 주거라"
한 제자는 의욕으로 충만해서 “저는 매일 두 통의 물을 가져와 주겠습니다.”라고 했고,
또 한 제자는 비장한 목소리로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물을 주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세 번째 제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저는 제가 올 수 있는 날에 제가 들 수 있는 양만큼의 물을 가져와서 주겠습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앞의 두 제자는 그런 세 번째 제자를 보며 무기력하고 소극적이라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나자, 첫 번째 제자가 스승을 찾아가 말했다. "스승님 더 이상 못 하겠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수행하는 데 지장도 많습니다."
스승이 그 제자에게 말했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거라"
보름쯤 뒤, 두 번째 제자가 스승을 찾아와 말했다. “스승님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물을 가져가는 일이 너무 신경 쓰이고 힘들어서 정작 수행을 못하겠습니다."
스승이 말했다. "그렇던가! 편한 대로 하거라."
세 번째 제자는 100일이 지나고, 1년이 넘도록 쉼 없이 물통을 들고 산을 올랐다.
어느 날, 스승이 세 번째 제자에게 물었다. "자네는 물을 주는 게 힘들지 않던가?"
제자가 말했다. "저의 힘이 되는 만큼 물을 가져가니 그다지 힘들지 않았고 점점 근력이 길러져 힘도 세졌습니다. 어린 생명이 조금씩, 조금씩 쉼 없이 자라 강건한 나무가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수행에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가고, 가고 가다 보면 알게 되고 하고, 하고 하다 보면 깨달으리라. (去去去中知 行行行裏覺)'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는 시도도 해보지 않고 지례 포기하거나 비록 시작은 했으나 과한 욕심이 앞서, 또는 실패로 좌절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처마끝에서 내린 낙수가 바위를 뚫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꾸준히 연마한다면 이루 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쉽지는 않은 말이지만, 멈추지 않으면 알아가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무실역행(務實力行), 이론보다는 움직이며 실천해 나가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는 그렇게 해석한다.
삶에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올바른 방향을 잡고, 너무 과하지도, 태만하지도 않게 매 순간 쉼 없이 가고, 가고, 가고, 행하고, 행하고, 행할 때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열리게 될 것이라고.
당신의 좌우명은 무엇인가?
曉泉 4. 26. 2023
권태훈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0332&cid=1625&categoryId=1625
<방외지사 方外之士 열전 1,2> 조용헌 저 https://m.blog.naver.com/hs72hs72/2202073327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