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afefile/pds80/13_cafe_2008_07_11_14_18_4876ed0f3e18c) |
[가해]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 전교 주일(2017-10-22)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
▦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그런데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파견된 우리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세상 끝 날까지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
[금주의 말씀(요약)] : [제1독서 : 이사 2,1-5 / 제2독서 : 로마 10,9-18 / 복음 : 마태 28,16-20]
[제1독서 : 이사 2,1-5] :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올 완전한 평화를 노래하고 있다. 장차 이방인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어 계약에 참여하게 되고, 그러면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인간이 참된 삶을 하느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를 때 그리스도의 참된 평화 안에서 만민이 하나가 될 것이다. [제2독서 : 로마 10,9-18] : 바오로 사도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구원의 핵심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사실을 바오로 사도가 깨달았던 것이다. [복 음 : 마태 28,16-20] : 그리스도께서는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심으로써 만민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신다. 교회는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
[가해]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 전교 주일(17-10-22) | 기도문
|
† 시작기도 :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
삶을 살아가며 제가 배우고, 익혀온 생활방식들,
고정 관념들, 선입견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점점
단단해지면서 저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규정짓게 됩니다. 주님, 너무나도 쉽게 저의 시선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사람들의 모습과 마음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저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께도 그 잣대와
비판의 시선으로 주님을 심판하고, 거부합니다.
주님, 저희의 시선과 생각과 마음이 얼마나 작은지,
얼마나 좁은 것인지 깨우치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모든 것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믿을 수 있도록
저희에게 굳건한 믿음의 은총을 부어주소서.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3.blog.daum.net%2Fimage%2F22%2Fblog%2F2008%2F09%2F07%2F02%2F54%2F48c2c3d244929%26filename%3Dda_pray-03-1.jpg) |
[가해]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 전교 주일(2017-10-22) | 말씀 묵상방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명하신 마지막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음에 간직하고 열성적으로 실천하여야 할 주님의 '유언'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1고린 9,16)하고 말하였다. 현대인들은 과학 기술의 발달로 물질적인 풍요와 온갖 편리를 다 누리고 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자주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이런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인류 공동체에 맡겨진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현대 복음 선교](교황 권고, 1975.12.8) 서론에서 "그러기에 형제들을 견고하게 하는 본인의 임무는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맡겨 주신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책임이며(루가 22,32 참조) 매일같이 '걱정에 짓눌리고 있는'(2고린 11,28) 본인의 교황직의 기본적인 의무이기도 합니다. 불안하고 혼란한 오늘의 사회 속에서 복음화의 역군들이 한결같은 사랑과 열성과 기쁨을 가지고 사명을 다하도록 형제들을 격려해야 하는 본인의 의무는 필요하고 또 고귀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교회는 자신을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노력하는 교회"(선교 교령,1항)로 이해하고 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루가 4,43)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사명 전체를 집약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하느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도 복음을 전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 되어 공동체를 이루고 복음을 선포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본연의 사명이며 첫째 가는 사명이다. 그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존재 근거이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교회는 살아 있는 소중한 유산인 복음을 감추어 두고자 보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복음에서 생명을 얻도록 전하려고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셨듯이 복음 선포자들을 파견한다. 그러나 복음 선포자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그 복음의 선포자이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복음에 따라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한다. 우리가 먼저 회개와 쇄신으로 복음화되지 않으면 아무도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 선포의 첫째 목적은 복음으로 사람들이 새로워지는 데에 있다. 다른 사람들을 새롭게 하려면 전하는 우리가 먼저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삶으로 보여 주는 복음의 증거는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증거를 통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저 사람들은 다르게 살고, 왜,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살게 만드는 것일까?" 하는 관심을 갖게 하여야 한다. 이러한 삶의 증거가 복음을 힘있게 하고 효과적으로 선포하게 한다. 복음 선포자는 또한 복음 선포를 하면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따로 떼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는 누구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만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한 바로오 2세 교황께서 즉위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기신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일치시킵니다."하는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스도는 사랑하지만 교회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며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루가10,16).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에페5,2).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지 않고는 아무도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복음 선포자는 '복음 선포'라는 말을 생각할 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 환경을 복음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반대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과 가치관, 사상, 생활 양식을 바로잡아야 한다. 복음의 근본 정신이 각 민족 문화의 근원에까지 생명력 있게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 선포이다. 우리 모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주님께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복음 선포의 사명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존의 근거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 [주일묵상-1] : 기쁜 소식 온 세상에 전하자 |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세월이 흐른 뒤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시온 산이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모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게 될 것인데, 그때 모든 민족이 그리로 밀려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모여와 주님의 길을 배우고 그분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모든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더 이상 불의와 전쟁, 죄악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주님의 빛에 따라 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 2,1-5)
이사야의 예언은 예수님에게서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모든 민족은 온 산들 위에 굳게 서 있는 새 도성 예루살렘이자 성전이신 예수님께로 모여올 것입니다. 그분께 주님의 길을 배워 주님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기쁜 소식, 그분께서 전하신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당신께서 가르쳐주시고 명령하신 모든 것, 곧 아버지의 뜻인 주님의 길을 가르치고 모두가 그 길을 걷게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마태 28,18-19)
교회는 예수님을 따라 그분의 길을 걷는 이들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며 모두가 예수님의 길을 따르도록 초대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이어받아 이사야가 예언한 그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교회가 자신에게 맡겨진 이 임무에 따라 복음을 충실히 전할 때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드러날 것입니다.(마태 5,13-16) 왜냐하면 전교 자체가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가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듯이 선포하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도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선포하는 이들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의 길로 따라나선 이들입니다. 예수님에 관해 전해 들은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이 고백하던 신앙, 곧 예수가 주님이심을 입으로 고백하며 마음으로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었고, 또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가 믿는 바를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함으로써 그들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듣게 합니다.
그런데 바오로가 입으로 고백한다고 표현을 하다 보니 당신을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마태 8,21) 예수님께서는 분명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니 전교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함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입으로 선포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예수님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지 말고 세상 곳곳에 가서 사람들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도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말하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노래합니다.(로마 10,15-16)
오늘은 세상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전교 주일입니다. 이런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겠다고 다짐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겠다고 다짐합시다. 물론 전교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세상 곳곳에서 그분만이 참으로 우리 주님이심을 고백합시다. 그렇게 우리들이 믿는 바를 선포할 때 세상 모든 이들은 예수님께로 모여들어 그분의 길을 따라 걸을 것입니다........◆
[말씀자료 : 염철호 신부(가톨릭신문) I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
† [주일묵상-2] : 우리로서는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올해 전교 주일 담화에서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일 수 없으며, 다만 자신의 목적대로 활동하다가 없어져 버리고 마는 다른 수많은 단체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라고 역설하십니다. 참으로 교회는 선교성(宣敎性)을 잃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만민에게」, 즉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시(摘示)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로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모름지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구원의 길을 깨닫지 못한 이들의 마음이 열리도록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야곱 집안, 곧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빛 속에 들어오도록 초대합니다. 주님의 빛은 구원을 상징하며, 이는 주님의 교회를 통하여 선포되고 실현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구원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더불어 선포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몇 년 전에 우연히 손가락 끝 마디가 잘려나간 수녀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멕시코에 선교사로 파견된 분이신데, 어느 날 미국으로 떠나는 트럭에 올라탄 멕시코 사람들에게 음료수를 서둘러 건네주시다가 발생한 사고 때문에 손가락 끝 부분이 없어진 것입니다. 저는 본래보다 어쩔 수 없이 짧아진 수녀님의 손가락을 보면서, 그분이 정말로 아름다운 삶을 사신다고 느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고 강조하면서, 들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찬양하시면서 그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고 세례를 주어라(마태 28,19 참조)
2015년 9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미국을 사목 방문하셨을 때에 언급하신 일화입니다. 언젠가 카타리나 드렉셀(Katharine Drexel)이라는 미국 여성이 레오 13세 교황님을 알현한 자리에서, 자기네 가문에서 세운 학교에 선교 사제들을 파견해 주실 것을 청원 드렸답니다. 그런데 교황님은 “그런데, 자매님은요?”라고 반문(反問)을 하면서, 카타리나 드렉셀 스스로가 선교사가 되길 권하셨답니다. 카타리나 드렉셀은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수녀회를 설립했습니다. 2000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카타리나 드렉셀을 성인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고 하면서, 당신의 복음을 만민에게 전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소명을 똑같이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선교사여야 합니다.
‘변방’으로 가라는 부르심(「복음의 기쁨」 20항)
2005년부터 우리나라 가르멜 수녀님들이 캄보디아 프놈펜에 진출해 수도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 수녀님들이 열대지방에서 몸으로 겪는 수고가 적지는 않지만, 사실 더 큰 어려움은 그리스도교의 불모지에서 봉쇄와 정주(定住) 생활의 뿌리를 내리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나가서 선교하는 교회”(「복음의 기쁨」 17항 참조)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계십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복음으로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교회의 선교 사명」 7항)을 살게 됐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선물에 안주하지 말고, 세상에서 증인이 되라고 격려하십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말할 수밖에 없는”(사도 4,20 참조) 아름다운 삶으로 충만하시길 빕니다. 아멘..........◆
[말씀자료 : 정연정 신부(평화신문) I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
† [주일묵상-3] : 예수님과 함께라면 |
이번 가을에 새롭게 시작하는 예비신자 교리반에 신청하시는 분들이 예년에 비해 많아졌다는 이야기를 몇몇 수녀님께 들었습니다. 교황님 덕분이 아닐까라고 생각하시는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지난 여름 대한민국의 많은 분들이 교황님의 말씀과 행동으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남녀노소, 신자와 비신자를 넘어서 많은 분들이 기뻐했습니다. 그 결과가 이번 가을 예비자 교리반 신청으로 이어지는 모양입니다. 참 기쁜 일이고 고마운 일입니다.
교황님께서 보여주신 발걸음과 손길, 그분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복음의 말씀들은 참으로 놀랍고도 또 단순했습니다. 엄청 어려운 어떤 일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들이었고, 평소에 우리가 쉽게 하는 말과 많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감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보고 들으면서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가서 복음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이 말씀은 낯설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실천합시다’, ‘가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눕시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라는 파견을 미사 끝에 듣습니다. 우리는 항상 파견 받는 사람입니다.
이 마음으로 미사를 마치고 일상 안으로 들어갑니다. 파견 받은 이 마음을 전하고 실천하고자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저희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머뭇거리고 주저합니다. 복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잘 못 하는데 누굴 인도한다는 것인가! 내가 좀 더 신앙적으로 성숙하고 깊어지면 그때 사람들을 성당으로 안내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이렇게 나를 정당화합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대답을 내놓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에 한 말씀 덧붙이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우리는 잘 못 하고 망설이기 일쑤고 용기와 지혜가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워 주시고자 항상 곁에 있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할 수 있겠지요! 내 믿음이 깊고 내 기도 생활이 충만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성당으로 초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그분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나는 말주변이 없다. 숫기가 없다. 그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드러내려는 마음과 정성을 사람들은 알기 마련입니다. 나의 부족분을 예수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복음을 자녀, 친구, 이웃,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사실 전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라서 망설입니다. 가장 어렵게 느끼면서도 쉬운 것이 신자 아닌 분들과 식사 때 성호를 긋고 식사 전 기도를 하고 숟가락을 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이 찾아올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셨어요? 저도 신자입니다. 세례명이 어떻게 되세요?” 이렇게 우리는 신앙을 서로 확인하고 격려하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틈날 때 묵주반지, 묵주팔찌를 돌리며 묵주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마음에 담고서.
교황님께서 여름에 저희들에게 보여주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간단하면서도 사람들 마음을 크게 감동시키셨죠. 예수님께서 저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품고 세상으로 나가 기도와 실천으로 복음을 전합시다. ............◆
[말씀자료 : 김동일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
† [주일묵상-4] : 먼저 복음화의 삶 사는 일꾼돼야... |
연중 제29주일이고, 전교주일이자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주일이다. 어느 때보다도 수식어가 많이 붙은 주일이지만, 요지는 '전교(傳敎)'와 '복음화(福音化)'다. 예비신자는 자꾸만 줄고, 어떤 이유에서든 교회를 이탈하는 신자들이 늘어나는 추세에 있는 교회 공동체를 생각하면 슬퍼진다. 또 이 시대에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사실이 이렇게도 힘이 드느냐는 물음 앞에 걱정이 깊어진다.
해마다, 달마다 일상의 모든 믿는 이들의 삶이 세상에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인데, 세상은 별로 달라질 조짐도 없이 점점 반(反) 복음적이고 반 하느님적인 곳으로 치달리는 것처럼 보이니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잘못됐다면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졌을까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전교란 무엇인가? 글자대로라면 '가르침을 전하다'는 뜻이다. 좀 더 나가보면, 하느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는 일 혹은 천주교를 세상에 전하는 일이다. 복음화란 무엇인가? 복음화는 세상 안에서 '기쁜 소식이나 복된 말씀이 되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전교나 복음화는 결국 하느님 말씀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전해들은 사람은 스스로 기쁜 소식이나 복된 말씀이 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사는 이 땅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망하고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 기도대로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뤄져 모든 이가 넉넉히 누리고, 모든 죄가 용서되며, 모든 악이 극복될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님 말씀대로 이 땅에서 가난하고 굶주리며 울고 짓밟힌 이들이 스스로 그리고 함께 일어나 하느님을 모시고 나누고 섬기는 공동체를 일궈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거기에는 착취와 억압, 불의, 불평등, 사기, 질투, 살인, 전쟁 등등 모든 죄악상이, 죽음의 문화가 더는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다.
대신에 믿음과 사랑, 나눔과 섬김, 정의와 평화가 언제까지나 꽃피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애쓰는 일꾼들이 먼저 복음화돼야 한다. 복음화는 사도 바오로 말씀대로 하느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옷 입는 일"(갈라 3,27)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말씀이신 당신으로 옷 입기를 소망하시면서 당신의 일꾼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세상 안으로 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 안으로 보내시면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19-20)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모든 세례 받은 이들이 받들어 지켜야 할 최고의 사명이다. 이 지상명령을 실행하는 우리는 우리 가운데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시고 붙들어주시며 힘을 실어주시는 예수님께서 계심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시고 일꾼으로 뽑아주시고 세상 속으로 보내신 분이 직접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약속은 어제와 오늘 유효한 것처럼 내일 또한 유효하고 세상 마지막 날까지 유효할 것이다.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신 분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 놓고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우리를 보내신 분과 그분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그 선포는 곧 그대로 그분을 증거하고 증언하는 삶이 돼야 한다. 삶이 그분을 옷 입지 못할 때 그 선포는 거짓말이 되고, 그 거짓말은 온 세상을 병들고 신음하게 할 것이다. 끝에 가서는 부메랑이 돼 결국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고야 말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끝으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1테살 4,1).
해마다 돌아오는 전교주일이자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오늘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주님께서 파견하신 일꾼으로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복음화돼야 하고, 먼저 그리스도를 옷 입어야 한다. 그렇다고 이 시대에 주님의 성실한 일꾼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주님께서 몸소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는가. 그러니 신앙 선조들의 순교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옷 입고, 그리스도를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씀자료 : 신대원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
† [주일묵상-5] : 마태오복음서 상의 공동체의 결의 |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서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라며 전하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 위주의 유대교는 그 실효성을 잃었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실천이 하늘과 땅을 위해서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다고 믿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배우는 제자가 되어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도록 하겠다는 마태오복음서 공동체의 결의가 담긴 말씀입니다.
오늘은 선교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날입니다. 유럽 중세 사회는 그리스도 신앙을 근본이념으로 한 사회였습니다. 유럽 그리스도 사회가 아시아를 알게 된 것은 16세기 교역을 위한 상선(商船)과 더불어 선교사들이 중국과 일본에 오면서였습니다.
그 시대 유럽의 기술 문명은 아시아의 것보다 우월하였습니다. 유럽 출신의 선교사들은 기술 문명의 우월함과 백인이라는 우월감에 젖은 시선으로 아시아 현지의 종교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유럽 중세의 격언은 만고(萬古)의 진리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눈에 아시아의 종교들은 모두 퇴치해야 하는 미신(迷信)에 불과하였습니다.
선교는 구원받지 못할 불쌍한 유색인종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시혜(施惠)적인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복음 선포는 우월감에 젖어 있었고, 권위주의적이었습니다. 오늘도 거리나 전철 안에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독선적 태도에서 우리는 그 우월감과 권위주의의 잔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우월감과 권위주의는 19세기에 들어오면서 타민족을 지배하는 식민주의로 표현되었습니다. 유럽 각국은 경쟁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으면서 그것이 원주민에게 혜택을 주는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19세기에 유럽 문물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일본이 20세기 초에 한국과 중국을 식민지화하려 했던 것은 유럽의 식민주의에서 한 수 배운 결과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주의가 사라지면서, 유럽 교회는 처음으로 편견 없이 아시아 문화권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술 문명에 있어서는 유럽 사회보다 뒤졌었지만, 정신문화에 있어서 아시아는 열등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깊은 영적 가치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격언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오늘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도 발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당시 유다교 지도자들을 거슬려 말씀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믿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교 지도자들이 하느님이 버렸다고 가르치던 죄인들과도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옹졸한 집단이기주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고 아끼고 배려하시는 아버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이웃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그들을 구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아니면서도 신앙인보다 더 관대하게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이웃을 위해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 또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수긍하고 그 가르침 안에 인간 삶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보기에 자기가 아끼는 이웃에게 신앙생활을 권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문제는 각자의 마음 깊은 곳에서 결단할 일입니다. 가두(街頭)에서 보험 가입을 권유하듯이 신앙을 권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은 인간 삶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스스로는 실천하지 않으면서 이웃에게 신앙을 권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화를 위한 노력은 교세확장이나 신자배가 운동과 같은 사업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습니다.
기업이 수입을 올리기 위해 사세확장을 하고 제품 판매 배가 운동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사업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을 믿고, 그분 안에서 삶의 보람을 찾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으로부터 배우는 모임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오늘의 사회를 위해 과연 보탬이 되는 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위해 우리가 구원적 실천을 하는 사람들인지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환경오염은 인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기술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이 많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이나 병고 혹은 고령으로 소외당한 이들은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이런 문제 앞에서 우리는 구원적 선택을 하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대단한 실천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실천입니다. 신앙 공동체가 그런 노력을 할 때 비로소 신앙이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남녀 성(性), 계급과 직업 등이 모두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는 높은 사람들의 권위가 인간차별을 당연시하면서 사회의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에서는 모든 차별은 극복할 장애로 생각됩니다. 오늘의 사회는 이웃을 위한 배려를 소중히 생각합니다. 이 배려로써 인간차별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실천도 인간 차별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으신 것은 건강한 자와 병자의 차별을 없애는 배려였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배려로써 인간차별을 없애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신앙 공동체가 이 배려의 노력을 진지하게 하지 않는다면 복음화는 하나의 구호로 끝날 것입니다. 교회는 내세를 위한 보험회사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현세에도 내세에도 잘 살아 보겠다는 이기주의자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하늘과 땅을 위해 중요한 것은 내가 보여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고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배려이다. 내가 실천한 사랑이 하느님의 자비를 사는 길이고 이웃을 위한 배려라는 것을 너희의 실천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서, 그들도 그것을 배워서 나의 제자가 되게 하여라. 이웃을 위한 너희의 배려 안에 나는 세상 끝 날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
[말씀자료 : 서공석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
| |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