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운에세이] 새해 첫 산행의 교훈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큰소리 칠 게 못 된다. 더구나 장담도 막말도 해서는 안 된다. 돌아서면 언젠가는 후회할 날이 오기 마련이다. 지난 25일, 금요일은 오랜만에 가까운 삼성산(481m)을 갔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한 줄기로 서울의 금천구와 안양시에 걸쳐 있는 명산이다. 왕복 4시간 정도면 되는 거리다. 거기까지만 갔다와도 하루 운동으로는 충분하다. 게다가 식전운동이다. 요즘은 거의 한 달 이상 동안 산이라곤 아무데도 가지 못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해야 할 운동을 제때 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좋지 않은 뒤끝이다.
이러고도 내 건강이 늘 좋으리라고 기대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된다. 한심한 일이지만 이번 일로 나는 나의 태만이 가져다 준 엄중한 대가를 단단히 치렀다. 오래만에 한 산행이라 그런지 그로 인한 후유증을 겪었다. 꼭 이틀이 지난 어제 아침부터 저녁무렵까지 거의 하룻낮 동안 이따금씩 오른쪽 허벅지가 쑤시는 통증을 느꼈다. 근육통이 왔다. 물물이 뜨끔거리는 아픔으로 나도 모르게 저절로 '아야, 아야'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무쇠 다리라며 부러워하던 옛 테니스 동료들의 이야기는 영영 소리 없는 메아리로만 사라졌는가.
내가 원래 엄살이 심한 편이란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데, 옆에서 지켜보는 집사람의 이야기이니 부인할 수만도 없겠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는 난감해진다. 정작 나는 아파 죽을 지경이라 내는 소린데 그걸 엄살 부린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씻은 듯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인가. 이열치열이다. 오늘 저녁무렵에는 한 시간 남짓 동안 가볍게 걷기를 하고 왔다. 다리가 아프던 다음이라 멀리는 가지 않았다. 달빛 공원 수변 산책로를 따라 송도 2교까지만 갔다왔다.
어쨌거나 나이 들어서는 몸을 움직이는 전신운동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끼니는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서 운동은 그렇게 하고 있지를 못하다. '앉으면 죽고 걸으면 산다.' 는 말이 맞다. 산이 없는 곳, 송도 아이들 집에서 지내는 것이 문제였다. 내 처소에 있었다면 그럴 리는 없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인 데가 내가 사는 임곡(林谷)이다. 산은 늘 나를 부른다. 엄동설한이라도 웬만해서 나는 집에만 박혀 있는 성미가 아니다. 그 날은 아침 7시 40분경 느지막히 집을 나섰다. 능선에 올라서자 그제서야 동쪽 산 위로 해가 거의 반쯤 모습을 드러낸다. 겨울 해는 게으름뱅이다. 비봉산만 갔다오겠다고 나선 걸음이었다.
그날 아침도 기온이 영하 10도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추위는 문제가 아니다. 오래 산행을 하지 않았던 터라 갑자기 무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서자 또 욕심이 생긴다. 시야가 멀리까지 탁 트이고 기분이 그만이다. 삼성산 국기봉이며 관악산 연주대, 멀리 인천 송도의 초고층 빌딩들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눈도 어지간히 녹고 아침이라 사람도 없다. 길이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다. 산행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다. 내친 김에 안양유원지 예술공원쪽으로 내려갔다. 가는 길엔 고작 세 사람과 마주쳤을 뿐이다. 그것도 비봉산 쪽에서만.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관악수목원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을 건너야 유원지 예술공원로에 들어서게 된다. 그 개울은 보통 때는 물이 거의 없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오기라도 할 때는 신발을 벗고 건너야 한다. 그런 날은 일 년에 손꼽을 정도다. 큰 돌로 된 징검다리가 있으나 물이 조금만 많아도 잠긴다. 여름철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다른 때는 맨발로 개울을 건너는 일이 쉽지가 않다.
그런데 그 곳에 일대 변혁이 생겼다. 이전의 징검다리는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아주 커다란 장방형의 넙적한 돌판 여남은 개가 개울을 가로질러 새로 놓여 있다. 이제는 아무리 큰 홍수가 나도 끄떡없을 만큼 튼튼하고 안전한 돌다리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새로운 변화도 볼 수 있다. 혹한에 그런 힘든 공사를 한 종사자들의 노고가 감사하다. 이런 것도 복지사업이다. 날로 달로 발전하는 우리나라의 한 단면을 오늘도 목격한다.
처음부터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발걸음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시장기가 약간 느껴지기는 했으나 그건 감수하기로 작심했다. 많이 먹어서 탈이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소식(小食)은 하면 할수록 좋다. 혼자 하는 산행이 지루하지 않게 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깊은 생각을 하면서 걷는 것이다. 생각에 몰두하며 걷다 보면 시간이 언제 가는 지도 모르고 가파른 산길도 힘이 들지 않는다. 사람은 분명 생각하는 갈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한 파스칼의 말에 수긍이 간다.
정산 8부 능선쯤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진다. 아직도 산에 눈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그럴 줄은 예상을 못했다. 아이젠이 없는 터라 설설 기다시피해야 했다. 그래도 정상이 눈앞이라 돌아설 수도 없다. 산길은 언제나 하산할 때가 더 어렵다. 하산길 걱정을 하면서 기어코 국기봉 정상을 밟았다. 아무도 없다. 나 혼자다. 또 한 번 개선장군이 됐다. 잠시 머물다 이내 하산을 시작했다. 염려했던 것만큼은 위험하지 않다. 미끄러운 데는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네 발로 더듬거리기도 했다.
1월 하순인데도 나로서는 새해 첫 산행이다. 첫째 날은 항상 의미가 다르다. 오늘은 우리 여생의 첫째 날이다. (Today is the first day of the rest of your life.)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우리는 항상 오늘에 산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하루하루는 모두가 우리 인생의 첫째 날이다. 첫째 날의 감동과 의미는 다르다. 이를 잊지 않는 삶이라면 성실한 삶, 유의미한 삶, 보람 있는 삶이 될 것이다.
산과도 더 가까워지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다. 삼성산 말고도 관악산, 수리산, 청계산, 광교산, 백운산,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소요산, 아차산, 검단산, 운길산 등 서울 근교에는 고만고만한 명산들이 너무 많다. 바라보기만 하는 산이라면 그들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 백견이불여일행(百見而不如一行)이다. 단련을 통한 튼튼한 다리로 근육통 앓는 일도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
조선 중종조의 선비로 문장가요 서예가인 양사언(陽士彦)의 다음 시조를 상기하면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泰山雖高是亦山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登登不已有何難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世人不肯勞身力 뫼만 높다 하더라 只道山高不可攀
2013. 01. 29. 인천 송도에서/草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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