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산' 보러갈 때 알고 가야할 것들 어영담 나대용
충무공 이순신을 소재로 한 영화가 2014년 ‘명량’이후 이번 2022년 ‘한산’으로 개봉되었다. 개봉 첫날 첫 시간 영화를 보고 왔다. 명량 때보다 더 젊은 나이에 임한 전투로 나대용이 만든 거북선(영화에서 구선龜船이라고 한다)이 처음으로 전투에 등장하고 잘 알려진 학익진 또한 등장한다. 화면 전환이 빠른 전쟁 영화라서 영화 보러 가기 전에 몇 가지 알고가면 영화 이해에 도움이 될 듯 싶다.
한산대첩은 1592. 7. 8 (음) 충무공 48세
명량대첩은 1597. 9. 16(음) 충무공 53세
충무공은 한산대첩 때 부상 중이었다
“살피지 못한 동안 기운은 어떠하시옵니까? 전일 두 번이나 보내주셨기에 나아가 뵙고 적을 토벌하는 방략을 아뢰려했습니다. 하지만 접전할 때 조심하지 못한 탓에 적의 탄환에 맞고 말았습니다. 죽을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어깨뼈가 깊이 상한데다 갑옷을 입고 있다 보니 상처가 헐어서 진물이 계속 흐르다보니 밤낮으로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씻고 있지만 아직 쾌차하지 못해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 편지는 『이충무공전서 권1 잡저 ‘어떤 이에게 드리는 글’』에 실려 있다.
위 편지의 내용과 같이 충무공은 한산 전투 전에 이미 부상 중이었다.
아래 참전목록처럼 5월 29일 사천 전투에서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 장군과 함께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활을 쏠 수가 없었다.
한 달 열흘이나 부상 중일 때에 한산 전투를 맞이한 것이다.
그 안에 아래와 같이 7번의 전투들이 더 있었다.
따라서 몸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투에 임한 것이다.
사천 전투에서 탄환을 맞다
1592년 5월 29일 사천전투에서 충무공께서 적탄을 맞았을 때의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자.
“우수사(이억기)가 오지 않으므로 홀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출발하여 노량에 도착하니 경상우수사 원균이 도착하여 있어 함께 상의했다. 왜적이 정박한 곳을 물으니 사천선창(지금의 사천시 선진리)에 있다고 했다. 왜인들은 이미 뭍으로 올라가서 산봉우리에 이미 진을 치고 배는 그 산봉우리 밑에 줄지어 매어 놓았는데, 항전하는 태세가 재빠르고 견고했다. 나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통을 바람과 우레같이 난사하게 하니, 적들은 무서워서 후퇴했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 명이지 알 수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羅大用)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활꾼과 격군(格軍) 중에서 탄환을 맞은 사람도 많았다. 적선 13척을 분멸하고 물러나와 주둔했다.“
한산대첩 시작
목동 ‘김천손’의 결정적 정보
이순신의 함대가 경남 고성 땅 미륵도에 도착했다. 이때 미륵도에 사는 목동 김천손이 함대에 달려와 긴급한 정보를 전달했다.
“적의 함대 70여척이 오늘 오후 2시경에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머물고 있다”
는 내용이었다. 레이더가 없던 시절 이렇게 적의 위치를 먼저 파악하는 것은 천운과도 같은 것이었다. 원래 김천손은 난을 피해서 가족들을 데리고 산 정산 부근에 와 있었다. 그래서 왜군의 함대가 관측된 것이다. 김천손이 알려주기 전에 서로 적이 근처에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평소 연해민들을 잘 관리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두 가지의 전술 수립
하나는 왜군이 육지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넓은 바다로 유인하는 작전
둘째는 유인한 적 함대를 포위공격하기 위한 학익진(鶴翼陣) 전법
한산대첩 상황
7월 8일 새벽, 출항한 조선 함대는 견내량이 보이는 바다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곳 견내량의 지형은 진해만에서 통영만 쪽으로 지나는 협수로에 해당하는 요충지이지만 해전을 벌이기에는 너무 좁고 위험한 수로였다.
이곳은 대형 선박이 항해하기 어려운 최소 폭이 약 180미터, 최소 수심 2.8미터, 수로 길이는 약 4키로 미터 정도이다. 또 암초가 많아서 자짓하면 판옥선이 좌초할 위험도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 육지와 섬이 많아서 해전이 불리할 경우 왜군이 도주할 염려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장군은 판옥선 5∼6척을 보내서 왜군들을 유인했다. 왜군들은 유인작전에 걸려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왜군들은 조선 수군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이렇게 걸려든 왜군들을 학익진으로 포위 공격을 가한 것이다. 포격전에는 학익진이 안성맞춤이었다.
학익진은 큰 틀에서는 일본 함대를 포위 공격하기 위한 횡렬(橫列) 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후 조선의 판옥선과 왜군 군선이 1:1로 맞붙었다고 볼 수 있다. 한산대첩은 학익진을 펼쳐 세계 최초의 함대 포격전을 한 것으로도 일컬어지는 전투였다. 당시는 요즘처럼 정교하지 못한 시대라 조선수군은 왜군 군선과 50미터 내외의 가까운 거리에서 총통을 발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목을 베기보다 사살에 치중하다
장군은 전투가 있을 때마다 목을 베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니 사살하는데 치중하라고 명령했다. 적의 머리 한 개를 베는 시간에 화살을 쏘면 더 많은 적을 제거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산대첩 결과
왜군은 73척이 출전하여 대선35척, 중선 17척, 소선 7척 등 59척 분멸되고, 대장선인 대선 1척과 14척은 부산 쪽으로 도주했다. 지휘관 와카자키는 구사일생으로 도주했고, 해적출신 와키자키 사베에 사망, 와타나베 시치에몬 사망, 미나베 사마 노조 할복 했다. 이 해전에서 왜군의 피해는 9,000여명이었고, 헤엄쳐 도주한 자가 200∼400명이었다. 왜군이 손실을 입은 군선 59척은 공교롭게도 조선수군의 함대 척수와 같았다. 그러니까 조선수군 판옥선 1척이 왜군 함대 1척씩을 깨뜨린 셈이다. 1척을 격침시키는 데는 1시간정도 걸렸다. 하지만 자료에 따라 전과에 대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산전투’ 결과 보고서
“바다 가운데 나와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을 펼쳐 일시에 진격하면서 각각 지자·현자·승자·총통을 쏘아 먼저 2∼3척을 깨뜨리자 여러 배의 왜적들이 사기가 꺾여 도망치려했습니다. 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기를 타고 분발해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총환과 화살을 마구 발사하니 그 형세가 바람과 우레 같아 적함과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거의 다 해 버렸습니다.”
상세한 한산대첩
이순신 학익진이 최초로 펼쳐진 임진왜란 3대 대첩 한산대첩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혹은 견내량대첩(見乃梁大捷)은 1592년 8월 14일(선조 25...
blog.naver.com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
영화 속에서 박지환 배우가 열연하였다
거북선을 만든 나주 나대용 생가 소충사
안녕하세요 큐레이션curation-낭만도사 ж 나대용 장군 생가 전라남도기념물 제26호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
blog.naver.com
영화 '한산'의 나대용
바다 물길의 신 어영담
영화 속의 안성기가 열연하였다
이순신의 해전을 빛나게 한 수로향도 물길의 신 어영담
충무공의 휘하에는 조선수군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게 한 많은 인물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초기 해전에서 ...
blog.naver.com
영화'한산'의 어영담
[출처] 영화 ‘한산’ 보러 갈때 알고 갈 것 어영담 나대용|작성자 낭만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