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저작권의 행방
임병식 rbs1144@daum.net
병아리 눈물만큼이나마 나오던 저작권료가 금년 들어 뚝 끊어지고 말았다. 돈의 많고 적음의 액수를 떠나서 나도 저작권료를 받는다는 콧대를 세우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것이 없어지고 나니 마음이 황폐화된 기분이다.
그것은 작품하나가 교과서에 실려서 그 부산물로 나오던 것이었다. 저작권료를 받아 좋아서가 아니라 내 글이 여전히 학생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하나의 징표로써 흐뭇한 마음을 지니고 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기대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런 마당에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 대안을 찾아보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만들어낸 속담하나.
‘알아야 면장을 하지’라는 말이다. 이것은 내가 만든 말인 만큼 연도와 출처가 확실하다. 때는 1961년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당시는 군사혁명이 일어난 첫해로 학교에서는 공휴일이지만 거주지 읍.면 사무에서 거행하는 기념식에 참석을 하도록 했다.
그날 면사무소에 나갔더니 면내에 거주하는 학생뿐 아니라 공무원, 지역주민들이 면사무소 앞마당에 많이 모여 있었다. 그 인원이 대충 잡아서 50명가량이 되었다. 면장님이 단상에 올라 양복 안주머니에서 준비해온 기념사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분은 인품은 훌륭하나 언변이 없기로 명이난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감안하여 미리 신경을 쓴 것 같았다. 한데 한 5분쯤 지났을까. 때마침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면장님이 읽고 있던 그 기념사를 나꿔 채어 날아가 버렸다. 그 바람에 면장님은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돼버렸다. 이때였다.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알아야 면장을 하지!”
무슨 저의가 있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읽고 있던 연설문을 놓치자 멍하니 넋 놓고 서있는 것이 답답해서 한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 말을 하니 주위 사람들이 큰소리는 내지 못하고 ‘풋풋’하면서 웃었다. 그날 상황은 그렇게 끝이 났다. 물론 기념사도 끝을 맺지 못하고 말했다.
한데 방학이 끝나고 등교를 하고 보니 학교에 이 말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알아야 면장을 하지’ 하거나 말이 약간 변질이 되어서 ‘아나 면장!’ 또는 ‘아무나 면장을 하나’ 등으로 유행이 되고 있었다.
이것은 나의 창작품이다. 일부 카피라이터의 말 중에 ‘든든해요, DJ’ 나, ‘남자가 함부로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혹은 ‘5분 빨리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등등은 지어낸 사람이 저작권료를 받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도 주장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일부에서는 이 속담을 두고 옛날 전국시대에 공자님이 아들에게 했다는 '면면장(免面牆) 이야기를 한다. 즉 견문이 좁으면 담벽에 막힌 것 처럼 답답하다는 것이다. 이미 2.500년전에 말했다는 것인데 . 암튼 그건 모르겠고 나는 당시 눈앞에서 일어난 상황을 보고 즉흥적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니 누가 나보다 앞서 어떤 책에다 실은 근거가 없다면 저작권을 한번 주장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에 대해서 누군가가 반박하여, 내가 그 말을 했던 시점 이전에 그렇게 다른이가 말한 근거를 댄다면 깨끗이 물러날 용의가 있다. 그렇지만 어느 작품집이나 기사, 속담집에 전해진 근거가 없다면 내 주장은 유효다가고 생각한다. 내가 말을 했던 후로 급속히 전파되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즘의 현상이다. 주변에서 갑자기 유행이 되고 있는 어떤 말을 많이 듣는다. 그것은 ‘1도 없다’는 것으로. ‘일도 없다’는 건 아무 일도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데 이것은 ‘일’을 ‘1’자로 바꾸어서 ‘여러 것 중에 나는 1도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한다. 마치 한때 ‘돈 많이 버세요’라는 말이 유행하더니 그처럼 급속히 펴져나가는 추세이다.
유행어는 출처가 불확실한 경우가 많다. 그런 중에는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있다. 누가 퍼뜨린 것인지는 모르나 연도는 거의 확실하다. 바로 1895년 을미왜변 시 일본자객의 난입으로 인하여 민 황후가 사망한 것을 이리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외교권을 빼앗은 그들이 황후를 시해했을 때 실로 그 분위기가 으스스했던 것이다. .지금은 이 말이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하며 비통하고 비장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말로 정착이 되었다. 그밖에 내가 아는 말이 몇 개 있는데 ‘넉살좋다’는 건 강화고을에서 생겼다고 한다. 이 말은 ‘부끄러운 기색 없이 비위가 좋다’는 것으로 뜻이 굳어졌지만, 당초에는 연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강화도 처녀가 연날리기에서 1등을 차지했는데 그 연의 살이 네 개였다는 것이다.
이 밖에 ‘뻘때추니’는 처녀가 제멋대로 짤짤거리며 요리저리 쏘다니는 것을 이르는데, 이것은 제주에서 생겨났단다. 고려시대 제주에는 몽고말을 사육하던 곳이 있었다. 그곳의 말들은 방사되어 자유롭게 갈기를 세우고 마음껏 내달렸다. 그것을 보고 멋대로 쏘다니는 처녀를 일러 말했다.
‘미주알고주알’은 유행 보다는 그 출처에 관심이 가는 말이다. 미주알은 항문에 닿아있는 창자를 말하는데 이 부분은 끝부분이다. 그만큼 무엇을 속속들이 안다는 뜻으로 쓰인다. 하면 고주알은 무엇인가. 이것은 별의미가 없이 한자의 어조사처럼 운율을 맞추어 쓰인 것일 뿐이다.
이것도 누군가가 만든 말일 텐데 알아 볼 방법은 없다. 그래서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런 말들처럼 유래와 출처는 아나 저작권자를 모르는 건 할 수 없지만 내 경우와 같이 확실한 장본인이 존재하는 터에는 주장을 좀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진의는 아니고 농이기는 하지만.
하나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자료로서 가능성은 있지만 주장을 앞세우기에는 불가능에 가깝지 않는가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래방의 기계처럼 장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관철을 하려고 든다고 해도 입증 책임을 주장하는 측에서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마당에 누가 뜬 구름 잡는 일에 적극 나서 증인을 서주겠는가. 해서 헛말로 해보는 소리로, 다만 그것은 언어생활을 하는데 풍부에 눈곱만큼이나마 공헌을 했다는데 대해 의미를 두고 만족할 일이 아닌가 한다. (2023)
첫댓글 알아야 면장을 하지'하는 속담에 대해서는 춘추시대 공자님이 이미 말했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면장이라는 직책이 있을수 없는 당시에 빗대는 것은 있을수도 없는 일이며, 免面墻이야기도 답답하다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해도 내가 말한 직책을 들어서 말한 것과는 다른것이다.1961년 당시 열여섯짜지가 무슨 그런 고전을 알아 그런말을 했겠는가. 그냥 눈앞에서 벌어진 현장을 즉흥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다만 바라기는 당시 장본인인 인품좋은 면장님의 인격에 손상이 가지 않았으면 한다.
그 면장님의 상황을 즉흥적으로 표현하신 선생님의 재치가 당시 지역사회에 널리 회자될 만큼 독특하고 신선한 경구가 되었군요 저도 청년시절에 그 말을 자주 썼지만 그 말이 어디서 생긴 것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외국에 나가있는 아우도 사람들이 그말을 쓰는걸 보면서 그게 어디서 나온 말인지 궁금했다고 하더군요.
이것은 정확히 팩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