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으로 읽는 구약성경 하나님의 선물 8가지
우리는 앞으로 8회의 연재를 통하여 구약성경의 중심 광맥을 이루는 8개의 주제인 창조, 구원, 율법, 제사(예배), 역사, 예언, 시, 지혜를 다루고자 한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와 특히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므로, 하나 하나 그 의미를 묵상하며 오늘날 우리의 삶에 조명해 보고자 한다.
구약성경의 선물(1): 창조의 선물(창 1:1-2:3)
최희준의 대표적인 노래인 <하숙생>에 있는 가사처럼 모든 사람들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라는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고 산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근본을 알지 못할 때 참된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마치 해외로 입양을 간 아이가 성장한 후에 자신의 부모를 애타게 찾으며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 고국으로 돌아오듯이, 사람은 자신의 뿌리를 알지 못하면 진정한 자존심을 가질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수정(水晶)에 대해 알고 싶으면 수정이 만들어진 과정을 보지 않고 완성된 수정을 보아야 하며, 장미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 씨앗이나 줄기가 아니라 활짝 핀 장미를 보아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은 보석이나 꽃처럼 완성된 모습이나 전성기의 모습으로 알 수는 없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전기가 말해주듯이, 사람의 진면목은 그의 조상과 성장배경을 통하여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마치 미국의 44번째 대통령 당선자인 버락 오바마가 케냐 출신의 아버지에게 태어났고 인도네시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젊은 시절 깊은 방황을 하였지만 그의 할머니의 헌신적 사랑으로 바른 길을 찾았다는 인생의 배경을 알게 될 때 현재 그의 인간됨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와 문명은 인간의 근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며, 각각 다양한 신화와 전설과 서사시를 통하여 우주와 인생의 근원에 대하여 설명 하려고 한다.
세상을 동서양으로 구분해 본다면, 서양인들은 본질적으로 개체적이지만 동양인들은 우주적이다. 우리가 처음 영어를 배울 때 처음 배운 문장은 ‘I am a boy, you are a girl’이었다. 즉, 서양인들은 ‘나는 누구며 너는 누구냐?’라는 인식론적 질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한문을 배울 때 가장 처음 배운 단어와 문장은 ‘하늘天 따地’였다. 우리는 ‘나와 너의 정체성’이 아니라, 하늘과 땅 즉, 우주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처음부터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대표적인 동양종교로 꼽을 수 있는 유교나 불교는 우주의 근원에 대한 가르침이 기독교 만큼 뚜렷해 보이지 않는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우주 창조의 대 서사시로 경전의 문을 활짝 열고 있다. 이리하여 기독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를 사도신경의 첫 조항으로 삼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 왔다. 바로 이런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하여 조선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은 젊은 시절에 그의 절친한 친구인 광암(光菴) 이벽(李壁)을 통하여 처음으로 소개 받고 너무나 벅찬 감동을 느꼈으며, 이후 그의 유배지였던 다산 초당에서 <중용강의보>를 완성하면서 그 서문에서 그 때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갑진년 (1784) 4월 보름에 맏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나의 형제들은 이벽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한강) 물을 따라 내려왔다. 배 안에서 천지가 창조되는 시원이나 신체와 영혼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이치에 관하여 들으니 놀랍고 의아하여 마치 은하수가 무한한 것과 같았다. 서울에 돌아오자 이벽을 따라가 <천주실의>와 <칠극> 등 몇 권의 책을 보고 비로소 기뻐하여 마음이 기울어졌다.
젊은 시절 창조신앙을 통하여 인격적 하나님을 경험한 다산은 그의 사상 체계 전체를 수정할 수 있었고, 이후 그는 평생 동안 유교 경전 전체를 ‘유신론적 실천론’(實學)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며, 음양오행의 세계관을 버리고 과학적인 세계관 속에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사상과 실천의 틀을 만들 수 있었다. 다산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고향집에서 서울 조정으로 가는 나루터가 있는 옥수동까지 배를 타고 오며 천지 창조 이야기 속에서 ‘하늘의 은하수가 그에게 쏟아지는’ 느낌을 받은 것처럼, 시편 8편의 시인도 밤하늘의 은하수를 바라보면서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고 탄성을 질렀다(3-4절). 여기에서 ‘내가 보다’(我觀看你指頭所造的天 [Chinese Bible])는 동사는 시편 8편에서 시인의 (정신) 활동과 연관하여 나타나는 유일한 동사이다. 그는 원경(遠景)인 밤 하늘의 달과 별을 보고(3절), 근경(近景)인 “소떼와 양떼와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를 바라보면서(7-8절), 그를 생각해 주시고 찾아와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경험하며 가슴이 터질듯한 감동을 느끼고 온 세상을 향한 청지기적 사명감을 받아들인다(6절).
시편의 시인들은 밤 하늘의 은하수 뿐 아니라, 춘하추동의 변화를 느끼면서 그들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아름다운 서정시로 담아 내었다. 시편 65편의 시인은 “밭이랑에 물을 넉넉히 대시고 이랑 끝을 마무르시며 밭을 단비로 적시며 움 돋는 새싹에 복을 내려 주십니다”를 노래하며 봄비의 은택을 찬양한다(10절). 84편의 시인은 “가을비로 샘물을 가득 채우시는” 주님의 은혜를 노래한다(6절). 시편 147편의 시인은 봄비를 주셔서 산에 풀이 자라 우는 까마귀 새끼를 먹이시는 주님의 자상한 은총으로 시작하여(8-9절), 가을의 아름다운 추수(14절)를 거쳐 눈과 서리와 우박으로 온 세상을 얼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와(16-17절), 다시 봄 바람이 불어 얼어붙은 온 세상을 녹이시는 주님의 지혜를 노래하고 있다(18절). 이리하여 65편의 시인은 ‘한 해를 영광스럽게 장식해 주시는’ 주님의 선하신 손길을 찬양한다(10절).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바라보며 두려움과 감격 속에 젖어 드는 모든 시인들의 시정(詩情)은 모두 창세기 첫 장(1:1-2:3)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이 장은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로서 우주의 시원(始原)을 한 폭의 그림에 웅장하게 담아내고 있다. 아무도 태고의 천지창조를 지켜 본 사람이 없으며, ‘있으라!’는 명령을 들은 사람도 없지만, 저자는 마치 목격자의 증언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언으로 우주의 기원과 형성 과정에 대한 모든 토의를 종식시켜 버린다. 그는 물리학의 가장 기본 개념을 이루는 시간과 공간으로 창조의 과정을 짜임새 있게 엮어간다. 시간의 관점에서 천지창조는 삼 일을 한 쌍으로 대칭시키는 엿 세에 걸쳐 창조를 완성하며(1:31) 체 칠일에 창조주의 안식과 복주심으로 마무리된다(2:3). 공간적 관점에서 저자는 ‘하늘과 땅의 창조’를 선언한 후에(1:1),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단계를 따라 뼈대를 형성하고 내용을 채워간다. 하루 하루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둠에 쌓였던 우주의 베일은 하나씩 벗겨지고 완성되어 가며, 혼돈과 공허에 쌓였던 세상의 원래 모습(1:2)은 바다와 땅, 나무와 꽃, 동물과 인간, 해와 달과 별들로 자리를 잡아간다. 이 세상은 아래와 같이 각각 삼일을 대칭으로 완전한 질서를 이루게 된다. 1. 빛 4. 광명 2. 바다와 궁창 5. 어족과 조류 3. 땅과 채소 6. 짐승과 인간 7. 하나님의 안식
하나님께서는 첫 삼 일에 공간적 구조를 만드시고, 둘째 삼 일에는 채우신다. 이리하여 빛과 광명, 바다와 어족, 궁창과 조류, 땅과 채소는 그 안에서 먹고 살 짐승과 인간으로 짝을 이루고 있다. 인류의 문명들이 꽃피고 사라지며, 우리가 한 평생 터전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근원과 구조를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다른 글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창조의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창조주 하나님은 마치 군대의 대장군처럼 모든 존재에 대하여 ‘있으라’고 명령하시면, 모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은 ‘그대로 있게 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 지으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매일 매일의 창조에 나타나고 있다(4, 10, 12, 18, 21, 25절). 즉,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은 개체 뿐 아니라 전부가 다 좋았다. 모든 창조가 완성되었을 때, 온 우주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다(31절). ‘심히 좋았다’는 표현은 완성된 우주(cosmos)를 보시고 하나님도 흥분하였음을 말해준다.
천지의 창조에서 하나님은 동물들(1:22), 인간(1:28), 안식일 (2:3)에 복을 주신다. 하나님의 복주심은 이후 아담(5:2), 노아(9:1), 족장들(12:3; 17:16, 20)에게 이어지며, 창세기의 중심 주제가 된다. 하나님의 복 주심은 모두 번식하는 생물과 연관되어 생육하고 번성하는 능력을 가리키지만, ‘안식일’에 복을 주심이 특이하다. 즉, 쉼이 없이 참된 생명의 번성은 이루어질 수 없다.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우리가 놀라는 것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별되며 자존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점이다. 그는 이 우주의 일부가 아니며 인간 상상의 산물도 아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만드시고 채우시는 초월적인 인격이시다. 그는 나무나 산이나 바다에 거하는 정령이 아니며, 세상의 한 영역을 책임지고 있는 하나의 신도 아니다.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거기에 살고 있는 그 모든 것도 주의 것이다”(시 24:1). 따라서 그는 “대장장이는 도금장이를 격려하고, 마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모루를 치는 자를 격려하여 이르기를 '잘했다. 잘했다' 하며, 못을 박아서 기우뚱거리지 않게 하는” 세상의 우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시다(사 41:7). 마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하나님과 아담이 서로 손이 닿을 듯 말 듯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근본적인 구별이 존재한다. 이 구별이 기독인의 인식론에 근본을 이룬다. 따라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비록 불타는 용광로에 던져진다 하더라도 느부갓네살이 만든 신상에 절할 수 없었다. 욥은 “언제 태양이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 맞추었던가?”(31:26)라며, 당대의 사람들이 천체를 신격화하고 경배할 때 자신은 그 유혹을 뿌리쳤음을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권면한다(고후 10:5).
오늘날 우리는 이제 막 시작된 세계적인 금융 위기의 대혼돈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주식과 펀드와 부동산에 과다한 부채를 지고 투자한 가정들이 경제적인 허리케인에 휩쓸리고 있는 위기와 혼돈의 시대에 우리는 어둠 속에 있던 세상에 빛을 주시며, 혼돈의 물을 정복하시고 땅을 만들어 주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주와 인생의 근원과 궁극적인 운명에 대하여 새로운 방향성을 설정하여야 할 것이다. 마치 옛날 이집트를 탈출하여 혼돈의 광야에서 처음으로 창조 이야기를 듣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적 세계관을 떨치고 새로운 우주관과 인생관을 가지며 새로운 영적 공동체를 이룬 것처럼, 우리들도 이 시대의 신들이 된 물질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 분파주의, 혼합주의 신들을 우리의 정신과 생활 속에서 다 몰아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어주시는 천지의 창조주와 정감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기를 사모하게 된다.
구약성경의 선물(2): 구원의 선물(시 130:1-8)
‘내게 아쉬움이 없으라’는 말씀을 남겨 주고 떠난 고 김수환 추기경의 고백처럼, 시편은 지난 수 천년 동안 모든 성도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 초대교회 500년을 완성하고 중세 1000년을 열어준 어거스틴(354-430년)은 임종 직전에 몸이 몹시 아팠을 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 130:4)란 말씀을 벽에 써 놓고 날마다 묵상하며 위로를 받았다. 종교개혁으로 근세의 문명을 연 마틴 루터(1483–1546년)는 동일한 시편 속에서 죄 사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1절 말씀을 따라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de Profundis)라는 찬송가를 지었다. 종교개혁의 정신이 시들어 가고 있을 때 요한 웨슬레(주후 1703-1791년)는 바로 이 찬송가를 런던의 성 바울 교회당에서 처음으로 들으면서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 후, 그의 영적인 삶은 변화되고 감리교를 창설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이 시편의 중심 이미지를 이루고 있는 ‘깊은 물 속’은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느낌을 준다. 요즈음에는 스킨스쿠버 다이버들이나 깊은 물 속을 들어가 볼뿐 일반인들은 그 세계를 전혀 경험할 수가 없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구원을 설명할 때 ‘깊은 물 속에서 건짐 받는 이미지’를 중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모세는 나일 강물에서 악어 밥이 되어 죽을 수 밖에 없었지만 건짐 받고 ‘물에서 건졌다’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출 2:10). 선지자 요나는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져졌지만’(2:3), 주님의 은총으로 고래 뱃속에서 벗어나 니느웨에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다. 다윗은 모든 원수들과 사울의 손에서 살아나게 된 것을 ‘죽음의 물살’에서 벗어난 것으로 노래한다(시 18:4). 우리의 상상을 좀 더 펼쳐보면, 인류 최초의 대홍수를 경험하고 살아난 노아도 우주적인 대혼돈의 물 속에서 일엽편주를 타고 건짐받고 새로운 인류를 시작하였음을 기억하게 된다. 그 때 ‘땅 속 깊은 곳에서 큰 샘들이 모두 터지고, 하늘에서는 홍수 문들이 열려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땅 위로 쏟아졌지만’(창 7:11-12), 노아와 그의 식구는 구원을 받고, 이후 방주에서 나와 마른 땅을 밟고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8:14-22).
홍수와 깊은 바다에서 건짐을 받는 구원은 구약성경에서 끝나지 않고 신약성경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예수께서 한 번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널 때 큰 광풍이 일어나 파선의 위기를 당했지만, 친히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며’ 잠잠하게 하셨다(막 4:37-39). 또한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의 전쟁에서 ‘큰 용 곧 옛 뱀’이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아이를 임신한 여인’을 죽이기 위하여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죽이려고 하는데 ‘땅이 입을 벌려 강물을 삼켜’ 아이를 건진다(계 12:15-16).
우리가 구약성경을 좀 더 자세히 읽어 보면, ‘깊은 물에서의 구원’은 창조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천지창조는 바로 태고의 심연을 가르고 마른 땅을 만들어준 사건이었다. 오늘날 창세기 1장을 읽어내려 갈 때, 먼저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교리를 생각하게 되지만, 이 용어는 중간사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마카비 2서 7:28). 물론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입장은 구약성경 전체가 전제하는 신앙고백이며, 다른 성경 구절에서 명시되고 암시된다(시 148:5; 잠 8:22-27). 그렇지만, 창세기 저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고 말한다(창 1:2). 여기의 ‘깊음’은 ‘깊은 물’이다. 즉, 천지창조는 온 세상을 뒤덮고 있던 태고의 물을 ‘하늘 위의 물’(하늘 바다)과 ‘땅 아래의 물’(바다와 지하수)로 나누는 작업이 중심을 이루며,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 물을 정복하고 사람들과 생물들에게 주신 선물이었다. 주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바다 위에 견고하게 세워주셨기 때문에 그 터전 위에서 우리는 안심하고 일하며 살게 되었다(욥 38:4; 잠 8:29). 시편의 저자들도 깊은 물을 정복하고 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시 74:13, 17; 24:2 참조).
하나님께서 태고의 물을 정복하시고 땅을 드러내신 창조의 과정(창 1:2, 6, 9)은 이후 구약성경에서 구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패러다임이 되며 구원역사에서 가장 먼저 출애굽에 적용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왕 바로의 학정을 벗어던지고 나왔을 때, 그들 앞에는 홍해가 가로 놓여 있었고 뒤에는 이집트의 전차부대가 추격하였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유유히 흐르던 홍해를 가르고 그의 백성들이 건너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갔다. 물이 좌우에서 그들을 가리는 벽이 되었다”(출 14:22). 이것은 장엄한 장면이다. 당대 세계 최고의 제국이던 이집트에서 수백년 동안 종노릇하던 민족이 이제 제국의 압제를 끊고 나오며, 도도히 흐르던 홍해에서 모두 수장될 줄 알았는데 그곳에서 새로운 백성들로 솟아오르고 있다. 마치 정월 초하루의 태양이 바다에서 솟아나듯이, 새로운 하나님이 백성들이 바다에서 솟아 오르며 땅으로 나오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바로 그들의 새 창조였다.
물을 정복한 구원의 패러다임은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가르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 새롭게 이루어진다(수 3:7-17). 그 때 홍해의 사건이 반복되었다.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강 물에 닿으면 요단 강 물줄기가 끊기고 둑이 생기어 물이 고일 것이다...온 백성이 모두 요단 강을 건널 때까지 주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강 가운데의 마른 땅 위에 튼튼하게 서 있었다”(13, 17절). 또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예언적 영감을 전수하기 위하여 요단 강을 건너갈 때 강이 갈라지는 사건은 반복된다. “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왕하 2:8, 12). 모세와 여호수아와 엘리야가 경험한 바다와 강의 정복 모델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망이 되었으며, 이후 이사야 선지자는 다시 한 번 역사 속에 새로운 출애굽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았다. “바다와 깊고 넓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의 깊은 곳을 길로 만드셔서, 속량받은 사람들을 건너가게 하신, 바로 그 팔이 아니십니까?”(새번역, 51:9-10).
이와 같이 구약성경에서는 혼돈의 물에서 건짐 받는 사건은 단지 한 개인이 체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받는 구원 사건에 그치지 않고 온 민족 공동체의 구원 사건에 대한 모델이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세례 의식으로 설명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모두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고전 10:1-2). 신약시대의 세례는 원래 몸을 물 속에 집어 넣은 후 다시 올라오게 하는 의식이었다(막 1:9-10). 여기에서 ‘물 속에 넣는 의식’은 죽음을 상징하며, ‘물에서 올라오는 의식’은 새로운 생명을 상징해준다. 즉, ‘세례’는 기본적으로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탄생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 혼돈의 물속에서 건짐 받는 사건은 세례를 받는 것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즉, 구원이란 영적으로 볼 때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고통스럽고 힘든 곳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깊은 곳’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밑바닥이다. 한 번 이곳에 빠지면, 아무도 자기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없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더 이상 이대로 살 수 없습니다. 제발 좀 벗어나게 해주십시오”라고 애절하게 부르짖는다. ‘깊은 곳’은 우리가 경험하는 질병, 불임, 파산, 기근, 전쟁, 이별, 죽음 등의 온갖 불행과 고통을 상징해 준다. 예언자들은 우리의 ‘구원자’(삼하 22:3; 시 68:19; 사 49:26)가 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몸과 영혼, 개인과 공동체, 인생과 역사, 사회와 생태계의 모든 ‘탄식’에서 구원하시고 ‘정의와 평화’가 깃던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았다(사 11:1-9; 롬 8:20-22 참조).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장차 여자의 후손(창 3:15)과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를 보내어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이다(사 7:14; 9:6-7; 사 11:1).
구약성경의 구원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평화(샬롬)를 이루는 것이지만, 그 평화는 죄사함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유혹에 빠져 범죄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대속죄일(욤 키푸르, 유대력 7월 10일)을 정하여 죄 씻음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여셨다(레 23:27). 이 때 대제사장은 “살아 있는 그 숫염소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이 저지른 온갖 악행과 온갖 반역 행위와 온갖 죄를 다 자백하고 나서, 그 모든 죄를 그 숫염소의 머리에 씌운다”(레 16:21). 어떻게 양과 염소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질 수 있겠는가 마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사람마다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양과 염소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다윗의 우리야의 아내를 취한 범죄는 너무나 중대하고 심각하였기 때문에(삼하 11장), 그는 동물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많은 자비를 좇아 주님께서 친히 그의 모든 죄를 ‘말끔히 씻어 주시고’(시 51:2), ‘우슬초로 정결케 해주시며’(7절),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10절), ‘성령을 거두어 가지 마시며’(11절), ‘자발적인 마음을 허락해 주시길’ 구하였다(12절). 선지자 이사야는 다윗의 기도가 장차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속죄양이 될 고난 받는 주의 종의 대속적 사역에 근거하여 응답될 것임을 증거하였다(사 53:6-7).
다윗처럼 시편 130편의 시인도 ‘깊은 곳에서’ 부르짖음을 시작하다가, 갑자기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라는 질문을 던지고(3절) 바로 이어서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4절)라고 고백한다. 이 말은 주님께서 그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주님을 경외하겠다는 뜻이 아니고, 용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이므로 주님을 경외한다는 뜻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어떤 수련을 통한 깨달음이나 해탈이나 아니라,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심을 느끼는 은혜의 체험으로 이루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인은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립니다”라는 아름다운 고백을 하고 있다(6절). 여기에 천지창조의 새로운 요소가 나타난다. 천지창조는 하나님께서 태고의 물을 정복하고 땅을 주신 은혜였을 뿐 아니라, ‘빛이 있으라’는 창조주의 명령으로 흑암으로 뒤덮인 세상에 빛을 주신 은총의 사건이었다. 깊은 물에서 건짐 받은 시인(1절)은 이제 그의 영혼에 빛이 비치길 사모한다(5절). 파수꾼 보다 더 간절한 심정으로 주님을 기다린다. 그는 그렇게 기다리던 빛을 체험하였을까?
사도 바울은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며(고후 4:6),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빛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화란의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였던 반 고흐는 ‘낮보다 더 찬란한 밤하늘’을 그의 화폭에 아름답게 수놓았다. 그는 폭풍한설 보다 더 쓰라린 인생을 살았지만 어둠을 햇빛 보다 더 빛나게 승화시켜 내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깊은 심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우리들을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우리 각자의 영혼 속에 은총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우리도 죄 사함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영혼의 평화를 누리며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빛으로 승화해 낼 수 있는 능력 주시길 사모한다(고후 5:17).
구약성경의 선물(3):언약의 선물
언약이라는 말은 오늘날 일상생활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구약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는 삶의 가장 중요한 영역들인 신인관계, 부자관계, 부부관계, 군신관계가 이 용어로 표현되었다. 예로서,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언약형식인 “나는 너희 하나님이며,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는 입양을 통한 부자 관계에서 “나는 너의 아버지이며, 너는 나의 아들이다”, 결혼을 통한 부부 관계에서 “나는 당신의 남편이며, 당신은 나의 아내입니다”, 군신 관계에서는 “나는 너의 왕이며 너는 나의 종이다”로 표현되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부자와 부부와 군신 관계의 은유로 묘사된 것은, 이 세 관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인격적이면서도 친밀하고 항구적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오늘날 언약(言約)이란 단지 ‘말로 하는 약속’ 정도로 이해되지만, 고대의 세계에서는 ‘피로 맹세한 상호적 헌신’이었다. 이리하여 언약을 맺을 때에 항상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통하여 언약을 맺는 당사자들은 자신의 목숨과 명예와 가문을 걸고 맹세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헌신을 확인하였다.
이와 같이 성경시대와 우리 시대의 언약 개념 사이에는 문화적 거리감이 크기 때문에, 이 용어는 계약(contract), 협약(pact), 조약(treaty), 약속(promise), 맹세(oath), 헌장(charter), 유언(testament) 등으로 다양하게 이해되고 번역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고고학의 발전으로 주전 2000년대와 1000년대 고대 근동아시아의 여러 조약 비문들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멘덴홀은 후기 청동기시대(주전 1400-1200년)의 힛타이트 제국의 국제조약 문서들을 방대하게 번역함으로써 구약시대의 언약과 매우 유사한 언약의 특성을 찾아내게 되었다(1955). 즉, 힛타이트 제국이 주변 여러 속국들과 맺은 종주권(宗主權) 조약에는 (1) 전문(前文), (2) 역사적 서문, (3) 조약 규정들, (4) 문서 보존과 공적인 봉독 규정, (5) 증인들의 목록, (6) 축복과 저주라는 여섯 가지 특징적인 요소를 갖고 있으며, 이 조약 문서는 동물제사를 바치는 비준 의식으로 공포되고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성서학자들은 바로 이 여섯 가지 요소들이 신명기에 그대로 반영되어 (1) 전문(1:1-5), (2) 역사적 서문(1:6-3:29), (3) 언약의 규정들(4:1-26:19), (4) 저주와 축복(28:1-28:68), (5) 언약 문서의 보존과 정기적인 낭독(31:1-13), (6) 언약의 증인들과 증거(31:24-32:52), (7) 후기: 모세의 축복과 죽음(33:1-29)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에 학자들은 언약 개념이 오경 뿐 아니라, 신구약 성경의 전체적인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인식을 점진적으로 갖게 되었다. 사실 기독교회에서 지난 2000년 동안 성경전서를 크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두 부로 나누고, 각각을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으로 부름으로써 두 성경을 언약의 관점에서 보고 있음을 증거해 왔다. 즉, 성경전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중보를 통하여 자신의 옛 백성인 이스라엘과 맺은 옛 언약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와 맺은 새로운 언약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물론 성경전서를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하는 것은 제롬의 라틴 불가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것은 신약성경의 히브리서에서 구약의 역사를 ‘첫 언약’으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새 언약’으로 보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히 8:7, 13; 9:1, 15, 18). 예수께서도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의 희생적인 죽음을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눅 22:20; 고전 11:25). 이와 같이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이 신구약성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알고, 언약의 관점에서 두 성경의 통일성과 구원 방식의 동일성을 고백하여 왔다. 우리는 아래와 같이 여섯 가지 주요 언약이 구약성경의 중추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며, 이 모든 언약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음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창조 언약
구약성경을 열어주는 창세기의 첫 두 장에 나오는 천지창조와 인간창조 이야기에는 ‘언약’(berit)이라는 용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레미야서에는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33:20), ‘달과 별들이 밤을 비추는 규정’(choq 31:35), 그리고 ‘주야와 맺은 언약’(berit)과 ‘천지의 법칙’(chuqot 33:25)이 나타나고 있다. 즉,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시고 밤낮의 순환을 이루도록 한 창조의 질서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세운 언약으로서 결코 파기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가 원래 창조된 질서대로 움직여지도록 언약을 세우신 이후에, 아담과 하와를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창 1:26). 여기에서 ‘형상’과 ‘모양’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인간의 통치적 기능을 말해준다. 고대근동아시아의 조약으로 말하자면, 종주(宗主)이신 주님은 자기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영광스러운 속주(屬主)로 세우셔서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시 8:5-6). 즉,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는 언약 관계가 존재하였다(호 6:7). 이 두 당사자 사이에는 ‘선악과’를 통하여 한계가 설정되었으며 아담은 봉신(封臣)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지음 받았다. 이 언약 속에는 아담과 하와가 결혼을 통하여 후손을 번성시킬 뿐 아니라, 온 세상을 하나님의 은총과 정의로 다스리고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노동을 하고(창 1:27; 2:15), 또한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사는 축복이 주어졌다(창 2:3).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언약 관계는 파괴되었다(3: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여인의 후손’을 통하여 유혹자인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온 인류를 구원할 원복음(proto-evangelium)을 주셨다(3:15).
2. 노아 언약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던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이후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많은 후손들을 낳았지만, 노아의 시대에 와서 사람들의 생각이 항상 악하여져서 온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게 되자(창 6:5),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통하여 세상 만물을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다(7절). 그러나 노아는 ‘주님께 은혜를 입은 자로서 당대에 의인이며, 완전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으므로(8-9절), 홍수 심판에서 온 가족이 건짐을 받게 되었다. 홍수 심판이 끝났을 때 주님께서는 노아가 드린 제사를 받으시고, 다시는 사람의 죄 때문에 온 세상의 생명들을 멸하지 않고, 자연 질서를 보존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였다(9:8-11). 그리고 하늘에 무지개를 두어 ‘언약의 증거’로 삼으시고(12-13절),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을 보존하는 영원한 언약’(16절)을 세우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근본적인 질서를 인간의 죄와 상관 없이 보존해 주시는 ‘보존의 언약’을 노아에게 세워주셨다. 이 보존의 언약 안에서도 사람들은 ‘고기를 피채 먹는 것’(9:4)과 사람들의 피를 흘리는 살인을 금령으로 받는다(5-6절; 사 24:5 참조).
3. 아브라함 언약
노아 홍수 이후 바벨탑 사건으로 온 세상 사람들은 흩어지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약속의 땅으로 불러 내셔서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하게 하며,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게 하겠다”는 약속을 주셔서, 원시복음을 이어가게 하셨다(창 12:1-3). 그러나 아브라함이 약속된 후손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두려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밤의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약속의 언약’을 맺어주셨다(창 15). 주님께서는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는 언약의 전문과 역사적 서문을 친히 말씀하시며(7절; 출 20:2; 신 5:6 참조), 이어서 언약체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제물을 아브라함에게 준비시킨다(9절). 그런데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는 놀라운 장면이 제시된다(17절). 여기에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자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고대근동 아시아의 종주권 언약 체결식에서 쪼갠 고기는 속주의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지나가야 했다(렘 34:18-20).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사이로 지나가심으로써,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책임지시고 이루실 것을 맹세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고(karat berit) 땅과 후손의 약속을 주셨다(15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를 따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겠다고 맹세한 약속의 언약이었다. 물론 이 언약에도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언약의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할례를 행하여야 하는 조건성이 포함되어 있었다(17:9-27).
4. 시내 산 언약
이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바로의 학정 아래에 종살이 하고 있을 때, 주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출 2:23-25)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시며 시내 산에서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시내 산 언약을 맺기 전에, 주님께서는 주권적인 구원의 은총으로 그들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셨음을 선포하시고 만약 그들이 언약을 지킨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19:5-6). 따라서 시내 산 언약은 아브라함의 언약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띤 것으로서 율법수여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를 가장 집대성하여 표현한 언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내 산 언약은 (1) 전문(출 20:1), (2) 역사적 서문(20:2), (3) 언약의 규정들: 십계명(20:1-17)과 판례들(20:22-23:33), (4) 율법의 기록, 보존 및 낭독(24:4, 7), (5) 제물의 피를 통한 백성들의 맹세(24:4, 8), (6) 그리고 비준(24:9-11)으로 구성된다. 마지막 비준 의식에서 하나님은 친히 영광 가운데 임재하신다. 시내 산 언약에 포함된 증인은 이후 ‘하늘과 땅’으로 제시되며(신 32:1; 사 1:2; 미 6:1-2), 저주와 축복은 이후 신명기에서 방대하게 제시된다(27-28장). 이후 시내 산 언약은 모압 평지(신 29:1-30:20)와 세겜(수 8:30-35; 24:1-28)에서 지속적으로 갱신된다.
5. 다윗 언약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통일한 이후에 종교적 구심점으로서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짓고 싶었고(삼하 7:1-3), 이 때 주님께서는 나단을 통하여 자신이 다윗의 집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하셨다(11절하). 여기에서 집은 왕조를 의미한다. 이리하여 나단의 신탁은 ‘다윗 왕조 창건 신탁’이 된다. 주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다윗에게 후손(zera')과 보좌(kisse')를 약속하셨다(12, 13절). 즉, 주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은 다윗 당대 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까지 넘어가는 ‘영원한 약속’이 되었다. 다윗 언약에서 다윗의 후손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이 되어 부자 관계가 수립되었다(14절상; 시 2:7). 다윗의 언약에서 특이한 것은 다윗의 후손들이 하나님께 범죄할 때 비록 징계는 받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거두시지는 않겠다는 약속이 포함된 것이다(14절하-15절).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다윗의 언약은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이며, 영원한 은혜 언약으로 이해되었다(시 89:26-37).
6. 새 언약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로 세워 열국에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돌처럼 굳어지고 부패하여져 하나님을 배반하고 열국의 우상을 섬김으로써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이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장차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을 맺어 그들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전한다(렘 31:31-33). 이 새 언약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핵심으로 갖고 있다. 즉, 옛 시내 산 언약에서 주님은 율법을 선물로 주셨지만, 그들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실력이 없었으므로 범죄하였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내면적 심성을 새롭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들 속에 새 영과 새 마음과 성령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새 힘을 얻을 것을 말하고 있다(겔 36:27). 즉, 그들은 새로운 본성을 얻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과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주의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
위에 제시된 구약성경의 여섯 가지 중심 언약들은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모두 성취되고 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세우신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시는 새 계약의 주체가 된다. 즉, 첫 아담은 ‘장차 오실 자의 표상’인 ‘예수 그리스도’이며(롬 5:14), 예수께서는 둘째 아담으로서 새로운 인류의 대표가 되며 계약의 머리가 된다. 예수께서는 새 아담으로서 부활하셔서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신다. 노아에게 주신 창조질서의 보존 언약은 메시아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우주에 참된 평화와 질서를 가져오는 것으로 성취 될 것이다(사 11:1-9). 예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서 믿음의 후손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며, 시내 산 언약에 부과된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시고, 제사 제도를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완성하시며,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가 바라 본 새 언약을 자신의 피로서 세우시고 그의 백성들에게 오순절 성령을 보내어 주심으로써 온 인류의 구원자가 되셨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원복음(창 3:15)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다(골 2:14-15).
구약성경의 선물(4): 역사의 선물
20세기가 시작되던 100 여년 전 우리 나라는 문을 꼭꼭 잠그고,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합병이 되어 나라를 잃었다. 그 후 40여년 동안 우리는 우리의 말과 이름까지 잃게 되고 신사참배를 강요받아 민족혼까지 말살되던 혹독한 일제 강점기 식민주의 시대를 경험하였다. 1945년에는 해방의 감격을 맞이하였지만 나라는 남북으로 두 동강 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삼년 동안 동족상쟁의 남북 전쟁까지 겪게 되었다. 우리의 강토는 초토화 되었고 산업 기반은 모두 붕궤되었으며 전쟁의 상처로 인심은 황폐해졌다. 그렇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나라는 세계역사에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었고,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자랑스러운 역사를 이루어내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분열사관(分裂史觀)을 극복하지 못하고, 바야흐로 ‘역사의 전쟁’을 겪고 있다. 이리하여 한편에서는 ‘친일반민족 인명사전’을 만들고, 그 반대편에서는 ‘친북반국가인명사전’을 만들겠다고 한다. “과거는 외국과 같다”(L. P. 하틀리)는 말처럼,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과거에 대하여 깊은 동정심(sympathy)을 가지고 객관적이며 심층적인 연구를 통하여 과거를 재구성하면서, 과거를 거울삼아 더 나은 미래 세계를 창조해 내어야 한다. 이와 반대로 마음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우리의 선조들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에 눞여 죽이고 후손들의 이마에는 주홍글씨를 새겨 남북과 좌우, 보수와 진보를 항구적으로 대립시키며 소통과 화해를 향한 미래를 차단시키는 매우 불행하고 안타까운 상황에 빠지고 말 것이다. 우리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심각한 남북 문제와 제국주의적 식민주의를 경험하였다. 그들의 남북 갈등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부터 배태되었다. 사사시대 때에 배태되었던 지파간의 갈등은 결국 솔로몬의 평화 시대가 끝난 후 폭발되어 왕국은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이후 북 왕국 이스라엘은 첫 왕 여로보암으로부터 시작하여 208년 동안 존속되며(930-722년), 남왕국 유다는 르호보암으로부터 344년 동안 존속되었다(930-586년). 그러나 북왕국은 결국 고대근동아시아 천하를 통일한 앗시리아에게 멸망하여 흡수되어 버렸고, 남 왕국 유다도 세계 최고의 제국이었던 신 바빌론에게 무너져 흡수되어 버렸다. 남북 왕국이 공존하던 약 200년의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는 끔직한 전쟁들을 치루었다. 둘로 갈라진 남북 이스라엘은 정치적-문화적-종교적으로 화해가 불가능한 관계로 악화되었다. 바빌론 포로 후 페르시아 시대에도 남북은 갈라져 서로 적대적 태도를 취하였다(에스라, 느헤미야). 솔로몬 이후 약 1000년 동안 진행된 남북의 갈등은 신약시대에도 풀려지지 않았으며(요 4), 결국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에 의하여 주후 70년에 완전히 나라를 잃고 2000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 세계를 유랑하였다. 그렇지만,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영토와 언어와 주권을 가진 현대의 민주 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역사 속 일어날 수 있는가? 그 비밀은 유대인의 민족성이나 천재성 때문이라기 보다 그들의 역사성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집대성하여 성경의 구원사 속에 담아 두었으며, 그것은 그들의 후손과 온 인류에게 최고의 선물이 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크게 분류하자면, (1) 태고사(창 1-11), (2) 족장사(창 12-50), (3) 정복과 정착사(출 1-삿 21), (4) 왕국사(삼상 1-왕하 25), (5) 포로 귀환 후 역사(대상 1-에 10)로 구성된다. 이 유구한 역사 기술을 살펴보면, 세 가지 관점이 눈에 뜨인다. 첫째로 그들은 자신의 역사를 세계의 문명사와 접목시켜 배타적 사관을 극복하였다. 둘째로, 그들은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추구하면서도, 동족상쟁의 갈등을 넘어 화해를 이루어가는 치유의 사관을 다듬어 내었다. 셋째로, 그들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완성해 가시는 미래지향적인 사관을 다듬어 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어둡고 치욕적이고 고통스러운 과거의 역사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창조적 지식으로 새롭게 창출하여 내었다.
1. 배타적 독선주의를 극복하는 문명사 속의 열린 민족사관
오경의 대미를 장식하는 모세의 노래에 보면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는 말씀이 나온다(신 32:8). 이것은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노아의 세 아들들인 셈, 함, 야벳의 후손들이 70개의 민족과 나라들을 만든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후손들 70명의 숫자대로(창 46:27. 출 1:5. 신 10:22) 온 세계의 민족들과 나라들을 나누셨다. 이것은 매우 독특한 사관이다. 이스라엘의 사가들은 자신의 역사를 인류 문명사와 융합시키는 독특한 사관으로 민족사를 서술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역사 바로 앞에 태고사를 두고 있다. 천지창조와 인류의 시조 이야기(창 1:1-3:24), 최초의 고대문명과 대홍수 이야기(4:1-9:29), 대홍수 이후의 문명과 바벨탑 이야기(10:1-11:26)를 민족사 앞에 거대한 스케일로 펼치는 것은 매우 전략적이다. 즉, 그들은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 살지 않고, 역사의 중심에 서 있다는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역사인 족장사도 단조로운 가족사로 기술하지 않고, 메소포타미아(창 14; 22; 24, 29-31), 모압과 암몬(19장), 블레셋(21, 26장), 가나안(34장), 에돔(32, 36장), 이집트(창 12, 37-50) 등 폭넓은 열국들의 역사와 엮어지고 펼쳐진다. 세계의 문명사와 민족의 역사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가는 기술방식은 이후 출애굽(출 1-13), 광야 생활과 가나안 입성(출 14-수 24), 가나안 정착과 사사시대(삿 1-21), 왕국 시대(삼상 1-왕하 25)와 포로 및 포로 귀환 후 시대에도 계속된다(대상 1-에 10). 즉,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계 문명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양면성을 견지하였다.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특수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배타성 속에 함몰되지 않았고, 온 세계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사명이 무엇인지 살필 수 있었다.
2. 진실과 화해를 함께 추구하는 소통과 치유의 사관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크게 신명기적 사관과 역대기적 사관의 두 축으로 구성된다. 신명기적 기자와 역대기자는 동일한 연대를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다. 먼저 신명기적 기자는 여호수아서에서 열왕기하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신명기적 관점에서 서술한다. 그는 역사를 되돌아 보며, “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나라인 이스라엘이 멸망하였는가?”를 묻는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상화 하지 않고, 진실을 파헤쳐 나간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있었지만, 진실하지 못하였음을 발견한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성군(聖君)으로서 남북을 완전히 하나로 통일한 다윗조차도 그의 충성된 신하였던 우리야의 아내를 취하고 우리야까지 죽이는 범죄를 저지르며, 그것 때문에 왕국이 무너질뻔한 이야기를 길게 묘사하고 있다(삼하 11-21). 이스라엘의 성현(聖賢)으로서 그 전에도 후에도 그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없었던 솔로몬의 죄도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비록 고대 이스라엘의 문예부흥과 평화 시대를 일구고 성전까지 완공하였지만, 말년에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고 우상숭배에 빠진다. 또한 무리한 건축사업으로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징수하여 죽자말자 왕국이 두 동강 나게 되었다(왕상 11-12). 왕국의 분열은 여로보암의 야심 보다는 솔로몬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다윗의 죄와 솔로몬의 범죄는 왜 예루살렘이 멸망했는지 설명해 준다. 비록 둘 다 영광스러운 왕이었으나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살지 못했고 궁극적으로 심판을 받아야 했다. 이런 관점은 분열 왕국에서도 계속된다. 예로서 가장 훌륭한 왕으로 칭송받은 히스기야조차도 앗시리아의 산헤립을 물리치고(왕하 18-19), 죽을 병에서 건짐받은 후(20:1-11), 바빌론의 왕 브로닥 발라단이 보낸 사신의 문병을 받고 우쭐대며 자신의 모든 영광과 군사력을 보여주었다(20:16-21). 그러나 신명기적 관점에서 볼 때, 유다가 멸망한 것은 므낫세의 죄 때문이다. 므낫세는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져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폐지한 여호와의 지방 산당들을 회복하며, 예루살렘 성전 안에 하늘의 신들을 위한 우상들을 세웠다(21:3-4). 풍년 의식이 종교적 매춘과 함께 성전 안에서 허용되며, 접신과 주술이 유행하고, 인신제사도 바쳤다(21:6-7; 23:7). 이 모든 것은 여호와를 믿는 유일신앙과 그의 율법을 떠난데서 생긴 것이며, 바로 이 죄 때문에 유다는 멸망할 수 밖에 없었다(21:11-14). 신명기사가는 이스라엘의 왕국사에 있었던 열왕들의 죄악을 포로로 잡혀가 있던 백성들에게 그들이 주님과 맺은 언약과 율법을 어떻게 파기하였는지 직면하게 한다. 그러나 역대기자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역사를 되돌아 본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관심이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이리하여 역대기의 다윗과 솔로몬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의 모습과 완전히 무흠하게 나타나며 그들의 이미지를 손상시킬 만한 어떤 실수도 제거된다. 다윗의 인구조사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성전 부지를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대상 21). 다윗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항상 승리하고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의 복을 누릴 뿐 아니라 백성의 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솔로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다. 그는 두 번이나 다윗의 후계자로 지명 받으며(대상 22:7-10; 28:6), 다윗처럼 완전하고 즉각적인 백성의 지지를 받는다. 남북의 분열도 솔로몬의 죄 때문이 아니라, 여로보암이 권력을 탐내었기 때문이다. 역대기의 솔로몬은 다윗보다 더 이상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역대기자는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역대기자의 시점에서 보면, 이스라엘에는 이제 왕이 없고, 실질적으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제 성전이 실질적인 중심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포로 후기에 남북의 모든 지파가 하나된 ‘온 이스라엘’이 새로운 이스라엘로 거듭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대상 9:1). 즉, 역대기자는 분열의 쓰라린 상처를 보듬으며 하나 된 통일 국가를 세우기 위하여 치유의 사관으로 역사를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왜곡이 아니라 창조적인 역사 해석이다. 3. 미래 지향적인 사관
동양의 대표종교인 불교는 역사를 윤회적으로 보고, 유교는 고대 중국의 요순과 문왕과 무왕을 이상화 하는 과거지향적 사관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는 미래지향적인 종말관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역사란 단지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해 가는 구속사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아브라함의 부름에서부터 ‘온 열국이 복을 받는’ 미래를 내다본다(창 12:3). 열왕기자는 바빌론 포로로 역사의 종말을 고하면서도, 여호야긴의 석방을 언급하며 포로 귀환을 어렴풋이 바라본다(왕하 25:27-30). 역대기자는 고레스 왕 원년에 바빌론 포로가 끝나고 왕명으로 포로된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칙령을 전하며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감격적으로 증거하며 왕국 역사를 닫는다(대하 36:22-23). 시인들은 새로운 다윗이 이상적인 이스라엘을 완성할 것을 바라보며(시 2:6-9), 예언자들은 열국이 시온으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세계에 평화가 임하고(사 2:2-5), 새로운 하늘과 땅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본다(사 11:1-9). 신약성경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세계의 역사가 완성될 것을 고대하며 마치고 있다(계 22:20). 우리들도 옛 선현들이 가르쳐주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지혜를 깨달아 분단사관과 배타적 독선주의를 극복하고, 진실과 화해를 함께 추구하는 소통과 치유의 사관을 따라 미래지향적 역사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안으로는 사회적 통합을 이루고 밖으로는 세계선교를 주도하는 나라와 교회로 귀히 쓰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경의 선물(5): 율법의 선물
내가 참 좋아하는 브로드웨이 쇼 가운데 <지붕 위의 바이얼린>(Fiddler on the Roof)이라는 뮤지컬이 있다. 러시아의 조그만 마을 아나테프카에 살고 있는 유대인 주인공 테비아는 “만약 내가 부자가 된다면”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소원을 아름답고도 애절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는 만약 부자가 된다면 먼저 “동내의 정중앙에 수십개의 방이 있는 크고 높은 집을 짓겠다”는 아주 자연스러운 소원을 말한다. 마치 우리들이 부자가 되면, 제일 먼저 서울 강남에 가장 좋은 아파트를 장만하고 싶어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테비아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만약 부자가 되면 온갖 농사 일로 분주한 생활을 쉬면서 “회당에 가서 앉아 기도하고 또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에 가서 서서 기도하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부자가 된다면, “예루살렘의 학자들과 매일 일곱 시간씩 성경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이것 보다 달콤한 것이 없다”며 노래를 끝낸다.
그런데 성경을 하루 종일 공부하는 것이 어떻게 달콤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달콤하다’는 가사는 분명히 시편 19:9-10을 반영해 준다.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시인은 율법의 맛을 ‘꿀’과 ‘송이 꿀’과 비교하고 있다. 여기에서 ‘송이 꿀’은 벌집 즉, 꿀 송이에서 뚝뚝 떨어지는 가장 순수하고 신선하며 달콤한 꿀 덩어리로서 가공되지 않는 천연 그대로의 꿀이다(잠 16:24; 24:13). 즉, 시인이 볼 때 주님의 율법은 이 세상에 가장 달콤한 송이 꿀 보다 더 달콤하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정서를 시편 1:1-2에서도 볼 수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에서 ‘묵상하다’는 단지 순종하겠다고 결심하는 정도가 아니라, ‘연구한다’는 뜻이다. 모펫은 ‘세밀하게 읽다’, ‘탐독하다’, ‘철저하게 파내다’, 혹은 좋은 의미에서 ‘천착(穿鑿)하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to pore over it). 마치 우리가 어떤 학문의 분야를 좋아하게 되면 심취하여 파고 들어가는 것처럼, 시인은 하나님의 율법이 너무나 좋아서 흥얼대며 읽고, 숙독하고, 연구하고 있다. 율법은 마치 애인과 같아서 생각만 해도 설레고 울렁대며, 마음에 기쁨이 샘솟는다. 즉,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이 시인에게는 부담스럽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율법에 대한 시인의 이와 같은 태도는 우리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즉, “어떻게 율법이 우리에게 달콤할 수 있는가?” 우리는 바울을 통하여 율법과 복음의 날카로운 대립을 배워왔기 때문에, 율법을 복음처럼 여기는 시인의 태도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낀다.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말한다(롬 7:7). 한 걸음 더 나아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다”고 말한다(8절). 즉, 율법은 우리 속에 있는 탐심의 정체를 드러내어 주며, 정체가 드러난 탐심은 자제하기 보다 오히려 계명이 금하는 죄를 더욱 탐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온갖 종류의 탐욕이 끊임 없이 꿈틀거리고 있는데, 어떻게 율법이 즐거울 수 있을까?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는 이 점을 더욱 실존적으로 표현한다. “내게 돈 한 푼도 없어 배가 고파 거리를 지나가는데 갓 구어낸 빵 냄새와 갓 복아낸 향긋한 커피 냄새가 내 코를 파고 들어올 때,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어떻게 달콤할 수 있을까?” 우리의 경험으로 말하자면, 밤 새도록 시험 준비를 하였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나오고, 내 앞에 앉은 우등생의 답안지가 한 눈에 들어올 때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어떻게 꿀 같을 수 있을까? 내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 내가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을 때,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이 어떻게 기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경우에 억지로 우리의 본능을 찍어 누르며 율법에 순종하려고 애쓸런지는 몰라도,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은 심해 보인다. 기껏 우리는 율법은 소중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는 있어도, 꿀보다 더 달콤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하게 보인다. 우리에게 율법은 달콤한 초콜렛과 비교하기 보다는 치과 의사가 들고 있는 공포스러운 집게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의 성도들이 사랑한 율법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첫째로 율법은 하나님의 계시였다. 우리에게 있어서 율법(토라)은 단지 ‘~을 하라’는 계명이나, ‘~을 하지 말라’는 금령처럼 느껴지지만, 히브리인들에게는 오경이었으며, 좀 더 넓게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바로 하나님의 계시였다. 바로 이 점에 대하여 사무엘 샌드멜(Samuel Sandmel)이라는 구약학자는 “유대교는 토라(율법)이며 토라는 유대교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전에는 유대교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잘 말하였다. 마치 우리들에게 교회는 복음이고 복음은 교회인 것처럼, 율법은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으로서 유대교의 심장을 이루었다.
시내 산에서 율법을 하나님께 받아 전해 준 모세는 율법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8). 사실 모세의 율법을 고대 세계의 대표적인 법전들인 우르-남무(Ur-Nammu), 에슈눈나(Eshnunna), 리핏-이쉬타르(Lipit-Ishtar), 함무라비(Hammurapi) 법전들과 비교해 볼 때, 사랑과 정의의 균형을 잘 잡고 있으며, 국민과 외국인 그리고 시민과 종에 대한 판결에 있어서 훨씬 더 평등하고, 사람 뿐 아니라 짐승에 대한 배려가 훨씬 깊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로 전해준 율법은 기득권자의 권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만든 통치자의 법이 아니며, 제국에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었다. 따라서 모세는 이 율법이 어려운 것도 아니며, 우리의 생활에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니라면서,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말한다(신 30:11-14). 따라서 모세는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고 부탁한다(수 1:8). 또한 장차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게 될 때,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가르친다(신 17:18-19).
둘째로, 율법은 언약의 진수(眞髓)를 이룬다. 우리가 지난호, ‘언약의 선물’에서 본 바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언약(言約)에 있다. 고대의 사람들에게 언약은 문자 그대로 단지 말의 약속이 아니라, ‘피의 희생제사’를 바치는 의식(儀式)이었으며, 그 의식은 바로 서로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언약은 ‘피로 맹세한 결속’ (bond-in-blood)이었으며, 그 결속은 서로에 대한 책임을 내포하였다.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신부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서로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포기하지 않도록” 약속하는 것과 같다.
이리하여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언약은 그 성격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일방적’(unilateral), ‘무조건적’(unconditional), ‘약속형’(promissory)이지만, 그 안에는 ‘조건성’과 ‘의무’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노아의 언약은 무조건적 언약의 원형으로 여겨지지만, 그 안에는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는 금령(창 9:4)과 살인의 금령으로서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가 포함된다(9:5). 또한 아브라함의 언약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요구하시며(창 17:1),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고 명령하신다(9절). 아브라함 편에서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는 것으로 구체화 된다(10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땅과 후손과 임마누엘의 약속을 주셨지만, 아브라함 자신과 그의 후손은 할례를 행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관계 안에 있음을 증거해야 했다. 이 할례의 계명이 언약의 후손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출애굽의 사명자인 모세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모세는 시내 산의 불타는 가시떨기 나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후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출 4:20) 자식들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의 사자가 어느 숙소에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였다(24절). 그 때 십보라는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서 모세의 발에 갖다대며, ‘당신의 나의 피남편’이라고 선언하자 주님께서를 그를 놓아주었다고 한다(25절). 즉, 모세는 출애굽의 대업을 이룰자였지만, 자신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을뻔 한 것이다.
이후 모세는 출애굽의 대업을 이룬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을 체결할 때, 주님은 그들에게 십계명과 그 외 출애굽기에서 신명기에 나오는 모든 도덕법, 시민법, 형법, 의식법 등을 총체적으로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후 다윗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도 그에게 보좌와 후손을 약속하지만,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 규례, 율례, 계명을 지키도록 요구하셨다(삼하 7:14; 시 89:31-32). 즉, 왕조의 약속은 영원하지만, 다윗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해야 했다. 이후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우리야를 죽이게 되었을 때, 비록 왕조는 잃지 않았지만 혹독한 심판과 징계를 받았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장차 맺으신 새언약에 대한 예언을 하면서,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였다(렘 31:33). 즉, 새 언약 안에서도 하나님의 법은 제외되어 우리가 멋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 속에 새겨져 그것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한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주된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쳐야 할 헌신과 책임을 율법의 형식으로 구체화 하고 있다.
끝으로,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예표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총과 주권적인 의지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이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구원하여 주시며,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시면서 자신의 도덕적 의지를 총망라한 율법을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여 주셨다(출 19:5-6). 그러나 육신이 연약하여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셔서 사람에게 요구되는 모든 의(義)를 이루게 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림으로써 레위기에 명시된 모든 피의 제사를 완성하시고(히 10:1-12), 그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권세를 허락하시며(요 1:12), 성령으로 우리의 심비에 새겨준 율법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렘 31:33; 갈 5:22). 이리하여 예수께서는 그림자로서의 율법이 바라본 참된 실체가 되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으며(마 5:17; 히 10:1), 그의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셔서 참된 제자의 표지를 온 세상에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구약성경의 선물(6): 지혜의 선물
이번 밴쿠버 동계 올림픽 최고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여자 피겨 결승 경기 중, 김연아 선수가 첫 3회전 점프를 시도할 때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완벽하게 착지하였고 “거쉰의 피아노 곡에 맞추어 공기처럼 가볍고 우아하게 치솟아 구름 위에 떠다니는 듯 한 춤” (뉴욕 타임즈)을 마치면서 눈물을 훔칠 때 나의 가슴은 터지는 것 같았다. 그 동안 우리는 쇼트 트랙 밖에 잘 하는 것이 없는 줄 알고 동계 올림픽에 대해서는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빙상에 이어 피겨까지 세계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어서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온 세계가 깜짝 놀라게 되었다. 우리의 신세대들은 그 동안 아시아인의 체격과 체력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통념을 단박에 깨어 버리고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지식을 융합할 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동서양은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지식으로 구별되었다. 사실 서양 사람들은 분석적이고 귀납적인 지식을 쌓아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 왔고, 동양 사람들은 통합적이고 연역적인 지혜를 축적하여 종교를 발전시켜 왔다. 지식을 추구하는 서양인들은 인식론(epistemology)을 발전시켜서 개인주의를 키워왔고, 지혜를 추구하는 동양인들은 우주론(cosmology)을 발전시켜 공동체성을 키워왔다. 서양인들은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모든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에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동양인들은 우주라는 집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성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공동체 속에서의 중용(中庸)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세우게 되었다. 이리하여 동양과 서양이 만날 때, 서양의 예리한 지성과 동양의 통전적인 지혜가 부딪히곤 하였다.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면,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지식이 완전히 융합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구약성경에 있는 히브리 지혜는 서양의 지식과 같은 구체적이며 실용적인 지식 및 기술과 동양의 지혜와 같은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지혜를 온전히 통합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히브리 지혜는 옷 만드는 기술(출 28:3), 집 짓는 기술(출 35:30), 철을 다루는 기술(왕상 7:14), 항해술(시 107:27), 법적인 판단력(왕상 3:9‐10) 등의 실용적 지식과 전문적인 기술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지혜는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재치와 수완이며 내재적인 정신적 능력으로서 생존 기술(잠 30:24-28)과 위기를 돌파하는 능력(삼상 25:3; 잠 22:3)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기술과 능력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비롯한 온 우주와 만물을 자신의 지혜로 창조하셨음에 근거한다(잠 8:22-32). 즉, 성경의 지혜는 근원적이고 우주적이며 관계적인 질서를 가르쳐 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성경의 지혜는 (1) 하나님을 알게 하는 영성, (2) 나 자신을 알게 하는 품성, 그리고 (3) 세상을 알게 하는 지성을 선물로 약속한다.
첫째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 선물 (영성의 선물)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1:7)는 말씀으로 성경 지혜의 대문을 열어주고 있다. 이와 유사한 말씀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로 나온다(잠 9:10). 즉, 성경의 지혜는 유신론적이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을 때 비로소 참된 깨달음의 출발점에 설 수 있음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성경의 지혜는 온 우주에 대한 근원적인 영적 통찰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세상의 지혜처럼 각자에게 부여된 지성과 총명으로 쌓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야고보 사도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했다(1:7). 우리가 수천년 동안 몸담아 온 동양의 지혜도 알고 보면, 인격적인 하늘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었다. 유학의 대표적인 지혜서인 『중용』장구 1장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으로 시작한다. 즉 “하늘이 명한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가! 『중용』의 본문은 바로 이어서 “도(道)는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이러므로 군자는 그 보지 않는 바에도 조심하며, 그 듣지 않는 바에도 두려워 떠는 것이다(戒愼恐懼)”라는 말씀이 나온다. 사람이 평소 늘 조심하고 두려워 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감찰하는 신적인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다산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군자의 공부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하늘을 섬기는 것으로 마친다”(君子之學於事親終於事天)로 잘 간파하였다.
성경의 지혜는 동양의 지혜가 말하는 ‘하늘’과 ‘도’가 인격적인 하나님과 그의 가르침에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지혜의 근본이 됨을 분명히 해준다. 따라서 참 지혜는 이 세상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 인생의 참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이다. 참 지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진리와 거짓, 성령과 악령, 영과 육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고전 2:15). 참된 지혜는 맑은 영성에서 느껴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의 빛이다. 그 빛 속에서 살아갈 때, 모든 것을 올바로 판단하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요셉과 다니엘은 지혜의 영이신 성령의 조명의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당대의 그 어떤 이집트와 바빌론의 지혜자 보다 지혜로웠다. 그들은 감당할 수 없는 위기 가운데 살았지만, 최고의 분별력으로 온 민족과 세계를 살리며 참된 신앙의 정수를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둘째로, 나를 알게 하는 선물(품성의 선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우리의 영적인 안목을 열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주며, 나아가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즉, 하나님을 알므로 나를 알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는 구원론에 치우쳐 참된 사람됨에 대하여 소흘하게 되었다. 잠언 1:2‐3에는 지혜 교육의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는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기 위함이다.” 스승은 자신의 훈계를 통하여 그의 제자가 ‘정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살도록 양육하려고 한다. 즉, 성경의 지혜를 추구할 때, 우리는 긍정적으로는 '정직하고, 공평하며, 올바르게 살게 될 것이며, 부정적으로는 죄악(간음, 사기, 위증, 거짓말, 폭력, 시기 등 10계명)을 피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의 지혜 교육은 오경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지향하는 목표와 궁극적으로 일치하게 된다. 성경은 주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우리가 올바른 품성을 닦도록 가르치고 있다.
동양지혜의 대표적인 책 가운데 하나인 <대학>도 교육의 목표를 ‘수신제가치국 평천하’에 둔다. 그러나 ‘제가치국평천하’를 이루려면, ‘수신’과 ‘명덕’을 이루어야 한다. 수신은 기본적으로 마음(正心)과 뜻(意誠)과 지식(知至)을 바르게 하고 완성하는 것이며, 명덕은 인륜의 기본인 효도(孝), 우애(弟), 사랑(慈)을 이루어야 한다. 즉, 동양지혜는 인간존재를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고, 이를 통해 인간적 가치질서를 새롭게 구축하고자 하는 데 있다.
성경의 지혜는 ‘정의, 공평, 정직’이라는 인격과 품성을 배양함으로써 동양의 지혜가 추구한 것을 더욱 밝히 제시해주고 있다. 성경의 지혜는 단지 처세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이므로, 원래 창조주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그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겸손, 순결, 확고함, 자제, 진실, 정직, 헌신, 사려 깊음, 감사, 아량, 사랑, 나눔, 책임감, 신뢰, 공평, 용기, 부지런함, 인내심, 신실함을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 가야하며, 특히 근심과 분노와 질투를 통제해야 한다. 성경의 지혜는 그것을 사모하는 자람에게 진정한 품성의 선물을 주어, 진실과 사랑, 겸손과 자비, 정직과 감사, 아량과 나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한다.
셋째로, 세상을 알게 하는 선물(창조적인 지성의 선물)
성경은 지혜의 세계를 소개할 때 교훈, 명철, 훈계, 지식, 슬기, 분별력, 총명, 덕, 모략, 충고, 책망, 근신, 경계, 꾸지람 등의 다양한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즉, 성경의 지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올바른 분별력을 통하여 창조적인 실천력을 갖는 것이다. 동양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사물을 분별하고 지식의 지극함에 이르는 것이다(格物致知). 여기에서 ‘지식의 지극함에 이름’이란 실천적이며 목민적인 것이다. <논어>자한편 13장에 보면, 공자의 제자 자공이 선생님께 “여기 아름다운 옥(玉)이 있는데 궤 속에 감추어둘까요? 혹은 값을 아는 사람을 구해서 팔까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공자는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값을 아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대화가 나온다. 공자는 자신이 쌓은 덕과 인품을 남을 위하여 사용할 은사로 보았다. 다산도 "학문이 수기(修己)에서 그친다면 전체에서 볼 때, 그것은 반공(半工)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안다면 마땅히 경세의 학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다산은 치인지학(治人之學)이 '경세지학'(經世之學)임을 잘 알았기에 <목민심서>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었다.
성경의 지혜는 하나님을 바로 아는 영성과 자신을 바로 세우는 품성에 바탕을 두고 이 세상을 바로 다스릴 수 있는 창조적인 지성이다. 열왕기 저자에 따르면 솔로몬의 지혜는,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으며, 잠언 삼천 가지, 노래 천다섯 편을 지었고, 초목과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논하였다고 한다(왕상 4:32‐33). 지혜자가 온 세상에 대하여 이렇게 넓고도 깊게 아는 이유는 온 세상을 자신의 지혜로 창조하신 하나님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잠언의 마지막 31장에 나오는 ‘유능한 여인 송가’를 통하여 가장 잘 나타난다. 이 여인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꿰뚫어 보고 있다. 그는 가정일과 밭일 뿐 아니라, 세계 경제까지 훤히 알고 있다. 그는 평안할 때 경제 생활을 잘 꾸려갈 뿐 아니라, 온 세계의 경제가 얼어 붙는 한파도 대비하고 있다. 그는 모든 일꾼들에게 일을 적절하게 맡기며,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한다. 그러나 그는 가족 이기주의에 빠져 있지 않으며, 그의 손을 약자들에게 내밀며 돌보고 있다(20절). 이 여인은 마치 ‘지혜의 여신’(은유적으로)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처럼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지식이 통합된 성경의 지혜를 통하여 우리는 순수한 신앙과 건강한 품성과 창조적인 지성을 얻어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를 빛낼 수 있기를 사모한다
구약성경의 선물(7): 예언의 선물 조선 왕조의 삼대 여걸을 꼽는다면, 숙종의 장희빈, 광해군(조)의 인목대비, 고종의 명성황후가 될 것이다. 이 세 여인들은 치열한 권력 다툼의 배후 조종자들로서 모두 비운의 운명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오늘 날 TV 드라마의 단골 여주인공들이 되었다. 이 세 여인들에게 공통분모가 있다면, 그들 모두가 무당을 지극히 좋아하였고, 결국 무당 때문에 비운의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장희빈은 전속무당 태자방을 통해 인현왕후를 저주하였고, 인목대비는 수란개라는 단골무당으로 광해군을 저주하였으며, 명성황후는 전속무당에게 진령군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국사 급으로 대우하면서 일 년치의 궁중 살림을 거덜 낼 정도의 규모로 한판 굿을 벌렸다고 한다.
점술과 주술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은 조선시대로 끝나지 않았으며, 현대에 와서도 우리의 정신생활과 정치ㆍ문화 활동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1995년에는 <격암유록>이란 작자 미상의 책이 나와, 임진왜란부터 5.16까지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알아 맞혔다고 하였다. 1997년에는 어느 무당이 쓴 <신이 선택한 여자>는 김일성의 사망 뿐 아니라 대선구도와 정개 개편까지 정확하게 예언한다고 떠들었다. 가장 최근의 통계 조사에 따르면 서울시내에만 점쟁이가 약 5만 명이며, 인터넷에서는 약 200개가 넘는 점술 사이트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점술 시장의 규모는 공식적으로는 연 2~4조원 정도로 추산되고 있으나, 무속인 단체에서 발표한 규모는 약 15조원 정도로서 의료시장의 규모에 맞먹는 액수이다((2010년도 한국의 예산 총액은 약 292조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과거에 대해서는 불만을 느끼고, 현재에 대해서는 불안을 느끼며,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미리 알아 대비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다. 이리하여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신과 직통하는 영매자를 만나 직접적으로 신의 뜻을 얻거나 혹은 징조나 꿈을 해석해 주는 점쟁이를 찾기도 한다. 동양에서는 오랫동안 무당을 찾아 굿을 하거나, 혹은 사주, 팔자, 궁합, 역술 등을 통해 점을 치기도 하였다. 구약성경의 종교적-문화적 배경을 이루는 고대 근동아시아의 세계에서도 왕들과 백성들은 점술과 마술을 통하여 국사와 인생의 중대사들을 결정하였다. 그 당시 점술가들과 주술사들은 전문적인 직업 예언자들로서 왕실의 보살핌 속에서 특권을 누리면서, 온갖 다양한 술법들을 개발하였고 이리하여 마술과 점술이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마술사들은 주문, 요술, 부적 등을 개발하였고, 점술사들은 짐승의 내장을 살피는 간점, 액체점, 화살점, 막대점, 새점, 별점 등을 쳤다. 에스겔 21:21에 보면, 바빌론의 대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과 모압을 치러 가는 갈래 길에서 “화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제물의 간을 살펴서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바빌론의 점술사는 바루(baru)로 불렸으며, 그들은 양과 소의 간을 해부하여 인간과 도시와 궁궐의 미래를 보았다고 한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도 당대의 이방인들과 같은 문화적 환경 속에 살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보면 이방인들의 점술을 그대로 사용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요셉은 꿈을 해몽하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잔으로 점을 치는 사람’으로 소개된다(창 44:15). 다윗은 인생의 중요한 위기에서 에봇을 가지고 하나님께 묻는다(삼상 30:7).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비를 뽑아 기업(민 26:56)과 제물(레 16:10)을 선택하고, 전쟁의 방향(잠 16:33)과 매매(욥 6:27)를 결정하였다(삿 20:9). 또한 꿈은 신탁을 얻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삿 7:13).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예 이방의 영향을 받아서, 복술가(사 2:6), 별점 치는 자(암 5:26), 마법사(미 5:12), 주술여인(겔 13:18), 진언자(욥 3:8), 신접자(사 8:19), 초혼자(삼상 28:14) 등 온갖 다양한 점쟁이들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영적인 활동들은 구약의 공식적인 종교에서는 금지된 것이었다. 이스라엘 종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모세는 약속의 땅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이와 같은 영적인 영향력을 염려하면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가르쳤다(신 18:9, 14).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점을 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는가? 바로 이 점에 대하여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신 18:15)고 말하였다. 즉,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미신과 점쟁이, 마법사, 초혼자들 대신에 선지자를 세워서 자신의 뜻을 알려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여기에 있는 ‘선지자 하나’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지만, 신명기의 맥락에서 선지자 직분을 말한다. 하나님은 새로운 시대 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주실 것이다. 그들은 어떤 사람인가? 그들은 ‘모세와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즉, 모세는 모든 선지자들(예언자들)의 원형이 되므로 그들은 모세를 닮아야 한다. 어떤 점에서 모세는 선지자들의 원형이 되는가?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와 선지자들의 관계가 가장 잘 나타난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본다”(6-8절). 모세와 일반 선지자들은 모두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계시를 전하는 자들이지만, 그들이 전하는 계시는 그 직접성과 상호성과 질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일반 선지자들은 이상과 꿈으로 주님을 보기 때문에 그들이 받은 계시는 모호하고 단편적일 수 있다. 그러나 모세는 주님의 절친한 친구처럼 얼굴을 서로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그 계시는 직접적이고 인격적이며 명료하다.
이리하여 고대 근동아시아의 모든 예언 문학들은 주로 점술과 주술의 술법으로 가득한 반면에 구약성경의 예언 문학은 역사 속의 이야기와 시들과 설교들로 가득하게 되며 구약 성경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구약성경의 절반 이상이 예언이다. 우리가 소위 역사서로 알고 있는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는 신명기적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예언서(Former Prophets)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예언서로 알고 있는 “이사야서에서 말라기”까지는 후예언서(Latter Prophets)로 분류된다. 즉 구약성경 총 39권 가운데 23권이 예언서이며 분량으로 보면 2/3 정도가 된다. 1. 하나님을 보여주는 예언의 선물 이 세상의 예언적인 점들은 대부분 개인과 도시(나라)의 운명에 관한 것들이지만, 성경의 예언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보여주는데 중심 관심을 갖는다. 선지자의 원형인 모세는 시내 산에서 양을 치다가 ‘불타오르지만 불타버리지 않는 떨기 나무’에 임하신 하나님을 만난다(출 3:2). 모세는 그 광경이 너무나 신비로워서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할 때,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시면서,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음성을 들었다(5절). 그는 너무나 두려워 ‘얼굴을 가릴 수 밖에 없었다’(6절). 가시 떨기에 임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이중적으로 소개하였다. 하나님은 먼저 모세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었다”(6절). 즉, 모세가 역사적으로 익히 알고 있는 하나님이었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은 모세가 다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고 말씀하신다(14절).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므로 우리의 이성과 경험을 초월해 계시며 주권적으로 일하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의 대업을 이루게 하신 후,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신다(출 19-24장).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황금 송아지를 만들게 되자 언약을 파기할 수 밖에 없는 정황에서도 자신이 맺은 언약을 붙드시며, 자신을 새롭게 소개하셨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출 34:6-7).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바로 모세에게 계시된 하나님을 시대 마다 증거하였다. 선지자들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을 바라 보았다(사 11:9).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후에 총체적으로 범죄하여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을 때에 주님은 다시 그들을 회복하신다. 그 때 주님은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겔 29:16). 2. 우리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예언의 선물
“하나님을 알면 우리를 알게 되고, 우리를 알면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칼빈의 말처럼, 하나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난 선지자들은 자신의 진면목을 깨닫게 되면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장면들을 고백으로 전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문체와 깊은 파토스로 말씀을 전해준 이사야는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심각한 순간에 영광의 하나님을 보자 말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는 비명을 질렀다(사 6:5). 세상의 사람들은 대부분 모든 잘못은 남(적)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비판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자신의 폐부를 드러내고 있다. 이사야의 자기 발견은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와 같은 모습이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고 말하며(출 4:10), 예레미야도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6)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고백한다. 3. 신앙 공동체의 참 모습과 미래를 보여주는 예언의 선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본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진정한 모습을 늘 노출시켰다. 나단 선지자는 이스라엘에서 성군으로 칭송을 받던 다윗 왕이 그의 신하인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인 밧세바를 빼앗았을 때 한 명의 부자 우화를 가지고 다윗의 양심을 두드린다. 다윗이 그의 우화에 동감하자,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라며 다윗의 범죄를 백일하에 드러내고 회개를 촉구하였다(삼하 12:1-15).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 예배가 종교적인 타성과 우상 숭배로 가득해지자,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며 하나님께서 실로의 성막을 무너뜨린 것 같이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언을 전하였다(렘 7:4, 14).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사치하는 여인들을 책망하고(사 4:16-26), 아모스는 선민사회에서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파는’ 사회정의의 타락을 보며(2:6), 그들이 바라는 ‘여호와의 날’이 ‘영광스러운 빛의 날’이 아니라, ‘칠흙 같은 심판의 밤’이 될 것을 증거하였다(5:18).
그러나 선지자들은 단지 ‘심판의 신탁’ 만을 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원의 전령’이었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결하게 하시고, 회복하심을 바라보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 언약을 파기하였기 때문에 예언의 말씀대로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갈 수 밖에 없었다. 이 점에 대하여 선지자들은 가슴 아파하였다. 예레미야는 밤 새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다”며 애통하였다(애 1:1).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바라보며,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며 다시 한 번 더 새로운 출애굽이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였다(사 40:1-11).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페르시야 왕 고레스 왕 때에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고 새 마음과 새 영을 부어주실 날을 바라보았다(렘 31:31; 겔 36:26).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바로 이 회복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선물(8): 메시아의 선물
왜 몰랐을까?
예수께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다. 사도 요한은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한다(새번역, 요 1:11). 정작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전혀 없이 살고 있던 동방의 박사들은 하늘에 새롭게 뜬 별을 보고 ‘장차 유대인의 왕이 될 아이’가 태어났음을 깨닫고 그에게 경배하기 위하여 먼 길을 찾아 왔다(마 2:2). 그렇지만, 메시아에 대한 모든 예언과 심지어 그가 태어날 장소까지 샅샅이 알고 있던 당대의 지성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그가 태어난 사실에 대하여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3-8절). 뿐만 아니라, 메시아 왕의 탄생을 축하하고 영접해야 할 당대의 왕이었던 헤롯은 메시아로 태어난 아이를 죽이기 위하여 참혹한 살육을 자행하였다(16-18절).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의 대부분 예수를 배척하였으며,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대부분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로마의 총독 빌라도와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은 다 함께 손을 잡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행 4:27). 예수님을 삼년 간 열심히 따라 다니며 재정 책임까지 맡았던 가롯 유다는 그의 스승 예수를 적들에게 넘겨주는 데 앞장서기까지 하였다.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 평생 기도하던 시므온(눅 2:28-32)과 안나(36-38절) 만이 아기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았다. 예수님의 공생애가가 시작된 후에는 세례자 요한, 예수를 따르던 소수의 제자들 만이 그를 메시아로 영접하였다. 유대인들의 지도자들 가운데에는 산헤드린의 위원이던 니고데모와 아리마대의 요셉 같은 극소수의 사람들이 최소한 예수를 스승과 의인으로 인정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 자신도 ‘메시아’라는 칭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공생애 중에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으며 죽은 자들을 살리기도 하였지만, 정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그 소문을 퍼뜨리지 못하도록 ‘엄히 경고하였다’(마 1:43; 마 9:30). 그의 공생애가 거의 마무리 되어 갈 즈음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역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고백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를 크게 칭찬하면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20절). 예수께서는 ‘메시아’(히브리어) 즉 ‘그리스도’(그리스어)라는 칭호는 최대한 피하려고 하였고, 그 대신 ‘인자’(the son of man)란 칭호를 주로 사용하였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회는 “구약성경은 구원의 시대를 도래하는 예언을 하고, 구원의 새 시대는 나사렛 예수의 강림으로 도래하였다”는 확신을 가지고 구약성경을 보았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개역개정, 행 3:24)고 말함으로써, 구약의 모든 메시아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취 되었음을 증거하였다. 그렇다면, 왜 구약성경에서 줄기차게 예언된 메시아가 왔을 때, 정작 그의 백성들은 그를 몰라보고, 메시아 자신도 메시아로서 그의 신분을 감추고자 했을까? 이것은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메시아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실제적인 메시아의 모습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최근 일본에서 일고 있는 한류열풍으로 비유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본의 여성들 사이에서 일어난 한류열풍에 대하여 처음 일본의 지배층은 몹시 언짢아 하였으며 애써 무시하려고 하였다. 초기에 그들은 일본 여인들이 꽃미남의 미소년 같은 남자 주인공을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해소하는 정도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정작 일본의 여인들이 겨울 소나타(겨울연가)에서 감동한 것은 욘사마(배용준)가 지우히매(최지우)에게 바친 순수하고 절박한 첫 사랑 이야기에 있었다. 눈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헌신적인 첫 사랑의 이야기는 일본인들의 의식 세계에서 몹시 생소하고 충격적이었다. 물론 욘사마의 사랑은 우리 문학에서는 매우 익숙한 소재이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은 과거에 급제하여 장안의 대갓집 명문 규수와 혼례를 올리고 입신양명(立身揚名)과 영달(榮達)을 도모할 수도 있었지만, 관기(官妓)의 딸이었던 춘향에게 찾아와 그를 변사또에게서 구하고 첫 사랑을 이룬다. 그러나 전통적인 일본 문학에서 진정한 남성은 항상 부국강병을 가져올 무사(武士)였으며, 그들은 목숨을 걸고 승부(勝負·쇼부)를 거는 것을 최고의 가치와 덕목으로 여겼다. 그들에게 여인은 항상 자신을 장식할 꽃에 불과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일본인에게 메시아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나라를 구원하고 장차 온 세계에서 영광을 가져다줄 무사였지만, 한국인에게 메시아는 자신의 영광과 영달을 포기하고 참된 사랑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선비였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는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용사로서 왕이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죄악을 대속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고난 받는 종이었다. 예수께서 메시아로 왔을 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사와 용사로서의 메시아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는 거부할 수 밖에 없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무능한 메시아를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구약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메시아의 예언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관통하고 있다. 메시아의 예언은 태고의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낙원에서 쫓겨 날 때 하나님이 구원의 소망으로 주신 ‘원시복음’으로부터 시작한다(창 3:15). 주님은 장차 ‘여인의 후손’이 태어나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 구약성경이 끝나는 말라기의 마지막 예언도 메시아가 와서 인류의 근원적인 갈등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예언으로 마친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4:5-6상).
구약성경의 메시아 예언은 두 개의 중심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한 축은 왕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신적 메시아이며, 다른 한 축은 고난 받는 종으로서 인간적인 메시아이다. 전자는 일반적인 메시아 사상으로서 “이 시대의 끝인 마지막 시대에 강한 구속자가 자신의 능력과 성령의 감동으로 정치적이고 영적인 구속을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가져오고, 이와 함께 온 인류에게 땅의 회복과 도덕적인 완성을 가져올 것에 대한 예언적 소망”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새롭고 전혀 다른 성격의 미래가 임하는 마지막 때에 영광의 왕이 도래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메시아 사상의 뿌리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에 있었다(삼하 7:1-14). 이 본문에서 장차 하나님께서 세우실 메시아는 새로운 다윗으로서 선택된 자(삼하 7:8),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삼하 7:9), 지극히 높은 이름을 가진 자(삼하 7:9하; 빌 2:9-11 참조),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는 자(삼하 7:10-11상), 주님의 아들(삼하 7:14), 성전 (즉 교회)을 짓는 자(삼하 7:13), 새 왕조인 하나님 나라의 창시자(삼하 7:11하; 16), 영원한 왕(삼하 7:13)으로 소개된다. 바로 이 메시아 사상과 신앙의 모판에서 장차 올 다윗 왕은 시편 2편에서 ‘거룩한 산 시온’에서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으로 세움을 받으며(6절),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고’(7절), ‘열방을 유업으로 받으며, 그의 소유는 땅 끝까지 이를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시편 72편에서 장차 올 메시아 왕은 ‘가난한 자들’을 구원하고(1-4절), ‘벤 풀 위에 내리는 단비’처럼 온 세상에 ‘평강의 풍성함을 가져오며(5-7절), 그의 통치는 땅 끝까지 이르게 되어 ’스바와 시바의 왕들이 그에게 조공을 바치게 될 것을 바라 보고 있다(8-15절). 시편 89편에서 그는 기름부음 받은 자, 선택된 자, 주의 종,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 지극히 높은 자로 등장하고 있다. 시편 110편에서 그는 ‘하나님의 오른 쪽에 앉은 분’이며(1절), ‘시온에서 권능을 홀’을 물려 받고(2절), 장차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4절)으로서 ‘열국을 정복할 자’(6절)로 그려지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주전 8세기에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과 유다가 앗시리아의 위협을 받을 때, 가장 많이 나온다. 그 중 이사야는 선지자들 가운데 메시아 예언을 가장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한 자이다. 그는 유다가 시리아-에브라임의 연합군에 의하여 예루살렘까지 포위되는 정황에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7:14). 그 아들은 바로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 될 사람이었다(9:6). 이사야 선지자는 물론 다윗의 집안에 위기가 있을 것을 바라 보았다. 그렇지만,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실 것”을 바라 보았다(11:1-2). 구약성경에서 다윗은 단지 역사적인 왕으로 표상화 되지 않았다. 성경 저자의 마음 속에 있는 다윗은 미래의 다윗이었다. 다윗 왕조가 망했을 때에도, 백성들은 장차 올 구원의 시대를 열어줄 새 다윗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단지 영광스러운 신적인 메시아 왕 만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진정한 인간성을 가진 자였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다”(42:2). 이사야는 구약의 메시아 예언 가운데 고난 받는 주의 종을 가장 깊이 드러내었다. 그는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 53:1)라는 수사의문을 던졌다. 즉, 그가 전한 메시아의 예언을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기” 때문이다(53:2-4). 그가 바라 본 주님의 종은 아무런 죄도 없지만,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건제물’이 된 분이었다(53:10). 시편의 저자들도 메시아 왕이 아무런 죄가 없지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완전히 버림 받으며 죽음을 당할 것을 바라보았다(시 22편). 시편 89편의 시인도 메시아 왕이 그의 왕관과 보좌가 내동댕이 침을 당하며(39, 44절), ‘젊은 날에 죽임을 당하고’(45절),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맹세한 언약이 무효가 된 것 같은 경험을 할 것을 바라 보았다. 118편의 기자도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118:22-23)라고 말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영광스러운 왕의 도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커지고,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역할은 잊혀졌다. 이리하여 예수님 당시 로마의 압제 아래에 살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고난 받는 메시아 상을 원하지도 않았으며, 의식적으로도 완전히 지워버렸다. 예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을 누누히 가르쳐도 제자들은 믿을 수 없어 하였다. 이리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라고 책망이 섞인 말씀을 하셨다(눅 24:24-27). 예수께서 어느 날 그의 제자들에게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물으셨다(눅 18:8).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알 수 있을까? 지금 확실하게 모른다면 그 때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김정우(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https://blog.naver.com/kite8696/220970005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