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론의 절벽 / 장영춘
어쩌랴 절벽 아래 저 파도를 어쩌랴
방향키 놓쳐버려 떠밀리고 떠밀려온
추자도 하늘길 따라
소금꽃이 피었다
나바론의 요새에 숨어든 병사들처럼
오늘 밤 태풍 전야 고요를 방심 마라
구절초 봉오리 쓸며
구구절절 되새기는
어쩌다 사는 일이 벼랑 끝에 서 있는 날
누군가 뭍으로 와 자일 하나 건네면
등 시린 저 꽃들조차
바람이고 싶겠다
* 나바론 절벽 : 나바론 요새를 닮았다 해서 지은 추자도의 절벽 이름.
고지서 / 장영춘
과속으로 달려온 출구 없는 길 위에
변명 한 번 못한 채 받아든 과태료
이제 좀 쉬어가라고, 내게 준 엘로카드
책장을 정리하다 / 장영춘
한 권 두 권 차오르는
책꽂이를 보면서
지나온 흔적만큼 커지는 미련을 두고
이제는 미룰 수 없어 정리를 시작한다
언제 그 어디쯤
읽다 만 페이지에
누렇게 손때 묻은 책장을 넘기다가
밑줄 친, 한 문장 속의 따뜻했던 위로여
그날 그 시간이
오롯이 재생되어
살며시 단어 한 줄 가슴에 받아 안고
잘 가라 어제를 노래하던,
노란 잎새 수북하다
어머니 숲 / 장영춘
사막에 꽃 피우는 낙타 풀 가시처럼
언제나 바람 맞서 궁굴리며 궁굴리다
하나둘 비워내 가며
가벼워지는 숲이네
늦가을 존자암 무게 진 산 중턱
푸르게 푸르게 푸르게 더 푸르게
우듬지 햇살을 잡는 상수리나무 어머니
한 번도 제 둘레를 재어본 적 없는 당신
검버섯 핀 손등 아래 염주 알 굴리는
어머니 야윈 생애가
곧추선 적 없었네
가을장마 / 장영춘
한여름 놓고 간 게 기억이 없으신지
십 리 길 따라가다 제정신이 들어서
내 여기 왔더냐? 하며 되물으시는 어머니
몇 날 며칠 닦아도 시린 하늘 떠받듯
단단히 뿌리내라고 무른 땅 토닥토닥
내 안에 고인 슬픔을 씻기고 또 씻긴다
영주기름집 / 장영춘
어디서 풍겨올까 고소함 덤으로 얹고
한물간 영주기름집 반짝 세일하듯이
명절 전 도심 한 귀퉁이
줄을 잇는 사람들
봄부터 여름까지 깨알 같은 땅심을 깨워
신토불이 고집하며 땀방울을 적시던
할머니 검버섯 핀 얼굴
참깨꽃이 피었다
일 년을 마무리하듯 한 병 한 병 채우면
뽀글뽀글 살아온 날 향기로나 남을까
스산한 늙은 거리에
솔솔 풍기는 삶의 진미
한라산의 겨울 / 장영춘
추울수록 뜨거워지는 민초들의 결기처럼
눈 쌓인 선작지왓 서로 등 기대고
밟히면 더 단단해지는 뿌리들이 여기 있다
달그락, 봄 / 장영춘
기다린 당신의 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겨울 골목길에 발소리도 낮추며
살아서 돌아오리라 울먹이던 아버지
몇 번의 계절 앞에
당신은 오지 않고
무작정 찾아든 숲, 빗금 친 날들 사이
풀뿌리 근성으로 견딘 발자국이 뜨겁다
꽁꽁 언 낮과 밤
봉인된 시간을 풀며
달그락 숟가락 소리, 얼음장 녹는 소리
드디어 재회를 꿈꾸는 얼음새꽃 떨리는 손
보리밭 / 장영춘
혼자 있어도 혼자 아닌 것들이 있다
바람 부는 가파도 청보리밭에 서 있으면
들리네, 광화문 함성 여기까지 와닿네
- 『달그락, 봄』(2024. 한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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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아가 읽은 시조집
시조집 『달그락, 봄』_장영춘
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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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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