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편지에 관한 시모음 7)
다시 가을 편지 /한승원
그 누구인가가
허공에 늘어뜨려놓고 있는
사천팔만억 개의 유리 구슬 주렴 속으로
천리 밖의 섬이 옹기종기 모여들고
질펀한 청자빛 바다 물너울 위에서
눈부신 태양 빛살과
수억천 마리 금빛 고기들이 혼례 치르고 있는
내 공화국의 정원으로
그대의 먼지 앉은 음습한
영혼 보내주십시오
보송보송하게 해바라기하여 보내드릴게요.
가을 편지 /서봉석
벌써 시월입니다
가을 문턱에서
안부 여쭙니다 라고 편지를 적다가
문득, 가을에도 턱이 있나 하고 놀랩니다
그래서 가을만 되면
멀쩡하던 날빛이
해거름에 턱 걸려 민 낮 저물기 허허롭고
찬바람 불자 저 부터 핏줄 닫는 초록을
서리 내린 길턱에서
여름을 끝물로 바겐세일 하는 갈잎에
창문에 턱 걸친 달빛이
빈 곳 건드리면 G선에서 반응하는
달밤 지나며
이 다음 시월은 어느 길에서
안부 여쭙게 되려나 모르겠습니다만
부디 턱없는 길만 골라
평발로도
큰 세월 업고 활보하시기 바라는 마음
무소식에 철새 엽서를 보냅니다
단, 턱 걸어서라도 멈추게 하고 싶은 세월이
저 혼자 마구 흘러가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그래도 그냥 내내 건강하세요
가을편지·2001 /나태주
아들아, 선생님 일을 하면서
화가 치민다고
데모 같은 거 하면 못쓴다
아이들이 무얼 보고 배우것냐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냐?
산 높고 물 맑은 나라
햇볕 따신 나라
가을이면 곡식들 익어 잔치하고
노래 부르는 나라
근데 우리 마을에서도
젊은 농사꾼들 몇이서
풍년 농사 다 지어놓고
벼를 베지도 않은 논을 갈아엎었단다
나이든 어르신네들 붙잡고
그러면 못쓴다 하늘한테 벌받는다
말렸지만 끝내 트랙터 끌어다
메다치듯 그 잘된 농사 다 갈아엎고
동네 사람들 부둥켜안고 울었단다
풍년 농사지으면 뭐하냐고
농사지어 목구멍에 풀칠이나 하겠냐고
우리가 왜 이런 세상에 살아야 하느냐고
목이 쉬도록 울었단다
그러면 못쓴다
도회에 나가 사는 사람들 그러면 못쓰고
높은 자리 앉은 사람들
더더욱 정치하는 사람들
농촌 괄시하면 벌받는다
아들아, 선생님 일을 하면서
화가 치민다고
싸움 같은 거 하면 안된다
커가는 아이들이 무얼 보고 배우것냐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냐?
인젠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님들과
농사꾼들이 데모하는 나라가
되어버리고 말았구나.
가을의 편지 /박정재
비 갠 후 가을 하늘은
물 끼얹어 씻어낸 욕탕 거울
얼굴을 하늘로 향해 고개 들면
자네가 내 얼굴 볼 수 있겠다.
하늘빛 가을 호수에는
구름 한조각 물결에 출렁이고
그 구름 물끄럼이 바라다보면
자네의 편지가 보일 것 같다
황금빛 들판을 지나는
불어가는 시원한 가을바람에
나의 마음 자네에게 보냈으니
바람 스치거들랑 받아보시게.
가을 편지 /신달자
그대는 아는가
나는 지금
소홀산이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는
광릉의 숲길에 와 있다
크낙새는 다 어디로 갔는지
그대 뒷모습도 보이지 않는
적막한 숲길에서
나는 유서 같은 편지를 쓴다
나무들은 그래도
가을이 가기전에 그대가 오리라고
말하고 있다
가지마다 붉은 축등을 켜 놓고
우리의 만남을 위해
서둘러 황홀한 잔치라도 벌이자는 것이다
오지 않을 것이다
사약 같은 통증으로
숲을 향해 외치지만
나무들은 더더욱
산너머 바다 너머 그 너머
서둘러 그대가 달려오리라는 것을
믿고 있는 모양이다
나의 생은 그대를 기다리는 것
나는 다만 이 한마디로
이 편지의 마무리를 끝내려고 한다
행여 그대 오려거든
아파하고 신음하는 아스팔트 길을 멀리하고
고요하고 적막한
광릉의 숲길로 오라
가을편지 /김용택
귀뚜라미가 웁니다.
귀뚜라미 울면
이불을 끌어다 덮는 찬바람이 불지요.
벼들이 패고, 수수모가지에 참새들이 앉고, 억새가 핍니다.
하얀 억새가 바람에 나부끼는 강가에 가고 싶습니다.
강에 언덕에
그대 마음 가장자리에 잔물결이 와닿겠지요
강가에 서서
서쪽으로 지는 가을 하늘의 노을도 보고 싶고
노을이 빠진 강물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그 당신을요.
가을에 보내는 편지 /김덕성
그 뜨거웠던 열정
어디로 떠나는지 모르게 사라지고
가냘픈 몸매
녹일 듯 시피 살랑댑니다.
하늬바람에 자리바꿈을 한 가을
그 가을 내게 다가와도
그리운 그대 생각에 아직도
잠을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그대의 향기
새삼스레 풍겨 오는데
꿈처럼 되어버린 두고 온 사랑
그리고 못다 한 사랑이야기
가슴에 멍울이 되어
그리움의 골짜기로 흐르고 있습니다
달콤한 과일 향과 함께
사뿐사뿐 다가올
정다운 그대의 발자국 소리
내 두근거리는 숨결이 배어
나로 하여금 꿈나라에 머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어서 내 곁에 오소서
사랑합니다.
가을의 편지 /書娥서현숙
당신과 나
운명처럼 만나게
될 날을 생각하며
그리워하던 날에
가슴 아려오는
아릿한 마음으로
사랑은 바람 타고
단풍나무에 앉아
인생의 가을
드릴 수 있는 것
무엇일까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없는데
내 마음 깊은 영혼 속
처연한 울음 삼키고
길 떠나려 할 때
친구가 되어
그리움에
아쉬움 주고받으며
갈잎 같은 마음이라도
그대에게 드리리다.
가을 편지 /문부식
하늘이 너무 높아
담이 조금 낮아진다면
나 당신에게 돌아갈 수 있으련만
길은 가을 들판처럼 멀어
나 묶인 몸으론 걸어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 찾아와 낮술 권한다면
나 단풍 들어 당신을 부르련만
흙바람 부는 옥담 곁에 코스모스
긴 목이 없어
낙엽 하나로 뒹구는 동안
이곳은 벌써 겨울입니다
모악산 가을편지 /박얼서
그댈 만난 날
수줍은 듯 마주치던 철쭉 길 능선을 따라
연초록 푸른 가슴을 열고
서로 볼 꼬집으며 반기었지요.
그댈 만난 날
중인리를 떠나 금산사로 넘어오던 길
짙푸른 무더위 계곡물에 띄워
한 여름 어화둥둥 날려 보냈죠.
어느덧 이 가을 속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와
우뚝 선 곳 정상입니다. 산은
석양을 등진 모습으로
낯익은 손님을 맞이합니다
기억 푸르던 시절
메아리 하나 둘 불러봅니다
이 골짝 저 골짝 흩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다가
가늘게 떨리며 되돌아옵니다
청설모는 여전히 부지런합니다
월동준비가 한창입니다
곡예 하듯 터전을 오가며
땀 흘리는 모습을 보는
핏발선 시야가 맑아집니다
자그마한 폭포를 지나면서
물줄기는 나지막이 반주합니다
새들이 합창을 시작합니다
파라다이스를 듣고 있습니다
청감의 오염이 씻겨집니다
붉게 물든 사연 한 장
일기장 깊숙이 담아둡니다
산은 온통 잔치마당입니다
벌겋게 취해 있습니다
그 품속에 든 나도
함께 어울려 취해버렸습니다
취기 점점 더 번져갑니다
모악은 지금...
가을 편지 /목필균
네게 머무르지 못했던 마음에
내려앉은 음계
시들지 않은 그리움이 부르는 노래
하양, 분홍, 진분홍, 자줏빛 붉은 입술,
아득할수록 선명하게 살아나는
지난날의 푸른 맥박들
보고싶다.
절절한 갈망은 감추고
부질없는 안부 속에 붙이는 우표 한 장
가을편지1(햇볕이야기) /강인섭
소식 끊긴지 오래인 옛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나이들 수록 햇볕과 자주 노니는게 좋다는데
요즘 자네도 그렇게 하고 있는지 궁금하이
이 가을이 가기 전에 햇살에 몸을 맡기고
우리가 건널 이승의 마지막 난간까지
눈감고 다녀와 보는 것도 어떨지?
내가 몸 져 누워 있을 때
CT, MRI등 온갖 기계들에 몸 속 구석구석을
들여다 보게 한 후 자주 햇볕과 어울리다 보니
그 놈은 얼굴만 그을리는게 아니라
영혼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가끔 우주의 기(氣)도 전해주고 가더군
그 동안 비뚤어진 심사도 바로 펴주고
해묵은 오해와 원한도 삭혀주니 말이야
늦가을 오후 공원의 벤치에서 만나는 햇볕이나
툇마루에 내려앉는 양지 볕도 좋지만
오늘은 모처럼 산 그림자 내리는
골짜기에서 어스를 때까지
햇볕과 개울물 그리고 내가 한데 어울려
한나절 놀다 올 참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