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스타
이탈리아, 그리스 등의 지중해 연안 국가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점심 뒤에 낮잠을 자는 풍습이 있죠, 이를 시에스타라 합니다. 시에스타는 사람들에게 힘든 일상에 꿀맛과도 같은 휴식시간을 제공…
아침식사를 먹으며 티브이를 보던 중 덜컹하며 옆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티브이의 전원을 끄고 현관문으로 달려가 몸을 바짝 붙이며 좁쌀만이나 한 크기의 도어 뷰를 통해 층계를 내다보았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여자가 층계를 내려갔다. 눈에 새겨 넣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나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구두굽 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잠시 후 그곳에는 가느다란 내 숨소리만이 울려댔다.
연애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첫눈에 반한다던가 하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허무한 녀석인가를 알기에 더욱 인색하게 굴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를 보게 되었고 나는 사랑에 대한 나의 신념이 출렁임을 느꼈다. 눈길을 확 잡아끄는 아름다움은 없었지만 눈빛이 근사한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세우고서야 나는 그녀가 내 옆집에 살고 있는 걸 알게 됐다.
내 이웃이 그녀라고 인식하고부터 내 삶의 모습은 그녀에게 종속되었다. 볼일을 보거나 샤워를 하려고 욕실에 들어가도 옆집에 샤워기 트는 소리가 나면 서둘러 뛰어나와 얼굴을 화끈거려했고 오전 10시까지 잠에 빠져 생활하던 게으름뱅이는 사라지고 적어도 그녀가 출근하는 7시 30분까지는 일어나는 무직의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그녀가 출근한 뒤, 나는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금 마티카 앞에 섰다. 1미터 크기의 조각용 목제를 마주보고 그녀의 모습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았다. 부드럽게 휜 이마선이나, 높지도 않지만 볼품없게 낮지만도 않은 콧날, 적당히 예쁜 입술이 눈에 잡힐 것처럼 피어난다. 그녀의 모습을 상기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언제나 그렇듯 주머니에 자리한 오래된 조각용 칼. 낡디낡아 손잡이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손에 쥐면 손가락이 손잡이에 꼭 들어맞는 그 기분이 무척이나 아늑했다. 이미 10년이 넘게 사용한 조각칼은 고등학교시절 먼저 떠난 부모님을 제외하면 내게 있어 가족이나 동반자 같은 물건이었다.
팔을 들어 그림을 그리듯 허공에 휘휘 저어본다. 대충에 윤곽을 잡은 뒤 곧바로 나무를 긁어냈다. 위로 파헤쳐 올리며, 옆으로 뉘여 살살 훑어내며. 무아지경에 빠져 조각을 만들어 갔다. 눈 깜짝할 새 조각이 사람의 형상을 나타냈다. 하지만 역시 아니었다. 사람의 대략적인 모습만 형상화 되었을 뿐, 그 이상은 드러나지 않은 조각이었지만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마티카를 밀어 엎어트렸다. 이미 수없이 시도해 봤지만 진정으로 갈망하는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괜한 헛수고를 했다고 생각하며 조각칼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점식식사를 라면으로 때우고서 집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나이 30살에 아직도 변변한 직업하나 구하지 못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러가는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대게 내 나이에 편의점에서 카운터를 보고 있으면 편의점의 사장이나 그 친인척으로 보기 십상인데, 난 사장은커녕 일을 하기 전까지는 사장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중년의 남자들이 복권을 사러와 ‘사장님 오천 원 어치 자동으로요.’라거나, ‘사장님 오늘따라 신수가 훤하시네.’라고 말하면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딸랑 종소리를 울리며 문을 밀고 들어가자 카운터에 ‘진짜’ 사장님이 앉아 계셨다.
“여, 정 작가, 왔어?”
“네 안녕하세요.”
양 볼에 찐빵이나 한 살덩이를 붙여놓았나 싶은 얼굴에는 개기름이 번들번들 빛나고 있었다. 작품구상은 잘 되냐는 둥, 언제나 지각하지 않고 제시간에 와서 믿음직하다는 둥의 인사치레를 들으며 인수인계를 끝내자 사장은 직원 휴게실에서 모습을 나타낸 묘령의 여인과 다정하게 팔짱을 끼며 문을 나섰다. 광택이 흐르는 체어맨의 조수석으로 여인을 안내하고, 사장님은 뭐가 그리 기쁜지 얼굴 한가득 미소를 띠우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조용한 엔진소리와 함께 사장의 체어맨은 차도를 따라 매끄러지듯 떠나갔다. 딸이라기엔 나이가 있고 아내라기엔 너무나 젊은 여인은 분명 사장의 애인일 것이다. 40대 초반의 나이로 편의점 몇 개를 운영하고 있는 사장이니 내연녀가 있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만은 않을 테니까. 비록 자진하여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지만 저렇게 호의호식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내가 저 정도 나이가 찼을 때, 저런 호강을 누릴 수 있을까 하여 적잖이 걱정이 되기도 했다. 예술의 추구도 좋지만, 대학교 학창시절 주린 배를 부여잡고 어렵사리 등록금을 낸 기억이 있는 만큼 배를 불리며 사는 삶에 대한 욕심도 없지만은 않았다. 예술적인 조각을 만들어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좋은, 좋은.
언젠가는 이 바램들이 이루어질 거라 기대하며 카운터에서 들어오는 손님을 맞았다.
퇴근시간이 조금 지나서 저녁 시간 담당 아르바이트생이 얼굴을 내밀었다. 정시에 찾아오는 일이 드문 대학생 청년은, 과거의 나와 마찬가지로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물론 나처럼 전액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진 않지만, 한창 놀아야 할 시기에 돈을 번다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일인가를 알기에, 나는 애써 웃는 얼굴로 그를 반겨주었다.
“왔니?”
“죄송해요. 식당에서 싸움이 나는 바람에…”
청년은 죄송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고 나는 괜찮다는 말로 사과를 받아드렸다.
사과의 의미라며 청년이 건네준 편의점 커피의 빨대를 물고 버스의 도착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다. 15분. 20분 전부터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었으니까 버스가 도착하면 30분을 기다린 꼴이다. 적지 않은 시간이지만 개의치 않고 다시 손에든 책으로 눈을 돌렸다. ‘예술인으로 살기’라는 제목의 자서전은 한국에서 그런대로 유명세를 떨친 화가가 그런대로 괜찮은 자신의 인생을 써 넣은 책이다. 미술 잡지를 구매하기 위해 찾아간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책이었다. 그나마 한국에선 대중적인 화가인 그도, 나처럼 방황의 시기를 거쳤을까하고, 호기심에 끌려 잡지를 포기하고 샀었다. 처음 네다섯 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명세를 얻고 난 후의 글이라 후회가 일었지만 성공했을 때를 대비해 알아두자는 생각에 열심히 읽었다. 알아두면 유용할 지식들이 없는 것만도 아니었다. 15분이라는 시간을 염두에 두고 천천히 글을 읽어 내려갔다.
세 장 째 책을 넘기자 버스가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그녀가 내렸다.
그녀가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그녀의 뒤를 은밀하게 뒤따랐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퇴근을 기다리다가 집까지 뒤따르는 일은 내게 일상이 되었다. 그녀를 따라 골목을 돌아서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정말로 이 스토킹 같은 에스코트가 언제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던가. 그녀가 편의점에 들어가는 모습을 전봇대 옆에 서 바라보며 차분하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녀가 맥주 몇 캔과 샌드위치를 고르는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내가 그녀를 뒤따르게 된 계기가 떠올랐다. 아마 우리 동네에서 성폭행 사고가 있었다는 뉴스를 보고부터였을 것이다. 얼마 못 가서 범인이 자수를 하였다고 하지만 나는 그녀를 따라다니기로 결심했다. 혹시나 그녀가, 생각하기도 싫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성폭행을 당했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을 나를 떠올리는 게 싫어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뉴스를 본 후부터 나는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매일 버스 정류장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가 내릴 버스가 도착했는데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막차가 지나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집에 돌아가 그녀 걱정에 전전긍긍 밤을 지세다, 다음날 아침 그녀가 출근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녀가 택시를 타고 귀가하였다는 걸 깨닫고 안도한 적 또한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영락없는 스토커로 오해받겠지. 어쩌면 난 정말 스토커일 지도 모르겠다. 나만 자각하지 못한 걸지도… 만감이 교차함을 느끼면서 편의점에서 나온 그녀를 다시 따라갔다.
그녀와 내가 사는 3층짜리 빌라가 눈에 보였다. 그녀가 집에 안전하게 귀가하는 것을 목전에서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오늘은 안심하고 잘 수 있으리라.
그러나 안심도 잠시, 어두운 집 앞 골목에서 한 인영이 그녀의 앞을 막으며 나타났다. 만면에 웃음을 짓고 있는 유들유들한 인상의 남자로 나보다 다섯 살 정도 더 나이가 있어 보였다.
“오늘은 왜 말도 않고 그냥 갔어.”
남자는 그녀의 지인이었는지 팔을 활짝 벌리며 가볍게 그녀를 포옹했다. 연인사이인가. 속에 불덩이가 앉은 마냥 배속이 뜨겁게 부글거렸고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 애인이 있다는 가정 하나 세우지 못한 미련한 나에게 수치심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혹시 사내가 그녀의 남자친구라면 어떻게 할까.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고 그녀가 출근하는 시간에 태연하게 나가 ‘안녕하세요. 옆집 살면서 인사는 처음인 것 같네요.’하며 능청을 떨어야 할까. 그녀에게 ‘보니깐 집에 늦게 귀가하시는 것 같던데, 애인 분 있으면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 보세요. 요새 동네가 워낙 흉흉해야 말이죠. 그 왜, 저번에 동네에서 성범죄도 일어나고…’라며 쫑알쫑알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는 ‘불편한 일 있으면 말해주세요. 뭘요 이웃에 사는 사람끼리.’라며 그녀 앞에서 웃음을 만들어 내야 할까.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있던 와중 분위기가 조금 소란스러워진 걸 깨닫고 다시 상황을 주시했다.
“놔줘요, 제발!”
크게 소리치지는 않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 강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잡념은 거기까지. 나는 불법주차 차량 뒤에서 몸을 빼며 그들 사이에 나섰다.
“실례합니다.”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둘은 상당히 놀란 기색이었다. 나는 그녀를 흘끗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여성분이 싫어하는 것 같은데, 저기 이 분하고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관계가 어떻든 무슨 상관인데.”
자기보다 어려보인 탓인지, 사내는 미간과 콧잔등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짐짓 험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괜한 참견지도 모르지만, 요즘 동네가 흉흉하잖아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숨을 들이마시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말해줄래요? 지금 제가 민폐를 끼치고 있는 건가요, 아니면 적절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건가요?”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뻥끗뻥끗 거렸다. 다만 글썽거리는 눈빛이 도움을 요청하는 듯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까짓 비루먹은 강아지 놈은 저 혼자 처리할 수 있습니다.”
원래 나는 여자를 칭찬하고 돋보이게 만드는 데는 재능이 없지만, 남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투쟁본능을 이끌어 내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 부모님이 안계시던 고등학교 시절 동급생들의 폭력에서 버티는 방법은 나 스스로도 폭력을 휘두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으므로.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욕설을 내뱉으며 주먹을 휘두르려는 듯 팔을 크게 들어올렸다. 싸움을 못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주먹을 뒤로 당겨 가속도를 얻어 볼 심산이겠지만, 싸움 좀 해봤다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지 않는 위험한 실수였다. 그리고 그 실수는 금방 그에게 고통이 되었다.
“으악!”
주먹이 나를 향해 뻗어지기 전, 그러니까 그의 팔이 뒤로 당겨짐과 동시에 나는 정수리를 내밀어 그의 기분 나쁘게 찡긋 거리는 콧잔등을 세게 들이 받았다.
사내는 코피를 줄줄 흘리며 나에게 소송이 어떻고 감방이 어떻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고성방가에 놀라 속속들이 모여드는 사람들 때문에 미간을 한껏 구기며 자리에서 떠나갔다.
“사람들이 더 몰리기 전에…”
“네, 네.”
긴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데리고 나는 빌라로 들어갔다.
2층으로 올라온 그녀는 내게 연신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여기가 집이신가 본데, 어서 들어가 보세요.”
내 말에 그녀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긴장한 듯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기… 옆집 사시는 분 맞으시죠?”
그녀의 질문은 나를 조금 당황시켰다. 그녀가 내 존재를 아는 것 에서온 당황이었고, 그 사실에 크게 놀란 심장에 대한 당황이었다. 애써 침착하며 그러마고 대답했고 이어진 질문은 내게 지금까지 겪어 본 적 없는 긴장감을 안겨 주었다.
“저, 저를…… 좋아하시나요?”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어요. 누가 밤마다 저를 따라오는 것 같았거든요. 처음에는 스토커인 줄 알았는데 멀찍이서 따라오기만 할 뿐 별 나쁜 심산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그러려니 했었어요. 그러다 택시타고 오는 길에 그 쪽이 제가 내리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는 모습을 봤어요.”
천천히 말을 꺼내는 그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마침 제가 평소 타는 버스가 제 택시 앞에 있었고 그 쪽이 그 버스의 출구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도 봤지요.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어요. 그러다가 버스에서 내려 그 쪽 모습을 보면 택시에서 그 쪽을 본 일이 생각나 더 군요. 그래서 좀 의식하고 봤더니 꼭 제가 버스에서 내리면 그제야 일어나 어디론가 가는 거 에요. 그래서 어쩌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 일을 보아 크게 틀린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어디까지나 심증이었지만 그녀는 확신에 찬 표정이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그동안 뒤를 몰래 따라다닌 것도 맞고,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린 것도 맞아요. 하지만 그건 아가씨에게 뭔가 불온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해서였지 절대 흑심에 한 행동이나 스토킹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아닌지 어떤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어 마지막에 목소리가 움츠러들었다. 다행히 그녀도 내 말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에게 흑심이 있어서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죠.”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좌우를 살폈다.
“저기 잠깐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나요?”
“네?”
의문에 찬 나의 “네”가 수락의 의미인 줄 알았는지, 그녀는 자신의 집을 열고 나를 끌어들였다.
그녀가 차를 내오는 동안 나는 그녀의 방을 살피고 싶어 하는 나의 욕구를 최대한의 자제력으로 억눌러야했다. 반쯤 포기하고 집의 내부를 살피려는 찰나 그녀가 홍차와 과일 따위를 가지고 나타났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었는지 탁자 맞은편에 앉은 그녀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많이 당황스러우실 거라 생각해요.”
“아뇨, 아가씨가 더…”
도리질 치는 내 모습에 그녀가 엷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서로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저는 시영이라고 해요. 박 시영.”
그녀의 이름을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들었다는 만족감이 일종의 쾌감처럼 다가왔다.
“저는 인 오라고 합니다. 성이 인이고 이름이 외자로 오에요. 편하게 인오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작게 숨을 터트리며 그녀가 미소이었다.
“인 오라고요? 재미있는 이름이네요.”
지금까지 숱하게 놀림받아온 이름이지만, 그녀를 웃길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만족했다. 그러나 곧바로 시영 씨의 얼굴에서 웃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늘이 져있었다.
“인오 씨. 제가 이렇게 인오 씨를 집으로 초대한 건 인오 씨에게 부탁할 거리가 있어서 에요. 염치없고 말도 안 되는 부탁인 건 알지만, 인오 씨가 제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들어 주실지 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탁드리는 거 에요.”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뜸을 들였다. 도대체 무슨 부탁이기에 저리도 어렵게 말을 꺼내는 것일까.
한숨을 내쉰 그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방금 본 남자. 제 상사 k부장님을 죽여주세요.”
몇 달 전 제가 갓 입사했을 때 일이에요. 정말 어렵게 취직한 회사고 동료 직원 분들도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들떠 있던 때지요. 입사 초기라 이것저것 한창 바쁠 때인데 처음으로 회식이란 걸 하게 됐어요. 안 그래도 업무에 쪼들리고 있던 저는 신나서 과음을 했죠. 입사를 축하한다고 건네는 축하주, 잘 부탁한다고 건네는 환영주, 그리고 옆에 앉아있던 여직원 분과의 술까지. 여러 잔에 걸쳐 술을 마셨어요. 그러다 술에 취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낮선 방의 침대 위였어요. 어리둥절해 좌우를 살펴보자 옆에 k부장님이 누워있는 걸 확인했어요. 그제야 전 제가 알몸이란 걸 깨달았죠. 믿기 힘드시겠지만 그게 제 첫 경험이었답니다. 아아, 침대 위에는 제 아랫배를 짓누르는 고통의 원인과 폭풍이 지나간 참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어요. 저는 부장님이 깨기 전에 조용히 일어나 옷을 입고 건물에서 빠져 나왔어요. 모텔 건물이더군요. 억울하고 슬펐지만 이런 일도 있다는 걸 들었었기에 이번엔 제 주의부족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주의부족. 네, 주의부족이죠. 그렇게 마음먹기로 하고 제 스스로 얼마나 질타하고 위로했는지 모르실거에요. 회사에서 부장님에게 어떤 얼굴을 보여야 할지 고민했었어요. 그런데 그 고민은 순전히 제 안일한 착각이었죠. 그는 제 모습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제 얼굴과 나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그 모습, 억눌린 신음을 토해내는 그 모습. 부장님은 자신의 얼굴만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모든 상황을 기록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말했답니다. “시영 양. 오늘 밤에 함께 식사를 하고 싶은데.” 아아, 잔인한 사람. 저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잔혹한 미소를 보았지요. 저는 별 수 없이 그를 따라갔고, 그 밤의 일이, 제 부주의로 인해 발생되었던 그 잔혹한 일이 다시 재현되었어요. 그 후로도 부장님은 제게 끊임없이 관계를 요구해 왔어요. 그의 행위는 점점 더 과격해졌고 저는 여자로서 차마 입에 올리기도 힘든 끔찍한 일을 당했답니다. 그는 발정기의 개처럼 제 몸을 탐하고 또 탐했어요. 그 더러운 혓바닥으로 제 몸 곳곳을 자신의 체액으로 덮어갔죠. 얼마 전에는 그가 제게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했답니다. 제 목을 조르고 답답한 신음성을 토해내며 제 몸 안에…… 아아, 저는 어쩌죠? 이런 수모를 겪고도 살아야 하나요? 영원히 지속될 그의 횡포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야 하나요? 전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때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얼굴을 붉게 달아오르고 주먹은 풍에 걸린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의 참담한 심정과 기분이 내게 옮겨져 혀가 딱딱하게 굳었고 피가 쏠린 머리는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저 혼자 그를 죽이려고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에요. 다만 그의 앞에만 서면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는 것처럼 떨려서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답니다. 그리고 오늘 인오 씨를 보았죠. 이 사람이라면 내 절망을 짊어져 줄 사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숨을 고르며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제 부탁 들어주실 수 있나요?”
그녀의 질문 후 내가 대답을 않자 묘한 정적이 돌았고 그녀는 급하게 말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물론 혼자서 모두 맡아 달라는 건 아니에요. 저도 도울게요. 어려운 부탁인 건 알지만 인오 씨라면 들어 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를 진심으로 위해주시는, 석 달 간 하루도 빠짐없이 내 신변의 보호만을 위해 나를 기다려준 사람이라면, 아무런 요구 없이 그렇게 해 준 사람이라면. 제 진심을 드려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말이에요. 믿어줘요. 제게 이런 일만 없었더라면 먼저 나서서 인오 씨를 찾았을 지도 몰라요. 인오 씨 부탁해요. 이미 더러워진 몸이지만 인오 씨만 받아준다면 전……”
한마디의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는 내 모습에 그녀의 목소리도 점점 옅어졌다.
“그렇겠죠. 애초에 말이 안 되는 부탁이겠죠? 저도 참 바보 같은 짓을.”
그녀의 목소리에 눈물이 묻어났다.
“…이만 돌아가 주세요.”
위에서 꾹꾹 누르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조용히 일어나 출입문을 통해 그녀의 집에서 나왔다. 등 뒤에서 쿵하고 출입문이 닫혔다.
편의점에서 나온 나는 오늘도 그녀를 기다릴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녀의 제안은 어떻게 생각해도 무리였다. 아무리 그녀를 사랑하고 보살피고 싶은 마음이 강해도 살인이란 행위는 쉽사리 결단하지 못할 문제였다-정말 결단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녀의 질문에 곧바로 못한다고 대답하지 않은 것은 마음속에 그녀를 위해서라면 살인 정도야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내가 했다는 사실에 흠칫하며 머뭇거리는 사이 대화는 끝났고 나는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그녀의 집을 나와 버렸다. 그렇게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흐지부지 된 것이다.
이제 그녀도 내가 그녀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여기서 내가 그녀의 마중을 나가지 않는다면 그녀와 나의 사이는 더욱 어색해 질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어색하지만, 아무튼 나는 그걸 원치 않았다. 그렇지만 또 그녀를 기다리다 그녀를 만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 것 또한 큰 고민거리였다.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 주변을 보니 나는 이미 정류장에 도착해 있었다. 고민에 빠져있을 때 몸이 멋대로 나를 정류장으로 인도했나. 될 대로 되라지 싶은 심정으로 벤치에 앉았다. 그러나 그녀는 정류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내가 껄끄러워 택시를 타고 갔나 생각하니, 이 앞을 지나갔을 그녀가 생각나 부끄러워졌다. 어젯밤의 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류장에 앉아있는 나를 보며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지독한 스토커라고 여겼을까. 순수한 사랑이라 여겼을까. 괜히 내가 순애보의 주인공처럼 느껴져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집에 도착해, 식사를 끝내고 행여나 밤늦게 귀가할 시영 씨를 기다리기 위해 영화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방 문을 세게 두드렸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 도어 뷰로 바라본 복도에는 그녀가 서 있었다. 나는 황급히 문을 열어 그녀를 들였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에요?”
그녀의 모습은 처참했다. 머리는 봉두난발 흐트러졌고 얼굴은 맞은 것처럼 붓고 멍이 들어 있었다. 절뚝거리며 걷는 모양새도 이상했다.
“……릴 거 에요.”
그녀가 뭐라고 말했지만 나는 확 끼쳐오는 술 냄새에 코를 붙잡고 몸을 뒤로 뺐다.
“뭐라고요?”
“그 인간 내가 죽여 버릴 거 에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었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아름다운 눈빛은 거의 없어져 있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무심하게 검은 점 하나 꾹 찍어놓은 그녀의 눈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지금 이 시간까지 그녀에게 있었던 일을 묻기가 두려웠다. 그녀를 둘러싼 부조리가 그녀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 거렸다. 고민 따위는 필요 없었다. 나는 그녀의 공허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시영 씨 울지 말아요. 당신의 부탁 제가 들어줄게요.”
온 몸이 뜨겁게 두근거렸다. 아무도 모르게 실행했다고 생각하나, 목격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귀가 두근거리고 눈이 두근거리고 나를 포함한 세상 전체가 두근거렸다. 사내의 싸늘한 주검이 담긴 보따리를 등에 짊어지고 밤이 깊어 이슥한 산길을 올랐다. 사람 하나를 등에 짊어지고 산길을 오르니 땀이 나기도 하련만, 어찌 된 셈인지 뜨거운 심장과는 대조적으로 몸에서는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어느 정도 깊숙한 산자락에 올라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미리 준비해 둔 삽을 나무뿌리 뒤에서 끄집어내어 땅을 팠다.
푹 팍 푹 팍 적막한 산중에는 내 삽질 소리만 울렸다. 어느 정도 깊이 팠다고 생각한 나는 보따리를 들어 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었다. 보따리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굴었다. 보따리에서 팔 한 짝이 삐져나왔다. 나는 조심조심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 팔을 집어 들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보따리 안에 집어넣은 방향제들이 무용지물이 될 판이었다. 손모가지를 집어 들고 보따리에 도로 구겨 넣으려는데 그의 손가락에서 비싸 보이는 반지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반지를 봄과 동시에 머릿속에 훅하고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녀, 시영 씨의 손끝에서 반짝이던 은색의 반지였다. 기억속의 반지는 이 반지와 무척이나 흡사했다. 갖은 노력으로 손가락에서 반지를 꺼내 주머니에 훔쳐 넣고 보따리의 주둥이를 꽉 묶었다. 구덩이 밖으로 올라온 나는 다시 삽질을 시작했고 그제야 온 몸이 땀으로 젖어들었다.
술에 절어 인사불성이 되어 돌아온 집에는 그녀가 흰색 원피스를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제대로 몸도 못 가누는 체로도 그녀의 원피스 차림을 아름답다고 여겼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와 그녀는 다시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한동안 말없이 술만 먹던 우리는 어색함을 없애고자 시답잖은 대화를 나눴고 그 도중에 내가 일하는 편의점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니까 그 젊은 여성분이 저희 사장님의 따님이라고요?”
“네. 제 대학교 후배라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인데, 부모님이 결혼을 무척 일찍 하셨대요.”
“그만한 자식을 두려면 도대체 얼마나 일찍 결혼하신 건지.”
“고등학교 때 임신을 하고 그 길로 야반도주를 했다고 들었어요.”
고등학교, 야반도주, 임신. 유복하게 자라 편안하게만 자랐을 줄 알았더니 사장님도 의외로 엄청난 역경을 거치셨던 것이다. 그런데도 성공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다니…… 새삼 사장님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느꼈다. 나도 언젠가 사장님처럼 모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기를. 그리고 그녀와 함께 오늘을 잊고 살아가기를. 그녀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볼을 붉혔다. 그녀의 눈동자는 원래의 빛을 되찾아 가고 있는 듯 보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포갰다. 서서히 의식이 멀어져갔고 나는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은빛의 반지를 보았다. 아까 챙긴 반지가 떠올랐다. 잡념과 미래를 향한 기대가 모두 사라지고 그녀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다. 그녀가 나의 셔츠를 벗겨 내고 나의 쇄골에 입을 맞추었다. 주머니 속 조각칼을 움켜쥐며 의식의 끈을 놓쳤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몸을 찐득하게 휘감고 있는 무언가를 느껴 몸을 살피니 온 몸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피였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을 쳤고 발 뒤로 무언가에 걸리며 넘어졌다. 붉은 원피스를 입은 시영 씨였다.
“아아!”
나는 고통과 절망, 슬픔 등이 섞인 비명을 질렀다. 크게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팔을 들어보았다. 그녀의 중지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사내의 반지와는 달리 겉보기에도 저렴해 보이는 큐빅 반지. 서둘러 사내의 반지를 꺼내 대조해 보지만 색깔부터 달랐다. 남자의 반지는 은색이 아닌 금색이었다. 깊은 산속이라 색을 식별하지 못했나 보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싸늘한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나는 통곡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나는 품에서 천천히 그녀를 내려놓는다. 쿵쾅쿵쾅 누군가 층계를 뛰어올라온다. 곧이어 현관문을 거칠게 두드린다. 뭐라고 외치는 것 같은데 메아리 소리로 들린다. 사이렌 소리가 점점 커진다. 티브이는 밤새 틀어져 있었는지 전에 보았던 프로그램의 재방송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 그리스 등의 지중해 연안과……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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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리신 말씀이 하나 없기에 감사하면서도 뜨끔한 감평이네요.... 감사합니다. 더욱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세 편도 감평해 주실 순 없을 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