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인
1946년 전라남도 해남 출생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중퇴
1974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
1980년 '남민전 사건'으로 징역 15년 선고(9년 복역 후 가석방)
1994년 지병으로 별세
시집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
『사상의 거처』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외
黃土碑 / 김준태
- 朝鮮 황토의 아들 金南柱
아들아, 1백년 전
우리에게는 金南柱라는
혁명전사ㅡ 온몸이 사랑과 불꽃으로 뭉쳐진
그런 시인이 있었단다
저녁 연기도 향기로운 남녘땅
쑥뿌리 황토를 박차고 일어나
反外勢 輔國安民을 외치며
망월동 넘어 白山竹山을 넘어
오오, 우금치 피바다 산마루를 넘어
끝끝내 끝끝내는 '조국은 하나다!'
우리 모두의 철조망을 뚫어버린
金南柱라는 가슴 벅찬 시인이
아들아, 우리에겐 있었단다
악의 무리에겐 비수를 들이밀고
선한 사람에겐 들꽃이라도 안겨주던
온몸이 사랑과 혁명, 불꽃으로
뭉쳐진 金南柱라는 시인이
아들아, 1백년 전
우리 고려반도에 있었더니라.
- 김준태 시집 <꽃이, 이제 地上과 하늘을> 1994
남주 생각 / 정희성
남주는 시영이나 내 시를 보며 답답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뉘 섞인 밥을 먹듯 하는 어눌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시영이나 나는 죽었다 깨도 말과 몸이 함께 가는 남주 같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울 것이다 기껏 목청을 높여보았자 자칫
몸과 목소리가 따로 놀 테니까 시영이도 그렇겠지만 나는 나대로
감당해야 할 몫이 따로 있기도 하고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건
무슨 변명 같기도 하고 비겁한 듯도 하고 하여튼 일찍 간
남주 생각을 하면 내가 너무 오래 누렸다는 느낌이다
- 정희성 시집 <흰 밤에 꿈을 꾸다> 2019
金南柱 시인 영전에 / 이시영
벗이여 남주여 그러나 나의 벗을 넘어 민족의 아들이여 민주 전사여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고
그대의 가쁜 숨결에 속삭여댔지만
아픈 다리 이끌며
가로질러 산을 넘고 물 건너 허허로이 저세상 입구로 먼저 가버린 친구여
남도엔 때아닌 폭설이 들판을 덮고
짚북더미 속에서 마늘 싹들은 파릇파릇 시퍼런 눈을 뜨는데
우리는 그대의 죄 없이 맑은 눈을 덮어
기어이 고향 마을로 돌려보내야 한단 말인가
한때는 영어 단어장 한 손에 들고 소와 함께 소의 웃음을 천진스럽게 웃던 소년 김남주의 마을
자라서는 그대를 간첩이라 하여 내쫓고 전사라 하여 내치던
분단 속의 엄혹한 분단의 마을, 광주의 마을
그대에게 난생 처음으로 꽃다발을 걸어주던 마을
아니 평생 농민 어머니의 마을 아버지의 마을
그대가 일생을 걸고 해방시키고자 했던 계급의 마을에
이제 그대의 관을 내리고 우리 목메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어여 가게 남주
삭풍에 가지 부러지고 귀 씻겨나간 채로 뒤돌아보지 말고 어여 가게 남주
가다가 들판 만나면 거기 개울가에서
낯익은 아이들과 함께 염소 뿔 싸움도 시키고
사나운 파도 만나면 어기여차 넘어주며
거기 뱃전에 아기를 업고 서성이는 아낙에게도
눈물 글썽이며 이 세상 안부도 전해주고.
오늘은 햇빛 밝고 이 세상에 바람 부는 날
자네 알지, 자네가 9년 만에 옥에서 나와 맨처음 고개 떨구고 섰던 망월동 언덕
수많은 민주 영령들이 언덕빼기 아래까지 달려나오며 햇빛 속에
하얀 고사리 손을 흔드는 것이 보이지?
어여 가게 남주
이 세상 일일랑 이제 남은 자들의 몫
자넨 일생을 제국주의의 억압자들과 사력을 다해 싸웠고
이제 역사 속에 가 아기 손으로 새로 태어나야 할 때
세상은 자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웠고
자네는 한번도 그 짐을 등에서 내린 적 없었는데
이제는 그 짐일랑 우리에게 내려놓고 편안히 가게
가로질러 산을 넘고 물 건너 표표히 먼저 간 친구
깨꽃이 환하게 피면 우리에게 다시 오게나
송화 가루 온 산천에 펄펄 날리면
눈 속의 샛붉은 매화처럼 다시 오게나
해방둥이 그대의 삶은 이 땅 반세기의 역사 그 자체
분단의 철조망과 제국의 사슬이 걷힐 날 반드시 있으리
자본에 의해 자본이 패퇴되는 날 반드시 있으리
그때 다시 이 세상에 오게나 아픈 다리 바로 딛고 감은 눈 새로 뜨며
그 잔잔한 소년의 미소로.
벗이여 남주여 나의 벗을 넘어 민주주의의 참다운 전사여
- 이시영 시집 <무늬> 1994
칼에 대하여 / 김사인
사람이 통째로 칼이 되기도 한다.
한이 쌓이면 증오가 엉기면
퍼렇게 날 선 칼이 된다.
나중에는 날이다 뭐다 할 것도 없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된다.
살은 거멓게 타고 마르고
눈에는 핏발이 오른 뒤
그것도 지치면 차라리 누레지는 것이다.
악물고 악물어 어금니가 주저앉고
밥도 잊고 잠도 잊고 나면
칼이 된다.
입은 웃는 것처럼 잇바디가 드러나고
한기가 피식피식 웃음처럼 새는 것이다.
무딘 듯 누더기인 듯 온몸이 서는 것이다.
한두십년에 오지 않는다.
진펄에 멍석말이로 뒹굴며
피떡이 되어 이백년 삼백년
비로소 칼이 서는 것이다.
꺼먼 칼이 되는 것이다.
김남주가 그랬다.
- 김사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 2015
보고 싶네 / 박남준
- 시인 김남주 생각
전주, 지금은 없어진 술집에서였지
그거 기억해요? 새카만 얼굴로
어퍼컷처럼 날리던 펀치
야 너 요새 그렇게 히말태기 없는 시를 쓰냐
다 기어들어가는 대답이었나
난 이제 산속에 살잖아
말이었나 막걸리였나
형은 뭐 불타는 전사니까 상관없지만
누가 내 이야길 기울여주나
새나 나무나 꽃이 아니었다면
고려병원 장례식장 울다가 울다가
아침에 나가보니 등산화가 없어졌데
짝이 안 맞는 신발을 질질 끌고 가다
철근 밥 일용직 김해화가 사준 운동화로 걸어
영결식장 들어서는데 카랑카랑 시낭송
전사가 들려오데 얼마나 숨이 턱 막히던지
그러고 보니 형 때문에 또 잃어버린 것이 있네
언젠가 광주 오월 문학제에 갔다가
망월동 형 무덤가에 엎어졌는데 에이 씨 자꾸만
자꾸만 눈이 뜨거워졌는데
시낭송하고 받은 돈이며 지갑 홀랑 빠져나갔는데
보고 싶네 형,
이 나라는 아주 끔찍해
가끔 슈퍼에서 총을 팔았으면 싶어
온통 날라리 공사판으로 파헤쳐 놓은 쥐새끼들
탕탕탕 해버리고 싶다니까
협잡과 기만과 위선과, 시인들도 마찬가지야
형이 살았으면 지금 같은 쓰레기
썩을 놈의 세상에 대갈일성 뭐라고 호통을 칠까
야 이~
- 박남준 시집 <중독자> 2015
김남주를 묻으며 / 최영미
우리 중의 누가 그의 쓴웃음 속으로 들어가보았는가
우리 중의 누가 그의 썩은 췌장을 들여다보았는가
잘 돌아가셨어요, 선생님.
이제 더는 더렵혀질 수 없는 몸이 되어
더러운 흙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시는 이여.
밟아도 밟아도 다 못 밟을 땅
뜨거운 시들이 묻힌 곳, 망월동에서
당신보다 더 당신을 닮은 초상 위로
당신 생애처럼 단순, 과격하게
카메라 플래시만 번쩍! 어둠을 가릅니다
철컥, 당신의 거대한 초상화 위로 셔터가 돌아가는 그 순간
차라리 감옥에 있을 때가 좋았지, 쓸쓸하게 말하던 당신의 얼굴을
나는 그만 보고 말았습니다
지상으로 유배되어 이 세상의 방식대로 알맞게 부패하지 못하고
차가운 눈 속에 박제된 가랑잎처럼, 겨울이 지나도 겨울을 증명해야 했던 사람
우리의 자랑스런 과거이자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이었던 사람
밤이 대낮처럼 발거벗고, 배가 터지도록 부어오른*
휘황한 거리에서 할 일이 없었던 어제의 전사
당신의 시가 피와 칼만이 아니라 나뭇잎에 부서지는 햇살과 풀잎에 연 이슬을
노래할 즈음, 당신은 갔습니다
저도 모르게 문득문득 제 손톱에 끼인 때처럼
그렇게 당신을 기억될 겁니다
뒤늦게 후회하는 자의 게으른 아침 머리맡을 붙들고
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죄로……
솔직히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 이 시대
살아있는 사상이 거처할 곳은 아무데도 없는 이곳에서
더 이상 못 볼 꼴 보지 않고
참, 잘, 돌아가셨어요
선생님.
* 김남주의 시 <근황>에서 인용.
- 최영미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 1998
김남주를 묻으며 / 송경동
경기대에서 「조국은 하나다」
육성시낭송을 듣고도 울지 않고
광주 톨게이트, 빛고을 시민들보다
먼저 와 그를 기다리고 섰던
백골단 장벽 보면서도 울지 않고
불 꺼진 취조실마냥 어둡던 망월동
그의 하관을 보면서도 이 악물었는데
그를 묻고 돌아온 서울
심야버스 타고 마포대교를 건너다
다리 난간에 덜덜거리는 허리 받치고
해머드릴로 아스팔트 까며 야간일 하는
늙은 노동자들을 본 순간
이 악물며 울고 말았다
그가 간 것보다 그가 사랑했던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이 서러웠다
- 송경동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2009
남주형 / 김용택
형
형이 형의 쇠창살 틈으로
내게 주어야 할 것이
이 시대의 피묻은 눈물이라면
내가 형에게서 받을 것은
저 전주 벌판 논두렁 녹두꽃잎 같은
이 시대의 피묻은 눈물
내가 형의 쇠창살 틈으로 주어야 할 것이
쌀이라면, 아 어머님의 한많은 쌀이라면
형이 내게서 받을 것은
쇠창살 안의 어떤 어둠으로도
감출 수 없는 새하얀
쌀입니다
눈물은 눈물로 받고
쌀은 쌀로 받아야 할
이 좋구나 좋은 가을 하늘 아래
저 원수들은
우리들의 갈길을 막고
우리들의 내미는 손을 자릅니다
형
형이 지금 쇠창살 틈으로
저 하늘가를 보고 있는지
전주의 가을 하늘에
붉은 노을이
핏빛으로 번집니다.
- 김용택 시집 <그리운 꽃편지> 1989
다시 옛 마을을 지나며 / 김용택
- 남주형 생각
다 늙은 감나무에
따지 못한 감들이
허연 눈을 쓰고
얼고 썩고 곯아 떨어진다
감나무 하나 제대로 가꾸지 못해
감가지마다
감들을 썩이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여.
- 김용택 시집<강 같은 세월> 1995
김남주 앞에서 / 김수열
빛고을 광주에
세 그루의 청송과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녹두꽃이 되자는 노래와
다섯 개의 녹죽 돌기둥으로
다시 살아오는 김남주 앞에서
내년 이맘때면 곱디곱게 푸르를 잔디 위를
저리도 다정스럽게 오고 가는
선남과 선녀들의 속삭임에
가만히 귀기울이고 있는
김남주 앞에서 나는
동족끼리 총을 겨눈 그해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칠월칠석날
송악산 섯알오름을 찢어발긴
총소리 비명소리를 듣는다
멜젓 썩듯 썩어 문드러져
오름 가득 구더기 스멀대고
송악산 하늘 가득 쉬파리 웽웽거리는
이유 없는 주검들의 아우성을 듣는다
언뜻 스치는 푸르른 하늘 아래 주검을 누이고
정성으로 비석을 세워 제단을 만든 그 이듬해
완장 두른 군복들의 망치소리 해머소리
우르르우르르 무너지는 비명소리를 듣는다
환청인 듯 아닌 듯
먹장구름 사이로 들려오는 우렛소리를 듣는다
- 김수열 시집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2000
노래하는 戰士 김남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