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얼굴 / 김남주 (1946~1994)
푸른 옷의 사내는
철창에 기대 담 쪽을 내다보며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면회 오겠다던 님을 기다리고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면사포도 없이
양친 부모 승낙도 없이
혼자서 결혼한 여자는
면회가 되면
혹시라도 특별면회라도 되면
간수 몰래 남편 될 사람
손등이라도 한번
어루만질 수 있을까
담 곁에서 애를 태우고
그러나 어쩌랴 이것도
분단과 식민지의 밤이 빚어낸 사랑의 한 얼굴인 것을
고집 / 김남주 (1946~1994)
아기 고집은 황소고집보다
세다
그 고집 엄한 아버지의 매로도 꺾을 수 없고
그 고집 다정한 어머니의
달램으로도 누그러뜨릴 수 없다
한번 토라졌다 하면
하고 싶은 일 하게 할 때까지
먹고 싶은 것 먹게 할 때까지 꺾이지 않는 그 고집
아기 고집
독재자 아니면 꺾을 자 없다
독재자가 휘드르는
칼 아니고는
세상은 고이 잠들고 / 김남주 (1946~1994)
세상은 고이 잠들고 적막한데 자지 않고 깨어나 일어나
유령처럼 어둠 속을 배회하는 것이 있다
하나는 그 꼬리에 반딧불처럼 불을 켠 불온의 사상이고
하나는 그 머리에 탐조등처럼 쌍심지를 켠 관헌의 눈이다
잡히지 말아라 불온한 사상아 네 꼬리가 잡히면
어둠이 운다
뜬눈의 봉사
네 어머니가 운다
무심無心 / 김남주 (1946~1994)
아침 햇살이 은사시나무 우듬지에서 파르르 떨고
산골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는 내 귀에서 맑다
나는 지금 어머니를 따라 산사(山寺)를 찾아가고 있다
어머니 그동안 이 고개를 몇번이나 넘으셨어요
니가 까막소 간 뒤로 이날 이때까장 그랬으니까
나도 모르겄다야 이 고개를 몇차례나 넘었는지
옥살이 십년 동안 단 한번도 자식을 보러
감옥을 찾은 적은 없었으되
정월 초하루나 팔월 보름날 같은 날이면
한번도 빠짐없이 절을 찾으셨다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두고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실은 나도 모를 일이다
자식이 보고 싶을 때
감옥 대신 절을 찾으셨던 어머니의 그 속을
이제 이 고개만 넘으면 어머니 그 절이 나오지요
그래 그래 하면서 어머니는 숨이 차는지
공양으로 바칠 두어 됫박 쌀차둥이를 머리에서 내려 놓고
후유 후유 한숨을 거듭 쉰다
니 나왔으께 인자 나는 눈 감고 저승 가겄어야
니 새끼가 너 같은 놈 나오면 그때는
니 여편네가 이 고개를 넘을 것이로구만
풍진 세상에 남정네가 드나들 곳은 까막소고
아낙네는 정갈하게 몸 씻고 절을 찾아 나서는 것이여
- 김남주 시인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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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 오냐" 그뿐이었다, 내가 옥문을 나와 십년 만에
고향집을 찾았을 때 어머니가 내게 하신 말씀은,
'어디 몸 상한 데는 없느냐' '고생 많이 했지야' 이따위
말씀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어머님의 속을 알지 못한다.
무심(無心), 이 한마디의 말 속에 내 어머니의 속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희로애락에 들뜨거나 호들갑스럽지
않은 내 어머니가 때로는 부처님 같기도 하다.
- 김남주 유고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나는 이 시에서 詩보다도 부재로 써 놓은 김남주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그 무심의 말씀이 더 애틋하였다.
때로는 시가 거창한 뜻으로 포장된 언어가 아니여도 되는구나
라는 것을 이러한 글을 통해 얻는다. 사실 글은 기호 같은
표현의 방법이다. 그 방법이 화려하거나 정확하지 않아도
단 한마디로 공통된 언어의 뜻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이 시 <무심>에서도 어머니의 지고지순한 큰 뜻을 김남주
시인 스스로 더 깊게 깨닫고 느꼈던 사랑을 보았던 것 같다.
세상을 향해 저항하며 가막소에 갔던 자식을 어찌 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 때마다 눈감고 외웠을 그 무심의 불경 속에
어머니 마음은 천길 만길 자식의 뜻이 굽힙없게 스스로
바르게 자리하기를 빌었을 것이다.
김남주 시인의 다른 詩보다 가장 인간적인 모성애를 나타낸
詩가 <무심>속에 가장 깊고 가장 크게 흐르고 있다고 본다.
그 큰 어머니의 뜻이 무심으로 흘렀기 때문에 김남주 시인은
이 세상을 그렇게 강하고 굳게 살았는지도 모른다.
/ 임영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