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진 엘마노 신부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에제키엘 47,1-9.12 요한 5,1-16
율법과 사랑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에서 38년 동안 고생한 한 맺힌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하필이면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은 계명과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기를 강요했습니다.
사람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율법만을 지키도록 했으니
형식주의자, 율법주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쉬어야 한다는 율법 의무에 매달려 있던 유다인들은
병을 치유한 것보다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사실에 비위가 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형식적으로 법을 지키는 것보다
법을 어기더라도 꼭 필요하다면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사랑이 율법보다 더 중요하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도 법에 얽매여 살기보다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미사는 매일매일 참례하면서 남에게 잘해주지 못하면 미사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기도를 매일 꼬박꼬박 바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미사와 기도만 잘하고 이웃 사랑에 소홀히 해서는 않되겠습니다.
대구대교구 전광진 엘마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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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스테파노 신부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에제키엘 47,1-9.12 요한 5,1-16
세상이 악해지는 이유는?
벳자타 연못에는 1년에 몇 번 하느님의 천사가 내려오는데, 그때 연못의 물이 움직인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연못 물이 움직일 때 그 물에 몸을 담그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습니다. 연못가에는 물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는 수많은 병자가 있었고,
서른여덟 해 동안 앓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몸이 아프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만 병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도 그만큼 외롭고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서른여덟 해 동안 병자로 누워 있는 그 사람 곁에는 돌봐줄 가족이나
친구가 없었습니다. 육체적인 병으로 괴롭지만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한테서 떨어져 나와
외톨이가 되고, 그들의 관심과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이 더욱 아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에게 가셔서 병든 육체뿐 아니라 마음까지 어루만져 주셨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 비슷한 말이 지금 우리 주위에도
소리 없이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사랑받고 싶지만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없습니다”,
“저와 함께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 틈에서 홀로 버려진 채 자신의 손을 잡아줄 이를 기다리는 사람이 과연
우리 주위에, 내 가족 가운데 없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세상이 악해지는 것은 선한 이들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광주대교구 김영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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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에제키엘 47,1-9.12 요한 5,1-16
오늘의 미사 독서들은 입당송부터 영성체송까지 온통 물 이야기로 채우고 있어,
그 안에서 맑고 밝은 생명력이 뿜어나오는 듯합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 돌아오신 예수님께서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특별히 병자들이 모여있는 벳자타 못으로 가십니다.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요한 5,3)고 합니다.
흡사 응급실이나 야전병원 같은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물론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하고 피폐한 형편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거기에 모인 병자들은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출렁거리게 하는데,
물이 출렁거릴 때 맨 먼저 못에 내려가는 이는 무슨 질병에 걸렸더라도 건강하게 되었기 때문"
(요한 5,4 각주)에 모여든 이들입니다.
장애가 덜해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이, 부축해 줄 가족이나 종을 거느린 이에게는
제법 유리한 조건일 터이고, 그들은 진작에 치유되어 그 못을 떠났을 겁니다.
그중 서른여덟 해나 앓아온 이에게 예수님의 눈길이 머무릅니다.
그 역시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낫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했을텐데 그 긴 시간을 그저 부러움과
자책으로 보내다 이제는 무기력만 남은 듯 보입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예수님께서 그의 원의를 물으십니다. 강렬하고 순수하고 절실했던 첫 바람을 일깨우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좌절과 실망을 쌓아온 그는 순수하고 단순한 응답 대신
여태 이러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합니다.
도와줄 이가 없어서 그렇다는 원망이 살짝 섞여 있기도 하지요.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그를 고쳐 주십니다. 원망 섞인 동문서답 이면에 자리한 바람을
읽으셨기 때문입니다. 출렁이는 연못의 물이 물리적으로 몸에 직접 닿아야 낫는다고 믿는 이에게,
생명의 물이신 분이 다가오셔서 말씀으로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진정 치유는 매개물을 통하건 통하지 않건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업적임이 드러납니다.
이제는 낫기 위해 요행을 바라며 다른 병자들과 경쟁하기보다 몸소 생명의 물이 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믿으면 살아난다는 진리가 선포되는 순간입니다.
훗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옆구리의 상처를 통해 세상으로 피와 물을 흘려보내셨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서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 중 하나인 오늘의 독서 말씀이 이를 미리 보여줍니다.
"주님의 집 문지방에서 물이 솟아"(에제 47,1)나는데,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에제 47,11)고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마시고 쓰는 물이 그렇듯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세상을 정화하고 치유하고
풍요롭게 되살립니다.
복음의 병자가 연못의 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으로 치유되어 새 삶을 살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치유는 예수님 박해의 전주곡이 되어 버립니다.
"너는 치유를 받아 네 힘으로 짐을 챙겨 걸어갈 만큼 건강해졌으니, 이제 그만 여기를 떠나도 된다."
는 뜻으로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하셨는데, 여기서 곡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서른여덟 해나 앓던 이가 멀쩡히 걸어가는데도 축하와 격려를 건네기는 커녕 안식일에
들것을 들었다고 지적하자, 병이 나은 이는 당장 위기를 모면하고자 예수님이 시키신 것이라고,
그분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전합니다. 들것을 들고 가라는 말씀의 의미보다
그렇게 문자의 외피만을 전하다보니 다른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게다가 그는 자기를 고쳐주신 예수님의 신원을 유다인들에게 알려주기까지 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5,14) 하셨고, 그분에 대한 유다인들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
생명의 은인을 고자질하는 모습이 사실 적잖게 당혹스럽습니다.
육신의 병은 나았을지 몰라도 여전히 영혼은 비틀려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책임을 면하는데 급급했던 걸까요?
예수님 삶이 그랬고 우리 인생사가 그렇듯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과 사건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 역시 유다나 가야파나 빌라도처럼 구원사에서
부정적이나마 제 역할을 한 것이라면 연민이 들기도 하고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주신
당신의 생명으로 치유받고 회복되어 날아갑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책임 있게 그 생명을 누리며 사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를 되살리고 고치시려고 부어주신 은총을 과연 하느님께 감사로 되돌려 드리는지,
아니면 그분 앞에 걸림돌을 놓는지 깊이 깊이 바라보는 사순절입니다.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아 멘. 감사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를 되살리고 고치시려고 부어주신 은총을 과연 하느님께 감사로 되돌려 드리는지,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치유의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