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다녀온 지 벌써 20여일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야 지각 후기를 올려봅니다.
그동안 바쁜 일과와 귀차니즘이 겹쳐진데다 설 연휴까지 있다 보니 이제야..
올해는 답사 다녀오면 꼭 빠트리지 않고 후기를 쓰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공개하면서 2011년 첫 답사 후기를 되새김질 하는 느낌으로~~ ^^
사실 답사를 다녀와서 후기를 쓰는 것만큼 좋은 복습은 없는 것 같아요.
답사에서 보고 들으며 느낀 걸 다시 한 번 자료들도 찾아보며 후기를 쓰다보면 절로 복습이 되고 이렇게 머릿속에 입력된 건 잘 잊히지 않는다는 게 저의 경험입니다.
※ 사진을 클릭하면 좀 더 크게 볼 수 있어요~~ ^^
남한강 옛 목계나루
나문답 2011년 첫 답사는 '중원문화권'의 핵심 충주이다.
개인적으로 충주는 워낙에 많이, 오래, 골골마다 쏘다녔던 곳이라 그다지 큰 느낌은 없지만 사실 충주만큼 문화유산이 산재한 곳도 많지 않을 것이다.
국토의 중앙(통일신라나 고려의 개념에서..)이고 각처의 물산이 이합집산 하던 곳이다 보니 역사적으로 변동과 각축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땅이었고 그들이 발자취도 그만큼 많이 남았음이리라.
충주 땅이 이렇게 주목받고 사람들이 들끓은 데는 바로 남한강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고속도로 만큼이나 사람과 물산이 오고갔던 물길 중에서도 남한강과 충주는 충청도는 물론 강원도, 경상도까지 이어지는 물류의 중심이었다.
이번 충주 답사는 그 남한강 줄기를 옆으로 끼고 시계방향으로 중원벌을 한 바퀴 휘돌아 보았다.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
최근인 2010.11.01 문화재청이 새롭게 변경 지정한 명칭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탑' 이다.
새롭게 정비된 문화재 명칭 부여방식은 소재지역명(충주) 사찰명(청룡사) 그리고 부도의 주인 시호(보각국사)만 사용하며 탑 이름(정혜원륭)은 제외된다.
보각국사 부도는 부도탑과 탑비 그리고 석등이 세트를 이루어 한자리에 온전하게 있어 보는 마음이 편안하다.
많은 폐사지들의 부도와 부도비가 이런저런 사유로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경우가 흔하다.
이곳에서 멀지않은 곳들에 남한강 따라가는 폐사지 답사로 인기 높은 거돈사지(원공국사), 법천사지(지광국사), 흥법사지(진공대사)의 부도탑들과 비는 모두 서로 떨어져 생이별한지 오래되었다(이들 부도들은 모두 서울 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고 부도비들만 현지에 남아있다).
이곳에 갈 때마다 주변에 인가도 없는 산속에 그냥 서 있는 국보와 보물이 걱정스럽더니 근래에 주차장도 만들고 전에 없던 감시용 카메라도 설치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으로 다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보각국사 혼수(混修 1320∼1392)의 부도이다. 고려 말에 크게 활약했던 그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던 1392년에 타계하자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 ‘정혜원륭(定慧圓融)’이라 하여 1394년에 완성하였다.
크지 않은 키에 전체적으로 통통한 모습인데 안정감 있는 지붕 장식이나 탑신을 가득 채워 새긴 신장상 조각들도 모두 완성도가 높아 보인다.
보각국사 부도 앞의 석등. 자기 몸보다 몇 배나 더 큰 석등을 등에 지고 있는 작은 사자가 안쓰럽다.
부도 앞에 석등을 세우는 건 려말선초의 유행이었나 보다. 1394년 세워진 청룡사 보각국사 부도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 회암사 지공선사 부도(1372년).
* 신륵사 보제존자(나옹화상) 부도(1379년)
* 회암사 나옹화상 부도(1377년).
* 회암사 무학대사 부도(1407년) 등에 모두 부도 앞에 석등이 세워져 있다.
※ 양주 회암사에 주석했던 나옹은 1376년 왕명으로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에 들었다.
그렇기에 그의 부도는 회암사와 신륵사 두 곳에 건립되었으며 그의 문도들에 의해 분사리 된 또 다른 사리탑 한 쌍이 원주에 세워졌다(1388년). 원주의 사리탑은 지금은 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영전사지 보제존자사리탑' 이라는 이름으로 한 쌍이 서 있다.
억정사 대지국사비(億政寺 大智國師碑)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인근의 경종대왕 태실 가까이 마을 뒤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10여 년 전 찾았을 때만 해도 밭 한가운데 비석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지금은 잘 지은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이래 전통 양식인 거북받침돌(龜趺)과 용머리장식(螭首)등이 생략되고 장방형 받침돌과 비신 윗부분의 양 끝을 사선으로 접듯이 잘라 놓았을 뿐이다.
이러한 양식은 대지국사비(1393년) 외에 인근의 청룡사 보각국사비(1394년) 용문사 정지국사비(1398년) 등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비석들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유행했던 양식이라 볼 수 있겠으며 이 보다 앞서 보광사 대보광선사비(1358년)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서봉사 현오국사비(1185년) 보경사 원진국사비(1224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지국사비와 닮은꼴 비석들
12세기 후반부터 이수를 생략하고 비신 위 양쪽 귀퉁이를 귀접이하듯 잘라낸 양식의 비석들이 등장하는데 이런 형태의 비를 규수형(圭首形) 이라고도 한다.
위 윈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서봉사 현오국사비(1185년)
보경사 원진국사비(1224년)
보광사 대보광선사비(1358년 부여박물관)
용문사 정지국사비(1398년)
<사진 : 문화재청>
경종 태실 오르는 길.
넓은 뜰 끝에 개천을 건너면 불뚝 솟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 태실로 오르는 길은 꽤나 가파르다.
경종대왕 태실
조선20대 임금 경종(재위 1720~1724)의 태를 묻은 태실이다.
숙종에겐 생전에 3명의 중전이(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러기에 숙종14년(1688년) 숙종과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사이에 태어난 경종이 보위를 이었다.
후궁의 소생으로 태어나 왕위에 까지 올랐지만 일생은 편할 날이 별로 없었다.
숙종15년(1689년) 원자로 정호되자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상조론을 주장하다 사사되고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이듬해 세자로 책봉되고 생모 희빈 장씨가 왕비에 올랐으나 4년 뒤 다시 희빈으로 격하되고 1701년에는 사사되는 아픔을 겪었다.
세자시절부터 다병무자(多炳無子)하여 이복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을 지지하는 노론과 그를 지지하는 소론의 당쟁이 극심하였다.
자신의 신변상으로나 정치상으로 갖은 곤욕과 수난을 겪으며 1720년 왕위에 올랐으나 질병과 당쟁의 와중에 재위 4년 만에 소생 없이 일생을 마쳤다.
최초 태실비
태실을 조성했던 당시에 세워진 비에는 앞면에
元子阿只氏胎室<원자아지씨태실>
康熙 二十七年十月二十八日酉時生<강희27년(숙종14년, 1688년)10월28일 유시생>
뒷면에는 康熙二十八年二月二十二日立<강희28년2월22일입> 새겨져 있다.
원자가 태어나서 4개월 뒤에 태실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태실비
앞면, 景宗大王胎室<경종대왕태실>
뒷면, 擁正四年九月初八日建<옹정2년(영조2년 1726년)9월초8일건> 이라 새겨져 있어 경종 사후 2년 뒤에 다시 태실을 고쳤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 왕실에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묻은 태실을 조성하고 훗날 아이가 세자로 책봉되거나 왕위에 오르면 그 격에 맞게 다시 고쳤다.
기록에는 영조2년 (1726년) 태실 주위에 팔각형 돌난간을 두르고 비석을 세웠으며, 순호군 16명을 두고 3년마다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불운한 일생을 살았던 경종의 태실은 좌우에 산줄기가 호위하는 가운데로 흘러내려온 산줄기가 갑자기 푹 꺼져 내려오기 직전의 정점부에 자리하고 있어 태실 앞으로 탁 트인 들판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잎담배 건조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밭농사가 많았던 강원, 충북, 경북의 산골동네들(벼농사가 많았던 충남, 전라도, 경남은 상대적으로 적었으리라 생각됨) 어디에서 볼 수 있었던 담배건조실.
흙벽돌이나 진흙으로 지은 2층 높이의 건조실은 나지막한 시골의 살림집들보다 높아서 멀리서도 눈에 잘 뛰었는데 앞쪽에 출입문과 그 아래 푹 파인 아궁이, 그리고 벽 곳곳에 건조 상태 확인을 위한 작은 유리창과 건조실내 환기를 위한 까치지붕까지 모두 똑같은 디자인과 구조로 되어있다.
뜨거운 여름 밭에서 딴 담뱃잎을 지게로 져 나르고 줄줄이 엮어서 건조실에 걸고 석탄가루를 물에 개어 아궁이에 불을 때서 담뱃잎을 말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난하던 산골동네에서 그나마 현금 목돈을 만질 수 있었던 담배농사는 끝없이 손길이 가야하는 "골 빠지는 농사" 라고 하던 옛 시골 사람들의 까맣게 탄 얼굴과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살이 느껴진다.
산골동네 집집마다 있던 건조실은 이제는 시골에서도 보기 귀해졌고 담배농사를 짓던 그 밭들은 대부분 고추밭으로 바뀌어 뜨거운 여름 햇볕아래 시골에서는 고추를 따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농촌의 여름은 뜨겁고 고되긴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억정사 대지국사비를 보러 가는 길옆의 건조실은 벽에 나무덩굴까지 번져서 한 층 더 고풍스러워 보인다.
단호사 철불좌상.
통일신라가 그 수명을 다 해가면서 혼란스럽던 9세기 중엽이후 등장한 철불은 아무래도 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받아 성장하던 선종과의 연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거칠고 가공하기 싶지 않아 무기나 농기구의 재료로 쓰이던 철로 존귀한 부처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세력들의 개성과 역동성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후삼국의 혼란스러움이 고려에 의해 평정되고 호족들도 승려들도 고려의 귀한 신분이 되면서 더 이상 거친 철불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길지 않았던 시간동안 특정한 지역에서 많지 않은 수량이 만들어진 철불은 우리 불교문화의 독특한 한 부류로 매김 하기에 부족함이 없겠다.
충주는 예로부터 철의 산지로 유명했다(지금도 충주, 음성, 괴산 일대에는 근래까지 채굴하다 폐광된 철광들이 산재해 있다)
그렇기에 충주에서 만나는 철불들의 느낌은 좀 더 특별한 것 같다.
창동마애불
탄금대에서 달천과 합류한 한강이 중앙탑에 이르기 전 탄금대와 중앙탑 중간쯤 되는 강변 벼랑에 있는 마애여래입상이다.
길게 드리워진 목의 삼도와 흘러내리듯 자연스러운 통견의 옷자락 등이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이 강물 따라 무수히 오갔을 뱃사람들의 무사통행을 기원하였으리라.
산화된 철분으로 보이는 붉은 빛깔이 마치 채색 한 듯 잘 어울린다.
하지만 북향의 응달진 강변에 자리한 탓에 겨울철 결빙과 해빙이 반복될 터여서 이미 떨어져나간 하부처럼 붕락이 염려된다.
창동 오층석탑
잘 균형잡힌 아담한 크기의 고려시대 오층석탑이다.
창동약사여래입상
누암리 고분군
남한강에서 멀지않은 곳에 마치 낙동강 일대 가야시대의 고분군을 연상케 하는 신라의 고분들이 펼쳐져 있어 진흥왕 이래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차지하여 경영하였던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무려 230여기가 밀집해 있다고 하는데 수차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현재도 연차적으로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누암리 고분군 참고 자료 <사진 :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하늘에서 본 고분 전경. 우리가 한 바퀴 둘러보았던 우측의 잘 정비된 곳은 전체 고분군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사진 :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45호분 석실내부에서 본 연도부 <사진 :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45호분 석실내부 노출상황 <사진 :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45호분 석실내부 출토 유물 <사진 :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중앙탑
'중원탑평리칠층석탑'이라는 공식 명칭보다는 중앙탑이라 명칭이 더 와 닿는 중원 땅 충주를 대표하는 얼굴마담이다.
강변에 높게 쌓은 토단위에 14.5m나 는 탑을 세워 더 웅장하고 높다.
지금의 고속도로 역할을 하였을 남한강 물길을 따라 수없이 오고가던 배들은 모두 이 탑을 바라보며 지나갔을 것이다.
천여 년의 세월을 말없이 강물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는 진정한 '등대' 이었으리라.
1990년 홍수흔적 기념비
옛 목계나루 인근의 강가에는 1990년 한강의 대홍수를 기념하는 표석이 서 있다(충주 가금면 장천리).
늘 잔잔하게만 흐르는 것 같아 보이는 강이지만 때론 주변 모두를 초토화시키는 엄청난 괴력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 1990년 홍수흔적 기념비는 이 곳 외에도 당시 큰 피해가 있었던 서울 성내동 과 경기도 고양시에서도 볼 수 있다.
참고자료) 1990년 한강 대홍수
1990년 9월 9일부터 12일까지 사흘간 중부지방의 집중호우는 평균 452mm의 강우량을 기록하면서 곳곳에 크고 작은 많은 수해를 발생시켰고, 한강 수위는 집중호우와 한강수계 댐들의 방류량 증가로 인도교 수위는 11.27m을 기록했다.
경기도 이천 581mm, 수원 529mm, 강화 512mm, 홍천 508mm, 양평 491mm. 서울 486mm의 강우량을 기록했다.
경기도 이천, 수원의 시간당 최대강우량은 각각 59mm와 56mm, 1일 최대강우량은 경기도 수원이 296.3mm가 내렸다.
이 홍수로 인하여 한강하류의 수위는 급상승하였고 일산제방의 하단이 무너져 고양군 일대가 물바다가 되었던 한강의 제방붕괴를 발생시킨 대표적인 홍수로 기록되고 있다.
한강의 격류가 고양군 지도읍 신평리 강둑을 무너뜨리며 쏟아져 들어가 민가와 농지를 덮으며 계속 능곡과 일산쪽으로 퍼져나가 수막산까지 물바다를 이루었다.
지붕만 보이는 민가에는 가축들과 미처 대피하지 못한 주민들이 지붕위로 올라가 구조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농경지 5,000여ha가 침수되었으며 불의의 사고로 이재민이 된 5만여명의 주민들은 행주산성 등 인근 고지대로 대피했으나 다수의 주민들은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물바다 한가운데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강 대홍수로 인하여 126명이 사망하고 37명이 실종되었으며, 187,265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5,203억원의 재산피해를 가져왔다.
1990년의 ‘한강 대홍수’가 계기가 되어 동강댐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영월댐 건설이 추진됐지만, 청정지역인 동강을 보전해야 한다는 환경단체의 강력한 반발에 때문에 중단되기도 했다.
<자료: 국가기록원>
남한강 목계나루
강원도 태백의 검룡소에서 발원해 평창, 정선, 영월 등의 물을 모아 다시 단양, 제천을 거친 강은 충주댐에 막혀 큰 호를 이루고 다시 탄금대에서 속리산부터 흘러온 달천을 만나 몸집을 불린다.
강가 높게 솟은 중앙탑을 바라보았던 강줄기는 한 세기 전까지 강을 따라 물산이 모이고 퍼져나가던 내륙 최고의 나루로 흥청거렸던 목계에 다다른다.
이제는 배도 나루도 사라지고 장터의 흥청임은 상상조차 안 되는 한적한 강가 마을인 목계일뿐이고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로는 무심한 차들만이 달릴 뿐이다.
사진의 다리는 옛 목계나루 위에 건설된 38번 국도의 신목계대교와 그 옆에 새로 건설되는 고속도로(충주~제천간)의 다리가 건설중이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네..
옛 목계나루터에 서 있는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시비
글씨체가 낯익어 살펴보니 판화가 이철수의 글씨이다.
목계나루를 내려다 보는 비탈면 위에는 작은 神堂인 부흥당(富興堂)이 있다.
목계가 남한강 물길을 따라 활발하던 물류의 중심일 때에는 배의 안전운행을 위해 치성들이는 선주나 객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리라.
목계교. 1973년에 남한강 위에 건설되어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의 38번 국도와 엄정면 목계리의 19번 국도를 연결한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직 전주야요. 3월초 까지는~~ ^^
답사를 또 한번 다녀온 듯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후기네요. 사진도 없고 글쓰기도 자신없어 후기 쓸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추임새님 덕분에 답사날 보다 공부 더 많이 했네요. 감사합니다^^
감사^*^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전 언제나 이렇게 깊은 내공이 쌓일련지~~~
너무 멋진 답사 후기네요!~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