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밖 아이들이 부르는 삶의 노래
네이버블로그/ 난 학교 밖 아이 | 김애란 시집
– 김애란 『난 학교 밖 아이』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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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청소년시집 『난 학교 밖 아이』(창비교육 2017)는 두 가지 점에서 이전 시집들과는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제도권 학교 울타리 바깥에서 살아가는 이른바 ‘학교 밖 청소년’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 또 하나는 개개의 시편이 독립된 시이면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한 편이 완결된 성장서사를 이룬다는 점이다.
표제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시집은 ‘학교 밖 아이’를 소재로 하고 있다. ‘청소년’ 하면 으레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떠올리는 것이 하나의 통념이 되어 있지만, 사실 이 땅의 모든 청소년이 학교에 다니는 것은 아니다. 한 통계에 따르면 학교에 적을 두지 않은 학교 밖 학생들의 수가 수십만에 이른다고 한다. 이 가운데는 입시 교육이라는 적자생존의 시스템에서 ‘학업 부적응자’로 내몰린 아이들이 있고, 왕따나 학교 폭력 같은 상처로 인해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이 있으며, 집안의 경제 사정이나 가정불화, 질병 등으로 학교를 다니고 싶어도 더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이 있다. 우리 사회는 이들을 흔히 ‘문제아’라는 낙인을 찍어 비정상으로 몰기 일쑤다.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하기보다 정상 궤도에서 이탈한 낙오자쯤으로 구분 짓고, 자꾸만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 한다. 『난 학교 밖 아이』는 바로 그런, 편견과 소외의 그늘에서 자기 삶을 꾸려 가는 학교 밖 청소년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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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는 심한 ‘아토피’로 인해 학교를 그만두게 되는 아이, ‘승연’이가 나온다. 승연이는 이 시집의 전체 서사를 이끌어 가는 시적 화자로 소설로 치자면 주인공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승연이가 자퇴를 결심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는 ‘중증 아토피’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수천수만 개 바늘이 찔러” 대고 “세상의 모든 털이 날아와 간질”(「차라리」)이는 것 같은 신체적 고통은 정신적 고통을 함께 수반하며 그를 결국 ‘학교 밖 아이’ 처지로 내몬다. 1부에 실린 시들에는 병으로 학교 밖 아이가 된 승연이가 느끼는 열패감과 두려움, 외로움 같은 감정이 속속들이 배어 있다.
피할 수 없는 한 가지 절실한 이유 때문에 내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담임 샘은 내게 많은 것을 잃게 될 거라”(「지우와 나」) 예언 아닌 예언을 한다. 담임선생의 그 말은 적중한다. 자퇴를 한 나를 “많은 친구들이 핑계를 대며 만나 주지 않”(「지우와 나」)고, 그럴수록 학교를 향한 ‘그리움’은 자꾸만 살이 쪄 간다(「다이어트」). 학교를 그만두면 “엄청난 그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기다리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한동안」)아, 나는 “우주 미아가 되어 별과 별 사이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하느님은 알지요」)이 된다. 여기에서 오는 외로움은 나를 “아주 깊은 우물에 빠”(「하얀 알약」)지게 한다. “아무것도 보기 싫고/ 아무것도 듣기 싫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죽은 듯이 잠만”(「한동안」) 자는 그 무기력한 나날의 고통 속에서 어느 날 문득 “열일곱 해 나약한 내 생이/ 저렇게 산산조각 나면 어쩌나”(「봄날」)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화자 자신을 쇼윈도에 갇힌 마네킹으로 비유한, 다음 시에는 학교를 떠나와 느끼게 된 그런 단절감과 막막한 외로움이 절절히 드러나 있다.
친구들이 발길 멈출 때마다
내 가슴은 사정없이 뛰는데
친구들에겐 내 심장 소리 들리지 않고
얘들아, 내게 말을 해 봐
아무리 외쳐도 내 입은 움직이지 않지
친구들은 내게 말 걸지 않는 세상
유리에 이마를 찧고 싶은 충동을 삼키지만
목젖도 움직일 수 없는 난 사람도 인형도 아닌
그저 키 큰 슬픔 덩어리일 뿐
― 「난 마네킹」 부분
내 심장은 분명히 뛰고 있고, 나는 친구들에게 분명 외치고 있지만, 그 소리는 친구들에게 도무지 들리지 않는다. 난 “사람도 인형도 아닌” 채로 그렇게 서서 “유리에 이마를 찧고 싶은 충동”을, “슬픔”을 가까스로 누른다. 나는 “조그만 발가락으로 우물 벽을 움켜쥐고/ 끝끝내 기어 나온 청개구리”(「하얀 알약」)를 떠올리며 “날개야,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날개야, 돋아라」) 자기 내면에 똬리를 튼 깊은 우물을 떨치려 애쓴다.
이런 나에게 언덕이 되어 주는 것은 중학교 때 자퇴한 경력이 있던 ‘지우’라는 친구다. 자신이 자퇴를 했을 때 편견 없이 대해 주었던 나의 우정을 지우는 잊지 않고 보답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은 나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며 또 다른 고통을 감내했을 엄마의 따뜻한 말 한마디다. “학교를 그만둔 날/ 엄마가 내게 해 준/ 괜찮다는 말”(「세상에서 가장 힘센 말」)은 자퇴 후 나를 지탱하게 해 주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엄마의 그 말(言)은 내게 “사막” 같고 “외롭고 추운 눈밭” 같은 세상을 건너가게 도와주는 ‘가장 힘센 말(馬)’인 것이다.
그러나 학교 밖의 아이가 된 승연에게 또 다른 불행이 닥친다. 시집 2부에는 아빠의 실직과 가출, 그리고 엄마 아빠의 이혼으로 이어지는 가족의 불행이 그려져 있다. “모퉁이를 돌면 파란 대문이 보이고/ 파란 대문을 열면 거기에 또 무슨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겁이”(「아빠가 가출했다」) 나던 나는, 아빠의 가출과 부모의 이혼으로 마음에 또 하나의 상처를 안게 된다.
처마 밑에 박혀 있는 대못에
거미가 집을 지었습니다
처마 끝에서 대못으로 이어지는
유연한 거미집
대못이 주춧돌인 셈입니다
아빠가 집을 나가면서 박힌
내 마음속 대못을 주춧돌로 삼아
저렇게 유연한 집을 지을 수 있을까요
― 「거미」 부분
“엄마 아빠가 싸우는 것도 나 때문이고/ 아빠가 집을 나간 것도 다 나 때문이라는”(「아빠가 가출했다」) 자책에 나는 괴로워한다. 그만큼 아빠 엄마가 화해하고 다시 온전한 가정이 되길 끊임없이 기원하지만, 그 꿈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저주스러워 옥상에 있는 물탱크를 주먹으로 치는 자해도 해 보지만 “깨진 건 내 주먹”(「화풀이」)일 뿐 현실은 호전되지 않는다. 대신 “아빠가 떠나고 나자/ 엄마가 아빠가 되”었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누런 점퍼/ 검은 운동화 불퉁한 목소리”를 하고 엄마는 가장이 되어 “아침 일찍 일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유일한 증거」)오는 고된 일상을 반복한다. 그런 엄마를 지켜보며 나는 점점 철이 드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철이 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간절하게 해 보고 싶었던 어떤 일을 하나둘 포기한다는 것, 한창 펼치고 싶은 꿈의 날개를 슬그머니 접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나의 미래를 함부로 팽개치지 않는다. 나는 “길에서 주워 온 돌”에다 희망이 담긴 ‘미래’라는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의탁하기로 한다. 나의 미래 또한 “조금만 밀어 줘도/ 데굴데굴 잘 굴러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저 먼 나의 미래를 향해/ 데굴데굴……”(「데굴데굴」) 그 돌을 굴리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2부 맨 끝에 실린 「연꽃의 사랑」은 타자를 향한 ‘사랑의 시’이기보다 내가 나를 추스르는, 간절한 위로의 시로 읽힌다. 이 시에서의 “너”는 바로 “나”가 아닐 텐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연꽃이 흔들린다
그래도 걱정 없다
연꽃의 그 질긴 뿌리는
연꽃 깊이 박혀 있으니까
연꽃이 흔들릴 때조차
연꽃은 연못의 맨 밑바닥
그 질척질척한 고독을 붙들고
놓지 않을 테니까
너를 사랑하는 나처럼
― 「연꽃의 사랑」 전문
< ‘동시를 읽는 마음, 새로운 동시를 위한 탈중심의 상상력, 김재곤 평론집(김제곤, ㈜창비, 2022.)’에서 옮겨 적음. (2023. 7.24. 화룡이) >
첫댓글 연꽃이 흔들릴 때조차
연꽃은 연못의 맨 밑바닥
그 질척질척한 고독을 붙들고
놓지 않을 테니까....
시인의 눈은 안목이 참 높습니다^^^
시인의 눈은 한 곳에만 머물러 있어도
생각의 수레는 우주를 한 바퀴 돌 터입니다.
고맙습니다.
길에서 주워온 돌에다 '미래'라는 이름을 붙인다.
저 먼 나의 미래를 향해
데굴데굴...
데굴데굴 잘 굴러가기를
나도 간절히 응원하겠습니다.
중학교때 일입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아저씨가 인형을 팔고 있었습니다. 예쁜 인형들속에서 내 눈에 띄인건 한 쪽 귀가 작게 만들어진 거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거북이를 집었다가
한쪽 귀가 작은 걸 보고는 휙 집어던져버리고 다른 걸 골랐읍니다.
휙 던져진 거북이가 내 앞에 떨어졌습니다.
'한쪽 귀가 작아도 바닷속을 날아다닐 수 있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 거북이를 사왔습니다. 그리고 '귀돌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미래'처럼 '귀돌이'는 내게 희망이었습니다.
바다를 날아다니는 '귀돌이'가 눈 앞에 선하게 보이는 듯 합니다.
나도 희망의 시 한 편을 쓸 수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망고 시인님!
기억의 저편에 머물러 있던 '귀돌이'를
한 편의 시로 만나게 되시는군요.
바다 위를 훨훨 날며
남다른 꿈을 펼칠 귀돌이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오늘이 바로 그
사유의 성벽을 허무는 날이면 좋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