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둘째 이야기,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2)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173)
[삽화-백소(白笑)]
행진 대열이 공덕동에 접어들었다. 이 코스로 행진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몇 번인지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을 요구하며 행진했던 기억은 확실히 있다. 그때 매우 천천히 걸었던 것 같아서 길이 멀어도 별 것 아니라고 지역 사람들한테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오늘 걷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왜 그런지 진행하는 측에 물으니 유가족들이 국회 방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에 맞춰서 가야 한다고 했다.
오늘 국회가 신속처리안건 지정을 하는 날이므로 유가족들이 그 장면을 반드시 목격해야 한다. 유가족들은 방청을 신청해 놓았다고 한다. 2시에 본회의가 시작되므로 1시까지 국회 앞 농성장에 도착해야 한다. 좀 빡빡한 일정이다. 그래서 속도가 빠르므로 좀 뒤처지는 사람도 있고 해서 대열이 얼마간 흐트러지기도 하였다. 지역 사람들 중에는 힘들 거라면서 안 온 사람들이 있다. 신돌석씨는 그들이 왔으면 말 좀 들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시간이 급해도 시청 앞에서 여의도까지 쉬지 않고 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공덕동 오거리의 공덕역 부근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잠시 쉬었다 간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 행진 때도 여기서 쉬었던 것 같다. 그때는 아마 출발지가 광화문이었을 것이다. 도심에서 출발해서 여의도로 가는 행진이므로 공덕동쯤에서 한번 쉬는 것이 맞으리라. 선두의 방송차가 공원 부근 도로에 차를 대고, 행진하던 사람들은 숲으로 들어가서 자리들을 잡았다.
신돌석씨는 일행과 함께 공덕역으로 들어가서 먼저 화장실에 갔다. 요즘 와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화장실에 자주 가게 되는데 오늘은 염려스러웠던 것과 달리 도중에 소변이 마렵지는 않았다. 화장실에서 나온 뒤 긴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앉으니 물들을 나눠 주었고, 어떤 목사라는 이는 얼음물을 작은 손수레에 싣고 와서 나눠 주었다. 초코파이를 나눠 주는 이들도 있었다. 세상에 착한 사람이 참 많다고 신돌석씨는 흐뭇한 마음을 가졌다.
대열을 따라오면서 계속 동영상을 찍던 사람이 인터뷰를 하자고 하였다. 핸폰으로 촬영을 하였는데 소속 단체가 운영하는 유튜브에 올릴 거란다. 신돌석씨도 들어본 적이 있고 신뢰하는 단체라서 좋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김민호나 최미숙이 나을 것 같아서 하라고 하니 최미숙은 사양하고 김민호가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런데 몇 마디 하자 전화가 와서 중단되었다. 다시 시작하자 또 전화가 와서 중단되었다. 그러는 사이 행진 대열이 다시 출발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김민호는 인터뷰를 하지 못했다. 핸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하면 그런 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김민호는 이러한 참사들이 이윤만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의 병폐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말을 시작하였었다. 그런데 신돌석씨는 늘 그렇듯 김민호의 말은 왠지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공감을 할까.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 같았다.
몇 주 전 토요일 추모집회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발언을 했는데 귀에 쏙쏙 들어왔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참사 초기부터 여러 차례 추모집회에 참석했었다면서 유가족 중 한 분이 한 말을 인용했었다. 이제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우리는 아무리 무엇을 해도 예전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어떻게 아들이, 딸이, 동생이 사라졌는데, 다시 올 수 없는데 이전 일상으로 돌아가겠는가?
발언하는 사람은 그 말에 자신도 그런 사람처럼 눈물이 났다고 했다.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왜 세상을 떠나야만 했는지, 그 뒤 어떻게 정부와 지자체는 대응을 했는지, 최소한의 것이라도 알아야 한다. 유가족들은 물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자는 사람들도 그 최소한의 것을 하는 것이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예의이고,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이다.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대할 때 그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또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태원 참사는 세월호 참사와 달리 유가족도 다양하고, 초기에 고인들의 시신을 분산시켰기 때문에 정부의 의도대로 묻혀 버릴 줄 알았다. 그런데 하는 짓이 영정도 없는 분향소를 만들고 쇼나 하는 것이었다. 결국 유가족들은 뭉쳤다.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만약 이것이 안 되면 또 다른 참사가 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 모두가 나의 일, 우리의 일로 생각하고 나서야 한다. 그것이 그날 발언한 사람이 했던 말의 요지였다.
[삽화-백소(白笑)]
행진하는 반대편 쪽에 만리동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거기서 조금 아래쯤에 마포형무소가 있던 자리가 있었다. 신돌석씨가 기억할 때는 다 허물고 건물 잔해만 남았었다. 잔해를 치우기 전에는 동네 애들이 무리를 지어 놀러오곤 하였다. 넓은 터에 건물 잔해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어서 애들이 놀기에 아주 좋았다. 아침부터 와서 저녁까지 놀다 가는 일도 많았다. 주울 것도 많고, 구경할 것들도 여기저기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떤 친구가 아는 척하느라고 여기 형무소에는 뼁끼통이라는 것이 있었다면서 방 안에 그걸 놓고 싸야 한다고 했었다. 다들 신기하다는 듯 들었다. 살인범 이야기, 강도 이야기, 사기꾼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다니던 형 하나가 여기에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고 하였다. 다들 좀 뜨아해졌다. 우리 동네에도 독립운동 하다 여기 살던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해방이 된 뒤에도 판잣집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이야기는 더 진행된 것 같지는 않은데 많은 애들이 알게 모르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독립운동가가 일제 때 감옥에 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잊고 사는 것이다. 해방이 되었으면 그 사람들은 잘 살아야 되는 것 아닐까? 아주 단순한 의문인데 사실 그렇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괜히 마음이 찜찜했다. 신돌석씨는 이런 어렸을 때 기억의 파편들이 이후 살아가게 되는 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공덕동 어드메쯤 굴다리가 있었다. 도로 위로 기차가 지나가는 곳이다. 경의선이 아니었을까 추정을 하는데 사실 정확한 것은 모르겠다. 다만 그 위에 올라가서 놀았던 기억도 적지 않다. 물론 그때도 거기는 통행금지 구역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다니니까 기차가 오면 옆으로 피할 수 있는 곳도 여기저기 마련되어 있었다. 거기 가서 못을 철로 위에 올려 놓고 기차 오기를 기다렸다. 기차가 지나가면 동그랗던 못이 납작하게 되었다. 그걸 칼처럼 쓰기도 했다.
지금은 건설사를 하는 박준범이와 거기서 함께 놀다가 부근에 있는 어느 공고 운동장에서 하는 김대중 연설회를 함께 보러 갔던 기억도 있다. 오늘처럼 날이 잔뜩 찌푸렸다가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유신 이전 마지막 대통령 선거였다. 선거 전 해부터 열기가 대단했고,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신돌석씨도 그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비만 오면 학교 운동장이 빗물이 고이고 질퍽거렸는데도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었다.
그때는 후보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대규모 연설회를 했다. 아니 1987년에도 그랬고, 그 뒤 몇 차례 더 그랬던 것 같다.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이 지체되면서 계속 늦었다. 이 날도 예정된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후보가 오지를 않았다. 경찰서장인 듯한 자가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했다. 그때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사람이 팔에 깁스를 한 채 빗물 고인 바닥을 뒹굴면서 항의를 했다. 참으로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그때 김대중 후보가 들어섰다. 김대중을 연호하는 소리가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경찰서장과 경찰들은 뒤로 빠졌다. 사실 신돌석씨는 경상도인 아버지와 이북 출신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김대중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받은 충격은 대단히 컸다. 아쉽게도 김대중이 무슨 연설을 했는지는 그날 우산을 팔러 온 형을 만나는 바람에 불발에 그쳤다. 형에게 야단을 맞고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당시에 김대중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단지 지역감정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광적인 사람들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어쨌든 박정희 군사독재에 염증을 느끼고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한이 맺힌 절규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이러한 대중의 열기를 냉소적으로 보는 진보운동가들이 있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그들보다 오히려 대중이 훨씬 더 냉철하고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현실적인 대안을 확실히 찾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행진 대열이 마포나루역 부근을 지나갔다. 왼쪽 편에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처음에는 외국인 대상으로 만들었다가 돈 좀 있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았다고 하였다. 신돌석씨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도 그 아파트에 사는 애들이 있었다. 같은 반 애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양변기를 처음 보았다. 그때 받은 문화적 충격이 대단했었다. 저렇게 뒤를 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신기하기만 했던 기억이 있다.
[삽화-백소(白笑)]
그 아파트는 신돌석씨 동네에서 한참 능선을 타고 내려와서 초등학교를 지나야 있었다. 축구를 하러 오곤 했었다. 학교가 꽉 차고 달리 축구할 곳이 없어서 아파트 운동장에 갔다가 경비원들에게 쫓겨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1층 유리창을 깨고 도망친 일도 있었다. 그때는 정말 빈 땅이 많았는데 야구는 물론 축구할 곳도 별로 없었다. 언젠가 신돌석씨가 나온 초등학교에 가보니 운동장 절반쯤 축구를 할 수 있는 잔디가 깔려 있었다.
마포나루역 부근은 마포동이라고 했는데, 그 바로 옆으로는 도화동이라고 했다.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서 그런다고 했는데 신돌석씨는 복숭아꽃은 구경도 못했다. 그때만 해도 복숭아꽃은 훨씬 더 남쪽으로 가서 소사 같은 곳에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신돌석씨가 나온 초등학교 교가가 ‘웅장하다 복사골’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런데 그때도 의아했던 것은 ‘기나긴 역사 가진 우리의 보배’라는 가사가 있다. 1회 졸업생들도 이 교가를 불렀을까 라고 말하곤 했었다.
마포대교를 바라보면서 오른쪽에 초중고등학교가 있었다. 지금은 서남쪽으로 이사갔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중고등학교만 있었다. 그 학교 다녔던 분들에게는 대단히 실례이지만 당시 동네에서 그 학교 다니는 사람이 몇 있었는데 똥통학교 다닌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러던 학교에 사립초등학교가 생겼다. 아마 신돌석씨가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갑자기 1학년 때 반장 부반장이 그리로 전학하였다.
입시를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를 옮기고 하는 것이 강남이 생기면서 그런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훨씬 오래 전부터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 돈 좀 있는 집 애들은 사립학교에 갔다. 아니면 사대문 안에 있거나 그에 가까운 초등학교로 위장전입을 해서 전학했다. 중학교 입시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그런 학교들은 학생들이 차고 넘쳤고, 신돌석씨가 4학년 때 평준화가 되자 다시 본래 학교로 전학 와서 그 학교들의 학생 수가 확 줄어들었다.
신돌석씨와 1학년 때 아주 친하게 지내던 여자애가 있었다. 신돌석씨 집에도 종종 놀러왔고, 신돌석씨도 그 애 집에 놀러갔었다. 그렇게 부자는 아니었지만 신돌석씨 기준으로는 잘 사는 집이었다. 어느 날 이사를 가야 해서 전학을 가게 되었단다. 서운했지만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만났다. 아직 이사는 안 가고 학교만 옮겼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동네 그냥 살면서 서대문에 있는 초등학교로 옮긴 것이었다.
지금도 입시 이야기만 나오면 언론이 떠들썩한다. 대통령이 수능을 어떻게 내라고 하자 난리가 났다. 신돌석씨가 보기에는 그렇게 말한 대통령도 우습고, 난리법석을 떠는 사람들도 웃긴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이른바 명문대학을 나와야 이후 삶에서 힘 있는 사람이 된다. 그것이 초등학교 선택부터 있던 시절이었다. 아니 신돌석씨는 관심이 별로 없어서 잘 모르는데 지금도 그런다고 한다. 어쩌면 지금은 훨씬 더 다수의 사람들이 그러는 것 같다.
아주 가끔씩 신돌석씨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신경을 써주었으면 자기 삶도 달라졌을까? 그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가정부터가 웃기지만 그렇다고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노동운동을 하기 전에 가끔씩 부모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때가 있었다. 노동운동을 한 뒤로는 그런 생각을 싹 잊어버렸다. 내가 그래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게 됐고, 거기서 형편없는 삶을 살지 않았으면 됐다는 생각으로 살아갔다.
물론 노동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학벌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신돌석씨가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학생운동 출신들이 노동운동으로 이전을 하면서 주도를 했기 때문에 학연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신돌석씨가 속했던 조직도 초기에는 그랬던 것 같다. 더욱이 비합법 비밀조직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아주 잘 아는 사람들끼리만 정보를 공유하는 소그룹 같은 조직이 아주 많았던 것 같다. 어찌 보면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알려지게 되면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 신돌석씨도 그런 것을 느낀 적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운동을 떠나거나 다른 조직으로 옮긴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학생 출신들이 학교 때 일이나 고등학교 때 일 같은 걸 이야기할 때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한 번은 두 친구가 예비고사 점수를 두고 설왕설래를 하는데 기가 막혔다. 그런 엘리트주의가 운동의 한 폐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신돌석씨는 막연하게나마 생각했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