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婚禮) 혼수품과 부조로 본 예(禮)의 변천
『소학(小學)』에서는 혼례를 위해 남녀가 예물을 주고받는 이유를 인간의 분별력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 설명했다. 그리고 분별이 있은 뒤에 의리도 나고, 예도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대에서 혼수나 부조는 그 의미가 조금 달라진 듯하다. 본래의 의미대로라면 혼수와 부조는 논란이 야기될 이유도, 필요도 없다. 01.목안. 전안례(奠雁禮)에 사용되는 나무 기러기이다. 전안례(奠雁禮)는 전통 혼례에서 신랑이 신부 부모에게 기러기를 드리는 의식으로 다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혼인은 일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선택하는 일로서, 예로부터 개인뿐만 아니라 집안 간에 소중한 인연을 맺는 ‘의례’로 여겨졌다. 그리고 혼례가 진행되는 각각의 과정에서 신랑과 신부는 다양한 준비를 하고, 상호 간에 혼수품을 주고받았다. 먼저 의혼(議婚)·납채(納采)의 단계에서는 신랑의 옷 치수를 적은 의양(衣樣)이나 사주(四柱)를 전했다. 그리고 신랑 측에서 신부 측으로 예물을 보내는 납폐(納幣)는 빈(賓, 손님)과 눈에 보이지 않는 빈(신)에게 일종의 선물을 올리는 행위였는데, ‘함 보내기’가 이에 해당한다. 신행 기간 중 신랑이 신부 집에 가는 것은 ‘재행(再行)’이라 했는데, 신랑이 재행을 갈 때는 부모의 허락을 받은 후 떡과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갔다. 신부의 신행 기간이 길면 신랑은 몇 차례 신부 집에 재행을 가기도 했다. 현구고례(見舅姑禮)는 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가서 신랑의 부모, 즉 시부모를 만나서 배례(拜禮)하고 폐백을 올리는 의례로, 이때에 시가의 친족과 상면(相面)하는 예도 같이 한다. ‘폐백드린다’는 말은 여기서 기원한다. 자녀들이 평생 화목하고 행복한 삶을 유지하도록 부모는 애틋한 마음으로 지극한 정성과 예를 담아 음식을 차리는 것이 폐백이다. 폐백 음식과 함께 혼인 때 신랑 신부를 맞이하는 양가에서는 큰상을 차려 이들을 축하하고 상에 올린 음식을 사돈댁에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이를 상수(床需)라 하였10다. 여기에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게 하다’, ‘정성을 들여 음식을 보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근래에는 큰상의 차림새가 차츰 사라지면서 음식을 예물로 주고받는 이바지음식 풍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02. 국가민속문화재 제265호 영친왕 일가. 복식 및 장신구류 ‘영친왕비 족두리’ 족두리는 예복을 입을 때 쓰는 관모의 하나로 영조때 가체 금지령이 내린 이후 성행하였다. 이 족두리는 전면에 수(壽), 후면에 복(福), 양측면에 희(囍)자를 투조한 옥을 장식했다. ⓒ국립고궁박물관 03.국가민속문화재 제265호 영친왕 일가 복식 및 장신구류 ‘영친왕비 대홍원삼'. 원삼은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여성들이 국가의 크고 작은 의식이 있을 때 입었던 예복이다. 서민들은 주로 혼례 때에 입었다. ⓒ국립고궁박물관 04.소반. 신랑과 신부는 교배례를 마치고 서로 술잔을 나누는 동뢰연을 가졌다. 이 소반은 바닥면에 ‘뎡유듕츄뎌동궁길녜시 이뉴일사고간’이라고 쓰여 있어, 덕온공주의 동뢰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고궁박물관 기록으로 보는 혼수품과 결혼 준비의 예(例) 가. 고대 ~ 고려시대 기록을 살펴보면 앞서 이야기한 납폐(納幣)와 같은 예가 고대 국가에서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조를 보면, 혼인을 할 때 구두로 이미 정하면 사위가 여가에 이르러 문 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꿇어앉아 여자와 동숙하게 해 줄 것을 애걸했다. 이렇게 두세 차례 하면 여자의 부모가 듣고는 소옥에 나아가 자게 한다. 그리고 옆에는 전백(錢帛)을 놓아두었다. 신라 신문왕은 김흠운의 딸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대아찬 지상을 시켜 납폐를 하게 하였는데 폐백 15수레, 쌀, 술, 기름, 간장, 된장, 포, 식혜 135수레, 벼 150수레를 보냈다고 하니 혼례가 성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배층과 달리 일반인은 비교적 간소하였다. 『북사』 「고구려전」에는 “결혼함에 있어서 남자 집에서는 돼지고기와 술만 보낼 뿐이지 재물을 보내는 예는 없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혼인 의례가 매우 간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에도 신부 집에 혼인의 징표로 예물을 보내는 납폐(納幣)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 의하면, 충선왕이 세자 시절 진왕의 딸 보탑실련 공주와 혼인할 때 황제와 태후, 진왕에게 각각 백마 81필씩을 폐백으로 바쳤다고 나온다. 우왕이 최영의 딸과 혼인할 때에도 최영에게 말을 주고, 최영은 왕에게 안마(鞍馬)와 의대(衣帶)를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도경』에 귀족이나 벼슬아치 집안에서는 혼인할 때 예물은 주로 비단을 쓰나, 서민들은 술과 쌀을 서로 보낼 뿐이라는 기록을 통해 ‘납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혼례 과정에서 절차별로 다양한 품목을 준비하였다. 그중 집에서 쓰는 열쇠들을 꿰어 보관하기 위해 만든 열쇠패가 있다. 조선 말기에는 친정어머니가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히 별전(別錢)으로 혼수용 열쇠패를 만들어 선물하였다. 신부는 열쇠패를 신방에 걸어 집안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했다. 18세기 후반에 이덕무(1741~1793)가 지은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과 『동상기(同廂記)』에는 혼례에 들어가는 온갖 물품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정조의 명으로 가난한 양반 서손(庶孫)을 위해 관아에서 마련한 물품은 납폐에 쓸 비단, 관(冠)·신발, 비녀·가락지, 치마·저고리, 이불·요, 쟁반·바리 등 그릇붙이와 소반·대야, 청주·탁주, 떡, 장막·병풍, 화문석, 그림, 초·향, 경대, 연지·분 등 온갖 화장품 그리고 안장 갖춘 말 등이며, 호위할 하인도 갖추었다. 또 신방에는 병풍·화문석·등매(登每), 이불과 요, 남녀 베개와 요강·비누통·나무 양치통·경대·놋놋대야·놋반상·혼서함(婚書函)과 보자기 등을 마련하였다. 신랑신부의 의복 또한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게 갖추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측면 못지않게 신랑 쪽에서 준비하는 혼수, 특히 납폐 때 보내는 혼인 선물은 신랑이 속한 집안의 부와 위세를 과시하는 동시에 신부 집안에 이 혼례가 대단히 성공적인 연대임을 확인하게 해 주는 기회였다. 유희춘이 손자 사돈집에 보낸 혼수함에는 현(玄)·훈() 각 한 필, 홍사(紅絲) 한 필, 자단자(紫段子) 한 끝, 압두록(鴨頭綠) 한 단, 청릉(靑綾)·명주 각 한 필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신부 집에서는 유희춘 집안이 죽도 못 먹는 가난한 집이라고 여겼다가 이를 받아보고 의혹을 풀었다 할 만큼 꽤 화려한 규모였다.
05.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15호 화촉. 화촉은 주로 궁중이나 상류층에서 사용했고, 민간에서는 혼례식에서나 사용하던 귀한 초였다. ⓒ문화재청 06.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42-2호 혼례음식. 혼례음식은 크게 봉치떡, 동뢰상음식(대례상), 큰상음식, 폐백음식, 이바지음식 등이 있다. 폐백음식은 재료와 부재료의 선정, 도구와 제조기법 모두 전통을 따르며, 장식성과 예술성도 뛰어나다. 사진은 전남의례음식장의 혼례음식이다. ⓒ문화재청 07.보물 제527호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 김홍도의 작품으로, 혼례를 치르기 위해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는 행렬을 그린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부조는 어찌합니까, 어떻게 하죠? 예나 지금이나 혼인을 앞둔 혼주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혼수 마련이다. 『광례람』을 보면 햇빛 가리개, 고족상, 병풍, 상보, 지의 등 각종 자리, 꽃방석, 등롱, 큰 촉대, 큰 붉은 초, 향꽂이, 붉은 나조, 횃불, 장목, 말[馬], 각종 옷가지 등등 1회용으로 쓸 물건이나 개인이 마련하기 힘든 물품은 관아나 군문(軍門)에서 빌리고, 함지박이나 가마는 시중에서 돈을 주고 세내도록 했다고 나온다. 상민이 혼례 물품을 관아에서 빌릴 수 있었던 것은 혼인을 통해 백성들을 잘 정착시켜, 양인(良人)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정책 덕분이었다. 이는 조선에서 혼인이 단순히 개인의 일로 치부되지 않고 상부상조해 잘 마쳐야 하는 공동과제였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와 관련하여 혼사계(婚事契)를 구성하여 혼례를 치르기 위해 필요한 혼례복을 비롯해 가마 등 많은 물품을 공동으로 준비한 사례도 있다. 조선시대의 결혼식 부조 관련 규정을 보면, 부조 담당 주체로는 개별부조(個別扶助)와 계중부조(契中扶助)를 설정하고 있지만 중심은 개별부조였다. 그리고 결혼식 부조는 동일 신분 내에서만 교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하층민이 양반 결혼에 물품 부조를 안 하여도 노동력 부조는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양반 또한 하층민의 결혼식에 직접 방문하여 부조하지 않더라도 사람을 대신 보내 부조하는 등 최소한의 성의 표시는 하였다고 본다. 삼척 강길댁 사례를 보면 당시 부조는 주로 주류(酒類)로 했으며, 그 다음으로 치계류(달걀 포함). 과일류, 식품류, 해산물, 곡물 순이었다. 현금 부조가 처음 등장한 건 1888년 무렵이었다고 그 당시 작성된 부조기에 기록이 남아 있다. 5년 후의 부조기에는 현금 부조가 15건으로 증가해 19세기 말 이후 현금 부조가 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조선 후기 결혼식 부조는 대체로 자기 거주지를 중심으로 10리 안에 있는 결혼에만 규정대로 하였고, 그 범위 밖의 결혼에는 친인척 혹은 친우 관계의 정분이 없으면 부조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처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부조의 방식과 범위도 달라졌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1940~1970년대의 혼수는 주로 좌식생활 침구류, 바느질 용구, 의류, 가구류, 가전제품, 주방용품류와 그 밖에 보자기, 요강 등이었다. 특히 신부의 치맛감과 저고릿감은 지역과 시대에 상관없이 필수적인 품목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러 좌식생활에서 입식생활로 변화하면서 이 시기의 혼수는 침대 사용을 위한 침구류와 가구류, 가전제품류, 주방용품 등이 주를 이루었다. 과거에는 친정어머니가 의류를 손수 준비한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생필품으로 자리 잡은 가전제품이 혼수품의 주류로 대체되었으며, 신거주제가 보편화되면서 더 많은 품목이 요구되었다. 이에 현금 형식의 혼수가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생겨났다. 폐백과 관련하여 오늘날에는 혼인 당일 혼례를 마치고 곧 폐백(현구고례) 의례를 하는데 과거 신부만이 현구고례에 임했던 것과는 달리 신랑과 신부 모두 폐백에 참석한다. 시부모는 반(盤)에 담은 대추와 밤 일부를 신랑과 신부에게 돌려주고, 신랑과 신부는 반에 담은 과일, 약과, 포 등을 술안주로 시부모에게 올린다. 대추, 밤을 신랑과 신부에게 주는 것은 과거 큰상을 받았을 때 소년이 신랑에게 밤을 주던 관행의 흔적일 것이다. 그리고 의례에 필요한 물품으로 부조가 이루어졌던 20세기 중반까지는 부조록에 쌀, 감주, 떡 같은 현물(現物)의 종류와 수량이 기록되었으나, 이후 현물 부조가 점차 사라지고 ‘축의금(祝儀金)’ 형태의 현금 부조가 일반화되었다. 도시화·핵가족화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도 혼례 준비는 여전히 신랑신부와 부모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물론 그 형태는 많이 변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수·폐백음식·재행·부조 등의 전통은 본래 지녔던 의미를 간직한 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는, 중요한 예(禮)가 남아 있음을 기억하자.
글. 김도현(문화재청 민속문화재분과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