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312. 묵상글 들 ( 사순 3주 금요일-사랑을 방해하는 것들. 등 )
----------------------------------------------------
210312.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순 3주 금요일-사랑을 방해하는 것들
사순 3주 금요일-2019
“첫째는 이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오늘 주님 말씀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에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율법 교사의 질문,
어떤 계명이 계명 중에 첫째가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사랑하느냐의 문제 이전에 사랑이
다른 모든 계명과 실천보다 앞서는 것임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하느냐’보다 앞서
‘사랑을 무엇보다 앞서 실천하고 있느냐’의 관점에서 성찰합니다.
참 헷갈립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고 미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랑을 제일 중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걸 더 중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저는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사랑을 제일 중시하는 건 분명하지만 순간순간 다른 것에 방해받거나
시선을 빼앗겨 사랑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기거나 집착을 하곤 합니다.
그러면 저의 사랑을 방해하고 시선을 빼앗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어렸을 때부터 끈질기게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이상주의와 완벽주의입니다.
누구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끈질기게 이상적인 나와 너이기를,
그것도 완벽하게 그러기를 바람으로써 그렇지 못한 저와 다른 사람을
사랑치 못하고 미워했습니다.
다음은 정의의식이랄까 율법주의입니다.
저뿐 아니라 수도자들 대부분이 사랑보다 정의의식이 강하고
그래서 뭐든지 똑바르고 올발라야 하고 그래서 율법주의적입니다.
당연히 정의가 사랑보다 앞서고 법이 사랑보다 앞서며
정의와 법의 잣대에 어긋나는 자신과 남을 사랑치 못하고 미워합니다.
다음은 욕심인데 저나 수도자의 경우 돈이나 명예욕보다는
보통 사람 욕심, 곧 내 맘에 드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그 욕심 때문에
그렇지 못한 자신과 남을 사랑치 못하고 미워합니다.
어떤 때는 일이 사랑을 방해합니다.
남자들이 흔히 일에 빠져 사랑을 등한시하는데 저도 그런 면이 있지만,
일에 있어서 다른 남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저의 일은 예를 들어
북한 사업이나 지금 제가 하려고 하는 협동조합과 같이 사랑 사업인데
자주 일의 목표인 사람보다 일의 성취가 더 앞서곤 하는 점입니다.
귀차니즘이라는 말이 있지요.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것인데 이 귀차니즘도 자주 사랑을 방해합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안정과 평안 상태에 있을 때에 그것을 깨기 싫어
누가 제 삶에 들어오는 것도 싫고 남의 일에 관여하기도 싫어합니다.
오지랖이 너무 넓고 관여가 병이었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사랑 에너지가 떨어진 결과이고 현상인 것 같아 어떤 때는 슬픕니다.
그래도 어쨌거나 사랑은 해야 합니다.
안 하면 삶은 의미 없어지고 행복치 않은 것을 넘어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 에너지가 현저히 떨어졌는데도 뜨겁게 사랑하고자 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사랑을 완전충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 하느님을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이
이 경우 내가 사랑을 드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력을 다해 매달리는 겁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슬이 내려 나리꽃을 피우고 싹들을 돋아나게 하는 것처럼
당신 사랑만이 나를 살리시니 당신 사랑을 내려주십사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을 받지 못한 채 그래도 사랑을 하고자 한다면
큰 사랑 욕심부리지 말고 작은 사랑이라도 하면 되겠습니다.
----------------------------------------------------
210312. 사순 3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르다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일은 예수님시대 전후에 종종 있었던 일입니다. 유다교에는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많은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으로 요약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키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 참조 : 신명6,4-5)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1. 참조: 레위19,18).는 사랑의 이중계명은 십계명의 핵심 정신이고,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근본정신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15,13-14). 하셨듯이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됩니다(손희송). 하느님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하여 동의를 표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하였지 아직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계명에 대하여 슬기롭게 말하고 동의한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천상의 나라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완성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 나라요, 알고만 있다면 멀리 있지 않은 밖이라는 사실입니다. 운동경기에서 골인을 한 것과 골인할 뻔한 것은 분명 다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캐오 이야기(루카19,1-10)를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나무에 오른 자캐오에게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선언하셨고, 율법학자에게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는 학자답게 이론으로 알고 있었고, ‘훌륭하십니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며 감히 예수님을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하며 즉시 변화된 행동을 보였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그러므로 사랑에 목말라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10312. 사순 3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화답송>에서는 “내가 주님, 너희 하느님이다.”(시 81,11)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마르 12,29)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곧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라는 그분의 존재차원을 밝히십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의 존재의 차원도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의 소유’라는 것을 밝혀줍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마르 12,34)고 할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아마도 율법학자에게 있어서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아직 더 확장되어야 할 사랑의 계명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에서는 ‘이웃 사랑’을 동포 사랑으로 한정하면서(레위 19,18)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레위 19,34)시키고 있다면, <신약>에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원수까지도(마태 5,44)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마태 5,48).
또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3,34;15,12)하여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사랑의 시금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4-5)의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19,18)의 ‘이웃 사랑’을 한데 묶으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형제가 곧 하느님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곧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210312. 사순 3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28-34: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하라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하신다. 이 사랑의 계명은 어떻게든 선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랑이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다. 모든 계명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신명 6,4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29절) 라고 대답해 주신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다. 이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며 인간을 지배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 하신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모른 체하지 않고, 돈을 자기 몸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만물의 주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비롭게 행한 것을 바로 당신께 해드린 것으로 여기심을 알고 있다. 그리고는 열심히 그 선행을 실천한다.
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확증은 바로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꾸준히 일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아 주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당신 계명을 지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다고 하신다.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친밀한 사랑을 알고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처럼 진실해야 한다고 고백하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말한 율법학자의 대답은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도 자비를 가로막는 판단은 하지도 말고 듣지도 않아야 한다. 자비는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기 때문이다. 사순절의 모든 삶은 바로 이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 이 말씀은 율법학자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아직도 떨어져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율법학자는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말씀을, 그 자비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아직 멀리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하면서 상대를 닮아간다고 한다. 부부의 모습이 닮은 것도 서로의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갈 것이다. 이것이 사순시기의 삶이다.
----------------------------------------------------
210312. 사순 3주간 금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사랑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처럼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 질문처럼 모든 대답이 정답인 질문도 없을 것입니다. 각자 가진 사랑에 대한 정의와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법은 목숨을 다하는 사랑법입니다. 희생하는 사랑법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모든 것을 내어놓고 싶은 사랑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히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어려움과 걱정 때문에, 지켜야 하고 함께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내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어놓고 희생하는 사랑법이란 맡기고 수용하는 사랑법일 것입니다. 없음의 두려움을, 빼앗김의 아픔을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께 내어놓은 것을 다시 희망과 믿음으로 채워 나가는 사랑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랑법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면서도 왜곡된 방식으로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법만 옳다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법만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데 그 사랑을 몰라준다며 서운해하기도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 방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랑법이 옳은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방법만이 옳다는 교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려면 상대의 사랑법을 알고 그 사랑법으로 표현하며 다가가야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최종훈 토마스 신부 -
----------------------------------------------------
210312. 사순 3주간 금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모두 무언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어렸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많이 듣는 어린이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되고 싶다고 해서 곧바로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괴테의 말처럼 되고 싶은 것을 위한 노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학교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을 배워 나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책임 있는 행동들을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공부도 곧바로 대학교에 들어가 어려운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과정을 밟아야 전문 학문을 배워 익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 없이 저절로 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이 할 노력을 찾고 또 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길을 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실천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듯합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첫째로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시고, 둘째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모른 척하지 않습니다. 또 돈을 자기 지체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둘을 구분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조그만큼의 갈라짐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가 슬기롭게 대답했지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아직도 떨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된 노력으로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 입으로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이웃 사랑을 계속 실천하면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어떤 것도 대가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 일한 만큼 노력한 만큼 받게 되어 있다(나폴레온 힐).
------------------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초등학생 3학년 때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복사를 서고 있었는데 미사 시작과 동시에 소변이 마려운 것입니다. 복사를 선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사 중간에 화장실에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꾹 참고 있었지만, 그날따라 강론도 참 길었습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미사 중간에 바지에 실례를 하고 말았습니다.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같이 복사했던 친구와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을 떠올리던 중에, 제가 복사를 서다가 실례를 했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의 사고(?)는 친구들 사이에서 큰 놀림감이었거든요. 그래서 모든 친구가 그때의 일을 다 기억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내 실패나 아픔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기억할 것이 많습니까? 자기 일에 집중하느라 남의 아픔을 챙겨가면서 기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
210312. 사순 3주간 금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첫째는 이것이다.(마르 12, 29)
사랑이
있다.
첫째는
사랑이다.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만나는 사랑의
새아침이다.
온 마음을
다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우리의
본분이란
첫째도
마지막도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것이
참된
회개이며
사랑이다.
회개와 사랑은
끊어질 수 없다.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사랑의 참된
길이다.
사랑의 최종
목적지는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이 사랑의
관계가
사랑의 삶으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일깨워주신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이다.
하느님 체험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체험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를
치유한다.
하느님
사랑 안에
이웃사랑이
있다.
사랑은
나눔이다.
나누지
않고서는
풍요로울 수
없다.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랑의
자녀들이다.
모든 것 중의
첫째는
하느님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이다.
사순시기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사랑을
회개하는 것이다.
사랑이
하느님을
향할 때
사랑은
기쁨이 되고
기도가 된다.
사랑의
원천으로
이끄는
십자가에서
다시 사랑을
배우는 은총의
시간이다.
더 사랑한
주님이시다.
사랑이
스승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10312. 사순 3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이 말씀은,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라는
가르침입니다(마태 22,40).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계명들과 율법들을 아무리 잘 지킨다고 해도 사랑 없이 지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사랑 없이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1코린 13,1-3).
신앙생활은 사랑 안에서 사랑으로 하는 것, 즉 ‘사랑의 삶’입니다.
1) 예수님께서 사랑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라는 말씀부터 하신 것은,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다른 것들을 하느님과 함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재물, 권력, 명예, 그 어떤 것도 하느님과 같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만 사랑하는 사람’,
즉 하느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2) 그런데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성경에는 사랑하라는 계명과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은 있지만,
‘사랑이란 무엇이다.’ 라고 정의를 내린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계명’을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계명’을 ‘사랑에 대한 정의’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자신의 온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모두 다,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기를 원하는 소망”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이 소망은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기를 원하는 소망이 없다면,
즉 그냥 좋아하는 것뿐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미신을 믿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미신의 대상이나 우상에게 자기의 소원을
간절하게 비는 일을 잘하기는 하지만 그 대상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미신일 뿐입니다.
3)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천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하느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이웃 사랑 실천 없는 하느님 사랑은 위선입니다.
4) 그러면, 이웃 사랑 실천만 잘하면
여러 가지 신심 행위나 기도나 전례는 필요 없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으로서 기본적으로 실행해야 할
예배, 기도, 전례, 신심 행위 등을 실행하지 않고 이웃 사랑 실천만 한다면,
그것은 무신론자들의 이웃 사랑 실천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무신론자들의 이웃 사랑 실천도 분명히 선한 일이긴 한데,
우리는 믿음 없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함부로 판단할 일은 아니고,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첫째가는 계명에 관해서 예수님께 질문했던 율법학자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나서,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라고 말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칭찬하셨는데(마르 12,33-34),
‘제물보다 낫다.’는 말이 ‘제물 바치는 일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랑이 제물 바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먼저 실행해야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와 사랑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5)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7-18).”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실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없다면,
그 말은 거짓말이거나 ‘빈말’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그래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랑에 대해서 강의를 많이 한다고 해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없다면, 그 이론은 죽은 이론일 뿐입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5-17).”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천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처럼 사랑에 실천이 없으면 그 사랑도 죽은 것입니다.
‘죽은 믿음’은 ‘생명력 없는 믿음’이고, ‘생명을 주지 못하는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사랑’은 ‘생명력 없는 사랑’이고,
‘생명을 주지 못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일은 사랑입니다.
신앙인은 그 사랑의 힘 안에서,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힘을 다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나누지 않고 자기 혼자 가지고 있기만 한다면,
그 힘은 서서히 약해지다가 결국 사라지게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210312. 사순 3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리차드 도킨스의 ‘신 만들어진 위험’과 크리스토퍼 라이언의 ‘문명의 역습’을 읽고 있습니다. 두 책은 상반된 주장을 이야기합니다. ‘신 만들어진 위험’은 현대의 과학이론으로 종교와 신의 허구성을 드러내려고 시도합니다. 과거의 신화, 종교, 신은 허구라고 주장합니다. 초자연적인 존재와 표징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현대의 과학, 기술, 문명이 가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주와 자연은 일정한 법칙과 진화에 의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문명의 역습’은 현대의 문명이 과거의 문명보다 발전하였고, 진보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과학, 기술, 문명은 풍요롭지만 다른 생명의 희생을 강요한다고 주장합니다. 자연과 환경을 파괴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과거의 수렵 문화가 훨씬 인간다운 삶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계급도 없었고, 노예도 없었고, 갈등도 적었고, 싸움도 없었고, 나눔과 연대의 삶이었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별도 적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수렵 채집 생활을 하는 공동체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2020년 세계의 종교 인구를 보면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 신자가 50억 명 정도 됩니다. 기타 종교 인구가 10억 명 정도 됩니다. 무신론과 불가지론으로 종교가 없는 사람은 10억 명 정도 됩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86% 정도 되고, 종교가 없는 사람은 14% 정도 됩니다. 과학이 발전하였고, 진화론이 생명의 신비를 푸는 열쇠라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은 종교, 신화, 신에 의지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축구와 야구는 게임의 규칙이 다릅니다. 축구게임에 야구의 규칙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야구 게임에 축구의 규칙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축구와 야구는 게임의 규칙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축구는 축구인의 시각에서 봐야 합니다. 야구 역시 야구인의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과학과 종교는 축구와 야구만큼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과학의 방법론과 종교의 방법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축구와 야구가 조화롭게 공존하듯이, 과학과 종교 역시 조화롭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리가 없는 과학은 사람과 자연을 파괴하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근대의 역사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지금도 인류가 만든 무기는 모든 인류를 죽일 수 있을 만큼 파괴력이 있습니다. 이성이 없는 종교는 광신과 광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종교는 합리적인 이성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잘못이 있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잘못에 대해서 인류와 역사 앞에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과학은 앞으로도 분석과 관찰을 통해서 새로운 규칙과 법칙을 찾거나 만들어 낼 것입니다. 이 또한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유용한 학문입니다. 종교는 과학으로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번뇌와 고통을 위로하고, 인간의 품격을 한 차원 높이는 길을 갈 것입니다. 이 또한 인류가 쌓아온 삶의 지혜입니다. 과학으로 멋진 도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종교는 멋진 도시에 사랑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을 구성하는 원자들을 연구하였습니다. 이 원자들은 모여서 분자가 되고, 분자들은 또 모여서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됩니다. 어떤 것들은 생명체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변화하고, 우리 눈에는 사라지는 것 같지만 우리의 몸을 구성했던 모든 분자, 원자들은 없어지지 않고, 또 다른 형태를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100여개의 원자들이 모여서 형태를 이루고, 생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분을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불교는 살아 있는 생명체는 그 행위에 따라서 또 다른 생명체로 태어난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삶을 이야기 합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 열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유한한 몸은 변화하고, 생명의 불꽃은 꺼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준다고 믿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십니까?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고 있습니까?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이미 하느님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립니다.”
----------------------------------------------------
210312. 사순 3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여정, 예닮의 여정
- 회개와 사랑 -
오늘 따라 본기도 내용이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주님, 주님의 은총을 저희에게 인자로이 내려 주시어, 언제나 저희가 지나친 욕망을 끊고, 주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은총없이 노력만으로 수행생활의 성취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운이 칠이요 기가 삼이라 운이 따라야 성취라는 말도 있습니다. 농사 짓은 우리 수사님에게 물으니 80%가 하느님 은총이요 20%가 내 노력이라 합니다. 의사가 알 수 있는 병은 고작 20%요 80%는 하느님 신비 은총의 영역이라 합니다. 제가 쓰는 강론 역시 고백하자면 80%가 은총이요 제 노력은 20%쯤일 것입니다. 이런 자각이 실로 겸허하게 하고 하느님께 부단히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합니다.
봄은 사랑의 계절이자 파스카의 시기입니다. 파스카의 봄, 파스카의 신비, 파스가의 기쁨, 파스카의 사랑, 파스카의 아름다움입니다. 하여 봄에는 유난히도 아름다운 동요나 가곡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움이나 사랑이 아름다운 노래로 표현되는 것이지요. 작년 여름철에는 산책중 동요를 많이 불렀습니다만 요즘 봄에는 산책중 여러 봄노래를 배워 부르고 가끔은 성가도 부릅니다. 개신교의 ‘참 아름다워라’는 성가도 좋아합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라는 말도 있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됩니다. 사실 사랑보다 더 좋은 화장품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의 화신이 예수님이십니다. ‘사람’과 ‘사랑’의 발음이 비슷합니다. 사랑해서 사람임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 말의 묘미가 참 깊습니다. 참으로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 참나의 실현이고 이것이 우리 삶의 평생목표이자 평생과제입니다.
영적성장은 결국 사랑의 성장이요 삶의 깊이는 결국 사랑의 깊이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이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사랑의 결핍이야말로 만병의 근원입니다. 하여 사랑이야 말로 인간 무지의 병에 대한 최고의 치유제요,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답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의미는 사랑입니다. 하여 제 졸저 제목도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입니다.
과연 날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 깊어가는 사랑의 여정인지요. 사랑하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여 사랑에서 나오는 분별의 지혜요, 참으로 사랑할 때 율법의 완성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의 기분좋은 덕담도 생생합니다.
“제가 하루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입니다.”
어제 수녀원 미사 강론전 드린 말씀에 수녀님들의 얼굴이 순간 환해졌습니다. 거의 진담眞談에 가까운 말인데 이 또한 사랑의 표현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덕담이나 청담이요 유머입니다. 얼마전 수도원 중앙 십자로에 위치한 예수성심상 아래 바위가 흡사 ‘기도하다가 바위가 된 사람’같아 지금도 산책때마다 감동하는데 이 또한 ‘사랑의 눈’에 발견된 신비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신비, 사랑의 관상, 사랑의 수행, 사랑의 성사, 사랑의 기적, 사랑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사랑이 빠진 삶은 헛것의 삶이요 영혼 없는 유령같은 삶입니다. 영혼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랑의 시인, 사랑의 신비가, 사랑의 예언자인 호세아는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회개할 때 마음의 순수요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 사랑의 축복에 본래의 사랑을 회복합니다. 우리 사랑의 여정은 ‘회개-사랑-회개-사랑’의 과정의 연속입니다. 사랑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이 됩니다. 회개와 사랑은 함께 가며 더불어 깊어지는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 호세아서는 얼마나 감미롭고 아름답습니까? 호세아 예언자의 하느님 사랑이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됩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참으로 사순시기, 회개로 주 우리 하느님께 돌아와 사랑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절호의 시기입니다. 회개한 이들에게 내려 주시는 사랑의 축복이 시적으로 참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주님 사랑의 축복을 가득 받은 영혼의 내적 풍요로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참 아름다운 묘사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회개한 영혼들에게 쏟아지는 넘치는 사랑의 축복을 깨달으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물음에 대해 명쾌하게 그 사랑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만고불변의 진리가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방대한 성서를 요약한다면 이 말씀뿐입니다. 구별할 수 있을 지언정 분리할 수 없는 둘이자 하나인 사랑의 이중 계명입니다. 이를 한자로 요약하면 경천애인敬天愛人이고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대통령의 좌우명입니다. 이에 대해 화답하는 율법학자의 깨달은 모습도 참 아름답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으로 검증됩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과 더불어 오늘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이중 계명의 모범이, 롤모델이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성심은 바로 사랑의 샘입니다.
참으로 회개할 때, 예수님을 사랑할 때 주님은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아낌없이 선물하시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은총을 베푸시어 사랑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210312. 사순 3주간 금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선명히 드러납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29-31)
첫째 가는 계명을 묻는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고 골자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이 모든 의무는 그분이 한 분이신 하느님이심에서 출발합니다. 누구도 그분과 관계성에서 벗어나서는 생겨날 수도 존재할 수도 없지요. 이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분, 양육하시고 돌보시는 분, 행복하라고 가르치시고 축복하시는 분, 그분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고 목적이십니다.
그런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가 끌어모아야 하는 것들, 즉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은 한 존재의 전부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생명을 덜어내어 사람을 지으셨고, 사람은 온 존재의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이끌립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상이 영혼 깊이 새겨져 있으니, 하느님처럼 사람도 사랑하는 일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배반한 이스라엘과 주님 사이에 다시 화해의 분위기가 흐릅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호세 14,4)
이야말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을 뒤로 하고 다른 우상을 기웃거리며 유일신 야훼 신앙을 훼손했던 이들이 주님 앞에 돌아와 다시는 헛된 것에 한눈 팔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호세 14,5)
주님은 그동안의 상처입고 분노한 마음을 잊고, 속없이 백성을 반기십니다. 그분은 백성이 언제라도 돌아오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십니다. 그분 본성이 자비이시고, 그분 존재가 곧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 내 길을 걷기만 한다면,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화답송)
우리가 당신과의 관계 안에 다시 들어가기만 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양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기름진 참밀"은 주님의 몸인 지극히 거룩한 성체를 가리키고, "바위틈의 석청"은 바위이신 주님께서 머금고 계신, 꿀보다도 더 달콤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과 성체. 이 둘은 새 하늘 새 땅이 이루어지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이가 천상 예수살렘에서 혼인잔치 음식으로 배부를 때까지 이 지상의 광야 순례길에서 우리를 지탱해 줄 소중한 양식이 될 것입니다.
"나는 네 사랑으로 족하다."고 주님께서 속삭이십니다. 나중에 성공해서 교회와 사회에 기여하겠다고, 이담에 부자 되면 많이 봉헌하겠다고 주님을 마냥 문 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면서 우상에게서 눈을 못 떼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속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존재의 온 힘을 다 끌어모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과 닮게 하고, 이웃과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영약입니다. 사랑이신 분 안에서 사랑이 되어 가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선물로 드립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
210312.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12,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은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12,29-31)
둘이 아니고 하나의 사랑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저는 그제와 어제 어머니이신 땅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제는 배둔성당 화단에 꽃양귀비, 수선화, 꽃잔디 등등 봄맞이 꽃들을 심었고, 어제는 먹걸이 채소들을 심을 밭을 일구었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돌아가신 저의 어머니께서는 평생 흙 노동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님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어머님께 일을 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지 않고, 힘 닿는데까지 일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사시다가 떠나가셨으니, 후회없는 삶이셨고, 고통 없이 짧게 아파하시다가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가셨으니, 참 행복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사랑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흙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묵상했습니다. 흙을 사랑하려면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가장 낮은 곳에 계십니다.(마태25,31-46 참조)
오늘 독서에서 호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호세14,2)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높은 곳을 향해 있던 나의 관심을 낮은 곳, 그것도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라고 묵상했습니다.
머리와 입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몸이 낮은 곳, 가장 낮은 곳으로 돌아가는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
210312. 사순 3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사랑은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것이며 무제한적입니다!
예수님 시대 율법학자라고 해서 다 위선자들, 날나리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라든지, 바오로 사도의 스승이자 온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던 가말리엘 같은 율법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신앙심이 깊고 열린 마음을 지닌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질문을 던집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을 무엇입니까?”(마르코 복음 12장 28절)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율법 계명은 총 613개였습니다.
그 중에 248개의 계명은 적극적인 계명이었고, 나머지 365개는 소극적인 계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절대적, 강제적인 것, 무거운 계명이었는가 하면 어떤 것은 권유적이고 경미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이 목숨처럼 중요시 여겼으며 앞자리에 두고 싶었던 계명은 안식일과 관련된 계명이나 할례에 관한 계명, 정결례와 관련된 계명, 단식에 관한 계명, 제례와 관련된 계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토록 목숨 걸고 강조했고 이를 어겼을 경우 가차 없는 잣대를 들이대곤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율법학자는 613개의 율법 가운데 가장 중요도가 높은 계명, 그래서 우선적으로 강조해야 하는 계명, 즉 가치나 등급이 가장 높은 계명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안식일 계명이나 할례나 정결례와 관련된 계명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웬걸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 4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복합적으로 인용하며 ‘사랑의 계명’을 제1계명으로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코 복음 12장 29~30절)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그냥 말로만, 입술로만, 기도문 만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함에 있어 적당히,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모든 에너지를 다 투자해서 성심성의껏 사랑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음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코 복음 12장 29~30절)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이웃을 향한 사랑도 종래 유다인들이 그려왔던 사랑과는 차별화됩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웃은 ‘절친’,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을 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의 개념은 보다 포괄적이고 광범위합니다.
물론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포함되겠습니다.
그러나 동심원은 점점 확대 됩니다.
적대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을 비롯한 이방인들, 꼴 보기 싫은 세리와 죄인들, 생활이 문란했던 사람들,
더 나아가 나를 공격하는 적들, 원수들까지 이웃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것이며 무제한적인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10312.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죽을 때 후회하지 않으려면 ‘사랑을 꿈으로 삼으라.’
오늘 복음은 우리가 무엇을 삶의 첫째 자리에 놓고 살아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내가 이것을 삶의 첫째 목표로 삼고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 목표입니다. 잘 살고 지옥 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생을 마감한 죽기 직전인 이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들을 우리가 살펴보면 이생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야 할지 답이 나옵니다.
바로 ‘사랑’을 가장 중요한 꿈으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35년생 이근후 정신과 박사가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오픈 테스트 설문 조사를 상위 세 가지로 종합한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 맘대로 살고 싶다.’입니다.
죽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자유롭지 못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에게, 자라면서는 친구들에게, 더 자라서는 회사에, 그다음엔 가장과 자녀의 눈치를 보며 살았지, 정작 자신의 인생은 산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맘대로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 ‘꿈’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근후 박사가 아내와 함께 브루나이란 나라에 머물다 온 적이 있다고 합니다.
워낙 수입은 많고 인구가 적고 복지가 잘 된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 대통령이 가장 바라는 것이 ‘젊은이들이 꿈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모두가 부자로 살 수 있어서 공짜로 유학을 보내준다고 해도 젊은이들이 공부하러 나가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조금 과장된 말이기는 하겠으나 아무도 땀을 흘리려 하지 않기 때문에 나라에 축구팀도 없다고 합니다.
‘생각하지 않고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며 사는 것 같지만 그냥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요셉이 ‘꿈’을 가지고 살았던 것처럼 꿈이 없는 삶은 반드시 후회를 남기게 됩니다.
이근후 박사는 현재 87세이신데, 작년부터 새로운 꿈을 찾았다고 하며 유튜버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지금 꿈이 고파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인간관계에서 맺힌 것을 풀고 싶다.’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나쁜 감정을 가진 것을 풀고 싶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미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갑자기 죽게 된다면 큰일입니다.
죽기 직전에는 주님 앞에 그런 마음은 절대 가지고 가서는 안 됨을 직감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근후 박사가 당시 수련의 생활을 할 때는 월급이 없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자신을 가르쳐 주는 의사에게 명절에 선물이라도 해야 했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호동 근방에 과수원이 많았는데, 주인에게 부탁하여 사과를 몇 개 따서 대나무로 만든 상자에 넣어서 들고 갔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잘 마치고 나왔습니다.
한 달 뒤에 다시 인사하러 갈 일이 있어서 그 집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선물한 사과가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모님이 이근후 박사가 가져왔던 것임을 잊어버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에도 촌스럽게 이런 선물을 가져오는 사람이 있어. 아휴!”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맺혀서 그 집에 선물을 들고 간 적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맺혀있는 이런 것들을 풀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이 가장 한이 된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나누고 살고 싶다.’입니다. 나누지 못한 삶을 가장 후회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이기적이기 때문에 나누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죽기 전에는 나누지 못한 것이 그렇게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근후 박사 말에 의하면 대부분 사람은 자신은 신세 진 것도 없고 신세 질 것도 없이 산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이 당연한 자신의 노력 덕분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보니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음식을 씹고 맛을 볼 수 있는 것도, 버스를 내 돈 내고라도 탈 수 있는 것도 다 감사한 일뿐이라고 말합니다.
너무 많은 신세를 지고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감사할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기에 내어놓아야 할 마음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데 나누며 살지 못한 것에 후회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사님이 지금 연세에도 책을 쓰시고 유튜브를 시작하여 당신의 지혜를 나누고 싶어 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처: ‘삶의 마지막에 후회하는 3가지’(35년생 이근후 정신과 박사), 유튜브 채널, ‘신사임당’]
첫째는 나에게 자유가 있는데 쓰지 못했다는 후회이고,
둘째는 그 자유를 용서하는 데 사용하지 못했다는 말이며, 셋째는 더 나누며 사랑할 수 있었는데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율법학자처럼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는 말을 들으려면 이런 분들의 가르침을 귀여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후회를 한 칼에 날려버릴 비책이 있습니다. ‘사랑을 꿈으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꿈을 가져야 나의 자유가 발휘됩니다. 그리고 그 꿈이 용서와 나눔일 때 이웃 사랑이 완성됩니다.
사랑이 꿈이 아닌 인생은 하늘 나라와 먼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일본 방송에서 어떤 76세 할아버지가 나왔습니다. 방송의 내용은 젊었을 때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의 촬영입니다.
히데오 할아버지는 24세의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이, 히데오! 76살이 된 너다. 너는 직장에서 알게 된 귀여운 하나 씨와 사귀게 된다. 별로 인기가 없던 너는 ‘이런 나 따위가!’라며 결혼을 고민하지만, 마음을 결심하면 바로 실행해라.
왜냐하면, 얼굴이 작고 귀여운 하나 씨는 2년 뒤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니까.
너는 엄청나게 후회하고 슬퍼하고 계속 잊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76살인 지금도 독신으로 산다.
24살일 때의 나, 그녀에게 이 말을 좀 전해 줘.
나의 76년 인생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하나 씨라고!”
[출처: ‘사람들이 죽기 전에 가장 후회했던 것들 3가지’, 유튜브 채널, ‘인생 수업’]
인생을 후회하지 맙시다. 사랑을 꿈으로 삼고 사랑만을 생각하며 삽시다.
신앙인이라면 그것만을 주님께 청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주님께 청하는 기도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가 하느님 자녀의 기도인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놓지 않았다면 분명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다른 생각을 할 것입니다. 다른 것에 관심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을 더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항상 주님의 기도를 깊이 묵상하며 바치고 하루를 산다면 사랑이 목표이고 꿈인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10312.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계명을 크게 둘로 나눈다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것은 첫째가 하느님 사랑입니다. 둘째는 이웃사랑입니다. 여기서 첫째, 둘째가 우리가 말하는 우열을 나타내는 순서라고 보통 이해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닌 것으로 해석한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을 잘 알면 이 부분이 좀 더 명확하게 이해를 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해 아쉽기는 하지만 그런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한번 묵상을 해봤습니다.
우열을 나타내는 의미가 아니라면 순위에 차등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럼 어떤 의미로 해석을 해야 할까요? 실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여쭤본 내용은 ‘가장’이라는 말로 했기 때문에 질문의 의도는 가장 큰 계명을 상징하는 의미일 텐데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첫째, 둘째 이렇게 나열을 하셨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첫째와 둘째는 같은 비중을 가진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분리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결국은 넓은 의미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거라는 말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면 예수님 입장에서는 어쩌면 하느님 사랑이나 이웃사랑이나 결과적으로 보면 같은 말씀이십니다.
찬물도 순서가 있다고 하는 것처럼 하느님 사랑이 우선이라고 강조하시지 않았을까 하고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면 자칫 잘못하면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다분히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오히려 그 말씀에 치중하게 되어 이웃사랑을 등한시할 우려가 있다고 보실 여지가 있어서 비록 말씀은 첫째, 둘째로 구분하여 말씀하셨지만 그걸 듣고 받아들이는 저희가 예수님의 말씀 속에 숨어 있는 큰 뜻을 헤아려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마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말씀하셨지 싶습니다.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만약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예수님께서 어떤 선택을 하도록 하게 하실 것 같습니까? 물론 이런 건 상상이지만 모르긴 몰라도 저는 예수님께서 굳이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이웃사랑을 선택하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이런 추론을 나름 할 수 있는 것은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한번 묵상하면 그런 추론도 가능합니다.
최후의 심판 기준으로 예수님께서 기준으로 삼으신 것도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근데 여기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베푼 사랑이 예수님 자신에게 한 사랑으로 예수님이 받아들이시고 또 그들을 예수님 자신과 동일하게 여기신 것으로 보면은 서두에 제가 표현한 내용에서 말씀드렸듯이 어쩌면 가장 큰 계명이 말장난 같을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웃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묵시적인 의미로 표현하셨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또한 사랑은 모든 허물과 죄를 덮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웃사랑을 실천할 때 이런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느님 마음에 드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말로는 하느님만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기 이웃과 가까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건 하느님을 우롱하는 한낱 거짓말에 불과할 겁니다.
----------------------------------------------------
210312. 김 로마노 형제님.
2021년 3월 12일 금요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첫째 가는 계명 (마르12,28ㄱㄷ-34) 제1독서<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호세14,2-10) 2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3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4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5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6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7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8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9 내가 응답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에프라임이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10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화답송 시편 81(80),6ㄷ-8ㄱ.8ㄴㄷ-9.10-11ㄱㄴ.14와 17(◎ 11ㄱ과 9ㄴ 참조) ◎ 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내 말을 들어라. ○ 전에는 모르던 말씀을 나는 들었네. “내가 그 어깨에서 짐을 풀어 주고, 그 손에서 광주리를 내려 주었다. 곤경 속에서 부르짖자 나는 너를 구하였다.” ◎ ○ 천둥 치는 구름 속에서 너에게 대답하였으며, 므리바의 샘에서 너를 시험하였다. 들어라, 내 백성아, 내가 너희에게 타이른다. 이스라엘아, 부디 내 말을 들어라. ◎ ○ 너에게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낯선 신을 경배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주님, 너의 하느님이다. 너를 이집트 땅에서 끌어 올렸다. ◎ ○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 내 길을 걷기만 한다면,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 ◎ 복음<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28ㄱㄷ-34)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제1독서(호세14,2~10)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6-7) 호세아서 14장 4절에서는 주님께서 징벌을 통해 이스라엘을 치유하고 사랑을 회복시키실 것이 약속되었다. 이제 호세아서 14장 5~7절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축복하실 때 그들이 풍성한 삶을 누릴 것을 예언한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이슬'처럼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슬이 되어'에 해당하는 '캇탈'(kattal; as the dew)은 '이슬과 같이', '이슬처럼'(like the dew)으로 번역된다. '이슬'은 호세아서에서 3회 사용되었는데, 호세아서 6장 4절과 13장 3절에서는 이슬의 덧없음과 무상함, 허무함 등의 이미지를 나타내었고, 여기서는 당신 백성에게 촉촉히 내리는 하느님의 부드러운 은혜를 상징한다. 팔레스티나 지방은 봄과 늦은 가을에 닥치는 우기를 제외하고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따라서 건기 때에는 밤에 내린 이슬이 농작물의 성장에 필수적이며, 산에 사는 동물들의 목을 축이는데도 반드시 필요하다. 호세아서 14장 6절에서 바로 비를 대신하는 이슬의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고 야곱의 후손들은 안전하게 하늘이 이슬을 내려주는 곡식과 포도주의 땅에 산다.'(신명33,28). 주님께서 그렇게 이슬처럼 은혜를 주실 때, 이스라엘은 아주 풍요롭게 번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서 14장 6절 후반부부터 7절까지에서는 이슬처럼 내리는 하느님의 은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진술된다. '그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나리꽃처럼'에 해당하는 '캇쇼샨나'(kashoshanna; like a lily)의 원형 '슈산'(shushan)은 팔레스티나 평원에서 자생하는 흰색의 꽃으로서 넓게보면 오늘날의 '백합'(lily)으로 불릴 수 있다. 이 꽃은 지고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아가2,2; 6,2). 그래서 나리꽃처럼 꽃이 필 것이라는 진술은 이스라엘이 영화롭고 아름답게 세워질 것이라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또한 '레바논처럼'으로 번역된 '칼레바논'(kallebanon; as Lebanon; like a cedar of Lebanon)는 '레바논 향백나무 같이'로 의역되기도 한다. 고대 근동에서 레바논은 향백나무의 산지였으며, 레바논은 곧 향백나무와 동일시되기도 했다(1열왕7,2). 향백나무 혹은 백향목은 견고하고 깊은 뿌리를 기반으로 해서 매우 굵고 튼튼하고 길게 자라나는 나무로서 고대 근동에서 왕궁이나 성전 등 크고 웅장한 건축물을 짓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이 그와 같은 향백나무의 뿌리를 뻗으리라는 예언은 그들이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굳건히 지키며, 하느님에 의해 보호를 받고 안전함을 누리며 크게 번성하는 나라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7) 이스라엘이 풍요와 번성을 위해 섬겼던 바알 우상은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아무런 풍요를 주지 못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진정 풍요로운 삶의 자리로 인도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예언하는 호세아서 14장 7절에서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에 해당하는 '옐레쿠 요네코타이우'(yelleku yoneqothaiu)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어린 가지들이 나무에서 점차 돋아나 계속해서 밖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강조한다. '요네코타이우'(yoneqothaiu)의 '요네케트'(yoneqeth)는 봄이 되면 막 돋아나는 어린 싹을 지칭한다(욥기14,7). 그리고 '돋아나'에 해당하는 '옐레쿠'(yelleku)는 미완료형으로서 그러한 일이 일회적이거나 종결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될 것임을 나타내 준다. 한편 '올리브 나무'에 해당하는 '자이트'(zaith; an olive tree)는 가지와 잎사귀가 매우 많은 나무이므로 '그 아름다움'에 해당하는 '호도'(hodo; his beauty)는 '그의 찬란함'(his splender)이라는 의미로 번역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올리브 나무처럼 찬란하고 웅장한 민족으로 성장한다는 의미이다. 이제 이어서 이스라엘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와 같으리라고 예언된다. '향기'에 해당하는 '레아흐'(reah)는 하느님께서 과거 계약적 저주의 예언 가운데, 그들이 바치는 제물의 향기도 맏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되었다(레위26,31).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계약적 저주가 다 해결되고, 이스라엘이 다시 향기로운 나라가 되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어려서는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께 새집 다오, 지금은 헌 마음을 드리면 하늘의 새 마음(생명)주심을 알았습니다.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로마노야),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 하느님만이 우리 생명의 주인(주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주셔서 생명이 되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요한3,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로마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히브10,14)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 십자가에서 우리의 속죄 제물로 죽으신 예수님, 그분의 죽음으로 얻는 하늘의 의로움, 거룩입니다. 우리의 불의, 죄를 덮으시고 그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로마4,6 히브10,17) 그래서~ (히브10,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 용서된 곳~ 십자가의 대속을 진리로 믿는 그 마음, 그 곳입니다. 모든 구원(용서, 생명)의 약속을 성령을 증인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이십니다.(히브10,15~참조)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그러니 그 새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지요.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 하느님을 사랑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생명을 얻기 위해, 땅의 생명을 위한 삶을 버리는~ 곧 육의 목숨을 위한 신앙이 아닌 영의 생명, 곧 영의 구원을 위한 신앙으로~내 뜻을 위한 삶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위한 신앙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 우리의 온 마음과 정신,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태10,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첫째 계명으로 깨달은 그 하느님과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주는 것, 그래서 이웃도 하늘의 의로움, 거룩, 새 생명을 얻도록 해 주는 것,~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인간의 사랑은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 제사 행위보다(인간의 열힘 그 행위보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내가 구원 받았듯, 이웃도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돌봐 주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일입니다. (1사무15,22) 그러자 사무엘이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 말씀을 듣는 것이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마다(창세1장 참조) ‘보시니 좋았다.’ 그 ‘낫고’와 ‘좋았다’가 같은 ‘토브’입니다. 창조의 일이 좋은 일입니다. 창조 그 안에 구원의 일(약속)이 들어 있기에 좋은 일입니다. 그 좋은 일, 하느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명심하는 것, 좋은 일입니다. 그 약속을 붙잡고 가야 갈 수 있는 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람의 말을 따라가면~ 땅속의 나라에 가게 됩니다. 어딘지는 아시죠? (이사9,5-6) 5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6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정과 정의로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켜 가리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로마11,5-6) 5 이와 같이 지금 이 시대에도 은총으로 선택된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6 이렇게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이 더 이상 은총일 수가 없습니다. = 은총은 하느님의 은혜- 선물입니다. (에페2,8-9)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 하느님께만 좋은 일이 있는 것, 맞습니다. (루가10,39-42)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종교행위 등 바쁜 신앙생활을 많이 한다 해도~ 말씀 속에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 큰 계명의 진의(眞義),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헛된 신앙생활로 헛된 시간이 될 뿐입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 아멘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마르12,28ㄴ~34)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29ㄴ~31) 마태오 복음 12장 29절은 소위 '셰마 본문'이라고 하는 말씀 가운데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며, 희랍어 '아쿠에 이스라엘'('Akoue 'Israel)은 히브리어 '세마 이스라엘'(shema Israrael)을 직역한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신앙 신조로서 신명기 6장 4~9절과 11장 13~21절, 민수기 15장 37~41절을 포함하며, 유대인들은 이것을 아침,저녁으로 암송하였고, 이것을 양피지에 써서 작은 통(성구갑)속에 넣어 앞 이마나 팔에 매어달아 언제든지 꺼내어 읽을 수 있도록 한 중요한 계명이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6,4~6) "Hear, O Israel ! The Lord is our God, the Lord alone ! Therefore,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Take to heart these words which I enjoin on you today." '이스라엘아, 들으라!' 본문으로부터 그 유명한 '셰마'(shema; hear)가 시작된다. 본절은 6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으며(세마 이스라엘 예흐와 엘로헤누 예흐와 에하드; shema israel yehwa ellohenu yehwa ehad; hear, o Israel the Lord is god, the Lord alone), 그 첫 단어가 '들어라'는 뜻이 있는 '셰마'이다. 따라서 본 단락은 이 첫 단어를 따라 '셰마'(shema)로 불리워진다.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셰마는 원래 6단어로 구성된 신명기 6장 4절만을 일컬었지만, 후에 5절이 포함되었고, 더 나아가 본문부터 시작해서 한 단락을 이루는 4~9절까지를 일컬었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 6장 4~9절(제1부분)에 이어 신명기 11장 13~21절 (제2부분), 민수기 15장 37~41절(제3부분)도 셰마에 포함하게 되었다. 제1셰마에 해당하는 신명기 6장 4~9절은 유일신 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으로부터 시작하여 항상 계명을 기억함으로써 주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명령과 자녀에게 그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명령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추가된 신명기 11장 13~21절은 이 명령에 순종했을 때 주어지는 축복과 불순종했을 때 주어지는 저주가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민수기 15장 37~41절은 주님의 명령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옷자락 술에 자주색 끈을 달게 하라는 규정이 기록되어 있다. 유대 랍비들은 신명기 6장 7절에 근거하여 이 셰마 본문을 아침 저녁으로 암송하는 의식을 제정했으며, 이 셰마 규정의 준수 여부는 진실된 유대인임을 확인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이것은 하느님의 유일성에 대한 이스라엘의 매일의 고백과 모든 이단 종교와 우상 숭배에서 스스로 구별되는 유대 종교 교리의 근간이 된다. '유일한'으로 번역된 '헤이스'(heis; one)는 단순하게 수사(數詞)로서 '하나'라는 뜻을 갖지만, 신학적으로는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는 유일신(唯一神)사상을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단어이다. 사랑과 순종의 대상이 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밝히시는 본문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먼저 즈카리아서 14장 9절의 '그리고 주님께서 온 세상의 임금이 되실 것이다. 그날에는 주님이 한 분뿐이시고 그 이름도 하나뿐일 것이다.'라는 말씀에 나오는 '그 이름도 하나뿐일 것이다'(우셰모 에하드; ushemo ehad)란 표현에 근거하여 '에하드'(하나 뿐; one)를 주님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라 본문을 번역하면,'주님은 우리 하느님이시며 '하나 뿐'인 주님이시다'가 된다. 즉 '하나 뿐'이라는 고유 명사를 이름으로 가진 주님이시라는 의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에하드'를 주님의 이름으로 보지 않고, 새 성경을 포함해서 대다수 성경과 같이 이것을 주님을 서술하는 '하나'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즉 하느님의 이름이 아니라 다만 하느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원문대로 직역하면, '주님 우리 하느님 주님 하나'이며,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전반부는 '주님은 우리 하느님이시다'는 내용이고, 후반부는 '주님은 한 분이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을 종합하면, 본문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한 분이심을 강조하는 '하느님의 유일성'을 알리는 구절이 된다. 이런 의미를 갖는 본문에 근거해 볼 때, 성경은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다신주의 (多神主義; Polytheism) 뿐만 아니라 혼합주의(Syncretism)을 일체 배제하며, 실제로 모든 종류의 자연신론(自然神論)을 배제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철학적인 사상에 의해 추상적으로 만들어내는 신, 예를 들어 '절대 존재', '절대 이데아'와 같은 개념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직 한 분이신 주 하느님은 오직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서 크신 능력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절대적인 살아계신 하느님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새 성경에는 본문이 본절의 후반부에 있지만, 원문에는 본절의 맨 처음에 나온다. '웨아하브타'(weahabtha; therefore(and) you shall love; 너희들은 사랑해야 한다)로 시작하는 단어에서 '와우'(wau; therefore; and) 접속사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우리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내용의 앞 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정리하면,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하느님은 세상의 수많은 다른 헛된 우상이 아니고, 오직 한 분이신 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다. 한편,'웨아하브타'에서 '아하브'(ahab; love)동사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신명4,37; 11,1)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경우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호세아서의 경우 남편과 아내의 사랑(호세3,1),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호세11,1)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바로 '아하브'동사가 매우 실제적인 차원의 사랑임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에서 특별히 구별된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이 익히 알고 있는 평이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단지 종교적인 관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 가운데서도 친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출애굽 이후 시나이산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 관계를 맺은(탈출19,5.6; 24,1.8)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현존하고 임재하셔서 그들 가운데 당신을 드러내어 주셨으며,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제를 사랑하듯이, 하느님을 자신의 아버지처럼 또는 자신의 연인처럼 사랑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편, 신명기 6장 4절에서는 주 하느님을 '우리 하느님'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반하여, 6장 5절에서는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신명기 6장 4절이 이스라엘 공동체와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께 대한 계시라면, 본문은 그 계시된 하느님께 대한 각 개인의 인격적 반응에 대한 촉구라고 말할 수 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로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 우베콜 나프셰카 우베콜 메오데카'(bekol lebobka wubekol naphscheka wubekol meodeka)에서 3번이나 나오는 전치사 '뻬'(be)는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로서 '~ 가지고'란 뜻이다. 또한 각각의 '뻬'(be)에 붙어 있는 '모든'이란 뜻의 '콜'(kol)은 수단이 될 수 있는 대상의 최상 혹은 최대의 상태를 암시하는 말이다. 그리고 각각의 말 위에는 2인칭 남성 단수 접미어 '카'(ka)가 붙어 있다. 이것은 주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수단이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당사자의 것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즉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주입된 생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중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번역하면 '너의 최선의 마음을 가지고 너의 최선의 목숨을 다하고 너희 최선의 힘을 가지고'이다. '마음'에 해당하는 '카르디아'(kardia)는 히브리어 '레바브'(lebab)를 번역한 단어인데, 사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란 뜻이며, '마음을 다하고'로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는 '너의 모든 중심을 다하여'라고 하는 것이 원어적 의미를 살린 번역이 된다(with all your heart).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知,意,情)이 모두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서, 한마디로 '(한 사람의)인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부분이 없이 완전히 드러낸 상태에서 진실하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목숨'으로 번역된 '프쉬케'(psche; soul)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프셰카'의 원형 '네페쉬'(nepesh)는 일반적으로 ‘영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 '뻬콜 나프셰카'는 '너의 온 영혼을 다해'(with all your soul)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정신'으로 번역된 '디아노이아'(dianoia; mind)는 신명기 본문에는 나오지 않고, 영혼이 가지고 있는 속성인 정신성과 정신력을 의미하기에 '목숨을 다하고'를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마태22,37참조)로 세분하여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지녀야 할 가장 귀한 모습이기 때문에, 만일 그가 자기 영혼을 다해 하느님께 나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요한4,24). 끝으로 '힘'으로 번역된 '이스퀴스'(ischys; strength)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오데카'(meodeka)의 원형 '메오드'(meod)는 '넘치는 것'이란 뜻이다. 물론 이 단어를 '힘'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with all your strength(might)>, '그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 또는 '넘치는 활동력'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즉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관념적인 부분에 국한되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의 모습과 행동 등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 삶 속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신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느님을 보다 구체적으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본문은 각각으로도 최상급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세 가지 표현을 중복시켜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태도와 그 정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매우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본문의 이러한 표현을 볼 때, 하느님의 백성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들 가운데 결코 자신의 것이라고 하느님 대전에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그러기에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되, '전심(全心), 전영(全靈), 전력(全力)'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6) 본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것이 네 마음 (위)에 있게 하라' (take to heart; be upon your hearts)이다. 여기서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말씀'을 가리킨다. 또한 '마음'에 해당하는 '레바브'(lebab)는 신명기 6장 5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이 모두 자리잡고 있는 인격(人格)을 가리킨다. 따라서 말씀이 마음에 있게 하라는 말은 단지 말씀의 내용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생각과 의지와 감정에 언제나 말씀이 반영되어 있는 인격을 소유하여 실제로 자신의 삶속에서 주님의 향기를 풍겨내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요한 14,21) 그리고 '새겨 두어라'로 번역된 '웨하유'(wehayu)에 쓰인 동사는 '~이다'란 상태를 나타내는 '하야'(haya)동사로서, 이것은 말씀이 마음 위에 있는, 즉 말씀이 인격 위에 반영되는 삶이 일시적인 상태로 끝나는 일회적 행위가 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항상 지속되는 상태에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마음에'로 번역된 '알 레바베카'(al lebabeka; 너의 마음에)라는 표현은 신명기 5장 22절에 나온 '알 셰네 루호트 아바님'(al shene luhoth abanim) 즉 '두 돌판위에'라는 표현과 대구를 이룬다. 우리는 이 두 구절의 대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두 돌판에 율법을 새겨 주신 행위가 실제로는 그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마음 위에 있기를 원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예례31,33참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레위기 19장 18절의 인용으로서 십계명의 둘째 부분, 즉 사람에 대한 4~10계명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웃 사랑을 하느님 사랑의 연장선상에 두어 율법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웃'에 해당하는 '플레시온'(plesion; neighbour)는 인종이나 종교와 상관없이 우리와 함께 살거나 혹은 우연히 만나는 사람까지도 다 포함된다(루카10,25~37).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은 '웨아하브타 레레아카 카모카'(weahabtha lereaka kamoka; bu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이다. 여기서 '이웃'으로 번역된 '레레아카'(lereaka)가 '사귀다'라는 뜻의 '라아'(raah)에서 유래하여 '벗', '친구'(욥기6,14), '동료'(즈카3,8)로도 번역되는 '레아'(rea)에 전치사 '레'(le)와 2인칭 단수 접미어 '카'(ka)가 붙어 '너의 벗' 혹은 '동료들'이란 의미를 가진다. 이 본문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 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레위기 19장 34절에서는 함께 머무르는 객, 이방인을 사랑의 대상으로 포함하는 것으로 볼 때(레위17,10.12.13.15), 넓은 의미에서 본문의 '이웃'이란 계약 공동체 안에 살고 있는 자는 누구든지 다 포함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사랑하다'라는 뜻의 '아하브'(ahab) 동사는 보통 전치사 없이 목적어를 취한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를 향하여'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 '레'(le)가 목적어 앞에 붙어 있어서 다른 뉘앙스를 전달한다. 즉 '레'(le)는 상대방에게 방향을 맞추고 있는 자세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에게 도움이 되어 주다', '~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어 주다'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사랑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해 언제 어디서나 도움과 사랑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를 말한다. 또한 본문은 사랑해야 하는 깊이와 정도에 따라 '카모카'(kamoka) 즉 '너 자신처럼', '네 자신과 같이'(as yourself)이라는 말을 쓴다. '이웃'이 곧 나 자신과 같다는 의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는 경우라면 자신의 유익을 앞세우지 말며, 나에게 쏟아 붓는 걱정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만유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첫째 가는 계명에 이어지는 둘째 가는 큰 계명(마태 22,39.40; 마르12,31)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웃의 범위를 모든 사람들, 특히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로 분명히 정해 주셨다(루카10,25~3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