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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휘어지지 않을 올곧은 인성, 흔들리지 않을 진실의 곳간
- 윤태란의 수필세계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들어가며
영혼을 드러내는 투박한 그릇, 윤태란 수필이 담긴 진실의 곳간이다. 풋풋한 향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인간애, 윤태란의 올곧은 인성이 품어내는 품맛이다. 진실의 곳간에서 풍겨져 나오는 향기, 그것을 말하지 않고 윤태란 수필을 말할 수 없다. 윤태란의 수필은 무엇보다도 인간학의 명제에 바로 답한다는 데 그 가치가 있다. 윤태란은 마음을 텅 비우고 고요함에 들기를 좋아한다. 사색에 즐겨 빠진다는 것은 그녀가 삶의 현장에서 유난히도 욕심 없이 비움의 미학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증거다. 그녀는 기침소리에도 몸을 움츠리는 작가다. 수필의 핵심은 자기 성찰, 바로 무의식의 의식화, 즉 그림자의 인격화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향기가 없으면 생명이 없는 조화나 다름없다. 꽃도 향기를 갖고 있고, 사람도 그 나름의 향기를 낸다. 수필에 있어서 문장이 매력적 요소라면, 인간적 향기는 절대적 요소다. 정의 문학으로 불리는 수필의 향기는 외부의 번득임이 아니라 내부의 번득임이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할 때, 윤태란은 아름다운 대지에 꽃을 피울 봄을 불러오는 작가다. 오늘도 진실하게 자기를 바르게 가다듬는 일에 정진하는 착한 여인이다. 윤태란은 일찍이 「에세이문예」로 등단하여 문인이 되었고, 본격수필에 대한 희구로 오랫동안 본격수필 이론을 배워왔다. 그녀의 수필은 순수의 빛깔과 인정의 향기가 서정이 되어 내면을 촉촉이 적시는 진실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I. 윤태란의 수필세계
1. 인상과 인정의 집결체, 감동의 편린
윤태란의 수필은 일상을 소재로 해서 정서와 그를 통해 획득되는 깨달음이 유감없이 기술된 글이라 할 수 있다. 수필의 고유한 영역과 특성을 제대로 살렸기에 그녀의 글은 향기를 지닌다. 수필을 인간학이라 부르는 소이도 수필의 내용이 인간에 대한 성찰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흔히 수필은 자신의 심적 나상이라고도 하고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윤태란의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기의 드러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비워내기를 통한 무욕의 소중함을 수필적 소재로 취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현대는 단절과 소외로 특징되는 시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윤태란 작가 역시 고독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녀가 순수의 세계에 푹 빠져들고 있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착한 심성이 그 원천으로 작용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윤태란의 수필들은 내면의 물음들을 접하고, 진실 찾기로부터 삶의 의의를 깨닫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아래 작품은 자기발견의 소중함이 어떤 것인가를 엿볼 수 있게 하기에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미 내 마음은 우산을 접은 듯이 구겨졌고, 또래로 보인다는데 어찌하랴. 속상한 마음을 털지 못하는 속 좁은 여자가 나였음을 인정하리라. 잊어버리자. 그리고는 메모지에 숫자 2를 쓰고 해를 그렸다. 이해를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어느새 햇살을 가득 머금고 입을 벌린 석류 알처럼 내가 웃고 있는 게 아닌가. 해결점도 찾았다. 앞으로 내 나이를 물으면 태양처럼 뜨는 해 라고 말하련다. 요즘 곳곳에 혁신 바람이 분다. 노력 여하에 따라 몰라보게 변하는 게 마음이라고 했던가. 봄바람처럼 마음이 가볍다. 경험을 바탕으로 나를 성숙시킨 지혜의 힘은 이제 나의 스승이고, 나의 도반이 되었다. 그 남자의 폭언도 일몰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바람이라고 생각하련다.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은 편견이고, 열려 있는 사람은 사랑이라 하지 않던가. 새로움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목적이 있는 삶을 살리라.
- <화> 중에서
그림자의 인격화란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아하-경험’으로 인식하여 솔직하게 드러낼 때만 가능하다. 위의 작품 <화>는 주부의 자리에서 겪었던 내면의 그림자를 작가가 정면으로 바라보는 과정이 그려져 있는 글이다. 이 수필의 제목을 ‘화’라고 한 것은 감상포인트다. 그녀는 세상 일에 대한 자신의 무관심을 지혜로 활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주위를 관심 있게 살피며 위험에 처했을 때, 용기 있게 나서는 사람들의 자세를 보면, 존경스러워 하며 자신을 반성해 보기도 한다. 유리창 밖이 세상이라면, 세상은 어둡지도 밝지도 않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지하철에서의 부딪침 순간을 참아냄으로써 얻은 지혜를 수필화한 것이다. ‘나누고 비우고 섬기며 살아갈 때, 내 마음에도 빙하가 멈추고 잔잔한 기쁨이 일렁거리지 않을까’하는 주제의식을 말해주고자 라캉도 홀츠도 불러내었다. 오늘의 자아가 형성되기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자기 내면의 물음에 답하는 과정을 지하철 체험으로 잘 형상화한 글이다.
알 수 없는 없는 게 인생 아니더냐. 설렘으로 기다렸던 봄, 행복과 불행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한 뼘과 한 줌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베란다에 히아신스 꽃이 별빛처럼 매달려 웃고 있다. 군자란 꽃대도 근엄하게 내밀고 올라왔다. 누군가가 아닌 온전히 나 자신을 진정 보호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시간을, 원하는 사람과, 보내는 것이 삶의 최고의 행복이라고 하지 않던가. 가출했다가 뒤돌아 온 나의 웃음소리를 봄꽃이 데리고 온 게 아닐까. 내 목소리를 들으면 속이 뻥 뚫리고 제일 많이 웃는다던 친구에게 한 통의 전화를 걸어봐야지.
- <잃어버린 웃음> 중에서
윤태란의 수필은 인간적인 유대가 확인되는 따뜻한 심성에서 출발한다. 수필쓰기는 자기 속에 내장되어 있는 기억을 불러내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잃어버린 웃음>은 바로 숨어 있는 실체를 파악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수필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고통의 근원을 해결하기 위해서 한 개인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유효하게 쓰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수필은 찬란하고 정결한 정신의 축제라 할 수 있다.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의 미학적 형상화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진솔한 내면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베란다 히야신스와 군자란의 봄꽃이 잃어버린 웃음을 데려온 것이 아닐까하는 사유가 깨달음을 이룬 작가가 자신의 내부와 만나는 장면을 중계하고 있어 우리는 상상과 연상으로 윤태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상징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기 한계에 직면하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건강하게 형성하고자 노력하는 작가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윤정희가 나오는 영화 ‘시’에서 김용택 시인은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잘 보아야 한다고 했다. 맞다. 개구리가 몸을 움츠리고 있을 때는 멀리 더 멀리 뛰기 위함이 아닐까. 찔레꽃의 향기를 느끼려면 가시에 찔리는 고통이 있더라도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서야 짙은 향기를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꽃향기보다 고운 글에 더 매력을 느끼며 달걀의 흰자가 생명체이고 노른자가 자양분이듯 마음 밭을 가꾸며 나도 어느 지인의 말처럼 글을 쓰고 싶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게 놓인 이 길을 운명처럼 여기리라. 맛깔스러운 글을 쓰려면, 고정관념의 틀에서 탈출을 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싶다. 나타나지도 않은 멧돼지에 벌벌 떠는 내 모습이 좀 더 대담해지길 바라본다.
- <고정관념> 중에서
자아가 페르소나와 동일시하여 외부세계의 요구에 잘 순응하면 할수록 내면의 세계, 즉 무의식과는 더 많은 갈등을 일으킨다. ‘나타나지도 않은 멧돼지에 벌벌 떠는 내 모습이 좀 더 대담해지길 바라본다.‘는 진술은 그녀의 소심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고정관념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녀가 고정관념의 틀에서 탈출할 때를 ’지금‘이라고 설정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많이 세웠다는 증거다.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하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리라는 다짐이 여러 수필에 자주 나오듯이, 여기서도 작가는 어떤 고통도 감수할 각오다. ‘맛깔스런 글을 쓰려면’에 비추어 볼 때 작가는 인생의 궁극적 목표를 좋은 작가가 되는 데 두고 있다. 본격수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를 해온 작가로서 열린 가치를 존중하면서, 현재보다 더 대담해지기를 기대하면서 긍정하는 태도로 건강한 자아를 형성해 가는 모습이 믿음직스럽다.
2. 존재의 근원을 연 그리움의 미학
윤태란은 자기희생을 근본으로 하여 주부의 소임을 빈틈없이 처리해나가는 작가다. 그녀의 수필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근원에 대한 본능적 편향성, 가족에 대한 지향성이다. 우리는 누구나 가족과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 대한 경건한 태도 앞에서는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다. 여린 심성의 소유자인 윤태란에게 있어 애정의 대상은 남편을 비롯하여 가족이 전부다. 그 패밀라즘의 귀착지는 가정을 지켜낸 남편이다. 작품 하나하나에 남편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난다. 한마디로 절절한 부부애의 응축물이다. 이는 그녀만의 독특한 정서라기보다 올곧은 인성을 소유한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수필들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 지극한 정성, 부부애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짐> 이 입증한다. ‘짐’이 주는 환기력은 대단하다.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강한 문학적 힘을 가진다. 사람들은 물질적 변혁만 이루면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허물을 벗고 한 순간에 환한 모습의 꽃으로 피어날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고,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가족을 최고로 여기는 데서 순수가 빚어낸 인간적 향기가 진하게 풍긴다고 하겠다. 윤태란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가족의 존재다. 가족간의 우애와 애정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많은 수필 속에 녹아 있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윤태란 수필의 한 축은 자신을 가족에 의지해 지탱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잘 보여준다.
올 해 임금피크제에 들어 간 남편이 손수 짐을 챙겨왔다. 삼십사 년 동안의 직장을 다녔던 짐은 세 박스였다. 그 짐을 보는데 왜 이렇게 허망할까. 예전 같으면 호기심으로 박스부터 열었을 텐데 시선을 회피했다. 차마 열어 볼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 안에 남편의 헌신과 땀, 그리고 눈물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박스 안에는 가족들이 기념일이나 생일날 보낸 편지가 고스란히 있었다. 힘들고 지칠 때 읽어 보았으리라. 늘 일이 남편을 재촉하며 따라다녔던 세월의 흔적은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퇴직을 앞두고 직장에서는 남편의 등을 밀고 종을 치려고 한다.
- <짐>에서 -
순수한 연모와 향기 나는 부부애보다 더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 짐을 보는데 왜 이렇게 허망할까. 예전 같으면 호기심으로 박스부터 열었을 텐데 시선을 회피했다. 차마 열어 볼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 안에 남편의 헌신과 땀, 그리고 눈물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는 작가의 짐에 대한 단상이 살짝 가슴을 찌르면서, 여운의 맛을 준다. 파토스 전략이 극대화된 이 부분은 섬세하고 세련된 작가의 정서를 잘 담아낸다. 이런 맛이 있어 문학성이 생겨나고 공감도가 형성되는 게 아닐까. 남편의 짐 앞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다 잡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작가의 모습이 신성한 구도자처럼 느껴지는 것은 사랑에 대한 진정성 때문이리라. 직장을 잃은 남편에 대한 측은지심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일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휴머니즘의 추구다. 남편의 가족사랑을 상징하는 ‘짐’에 대한 연민이 없다면 그것은 곧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건강해야 우리 가족에게 웃음꽃 핀다.’는 명언을 지어냈던 윤태란 작가의 <내 남자>란 수필 또한 부부애가 진하게 내어나온다.
그런 과정에서 남편의 소중함을 절절히 느꼈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이 맞았다. ‘남편이 건강해야 우리 가족에게 웃음꽃 핀다. 는 명언을 지어냈던 내가 그새 지나간 일을 까맣게 잊었나 보다. 오늘도 나의 눈은 시계의 분침을 노려보며 “너무 합니다. 너무 합니다. 당신은 너무합니다.”라고 노래를 부르며, 남편을 기다린다.
- <내 남자>에서
이 수필의 핵심은 반전에 있다. 남편이 테니스를 너무 좋아해서 테니스공에 질투를 느끼던 작가가 테니스를 치다 다쳐온 남편을 보고 난 후 오히려남편이 운동할 수 있도록 좋은 날씨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재미를 준다. ‘시계의 분침’에는 남편을 기다리는 여심이 끈적하게 녹아있고, 사랑의 향기와 그리움의 미학이 펼쳐져 있다. 부부애와 그리움의 미학을 주제로 하는 수필은 현대사회의 특성상 여성 수필에서 필연적으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편을 기다리는 마음이 잘 드러난 ‘내 남자’는 오늘을 살아야 하는 윤태란의 존재이유다. ‘너무합니다.’라는 멜로디는 남편에게 주는 일종의 애교스럽고 아름다운 격려다. 그것은 새로운 권태를 전지하는 진실한 기도이고, 애정의 영토 확장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자신의 반쪽을 기다리며 사는 삶, 시간은 흘러도 그녀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자 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부부애를 보여주어 감동을 준다. 주제를 의미화하기 앞서 그런 인생관을 갖기까지의 과정을 시공의 순서에 따라 논리정연하게 서술한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다. 윤태란의 순수와 열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지금은 참 좋은 세상이다. 요즘은 바닥에 떨어져도 깨지지 않는 그릇들이 즐비하다. 돈만 있으면 마음에 드는 그릇을 얼마든지 살 수 있지 않은가. 무거운 놋그릇을 꺼내어 닦으셨던 부지런한 어머니의 삶은 고단함 그 자체였으리라. 그것을 까맣게 잊고 살아온 나는 어머니를 흉내조차 내지 못한다. 무쇠처럼 입이 무거우셨던 어머니는 동기간이나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다녔지만, 그러나 어머니를 대표하는 그 이름표가 나는 정말 싫었다. 마음 상한 일들이 살면서 왜 없었을까. 어떻게 참아 내셨는지. 놋그릇, 그 앞에 서면 어머니의 너른 가슴에 내 좁은 속내가 안개 속이듯 얼비친다.
빨리 데워지고 빨리 식는 요즘의 모든 일상, 유기는 분명히 나에게 어머니의 삶이 수용이나 포용, 그리고 헌신이었다는 걸 가르쳐 준다.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놋그릇이 눈물을 멈췄다. 빛이 난다. 그 안에 칠 남매가 웃고 있다.
- <놋그릇>에서
<놋그릇>라는 작품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정이 어떠한가를 제시해주는 수필이다. “집 안의 귀퉁이에 놓인 놋그릇이 가만히 나를 올려다본다. 그 앞에 서면 어머니의 잔영이 떠오르곤 한다. 어찌 그 영상을 내 부족한 표현으로 다 말하랴. 다만 나는 놋그릇을 보며 그것이 갖는 수용성이라는 관념과 만나기를 바란다. 잿빛을 벗겨내면 찬란한 빛이 깃든 그것은 위대한 모성성을 잉태한다. 그 안에 칠 남매를 별빛처럼 키워내던 어미의 자화상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했다.”는 <놋그릇> 발단부는 윤태란의 문학적 역량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윤태란 수필세계가 보여주는 또 다른 한 모습에는 모성의 따스함이 스며나고 있으며, ‘잿빛을 벗겨낸 찬란한 빛’을 모성원리의 미학으로 구축한 표현력이 압권이다. 문학성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간접화한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표현능력일 경우가 많다. 윤태란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문학성이요, 진한 모성 원리의 표백에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적 성취를 담보해 주는 것이다.
윤태란의 글은 한 여름 밤, 범부의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시원한 찬물처럼 우리에게 청량감을 준다. 일상적이고 단조롭고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는 삶을 투시하는 그녀의 긍정적인 삶의 태도에는 따스함과 순박함이 병존해 있어서 정감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가정이란 울타리를 축으로 해서 따뜻한 가족애가 작품의 주조적 테마로 자리 잡고 있는 그녀의 수필 구석구석에는 <목의>처럼 사랑의 향기가 따스하게 물결치고 있다. 이외에도 주옥같은 작품들이 즐비하다. <공>, <호박>, <쓸개>, <틈>, <오월단상>, <소리>, <아버지의 틀니>, <제발>, <뒷모습>, <주문> ,<초대>, <살다 보면> 등은 소박하고 담백한 문장들이 주는 손맛과 파토스적 호소전략이 주는 감성자극이 주는 품맛이 따뜻한 인간애를 느끼게 한다.
III. 나오며
이상으로 윤태란 수필세계를 소상하게 살펴보았다. 그녀의 수필은 우선 건강하고 맑다. 신선하고 순수하다. 고뇌보다는 희망이 있고, 분노보다는 이해가 있고, 질시보다는 인정이 있다. 이기적인 본성보다는 이타적인 사랑이 녹아 있다. 그녀의 글은 하나같이 잔잔한 모습이다. 윤태란 수필을 읽는 맛은 여기에 있다. 지식이나 관념의 노래라기보다는 일상의 소중한 체험에서 개성화를 이룬 글이기에 그녀의 수필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향기가 풍긴다는 게 강점이다. 자신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세우며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려는 순명의 정신이 물결치는가 하면 인정의 넉넉한 품이 있어 좋다. 세상을 긍정하는 마음, 그 속에 행복이 있다는 통찰을 통해서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를 통합하는 작가의 예지는 우리들의 메마른 공명상자를 울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보여진다. 가족의 사랑이 충만하기에 글에서 행복의 여운이 느껴진다. 이 수필집은 자기성찰로 시작하여 자기완성에 이르는 길에서 찬연한 꽃을 피우고 있다. 모든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비움의 미학은 그녀의 수필을 포근한 어머니의 치마폭처럼 따스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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