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삶이 떠안아 온 고통을 기리는 당신만의 방식이 있는지.
손상과 회복을 넘나들며 기어코 성장하고 마는 우리의 정신은 우듬지를 닮아있다.
아득히 솟은 오늘만큼 깊어진, 어제의 골로 들어선다.
가장 사적인 주석을 상처에 내걺으로써
아이돌 그룹 르세라핌의 데뷔곡 ‘Fearless’ 속 일부 구절이 인상 깊다. “내 흉짐도 나의 일부”라는 노랫말엔 약점이자 상처인 자신의 부분을 수용하고 그럼으로써 나아가겠노라는 당찬 포부가 배어있다. 1인 출판사 아키텍스처의 대표이자 작가인 김현중이 첫 에세이 『우듬지』로 풀어 쓰고자 한 메시지는 위 가사에 담긴 욕망과 유사하다. 뒤안길로 사라져 간 과거의 상처들을 더듬어 보며 오늘에 미친 영향을 살피는 것. 이 작업을 작가는 ‘상처에 가장 사적인 주석을 내거는 행위’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되돌아본 상처들의 집합이 밀어 올린 존재가 현재의 자신이라는 점을 인식하니, 나무의 꼭대기 줄기를 뜻하는 ‘우듬지’라는 단어를 작품의 제목으로 삼는 결정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게 작가의 고백이다.
작가에게 상처란 당장 몸에 남아 있는 흉에 그치지 않는다. 육체 위로 그 흔적이 사라졌다 한들 잔존하는 기억이라면 여전한 상처다. 마음에 은유적인 생채기를 남긴 지난날의 사건과 감정 따위도 여전한 상처다.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고통 외에도 지극히 사적인 체험에 그칠 따름인 순간 역시 여전한 상처다. 그렇게 『우듬지』를 이루는 30편의 단상은, 도저히 보편의 상처라 부를 수 없을 법한 일화까지 망라하며,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의 나날을 기록한다.
한편 개별 산문이 시작하는 페이지마다 삽입된 일러스트들도 작가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작가는 읽는 재미를 배가하고 글에 대한 깊은 이입을 북돋우기 위해, 각 산문의 마침표에 포개진 머릿속 이미지를 그림의 형태로 가공했다. 작가의 생애 전반을 아우르지만 『우듬지』는 시간순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어떠한 질서를 갖춘 서사의 흐름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작가는, 마치 룰렛이나 뽑기처럼 한 편 한 편의 글을 취사선택해 읽기를 장려한다. 이런 의도는 작품의 날개 부분에서도 드러나는데, 뒷날개에 그려진 인체도를 둘러싼 숫자들이 저마다 지시하는 대상이 있으니 바로 부위별 글의 페이지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장치들까지 활용한다면 독자들은 작가와는 다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몸과 마음을 사유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자신의 본바탕을 일군 상처들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프롤로그:
온몸으로 부친 서문
1장 무지개를 예보하는 기상청은 없다
1. 양파 한 꺼풀의 사랑
2. 우연을 읽는 오늘
3. 이따금 스위치를 내린 모형이 되고 싶어
4. 도량형 세계가 붕괴하기까지는 불과 2초
5. 단장의 슬픔으로 당신을 끊어내어 단장해야 했던 날
6. 빨가면 사과, 사과는 사랑하는 마음
7. 좌석이 뒤일 뿐이지, 서열이 뒤인 건 아니니까
8. 당신이 밟고 선 맨땅이라는 이름의 천장으로, 점프
9. 언어로 인간을 사랑하는 법, 편지에 대하여
10. 구르거나 튕겨 이끼가 앉지 않는다 한들 상처마저 없으랴
2장 장렬히 실패하는 삶
1. 올드 패션드 하트
2. 최초의 블랙아웃
3. 가장 인간적이며 가장 애틋한 알고리즘, 손금
4. 케케묵은 면도날은 쓰레기통으로
5. 여전한 신화의 탯줄, 우리는 시시포스로 산다
6. 어느 잔해가 빗장을 벗긴 건
7. 동공에 드리우는 저편의 불안
8. 인간에 대한 내성이란 어떻게 키우는 건가요
9. 모래시계 앞에서
10. 그릇을 부시며
3장 제 엄니에 꿰뚫리는 운명 앞에서, 나는 바비루사처럼
1. 생의 재난 앞에서 쇼맨십이 웬 말입니까
2. 콤플렉스로 쌓아 올린 굴뚝에 체온계를 물리고
3. 해진 뒤축에 영광을 돌리는 플라뇌르의 마음으로
4. 비극의 비거리를 늘리고 싶다니 오타니 쇼헤이의 어깨 정도라면 어떨까
5. 변기를 붙잡은 채 창공을 경외한 어느 해양생물에 대하여
6. 고여 흘러 내 것이자, 본류를 잊어 내 것이 아니었던 눈물
7. 우화를 시니컬하게 옮겨 보는 것
8. 우리의 봄은 더 이상 친절하지 않으므로
9. 만사 제로백
10. 가끔은 배를 한 대 얻어맞아 기우는 몸의 각도로
상세 이미지
저자 소개
저 : 김현중
1992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2018년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CJ ENM 등 다수 기업에서 콘텐츠 제작 및 유통 직무를 수행했다. 2022년 1인 출판사 아키텍스처(ARCHITEXTURE)를 설립하고 이듬해인 2023년, 첫 산문집 『우듬지』를 펴냈다.
책 속으로
성장의 주체를 마음까지로 뻗었을 때, 육체적 성숙 외에 정신적 진화까지 망라하는 통증은 뭐라 명명해야 할까 고민하곤 했다. 그러다가 산적한 시간과 시간, 시간을 헤치며 나는 외형적 변화에 맞춘 성장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해석과 기술이 지닌 한계를 깨달았고 스스로 재정의한 용어로서의 성장통을 읽어 내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온몸으로 부친 서문」중에서
요리의 앞 단계에서 양파의 겹을 벗기고 해체하듯, 사랑에 선행되어야 하는 정서적 의무를 깨달았으니 다름 아닌 마음밭의 조심스러운 탐침과 수색을 진행해야 한다는 과제. 실천하며 여전히 내가 상정하는 사랑의 기본값은 그때와 비슷하게 아리고 매운 맛이지만, 그런 양파의 자극 틈바구니에서 과거엔 알아채지 못했던 약간의 달짝지근한 맛을 이따금 감지하기도 하니, 이 지점의 나는 사랑의 요사스러움을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양파 한 꺼풀의 사랑」중에서
오늘날엔 나와 당신과 모든 이가 기시감의 되풀이 속에서 살아간다는 생각이다, 심지어 인간사를 관통하는 생로병사 또한 그 구간마다 기시감의 눈금을 그어 놓을 수 있다고.
---「우연을 읽는 오늘」중에서
생애 전반에 걸친 필연을 미리 알게 된다면 매 하루는 얼마나 시시해질 것이며, 모든 사고와 행동이 운명에 종속되는 과정이라는 걸 깨달은 후 매 하루는 얼마나 메말라갈 것인가. 충만한 의욕과 실천의 결핍으로 인해 거대한 폐경지로 변하는 한 세계를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손금으로 보는 팔자 따위에 지갑을 열어본 적이 없었다.
---「가장 인간적이며 가장 애틋한 알고리즘, 손금」중에서
관계에도 분명 치사량이 존재한다는 믿음이었다. 한 인간이 비울 수 있는 자신의 곁, 마음의 방은 크기와 수가 정해져 있고 그 자리를 채우는 관계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고.
---「인간에 대한 내성이란 어떻게 키우는 건가요」중에서
내가 떠안고 짊어진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마지막 한 사람의 좌표. 그가 서 있는 유대와 공감의 한계선이 희극과 비극을 나누는 기준점으로 성립된다.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을 최후의 보루로서의 관계. 그가 자리한 심리상의 마지노선이 희극 내지는 비극의 여부를 규정한다.
---「비극의 비거리를 늘리고 싶다니, 오타니 쇼헤이의 어깨 정도라면 어떨까」중에서
봄에 로맨스를, 여름에 액션을, 가을에 드라마를, 겨울에 스릴러를 좇았던 과거야 쉽게 묻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지만, 나는 더 이상 하나의 계절에 하나의 장르만을 부여하지 못한다.
---「우리의 봄은 더 이상 친절하지 않으므로」중에서
출판사 리뷰
표지가 어쩐지 휑한 느낌이다. 표지를 채우는 색상의 조합조차 단순하니 에세이라기에는 무심하면서도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미지가 제법 독특하다. 그 흔한 부제조차 적혀 있지 않다. 저자는 책의 부제를 오랜 시간 고심했다는데 ‘자기에게 몰입하는 렌즈를 돋구는 법’이라든지 ‘상처에 내거는 가장 사적인 주석’과 같은 여럿의 문구를 나열하며 가장 적절한 문장을 찾기 위해 분투했다고. 결국 저자가 내린 결정은 부제의 소거였다. 『우듬지』라는 제목과 황량한 표지에서 풍기는 을씨년스러움, 긴 호흡의 줄글,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정서적 위상의 그림에서 독자 스스로 자신만의 부제를 길어 올릴 수 있을 거라는 여전한 도피적 고백과 함께.
저자의 목적은 자기 고백이다. 도피하고, 모면하고, 회피하려는 성향이 더 이상 책임을 덜고 안위를 보장하는 수단이 될 수 없음을 문득 깨닫고는 자기를 돌아볼 필요를 느낀 것이다. 그렇다고 뜯겨나가고 버려지고 훼손된 모든 과거의 달력을 한 장 한 장 거두기란 불가능하니, 생애 구간마다의 바로미터로서 또는 거울로서 최선의 지표로 삼은 게 다름 아닌 ‘상처’다. 저자의 사고에서 상처는 그 외연을 넓히니 눈에 보이는 흉과 상흔 외에도 비가시 영역의 고통과 아픔과 같은 감각 작용은 물론이거니와 슬픔과 고독, 외로움 등의 감정까지도 망라한다. 그렇게 총 서른 편의 산문은 오늘의 저자를 조립해 온 다양한 상처와 그 상처의 배경이 된 어느 시공간들을 술회한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저자가 써 온 글 중에서 선별을 거쳐 수록된 작품인 만큼 문장 하나하나의 깊이가 상당하며 어느 대목에선 붙박인 듯 시선을 고정하게 된다.
부위마다의 상처를 고백한 각 글도 글이지만, 그러한 상처를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세 가지 의미로 풀이한 서문의 표현이 인상 깊다. 한바탕 몸과 마음 일부의 훼손과 상실이 일어난 후에 남은 상처가 소나기가 쏟아진 뒤 등장하는 무지개와 같으나, 예보의 대상이 되지 않는 무지개처럼 우리도 드러나기 전까지는 일찍이 상처에 감응하기 어렵다는 것. 상처란 몸과 마음의 안전을 지키지 못한 실패와 다름없으나, 그런 실패마저도 축적된 역사로서 자신을 형성하기에 마땅히 자신의 부분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것. 그런 환원의 과정에서 상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행위는 그릇된 방향으로 자라 기어코 자기를 해치고야 마는 바비루사의 뿔과 같으니, 높이 솟는 우듬지를 지향하기 위해선 새로운 사유를 바탕으로 한 해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 이런 세 갈래의 풀이조차 길잡이로서만 받아들이기를 독자들에게 바라는, 저자의 굳세지 못한 당부엔 오히려 저자의 관점으로 완독하고야 말겠다는 오기마저 든다.
한편 저자의 예술적인 감각이 글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음이 놀랍다. 개별 산문과 함께 삽입된 일러스트들 역시 저자의 작품이라는데, 저자에 따르면 그림들은 퇴고를 마친 글들을 다시 읽어보며 품게 된 심상을 구체화한 결과물이라고. 하나의 형식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은 예술성이 무대 위에 선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 책이 공동체를 고칠 연고도, 곁에 머문 작은 손 하나 보듬어 줄 반창고도 되지 못한다 한들 어떠랴. 독자가 겪어 온 상처의 내력을 살피는 데 일조한다면 『우듬지』는 그야말로 자가 치유를 위한 회복력, 그 자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