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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문화유산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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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후기 스크랩 [정기답사] 애월리(涯月里) 집중탐구
문차일드 추천 0 조회 574 13.10.18 23:13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벼랑 위에 뜬 달!!

애월리(涯月里) 집중탐구


제주문화유산 답사회 안내를 맡은 오멍가멍님의 주제로 삼은 “벼랑 끝에 걸린 달”의 무슨 내용일까?

궁금해서 여기 저기 찾다보니 답이 나온다.

애월리 옛 이름은 곳돌(아래 하)이라고 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곳은 해안가라는 뜻과 돌은 월(月)의

제주어 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涯라는 한자의 뜻을 보면 물가, 가, 끝, 어느 곳이다.

곳돌(아래 하)그래서 애월(涯月)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벼랑 위에 뜬 달’이라는 뜻이 이해된다.

 

한담포구에서 본 한담해안 절벽

첫번째는 한담바닷가 가파른 절벽 위에 둥그렇게 떠오른 달을 보며 애월(涯月)이라는

"벼랑 위에 뜬 달"이라는 이름이 유래한 것이 아닐까?라고생각 해 본다.

 또 하나는 애월항에서 동쪽을 보면 신엄리 해안가 절벽이 경이롭다.

바닷가 가파른 절벽 위에 둥근 보름달이 뜨는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지?

  

탐라순력도 애월조점(涯月操點)

또한 탐라순력도 중 애월조점(涯月操點)을 보면 매립 전 포구 모습을 보면 내면으로 깊숙이

반달처럼 들어 와 있으며, 1982년 건설부 국립지리원에서 펴낸 '한국지명요람'에도 포구가

반월과 같은 데서 애월리명이 유래한다고 적고 있다.

애월이라는 지명이 어디에서 유래하든 바닷가 벼랑 위에 흐릿하게 떠올랐던

보름달의 그윽한 정취를 잊을 수 없다고 기록돼 있다.

 

 애월리사무소 입구

 

사상정공기원추사비(使相鄭公岐源追思碑)

사상정공기원추사비(使相鄭公岐源追思碑) 등 조선 후기 목사의 선정을 기리는 비가 8기가 있었다

애월리에 있었던 비석거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도 있으며, 다른 곳에서 옮겨진 비도 있다고 한다.

 

애월리사무소 碑石群

 

 금장비(禁葬碑)

답사자료의 의하면 禁葬碑는 제주에서 애월리에만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금장회동인가백보지내(禁葬回洞人家百步之內)라고 작고 뭉툭한 현무암비가 서있다.

이는 인가가 있는 백보 안에 장례를 하거나 묘를 쓰면 안 된다고 하는데 자료에 의하면

금장은 일반적으로 마을 형성과정에 장례를 금했으며, 조선왕조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성저십리 금장·금송(城底十里 禁葬·禁松), 즉 서울성곽에서 십리까지의 지역은 묏자리를 쓰거나

나무를 함부로 베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다고 한다.

 

애월리 사무소 서쪽에 위치한 향사

향사는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은퇴한 관리들이 이용하는 클럽하우스라고 할 수 있다.

애월향사는 예전에 애월읍사무소가 이전하기 전까지 면사무소 건물로도 활용했었으며, 

현재는 풍물보존회에서 사용하는 듯! 북과 장구등의 풍물놀이 기구가 보관하고 있었다.

 

 한국에 명수 100선에 선정된 하물전경

중학시절 지붕이 있는 건물안에 있던 하물 맛은 가슴이 뻥 뚫릴 만큼 시원했었다.

하물은 애월리 중심에 있는데 주민들의 생활용수와 부녀자들의 빨래터와 노천 목욕탕으로 사용했었다.

특히 마을에 경조사 발생시 물부조라고 해서 한 집에서 한 허벅씩 물을 길어다 주고

부조를 대신했을 만큼 마을의 인정을 넘치게 하는 역할을 했다.

하물은 심한 가뭄때도 용출량이 줄어들지 않아 인근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중산간지역인

납읍과 어도 지역 주민들도 우마를 이용해 물을 길어다 먹기도 했다.  

1990년대부터 이후 용천수 보호를 위해 콘크리트 구조물이나 울타리 시설을 하기 시작했는데

용출 지점만 남겨두고 주변을 돌이나 콘크리트로 뚝을 쌓아 물 흐름을 막아 수량감소와 오염되고

천연적인 아름다움을 해치있어 마음이 답답하다.

 

애월(涯月)은 물이 어려운 제주도내의 마을 중 축복 받은 땅이라 할 수 있겠다.

마을 중심에 있는 하물을 비롯하여 장공물, 큰물, 구마물, 서하물, 말물, 시궁물, 손두벌물, 고수물,

오방수, 원댁이못 등 땅을 파기만 하면 샘이 솟을 만큼 물이 풍부했던 곳이다.

 

내부가 파헤 공사중인 '장공물'

장공물은 공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예전에 있던 돌들은 제자리에 설치해주겠지!!

‘장공물’의 이름은 옛 애월진 시절 ‘장군이 먹은 물‘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치수작업을 주도한 장익준의 이름을 따 ’장공(張公)물‘이라고 붙였다고도 한다.

‘장골물’은 두 물골을 한 곳으로 모이도록 했는데, 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마을남성들의

목욕탕이자 아이들의 놀이터 역할을 해왔다.

 

 김신현 치수공덕비’

용천수가 솟아 나오는 곳엔 마을주민들이 우물을 정비해준 고마움을 기려 ‘김신현 치수공덕비’를 세웠다.

1926년(大正15) 4월 건립된 이 치수비는 당시 애월리장인 박형순(朴亨淳)이 감리를 했고,

장익준이 건립했다고 돼있다.

 

하물 맞은편 근대식 주택

대지 323평인 이 집은 외견상 지상 1층 기와집이나, 당시 최고 건축기술로 지어진 신식 주택이었다고 한다.

주택의 평면과 외벽체는 제주민가의 3칸형을 따랐으나, 일식(日式) 건축물 구조로 이루어 졌다.

기둥과 보, 서까래는 전부 제재목을 섰는데, 일본에서 수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기 할만한 것은 지붕의 높이를 포함해 용마루의 높이가 매우 높다는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이 집은 김씨의 큰 아들이 사용하다, 1961년 현재 소유주인 김모씨(87)가 구입했다.

김씨는 일본에서 화물선을 탔는데, 당시 75만원을 주고 이 집을 사들여 매입 후 개축을 했으며,

그때 흙땅으로 된 부엌,욕실, 마루 등을 수리하고 집의 구조는 원래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대문입구에서 만난 젊은 안주인께 집 내부를 볼 수 있는지 문의 했으나 거부한다.

 

하물동쪽 김씨댁과 함께 1930년 9월 준공된 근대식 주택

마당을 가운두고 동쪽난 이문간(대문)을 중심으로 안거리는 남향, 밖거리는 북향이다.

 

하물공원 표석

 

바다와 연결되어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듬방'

하물일대는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와 고이는 낮은 바위들이 많아 '듬방'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일제감정기 1920년대부터 매립되면서, 지형과 포구의 형태가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애월포 일대의 매립은 1920년 시작되었으며, 1920년경 일본인에 의해 택지조성을 목적으로

공유수면 매축허가가 나고, 애월리 장모씨의 신청으로 1924년 10월 택지조성을 목적으로 한

매립허가를 내준 것이 기록이 있다고 한다.

 

 애월초등학교 정문 옆 애월진성(涯月鎭城) 모습

 

운동장 남쪽 복원된 애월진성 모습

 애월초등학교 북쪽 원형이 남아있는 애월진성 모습

현재는 애월초등학교 울타리로 변한 애월진성은 북쪽 일부만 남아 있고

서쪽과 남쪽은 일부 복원되어 있었다.

 

운동장 남쪽 복원된 애월진성 모습

 

원형이 남아있는 북쪽 애월진성 모습

 

 원형이 남아있는 회곽도(廻廓道)

 

 원형이 남아있는 총안(銃眼)

현재 바다와 접한 북쪽 성벽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미석(楣石)·총안(銃眼)·회곽도(廻廓道)·여장(女墻) 등이 남아 있다.

 

애월포에서 본 담쟁이덩굴이 감싸버린 애월진성 북서사면

애월진성(涯月鎭城)은 이원조의 '탐라지'에 따르면 애월진은 옛날 삼별초가 관군의 공격에

대비해 쌓은 나무로 구축한 목성(木城)을 그 시초로 보고 있다.

그 후 선조 14년(1581)에 목사 김태정이 석성으로 개축하면서 애월진성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애월성은 주위는 255보, 높이는 16척, 서·남쪽 양문에 초루가 있고 성내에는 객사와 군기고가 있었다고 한다.

또 성을 지키기 위한 조방장 1인과 진졸 2인, 방군 64명, 척후선 1척이 있었다.

그러나 이형상 목사가 1702년에 펴낸 '탐라순력도'에는 조방장을 비롯해

성정군(城丁軍) 245명이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애월진성 위에서 본 애월포 모습

애월초등학교 서쪽 입구에 위치한 우체국 일대도 매립되었는데 매립공사때 많은 석재가 필요했고,

애월진성의 성담을 투입되며 매립되어, 크게 훼손되어 초승달 모양이 원형을 잃어버렸다.

120여년 전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를 보면 애월포에는 '판옥전선이 1척, 비상양곡이 3석,

격군 118명, 사포 21명이 있다.'고 했다.

 

 애월초등학교 전경

 

작년에 준공한 애월초등학교 실내채육관

애월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애월리민 체육대회가 열리고 있고..

 

 새로 만들어진 도대불의 모습

애월포구는 군데군데 옛 포구의 모습이 남아있으나 원형을 그려보기가 어렵다.

애월포구의 한쪽에 예전의 모습을 복원한 도대불이 있는데, 해안도로 아래 있어서 찾기가 어려울 것 같다.

복원한 도대불앞에 있는 비문은 1930년대 세워진 도대불이 애월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사라지면서

2003년 11월 애월리와 애월항개발추진위원회가 다시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복원은 원형도 중요하지만, 위치도 중요하다고 본다.

 

애월항에 세워진 개항기념비

 애월항 북쪽해안은 수심이 깊어 항구로 1921년부터 작은 포구 부두역할을 했었다.

그 당시 일본 대판, 부산, 목포행 정기여객선이 취항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1971년부터 애월항 축항 제1차 공사가 착공되어 지금까지 여러차례 공사가 진행되었고 계속 확장중이다.

애월항은 1995년12월29일에 연안항으로 지정되었고,

방파제의 길이는 1Km 정도 동북쪽으로 있고 겨울철에 북서풍 파도를 막는 역할을 하고있다.

또한 500톤급 화물선 3척을 동시에 접안시킬 수 있으며, 화물선이 목포와 완도에 정기운항 하고 있다.

 

 애월항 2단계 개발사업 조감도와 안내문

 

고내봉 전망대에서 본 해월항 전경

  

 

애월리 “광제의원 건물‘ 1997년 6월 고영철 선생님께서 찍은 사진

 

현재 주차장으로 활용되는 광제의원 터 (애월리 1524번지)

광제의원(원장 장응삼, 1913~1945)은 1938년 에 한양방을 겸해 신축, 개원하여 비운에 나의에

사망하기 전까지 운영하였었다고 한다.

문화적 보존가치가 있었던 의원건물은 철거되었고 현재는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어 안타깝다.

 

광제의원 터 뒷쪽 세월이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주택!

 

애월리 ‘남당’(海神堂)은 마을의 북쪽 바닷가 방파제 서족에 있다.

애월마을 수호신을 모신 본향당(本鄕堂)으로 전에는 ‘남당’이라 하였는데 근래에는

신의 직능을 따라 해신당이라 부르고 해신이 마을의 수호신인 본향당신이 되어 있다.

 정방형으로 돌담울타리를 두르고 울타리 안 북쪽 벽에 ‘해신지위(海神之位)’라고

새긴 비석을 세워 신체(神體)로 삼고 있다. 이 비석 앞에 2단의 제단이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다.

 

서쪽 벽에는 ‘개당한집님’이라는 신을 모시는 제단이 만들어져 있다.

개당은 본래 마을의 동쪽에 따로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겨다 같이 모신 것이라고 하며,

신명은 해신지위(海神之位)라고 한자로 새겨 있지만, 심방(무당)은 ‘해신당한집’ 또는

‘남당하르바님’·‘남당할마님’이라 부른다고 한다.

 

애월리 배무숭이 소금밭 전경 

조성되었던 소금밭은 15개소로 구획되어지며 총 면적은 약 2,160㎡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지금은 양어장이 되어버린 길 건너편에 이것보다 작기는 하지만 같은 형태의 소금밭이 있었다고 한다.

 

구들장처럼 평평하게 다져만든 배무숭이 소금밭 흔적

조간대에는 낮은 돌담들이 울타리처럼 쌓았던 흔적과 평평하게 다져 만든 ‘구들장 같은 바닥’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돌들과 함께 ‘돌솥’, ‘수로‘ 등이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배무숭이 소금밭은 사리 때 들어오는 바닷물의 높이에 맞춰 바닥을 높이고, 밭담처럼 구역마다

돌담을 쌓고, 소금밭과 소금밭 사이에는 옴폭하게 바닷물을 가두어두는 물통을 만들고,

각각의 소금밭으로 연결되는 좁은 수로도 만들었다.

그 소금밭은 일일이 손으로 평평하게 구들장을 바닥을 고르게 다졌다.

그리고 그 틈을 작은 자갈로 메웠다. 그 위로 굵은 ‘조개모살을 펼쳐 깔았다.

파도에 소금밭이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소금밭의 바깥쪽에는 두텁게 돌담을 겹겹이 쌓아올렸다.

 

 자갈틈을 매웠던 굵은 ‘조개모살'

 

 평평하게 바닥을 고른다음 그 틈을 작은 자갈로 매꾸고 다시 그위에 굵은 조개모살을 깐다.

 

수로

 

이 돌은 ‘돌솥’사용됐었던 것 같고

 

솥을 고였던 돌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제주의 전통적인 소금제조 방법은 이런 곤물을 인공적으로 많이 만들어 가마에서 끓이는

자염(煮鹽)제조법이다.

배무숭이 소금밭에서 소금을 만드는 과정은 구들장 모양의 평평한 바닥에 ‘조개모살’을

깔고는 물통에 고인 바닷물을 길어다 모살에 지쳤다. 그리고 그 모살을 햇볕에 말리면서

고무래로 널고 뒤집기를 반복하며 물기가 증발하고 모래에 소금꽃이 하얗게 보이면

모살을 모아서 솥덕 위에 앉힌 판판한 돌에 올려놓고는 소금물을 살살 뿌려 소금기를 씻겨 내렸다.

이것을 허벅에 받아서 집에 가서 졸여 소금을 만들었다.

 

제주에서는 마을이 처한 환경에 따라 소금의 제조방식이 달랐는데,

여기 애월읍 배무숭이처럼 모래를 이용한 마을도 있는가 하면, 애월읍 구엄리나

제주시 어영마을처럼 암반을 이용한 마을도 있다.

또한 일과리와 동일1리 두 마을에 걸쳐 있는 날뤠소곰밧(밭)은 뻘밭형 소곰밧으로

제주도의 서부지역을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크고 소금 생산량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잊혀져가고 있는 이러한 소금밭을 복원하여 제주의 전통소금제조에 대한

체험을 누구나 경험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금을 만들려고 곤물(鹽水)을 물허벅에 져 날랐던 진올레

사람이 겨우 다닐 정도의 좁은 ‘진올레’는 소금을 만들려고 뙤약볕 아래서

아침부터 저녘까지 이 길을 곤물(鹽水)을 물허벅을 지고 날라 다녔으리라!

'진올레‘는 진창길에 짚신이 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녘을 촘촘히 돌로 박아 만든

길이란 뜻인 ‘진올레!‘ 진짜 이 길이 제주올레길이다.

 

올해 새로 만든 애월연대(涯月煙臺) 진입로

 

애월연대 동사면

동사면은 예전송악 덩굴이 자라면서 훼손이 심각하고 사면이 위험스러울 만치 불안하다.

애월연대(涯月煙臺)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3-17호 (1996.07.18 지정)

애월 연대는 애월리 ‘연디왓’이라 불리는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애월성에서 서쪽 500m 지점이다.

바닷가에서 450m 정도 떨어진 동산 위에 세워져 있는데, 제주도에 있는 여러 연대 가운데

비교적 큰 편에 속하며, 동쪽으로 남두 연대, 서쪽으로 귀덕 연대와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별장 6명과 봉군 12명이 배치되어 6교대로 24시간동안 해안선을 지켰다고 한다

 

애월연대 상부 모습

 

애월연대 위에서 보이는 애월마을과 고내봉 한라산 모습

 

오전에 답사했던 마을 중심에 있었던 광제의원 터와 고영철 선생님의 예전에 찍었던 광제의원

건물사진을 봐서 그런지! 뜻이 있는 '광제의원장 장응삼지석(光濟醫院長 張應三誌石)'

 

'광제의원장 장응삼지석(光濟醫院長 張應三誌石)'

광제의원 원장 장응삼은 지역에서 뿐 아니라 도?내외에 널리 의술이 알려지면서 멀리

목포지방까지 왕진을 가게 된다. 태평양 전쟁 말기라 목포엣에서 왕진을 마친후

제주로 돌아오는 길에 미군 이 오인으로 배가 폭격으로 배가 침몰되면서 33살이 나이에 비명횡사 하였다.

그를 추념하는 비라고 한다. 비석 뒷면에 그 내용이 새겨져 있다.

 

애월 환해장성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49-4호 (1998.01.07 지정)

현재 남아 있는 ‘애월 환해장성’ 성벽의 길이는 약 360m로 훼손사태가 심각하다.

애월 해안산책로는 남당부터 서쪽으로 한담산책로까지 이어지는 해안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특히 양식장 주변 환해장성이 훼손상태는 심각한 상태로 통로로 이용하기 위해 허물어 버린 곳이 많다.

 

애월해안로에서 본 환해장성

제주도에서는 해안선을 따라가며 쌓은 성을 환해장성이라 하는데, 현재 성벽이 남아있는 곳으로는

온평리, 행원리, 한동리, 동복리, 북촌리, 애월리, 고내리 등 14곳이 있다.

김상헌이 지은 『남사록』에는 환해장성을 일러 ‘탐라의 만리장성’이라 칭하고 있기도 하다.

 

 

예부터 한담은 멜(멸치)어장이 형성되는 유명한 곳으로 ‘애월코지’라고 불렸다고 한다.

한담 해변은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25여 가구가 소금을 제조하고 테우배를 타고

멜과 자리 많이 잡혔던 어촌마을이었다.

 

폐허가된 옛 주택

1980년대 전·후에 부동산 붐을 타고 땅값이 치솟자 이곳 주민들은 땅을 팔고 타 지역으로

이주하여 토박이는 2세대만이 남아있다.

이곳이 유명세가 타게 된 것은 탤런트 노주현씨가 별장용으로 집을 사면서부터 부동산 투기장으로 변해 버렸다.

지금은 팬션과 민박집 식당 등으로 탈바꿈 돼버렸다.

 

탤런트 노주현씨 별장

 

애월해안산책로에 들어선 팬션

 

 한담 애향동산에 세워진 제주세관자매결연기념비(濟州稅關姉妹結緣記念碑)

1970년대 지역사회 소통과 농어촌 지원을 위해  1사1촌 자매결연이 유행처럼 번졌을 때 세운 비로

자매결연은 많아도 자매결연비까지 세우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한담동과 세관이 자매결연을 맺은 때는 1971년 4월로 제주세관은 일부 형식적인 관계만을 맺었던

다른 기관과 달리 매년 4~5회씩 농촌 일손돕기를 진행했으며, 박봉을 털어 마을 안길을 포장하고 농기구 등을

전달하였고, 1974년 마을 주민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마을 입구에 자매결연비를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애향동산 듬돌(등돌)의 유래비

 

한담 애향동산에 있는 등돌

듬돌은 주로 마을 어귀에 놓여 있었는데, 이 듬돌을 들 수 있는지 없는지를 통해서 그 사람의 힘을 겨루었다.

그리고 품삯을 정할 때에도 이 듬돌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에 따라 달라졌었다고 한다.

 

시간까지 멈춰버린 한담포구 입구에는 낡고 허물어 져가는 '맬막(멸치그물막) 초가'

그물로 동여매고도 모자라 밧줄로 단단히 붙들어 매어 놓은 멸치그물막 초가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맬막은 지난 1920년대 애월읍 초대면장을 지낸 김도연씨가 2채를 지어 멸치잡이를 위한

그물보관과 멸치잡이 일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하다가 1채는 허물어 버렸고

이후 김모씨에게 팔아 현재는 약 100세 고령인 장모씨 소유로 돼 있는데

연세가 많아 애월에 살고 있는 아들이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한담해안길 전경

한담(漢潭)은 애월리 서쪽끝 마을로 모래사장과 노두(露頭), 돌담을 비롯한 해안가에 즐비한

기암괴석 등을 모두 만나는 곳으로 작지만 너무 훌륭한, 아름다운 비경이

또한 신비로운, 숨어있는 절경이라 할 수 있다.

제주시 애월과 곽지해수욕장 사이의 '한담'이라고 불리는 작은 해안 1.2km의 산책도로는

자동차는 다닐 수 없어 더욱 운치가 있고 특히 이곳의 석양은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길로

제주에 풍광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주도가 지켜야할 제주환경 100선에 올려있기도 하다.

 

가린돌(한담) 용드랑물

1970년까지 한담마을 주민들이 사용했던 ‘용드랑물’은 수량을 많이 감소했지만

지금도 투명한 물색이 바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한담공원에 세워진 장한철선생표해록비

 

 

해양문학의 백미로 알려진 ‘표해록’의 저자 장한철은 1744년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 한담에서 태어났다.

그는 1770년 향시에 수석 합격하고도 가난해서 한양에서 치러지는 회시에 응시하지 못하자,

마을 어른들과 3읍에서 노자를 마련해 줘 한양으로 떠난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풍랑을 만나 그가 탄 배는 난파당하고, 조류의 흐름에 몸을 맡겨 떠다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까지 다다른다. 거기서 중국 상선을 만나

청산도를 거쳐 제주에 돌아오게 되는데 그 생사 과정을 훗날 일기 형식으로 정리한 게 ‘표해록’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갖는 의의는 역사가 일천하고 작품 수가 적어 연구 성과물조차도 미미한

해양문학 분야에 대단히 가치 있는 자료로 인정되고 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적비가 그의 후손에 의해 2011년 한담공원에 세워졌고,

그가 살았던 한담의 생가 복원 사업도 애월읍을 중심으로 진행 중이라고 한다.

 

남당마을 남쪽에 위치한 애월리 포제당 모습

 

애월리 포제는 里祀之神과 ?神之位를 함께 모신다.

애월리 포제당 건물을 자세히 드려다 보면 독특한 방식으로 건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4개의 긴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있다.

최근에 보수를 하면서 돌기둥위에 목제로 높게 하고 기둥 높이와 맞게 낮게 ㄷ자 형태로

울타리를 지붕 높이까지 높게 쌓아 아름다운 건축미기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 답사지 과오름 북쪽기슭에 위치한 풍기진씨 진계백(秦季伯)의 묘

공만왕때 우참찬(贊成事:고려 문하부의 정2품부총리급)벼슬을 하던 진계백은 신돈을 추출한 후

권신들이 정쟁이 심하자 1371년(공민왕 20) 관직을 사임하고 에 가족과 노비 등과 함께

애월포로 들어와 입도하였다고 한다. 2년 후 목호의 난이 일어나자 최영장군이 제주에 들어와

원(몽고)세력을 토벌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 외가친족인 진계백을 직접 찾아가 송도로 함께

가길 권하였으나 혼란한 고려정권을 한탄하며 거부하자, 집을 지어주고 면포 7단과 군량으로

가져왔던 양곡 30석을 받아 그것으로 생활터전을 닦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내 고향 옆 동네라 많은 관심을 갖고 이번 답사에서 중학시절 애월포구 옆 바다에서 빠져 허우적대던

옛 추억과 잃어버린 주변 풍경들 또한 그 속에 남겨진 풍경들까지 하나하나 소중하게 담아본다.

20여 년이 훌쩍 지나버린 청소년 시절에 느꼈던 동네 풍경들 아침이슬을 맞고 더욱 선명한

푸른색으로 멀구슬나뭇잎 사이를 뛰어 다니던 청개구리도 눈에 그려본다.

높아진 가을 하늘과 시원해진 날씨 함께했던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풍요로워 지는 마을에 살고 싶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한담해안 길 : http://blog.daum.net/airport99/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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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10.18 23:49

    첫댓글 사람과의 관계가 더욱 풍요롭게 되었습니다. 멋진 사진과 설명 감사합니다.

  • 13.11.20 10:09

    禁葬 回洞人家百步之內는 禁葬 四洞人家百步之內로 고쳐야 할 것 같은데요~
    금장 네 개 마을 인가 백보지내, 또는 사방 마을 인가 백보지내로 해석해야 될 것 같은데요
    金信鉉 治水碑는 김신현의 자금을 기부하였다는 의미이고, 菖岩 士 朴亨淳 監은 號가 菖岩인 선비 박형순이 공사를 집행 감독하고 독려했다는 뜻입니다.
    菖岩의 학문 수준을 생각하면 당시 애월에서 가장 존경 받는 분으로 일제시대 이장을 지내지는 않았으리라 추정됩니다.
    당시 애월에서 가장 수준 높은 훈장이었습니다. 따라서 일제에 협력하는 이장은 아니지 않을까요?

  • 작성자 13.11.14 14:25

    감사합니다.
    블방에서 옮긴거라 수정이 안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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