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 백석 (1912∼1995)
접시 귀에 소기름이나 소뿔등잔에 아즈까리 기름을 켜는
마을에서는 겨울밤
개 짖는 소리가 반가웁다
이 무서운 밤을 아래웃방성 마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있어
개는 짖는다
낮배 어니메 치코에 꿩이라도 걸려서 山너머 국수집에
국수를 받으러 가는 사람이 있어서 개는 짖는다
김치 가재미선 동치미가 유별히 맛나게 익는 밤
국수 / 백석 (1912~1996)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룻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어느 하룻밤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베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재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기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 백석 시집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와>
* 멕이고: 활발히 움직이고
* 김치가재미: 북쪽 지역의 김치를 넣어 두는 창고, 헛간
* 양지귀: 햇살 바른 가장자리
* 은댕이: 언저리
* 예대가리밭: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 산멍에: 이무기의 평안도의 말
* 분틀: 국수 뽑아내는 틀
* 들쿠레한: 좀 달고 구수하고 시원한
* 큰마니: 할머니의 평안도의 말
* 집등색이: 짚등석, 짚이나 칡덩쿨로 짜서 만든 자리
* 댕추가루: 고추가루
* 탄수: 식초
* 삿방: 삿(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를 깐 방
* 아르궅: 아랫목
* 고담(枯淡): (글, 그림, 글씨, 인품 따위가) 속되지 아니하고
아취가 있음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 백석 (1912~1996)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
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
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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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자 소래섭 교수가 <백석의 맛>을 펴냈습니다.
백석(1912~1995) 시에는 유난히 음식이 많이 등장합니다.
시 100여 편에 무려 110여 가지 음식이 아릿한 시의
소재이자 시심의 매개체로 자리잡습니다.
저자는 백석 시를 매개로 음식에 관한 인문학적 상상력을
펼쳤습니다. 동아일보에 소개된 이 신간엔 백석의 가족
사진이 실려있습니다. 바로 1980년대 중반 北에서 찍은
가족사진입니다. 아마 백석 시인이 70대 중반 무렵으로
여겨집니다. 오른쪽 아래가 백석 시인이며 옆이 부인
이윤희 씨. 뒤는 둘째 아들 중축 씨와 막내딸.
분단 이후 백석의 시 세계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20세기 전반 조선반도 최고의 엘리트이자 모더니스트였던
선생은 우리민족 고유의 언어를 가장 풍부하게 구사한
최고의 시인입니다. 백석의 시편들은 향토성이 넘쳐났으나
단아했고 자유스러웠습니다. 얽매임이 없었고 인위적인
恨을 담지 않았습니다. 매우 현대적이었고 민족 자존감이
묻어났습니다. 1990년대 들어 한국 문단의 본격적인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시인 관련 정보를 자유롭게 공유한다면 그의
인생 후반기 문학적 발자취는 또다른 문학의 보고로
다가올 것 입니다. 70대의 노구이지만 꼿꼿한 풍모는
여전하십니다. 인민복에 손마디 굵은 두 주먹을 무릎 위에
얹고 온유한 낯빛으로 카메라를 주시하는 그의 시선은
지식인의 한 전형 그대로 입니다. 한때 이목구비 훤칠하고
'고흐의 보리밭' 같은 헤어스타일로 조선 최고 '모던보이'로
회자됐던 백석의 젊은 시절 모습이 중첩됩니다.
토속적 시심을 토착어에 가득 실어 밤하늘 은하수처럼
흐르던 그의 서정성. 북의 획일주의 문학 구도 속에서
여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고
애잔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