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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현 가라쓰3 - 나고야성터에서 백제 무령왕 출생지 가카라시마 섬을 바라보다!
11월 9일 사가(佐賀) 시에서 기차로 후쿠오카현 이토시마시 의 라이젠 센뇨지 절을
보고는 기차를 타고 니시 가라쓰역 에 도착하여 버스를 환승해 요부코항 呼子港
(호자항) 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는 나고야성 박물관 (名護屋城 博物館) 을 구경합니다.
나고야성 名護屋城 은 1592년 임진왜란 침략의 전진기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축성한
성이고 요부코항 呼子港 은 15만 왜군이 출항한 항구 이니 왜군의 모습과 조선 지도 및
부산진성 및 동래성 전투도 등이야 당연히 있어야 하겠지만 그 외에 눈길을 끄는게 있으니?
이순신 장군의 영정 과 거북선 및 화포, 조선 자기에 활자 인쇄, 유교 주자학,
사명당 스님 그리고 국보 반가사유상 모조품 과 백제관음 에 안중근 과
의병 그리고 부산포 왜관과 무역에 조선통신사 등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네요?
인류 5천년 세계사는 전쟁의 역사이니 이웃나라는 원수지간 인데 만일 양국 국력이 비슷하면
평화가 유지 되지만 차이가 벌어지면..... 물이 높은곳에서 낮은곳으로 흐르듯 침략 이
일어나니 백년 평화 가 드문데 유일하게 조선과 일본은 1603년 부터 1874년 까지 272년
동안 통신사를 보내며 장기간 선린 우호 를 지속했으니 세계 역사에서 보기 힘든 사례 입니다?
1868년 일본에서 조슈번과 시쓰마번 존왕양이론자 들이 무진전쟁 내란을 일으켜 도쿠가와
막부를 무느뜨리고 메이지 유신 을 이룩한 후 조선에 사신 을 보내왔으나 조선은 3백년
가까운 세월 선린우호를 다진 도쿠가와 막부의 명의 가 아님을 들어 일본 사신의 접수를
거부 하니 1875년 운양호가 강화도를 침범해 무력시위 를 하자 강화도 조약 을 맺게 됩니다.
대포 2문 을 장착한 운양호 는 초지진을 포격해 초토화 하고 영종진에 도착해 포격후 보트
2척에 22명의 육전대 를 상륙시키자 첨사 이민덕이 이끄는 450명 조선군 은
대포와 총을 쏘았으나 일본군 22명 육전대는 뻘밭에 상륙해 험준한 성벽을 기어오릅니다.,
조선군은 전사35명에 포로 16명 을 남기고 도주하는데 일본군은 대포 36문에 소총 130자루 를 노획
하니 전사자는 없고 경상자 2명 이라...... 강화도 민가에서 살륙과 약탈, 강간에 방화를 저지릅니다.
나고야 박물관 은 단순히 임진왜란 관련 자료만 전시하면 침략 전쟁을 미화 하게 될것이니
박물관 입구에 제주 돌하르방 과 천하대장군에 지하 여장군 을 세우고는..... 거북선과
반가상 및 조선 통신사 를 전시해서는 "한일 우호 평화박물관" 을 지향하고 싶은 것일러나?
박물관을 나오니 나고야성터 名護屋城跡 인데 왜구인 마츠우라당 (松浦堂) 의 성이던
것을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조선 침략 전진 기지 로 삼기 위해 확충한 성벽 입니다.
가토 기요마사 등이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 단죠마루 및 야마자토마루등 성곽과
망루 야구라들을 쌓았으며... 히데요시 를 위해 5층 칠탑 천수각 도 지었다고 합니다.
여기 나고야성 名護屋城 은 원래 나고야에치젠노카미 쓰네노부의 성 이었으니
그의 여동생 히로코 는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아 측실 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눈병 치료의 대가로 불상을 모신 것이 저 너머 광택사 의 시작이며 히데요시 사후에는
비구니가 되어 공양 했다는데 기요마사가 한반도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소철나무 가 있습니다.
1596년 8월 명의 사신 을 수행해 이 성에 왔던 조선 특사 황신 은 성을 둘러서 호 를
파고 물을 담았으며 돌을 쌓아 층계를 만들고 5층 누각 을 지었다고 기록했습니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백제가 망하고 복신 등의 부흥군 이 일어서자 백제 의자왕의 사촌 여동생(?) 인
사이메이 여왕(천황) 은 인질로 와 있던 왕자 풍에게 5천 군대 를 주어 한반도로 나가 백제 왕위
를 잇게 하고는, 아스카에서 후쿠오카로 임시수도를 옮기고 663년에는 1천척의 배에 2만 7천명 을
왜군을 보내는데 저 지원군으로 3만 2천 왜군을 출진시킨 곳은 인근인 츠쿠시(후쿠오카) 라고 합니다.
우리가 박물관을 나오니 대기하고 있던 택시 여기사 가 반색을 하며 하토마사키
波戶岬(파호갑) 전망대 에서 鉉海灘(현해탄) 바다 를 보지 않겠느냐고 묻네요?
거기 “ 戀人の 聖地 연인의 성지” 도 볼만하다지만.... 이미 해가 지고 있으니 우린
가라쓰(당진) 시내 를 보고 기차로 사가시 로 돌아가야 하니 시간이 없다며 거절합니다.
그러고는 잠시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무너진 성터 언덕길을 달려
올라가니.... 여기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베리 하드 플랜" 이라고 말하네요?
숨이 턱에 차서 언덕에 올라서는 바다에 떠있는 섬 을 살피는데 요부코항 呼子港
(호자항) 바로 앞에 육지에서 다리 가 놓인 큰 섬은 加部島(가부도) 이고.....
그 뒤편에 왼쪽으로 보이는 작은 섬 이 백제 25대 무령왕의
탄생지 인 가카라시마 加唐島 (가당도) 라고 합니다!
고구려 침공에 시달리던 461년 백제 개로왕 은 동생 곤지 에게 임신한 후궁 을 내어주며
일본으로 도피 시키는데 바다를 건너는 중에 후궁은 태기를 느껴 저기 보이는
가카라시마 동굴에서 왕자 를 출산하니 섬에서 태어났다고 섬왕, 시마(사마) 로 부릅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 이 백제의 수도 한성(서울) 을 침범해 개로왕을 죽이자
신라에서 구원병 1만을 빌려 이끌고 돌아온.... 아들 문주왕 이
남쪽 공주 에서 왕위에 오르나 2년만에 좌평 해구가 보낸 자객 에게 피살 됩니다.
그러자 왕위을 이어받은 13세 삼근왕 은 실세인 해구를 병관좌평 에 임명하는데
교만해진 "해구가 대두성에서 반란" 을 일으키자.... 왕은 진남과
진로등을 시켜 토벌하나 세력을 잡은 시절 "진씨" 세력들은 삼근왕을 시해 합니다.
이보다 2년 전인 477년에 16년 동안 이나 일본 오사카 동쪽 가와치 아스카에
머물다가 백제로 귀국한 개로왕의 차남 (일본 서기에는 동생?) 곤지 는
내신좌평으로 왕을 보좌 하고 있었는데 이때 역시 진씨 세력들에게 피살 됩니다.
곤지가 왜국에서 16년동안 오래 살다가 귀국할 때 장남 무령왕 을 대동했으나 진씨들은
궂이 번거롭게도 멀리 일본에 살고있는 곤지의 차남인 어린 동성을 왕 으로 세우는데
동성왕은 일본으로 피신했던 곤지가 일본에서 낳은 둘째 아들로 일본 땅에서 자랐습니다.
일본 유랴쿠왕 (천황)은 15살 소년 동성을 불러 머리를 쓰담으며 격려하니 동성은
규슈 쓰쿠시 (후쿠오카)에서 왜병 500명의 호위 를 받고 나와 백제 왕위에
오르는데, 해씨의 반란을 진압한 진씨 세력들 이 백제 왕위에 국내로 나와 있던
형인 무령 대신에 그 동생으로 나이가 어린데다가 왜국에서 태어나 살았던지라.....
국내 사정에 어두운 어린 동성왕 을 궂이 왜국에서 모셔와 옹립한건 조대비가 흥선 대원군
의 장자를 제쳐두고 12살 어린아이 고종 을 옹립한 것과 같은 이치로, 그 전에 순조가
죽자 조정이 강화도로 유배된 왕손의 후손으로 농사꾼인 철종 을 옹립한 것도 같은 이유라!
동성왕은 중국 요서 지방(?) 까지 진출해 북위 와 전쟁 을 하며 고구려를 견제 하는데
중국 역사서 남제서와 자치통감 및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488년~ 490년에 위나라를
격퇴한 기록 이 있으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역사학계도 난감한 모양 입니다?
동성왕은 중국 남제 황제에게 표문을 바쳐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
에게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하니 양자강 이북을 북위 에게 빼앗기고 양자강
이남의 건강(남경) 에 도읍한 남제 에서는 이를 허락하고는 동성왕의
충성이 가상하다며.....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에 봉합니다.
혹자는 서울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백제 가 바다 건너 중국을 지배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우니... 동성대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에 "큰 선박을 부순공..." 에 장군
들이 받은 직위가 국내의 지명 임에 비추어 중국이 아닌 고구려로 보는 견해 도 있습니다?
동성대왕 은 중국의 북위를 격퇴하고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군을 물리치며
신라 왕족인 이찬 비지의 딸을 왕비 로 맞이하고 지방 귀족
들인 사씨, 연씨, 백씨등을 등용하여 중앙귀족 해씨와 진씨를 견제 했으나...
501년 지방의 가림성주로 좌천 되었다고 생각한 지방 귀족 위사좌평이었던
가림성 성주 백가 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 됩니다! 그럼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3대 가 모두 국내의 반대파에게 연속해서 암살 된 것이지요!!!
그러자 곤지(개로왕?)의 아들 로 이부형 인 무령왕 이 백제 왕위에 오른후에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고 고구려 수곡성을 공격하는데 1145년에 김부식 삼국사기
에는 곤지는 개로왕의 차남 이고 무령왕 또한 동성왕의 아들 이라고 적혀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1145년의 삼국사기보다 425년이나 앞서 720년에 씌어진 일본서기 에는
곤지는 개로왕의 동생 이며 무령왕은 동성왕의 이부형 으로 나오니 어느 기록이
맞는가? 무령왕은 김부식 기록대로 동성왕의 아들이냐? 아님 일본서기 처럼 이부형이냐?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히 일본서기는 조작된 사실이 많으니 삼국사기가 맞다고 생각
했는데... 1971년 충남 공주시 에서 한국 고고학계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
일어납니다! 공주 송산리 고분 에서 벽돌 무덤을 발견했는데, 지석에는 글자
들이 새겨져 있었으니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이라!!!
사마 斯麻 는 백제 25대 무령왕의 본명 이고 영동대장군은 무령왕이 521년에 중국 양나라의 임금
무제로 부터 책봉받은 관직이라 무령왕의 무덤 이 확실한 것이며 날자등도 일본서기의
기록이 정확한 것입니다! 백제 성왕 이 신라를 치다가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전사한
내용등을 1145년에 편찬된 한국 삼국사기 와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 에서 서로 비교해 보면...
한국 : 1145년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의 백제본기 :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자 싸웠으나 복병에게 해침당하여 죽었다. 시호를 성(聖)이라고 하였다.”
한국 : 1145년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의 신라본기 : “가을 7월 명활성을 수리했다. 백제왕 명농
(성왕)이 가량(가야)과 함께 관산성(옥천)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
에 비장 삼년산군의 고우도도라는 사람이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네명과 군사 2만 9천6백명 의 목을 베니 한 마리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일본 : 720년 도네리친왕이 편찬한 일본서기 : 백제본기 보다는 신라본기가 좀더 상세 하지만 일본
서기는 좀더 자세하니 백제가 구원을 청해 저 전투에 병사를 보낸 전후 내용이 아주 상세하게
나오며, 그외 백제 멸망후 구원군 을 보낸 기록들을 보면..... “백제 주류성(周留城) 이 마침내
당에 항복하였다. 이 때에 국인(國人) 이 서로 말하길 주유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 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 ”
“겨울 662년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 에치노하타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 와 의논하기를 “ 주유(州柔) 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 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 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 (古連旦涇, 당진군 신평천) 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
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 ”
663년 8월 17일 주류성을 신라군이 포위했고 부여풍과 왜장들은 백촌강에서 집결해 싸웠지만 당나라
군의 화공으로 왜선이 불탄지라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했고 9월 7일 결국 주류성이 함락
됐으니... 호례성 (弖禮城· 전남 보성) 으로 가서 일본 장수들과 만나 어떻게 할지 의논하자.’
그리고 침복기성 (枕服岐城· 전남 강진) 에 있던 처자들에게 나라를 떠나가려 한다는 마음을 알렸다.”
“일본 수군과 함께 좌평 여자신,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와 국민들이 호례성 (弖禮城· 전남 보성)
에 이르렀고 배가 출항해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서기』 663년 9월 25일) 여러 전투 상황이 자세
하게 기록된건 사건이 벌어진 해가 554년~663년이니,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는 166년 내지 57년후
기록 인데비해 한국의 삼국사기는 1145년에 편찬되었으니 591년내지 482년이 지난 기록 이기 때문입니다?
부장품은 108종 2,906점 인데 현재 국보로 지정된 것만 12점에 달할 정도니 참으로 대단한
발굴이었는데... 무령왕릉 은 백제식이 아니라 벽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든 중국 양나라
식이었으며 무령왕과 왕비의 시신을 담은 관 은 "일본 남부에서만 자생하는 금송" 이라!!!
출토된 지석에 무령왕은 462년에 태어나서 40세가 되던 해인 501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523년 5월에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니 "일본서기의 기록과 일치" 합니다!
무령왕은 고구려를 공격하고 일본과 매우 친밀한 관계 를 형성하였으며...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제로 부터 “사지절도독 백제군사 영동대장군” 에 책봉 되었습니다.
한편 오사카 동쪽 아스카 주민들 은 서기 461년에 일본에 건너간 백제 개로왕의 동생 이자
동성, 무령왕의 부친 인 곤지왕의 제사 를 1,550 여년간 아스카베 신사 에서 지내왔습니다.
2011년 아스카 주민들은 자신들이 모시고 있는 곤지왕 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뿌리 를 찾으
려는 목적으로 방한해 남한산성 숭렬전 의 온조왕 위패 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니,
오사카의 양형은 박사 를 주축으로 “곤지 대왕” 소설을 쓴 정재수 작가 를 포함해
"곤지왕 네트워크" 가 형성되어 제2회 심포지엄에는 700명이 참가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령왕의 장남 순타태자의 8대손인 화을계의 딸 화신립 이 일본 간무왕(천황)
의 생모 라는 사실은 2001년에 아키히토 일왕(천황) 이 고백한 바도 있습니다.
"제50대 간무 천황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왕자 순타태자 의 직계 후손 인
화신립(和新笠) 황태후 입니다. 이 사실은 일본 왕실 역사책인 ‘속일본기’
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아키히토 일왕) 도 한국과 혈연 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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