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차 그리스도사상연구소 학술회의
(제1주제 발제)
‘사이’와 ‘차이’에 대한 감각,
동질성과 다양성은 종교 간(間) 대화에 어떤 의미인가?
목 차
I. 주제 설정
II. 종교의 위기이자 기회의 두 가지 표징들
1. 탐욕과 능력주의 신화에 갇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병폐
2. 기술과학주의를 지탱하는 물질환원주의와 과학적 무신론의 확장
III. 종교 간 대화, 간(間)-문화가 지닌 사이와 차이, 동질성과 다양성의 원리
1. 종교 간의 동질성과 보편성의 원리
2. 종교 간의 차이와 다양성
IV. 한국의 ‘종교 간 대화’, 위기인가 기회인가?
1. 보편적 인류애에 대한 공감과 수행을 통한 대화의 긍정성
2. 관점과 관심의 차이를 절대화하는 대화 능력 부재의 위기
V. 맺는말: 한국 신학 발전을 위한 종교 간 대화의 제언들
I. 주제 설정
‘종교’(宗敎, religion)는 유한하고 부조리한 인간의 원(原)체험에 대한 다의적 해석이다. 종교란 단어가 품고 있는 다양한 개념만큼 인류의 장구한 역사를 함께 한 인간 체험은 드물다. 대자연의 위대함과 숭고함 앞에 미소한 인간의 원시 체험에서부터 종교는 인간 부조리에 대한 신화적 상상력을 만들어 냈다. 서구 사상은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신(神)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신에 종속된 인간이란 중세의 신중심적 세계관을 통해 신앙 세계를 구축해냈지만,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신의 자리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주체적 실존으로 무장한 회의론과 무신론의 등장으로 자리를 잃어갔다. 20세기 양차 세계대전을 겪은 인류는 새로운 종교성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으나 21세기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서 과학적 사유에 토대를 둔 물질환원주의와 과학적 무신론의 위협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오늘날 종교는 한마디로 위기이다. 그러나 ‘종교’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종교가 위기일 수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유행처럼 퍼진 ‘영성’의 흐름이 제도화된 종교의 틀을 벗어나 현대인의 영적 갈망에 대한 새로운 종교성을 요청하고 있고, 인류의 심장을 겨누고 있는 자본주의의 병폐와 과학기술의 위협이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영적 충만함과 참된 인간성의 완성의 길이 무엇인지 묻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의 표징과 논쟁의 맥락에서 오늘날 종교 간 대화가 갖는 의미와 한계는 무엇인가? 필자는 ‘종교 간 대화’라는 주제어에서 주목할 수 있는 두 가지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는 종교들 사이에서 맺어진 동일성의 원리 혹은 보편성의 원리이고, 둘째는 종교들 간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다양성과 다의성의 원리이다. 이른바 ‘간’(間)이 갖는 함축적 의미 속에 종교들이 추구하는 인류의 보편적 진리와 선에 대한 동질성의 물음과 동시에 서로의 종교적 신념 사이에서 벌어지는 해석학적 ‘차이’와 ‘다름’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 소고에서는 ‘한국신학(K-신학) 발전을 위한 종교 간 대화’라는 심포지엄 주제에 한정하여 코로나 이후 한국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종교에 대한 무관심의 현상에 집중하고자 한다. 특별히 자본과 기술이 문명의 중심이 되는 가운데 경제적, 이념적 양극화가 심각해지는 한국 사회에서 종교의 위기를 일으키는 표징들이 무엇인지 언급한 후, 이를 극복하기 위한 종교들의 노력 속에 발생하는 ‘간(間)문화’를 사이와 차이, 동질성과 다양성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종교 간 대화가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가능 조건들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으로 주제를 한정해 보고자 한다.
II. 종교의 위기이자 기회의 두 가지 표징들
21세기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는 근대의 모더니즘(modernism)이 지닌 계몽된 이성과 진보에 대한 열정에 대한 회의를 통해 근대성을 계승하면서도(후기근대) 새로운 인간성에 대한 갈망(탈근대)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이 이성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감정, 상상력과 정서, 감수성과 열정과 더불어 산다는 점을 강조하고 인간 체험에서 감정의 인식적 의미, 내면의 차원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된 시대의 흐름은 종교에 대한 관심과 이해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인은 제도화된 기성 종교보다는 영성화된 개인 종교심에 깊은 매력을 느끼고 종교가 지닌 존재론적 관심보다는 기능과 효율에 입각한 자율과 치유에 몰입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미친 현대 사회의 두 가지 병리적 현상을 언급하고자 한다.
1. 탐욕과 능력주의 신화에 갇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병폐
20세기 인류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서로 결합되어 있음을 느끼고 과거의 무력 충돌과 배타적 갈등을 극복하며 공감과 친교, 연대를 추구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인류를 하나의 지구공동체로 묶어내는 문명 전환의 시대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화의 현상은 인간의 소유와 자본에 대한 근원적 욕망을 자본주의라는 경제이념이 세계를 거대한 경제 공동체로 묶어냈고, 효율과 능력을 중요시하는 자유시장경제의 논리가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원리가 종교의 본질에 대한 체험을 가로막는 두 가지 병폐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오늘날 자본주의가 이룩한 소유와 이익 증대 및 가치 창출이라는 문명 발전과 놀라운 경제 공동체의 긍정적인 효과만큼이나 인간 소유의 욕망이 자본주의 체제와 결합되면서 탐욕과 약탈이라는 형태로 진화되고 있는 병폐를 낳고 있다. 이른바 ‘약탈자본주의’ 혹은 ‘야수자본주의’의 뿌리가 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기득권 세력의 이권을 보장하고 약자에 대한 약탈이 극단화되어 심각한 양극화 현상으로 번지고 있다.
이미 20세기 중반 이러한 소유 방식의 자본주의가 지닌 문제점에 대해 예리하게 지적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에서 20세기 인류는 “무한한 생산, 절대적 자유, 무한한 행복의 삼위일체가 무한한 발전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핵을 형성”하여 현대인의 소유 양식에 바탕을 둔 욕망의 종교에 귀의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소유하는 생존 양식이란 “어떤 것을 가지고 나의 내부에 영원히 보관”하는 행위이며, 보다 많이 갖고자 하는 양적 욕망의 속성을 갖고 “탐욕은 소유 지향의 당연한 결과”임을 지적한다. 자본주의 문명이 인류에게 준 풍요로움의 뒷면에는 행복에 대한 현대인의 가치를 내적 평화와 자아실현이 아닌 “하나의 탐욕으로부터 다른 탐욕으로의 끊임없는 추이”이며, 인류가 겪고 있는 극단적 쾌락주의와 집단적 이기주의는 더 이상 현대인이 삶의 영적 가치와 종교적인 충만한 삶에 대한 욕구보다 신체적 생존에 필요한 것을 우선시하고, 인간 영혼의 승화와 변용보다는 오히려 경제적 사회적 변혁에 필요한 인간 마음의 잘못된 변혁을 강요하는 모순을 낳고 있는 셈이다.
둘째는, 능력주의의 신화가 가져온 자유시장경제의 모순이 종교인에게 자아 성취의 의미를 세속적 가치로 둔갑시킨다는 점이다. 마이클 샌델(Michael Joseph Sandel)은 공리주의의 오랜 정식이 수치와 계량화할 수 없는 인간 생명의 가치를 수량화하고,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인 가치로서의 행복을 이득이라는 개념으로 일원화하는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문제는 종교적 윤리가 강조하는 ‘선’(善) 혹은 ‘옳음’의 정의는 욕구를 충족하는 ‘좋음’의 선호의 범주로 둔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숭고함과 덕의 가치가 사라지고 이윤추구가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는 문제는 종교인에게 신성함과 거룩함이라는 고유한 체험의 영역을 박탈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런 탐욕과 능력주의 시대를 마주한 종교 역시 인간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실존적 물음과 희망의 결단을 향한 인격적 신뢰가 아닌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우상으로 변질될 수 있는 유혹을 받고 있다. 미국의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는 그의 저서 신이 된 시장(The Market as God)에서 오늘날 일종의 ‘유사 종교’(ersatz religion)의 형태로 곧 ‘시장신(The Market as God)’을 새로운 신으로 숭배하는 ‘시장경제’가 종교로 둔갑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 바 있다. 종교의 세속화는 현대 사회의 강력한 시장 경제가 만들어낸 이단적 현상이며, 전통적인 종교적 가치들은 자본주의 시장의 상품의 효용성의 기준에 맞게 평가되어 ‘탈신성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종교의 전유물로 여겨진 인간의 영적 위로와 은총의 체험마저도 심리학자와 과학자의 영역에 자리를 내놓아야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비판하였다.
2. 기술과학주의를 지탱하는 물질환원주의와 과학적 무신론의 확장
19세기 이후 근대의 과학혁명이 이루어 놓은 기술 사고로의 전환은 진보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진리가 더 이상 존재의 진리도, 인간이 겪은 사실들의 정리도 아닌, “세계 변혁의 진리요, 세계 형성의 진리, 즉 미래와 행동에 관련된 진리”로 바뀌고 있다. 21세기는 한마디로 기술과학의 시대이다.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은 기술 과학에 대한 신뢰가 모든 가치의 판단기준이 되는 과학주의를 지향한다. 과학주의란 “과학이 탐구자와 전혀 독립된 사실들을 다루고, 경험적-분석적 방법만이 유일한 지식 획득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거나, 이 방법은 인식 활동의 모든 영역에 확대되어야만 하고, 이러한 방법을 통해 얻어진 결과만이 진정한 형태의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을 뜻한다. 과학적 지식은 “더이상 존재의 법칙들의 본질이 아니라 현상의 법칙의 본질”에만 관심을 갖는다. 근대 이후 존재의 본질에 대한 무관심, 곧 형이상학의 몰락으로 인해 현상(現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존재자들의 유용성과 효용 가치에 대한 지식적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존재가 추구하는 궁극적 관심이나 목적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사상적 발전은 신학적 진술들의 신빙성이나 효용성을 폄하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학주의는 초역사적, 중성적 체계이며 과학의 탐구 대상에 대한 역사적 상황 제약성에도 불구하고 기술과학이 참된 인식을 획득하는 유일한 양식이라고 보려고 한다. 과학주의가 종교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하는 원리는 물질환원주의에 근거한 과학적 무신론이다. 생명공학과 인공지능 기술개발은 이른바 ‘신경과학만능주의’를 낳고 있다. 이는 인간을 매우 복잡한 인공물로 간주하면서 인간의 근본 선택이자 고유한 능력으로서의 자유의지는 물론 인간의 모든 행동, 사고, 실수, 움직임까지도 생화학적인 상호 작용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신경과학적 일원론으로 드러난다. 곧 인간이 측정 가능하고 질량으로 평가할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며 그 귀결은 인간이라는 신비체가 지닌 비밀을 해체하여 심리적 행위를 대뇌에서 이루어진 정보처리로 여길 뿐, 영혼은 배제되며 모든 심리적인 삶은 물질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유물론적 입장이다.
이러한 과학적 유물론은 전통적인 창조론과는 대비된 ‘창발론(創發, Emergentism)’에 근거한다. 이는 “생명은 비생명에서 창발되며 동물적인 생명은 식물적인 생명에서 창발되고 이성적 생명은 동물적 생명에서 창발”된다는 것이다. “사고, 감정, 윤리의 경험, 미적 경험, 종교적 경험은 모두 유기적 생명 안에 그 궁극의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그 결과 인간에게 영적 차원과 심령적 차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되어 인간 세계의 영적인 모든 것은 물질의 복합성에서 오는 우발적 현상으로 간주된다고 하여 이를 유물론적 일원론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유발 하라리는 불완전한 인간 본성의 일부로 치부해버린 ‘기아, 역병, 전쟁’을 21세기 인류는 상당 부분은 이미 극복했으며,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가치를 고려할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종교심의 뿌리가 되는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죽음은 “의미가 폭발하는 신성한 형이상학적 경험”이 아니라,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해야만 하는 기술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과학적 유물론의 흐름은 오늘날 인공지능의 기술 발전으로 이어져 인간 강화(Human enhancement)를 통해 인간 한계를 극복하려는 트랜스 휴머니즘(transhumanism)과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한계인 노화와 고통을 극복하고, 지금까지 인류가 쌓은 모든 지식의 총합을 뛰어넘는 신인류, 곧 포스트휴먼(posthuman)이 탄생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고백하는 ‘하느님의 모상성’에 대한 도전하는 ‘바벨탑의 교만’이자 모든 종교가 인정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불완전성과 궁극적 진리를 향한 초월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
III. 종교 간 대화, 간(間)-문화가 지닌 사이와 차이, 동질성과 다양성의 원리
20세기 세계화의 시대에 종교는 매우 중요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개신교의 부흥운동, 이슬람교의 높아진 위세, 가톨릭교회의 활발한 교세 확장 등이 이루어졌지만 오늘날 종교가 처한 현실은 녹록지 않다. 종교 간 갈등의 요소는 더 많아졌고 서로를 이해하고 수용하기에 장애들도 많아졌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종교는 어느 시기보다 세계 평화에 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우리와 신앙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그들도 우리 못지않게 훌륭하고 흠이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려고 각각의 종교 나름대로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 간 대화’란 말 그대로 종교들 상호 간의 유사성과 동질성을 찾는 사이(間)에 대한 관심이고, 종교가 위기를 맞고 있는 현실 인식 속에서 각자의 종교의 본질과 인간의 보편적 종교심의 해명을 통해 종교의 당위성을 공감하려는 노력이다. 종교는 인간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보편적 진리와 동질성의 원리를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종교는 종교적 희망과 삶의 원리에 대한 해석과 주장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차이(間)를 갖고 있다. ‘차이’는 때로 ‘틀림’ 혹은 ‘오류’로 해석되어 투쟁과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차이를 ‘다름’으로, 다양성을 품은 고유성 혹은 다름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다중심주의로 해석될 여지는 없는가? 과연 종교가 선포하는 보편적이며 동일한 불변의 진리와 종교들이 주장하는 이념과 해석의 차이를 통해 드러나는 다름과 다양성은 종교 간 대화에 어떤 의미일까?
1. 종교 간의 동질성과 보편성의 원리
21세기는 세계화로 인한 지구촌 문명이 발전하고 동서양의 문명에 대한 충돌과 비교를 넘어 공동의 미래를 위한 인문학적 담론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은 20세기 중반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경험한 이후 냉전 시대를 거쳐 인류가 더 이상 무력 충돌과 배타적 갈등의 시대를 넘어 대화와 친교, 공감과 연대를 추구하는 새로운 ‘공감의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인류는 인종과 민족, 국가와 대륙을 넘어 하나의 지구촌으로 결합 되었고, 급속히 발전한 IT산업과 인터넷 문명은 인류를 하나의 지구공동체로 묶어내는 힘이 되고 있다.
근대 계몽주의 이후 종교 비판이 거세지면서 근대주의가 합리성의 잣대로 종교의 자리를 빼앗아갈 때 근대 종교학의 선구자들은 종교의 본질을 새롭게 찾아냈다.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의 본질을 신화적 상상력 속에서 찾아낸 종교학자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속됨(俗) 안에서 거룩함(聖)을 찾아가는 원초적 체험이 종교의 본질임을 말하였고 일찍이 ‘성스러움’(聖)을 종교의 본질로 간파한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합리성으로 무장된 근대의 무신론에 맞서 종교를 “개념적 사유로 잡히지 않으나 감정에는 주어지는 비합리적 감정”(das numinos Gefuhl)이며, 초월적 대상에 대한 매혹(Hascnaus)과 두려움(Tremendum) 속에서 ‘성스러움’의 체험을 종교 체험의 본질로 파악하였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종교의 중요 요소들은 신심의 기초인 감정, 직관 경험이며 “무한함에 대한 감각과 취향”이라고 강조하면서 종교를 ‘절대의존의 감정’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한 마디로 이들은 종교의 본질이 초월적 존재를 마주한 성스러움의 체험이자 ‘하느님-神’ 앞에 선 인간이 지닌 피조물로서의 직관적 감정이자 진리를 향한 태도임을 밝힌 것이다.
이렇듯 개별 종교들의 역사성을 포괄하는 보편성 혹은 동질성의 원리는 21세기 기능과 효율에 맞춰진 시장경제원리와 과학주의 이념으로 무장된 유물론적 환원주의에 대한 종교의 자기 변론과도 같았다. 종교들은 더 이상 역사 속에서 갈등과 투쟁의 원인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이상을 실현해야 할 역사적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물질적 풍요라는 망상에 따른 영혼의 빈곤감과 과학적 유물론의 확산이라는 엄청난 변화에 직면해서 불안을 느끼는 현대인들은 불변하며 심리적 안정과 확신을 심어주는 보편적이고 동질성의 원천인 종교로 귀의하기도 한다.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전통적으로 유지해온 ‘교회 밖의 구원 문제’에 대하여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천명하며 그들과의 대화의 문을 열었다.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선언』(Nostra Aetage)에서는 인류가 공통적으로 고민해온 문제들, 곧 인생의 의미와 목적, 선과 죄, 고통과 참 행복, 죽음과 심판과 보상, 삶을 감싸고 있는 궁극의 신비 등을 언급하였다. 종교는 전통적으로 해왔던 역할, 곧 다른 어떤 이론체계도 대신할 수 없는 물음들, 우리는 누구이며 왜 존재하는지, 우주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위치나 우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들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계몽주의 이후 무엇과 어떻게는 말해주지만 왜는 알려주지 않는, 한마디로 포괄적인 철학의 역할을 상실한 과학과 경제학과 정치 이데올로기의 빈공간을 종교가 채울 수 있다고 여겨졌다. 종교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종교의 보편성은 현상 뒤에 숨어 있는 인간 본연의 물음에 거주하고, 수많은 현상적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다른 것을 묶어 주는 초월에로 인간을 초대한다. 종교는 “여전히 삶에 의미를 주는 가치와 미덕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후기 서양 문화 바깥에 존재하면서 그것과 대척을 이루는 중요한 영역에 남아 있다. 선의 이상을 구현하는 것, 기도와 의식, 감동적인 이야기와 집단적인 봉헌을 통해 선의 이상을 살아 있는 실체로 만든다.”
이러한 점은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동질한 가치와 목표이며 오늘날 자본주의의 병폐와 과학지상주의로 인해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대한 대안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현대인은 능력주의 신화에 시달리고 긍정성의 과잉에 의해 소진되는 ‘피로사회’를 겪고 있다. 인간은 행위의 주역이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공의회를 통하여 가톨릭교회가 타종교에 대한 전향적 태도를 보여준 또 다른 예는 유대교를 비롯하여 세계 종교들이 지닌 “옳고 거룩한 것”에 대한 존중이며,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참 진리의 빛’과 “정신적 도덕적 자산과 사회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증진”하도록 촉구한 점이다. 그리스도교와 정신적 공동 유산을 지닌 유대교는 하느님의 모상성에 입각하여 보편적 형제애를 함께 찾을 수 있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무슬림의 도덕 생활과 기도와 자선, 단식의 종교적 수행을 높이 평가하였다. 동양의 종교들에 관해서도 그리스도교와 공감할 수 있는 종교적 금욕과 명상, 세상의 근본적 불완전성에 대한 긍정,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적 노력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개별 종교들이 지닌 고유한 세계관과 인간 완성의 길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동질성의 원리를 찾으려는 노력은 21세기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무신론적 경향에 맞서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의 본질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종교들이 추구하는 보편적 이상은 21세기 병리적 현상으로 드러난 이기적 탐욕과 유물론적 무신론에 맞서 이루고자 하는 상호 존중과 비폭력적인 갈등 해결 방식, 지구의 미래에 대한 공동책임, 가난한 자를 외면하지 않고 환경 보호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들이다. 이러한 도덕성의 회복이야말로 인간 존재가 떠안아야 하는 “운명을 인간화하려는 문명의 가장 위대한 시도”라는 적절한 지적이 될 수 있다.
개별 종교들이 자본주의의 망령에 흔들리고 물질환원주의에 타협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우상숭배에 맞서 종교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하느님을 만든 게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들었다는 명제”를 기억하는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역사 속의 종교가 지닌 특수성이 때로 불완전함과 오류와 편협과 편견의 원천이 되었기에 오늘날 종교들은 “추상적이고 시간을 초월하며 보편적이고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진리를 추구하는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 종교 간 대화의 물꼬를 트게 된 것이다. 더욱이 정치와 경제의 효율적 계약을 통해 오직 경쟁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종교만이 도덕적 이상을 품고 자기를 통제하며, 사랑과 애정과 헌신은 물론, 자선과 협동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창조적 이성을 지켜내는 호혜적 삶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 종교 간의 차이와 다양성
보편성을 찾는 종교간 대화의 다른 차원은 종교 간의 ‘다름’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 다름은 고유성이자 정체성이며 다양성의 관점이다. 인류는 다름의 삶 속에서 변하지 않는 동일하고 불변의 진리를 찾는 여정이었다.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부터 인간 조건의 본질에 관한 진리는 오직 하나이며 그 진리가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 대해 참이라고 주장해온 서양의 철학사에서는 물론 유대교의 히브리적 신관에서 유래한 계시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세상의 모든 원리를 인과율의 법칙과 선과 악, 현세와 내세의 이분법으로 규정해온 종교의 역사에서도 이어져왔다.
그러나 포스트모너니즘을 지탱하고 있는 현대 사상의 근저에는 동질성이 아닌 차이에 대한 관심이 있다. 현실은 ‘차이’의 세계이며 개념은 추상일 뿐이다. 이전에는 예술을 비롯해 철학이나 종교, 정치, 심지어 교육에서마저도 불변하는 어떤 것, 즉 추상적인 개념의 중요성만을 강조했지만 차이란 바로 개념의 폭력에 의해서 감춰진 현실 세계의 모습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프랑스 현대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Difference et Repetition), 1968년』에서 추상적인 개념에 의해서 억압된 차이의 논리를 회복함으로써 우리가 현실에 한 발짝 더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지평을 열고자 하는 시도한 바 있다.
그리스도교 사상을 떠받치고 있는 서구 사상의 핵심에는 ‘존재의 원리’인 있음(有) 그 자체에 대한 물음에서 신(神)을 존재의 근원이자 목표로, 계몽주의 이후에는 주체 곧 자아에 대한 물음으로 보편성의 진리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동일한 반복이라고 주장해온 보편적 가치들은 차이의 생산이며 일상적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반복은 차이를 만들며 동일한 반복은 없다는 점은 명확하다. 인류를 지배해온 제국주의, 전체주의와 근본주의는 다수성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하나의 체제를 강요하려는 시도였고 인간들을 일반 인간으로, 문화들을 단일한 문화로 환원시키고 하나의 사회정치적 질서의 이름으로 다양성을 제거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이 일어났다. 이러한 비판은 차이를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바라보게 하고, 보편주의가 오히려 타자의 고유성을 용인하지 않는 불관용의 원천이라는 지적을 낳았다.
가톨릭교회는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하며 모든 종교 안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음을 강조해왔다. 비그리스도인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칼 라너)으로 받아들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에서는 교회 밖의 구원 가능성에 대한 신학적 해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가톨릭의 보편성의 원리가 포용과 관용으로 해석되지만, 때로는 숨겨진 승리주의나 정복주의라는 비난도 없지 않다. 타자의 다름을 결국 우리의 정체성으로 희석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기억할 점은 창세기 이야기 속에서 “하느님은 인류 전체의 하느님이지만, 바벨탑과 최후의 날 사이에서는 어떤 하나의 신앙도 인류 전체의 신앙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자아’와 ‘타자’의 주종적 관계를 해체하고 타자성을 용인하는 사상적 흐름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차이’에 주목하는 신학은 묻는다. 특정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듯이 타자 안
에서 하느님의 모상성을 볼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종교 간 대화란 엄밀히 말해서 자신의 이해와 체험 지평이 타자의 체험과 이해 지평과 만나 지평 확대와 동시에 지평 융합의 과정을 거치는 해석학적 순환에 대한 진실한 고백이다. 그리스도교가 구원과 영생의 종교적 관심을 그리스도교의 교리 개념과 역사적 전승의 우월성에 두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교들이 가르치고 전승해온 그들의 독특한 가르침의 맥락과 타자성을 인정할 때, 곧 전체성과 동일성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개별 종교들이 주장하는 가르침에 담긴 지혜와 인간 본연의 면모를 찾아낼 때 진정한 종교 간 대화는 상호주관적인 진리 탐구의 여정이 되는 것이다.
종교 간 ‘차이’에 주목하는 이유는 어떤 종교든 자신들의 주장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진리의 상대성과도 관련이 있다. 진리는 사물과 사유의 일치라는 전통적인 개념과는 달리 진리는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성 순환되는 것이라는 관점도 있다. 역사적 실존으로서 인간은 절대 진리를 소유할 수 없으며 단지 포착되는 대상의 차이 속에서 절대 진리로 ‘함께 더 깊이’ 다가서는 여정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 간 대화에 있어서 그리스도교가 오랫동안 견지해온 그리스도교 중심주의와 우월의식은 오늘날 탈그리스도교와 탈서구화란 흐름 속에서 위기를 맡고 있다. 폴 니터( Paul Knitter)와 존 힉(John Hick)으로 대변되는 사상, 곧 모든 종교는 하나의 진리의 다양한 표현일 뿐이라는 이른바 진리의 상대성이 강조되거나, 교리의 개념과 진리 주장보다 구원과 실천 중심의 종교성에 집중하는 종교 다원주의 신학이 등장하였다. 또한 특정 종교의 중심을 해체하여 개별 종교들의 타자성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보려는 새로운 해석학적 연구도 주목받고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절대 종교, 절대 계시 진리에 대한 자기주장을 철회한 적이 없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개념적 절대성은 신앙 고백의 관점에서 어떤 형태로든 상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이란 개념에 갇히지 않는 ‘하느님’, “나는 있는 나다”(출애 3,14)로 인간의 소유물이 될 수 없는 하느님은 “이름 없는 하느님”, 형언할 수 없는 절대 신비이신 하느님으로서 인간에게는 자신을 감추시지만 인간을 ‘거룩함’으로 초대하시는 분으로 고백된다.
개별적 자아와 고유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차이에 대한 강조는 거부할 수 없는 차이의 실재를 획일성과 동일성으로 축소시키거나 “차이 그 자체”(질 들뢰즈)가 지닌 생성과 창조적 힘을 도덕적 법칙과 집단의식에 함몰 시키려는 시도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종교 간 대화에서 종교들 간의 ‘차이’는 서로의 다름을 비교하여 일반화하거나 자기 종교의 이해 지평으로 수렴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각 종교의 고유한 종교 체험이 개념화되면서 발생한 맹목적 믿음과 인과율에 의거한 전통적인 도덕법칙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움과 이질성에 대한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이해 지평을 이끌어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유대-그리스도교 사상이 강조해온 유일신 신앙이란, “하느님의 유일성은 다양하게 숭배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종교 간 대화는 다름에서 드러나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개방성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지닌 진부하고 획일화된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나와는 다른 타자를 만나 자기를 객관화하고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우발성’의 체험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감춰진 사물의 고유한 내재성, 즉 차이를 찾아내고 그 차이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종교 간 대화에서 얻는 차이에 대한 존중은 인간이 “매일매일 인간이 되어”가는 자기완성에로의 지향성을 지닌 존재이며 그것이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하느님의 모상성을 타자 안에서 발견하는 길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IV. 한국의 ‘종교 간 대화’, 위기인가 기회인가?
필자는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펼쳐진 종교 간 대화의 두 가지 흐름들, 곧 상호 이해와 공동선을 위한 종교 간의 실천적 교류와, 종교 간 상호 이해와 보편적 진리 추구를 위한 학술적 대화의 역사와 과정을 연구 발표한 바 있다. 이른바 ‘이웃종교’로 불리는 한국 내의 타종교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선교의 대상으로 볼 것인지 진리 추구의 동반자로 볼 것인지 물었다. 그리고 종교 간 대화가 대화의 본질에 충실하려면 통교적 실존으로서 인간의 대화의 방식을 따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대화란 ‘너’를 말하는 사람이 온 존재를 기울여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무엇’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관계에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 간 대화에서도 대화에 임하는 개별 종교가 상대를 주체적 타자로 받아들이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동시에 종교의 본질에 속하는 인간구원에 대한 물음의 여정에 동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는 서구의 이념 논쟁에서 발생한 종교 간 갈등이나 투쟁의 역사가 거시적 차원에서 발생한 적은 없다. 물론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여 힘의 논리가 대화를 지배할 때 종교들 간에 유사성이나 공통점보다는 사소한 차이가 엄청난 갈등과 분열의 씨앗이 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종교의 교리적 논쟁과는 달리 한국의 주류 종교들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예언자적 성찰과 인류애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 인간구원에 대한 공동의 관심을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가톨릭교회가 공의회 이후 ‘신앙의 토착화’와 ‘문화의 복음화’의 관점을 ‘선교’의 개념으로 확장한 후 타종교를 선교의 대상이 아닌 진리를 찾아가는 동반자로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종교 간 대화는 시대의 표징을 함께 탐구하고 해석하는 기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종교를 인간 욕망의 도구로 폄하하는 이들에 의해 대화 자체가 의미 없는 위기가 될 것인가?
1. 보편적 인류애에 대한 공감과 수행을 통한 대화의 긍정성
한국의 종교들의 만남과 대화는 수행의 전통에서 사회의 공공선을 위한 보편적 인류애에 대한 공감과 실천이다. 한국인의 종교심의 뿌리에는 ‘한’(恨) 맺힘을 풀어내는 한국 무(巫)의 샤머니즘 전통이 자리 잡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희생양이 되어온 수난의 역사가 말해주듯 한국인의 정서에 뿌리 박힌 민초들의 한(恨) 맺힘, 권력과 지배 세력들에 의해 당해온 수탈과 억울한 희생의 반복은 시대를 관통하여 오늘날 한국 사회 전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종교들은 종교가 지닌 고유한 교리체계나 윤리지침들에 앞서 인간의 고통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먼저 던져왔다. 한국의 무교 전통은 한 맺힌 인간의 아픔을 굿 정신을 통하여 공동체와 함께 풀어내어 집단적 화해와 조화의 구원 체험을 이루었다. 한국 무의 전통은 불교가 자기해탈의 무아(無我)의 정신을 고통받는 민중들을 향한 대승적 보살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유교의 공맹사상은 인간 삶의 무질서와 부조화를 하늘(天)의 이치에 따라 살아가는 성인군자의 삶으로 가르쳤고,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을 통한 하느님 사랑과 구원과 영생의 언약을 민중들에게 실천적으로 드러내었다. 한국의 자생종교인 원불교와 민족종교들은 개벽사상을 통하여 물질 개벽에 이은 정신 개벽을 통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정신 수행을 통한 세상의 변혁을 꿈꿔왔다.
이렇듯 한국의 종교들이 서구의 사상논쟁이나 교리해석의 차이로 인한 종교 갈등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정교(正敎, orthodoxy)보다는 정행(正行, orthopraxis)을 종교인의 바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물론 불교나 그리스도교가 유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당쟁의 희생양으로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겪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여 힘의 논리에 지배되었을 때 발생한 것이지 민중들의 종교심의 뿌리에서 보편적 인류애를 향한 수행의 가치가 폄하된 적은 없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한국의 7대 종단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추진되고 있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를 통한 종교 간 대화는 한국 종교인의 실천적 수행들에 집중되고 있다. 가령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사회 문제들, 곧 정의평화, 생태환경, 사회복지 등의 영역에서 각 종교들은 종교의 보편적 본질에 속하는 인류애의 숭고함, 창조 질서의 보전, 복음적 가치의 공동체적 실천 등에 다양한 협력과 활동을 증진하는 것이 한국의 종교 간 대화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보편적 인류애와 공공선, 도덕적 이상을 실천하기 위한 종교의 사회적 기능은 종교 간 대화에서 한국인의 보편적 공감능력을 성장시키는 긍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종교 간 대화의 긍정적인 가치는 종교인들 간의 다양한 형태의 대화 모임과 학술 종교인들의 학문적 대화에서 나타난다. 최근 사회적 대화의 흐름은 하나의 영역에 고립되지 않고 경계를 너머 상호 융합(convergence)하거나 통섭(consilience) 등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종교인들의 만남이 늘어가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고유한 종교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종교적 가치와 유산을 열린 토론의 장에서 나누는 대화 모임과 만담(talk) 등에 참여한다. 이러한 흐름은 2006년에 시작된 유튜브(YouTube)라는 미디어 플랫폼을 통하여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벼운 주제들을 종교인들끼리 모여 이야기하며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늘었고, 코로나(COVID-19) 팬데믹의 영향으로 온라인 플랫폼이 확장되면서 종교인들의 다양한 대중 강연과 대화의 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도 종교 간의 상호 이해에 도움을 주었다.
종교 학술인들의 만남은 주로 종단에 소속된 대학 교수나 종교학 관련 연구를 하는 종교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종교대화 씨튼연구원』(1993년 창립)을 꼽을 수 있다. 씨튼 연구원은 정기 모임을 통한 공동의 주제 연구세미나와 심포지엄 개최, 이웃 종교를 이해하기 위한 종교강좌개설과 이웃 종교 체험 행사 등을 통해 본격적인 의미에서 종교인들 간의 학술적 대화와 체험적 대화를 병행하는 사례로 꼽힌다. 정기 모임에서는 종교인이라면 함께 고민해야 할 시대의 키워드를 담은 책을 선정하여 함께 연구 발표하며 주제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서로 다른 종교 전통을 이해하고 의식의 지평을 넓히는 기회로 삼고 있다.
2. 관점과 관심의 차이를 절대화하는 대화 능력 부재의 위기
한국 사회의 종교 간 대화가 언제나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한국종교인평화회의』에 소속된 회원 종단에 천주교와 개신교가 같은 그리스도교로서 분리되어 참여하다보니 한국 사회에 ‘기독교’와 ‘천주교’라는 명칭에서 마치 서로 다른 종교인 것처럼 분류되는 오해를 낳기도 한다. 또한 『한국종교인평화회의』에 소속된 한국 개신교는 에큐메니칼 운동(그리스도인 일치운동)에 동참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1924년 창립/1970년 개칭)의 대표가 참여하지만, 정부가 종단 수장들과의 대화 통로로 활용하는 『종교인지도자협의회』(1997년 창립)에는 보수적 성향이 강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1989년 창립)의 대표가 참여하여 서로 결이 다른 종교 간 대화기구가 양립하는 모순을 겪고 있다.
한국의 종교 간 대화를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종무실과의 불협화음도 없지 않다. 종무실은 각 종단의 활동을 지원하며 종교 교류 및 협력을 통해 종교 간 화합에 기여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종단 수장들 간의 친교와 화합을 위하여 ‘종교지도자해외순례’ 등을 재정 지원하고, 각 종단의 주요 사업들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왔다. 그러나 각 종단에서 추진하는 사업이 종단의 이해에 상충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그 결과 오랫동안 종단 수장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종교 간 대화의 협력과 공동 노력이 실질적인 종교 간 대화의 결실로 이어지지 못하는 문제도 드러나고 있다.
한국 천주교의 입장에서 종교 간 대화 역시 기구적 차원에서의 활동에 국한되는 한계가 있다. 종교 간 대화를 관장하는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위원장 이용훈 주교)는 한국 개신교 교단들과의 그리스도인 일치운동과 타종교와의 종교간 대화를 하나의 위원회에서 맡아 추진하다 보니 종교 간 대화를 성숙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사업이 어렵고, 『한국종교인평화회의의』 소속 종단으로만 활동하는 제약이 있다. 그리고 각 교구별로 다양한 대외사업을 위한 위원회가 조직되어 있으나 ‘교회일치운동’과 ‘종교 간 대화’를 위한 위원회가 조성되어 있지 않은 교구가 대부분이다. 이런 이유로 천주교 사제들과 신자들이 교회일치운동의 당위성이나 종교 간 대화의 교회론적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도 없고, 사제들은 사제양성과정에서 이들 분야와 관련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사목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 보편 교회의 타종교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질 종교 간 대화는 위기인가, 아니면 기회인가? 최근 한국 사회의 화두는 경제적 양극화에 이어 이념의 양극화, 진영 논리에 입각한 사상논쟁과 대결구조가 깊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종교가 추구하는 ‘성스러움의 의미’나 구원의 보편적 체험인 ‘마음의 평화’와 ‘영생에 대한 갈망’에 대한 관심과 투신의 기회를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정반대로 종교를 개인의 취향에 따른 선택이나 문화의 일부로 여기는 시대의 흐름 때문에 종교와 관련된 주제로 나누는 대화가 단절될 수 있다. 한국 개신교가 지닌 배타적 선교의 자세나 최근 급속히 퍼져가는 유사종교의 폐단과 사이비, 이단의 성행은 정통 신앙의 가치와 정당성을 흔들며 맞춤형 종교심을 한국인들에게 제공하려 하고 종교 간 대화가 추구하고자 하는 해석학적 지평 융합의 취지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여기에 한국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경쟁적 능력주의, 배타적 이기심과 집단주의의 폐단, 이로 인한 피로사회의 현실이 종교 간 대화에서 찾는 종교심의 보편성과 개별성, 사이와 차이에서 발생하는 지평 확대와 융합의 기회를 사라지게 하는 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V. 맺는말: 한국 신학 발전을 위한 종교 간 대화의 제언들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가 ‘한국 신학(K-신학) 발전을 위한 종교 간 대화’라는 점은 심상태 몬시뇰이 추진해온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의 토착화를 위한 연구소의 관점을 잘 드러낸다고 본다. 신학은 신학함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맥락들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문화와의 대화 없이 시대의 언어로 올바르게 해석되고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양철학과 문명에 기반한 그리스도교의 이해가 한국이라는 언어와 사상의 맥락 안에서 받아들여지려면 한국인의 신앙 행위가 발생하는 맥락에 대한 이해와 성찰은 불가결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교 신학이 지닌 보편적 가치를 잃고 믿음을 서구적 편견에 빠진 교조적 수용 행위나 문화의 정체성을 잊은 이질적 자기소외로 왜곡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 신학’을 유행처럼 번지는 ‘K-신학’이란 이름으로 발전시키려는 연구소의 의지는 한국문화가 지닌 독특함과 보편적 가치를 신학적 사유와 접목시켜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취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폴 틸리히(Paul Tilich)가 강조한 관점, 곧 종교는 문화가 추구하는 본질이고, 문화는 이러한 종교심의 표현이라는 점과 진정한 종교란 “무한자로 향하는 지향성”라고 강조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문화가 한국인의 종교심의 표현이라면 그 종교심의 뿌리가 무엇인지 해명하고, 한국의 종교들에서 사이(間)의 보편성과 차이(間)의 다양성을 해명하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종교 간 대화는 종교들이 지닌 보편적 가치와 종교의 본질인 ‘성스러움의 의미’를 찾아내는 해석학적 작업이 필요하다. 이는 한국의 종교인이 지닌 신앙 감각(sensus fidei), 곧 개별 종교인이 신앙의 대상을 지각하는 감각의 지향 능력으로 무엇을 서로 공감(共感)하고 있는지 찾는 일이다. 필자는 이를 ‘한(恨)’의 심성에서 찾아 해명한 바 있다. 종교의 본질에 속됨과 성스러움에 대한 체험이 있듯이, 한국인의 한(恨)의 심성에는 비록 표현과 형태는 달라도 맺힌 한(恨)을 품은 인간 본성의 한계와 죄성(罪性)이 담겨 있고, 이를 초월하려는 내재적 본성이 한풀이의 문화로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한국 개신교가 한국 무(巫)의 치성(致誠) 정신이 깃든 새벽기도회나 한풀이와 죄의 씻김이 담긴 성령대부흥회를 통해 부흥한 예가 그러하다. 불자들이 추구하는 무아(無我)의 깨달음(空)은 현실의 모순과 고통의 근원이 집착에 있음을 알고 비움의 선(禪)수행을 통해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종교인의 신앙 감각에 속한다. 그리스도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자기 비움을 통하여 죄와 죽음을 없애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전하고,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섭리된 인간”(칼 라너)이라는 신앙고백도 파스카의 신비 속에서 맺힌 한(恨)을 부활 신앙으로 풀어내는 종교인의 신앙 감각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종교인의 신앙 감각은 개별 종교가 추구하는 도덕적 이상을 윤리적 실천으로 풀어내는 수행으로 구체화 되어야 한다. 종교인은 오늘날 야수자본주의와 물질환원주의의 유혹으로 종교를 이타적 종교심이 아닌 이기적이고 현세적 욕망의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도록 자신의 종교를 타종교와의 관계 안에서 깊이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점은 사적취향과 욕망의 세계에 몰입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종교인들만이 용기 있게 선택할 수 있는 지혜의 길이다. 종교만이 배금주의와 물질환원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 사람다운 존엄과 품위를 지켜가는 도덕적 이상을 지켜낼 수 있다. 용서와 화해, 관용과 희망의 언약들을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종교뿐이며, 그리스도교가 여타의 종교들 속에서 그 가치들을 가장 이상적으로 실천하려는 종교라는 확신도 필요하다. 따라서 종교 간 대화는 개념화된 자기 고유의 종교언어로 타종교를 함부로 폄하하는 배타적 혐오에서 벗어나야 한다. 종교 간 대화는 인격적 주체 간의 대화에서처럼, ‘솔직한 자기이해’, ‘성실한 타자이해’, 그리고 ‘보편적 진리와 도덕적 이상을 담고 있는 내용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종교 간 대화는 종교들이 지닌 차이의 풍요로움과 진리를 추구하는 역사적 도정에 있는 개별 종교들이 전승해온 종교적 수행의 가치를 상호 인정하고 존중하며 증진하도록 돕는 것이다. 종교들이 지닌 보편적 가치들이나 도덕적 이상은 종교적 인간 이해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동일할 수 있으나, 교리의 내용과 형태, 각 종교가 지닌 해석학적 모델은 상이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다름을 통해 펼쳐가는 새로운 종교적 지평을 넓히고 타종교 안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보편적 가치들이나 도덕적 이상을 긍정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종교들이 간직해온 자기 비움의 수행 전통은 능력주의와 과학주의의 병폐로 생긴 피로사회에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존재 방식의 삶의 비전을 제시해줄 수 있다. 존재 방식이란 소유가 아닌 타자와 공존을 찾는 방식이며, 자신의 사고에 집착하지 않고 열어 놓으면서 타인의 생각과 관심이 자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생생하게 대화에 참여할 수 있게 하여 새로운 생각과 가치가 발생하는 것을 불안해하지 않는 것이다. 종교 간 대화에서 중요한 점은 자신의 지식을 절대화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갇힌 “상식적 지각의 기만성을 깨닫는 일”에서 시작하여 사물을 “보다 깊이 아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타자를 이질성으로 거부하던 ‘면역학적 부정성’에서 남을 ‘나와 다른 똑같은 대상’으로 여기며 그들과의 만남의 긍정적 가치가 과잉되어 타자를 “위협이라기보다는 짐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병리적 현상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피로사회 속의 현대인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산만한 주의력을 갖고 사색적 삶(vita contemplativa)으로 초대하는 종교의 고유한 기능을 수용하지 못한다. 사색하는 삶은 이른바 성과와 능률사회 속에서 ‘중단의 부정성’, 곧 하지 않을 수 있는 힘과 돌이켜 생각하기를 가능하게 하여, ‘태평한 무위(無爲)의 능력’을 일깨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가 추구하는 인간 내면에 대한 탐구와 성찰, 그리고 이를 수행의 원리로 삼아 제시하는 명상의 가치가 재발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불교의 화두를 통해 깨달음의 길을 찾는 ‘간화선’ 수행, 원불교의 정신개벽을 추구하는 일원상(一圓相) 신앙에 토대를 둔 정신 수양, 유교에서 인(仁)을 이루기 위해 극기와 복례의 실천을 통해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여 군자에 이르는 수행의 길이 재조명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자기비움을 묵상과 관상을 통해 자신 안에 받아들여 하느님께 자신의 의지를 맡기고 이웃 사랑을 통하여 종말론적 희망을 선포하는 수행의 삶으로 초대한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바라보도록 이끌어주는 사회적 기능을 한다. 종교는 죄와 고통, 죽음이라는 유한한 인간의 본성 안에 내재된 무한, 영원, 진리에 대한 희망의 근거를 밝혀주는 삶의 지혜이자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식을 넘어서는 권위에 대한 절대적 신뢰 없이 살 수 없으며, 근거 없는 희망에 자신을 투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 간 대화는 이러한 종교인이 추구해야할 보편적 가치들, 곧 공존과 공감의 가치, 세상 속에서, 그러나 세상과는 다른 참된 행복의 가치들을 함께 발견하는 순례의 여정이다. 종교만이 인류의 연대성과 정의와 공감, 그리고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개인들의 삶의 존엄성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종교에 관한 무관심과 사회적, 경제적 양극화가 심각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가톨릭 교회 역시 인류의 지혜를 밝혀주는 하나의 종교로서 인간이 지닌 궁극적 관심, 곧 유한한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을 통해 영원성을 향한 갈망을 인류가 잃지 않도록 인도해주는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가 제도교회의 영속성과 세속의 권력과 힘의 논리에 지배되지 않고, 이웃종교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참된 구원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봉사적 실재임을 되새야할 것이다.